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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말
며칠 동안 위 제목의 주제로 살펴보고 있었는데, 마침 류병수 님께서 유사한 주제의 글을 작성하셨다. 중복되는 내용도 있겠지만, 이 글에서 필자도 살펴보았다는 표시를 하고자 한다. 금방 작성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문헌의 원본들을 그대로 살펴봐야 하는 일이 포함되어서 시간에 제법 걸렸다. 위서(僞書) 차원부설원기가 대동운부군옥에 편입된 과정을 고찰해 보고, 류차동원설의 위작의 시초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는 내용이다.
시작하기 전에 한 마디를 하면, 자료를 살펴보다가 전북대학교의 전라문화연구소에서 2017년에 작성한 이방간(회안대군, 호 망우당)의 행장 관련 연구인 “망우당행장 국역 연구용역사업 최종 결과물”이라는 자료를 마주치게 되었는데, 그 안에 한만유(韓晩裕, 1746~1812)가 지은 “회안대군공 신도비 기(記)”가 소개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글 안에는 설원기에서 조작된 이방간의 일화가 수용되어 있었다. 그것이야 19세기 초쯤에 지은 것이라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연구 자료에서는 차원부에 대해 주석을 달면서 그 행적을 그대로 사실로 제시하고 있었다. 차원부의 행적과 차원부설원기가 위작임이 연구자들에 의해 밝혀지기 시작한지 무려 20여년이 흐르고 있는 이 시점이다. 이방간에 대한 연구라면 고려말과 조선초의 상황과 더불어 왕자의 난에 대해 상세히 알고 있는 사람들일 터인데, 그대로 검토하고 판단해 봐도 알 수 있는 그 황당한 날조를 어찌 간파하지도 못하고, 다른 연구도 참조하지 않았는지 한탄이 절로 나왔다. 여기서 특정한 연구자들에게 뭐라고 하려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위서(僞書) “차원부설원기”가 수백 년 전에 날조한 역사적 거짓이 여전히 우리 사회와 학계에 횡행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에 언급해 본 것이다. 언제나 이 거짓의 어둠이 걷히려는지.
2. 대동운부군옥과 신편대동운옥
“대동운부군옥”은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으로서, 권문해(權文海, 1534~1591)의 역작이다. 1587년에 편찬되고 1589년에 정서를 마쳐 완성된 이 책은 목판본으로 간행되는 데 무려 250여년이 걸렸다. 처음에는 권문해 자신이 간행할 시기가 아니라고 여겨 출판을 하지 않았다고 추정되고, 편찬 후부터 내용, 특히 등재된 인물들의 묘사에 대한 시비가 많았기 때문에 그랬다고 한다[“조선의 백과지식”, 한국학중앙연구원, 2009년, p.87] “고려사”의 편찬 과정에서도 이와 유사한 일이 일어났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여기에 후손들이 미약하여 간행할 힘이 없었음도 지적되고 있다. 그러나 1836년에 목판본으로 간행되기 전에도 필사본으로 유통되어 영향을 미쳤다.
목판본 이전의 필사본은 몇 종류가 남아 있다고 하는데, 제목이 모두 “신편대동운옥”으로 되어 있다. (목판본에서는 “대동운부군옥”으로 되어 있다.) 그 중 가장 오래된 것의 작성 시기가 ‘최소한 임진왜란 이전으로 파악’되며 그것이 권문해의 ‘초고본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위의 책, p.39], 이하에서는 이 필사본을 ‘신편 1’, 목판본을 ‘군옥’이라 지칭하였다. 그리고 필사본 중에 김응조(金應祖, 1587~1667)의 발문이 붙어 있는 것이 있는데, 그는 권문해의 아들인 권별(權鼈, 1589~1671)과 비슷한 시기에 살았다. 김응조는 1655년에 군옥의 간행을 도모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로 미루어 보며 이 필사본은 그 무렵까지는 완성되어 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아래에서 ‘신편 2’라고 지칭하였다. (참고로, 김응조의 발문은 목판본에도 포함되어 있다.)
3. 군옥과 신편의 비교
신편 1과 군옥을 비교해 보면 변경이 적지 않음이 확인된다. 여기서, 이하의 기술(記述)은 전체적인 내용을 대상으로 한 것은 아니고, 설원기에 관련된 내용에 대해서만 국한하였음을 지적해 놓는다.
군옥에는 차원부설원기 관련으로 수십 건의 항목이 들어 있는데, 이 정도면 설원기가 중시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를 보면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군옥(목판본)에는 참고문헌 목록 가운데 ‘설원기’가 포함되어 있다. 반면에 신편 1의 참고문헌 목록에는 ‘설원기’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군옥에서 설원기와 관련이 있는 항목들은 출처가 “설원기”로 밝혀져 있는 것들도 있지만, “잡록(雜錄)”이라고 되어 있는 것들도 약 20건이 들어 있다. 군옥에는 이름에 ‘잡록’이 들어간 참고문헌이 두 개가 들어 있는데, 하나는 말 그대로 “잡록(雜錄)”이라는 제목의 것이며, 다른 하나는 “서경잡록(西京雜錄)”이라는 제목의 것이다. 둘 다 저자가 밝혀져 있지 않아 어떤 문헌인지 금방 특정하기 어렵다. 반면에 신편 1에는 설원기가 본문에 직접 언급된 경우는 필자가 확인한 것으로는 다음의 이미지에 보인 ‘문화류씨’ 항목 하나뿐이며, 나머지는 본문에는 들어 있지 않고 여백에 추가로 적혀 있다.
