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만년만에 드러난 남극 얼음밑 세상
2007년 2월 26일 남극 대륙의 거대한 얼음덩어리 아래에서 서식해온 생물들이 1만여년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남극 대륙에서 남미 남단 케이프혼 쪽으로 길게 뻗은 남극 반도. 그 일부인 라센(Larsen) 빙붕(氷棚·바다 위에 떠있는 얼음덩어리)이 지구 온난화의 영향으로 떨어져 나가기 시작한 것은 10여년 전부터. 1995년엔 라센A 빙붕이, 2002년엔 라센B 빙붕이 붕괴하면서 떨어져 나갔다. 그 결과 제주도 면적의 약 5.5배에 달하는 1만㎢의 바다가 1만2000년 만에 얼음 아래 덮여 있던 속살을 드러냈다.
독일 알프레드 베그너 극지해양연구소 연구팀은 잠수정을 타고 이 지역 바닷속을 최초로 탐사했다. 그 전까지는 과학자들이 얼음에 구멍을 뚫고 원격 조종 비디오 카메라를 이용해 남극 바닷속을 탐사해왔다. 연구팀은 10주간의 탐사 끝에 새로운 종(種)의 해양생물 19종을 비롯해 총 1000여종의 생물이 서식하고 있음을 확인했다고 26일 밝혔다. 새우를 포함해 새로 발견된 갑각류는 15종이나 된다. 산호나 해파리와 같은 강장(腔腸)동물류에 속하는 4종도 처음 발견됐다. 이 중 말미잘과 유사한 생명체는 달팽이의 등에 붙어 살며 공생하는 것으로 관찰됐다.
하지만 이번 조사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빙붕 붕괴 후 남극 바닷속 생태계 변화를 눈으로 확인했다는 사실이다. 연구팀은 크릴 새우와 밍크 고래 등이 대규모로 서식하고 있으며, 수심 2000m 심해(深海)에 사는 갯나리와 해삼, 성게, 멍게 등이 남극 바닷속을 빠르게 점령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탐사팀을 이끈 줄리안 구트(Gutt) 박사는 “얼음이 사라진 뒤 해양 생태계가 새로운 환경에 빠르게 적응하고 있음을 확인했다”며 “이번 조사는 지구 온난화가 생물 다양성에 미칠 영향을 예측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독일 알프레드 베그너 극지해양연구소 연구팀은 잠수정을 타고 이 지역 바닷속을 최초로 탐사했다. 그 전까지는 과학자들이 얼음에 구멍을 뚫고 원격 조종 비디오 카메라를 이용해 남극 바닷속을 탐사해왔다. /조선
[2006년] 17세기 일본문서 "독도는 조선 땅" 시마네현 가문 전승 문서 공개
독도를 ‘조선 강원도에 속한 섬’으로 기록한 17세기 일본측의 공문서가 26일(2006년 2월) 공개됐다. 이 문서는 최근 ‘다케시마의 날’을 선포해 물의를 빚고 있는 일본 시마네(島根)현의 한 가문에 전승된 것이다. 손승철(孫承喆) 강원대 사학과 교수는 최근 무라카미(村上) 가문으로부터 ‘원록 9 병자년 조선주착안 일권지각서(元祿九丙子年朝鮮舟着岸一卷之覺書)’의 원본 사진을 입수하고 이를 공개했다. 문서는 “조선국 강원도에 죽도(竹島.울릉도)와 송도(松島.독도)가 있다”는 안용복(安龍福)의 진술을 담았다. 이어 ‘조선의 8도(朝鮮之八道)’라는 제목 아래 각 도의 이름을 기록하고 ‘강원도’ 아래 ‘이 도(道) 가운데 죽도와 송도가 있다’라고 명기해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사진.점선 안) 이 문서는 1696년(숙종 22년) 5월 일본 어선의 독도 출어에 항의하 기 위해 두 번째로 일본을 방문한 안용복을 일본 지방 관리가 취조해 막부 직할령인 이와미(石見)주에 보고한 내용이다. 문서의 존재는 작년 5월 일본 시마네현의 지방지 산인주오신보(山陰中央新報)의 보도에 의해 알려졌으나 실물사진이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2006년] 노무현 대통령 취임 3주년 맞아 청와대 출입기자들과 산행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은 임기 4년차 시작 다음날인 26일 청와대 출입기자들과 등산 및 점심식사를 함께하면서 3년간의 소회와 향후 2년에 대한 계획을 밝혔다. 또 ‘취임 3주년을 맞아 국민에게 드리는 편지’도 발표했다. 노 대통령은 “결심했다” “회피하지 않기로 했다”는 등의 표현을 쓰며 의욕을 보였다. /조선
