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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으로 간 여인들 / 공녀
1) 공녀란 무엇인가?
공녀란 공물의 일종으로서 약소국이 강대국에게 조공의 하나로 여자를 바치는 것을 의미한다. 예전 고구려나 신라가 조공을 했다는 기록은 있지만 조공이 하나의 국가적인 연례행사로 자리잡은것은 고려시대인 1221년부터 조선전기까지 라고 할수 있겠다.
한국사회의 분위기는 보통 세종을 띄우는데 촛점이 맞혀져 있어서 조선 세종때에 들어서 조공이 중단되었다고 하지만 사실 그런 세종 역시도 즉위 초기에 많은 수의 공녀를 명나라에 보낸것이 사실이다.
2) 공녀는 언제 폐지되었는가?
공녀조공이라는 제도를 우리조상들이 본격적으로 따르게 된것. 그리고 그게 우리 역사의 기록에 남게된것은 원나라때부터이고 원나라를 이어서 중국대륙에 집권한 명나라때도 계속 이어진다. 정확히 중국이 우리에게 조공요구를 멈추게 된것은 임진왜란 이후이다.
알다시피 임진왜란은 조선, 명 , 그리고 일본 세나라 모두에게 굉장히 큰 사건이였는데 조선은 임진왜란으로 국토가 황폐해져서 공녀나 조공을 받칠 여력이 없었고 명나라 역시 임진왜란 이후 급격한 쇄퇴기를 맞게 되면서 명나라 초기와는 반대로 공녀를 요구할 정도의 뻔뻔함을 보일만큼 국력이 쎄지 못했다. 자국내의 문제들도 산적해 있었고. 마치 중국이 과거 20~30년전 가난할때 주변 아시아국들에게 유화책을 폇듯이 말이다. 하지만 임진왜란 이후에 중국대륙에 청나라라는 새로운 제국이들어서면서 이전만큼은 아니지만 공녀제도가 부활한다.
3) 고려시대 공녀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자
고려시대때 기록된 공녀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3세기말 고려사절요에 있다. 1274년 고려사 절요의 기록에 따르면 원나라에서는 원나라 군인들의 아내가 될 고려여인들을 요구하였고 이에 여인 140명을 뽑아 보냈는데.
여인들이 떠난후 길에는 울음소리가 가득했다고 한다, 참고로 같은해에는 제1차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이 있었다. 원나라는 젊은 고려의 남성들은 일본침공을 위해서 병사로 징집했고 여성들은 공녀로 보내졌던 것이다. 고려사에 기록된 원나라의 공녀요구는 총 80년간 50여회이지만, 공식기록 이외의 것을 합하면 수 천명의 고려여인들이 인간공물인 공녀가 되어 고향을 떠나 원나라로 끌려갔다.
고려에서는 결혼도감이라는 임시기구를 설치해서 원나라에 조공할 공녀의 숫자들을 채워넣었다고한다. 또 기황후와 같이 권문세족의 높은 지위를 가진 집의 규수들도 포함되었는데 고려후기 학자 이곡의 1335년 상소문에 따르면 공녀로 뽑히면 부모와 친족들이 곡을 하는데 밤낮으로 우는 소리가 끝나지 않는다고 했고 공녀로 뽑혀 떠나는 날이면 울부짖다가 비통하고 분하여 스스로 목을 매 죽는 사람도 있다고 할 정도였다고 고려사절요 25권은 기록하고 있다.
4) 조선시대 공녀에 대한 기록
태조 이성계때는 없었지만 태종 이방원때부터 생기는데 1408년 태종 8년 공녀를 선발했다고 역사서가 기록하고 있다. 당시의 기록에 따르면 공녀의 조건을 보면
1. 13~ 16세의 처녀
2. 미모를 갖춘 양갓집 규수였다고 한다.
