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
박완서 선생님은 '작가는 빛이 드는 곳보다 그늘 진 곳에 서 있어야 한다'고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22일 별세한 소설가 박완서씨(80)와 친분이 있는 김영현(56) 실천문학사 대표는 "박 선생님은 '작가는 명예로운 자리가 아니며 어려운 사람들 곁에 서고자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며 울먹였다.
고인과 김 대표는 1984년 소설집 '지 알고 내 알고 하늘이 알건만'에 함께 작품이 실린 후 처음 만나 인연을 맺었다. 박씨는 이 소설집의 표제작을 썼고 김 대표는 이 책에 단편소설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이후 두 사람은 사제지간처럼 각별하게 지냈다. 문학계에서는 김 대표가 고인의 아들 노릇을 한다는 이야기까지 나돌 정도였다.
김 대표는 "문학계의 큰별이 졌다"며 "
박경리 선생님과 함께 여성 작가의 양대 산맥을 이뤘는데 얼마 전 박경리 선생님에 이어 박완서 선생님도 떠나 보내 착잡하다"고 밝혔다.
평소 김 대표와 박씨는 방방곡곡으로 여행을 두루 다녔다. "여행을 다닐 때면 비싼 곳에 묵으려고 하기 보다 부러 소박한 모텔에서 주무시곤 했다"며 "유명 작가답지 않게 명성에 얽매이지 않고 소박했다"고 회상했다.
작품 세계에 대해서는 "박완서 선생님은 작품성뿐만 아니라 대중성까지 확보한 몇 안 되는 분"이라며 "625 동란의 혹독한 아픔을 작품으로 끌어들여 따뜻하게 승화시킨 감각이 탁월하다"고 경탄했다. "얼마 전 뵐 때까지만 해도 건강해 보였는데 갑자기 돌아가시게 돼 정말 안타깝다."
김영하(43),
은희경(52), 이외수(65)씨 등 문인들도 자신의 트위터 등을 통해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지난해 등단 40주년을 맞이한 고인은 22일 오전 5시20분께 경기 구리 아차동 자택에서 지병인 담낭암으로 별세했다. 1953년 결혼 후 1970년 마흔이 되던 해에 장편소설 '나목'이 월간 '
여성동아' 현상공모에 당선돼 문단에 들어왔다.
이후 6·25 동란과 분단문제, 물질중심주의 풍조, 여성 억압 등을 다루며 주목 받았다. 특히, 유려한 문체와 일상에 대한 중년여성 특유의 섬세하고 현실적인 감각을 살려냈다는 평을 받는다.
故 박완서 "문인들에게 부의금 받지 마라" 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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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 강승훈 | 입력 2011.01.22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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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강승훈 기자] 故 박완서의 빈소 입구에 적힌 안내문이 뭉클한 감동을 전해주고 있다.
22일 오전 6시 17분 경기도 구리시 아차동 자택에서 향년 80세로 별세한 故 박완서의 빈소는 현재
서울 삼성병원 장례식장 16호실에서 마련되어 있다.
빈소 앞에는 '부의금을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라는 안내문이 걸려있다.
이에 대해 박완서 측은 "생전에 박완서 선생은 자신이 죽으면 찾아오는 문인들에게 잘 대접해주라고 신신 당부했다. 또한, 가난한 문인들이 많으니 절대로 부의금을 받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말했다.
故 박완서는 평소에도 후배 문인들을 챙기는 마음이 살뜰했다. 이 때문에 은희경 이외수 하성란 김영하 등은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서 애도를 표했다.
특히, 김창완은 故 박완서의 빈소에 놓인 방명록에 김창완이라는 이름을 적고, 그 밑에 '선생님, 선생님, 선생님, 선생님, 선생님, 선생님'이라며 그리움을 표했다.
한편, 박완서의 장지는 용인 천주교 묘지에 안장되며, 발인은 25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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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오래 좋은 작품 쓰시며 우리들 곁에 계실 줄 알았던
박완서 선생님께서 영원히 떠나셨습니다. 담낭암을 앓으셨답니다.
그 많은 작품을 쓰시느라 힘들었을 선생님을 생각하니
그 열정을 따라가야지하는 생각이 절로절로 깊이깊이 듭니다.
그늘진 곳을 따뜻하게 조명해주시던 선생님의 글힘으로 많은 사람들이
위안을 받았겠지요.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천국에 가셔서도 즐거운 소설 많이 지으십시오.
첫댓글 좋은 곳으로 가셔서 글을 쓰시고 계실겁니다.
나는 박완서씨와 한비야씨의 책은 나오는 족족 대체로 챙겨 읽는다. 처음 만난 박완서씨의 책은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였다. 통렬하고 매혹적인 글이었다. 인생의 쓴맛 단맛 다 본 뒤에 우러나온 그의 수필들은 완성된 인격의 반영이었기에 더욱 좋았다. 활짝 웃는 모습 소박하기 그지없던 그 분의 명복을 빕니다.
글쓰던 짐 벗고 편안하게 쉬시길 빕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항상 그 자리에 계실 줄 알았는데.....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딱 한 번 대학교 때 초청강연회를 들은 적이 있었다. 수줍고 어눌한 말씨에 흐르는 숨어있는 진실성. 드러나지 않아도 내면을 꽉 채우고 있는 그 무엇? 그 무엇이 그토록 멋진 글을 쓰는 힘이구나 생각했다. 한 번 더 뵙고 싶었는데 작품을 통해 더 깊이 느끼고 그 느낌 창작의 열정으로 끌어올려야겠다. 행복하세요.
선생님, 좋은 나라에 이르시어 편히 쉬세요.
선생님은 항상 그 자리에서 묵묵히 글을 쓰실 줄 알았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선생님의 글은 영원할 것입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오래 전, 시골뜨기가 혜화동에 가던 길이었습니다. 지하철에서 내려 계단을 오르고 있는데 반대편에서 내려오는 사람들 중에 유독 제 눈에 들어오는 분이 있었습니다. 머리를 곱게 빗고 화장기 하나 없는 수수한 어른은 엷게 웃고 계셨지요. 아무런 겉치레 없이 빛나는 분이 가까이 왔을 때 박완서 선생님인걸 알았습니다. 글을 쓰는 일이 고통이라지만 그 고통 속에 있는 분이 참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내면에서 끓어오르고 차오르는 기쁨이 없으면 그렇게 편안하게 미소 지을 수 없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선생님.. 부모님이 계시고 남편이 계시고 그토록 사랑하신 아드님이 계신 그곳에서 편히 쉬십시오.
글을 쓰기 위해 서재에 들어갈 때의 그 모진 마음을 " 아이가 옷고름을 부여잡고 보챌 때 가위로 옷고름을 자르는 심정"이라고 표현했었답니다. 글 쓰는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는 말씀입니다.
눈물이 앞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