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근대와 현대라는 개념 근대(近代)와 현대(現代)라는 시대구분 개념은 유럽을 중심으로 한 서구의 시각으로 바라본 세계사에 기원한다. 따라서 일반적인 역사학에서는 유럽이 고대, 중세, 르네상스를 거친 이후부터 현대 이전까지, 18세기부터 20세기 중후반까지를 근대로 구분한다. 대체로 근대란 유럽 각 국가들에서의 시민혁명, 또는 산업혁명을 그 시작으로 보며 따라서 프랑스의 경우 시민혁명 이후 부르주아공화정을 설립한 1799년부터 근대사회가 탄생한 것으로 여긴다. 영국 역시 18세기 중엽 면직, 광산, 제철 등의 산업을 시작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기계가 인력을 대체하며 생산물을 만들어내었던 시점을 근대의 시작으로 본다. 두 가지 시작이 그 배경은 다르더라도 인간에 끼친 영향이 그 이전의 사회와 차별화되는 점이 현대의 우리가 바라보는 근대라는 시대 구분의 핵심이다. 시민혁명은 ‘자유, 평등, 박애’라는 개념을 인간사회에 심어놓았고 따라서 그 이전 절대왕정의 가치와는 다른 사회체계와 인식, 철학, 종교, 문화가 퍼져나갔다. 산업혁명 역시 이전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변화하며 농토에서 도시 중심의 공장으로 사람들의 생활이 변화했고 경제활동의 방법과 규모가 달라졌으며, 영국의 경우 귀족의 땅을 관리하던 젠틀리 계급이 화폐자본을 바탕으로 한 부르주아 계급으로 탈바꿈하며 자본주의 체제가 시작되는 등의 변화를 겪었다. 이러한 사실을 놓고 볼 때 ‘근대’라는 시대개념을 단순히 물리적 시간개념에 대입해 전 세계의 역사를 획일적 시각으로 바라볼 수는 없는 일이며, 또한 일반화의 오류가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시대의 구분이란 각 국가와 민족마다의 고유한 문화와 구성원들의 인식의 변화를 면밀히 살펴 정의해야 하며 우리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이 땅의 근대와 현대 또한 그래야만 한다.
2. 한국의 근대와 현대 앞서 말한 이유로 인해 우리나라의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주장에서도 한반도 근현대개념은 저마다 다르다. 1863년 고종의 즉위라는 정치적 사건에서부터 근대가 시작되었다는 주장도 있고 1876년 전국 20개 항구가 열리고 서구에 문호가 개방된 강화도조약부터가 근대라는 시각도 있다. 또한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비롯해 반봉건 반외세의 물결이 민중들에게서 싹트기 시작한 1800년대 중반부터가 근대라는 주장도 있으며 1894년 갑오개혁과 동학농민운동의 시작이 근대사회의 출발이라는 말들도 있다. 근대의 끝과 현대의 시작 또한 의견은 분분하다. 한일병탄 함께 대한제국이 끝나고 일제강점이 시작된 1910년이 현대사회의 시작이라는 의견도 있으며, 1945년 광복과 해방이, 또 1948년 대한민국정부 수립이 진정한 현대라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사전적 정의에 따르는 현대(現代)란 사상 또는 그밖의 것이 현재와 같다고 생각되는 때부터 지금까지의 기간을 일컫는 말이라고 했으니 어쩌면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현대는 이보다 훨씬 이후, 가령 정치적으로 민주화의 시기부터이거나 산업적으로 고도성장기 이후일 수도 있다. 