[2006년] 정진석 추기경 첫 미사
26일 정오 서울 명동성당 미사. 정진석(鄭鎭奭) 추기경은 앞으로 남북통일, 부의 양극화, 진보·보수 및 세대 간 갈등 등의 문제 해소와 공동선(共同善) 증진에 앞장설 뜻을 밝혔다. 정 추기경이 추기경으로서 가진 첫 강론이다. “추기경의 역할은 하느님 뜻의 전달자로서 교황의 말씀을 각계각층에 잘 전달해 해당 국가의 운영에까지 반영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정진석 추기경 서임 후 교구 신자들과의 첫 만남인 이날 미사에는 정 추기경을 친견하기 위해 평소보다 거의 2배나 많은 2000여명의 신자들이 참석해 성당 대성전은 물론 꼬스트홀(문화관)까지 가득 메웠다. 정 추기경은 신자들에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모범적인 삶을 살 것을 당부하고, “교우 여러분이 국민으로부터 지지받을 때 제 말도 국민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며 사회적 문제에 대한 발언을 확대할 것을 시사했다. 정 추기경은 “서울대교구장과 평양교구장을 겸한 제가 추기경에 임명된 것은 서울과 평양을 잘 어울릴 수 있도록 하라는 뜻”이라고 의미를 강조했다. 그는 “북한의 동포들은 식량도 없고, 종교자유도 없는 어려운 상황”이라며 “하느님이 자비를 베푸셔서 하루속히 북한 주민들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기도하자”고 말했다. 이날 미사 말미에 축하화환이 증정되고 백남용 신부가 작사·작곡한 축가가 연주되자 신자들은 우레 같은 박수를 보냈다. 미사 후 정 추기경이 성당 정문 앞에서 신자들에게 감사인사를 할 때는 수백 명의 신자들이 그를 둘러싸 손을 잡고 사진 촬영하며 37년 만의 추기경 탄생을 축하했다. /조선
[2006년] '황우석논문' 서울대교수들 정부 연구사업서 모두 제외
최근 정부가 추진하는 각종 연구사업에서 황우석(黃禹錫) 서울대 교수의 논문 조작 논란에 연루된 서울대 교수들이 모두 배제됐다. 과학기술부는 문신용·안규리 교수 등 논문조작 논란으로 직위해제된 서울대 교수 5명에 대해 정부 연구사업에 대한 연구 정지 조치를 취했다고 26일 밝혔다. 이 밖에 세포응용연구사업단의 강성천·이병천 교수와 장기복제이식기술개발사업단의 이창규 교수도 연구정지 조치를 받았다. 과기부 관계자는 “해당 교수들은 논문조작 논란에 연루돼 서울대에서 모두 직위해제된 만큼, 정부 연구사업을 수행하기에 부적절하다고 판단해 내린 조치”라고 설명했다. /조선
[2006년] 세계인구 65억명 넘다
세계 인구가 26일을 기해 65억명을 넘어선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 인구통계국의 국제 프로그램센터의 분석에 따르면 세계 인구는 한국 시각 26일 오전 9시16분을 기해 65억명을 넘어섰다고 MSNBC방송이 2006년 2월 25일 보도했다. 현재 초당 4.4명이 태어나고 있으며 현 인구는 1990년에 비해 4배 가량 늘어났다. 통계국은 지난 2004년 3월 보고서를 통해 1999년 6월에 인구 60억명을 넘어섰다고 밝힌 바 있어 7년도 채 되지 않아 5억명이 늘어난 것이다. 또 6년 후인 2012년 10월 18일 오후 4시36분(미국 동부 시각)에 70억명을 넘길 것으로 예상했다.
[2006년]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안현수·진선유 '사상 첫 3관왕'
한국 쇼트트랙의 ‘수퍼 선데이 2’였다. 한국은 안현수(한체대)가 26일(한국시각) 이탈리아 토리노 동계올림픽 남자 5000m 계주 금메달과 500m 동메달을 땄고, 진선유(광문고)도 여자 1000m에서 우승하면서 하루에 금 둘, 동 하나를 수확했다. 금메달 두 개와 은메달 하나를 땄던 19일에 이어 다시 무더기 메달 사냥에 성공했다.