그런데 이 문화류씨 항목도 자세히 살펴보면 종이를 덧대어 수정한 것이다. 그리고 필자가 여백에 들어 있는 것으로 확인한 항목들은 ‘車原頫’, ‘雪冤記’, ‘左脇金鱗’, ‘好食沈菁’, ‘三黃忌菁’, ‘信誣’, ‘殄滅其嫡’, ‘車松祐’, ‘色不近’, ‘神人採蓴’, ‘玉舃’ 등이다. 다음은 ‘左脇金鱗’의 예이다.
이것을 보면 설원기 관련은 신편 1에서는 애초에 다뤄지지 않았고 신편 1이 완성(정서)된 후에 그 위에 덧대거나 여백에 추가하여 더해진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신편 2는 17세기 중엽까지는 완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전체 20권 가운데 절반쯤인 아홉 권만 남아 있다. 그것을 살펴보면 신편 1에는 본문에 들어 있지 않았던 항목들이 본문에 들어가 있는 것이 확인된다. 신편 2의 여백에도, 비록 숫자는 적고 대개 권1에 집중되어 있지만, 추가가 주어져 있는데, 대개 신편 1을 정서하다가 누락된 것을 기록해 놓은 것으로 확인된다. 그리고 신편 1에도 여백에 있고 신편 2에도 여백에 있는 항목(‘置烽’)도 발견되었다. (참고로 신편과 군옥의 차이점에 대한 논의는 “조선의 백과지식”에 주어져 있다.)
4. 해동잡록
군옥에서 다뤄진, ‘잡록’이 이름에 들어간 두 문헌 중 “서경잡록”은 왕수긍(王受兢) 관련 두 개의 항목(‘神人採蓴’, ‘玉舃’; 왕수긍은 이들 두 항목에서만 나옴)에서만 출처로 주어져 있다. 반면에 “잡록”은 40여 개의 항목의 출처로 제시되어 있고, 그 중 절반 정도가 설원기 관련이다.
한 가지 추정해 볼 수 있는 것은 이 “잡록”이 권문해의 아들인 권별(權鼈, 1589~1671)이 편찬한 “해동잡록(海東雜錄)”일 가능성이다. 해동잡록은 역사편과 인물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대동운부군옥(당시는 제목이 신편대동운옥)을 바탕으로 수정 보완한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인물편은 군옥의 인물조 가운데 벼슬을 지낸 사람과 효자를 선별하여 수록하면서 그들의 학문과 일화들을 중심으로 보완, 정리한 것이다. 해동잡록은 그 성격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오랜 기간에 걸쳐 작성된 것인데, 그 문헌에서는 예를 들어 김휴(金烋, 1597~1638)의 “해동문헌총록”을 인용하고 있다. 후자 역시 20여 년의 장기간의 자료 수집을 바탕으로 지어졌으며 김휴가 병으로 갑자기 사망하면서 초고본만 남겼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보면 해동잡록은 최소한 1638년 이후의 시기에 완성되었음은 확실해 보인다.
“해동잡록” 권6에는 ‘차원부’가 실려 있는데, 다섯 페이지에 걸칠 정도로 상세하다. 이 글의 말미에 부록으로 해동잡록과 군옥을 비교해 놓았는데, 그것을 보면 해동잡록의 차원부의 내용이 거의 대부분 군옥으로 들어간 것을 알 수 있다. 두 문헌 모두 해당 항목들의 출처를 ‘본록’, ‘잡록’, ‘본기’, ‘본집’ 등으로 다소 모호하게 제시하는 경우가 많은데, 결국 원래 출처는 모두 설원기이다. 왕수긍 관련 2개 항목도 모두 그대로 “해동잡록” 권1과 권2에 실려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가 또 있다. 위에 신편 1의 여백에 있는 것으로 열거된 항목들은 인명(차원부와 차송우)을 제외하고는 모두 출처가 주어져 있다. (인명 항목에 출처가 없는 것은 군옥의 기본 편찬 방식 중 하나이다.) 그런데 그중 일부는 원래 출처 위에 새로운 출처를 덧쓴 것이 확인된다. (위의 이미지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그것들을 자세히 살펴보니 그것들은 한결같이 원래 설원기가 출처로 제시되어 있던 것으로 판명되었고, 새로운 출처로 제시된 것은 모두 ‘잡록’ 또는 ‘서경잡록’이다.
‘雪冤記’-本記, ‘左脇金鱗’-雜錄←雪冤記應製詩註, ‘好食沈菁’-雜錄←雪冤記註, ‘三黃忌菁’-雜錄←[~記](本記로 보임), ‘信誣’-雪冤記註, ‘殄滅其嫡’-雪冤記註, ‘色不近’-雜錄←雪冤記註, ‘神人採蓴’-西京雜錄←雪冤記註, ‘玉舃’-西京雜錄←雪冤記註
서경잡록과 왕수긍
이와 같이 군옥에서 출처로 나오는 ‘잡록’은 대개 “해동잡록”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는 반면, ‘西京雜錄’(서경잡록)이라고 밝혀져 있는 출처는 미스터리이다. 이 ‘문헌’은 군옥의 참고문헌 목록에도 들어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수긍 관련으로 단 두 번만 출처로 사용되고 있다.