이는 다른 국가들에서도 마찬가지라서 가령 독일의 경우 1990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이후부터, 베트남의 경우 전쟁이 끝난 1976년 이후부터를 현대로 보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현대란 매우 상대적인 것이어서, 앞서 말한 지금 우리의 근대인 1920년 경 사람들은 당대를 현대라고 신문기사에 표현했다. 아마 우리의 미래세대들이 바라보는 근대 또한 같은 혼란을 겪을 것이다. 이런 사실을 종합해볼 때 한국의 근대와 현대, 더군다나 한국산악사의 근대와 현대를 나누는 기준은 매우 불분명하다. 많은 이들이 등산사를 다루며 단순한 근대와 현대 구분을 기록상의 인수봉 초등인 1920년대 말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는 흘러온 역사 중 하나의 사건일 뿐이지 역사 자체를 구분하는 전환점으로 보기엔 논리가 빈약하다. 그렇다면 한국등산사의 현대는 또 언제 어떤 사건부터 시작되었단 말인가? 1977년 에베레스트 등정? 1989년 해외여행자유화조치? 8000m급 14봉 등정? 2000년 밀레니엄과 등산 붐의 시작? 사전적 의미의 현대로 볼 때 지금 현재 활동하고 있는 대다수 산악인들의 인식과 문화가 많은 부분 일치하는 시점은 아마 최근 10년 이내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기준으로 그 이전을 근대로 정의한다면 또한 아직 현역에 있는 다른 나이든 산악인들, 그리고 이 산악계에 오래도록 전해 내려온 선후배간의 위계질서, 군대식 문화 등으로 인해 또 많은 논란이 일어날 것이다. 이러한 근거에 바탕해 한국의 근대등산사를 다시 들여다본다는 세미나는 그 주제 설정과 단어의 선택이 잘못되었다. 굳이 바꾸자면 ‘한국 현대등산의 여명기’라거나 ‘서구 알피니즘 도입기’를 다시 조명한다는 주제가 맞다. 여러분들이 근대라는 단어에 빗대어 궁금해 하는 것, 듣고 싶어 하는 답은 바로 그것이 아닌가? 구체적으로 짚어보면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 시기에 서구에서 유입된 장비와 등반형태를 이용한 산행에 관한 사실들을 남아있는 사료를 토대로 고찰해보는 지적 호기심’ 정도? 때문에 필자는 여러분들이 말하는 근대와 현대 개념을 이렇게 임의적으로 가정하고 지금 현재 우리가 하고 있는 행위와 사상의 뿌리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가, 그 전환점이 어느 시기인가를 찾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3. 서구 알피니즘과 한국적 등산의 접점 서구의 알피니즘이라는 행위는 그 시작이 분명하다. 1786년 알프스 최고봉 몽블랑 등정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몽블랑 등정 또한 이를 현대에 와서 정리하고 해설을 덧붙인 프랑스 언론인이자 산악인 로저 프리종 로슈의 개인적 사견,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 사회와 정치상황 등 복잡한 외부적 요인을 배제할 순 없다. 하지만 그의 등산사 정리가 프랑스인의 시각에서 쓰였더라도 이미 세계에 퍼져나가 고착되었고 현재 산악인들에게 학습되었기에 이를 일일이 뒤집기란 어려운 일이다. 프리종 로슈가 고대유럽신화에 빗대어 황금시대, 은의시대, 철의시대로 유럽의 산악사를 정리한 건 탁월한 선택이었지만 우리에겐 그런 정복의 역사는 없다. 