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8∼1848년 노동자층을 주체로 하여 전개된 영국의 민중운동.
노동자들은 1832년의 선거법 개정에서도 선거권을 얻지 못하자, 1830년대 중반부터 경제적 ·사회적으로 쌓여온 불만과 함께 선거권 획득을 위한 요구의 목소리를 높여갔다. 우선 1836~1837년에 런던에서는 W.오언을 고문으로, W.러벗을 지도자로 내세워 런던 노동자협회를 결성하였고, 버밍엄에서는 은행가 T.애트우드의 노력으로 버밍엄 정치동맹을 이루었으며, 북부와 서부에서는 노동자들의 운동을 활발히 추진하면서 F.E.오코너가 《노던 스타》지를 발간하여 이를 지도하였다.
이와 같은 각지의 노동자 조직이나 운동은 점차 전국적으로 확대 발전하여, 1837년 초에 러벗 등은 ‘인민헌장(People’s Charter)’을 작성하여 다음해 5월 전국에 배포하였다. 그리고 이 헌장이 실현되도록 국민청원 서명운동과 그를 위한 전국 조직 결성을 확대하여, 각지에서 집회를 갖고 행진을 했다. 그리하여 1839년 2월에는 런던에서, 그리고 5월에는 버밍엄으로 옮겨 통일대회를 열었는데 오코너 등 급진파와 러벗 등 온건파가 대립하여 결말을 짓지 못한 채 6월에 120만 명의 서명 청원서를 하원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거부되었을 뿐만 아니라 러벗 등은 체포되고, 런던 대회의 파업 결의도 취소되는 등 관헌의 탄압으로 실효를 거두지 못한 채 9월에는 해산하였다.
그 후 1840년 오코너는 맨체스터에서 전국헌장협회를 설립하고 1842년에 325만 명의 서명 청원서를 제출하였으며, 같은 해 버밍엄에서도 정치동맹 대신에 완전선거권동맹을 조직하고 역시 의회에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그러나 다시 모두 거부되어 동맹은 깨지고 러벗도 물러났으며 차티스트 지도 아래 북부에 퍼졌던 파업운동도 무력에 의해 진압되었다. 오코너는 그래도 《노던 스타》 및 전국헌장협회를 통해 운동을 계속하였으나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어서 G.J.하니가 지도자가 되어 마르크스 ·엥겔스와 협력하여 1845년에 설립한 우애(友愛)민주주의협회를 기반으로 노동자 조직을 호소하였다.
1848년의 프랑스 2월혁명으로 전유럽의 혁명적 분위기 속에서 세 번에 걸친 570만 명의 청원 서명을 모아, 4월 런던에서 대청원 시위운동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시위는 무력에 의해 억제되고, 청원은 하원에 전달되었으나 역시 부결되었다. 그 후 지도자들의 체포 ·투옥이 계속되고 전국헌장협회를 중심으로 한 재건의 노력도 헛수고로 돌아가 1858년의 대회 후 소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