참고로, 군옥의 왕수긍 항목 두 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玉舃(옥석) - 기자(箕子) 때 신인(神人) 왕수긍이 옥으로 만든 신을 남겨두고 하늘에 올라가 신선이 되었음.
神人採蓴(신인채순) - 동방(東方)의 설원(說苑)에 신인 왕수긍 ....(중략).... 룡연(龍淵)에서 발을 씻고 그곳에서 나온 신녀(神女)의 꾸지람을 받음. 후에 상제(上帝)가 왕수긍이 선대의 성제(聖帝)의 후예라는 사실을 알고 그 여자(해석에 따라서 ‘상제의 딸’)를 아내로 삼게 하였다. 사시사철 봄인 궁궐에 살았음. 정지상의 “보음록(報陰錄)”에서는 ‘고려 태조 왕건은 왕수긍의 13대손인 왕몽의 셋째 아들 왕식시(王式時)의 후손이다.’라 하였음.
왕수긍은 지나(支那)의 왕씨를 동원한 다음 왕씨가 우리나라로 와서 후에 변성을 해서 차씨가 되었다는 계보를 조작하기 위해 만들어진 인물로 파악된다. 그것이 등장한 출처를 추적해 보면 문화류씨의 “원파록”(지금은 그 내용을 사실로 믿을 수 없어 폐기됨)이란 것으로 귀결된다. 원파록도 무엇인가 자료와 문헌들을 보고 만든 것이지만, 왕수긍이 들어 있는 원래 자료는 전해지지 않는다. 정약용 선생도 왕수긍은 “위서(僞書)에서 나온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다[“여유당전서”].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도 神人採蓴의 뒷부분과 같은 내용을 제시하면서 (참고: 출처는 밝혀져 있지 않음; 報陰錄을 陰報錄이라 잘못 씀) ‘尤爲不經’(더욱 허망하고 간사하다)라는 강한 말로 부정 평가하고 있다. 내용면으로 봐서도, 위 이야기에 등장한 상제(上帝)는 (‘상고(上古)의 제왕’일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문맥상 그렇게 일반적인 지칭은 아니므로) 다름 아닌 하느님인데 왕수긍이 ‘선대의 성제(聖帝)의 후예’라는 사실을 알고 특별대우를 해주었다는 다소 황당한 표현이 등장하고 신화적인 색체가 강해 사료로 받아들일 만한 성격이 아니다.
지금 전해져 있는 “원파록”에 주어져 있는 계보(믿을 수 없어 문중 차원에서 폐기된 것임을 다시 지적함)에는 단군 때 인물이라는 왕조명(王祖明; 신갑(辛甲)이 지나에서 도망쳐 와서 왕조명이 되었다고 함)이 나오고, 그 후손에 왕수긍이 나오며, 왕수긍 후손에 왕몽(王蒙)이 있고, 왕몽의 셋째 아들이 왕식(王式; 왕건이 왕식의 후손이라 함), 7째 아들이 왕림(王琳)이라고 나온다. 왕몽과 왕림이 변성하여 각각 차무일(車無一)과 차신을(車神乙)이 되었다고 그 후손이 대대로 신라에서 높은 벼슬을 지냈다고 하며, 그 중 한 명은 심지어 왕 비슷한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왕씨와 차씨와 류씨 등을 같은 계통으로 엮어 꾸며내는 이야기일 따름이다. 예를 들어 왕몽의 경우 기원전 210년이라는 시점에 ‘一土草家者王’(一土草家가 왕이 됨)이라는 동요가 있었다고 한다. 一土는 王, 草家는 蒙(艹=草)의 파자인데, 우리나라에 한자가 제법 알려진 것이 삼국시대가 시작되고도 수백 년 후이고, 그것도 소수만 알고 있었는데, 그때 아이들이 한자 파자로 노래를 불렀다니 심각한 시대착오이다. 여기에 차씨가 고려 이전에는 역사에 나오지 않는 것만 봐도 일고의 가치도 없는 조작이다. 요즘의 판타지 퓨전 드라마라고 하면 적절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더구나 이 이 왕몽 곧 차무일은 기원전 210년에 일곱째 아들과 도망했다고 하고, 기원전 57년에는 '신라 태조'에 의해 좌상(左相)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면 최소 200년 가까이 살았다는 말이 되는데, 무슨 전설 시대도 아니고 불가능한 이야기이다. 더구나 신라 때 ‘좌상’이란 직책도 심히 시대착오적이다. 또 하나, 신라 태조는 혁거세와는 다른 개념인데, '기원전 57년'은 혁거세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원파록은 이 둘을 혼동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명백히 후대에 적절히 꾸며 만든 기록들이기 때문이다.
군옥의 ‘왕식시’는 원파록에는 ‘왕식’으로 나오며, ‘왕몽’은 군옥과 원파록이 동일하지만, 군옥의 다음 부분에서는 또 다르게 나온다.