몽블랑 초등과 시작된 서구 알피니즘은 그것이 인간의 이념을 지배하는 어떤 철학이 아니라 단순히 설선 이상의 대상지를 올라가는 행위에 국한한, 즉 우리가 말하는 ‘몸등산’이라는 것의 전부였지만 이 사실에 대한 해설은 인간 도전의 의지, 자연에 대한 극복, 죽음을 무릅쓴 어떤 무용의 용기 등으로 덧붙여 확대 해석되었고 우리에게도 전해져 지금에 이르는 것이다. ‘탐험’ 즉 위험을 무릅쓰고 어떤 곳으로 가 살펴보고 조사하는 행위로써의 등산을 알피니즘으로 본다면 우리는 이미 서구보다도 훨씬 일찍 그런 일들을 해왔다. 고선지 장군이 그랬고, 혜초가 그랬고, 전국의 명산대천에서 숱한 유산기를 남겼던 조선의 선비들이 그랬으며 고산자 김정호도 그랬다. 그랬음에도 지금 현재의 우리는 알피니즘에 대해 서구식 등산장비를 사용해 도포자락 아닌 일본 군복 비슷한 옷들을 입고 20세기 들어서야 개발된 카라비너나 하켄 같은 장비를 이용해 암벽을 오르는 것만을 한정해 한국 알피니즘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이런 행위와 겉모습에 치중한 것들을 알피니즘이라고 말하면서도 또 ‘탐험가 정신’이 있어야 함을 강조한다.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다. 노비에게 짐을 지우고 도포자락 차림으로 맹수가 우글거리는 위험을 무릅쓰고 노숙을 감행하며 금강산에 올랐던 선비들의 산행은 탐험이 아니고 샤모니 가이드를 앞장세워 현지 짐꾼들을 이용해 알 수 없는 빙하 크레바스를 건너던 영국의 젠틀리들은 탐험가란 말인가. 이런 사대주의적 발상과 시각이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현대등산과 그 이전 등산의 차이를 종교나 생업에 빗대어 설명하는 경우도 있지만 꼭 그렇게만 구분할 수 없는 것도 마찬가지다. 옛 사람들이 산을 신성시하고 산에 올라 기복하며, 또는 먹고 살기 위해 올랐다는 것은 지금도 그대로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알프스의 어느 가파른 산정에나 근래 알피니스트들이 세워둔 그들 종교의 상징 십자가가 서 있으며 일본의 산들에도 정상마다 신사가 들어서있다. 하물며 에베레스트 산의 정상에도 룽다가 휘날리고 있다는 것은 등산의 목적을 종교로 구분할 수만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산의 안내자들, 알프스의 가이드들과 구조대들과 셰르파들, 등산매체를 만들고 있는 기자인 나 역시 먹고 살기 위해 산에 가는 것이다. 하지만 꼭 경제적 목적만은 아니다. 여러 가지 다른 직업 선택에 앞서 그들이 그 위험한 일을 계속하는 것은 산에 대한 특별한 성정(性情)이 있기 때문이다. 우린 어쩌면 그런 것들을 두고 산악인의 정서 또는 알피니즘이 뿜어내는 특별한 향기 같은 것이라고 말해 왔는지도 모른다. 서구 알피니즘과 한국적 등산의 접점을 나는 여기서 찾는다. 현재의 산을 오르는 우리에겐 클레먼트 휴 아처의 기록상 인수봉 초등 같은 건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다. 한 사건을 파악하는 탐구와 분석은 필요하겠지만 전체적인 흐름에서 지금 내가 산을 오르는 일은 이미 수천년간 이 땅에서 살아오며 전국의 구석구석을 누볐던 선각자들의 정신, 아마도 인간 본연의 탐구심과 호기심 같은 것, 그것이 현재의 산에서 표출된 형태가 지금의 사람들이 산을 오르는 일과 통하고 있다고 본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또 이렇게 되묻는다. 그래서 대체 이 땅의 등산은 언제 시작되었냐고.