1408년의 공녀 선발은 조선 백성들을 두달동안이나 공포에 떨게 한걸로 유명하다. 태종은 전국 각 도에 관찰사를 보내 총 30명을 선발하여 그들을 의정부로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의정부에서는 2차 심사를 실시하는데 부모상을 당한 자나 무남독녀는 제외되어 총 7명
만 선별되었다. 이 7명은 경복궁으로 보내져 명나라 사신에게 최종심사를 받았다. 후보가 된 여인들은 몸이 아픈척을 하거나 얼굴을 바늘로 긁거나 약을 발러 상하게 하는 방법으로 탈락하려고 했다.
다양한 방법을 시도해서 이 7명의 공녀후보들은 명에 가지 않으려 했고 결국 명나라의 사신은 이들을 모두 퇴짜놓게 된다. 하지만 결국 다시 처녀사냥은 시작됐다. 수령 품관 향리 양반등 모든 백성들의 집들을 수색하여 미모를 갖춘 처녀들을 색출하기 시작
했고 부모와 가족들은 딸을 숨기려하고 관리들은 처녀를 색출하려고 하니 쫓고 쫓기는 난리가 계속 되었고 딸을 어린나이에 시집보내거나 비구니로 만드는 부모들도 있었다.
딸을 숨기려 하거나 흉하게 보이려고 한 부모들은 전 재산을 몰수당했는데 그걸 빌미로 일부 조선의 관리들은 양민들의 재산을 뺏었다. 당시 태종에게 올라온 상소에 따르면 관리들이 부녀자들을 잡아가두고 매질을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크다는 내용도 있었다.
5) 공녀조공과 세종대왕
태종이방원때 백성들이 꾀를 부리거나 편법을 이용하여 공녀로 선발되는걸 피하려고 하는경우들이 많아지자 세종은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법률을 만든다. 그 첫번째 법이, 신고제라는 것이다. 신고제란 딸을 가진 모든 전현직 관리들이 자진 신고하는 제도인데 신고하지않으면 적발시 전 재산이 몰수 되었고 이를 신고한 자에게 주도록 했다. 때문에 이러한 법령은 사회를 공포분위기로 몰아 넣었고 서로를 불신하게 됐다. 이 가운데에는 평소 원한관계에 있던 사람들이 복수할 기회라고 여기고 딸이 없는 사람을 딸이 있다고 거짓 신고해서 재산을 뺏는 일도 있었다. 또 세종은 딸을 숨기는 가정이 있는 지역의 수령들 역시 연대 책임을 지게 했다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딸을 조혼시켜 공녀징집을 피하려는 백성들이 있었고 세종은 12세 미만 (공녀선발 연령 13세 이상)의 조혼을 전국적으로 금지시킨다.사실 세종대왕의 당시 통치키워드는 지극정성으로 중국을 사대 하자 였다.
그래서 중국황제가 죽었을때 사흘만 입어도 되는 상복을 27일간 입었다던가 명나라의 요구에 응해 말 3만마리를 조공으로 보냈고
명나라에 농업용으로 소 1만마리를 보냈다는 등의 일화는 유명하다.
후대의 역사학자들은 세종의 이런 명에 대한 사대는 훗날 훈민정음을 반포하기위한 고도의 외교술로서 오히려 세종을 높게 평가하는 경우도 있는 어이없는 실정이다. 또 세종은 수차례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서 명주 인삼 해동청(매)의 조공을 더 하는 조건으로 공녀조공을 면제해달라고 요구했고 명으로부터 이를 승인받는다.
6) 두명의 자매가 모두 공녀로 간 한씨자매 이야기
태종과 세종때 우의정과 영의정을 지낸 한확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의 누이동생들은 한양에서도 미모가 뛰어난것으로 유명했는데 태종때 첫째 누이를 명에 공녀로 보내면서 우의정으로 승진했고 세종때에는 둘째 누이를 명에 보내 영의정으로 승진을 하게된다.
