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시 100년 오독의 원인
(이상과 한국 현대시를 연구하는 학자 평론가들께)
김유섭
한국 현대문학사에 이상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천재이고 이상의 작품들 역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작품들이다. 특히나 오감도는 그 절정이라고 생각한다. 놀랍게도 1934년 조선중앙일보에 발표한 오감도 연작시 15편을 90년이 다 된 지금까지 그 누구도 해석하지 못했다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사건이다.
이상을 전공한 학자인 어떤 교수님께서 필자의 “이상 오감도 해석”을 읽고 “천재는 천재만이 알아본다.”라고 하셨다. 그러나 이상은 천재이지만, 필자는 천재가 아니다. 이미 고백했듯이 허접하고 어리석은 사람이다. 그런데 허접하고 어리석은 필자가 어떻게 천재 이상의 오감도를 해석했는지와 90년 오독과 그 원인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이는 김소월 한용운 백석 김수영의 대표작 100년 오독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나는 근원적인 원인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가장 중요한 것 하나만 이야기하려고 한다. 시는 시인과 독자와의 대화다. 인간 시인이 인간 독자에게 뜨거운 생각과 감정을 압축된 보석으로 만들어 말하는 것이 시라고 생각한다.
한국 사람이 한글로 쓴 시는 모국으로 쓴 시다. 그래서 한국 현대시는 시인이 모국어로 자신의 압축된 뜨거운 생각과 감정을 독자에게 말하는 것이다.
모국어는 습득되고 외국어는 학습된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학자들은 모국어와 외국어의 차이를 모국어는 즉각적으로 흡수되고 소통되지만, 외국어는 문법과 단어의 뜻과 문장 등을 해석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국어로 쓴 시 역시 즉각적으로 흡수되고 소통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즉각적으로 흡수되는 우리말 모국어로 쓴 시라고 하더라도, 시인과 시는 유별나서 여기저기 압축된 뜨거운 말의 보석을 만들어놓았기에 쉽게 소통되지 않을 때도 있다. 따라서 독자 역시 생각과 감정을 사용해서 시인의 압축된 뜨거운 생각과 감정에 다가가야만, 시인이 만들어놓은 보석을 발견하고 소통할 수 있다. 이를 모국어 시 읽기의 특징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어렵거나 힘든 일이 아니다. 시와 독자 사이를 이어주는 생각과 감정, 뇌 구조와 뇌 작동방식을 들여다보는 즐거운 교류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필자가 “이상 오감도 해석”과 “한국 현대시 해석”을 할 수 있었던 이유다.
봄가을 없이 밤마다 돋는 달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김소월,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부분
즉각적으로 흡수된다.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가 걸림돌이면서 김소월이 천재임을 알려주는 보석이다. 독자를 시인의 감정 속으로 훅, 끌어당긴다. 예전엔 미처 몰랐는데 무슨 일이 있어서 자각하게 되었다는 것일까? 가슴 뛰게 한다.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김소월, 진달래꽃, 부분
역시 독자를 시인의 생각과 감정 속으로 훅, 끌어당긴다. 그리고 소통을 위한 여러 개의 왜? 라는 반짝이는 의문이 생긴다. 여기서 문예사조, 미학, 문학 이론과 전통적 한, 리듬 등을 따지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지 알아야 한다. 마치 외국어 시를 해석하려는 것과 다르지 않은 오독의 출발점일 뿐이다.
왜 역겨워? 왜 말없이? 왜 고이? 왜 드리우리다 존칭을 쓰나? 즉각적으로 다가오는 의문의 답을 시 안에서 발견하고 시인과 소통하고 교류하면서 매혹으로 번뜩이는 우리말 어법의 천재가 주는 즐거움에 빠져들게 한다.
13인(十三人)의예해(兒孩)가도로(道路)로질주(疾走)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適當)하오.)