군옥의 문화류씨 항목: [姓氏] (文化) 高麗大丞柳車達之後按雪冤記車氏譜圖赫居世時有車蒙一後變車爲柳蒙一卽車達之先然年代世系不可考
(문화류씨는) 고려 대승 류차달의 후손이다. 설원기에 들어 있는 차씨보도(譜圖)를 보면 혁거세 때 차몽일이 있었다. 후에 차씨에서 류씨로 바뀌었다. 차몽일은 류차달의 선조인데, 년대나 세계(世系)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참고: 後變車爲柳蒙一卽車達之先 부분은 잘못해서 “후에 車를 바꾸어 류몽일이 되었으니 곧 차달의 선조인데....”로 오역될 수 있는데, 아니다.)
신편 1에서부터 이것이 종이로 덧붙여서 쓰여 있어서 그 전에 원래 어떤 표현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필시 이미 고려시대에 금석문으로 정형화되고 우리나라 최초 족보인 영락보에도 묘사되었음이 확실한 시조 류차달의 행적인 ‘고려 태조가 남정(南征)할 때 공을 세운 것’이 들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행적은 신편 1에서부터 이미 ‘柳車達’과 ‘助出車乘’의 두 항목에 들어가 있었다. 그런데 위의 군옥의 항목은 또 다른 문제점이 있다. 곧, 원파록에 등장하는 신라 태조 때의 인물은 원래 왕몽(王蒙)이었다가 성명을 바꾸었다는 차무일(車無一)이다. 군옥에는 왕몽과 차무일이 섞여서 차몽일(車蒙一)로 바뀐 것인지, 위 항목 저자(여기서는 권별일 가능성이 높음)가 본 설원기에 ‘차몽일’이 나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하여간 현재의 설원기의 기록에는 계보의 최고가 차제능(車濟能: 원파록에는 신라 미추왕(재위 261~284) 때 활약한 인물로 조작)으로 여기 언급된 설원기에는 최소한 혁거세(재위: 기원전 57~기원후 4) 때의 ‘차몽일’이다. 군옥에는 차몽일과 왕몽이 동일인이라는 증거는 없지만 정황상 그렇게 보아야 할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며 군옥의 저자가 본 설원기에는 최소한 차원부 → 류효전(차씨가 됨) → 차제능 → 차몽일(왕몽) → 왕수긍까지 올라가는 계보가 들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왕수긍의 조상이 왕조명이고 그가 원래 신갑(辛甲)으로서 지나에서 왔다고 하면 전설상의 인물인 황제(黃帝)로까지 이어지는 계보의 줄거리가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신갑은 기원전 11세기 중엽에 활약하였다는 다소 전설적인 인물일 뿐이며, 왕조명은 단군 때 ‘치민장’(治民長)이었다고 묘사되는데, 이들은 모두 시기로 봐도 적절한 이름들을 끌어다 이야기를 만들어냈다는 정황이 뚜렷하다. 이런 것을 단지 지어낸 설화라고 한다면 그럴 수 있겠지만, 1000년 혹은 2000년 이상의 이전의 성씨의 역사라 주장한다면 거짓일 수밖에 없다.
현재의 설원기에는 왕수긍이 나오지 않는데, 군옥에서 그 출처를 ‘서경잡록’이라고 제시한 것은 다음과 같은 사항을 보면 시사하는 점이 있다. 곧, 설원기에서는 본문인 기(記)에서 차원부의 조상이 류차달의 아들인 효전이라고 이야기를 조작해서 제시하고 있고, 記의 몇 군데 주석에서 류씨와 차씨가 하나의 계통에서 나왔음을 언급하고 있다. 본격적인 계통은 응제시 하나의 주석에서 자세히 주어져 있는데, 신라 때 차씨들이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냈다는 것과 정치적인 사건에 의해 류씨로 되었다가 차씨와 류씨로 나뉘었다고 하는 역사를 제시하고 있다. (이런 것은 우리나라 차씨나 류씨 모두 고려 이전에 기록된 역사가 없다는 사실과 신라말-고려초에 문화사적인 현상으로 본격적으로 한자 성씨들이 생겨나 사용된 사실만 봐도 꾸민 이야기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응제시의 주석은 그 계통에 대해 출처가 언급되어 있지가 않는 반면, 記의 주석들은 정지상의 “서경야사” 혹은 “서경잡기”라는, 제목도 혼란스러운 출처를 제시하고 있다(여기에 다른 두 개가 더 있음). 이것을 왕수긍과 연결해 보면 서경야사/서경잡기는 서경잡록과 같은 것이라고 추정된다. 또한 정황상 군옥의 저자가 직접 그런 문헌들을 보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설원기에서 어떤 내용(A)을 위작하면서 그 출처(B)로 밝혀놓은 것을 군옥에서 그 내용(A)을 제시하면서 처음에는 설원기를 출처로 제시했다가 출처(B)가 더 직접적인 출처로 생각하여 그것으로 제시한 것으로 판단된다.
