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25명 정도 되는 경주남산연구소 회원님들과 함께 발굴 중인 나정에 들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답사를 인솔하는 김구석 선생님의 설명을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만약 혼자 찾아갔다면 나정에 못 들어갔겠지요. 또 현장을 잘 아시는 김구석 선생님의 설명도 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런 모임에 참석하게 해주신 아혜모호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얼마전 신문 기사(1월 22일자, 연합통신, 백제방 491번 글 참조) 에도 나왔듯이 이곳 나정에는 8각형 건물터와 담벼락터, 生자가 쓰여진 명문기와, 官자명 대리석 1점 등이 출토되었습니다. 사실 이곳이 나정인지 여부는 확실하지 않았는데, 이런 유물의 발굴로 혹 이곳이 나을신궁 자리가 아닌가라는 기대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을신궁 복원 발원을 위한 고유제도 지낸다고 기사까지 날 정도입니다.
이곳이 나을신궁터라면 신라사에 또 하나의 진실이 밝혀지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8각형 건물하면 떠오르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경기도 하남시에 위치한 이성산성입니다. 이성산성은 백제의 수도방위성으로 알려져 잇지만, 이곳에서는 8각, 9각형 건물지가 나왔습니다. 이 가운데 동쪽의 9각 건물지는 하늘에 제사지내는 천단, 서쪽의 8각 건물지는 땅에 제사지내는 사직단으로 추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신궁의 의미도 이것과 관련지어 해석이 가능해지겠지요. 나정은 차후 발굴보고서가 기대되는 유적입니다.
나정을 본 이후, 나정에서 직선 거리로 남쪽으로 축사가 있는 부근에 금광사지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금광사지는 삼국우사 명랑신인조에 등장하는 절로, 명랑법사가 자기 집을 희사해서 만든 것이라고 하는 절입니다. 명랑법사가 당에서 돌아오는 길에 용궁에 들러 설법을 하고, 금은보화를 보시 받아서 땅 밑으로 잠행하여 자기 집 우물 밑에서 솟아나왔고, 자기 집을 희사해서 절을 만들고 금은보화로 탑과 불상을 장식해 유난히 광채가 나는 절이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금광사지는 1966년에 못을 논으로 경작하기 위해 물을 뽑아버렸을 때 갖가지 석조물이 발견되어 절터로 확인된 곳입니다. 불상연화대석, 석불상, 석탑과 석등이 놓였던 돌 등이 드러났는데, 이들 석조물은 현재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져 있습니다. 또 사제사라는 명문기와도 발견되어 새롭게 금광사지로 밝혀진 곳입니다.
기록만으로 듣던 금광사지를 김구석 선생님의 설명과 함께 멀리서 나마 볼 수 있었습니다.
나정에서 서쪽으로 남산을 향해 걸으니, 마을 한 가운데 남간사지가 있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남간사. 좀 생소해서 찾아보니 삼국유사 혜통항룡 편에 혜통의 집은 남산 서쪽 기슭 은천동 어귀에 있는데, 지금의 남간사 동리 라는 일연의 설명에서 등장하는 절입니다.
그런데 명랑법사의 어머니인 남간부인이 시주하여 세웠기에 절 이름과 동네가 남간리가 되었다는 말을 김구석 선생님의 설명도 듣고, 아혜모호님이 글에서도 이 내용이 있기는 한데, 남간사와 명랑의 어머니 남간부인의 한자가 같은 것은 사실이지만, 시주해서 절을 만들었다는 기록은 불행히도 찾지 못했습니다. 남간사지가 금광사지와의 거리 등으로 볼 때 명랑법사와 그의 어머니와 관련된 절임에는 분명하기는 한데, 이 관계는 조금 더 찾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남간사지를 대표하는 유물인 당간지주는 보물 909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논 한가운데 있다고 하는데, 시간 관계상 찾지를 못하고 다음 장소로 이동해야 했습니다. 남간사지에는 민가와 밭에 초석과 장대석, 팔각대석, 목탑의 심초석으로 알려진 석재와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13호 남간사지 석정(石井) 등도 남아있다고 합니다. 주변 민가에 초석 및 석주(石柱), 우물과 우물 뚜껑으로 사용하고 있는 반파된 팔각 대석, 장대석과 확(문을 다는 돌), 그리고 다양한 문양의 기와 등이 산재해 있어 9세기를 전후하여 크게 번창했던 사찰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아혜모호님이 저 집에 큰 돌이 있었다, 우물이 있었다고 말을 해주셨는데, 나중에 시간이 나면 다시 한번 방문해서 집집을 돌아다니며 봐야겠습니다. 아쉬운 것은 이런 유물들이 자꾸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유물을 발굴하는 비용을 개인이 물어야 하는 우리나라의 비현실적인 문화재 관리 규정이 문제입니다.