한확이 간통을 저질렀을때에도 세종은 한확의 누이들이 희생한것을 알았기에 내가 죄를 줄수 없는사람이라면서 그의 죄를 면제해준다. 그의 첫째 누이는 중국어가 능통했고 미모와 지성이 뛰어나서 영락제의 이쁨을 받았지만 공녀로 온지 3년만에 영락제가 죽게되자 순장되고 만다 ( 중국의 황제가 죽으면 후궁들도 같이 죽는 풍습) , 그리하여 20살의 꽃다운 나이에 스스로 목을 메 자결을 하고 순장되는 비참한 운명이 된다.
하지만 1521년 조선 중종 16년에는 중국이 요구하는 숫자만큼의 공녀를 준비해 뒀지만 당시 중국의 항제 정덕제가 갑작스럽게 죽게되
면서 공녀들이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수 있었던 다행스러운 케이스들도 있었다.
7) 중국 사신들의 횡포
고려시대 만큼은 아니지만 중국의 사신들은 조선조정에게 황제에가 바치는 공녀라고 속여 사적으로 공녀들을 수십명씩 데려가기도 했다. 또 고려때는 결혼도감 이 있었다면 조선때는 진헌색이 있었는데 공녀를 구하러 오는 중국의 사신이 압록강을 건너면 조정에서는 전국에 결혼 금지령을 내렸다. 사람들은 공포에 떨면서 딸을 숨기거나 머리를 깍아 비구니로 만들기도 했고 10살도 안된 어린 아이를 결혼시키는 편법도 썼다고 한다.
8) 공녀징집에 얽힌 비극적 살인사건 이야기
조선시대 경상도의 정황이라는 자는 딸이 공녀로 뽑혀 한양으로 올라가자 그 길을 따라 나섰다. 가는 도중에 딸의 얼굴에 약을 발라서 얼굴을 상하게 했는데 이 일이 호송을 맡았던 관리에게 발각되자 이를 숨기기 위해서 당시 딸을 호송했던 최응벽이라는 자가 자기딸을 강간했다고 거짓증언을 하게 된다. 결국 최응벽은 사형당하고 최응벽의 아들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 다면서 정황을 칼로 살해하고 만다. 딸은 얼굴이 상하고 낯선남자에게 범해져 공녀 징집을 피할수 있었지만 아버지는 살해되고 호송임무를 맡은 관리는 죽게된 비극이다.
9) 이별의 자리
우여곡절 끝에 선발된 공녀들은 떠날 채비를 하고 왕과 왕비가 차린 전송식에 불려가 위로도 받았다. 이때 여인들은 차린 음식에는 입도 대지 않았고 죄다 슬퍼서 울기만 했다고 전해진다. 또 함께 자리를 한 처녀들의 부모들도 덩달아서 울었는데 그 통곡의 소리가 궁궐을 가득 메웠다고 한다.
이후 처녀들은 근정전에 비치된 가마에 올랐는데 가마에는 2명씩 들어가고 중국 사신은 공녀들이 호송중 도망가지 못하게 직접 자물쇠를 채웠다고 한다. 공녀들이 출발할때에는 왕과 왕비까지 모화관에 나와서 전송을 했다. 눈물의 환송식을 뒤로한채 공녀들은 한양- 개성-평양- 안주-의주-요동 -북경에 달하는 꼬박 2달이 걸려서 도착하는 긴 여정을 떠나게 된다.
이들은 임시로 지은 각 참의 숙소에서 잠을 잤는데 호송하는 도중 환관들에게 희롱당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겨울에는 만주벌판의 추위에 시달렸고 여름에는 더위로 병을 얻기 일수 였다고 한다.
10) 여자는 공녀로 남자는 내시가 되어 중국에 갔다
조공으로 받쳐진건 사실 그시절의 여자들만이 아니였다. 남자들도 환관으로 받쳐졌는데 조선 태종임금때의 기록에 따르면 명나라의 영락제가 안남(북베트남)을 정벌하고 고자들을 데려왔지만 멍청해서 못 쓰겠다며 조선에 300명의 환관들을 요구한다. 그러자 태종은 29명의 환관들을 명나라로 보내게 된다. 영락제는 조선의 고자들이 예의가 바르고 빠릿빠릿해서 매우 좋아 했다고 한다.
