무빙(霧氷) / 안도현
허공의 물기가 한밤중 순식간에 나뭇가지에 맺혀 꽃을 피우는 현상이다
중심과 변두리가 떼어져 있다가 하나로 밀착되는 기이한 연애의 방식이다
엉겨 붙었다는 말은 저속해서 당신의 온도에 맞추려는 지극한 정신의 끝이라고 해두자
멋조롱박딱정벌레가 무릎이 시리다는 기별을 보내올 것 같다
상강(霜降) 전이라도 옥양목 홑이불을 시쳐 보낼 것이니 그리 알아라
― 시집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창비, 2020)
* 안도현 시인
1961년 경북 예천 출생. 원광대 국문과와 단국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 『모닥불』 『북항』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 등
어른을 위한 동화 『연어』 『연어 이야기』 『관계』,
동시집 『나무 잎사귀 뒤쪽 마을』 『냠냠』 『기러기는 차갑다』,
산문집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 『안도현의 발견』 『잡문』 『그런 일』 『백석 평전』 등
현재 단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11월, 어느덧 빙점(氷點)을 오르내리는 시간 속에 닿았습니다. 시간이라는 판관(判官)은 거짓이 없어서 구르는 나뭇잎처럼 우리네 삶은 그저 가볍디 가벼울 뿐이라는 사실 앞에 섰습니다. 잎 떨어진 나뭇가지에 ‘무빙’ 현상이라는 얼음꽃이 피었습니다. ‘연애의 방식’ 같고, ‘지극한 정신의 끝’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한 정신이 있어서 마침내 ‘얼음’이 될 수 있다면 그 빛은 차고 맑고 영원하겠죠. ‘지극히’ 차가워서 이루어진 아름다울 경(經)입니다.
자왈, ‘시(詩)로써 새나 짐승, 초목들의 이름도 많이 배우게 될 것’이라더니 여기서 ‘멋조롱박딱정벌레’를 알게 됩니다. 저 운치 있는 이름의 벌레께서 보내는 ‘무릎이 시리다는 기별’ 속에는 ‘옥양목 홑이불’도 들어 있습니다. 참으로 귀하고 어여쁜 첫서리의 풍경이겠는데 그것은 하늘이 ‘시쳐’ 보낸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설명 불가의, 공평하고 깨끗하고 수수하고 낮은 메시지. 첫서리가 내리면 들판의 일 년은 마무리되지요. 철없이 나대던 것들에게 그것은 ‘된서리’가 되는 무서운 것이기도 합니다.
- 장석남 시인ㆍ한양여대 교수
Wild Side / Roberto Cacciapagl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