남산을 향해 한참 걸어 천은사지가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지금까지 답사에 잘 따라오던 영준이가 이때쯤 졸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아이라서, 가벼운 유모차를 갖고 답사를 갔는데, 유모차가 갈 수 없을 만큼 길이 나빠져서, 중간에 큰 나무 아래에서 아내와 영준이를 쉬게 하고, 나는 답사팀과 함께 계속 산쪽으로 갔습니다.
조금 외진 곳에 밭과 과수원 사이에 주춧돌 몇 개가 보였습니다. 이곳이 천은사지라고 김구석 선생님이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그곳이 본래 건물지임에는 분명한데, 다른 유물들은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이곳에서 천은 이라는 명문기와가 출토되어 천은사지임에는 분명하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김구석님이 충담사의 불공을 드린 삼화령 미륵세존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남산 삼화령 석실에서 발견되어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진 삼화령미륵삼존불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김구석님은 미륵삼존불이라는 것이 없다면서, 내게 미륵삼존불이란 기록이 있냐고 묻기도 했습니다. 분명 불경에는 미륵삼존이란 말이 없음은 나도 알고 있어서 그렇게 답을 했더니, 선생님은 유일하게 삼국유사 백제 무왕의 기록에 미륵삼존이 못 가운데서 나타났다는 기록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삼화령에서 발견된 것은 미륵삼존불상일 수 없다고 주장을 하셨습니다. 김구석 선생님이 미술사학계의 최고 원로이자 권위자인 황수영 박사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을 보고, 내심 숨은 고수가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천은사지에서 곧장 일성왕릉으로 갔습니다. 일성왕은 신라 7대 임금으로 134-154년에 왕위에 있던 박씨왕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초기의 왕이라고 보기에는 왕릉의 모습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무덤은 흙을 덮은 원형봉토분이며, 무덤 아래쪽에 돌로 한 단을 둘러서 무덤의 보호석을 만든 모습이었습니다. 이런 형태의 무덤은 매우 후기의 무덤으로, 신라 초기형식으로는 도저히 볼 수가 없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18세기말에 박씨들이 자기 조상들의 무덤을 지정하면서 무리하게 이 릉은 누구의 릉이라고 고증없이 지정했기 때문에 생긴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이 릉의 위치가 남산 해목령 아래에 있는 것과 무덤의 형식으로 볼 때 신라 말의 55대 경애왕(924-927)의 무덤으로 보고 있습니다. 나 역시 그것이 더 사실에 가깝다고 생각되었습니다.
무덤을 보고 다시 아내에게도 돌아왔습니다. 답사팀은 신라 최초의 왕궁지로 알려진 창림사지로 걸어갔는데, 나는 아내와 영준이를 만나러 왔습니다. 아내는 쉼터에서 동네 할머니에게 오이도 얻어 먹고, 고추도 선물받고 재미있게 시간을 보낸 것 같았습니다. 오후 4시경이 되었는데, 마침 감포로 놀러갔던 처형 가족이 경주로 돌아온다는 연락이 와서 아내와 영준이를 그 차편에 보내기 위해 다시 양산재쪽으로 내려왔습니다. 아혜모호님과 손영미님, 그 아들이 저와 동행을 했습니다. 영준이는 처형가족의 차에 타지 않겠다고 조금 떼를 쓰기는 했는데, 아빠와 헤어지는 것이 싫었나 봅니다. 아내와 영준이를 서울로 보내고, 나는 다시 답사를 계속했습니다.
일행보다 많이 뒤쳐졌으므로, 아혜모호님의 차를 타고 창림사지쪽으로 급히 갔습니다. 다행히 일행보다 크게 늦지는 않았습니다. 창림사지에는 많은 주춧돌과 귀부 등이 남아있었고, 매우 커다란 창림사지 3층 석탑이 있었습니다. 이 탑에는 상층 기단면석에 8부중상이 새겨져 있는데, 4개가 온전히 남아있고, 나머지는 없어졌는데, 옛 것을 그대로 살리기 위해 없는 것은 없는 상태로 복원을 했다고 합니다.
이 탑에 1824년 추사 김정희가 경주를 방문하여 이 탑에서 나온 무구정탑원기를 자기 글에 남겨둠으로써 이곳이 창림사였음과 그 창건연대가 855년임을 명확하게 알 수 있게 했습니다.