11) 조선의 공녀는 대한제국시대까지 이어졌다?
위안스카이는 한국에는 원세개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청나라 말기의 정치가이자 중화민국의 초대 황제였다. 중국의 청말기에서 중화민국까지의 시기는 우리의 구한말과 대한제국 시절과 그 시기가 겹친다. 위안스카이는 1882년 조선에와서 당시 중국인 본부인이 있었음에도 3명의 첩을 얻는다. 원래는 양반가인 안동김씨 규수를 얻었지만 그 규수를 보조하기 위해서 따라온 몸종 두명까지 모두 자신의 첩으로 취한다. 양반가 규수였던 김씨는 3명의 조선인 첩들 중 가장 나이가 적어서 자신의 몸종으로 왔던 이씨와 오씨 , 즉 두명의 다른 첩들을 손 윗사람으로 모셔야 했다. 양반출신인 자신이 몸종이였던 사람들을 손윗사람으로 모셔야 했으니 정말 미칠 노릇이 아니었겠는가?
12) 공녀조공의 흔적들
공녀의 역사는 생각보다 엄청 길다. 오랜시기 동안 이어졌고 그래서 우리민족의 역사에 그 흔적들을 남기게 된다. 대표적인게 조혼을 하는 풍습인데 요즘 사람들은 결혼 연령이 늦어져 저출산을 걱정해서 조선시대 조혼을 부러워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사실 조선시대 조혼은 공녀징집을 피하기 위해서 양반층이 먼저 시작하면서 당시의 대표적인 문화로 자리잡게 된다.
고려양같은 원나라에서 유행했던 최초의 한류들도 여성적인 문화에서 기인한것이 많았는데 고려출신 공녀나 후궁들이 유행시켰다는 설이 유력하다. 한국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심청전이라는 이야기도 부모에 대한 효도를 그 주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지만 현대 학자들에 따르면 황해도 출신의 조선 혹은 고려 여인이 공녀로 징집되서 중국으로 가게된 이야기가 시대적 배경이라고 해석한다.
중국으로 가게된 조선 혹은 고려의 후궁이 자신의 도덕적 우월성을 내세우기 위해서 아버지를 위해 희생한 효녀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가 입으로 전해지면서 후대에는 유교를 통치기반으로 하는 조선시대에 백성들에게 효도를 하라는 교훈을 주는 이야기로 탈바꿈 되었다는 것이다.
13) 중국에 대한 조공제도와 공녀는 포장할수 없는 비극
현대 한국인들중 상당수가 공녀나 중국에 대한 조공에 대한 반감이 없는게 개인적으로 놀라웁다. (반대로 일본의 위안부문제는 그렇게도 광분하면서?) 중국에 대한 조공을 마치 당시의 당연한 외교방향이라던가 아니면 공녀로 중국에 끌려간 어린 여성들이 황후나 권력자로 출세해서 잘 살았다고들 믿는 사람들도 많고 말이다.
하지만 공녀와 중국에 조공을 했던 역사는 우리역사중 가장 가슴아픈 역사였고.결코 정신승리로 포장한다고 없던일이 되는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잘살았던 공녀는 정말 소수 였고 대부분의 공녀들은 거리의 기생으로 팔려나가거나 사실상 중국인 밑에서 성노리개가 되었다는 사실을 절대로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03/28/0200000000AKR20170328111700797.HTML
[숨은 역사 2cm] '조공외교' 조선 미녀들 중국 궁궐서 몰살됐다
요약
중국몽이 완성되면 우리 한국은 다시 조선시대로 돌아가게 됨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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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커다란 깨우침글 감사드립니다^^
소비에트연방의 교훈.중국의 분열은 20년 안에 됩니다.
비러처먹을 짱꼴라 새키들 전부 추방해야됨
몰랐던
역사공부 되었네요
한나라의 대통령이란 자가 대학생들 앞에서 무슨 아양방구를 저렇게도 떨수 있는가 참 이해가 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