정지상이 지었다고 꾸며진 “서경야사/서경잡기”가 출처로 주어진 것은 잘 꾸며놓은 함정인데, 옛날 문헌으로 제시된 것이라 그런 것이 존재한 적이 없어도 사람들이 잘 알 수 없고 정지상이라는 역사적 인물의 비중 때문에 믿음의 비중이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다른 두 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임). 실제 역사학자도 이에 속아 넘어갔음을 소개한 적이 있다. “군옥”에서 그 작품을 직접 보고 참고한 것이라면 응당 그것이 출처인 어떤 다른 항목들이 더 있어야 할 터인데 없는 것을 보면, 군옥의 저자마저도 속인 가짜 문헌임이 더욱 확실해진다. 실제 군옥에는 王蒙, 王式, 報陰錄, 東方說苑이 ‘神人採蓴’ 항목 하나에서만 나온다.
이상의 내용들을 고려하면, 현재의 설원기에는 들어 있지 않은 왕수긍이 군옥이 참조한 설원기 버전에는 들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설원기의 위작자(들)는 설원기의 위작을 계획하면서 배경 설정 및 구체적인 묘사를 위해 계통을 미리 꾸며서 작성해 놓았을 것이고, 또한 그런 조작을 그럴 듯하게 보이기 위한 장치를 마련해 놓았을 것임은 확실하다. 가장 좋은 것은 권위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빌리는 것인데, 설원기 자체가 사육신들을 적극 이용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5. 결론
이 글에서는 설원기 자체의 분석이나 비판보다는 대동운부군옥(군옥)에 들어 있는 설원기 관련 내용들이 언제 어떻게 들어갔을까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설원기는 군옥의 가장 초기본인 신편대동운옥 필사본(신편 1)에서는 목록이나 본문에 들어 있지 않고 드물게 본문을 직접 수정하고 대부분 여백에 추가하여 놓은 다음, 그 다음 필사본에서 본문에 편입되었고 이때는 목록에는 여전히 포함되어 있지 않다. 목판본에는 목록에까지 포함되어 있다. 이로써 설원기가 본격적으로 대동운부군옥에 편입된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고 하겠다. (다시 확인하자면, 여기서는 지금 관심 대상인 설원기 관련으로 국한하고 있음. 다른 변경 사항에 대해서는 연구 결과들을 참고할 것.)
여기서 설원기를 수용한 주체가 누구인지 추정을 해볼 수 있다. 권문해와 그 아들인 권별 두 사람 중 하나인 것은 확실해 보이는데, 권문해라고 해도 당시에 설원기가 이미 세상에 나와 있었던 시기이기에 시간적으로 무리는 없다. 그러나 군옥/신편의 완성(1589년)에서 권문해의 사망(1591년)이 근접하며, 초기본인 신편에는 없던 것들이 나중에 추가되었고, 그 추가 내용이 표현까지도 해동잡록의 그것과 사실상 동일하기 때문에 권별이 추가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군옥을 이야기할 때는 항상 권문해의 저작으로만 말하는데 권별의 기여도 작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이 제기될 수 있고, 또 설원기의 시대적 변화를 논할 때 군옥보다 해동잡록을 먼저 고려해야 할 가능성도 제기된다고 하겠다.
지나 사이트에는 “韓國大部分姓氏是黃帝後裔, 清明上墳應該回中國祭祖”(https://kknews.cc/culture/39v94no.html, 2017. 4. 2) 같은 제목의 기사가 버젓이 실려 있다. “한국 대부분의 성씨는 황제의 후예이며, 청명절의 성묘에는 중국으로 돌아와서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바로 “문화류씨세보”에 실린, 신갑-왕몽(차무일)-류차달 등의 “원파록”의 내용을 사실인 양 설명하고 있으며, 지나의 류하혜(柳下惠)의 후손인 하동류씨(河東柳氏)와 한국의 류씨는 다르지만 똑같이 황제의 후손이라고 결론을 내리면서 이렇게 코멘트를 하고 있다. “有朝一日, 如能在黃帝祭祖大會上, 同時邀請韓國柳氏與河東柳氏的後人, 一起參與祭奠黃帝, 那該是多麼難得而又有意義的事啊!”(언젠가 황제 제사에 한국의 류씨와 하동류씨의 후손들을 동시에 초대하여 함께 황제에게 제사를 올릴 수 있다면 얼마나 드물고 의미 있는 일이 되겠는가!) 조선 중기에 이루어진 한 가문의 역사 위조가 여러 가문의 역사를 추하게 먹칠해 버리고 말았고, 그것이 공사가(公私家) 문헌들을 통하여 널리 퍼져서 학계와 사회에 영향을 주었고, 심지어 외국에서도 그런 잘못된 정보를 통하여 마치 우리나라 사람들이 대부분 지나의 후예인 듯한 잘못된 관념까지 심어주게 되었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인가. 역사와 사회를 좀먹고 민족정기마저 해하는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동안 돌아보면 길게는 20여년, 짧게는 십 몇 년 그 잘못을 밝히고 바로잡는 노력이 있어왔다. 그러나 그 어둠의 뿌리는 깊고 깊어서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것이 절실히 느껴진다. 부디 위서(僞書) 차원부설원기에서 시작된 이 어둠을 물리치는 데 많은 분들이 참여하여 주시길 바라마지 않는다. 여기에 특히 차원부설원기가 시작된 연안차씨 문중의 여러 분들이 중심이 된다면 더욱 바람직하리라 믿는다.