이로써 안현수와 진선유는 동·하계 올림픽을 통틀어 한국의 첫 단일 올림픽 3관왕을 차지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바이애슬론 3관왕인 독일의 미카엘 그라이스와 함께 대회 공동 최다관왕의 영예도 안았다.
한국은 금메달 6개, 은메달 3개, 동메달 2개로, 1994릴레함메르(금4·은1·동1) 대회 이후 동계올림픽 역대 최다 금메달을 거둬들였다. 폐막 하루를 남겨둔 상태에서 종합순위에선 6위를 달리고 있다.
안현수는 이날 팔라벨라 아이스링크에서 열린 5000m 계주 결승에서 송석우(전라북도청)·서호진(경희대)·이호석(경희대)과 호흡을 맞춰 6분43초707의 올림픽 신기록(종전 6분45초455·캐나다)으로 골인, 캐나다(6분43초707)와 미국(6분47초990)을 따돌렸다. 남자 5000m 계주에서 금메달이 나오기는 1992알베르빌 대회 이후 14년만이다. /조선
[2006년] 프랑스, 유대청년 피살에 반유대주의 시끌 정치인·시민 등 3만여명 추모 행진
26일 프랑스 전역에서는 반유대주의 범죄로 희생된 유대인 청년 일랑 알리미(23)를 기리는 가두행진이 열렸다. 무하마드 만평 사태 당시에는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며 이슬람의 분노에 침묵하던 정치인들도 이날 반유대주의 행진에는 앞다투어 참석했다. 파리의 행진에서는 니콜라 사르코지 내무장관, 필립 두스트 블라지 외무장관, 야당인 사회당의 프랑수아 올랑드 제1서기, 리오넬 조스팽 전 총리 등 여야 정치인과 인권단체, 시민 등 3만3000여명이 참가했다. 지난 23일 파리의 유대교 회당에서 열린 알리미 추모식에는 자크 시라크 대통령과 도미니크 드 빌팽 총리도 참석했다. 알리미는 범죄 조직의 미인계(美人計)에 넘어가 납치됐다. 범인들은 가족들에게 45만달러(약 5억5000만원)의 몸값을 요구했다. 알리미는 납치된 지 3주 만인 지난 13일 파리 교외 철길에서 심한 고문에 다 죽어가는 상태로 발견됐고 곧 숨졌다. 처음에는 단순 강도 사건처럼 보였다. 그러나 체포된 10여명의 용의자 중 한 사람이 “알리미가 돈이 많고 뭉쳐 사는 유대인이어서 범행 대상이 됐다”고 말하고, 수사 과정에서 이 범죄조직이 이전에도 유대인 4명을 납치하려 했던 것이 드러나면서, 프랑스 내 반유대주의 비난 여론에 불을 댕겼다. 프랑스 정부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프랑스는 2차대전 당시 유대인들을 독일 나치에 넘겨 대량학살에 협력한 전력(前歷) 탓에, 정부가 반유대주의를 좌시하지 않는다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애쓴다. 니콜라 사르코지 장관은 가두행진에서 “그들은 ‘유대인은 돈이 있다’고 믿었는데, 그게 바로 반유대주의”라고 말했다. 한편 범죄조직의 두목으로 보이는 용의자 유세프 포파나는 지난 23일 코트디부아르의 아비장 외곽에서 체포됐다. 포파나는 돈을 노린 단순 범행이라고 주장하며 반유대주의 혐의는 부인했다고 현지 경찰은 밝혔다. /조선
[2006년] 일본 왕인박사 묘에 백제문 세운다
일본에 천자문과 논어를 전해준 것으로 알려진 백제인 왕인(王仁) 박사를 기리는 기념물 ‘백제문(百濟門)’이 일본에 세워진다. 사단법인 한일문화친선협회는 창립 30주년을 맞아 일본 오사카부(大阪府) 히라가타시(枚方市)에 소재하는 왕인 박사 묘역(王仁墓域) 내에 백제문을 건립한다고 26일 밝혔다. 한일문화친선협회 윤재명(尹在明.74) 회장은 “지난 2004년부터 추진해 온 백제문 건립 계획이 2005년 1월 오사카부 문화재위원회 심사를 통과함으로써, 한국 건축양식으로 된 백제문 건립허가를 받게 됐다”고 말했다. 기와를 얹은 전면 3칸 단층 양식으로 지어질 백제문은 8월 완공에 앞서 오는 3월 5일 일본 오사카 왕인묘역에서 기공식을 갖는다. 총 건립비 약 2억원은 왕인 박사가 태어난 전라남도(5000만원)와 전남 영암군(3000만원), 한일문화친선협회(5000만원), 이 협회 일본측 단체인 일한문화친선협회(5000만원), 그 외 찬조금(2000만원)으로 충당된다. 일본 문화청은 “외국이 돈을 기부(寄附)해 사적을 고치거나 다시 지은 적은 처음”이라고 전했다. /조선
[2003년] 아내와 딸을 살해한 혐의로 구속된 치과의사 이도행씨 무죄확정
1995년 6월 12일 오전 8시50분쯤 서울 은평구 불광동 M아파트 708호 문틈에서 흰 연기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이를 목격한 경비원의 신고로 출동한 소방관들은 오전 9시40분쯤 치과의사 최수희(여,당시 31세)씨와 딸(당시 1세)의 시신을 발견했다.
