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성씨 가운데서도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씨족의 하나인 최씨[최씨]는 역사상
수많은 인재들을 배출한 전통있는 명문거족으로 선현들이 이룩해놓은 찬란한 업적에서
더듬어 볼 수 있다. 최씨 특유의 기개, 신념, 절조 등으로 "최고집"혹은 "최씨앉은 자리에
풀도 안난다 " 등의 애칭을 낳기도 하였다.
최씨[崔氏]의 원조는 신라의 전신인 사로의 6촌중에 돌산고허촌 사량부 촌장 소벌도리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기원전 57년경 유민들이 여러산골짜기에 흩어져 살면서 여섯마을을 이루고
있었는데, 신라 3대 유리왕 9년(서기 32년)봄, 6부를 개정하고
알천 양산촌장 알평에게는 이씨[李氏]. 돌산 고허촌장 소벌도리에게는 최씨[崔氏],
무산 대수촌장 구례마에게는 손씨[孫氏], 취산 진지촌장 지백호에게는 정씨[鄭氏],
금산 가리촌장 기타 에게는 배씨[裵氏], 명활산 고야촌장 호진 에게는 설씨[薛氏]의 성을
내려주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삼국유사에는 위의 6부촌장들이 모두 하늘에서 내려온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시조는 소벌도리의 24세손이며, 신라말기의 대문장가인 최치원[崔致遠]을
주축으로 하여 선대 및 후대에서 분파되었다고 보면 정확하다.
문헌에 의하면 최씨는 387본까지 기록하고 있는데, 거의가 지명이고 실제 시조가 분명하게
확인된 것은 43본이다.
[경주최씨 상계세보]의 기록으로는 소벌도리의 24세손 최치원의 윗대에서 분파된 본관으로
개성, 삭녕, 동주(철원), 전주(군옥파)가 있고, 최치원의 후대에서는 함양, 청주, 영흥, 충주,
용강, 수원, 부안, 강릉, 강화, 탐진, 전주(순작,균)가 분파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거의 모든 최씨가 소벌도리의 후손으로 경주최씨를 원조로 하는 소벌도리와
최치원을 잇는 후예임은 틀림없다.
이렇게 신라시대에 웅기한 최씨는 신라에서 최치원, 최승우, 최언위 등 세사람이 똑같이
당나라에 유학하여 그명성을 날렸으며, 특히 문창후, 최치원 같은 대문장가는 동양의
역사속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명현으로 동양최고의 지성[至聖]이고 한문학의 대가로
추앙받고 있으며, 고려때와서는 역사상 최고의 번영을 누렸다.
고려사를 보면 서기 1196년~1258년까지 60여년간 군벌정치로 한때 최씨왕국을 방불케했다.
명장 최영[최영]은 수많은 국내외의 혼란이 있을 때마다 평정하여 시련을 극복하고
나라에 공헌했으며, 두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충절은 우리민족의 얼이요, 최씨의 특성이다.
경주시 교동에 자리한 "최부자집"은 12대 만석과 10대 진사로 유명하며, 문공부가 1969년에
"신라의 집"으로 선정하고 길이 보존하기로 했다. 마지막 만석군 최준[최준]은 조선 청백리
정무공 최진립[崔震立]의 11세손으로 상해 임시정부에 100억원(현재기준)을 보내어,
해방후 임시정부가 환국하자 백범 김구선생이 제일먼저 만나보고싶은 분이 최준이라고
하였으며, 당시 조선총독들이 문교부장을 요청했으나 끝내 거절하였다.
최준은 특히 육영사업에 많은 투자를 하였는데, 그예로 영남대학교의 전신인 대구대학을
설립하였으며, 보성전문(현 고려대학교) 도서관 건립 등이있다.
조선때 명종, 선조, 인조 임금은 선현[先賢] 문창후, 최치원은 우리 동방의 이학시조[理學始祖]
이니 "그의 자손은 귀천을 불문하고 군역[軍役]에 동원하지 마라" 고 전교 하였다.
이렇게 대대로 나라에 공헌하고 근대사회 발전에 앞장서온 최씨들의 발자취로 하여금
명문 최씨가문은 더욱 빛이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