2019년 6월 15일
류주환
*부록 1: 해동잡록의 비석
“해동잡록”의 차원부 기사 중에 특이한 것 하나를 지적하자면, 태종이 비석을 세우라고 명해서 차원부와 차안경의 묘에 세웠다는 것이며, 조석문曺錫文, 1413~1477)이 그에 대해 시로 읊었다는 대목이다. 그 출처도 ‘본록(本錄)’으로 나오는데, 정황을 보면 설원기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시는 다음과 같다.
잡록: 㤙碣巍森傑暮春 二公髙節與山長
군옥: 恩碣巍森傑暮岡 二公高節與山長
(평측: ○●○○●●○ ●○○●●○○)
은혜로운 비석 저무는 언덕에 우뚝 빼어나니
두 분의 높은 절개 산과 함께 오래 전하리라
두 버전이 글자 하나가 다르지만, 春과 岡이 모두 평성이라 어느 것이 와도 괜찮으며, 평측의 운율도 잘 맞는다. 저자인 조석문(曺錫文, 1413~1477)은 세종~성종 때의 문신으로서, 1422년(세종 4년)에 사마시에 합격, 1434년(세종 16년) 문과에 급제한 문신으로서 영의정까지 지냈다. 태종은 1400년에서 1418년까지 재위에 있었다. 태종 때 비석이 세워지고 조석문이 그때 시를 지었다면 최대로 봐도 대여섯 살의 아이가 지은 것이 되어 문제가 되지만, 훗날 언젠가 무덤과 비석이 있는 곳에 가서 읊었다고 하면 무리는 없다. 그런데 그렇다면 실제 비석이 있었다는 것이고 조석문의 시는 그 존재에 대한 강력한 증거가 되기 때문에 그 실체가 지금도 있거나 내력이라도 남아 있어야 할 것이며, 최소한 비문도 남아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런 상황인데도 왜 조석문과 비석의 이야기는 현재 설원기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도 보이지 않는지 하는 의문이 강하게 든다. 이것 역시 차원부 행적과 설원기의 위작자가 애초에 그렇게 조작했다가 실체가 없으니 조작이 들통 날 염려가 있음을 간파하고 후에 최초의 위작자 혹은 다른 사람이 빼버린 것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부록 2: “해동잡록” 권6의 ‘차원부’ 항목과 “대동운부군옥”의 비교.
아래는 해동잡록(잡록)의 내용이 모두 해체되어 대동운부군옥(군옥)으로 들어갔음을 보인다. 먼저 잡록의 구절을 제시하고 { } 안에 군옥의 관련 항목을 제시했다. 다만 판독 오류가 들어 있을 가능성이 있는데 그에 대해서는 일일이 확인하지는 않았다.
동일하거나 비슷한 구절이 군옥의 여러 곳에 반복적으로 들어가 있는 경우가 흔히 보이는데, 백과사전의 특성상 하나의 항목이 그것만 보면 내용을 알 수 있도록 독립적으로 구성되어야 하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라 하겠다.
여기서 보면 잡록과 군옥은, 박팽년의 시로 위작된 것이 잡록에는 전문이 나와 있지만 군옥에는 앞부분만 제목처럼 들어간 것과, 설원기에서 주석으로 주어진 자구(字句) 풀이가 잡록에는 주어져 있지만 군옥에는 들어가지 않은 것 등의 사소한 차이만이 존재한다. 단, 잡록에 ‘瑣錄’(쇄록)이라는 출처가 하나 주어져 있는데, 제목만 보면 조신(曺伸, 1454~1529)의 “소문쇄록(謏聞鎖錄)”인 듯하지만, 그 책에는 설원기 관련 내용이 없다. 정황상 이것은 ‘雜錄’(잡록)의 오기일 것으로 판단된다.