두 모녀는 목에 졸린 듯한 자국이 있는 상태로 물이 담긴 욕조에 떠 있었다. 불은 안방 장롱 속 옷가지들에서 처음 발화한 것으로 추정됐다. 최씨의 가방에 있던 현금과 수표 51만8,000원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경찰은 최씨의 남편 이도행씨를 범인으로 지목했지만 지문이나 범행도구 같은 직접적인 증거는 찾아내지 못했다. 검· 경은 이씨를 수차례 소환· 조사하고 거짓말탐지기도 동원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사인을 밝히기 위해 부검을 실시했고, 내노라 하는 국내 법의학 교수들도 나섰다. 혈액형 감정은 물론, 모의 화재실험까지 실시했다.
검찰은 사건 발생 3개월 만인 같은 해 9월 2일 이씨가 가정 불화 등으로 인해 부인과 딸을 살해한 것으로 보고 그를 구속했고 그후 이 사건은 이씨측과 검찰 간의 기나긴 법정 싸움으로 이어졌다. 이 사건은 1996년 2월 1심에서는 유죄와 함께 사형이 선고됐으나, 같은 해 6월 항소심에서는 무죄로 뒤집혔다. 1998년 11월 대법원은 유죄 취지로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지만, 2001년 2월 서울고법은 또다시 무죄를 선고했다. 직접증거가 없는 상태에서 간접증거만으로 유죄를 인정할 수 있느냐를 놓고 하급심과 대법원을 오간 ‘핑퐁 판결’이었다. 이 과정에서 이씨는 한 번의 사형 선고, 세 번의 사형 구형을 받았다. 이씨처럼 부인을 살해한 혐의를 받았던 미국의 유명 미식축구 선수 OJ 심슨처럼 최종 결론은 무죄였다.
‘OJ심슨사건’으로 불려온 이 사건에 대해 2003년 2월 26일 재판부는 "유죄를 인정할 직접증거가 없고, 가장 중요한 간접증거인 사망시각 역시 분명치 않다"며 ‘유죄의 확신이 없으면 피고인에게 유리하도록’이라는 형사법의 기본 명제를 재확인했다. 평화로운 한 가정의 가장에서 가족을 죽인 살인범으로 1심법원에서 사형선고까지 8년동안 말못할 고통을 받았던 한 사람의 인생이 또다시 바뀌는 순간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의사· 신부· 연예인 등 80∼90여명이 참가한 ‘이도행을 위한 모임’까지 만들어졌다. /조선
[2001년] 남북 이산가족 200명 서울-평양에서 50년 만에 혈육 상봉(3차 상봉)
제3차 이산가족 상봉이 2001년 2월 26일부터 2박3일간 서울과 평양에서 이뤄졌다. 서울 센트럴시티에선 100명의 북측 이산가족들이 500여명의 남쪽 가족을 만났으며, 이어 평양 고려호텔에선 남한 이산가족 100명이 북쪽 가족들과 눈물어린 포옹을 했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1969년 12월 대한항공 여객기 승무원으로 근무하다 납북된 딸 성경희씨를 어머니 김삼례씨가 32년 만에 만나 회한의 정을 나눈 순간이었다. 또한 6.25때 포로가 돼 북한에 살고 있던 국군 포로 2명도 평양에서 남한측의 동생들을 만나 눈물의 50년을 회상했다. 서울에선 고 정지용 시인의 둘째 아들이 남쪽의 형을 만나 얼싸안고 굵은 눈물을 흘렸다. /조선
[1999년] 패티김, 가수 데뷔 40주년 기념 대형콘서트
가수 데뷔 40주년을 맞은 패티김이 1999년 2월 26일부터 27일까지 이틀간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가요인생 40주년-사랑은 영원히’라는 타이틀로 대형콘서트를 열었다. 국내 대중음악인이 데뷔 40주년을 기해 이처럼 대대적인 축하공연을 열기는 패티김이 처음이다.