4. 암빙벽등반의 시작과 조직적 산악운동의 태동 사람들이 원했던 주제는 아마 이런 것이었을 테다. 이건 아주 간단하고 고민할 필요도 없는 대답이다. 이미 많은 자료들에 나와 있으니까. 조선을 무대로 서구적 등산을 펼친 사람들 중 기록을 남긴 이들은 많다. 개항 이후인 19세기 말엽부터 서구의 외교관, 군인, 선교사 등이 백두산, 금강산, 북한산 등지를 올라왔다. 20세기 초반 시작된 일본의 현대 등산활동이 전해져 일본인들 또한 마찬가지로 먹고 사는 것에서 벗어난 이런 탐험적 등산을 시작했다. 산을 오르던 사람 중에는 암벽등반과 같은 특수한 기술을 접해본 이들도 있었고, 그중 한 사람이 영국 공사관에서 일하던 아쳐였으며 1929년 인수봉에 올라 기록을 남겨 지금까지 전해진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아처의 등반은 당시까지 이 땅의 누구도 몰랐고 관심도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산악계 또한 마찬가지로 아처가 인수봉을 올랐다는 사실이 조명된 건 근 20년 남짓된 일일 뿐이다. 이보다도 재한 일본인 이이야마 다츠오의 활동이 한국 현대산악운동의 뿌리라고 보아야한다. 조선산악회를 창립해 서구 알피니즘에 입각한 활동을 펼친 것, 또 투어리즘의 면에서 금강산협회를 만들어 대중들에게 산을 통한 휴식과 여가를 소개하는 등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데에는 그것이 비록 우리가 혐오하는 일본일지라도 이이야마의 역할이 크다. 이이야마는 아처와 비슷한 시기에 인수봉을 올랐지만, 어쨌든 인수봉 등반이 산악사를 설명함에 있어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본다. 그런 논리로 본다면 인수봉만 산인가, 거기만 당신들이 말하는 한반도 알피니즘의 무대인가. 같은 이방인일지라도 영국은 옳고 일본은 틀린가? 1905년 신문 기록에는 당시 YMCA등산반에서 근교 관악산으로 집단 등산을 함께할 사람을 모집한다는 기사가 나온다. 이미 아처나 이이야마의 인수봉 등반 이전부터 순수한 등산 목적의 행위가 이루어져 온 것이다. 짚신에 도포자락으로 갔을지언정 나물 캐고 나무하러 산에 간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 순수한 등산목적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종교적 포교활동의 일환이었을는지도. 어쨌든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19세기의 사람들은 낙후된 사고를 갖고 있지 않았다. 그 사고를 깨뜨린 사건이 인수봉 초등도 아니었고. 다시 돌아가, 이 무렵 등산이라는 신체 활동을 권장하고 소개했던 식민지 조선의 사회 상황 또한 같이 보아야한다. 1926년 일본 왕 히로히토의 결혼을 축하하며 건설한 경성운동장(동대문운동장)에서 보듯,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신민들에게 체육활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 배경에 당시 일본과 분리된 독립채산제로 운영되던 조선총독부가 생산성 향상과 수탈의 확대, 전쟁 준비를 위해 신민의 체력단련을 필요로 했다는 느낌을 지울순 없으나, 어쨌든 1928년 일본 문부성은 조선총독부에 각급 학교 교직원을 대상으로 동경에서 체육 지도강습회를 실시하라는 공문을 보내고 여기엔 등산이라는 과목이 포함되며, 연수를 받고 돌아온 교사들은 중앙고보, 배재고보, 세브란스의전, 연희전문, 경신학교 등에 등산반을 신설한다.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했던 아니건, 또 그 활동을 계속했건 아니건 간에 산에 올라야 했던 것이다. 국정교과서 논란에서 보듯 사회구성원의 인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건 바로 ‘교육’이다. 교육에 등산이 포함됨으로 인해 이를 체험한 청소년들은 사회로 나아가 서구적 등산활동을 전파하는 경로가 되며 사회문화 전반에 영향을 끼친다. 학생들을 통한 현대적 등산의 인식 확대가 사회에서 얼마나 작용했는지는 나도 그 시대를 살지 않았으니 잘 모른다. 다만 이와 함께 일제가 1919년 만든 금강산전기철도주식회사의 활동이 1930년대 들어 부쩍 늘어난 것은 사실이다. 그 배경엔 앞서 말한 독립채산제로 운영되었던 조선총독부의 세수 확대의 목적이 포함되어있던 것 같다. 