車原頫
延安人 字思平 麗季授正言 論事正直 (後:삭제)入本朝 晦跡不仕 以白衣赴召 爲河崙鄭道傳䓁所搆䧟 竟被赤族之禍 我太(祖:삭제)宗命雪其寃 特贈門下侍中 謚文節 命立碑(石于父子之墓)
{車原頫 字思平延安人麗季薦授正言論事正直胷襟淨瑩無一点塵俗氣人以冰壺貯月比之入國朝晦跡不仕以白衣赴召爲河崙鄭道傳等所搆陷竟被赤族之禍我太宗命雪其冤特贈門下侍中諡文節 }
{恩碣 河崙鄭道傳等以車原頫爲芳碩羽翼並其子安卿構殺之後命雪其冤立碣石于父子之墓曺錫文詩――巍森傑暮岡二公高節與山長[本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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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麁末憫時危艱 隱居于平山水雲洞 寢安苫席食掩沙瓦 時人方以秋水中明玉 擬之氷雪間淸霜 我康獻大王憫崔瑩攻遼之謀 托以平原游射之獵 徃訪原頫于洞廬 問以攻遼之事 原頫涕泣而言 其不可者再三 後出山 我 太祖與原頫論心後(苑){園}之日 以葱種数斗冐其天雨散于(苑){園}䑓 原頫槖以葱種 以示不留之意 太祖戱曰 平山之葱 何獨飽 而予園林之葱 獨不頼飢膓乎 瑣錄
{冒雨飛葱 車原頫麗季隱于平山水雲洞後出山我太祖與原頫論心後園之日以葱種數斗冒其天雨飛散于園臺原頫槖以葱種以示不留之意太祖戲曰平山之葱何獨飽而予園林之葱獨不賴飢腸乎[雜錄] }
{託獵往訪 車原頫隱于平山水雲巖洞我康獻大王憫崔瑩攻遼之謀託以平原遊射之―――原頫于洞廬問以攻遼之事原頫涕泣而言其不可屈指而言其不可者再三[本錄]}
{明玉淸霜 車原頫仕于麗季居官如在草野寢安苫席食掩沙瓦時人方以秋水中――擬之冰雪間淸―[雜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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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傳 辛昌左脇有金色龍鱗 趙浚李良祐䓁 以開國雲䑓之意 問于原頫 原頫荅 以左脇金鱗之昏尚在 予何忍背彼謀此 以汚忠義乎 竟不從 雜錄
{左脇金鱗 世傳辛昌――中有―色龍―趙浚李良祐等以開國雲臺之意問于車原頫原頫答以――――之昏尙在余何忍背彼謀此以汙忠義乎竟不從[雜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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爲人有氷玉絶㸃之姿 淸白不泹之節 胸襟净浻 無塵俗氣 時人以氷壼貯月比之 本錄
{胷襟淨泂 車原頫爲人有冰玉絶點之姿淸白不涅之節――――無塵俗氣時人以冰壺貯月比之[本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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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車)原頫本是䖏士 不貪功利 避遁窮山 居無住托 倚無枕簟 淡月淸風 是念(惟)是事 我英廟傳教書
{倚無枕簟 麗朝人車原頫本是處士不貪功利避遁竆山居無住託――――淡月淸風是念是事[本錄]我英廟傳敎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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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道傳河崙咸傅霖趙英珪䓁 皆是車門之近孽 以其名直書于族譜 四人䓁囙此懷嫌 搆陷車門內外族類 托以林堅味之外孫 鄭夢周之黨類 又當两聖之際 以二芳之羽翼七十餘人撲殺于松麻二原之谷 又將車柳同源之世系 專数焚蕩于海州神光寺 遂殱滅其嫡氏 時人目之爲四㐫 我 恭㝎大王知其誣 命雪其寃 景泰丙子 朴彭年奉教作雪寃記 而進之 本記
{殄滅其嫡 鄭道傳咸傅霖及趙英珪河崙皆是車門之近孼車原頫以其名直書于族譜四人等以私嫌構陷車門內外族類七十餘人一時撲殺于松麻二原之谷又將車柳同源之世系專數焚蕩于海州神光寺前遂――――氏[雪冤記註]}
{雪冤記 車原頫以河崙鄭道傳咸傅霖趙英珪爲車門之孼直書四名于族譜中崙等因此懷嫌搆陷盡赤其族當松原撲殺之日托以林堅味外孫之屬及其赤族之時則擧以鄭夢周之餘黨又當兩聖之際以二芳之羽翼詭囿而陷之後我恭定知其誣命―其―景泰丙子朴彭年奉敎作―――而進[本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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雪寃後 一日夢有神人乘黃鶴自西方来言 千萬慮外 得 上殿伸寃之特命 故今乃来謝云云 原頫嘗有所養數雙之鶴 本錄
{夢神鶴 車原頫爲河崙等構殺後自上命雪其冤一日夢有一神人乘黃―自西方來言千萬慮外得上殿伸冤之特命故今乃來謝云云原頫嘗有所養數雙之―[本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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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其兄崇頫崇質宗頫 皆死於松麻二原 皆車門一家俊士也 諸臣所製詩中 所謂五老五賢五璧五矜 皆指五人也 具綾城應製詩云 到此方知洪聖徳 昔年秋髮返春繅 注言昔年未快伸之日 毛髮盡白 今得永伸之旨 則前日之霜鬂 盡還青鬂也 雜錄
{五老雙原 車原頫爲河崙鄭道傳等誣陷與其兄崇頫崇質宗頫亨頫皆見殺於松麻二原之地朴彭年以詩悼之有――――事可悲之句[雜錄]}
{一家五俊 車原頫與其兄崇頫崇質宗頫亨頫爲河崙等構陷俱死於松麻二原皆車門――俊士也諸臣所製詩中所謂五老五賢五璧五矜皆指此五人也[本錄]}