8부중상 가운에 아수라, 가루라, 건달바, 천 등의 4상이 남아 있는데, 불법을 수호하는 사천왕의 부하 장수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사천왕천의 아래에 사는 신들로, 결국 탑 위는 사람이 죽으면 가고자 하는 불교의 이상적인 하늘인 사천왕천이 되는 셈입니다.
1층 탑신석의 사면에는 문짝을 표현했는데, 사람의 시각을 고려해서 약간 높은 곳에 그렸고, 문고리까지 그려넣었습니다. 탑의 상륜부는 없어졌지만, 그래도 매우 뛰어난 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립사지 탑의 특징은 절의 입구 쪽에 탑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절터 가운데 비교적 높은 안쪽에 우뚝 탑이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 만큼 이 탑은 절을 창건할 당시부터 일반 탑과 달리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삼국유사 박혁거세 조에는 남산 서쪽 기슭 창림사터에 신라 최초의 궁궐이 지어졌다고 기록은 되어 있는데, 궁궐터의 흔적이 어떻게 되는지는 쉽게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전면적인 발굴이 되면 궁궐의 흔적을 찾을 수가 있을 듯 하군요. 창림사터 숲에서 나와서 주변을 돌아보니 남산서쪽 부분이 의외로 넉넉한 곳이라는 것을 알겠습니다. 알영과 나정, 최초의 궁궐터가 모두 남산 서쪽에 있다는 것은 이곳이 최초에 박씨의 중심지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경주의 중심은 역시 월성입니다. 그 월성은 석탈해가 먼저 차지해버렸지 않습니까. 이 이야기를 떠올리니 신라 초기사의 그림이 머리 속에 좀 쉽게 그려졌습니다.
이제 오늘의 마지막 답사 코스인 포석정으로 갔습니다. 신라의 시작인 나정과 궁궐터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포석정. 신라의 처음과 끝이 이렇게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포석정. 화랑세기에는 이곳이 포석사라고 하여, 놀이하는 공간만은 아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김춘추와 김문희의 결혼식도 이곳에서 열린 매우 의미있다는 포석사. 이곳이 유명한 곳은 유상곡수라 불리는 놀이터에서 술잔 돌리기 장면이 떠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유상곡수는 신라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미 중국 남조에서부터 유행한 당시 왕실과 귀족들의 유희를 위한 시설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포석정에는 물이 전혀 흐르지 않고 있습니다. 이점이 좀 아쉽습니다. 유상곡수 옆에 우물이 있는데, 열어보니 깊은 원형의 우물이었습니다. 포석정 답사를 마침으로써 경주의 첫날 답사는 끝이 났습니다.
저와 답사를 함께 했던 아혜모호님, 손영미님, 그리고 윤영희님이 저에게 오늘 저녁 숙소가 예약되었냐고 물었습니다. 본래 계획은 경주 시내에서 숙박을 할 예정이었는데, 윤영희님이 안강읍에 있는 자기 집에서 하루 머무른 것은 어떠냐고 초대를 해주셨습니다. 그날 손영미님과 그 아드님도 윤영희님에서 모여서 저녁을 하기로 했으니 함께 가는 것이 어떠냐고 말해주셨습니다. 집 주변에 옥산서원, 독낙랑, 정혜사지 13층 석탑 등 유적지도 많다는 말을 듣자, 갑자기 욕심이 나서 염체 불구하고 하루를 신세지기로 하고 윤영희님의 댁을 방문하기로 했습니다. 아혜모호님과 헤어져 안강으로 가는 시간은 약 50분. 도착하니 저녁 7시가 조금 안되었을 시간이었습니다. 그곳은 서울 사람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그림 같은 전원주택이었습니다. 공기도 맑고 조용한 이런 곳에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저녁에 포철에 다니시는 윤영희님의 남편분과 그 친구분들 4가족이 모여서 야외에서 고기와 술, 과일을 먹으면서 조촐한 모임이 있었습니다. 불청객이지만, 저도 거기에 끼어서 함께 술을 마시며 대화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역사연구자로서 갖는 여러 생각들을 이야기하면서 즐거운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처음 뵌 분들이지만 모두들 저를 반갑게 맞이해주어서 너무나도 편하게 하루를 쉴 수 있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부산에서 제베님이 경주로 오기로 약속되어 있기 때문에 적어도 10시까지는 경주 시내로 가야 합니다. 그래서 8시 조금 넘어서부터 옥산서원을 시작으로 안강 지역 답사를 시작했습니다. 윤영희님께서 차로 안내를 해주셔서 너무도 편하게 답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