-이상, 오감도시제1호, 부분
천재로 번뜩이는 완벽한 언어 구조물이다. 한 치 빈틈이 없다. 건축기사인 이상의 결백에 가까운 언어 구조물 시다. 우리말은 이런 완벽한 구조물 시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천재 이상이 보여준다. 동시에 한글이 현재와 미래를 위한 최신의 혁신적인 글자임을 알려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상의 뜨거운 생각과 감정이 “하오”를 타고 쩌렁쩌렁 들려온다. 읽는 즉시 흡수되면서 의문이 생긴다. 왜 13인?, 왜 예해?, 왜 도로?, 왜 질주한다는 것일까? 도로와 길을 대비시키는 이유가 뭘까? 의문과 답을 번뜩이는 시 안에서 발견하는 강렬한 즐거움을 준다. 여기에 문예사조, 미학, 문학 이론과 온갖 잡동사니를 버무려 해석하려는 것은 조작이고 수작일 뿐이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내린다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부분
백석의 독자를 끌어당기는 어법이 돋보인다. 왜 나는 가난한가? 나는 누구지? 나타샤는 왜 아름답지? 왜 논리 모순의 문장을 첫 연에 배치한 것일까? 왜 눈이 푹푹 내린다고 할까? 흥미로운 의문과 긴장을 던져준다. “연애시”라는 어설픈 속단으로 읽거나, 문예사조나 미학, 문학 이론과 현실 연애를 뒤섞는 짓은 오독을 창조하는 허망한 작업이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야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참어 떨치고 갔습니다.
-한용운, 님의 침묵, 부분
승려이자 선비의 단아한 어법이다. “단풍나무 숲을 향하야 난 적은 길을”이라는 진술에서 “길”이 사람이 죽으면 상여에 실어 산에 묻으러 가는 상여 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중의적인 의미도 있다.
승려이자 선비인 한용운이 부르는 “님”은 누구일까? 또한 즉각 흡수되어 가슴을 관통하는 거부할 수 없는 감정으로 그 죽음을 슬퍼하는 까닭이 무엇일까? 이런 의문에 대한 답을 시 안에서 찾는 즐거움이 있다.
여기에 문예사조, 종교, 미학, 문학 이론 등을 버무리면 어리석은 허구의 오독이 된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
-김수영, 풀, 부분
김수영은 명쾌하게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라며 풀과 바람이 자연 현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 준다.
그런데 여기에 문예사조, 문학 이론, 미학 등 잡동사니를 버무리면 망상에 빠지게 된다. 즉 영원히 헤어나오지 못할 오독의 수렁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시인이 던지는 의문에 답을 찾기 위해 시인의 생각과 감정에 다가가서 바람과 풀이 자연 현상이 아니라는 생각에 도달해야 바람의 의미가 사전적 뜻 중에 하나인 사회적인 유행이나 현상임을 읽어낼 수가 있다. 동시에 풀의 의미 역시 알 수 있게 된다.
불행하게도 이상과 한국 현대시를 연구하는 학자 평론가들은 예외 없이 모국어 시를 시인의 생각과 감정에 다가가서 교류하고 소통하려고 하지 않고 마치 외국어 시를 해석하듯, 문예사조, 문학 이론, 미학, 시인의 생애, 사생활 등 온갖 잡동사니를 버무려서 오독과 모독의 탑을 해석이라고 100년이나 쌓아왔다. 이것이 한국 현대시 100년 오독의 원인이다.
또 하나 이토록 처참한 오독에 근원적인 이유가 있다. 우리말을 한글 전용으로 쓴 것은 1896년 발행된 독립신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띄어쓰기도 헐버트와 주시경에 의해서였다. 시 역시 율격을 벗어나 자유시, 산문시 형식으로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1931년 만주사변을 지나면서 더욱 강화된 제국주의 일본의 폭압적 조선어 사용금지와 교육금지 그리고 일본어 사용, 일본어 교육은 우리말 읽기 쓰기 말하기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우리 민족은 조선어 사용금지와 교육금지, 그리고 일본어 사용과 일본어 교육 때문에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인 일본어를 머릿속에서 우리말로 해석해서 읽고 쓰고 말해야 했다.
이는 즉각적으로 흡수되고 소통되는 모국어 기능을 방해하는 해석의 과정을 거친 다음 읽고 쓰고 말해야 하는 세월이 1945년 해방될 때까지 이어졌다는 이야기다.
이런 이유로 즉각적으로 흡수되고 소통되어야 할 우리말이 모국어의 기능을 크게 상실하게 되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특히 시에 있어서 어느 시점부터 상당한 부분에서 즉각적으로 흡수되고 소통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이런 방식의 언어 사용을 배우고 가르치던 교사, 교수들이 해방 이후에도 그대로 교육 현장에서 가르치고 배웠다. 지금도 우리 민족은 우리말 모국어를 즉각적으로 흡수하고 소통하고 있을까?
여기에 더해 문예사조와 외국의 문학 이론과 미학 등을 국내 학자는 물론이고 외국에 유학하고 돌아온 학자들이 유행시키고 굴림하고 지배한 탓에 영원한 오독의 수렁으로 빠져버린 것이다.
이것이 한국 현대시 100년 오독의 근원적인 이유라고 필자는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