조선 민중을 대상으로 등산 붐을 일으켜 금강산으로 가 돈을 쓰게 하는 경기 활성화의 목적과 함께 대내외 정치적으로도 금강산 개발과 투어리즘은 중요했다. 금강산 개발은 조선반도의 아름다운 자연이 일본의 것이라는 걸 서구열강에게 공공연하게 인식시키기에 좋은 무대였기 때문이다. 여기에 이이야마와 같은 산악인들이 첨단의 등반을 감행하고 미디어는 이를 적당히 포장하여 알리고, 또 일본 내에서도 1925년 RCC와 같은 전위 클라이머들의 등반과 경도제대산악부의 카메트 초등과 같은 히말라야 진출 붐이 이는 등 그야말로 삼박자가 맞아 떨어지는 행위가 그 시기 있었던 것이다. 여기 덧붙여 금강산에서의 성공에 이어 일본은 1940년 동경올림픽을 유치하는데, 1930년대 말에는 북한산으로 무대를 넓혀 북한산주식회사를 설립하며 정릉일대의 유원지 개발과 백운대까지 관광도로 개설 및 케이블카 설치 등 산지개발을 구상한다. 결국 이 계획은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올림픽이 취소되며 없던 이야기로 돌아갔지만 냉정하게 본다면 우리 근현대 산악운동과 산악인이란 이런 거대한 흐름의 소품에 지나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1942년부터 시작된 전승기원등행단의 활동과 이를 왜곡해석해 후배들에게 전한 김정태의 기록 같은 건 더 말할 나위 없는 일이다. 그리고 또 이런 건 지금 현재에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14봉도 아닌 일본식 표현 ‘14좌’ 열풍이 지난 자리에 다시 몰아치는 설악산 케이블카.
5.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이제 이런 질문을 해야할 때다. 참 불편한 말이지만 현재 우리 산악운동은, 또 알피니즘이란 건 여기 있을 이유가 없다. 얼마 전 다녀간 메스너가 의아해했던 것처럼 고도지향성을 지닌 것이 알피니즘의 특성이라면 여긴 알프스도 아니고 만년설도 없는 땅인데 스스로 알피니즘이라 불리는 그 활동을 굳이 끼워맞출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울하게 보자면 저 일본제국주의의 산물과 청산되지 못한 역사가 등산에 스며들어 우린 해방 이후로도 산에서 군국의 산물을 떨쳐내지 못하고 국가와 정권의 이해를 대변하며 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산을 올랐다. 아직도 빠따 치던 군대식 위계질서를 산에서 찾는 사람들, 니꾸사꾸 메고 항고에 밥 지어먹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들 얼마나 많은가. 분단과 함께 스며든 반공교육의 영향을 받아 산악인들은 산악계라는 견고한 카르텔을 형성했고, 거기서 선배에 거스르는 말과 행동은 ‘좌빨’이라는 개념으로 이분법적 인식되어온 것은 아닌가. 천민자본주의의 사회에서 자라온 당대의 산악인들은 스스로 투어리즘과 알피니즘을 구분하지 못하도록 교육받았고 자신이 산에 가는 이유를 스스로 찾는 일을 등한시한 채 맨날 서양의 책과 서양 사람들의 활동과 그들의 말에 인정받는 데에만 신경 썼다. 마치 그게 세상과 분리된 숭고한 알피니즘인양. 그들이 나쁜 사람이라는 건 아니다. 그렇게 제도를 통해 배우고 선배에게 주입받았으니 그런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아의 형성단계에서 자신이 살아온 환경과 주변의 영향을 받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우리는 지금의 산악인이라는 어떤 인간 모델로 한정하기 전에 이미 오래 전부터 인간 본연의 호기심과 탐구심으로 위험을 극복하고 개척하며 이 땅의 산을 올라온 민족이며 사람들이다. 그 과정에서 자연 속으로 입산했고 자연과 하나가 되려 노력했으며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전했다. 그런 아름다운 우리의 산행이 근대와 현대라는 시기에 들어 알피니즘이라는, 우리에게는 뿌리 없는 말에 휩싸여 이상하게 변하고 단절되었다.
*이 글은 논문이 아니다. 자료도 정확히 다시 검토하지 않고 머릿속에 떠오른 대로 쓴 것이기에 연도 등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 한국 근대등산이라는 주제의 세미나를 한다기에 좀 제대로 생각해보자고 대충 쓴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