{秋髮春繅 車原頫與其兄四人一時見殺於河崙輩其後特降昭雪之命具綾城致寬應製詩云到此方洪仁聖德昔年秋―返――註言昔年未快伸之日毛髮盡白今得永伸之旨則前日之霜鬢盡還靑鬢也[雜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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水雲巖洞巖畔 有數株梅 潭上有千叢菊 原頫被殺後 谷空無人 只有梅菊雙淸而已 成三問詩云 原上風顛舎杞傾 半巖誰護舊雙淸 数灣唯有三灘水 一攁訶喧四孼生 (公自)注 原者松原麻原也 舎杞者指原頫也 恭㝎知其誣殺 叱崙曰 予舎杞今已頹耶 半巖指水雲巖洞也 永嘆其谷空無人 只遺梅菊雙淸之意也 三灘水者水雲洞在東北面云 四孽趙鄭河咸也 權攀作詩云 那知物外游魚跡 流落河僧鉢裡罾 註原頫入山遁世 故以游魚比之 (河)崙少時削髮生長沙門 故以僧號之 言原頫以江湖游魚之跡 見落於崙之圎鉢中網罟也 原頫孫寳成疑畏其餘禍 托以睛盲癩面隱身于清凉之洞 自托郊西翫漲之遊 自經於叢林之下 觀聴者絶氣丧心焉 雜禄
{梅菊雙淸 車原頫麗末隱居平山水雲巖洞巖畔有數株梅潭上有千叢菊後原頫爲河崙等構殺谷空人無只有―――― 而已成三問應製詩原上風顚舍杞傾半巖誰護舊雙淸云云取古人半山自梅花詩意詠歎之[雜錄]}
{舍杞 河崙以私嫌誣殺車原頫我恭定終知其誣怒叱崙曰予舍之杞今已頹耶成三問應製詩有原上風顚――傾之句以悲之[雜錄]}
{梅菊雙淸 車原頫麗末隱居平山水雲巖洞巖畔有數株梅潭上有千叢菊後原頫爲河崙等構殺谷空人無只有―――― 而已成三問應製詩原上風顚舍杞傾半巖誰護舊雙淸云云取古人半山自梅花詩意詠歎之[雜錄]}
{鉢罾 權攀悼車原頫詩那知物外游魚跡流落河僧―裏―言原頫入山遁世故以游魚比之河崙少時削髮長沙門故以僧號之言原頫以江湖游魚之跡見落于崙之圓鉢中網罟也 _詳嫡_}
{翫漲自頸 車原頫爲河崙鄭道傳等構陷終被赤族之禍原頫孫寶成疑畏自託郊西――之遊――於樹木叢林之下觀聽者莫不絶氣喪心焉[雜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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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彭年以詩悼之云 五老雙原事可悲碧桐丹鳳又何時 幽懷不勝年前痛 昧死恭陳一鑑辭 注碧桐丹鳳者指芳碩也 同上
{五老雙原 車原頫爲河崙鄭道傳等誣陷與其兄崇頫崇質宗頫亨頫皆見殺於松麻二原之地朴彭年以詩悼之有――――事可悲之句[雜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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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谷中幽蘭之岀谷之後 未保其身 竟被賊臣謀亂之竒禍 蘭本依土 而不依水 中執原頫比蘭 則何異水中之蘭 當時應製詩人 以澗中蘭比而悲之 同上
{澗中蘭 車原頫麗末隱于平山以谷中幽蘭之質出谷之後未保其身竟被賊臣謀亂之奇禍蘭本依土而不依水中執原頫比蘭則何異水中之蘭當時應製詩人以―――比而悲之[雜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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淮安君芳幹 放歸田里之日 以已之所懷想原頫之冐昧 不覺丧心 而自慟 至農人田舎之飮 㤀其所騎去牛 而李養中麗朝士人也 遁在野外之時 以心之不染悲原頫之非命 不勝禍連之憤 至郷人獵川之會 打破所盛醪哭而去 時人以淮安爲㤀牛之子 以李爲破醪之公 本錄
{忘牛破醪 車文節原頫爲咸傅霖鄭道傳河崙所椎殺懷安君芳幹放歸田里之日以己所懷想原頫之冒昧不覺喪心而自慟至農人田舍之飮忘其所騎去牛而歸李養中麗朝士人也遁在野外之時以心之不染悲原頫之非命不勝禍連之憤至鄕人獵川之會打破所盛醪器而去時人以懷安爲――之子以李爲――之公[雜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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居官捧禄 散與故舊 寢安苫席之陋 食掩沙瓦之哭 雖在重地如在草堂 雜錄
{明玉淸霜 車原頫仕于麗季居官如在草野寢安苫席食掩沙瓦時人方以秋水中――擬之冰雪間淸―[雜錄]}
{俸祿散予 車文節原頫居官――――故舊寢安苫席之陋食掩沙瓦之器雖居重地如在草野[雜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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雪寃後 立碑于父子之墓 曺錫文作詩云 㤙碣巍森傑暮春 二公髙節與山長 本錄
{恩碣 河崙鄭道傳等以車原頫爲芳碩羽翼並其子安卿構殺之後命雪其冤立碣石于父子之墓曺錫文詩――巍森傑暮岡二公高節與山長[本錄]}
-- 이상 --
첫댓글 류병수님과 류교수님 글을 소문종원에게 읽고 다음 만나는 날 이야기 해보자고 하면 고등교육을 받으신 종중임원께서 이해롤 못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그래서 알기 쉽게 풀어서 설명해야하는데 그러면 간단 명료하게 하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는 노력하지 않고 자기 머리속에 요약해서 입력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런 점이 노인들의 특성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두분 글을 재 편집해서 구어체로 설명합니다. 정리되면 요악한 것을 여기 소개하겠습니다.
수고하신 두분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