1959년 데뷔한 패티김은 광복 후 한국가수로선 처음 일본에 진출했고, 1963년엔 미국 라스베가스로 건너가 자니 카슨 ‘투나잇 쇼’에 8회나 출연하는 인기를 누렸다. 또 패티김은 1960~70년대 가요사에서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와 더불어 양대산맥으로 우뚝섰던 대형가수였다. 길옥윤 박춘석씨와 손잡고 앨범 70여장, 노래는 600여곡을 발표, 빅히트곡만 ‘모정’ ‘초우’ ‘못잊어’ ‘이별’ ‘9월의 노래’ ‘빛과 그림자’를 비롯한 40여곡이 있다.
쪽져 넘겨 묶은 머리, 건강하고 여유로운 미소. 언제나처럼 한구석 흐트러짐 없고 자신감 넘쳐 보이는 패티김은 자기 관리에 철저하기로 유명하다. 이날 반주는 김정택 SBS악단장이 지휘하는 40인조 오케스트라가 반주했고, 평소 가깝게 지내는 후배 조영남과 인순이가 축하 게스트로 출현, 음악 인생 40주년을 축하했다. /조선
[1993년] 뉴욕 세계무역센터 폭발
1993년 오늘 낮 12시 18분!
110층짜리 뉴욕 세계무역센터 지하주차장에서 폭발물이 터졌다.
이 폭발로 주차장과 연결된 지하철역의 천장이 무너지면서 열차를 기다리던 시민 수십명을 덮쳤다.
또 건물 지하층 여러 곳에서 불과 연기가 퍼지면서 아비규환을 빚었다.
전기가 나가 엘리베이터 24대가 멈춰서면서 입주자들이 비상계단을 통해 빠져나가는데만 하루가 걸렸다.
이 사고로 6명이 숨지고 1,000여 명이 다쳤다.
범인 6명은 체포돼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이 폭발사고는 시작에 불과했다.
8년 뒤인 2001년 9월 11일 테러범들에게 납치된 항공기 2대가 이 건물과 충돌하면서 미국에서 두 번째로 높은 세계무역센터 건물은 붕괴되어 사라지고 3,000여 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됐다. /YTN
[1963년] 민주공화당 창당
← 1963년 2월 26일 서울 시민회관에서 민주공화당 창당대회가 열렸다.
민주공화당이 1963년 2월 26일 서울시민회관에서 창당대회를 열고 당총재에 정구영씨, 당의장에 김창열씨를 각각 선출했다. 두차례의 혁명을 이어 받아 새 노력의 양심과 협동으로 올바른 가치관과 사회의식을 지닌 민주주의적 지도세력을 이룩하겠다"고 내세워 정치활동 후 57일 만에 제일먼저 창당을 선언했다.
박정희 의장의 민정불참과 김종필씨의 사퇴로 불안정한 당내사정을 그대로 안은 채 열린 이날 대회는 1,896명의 대의원 중 1,319명의 참석으로 개회했다.
김동성, 김용우, 김성진씨 등 임시의장단의 사회로 진행된 대회는 창당선언문을 채택한 다음 당체제를 2원제로 하고 사무국 권한이 강력한 전문 62조의 당헌을 약간의 혼란 끝에 통과시키고 또 6개항의 총령과 7개항의 기본정책을 각각 채택했다. 8월 31일 박정희 최고회의의장이 입당하여 총재직을 맡아 권위주의적 지도체제아래 계파갈등을 억누르고 조직, 선전 등을 전문화, 당료화시켜 강력한 대중정당체제를 지향해 나갔다. 이후 민주 공화당은 경제개발과 안보이데올로기를 내세워 1인독재체제를 구축했다. /조선
[1936년] 일본 ‘2ㆍ26 사건’ 발발
←2.26 쿠데타 당시 국회의사당을 지나가고 있는 반란군 부대.
1936년 2월 26일, 22명의 황도파(皇道派) 청년장교들이 1,400여명의 사병들을 이끌고 ‘국가의 전면적 개조’와 ‘군사정부 수립’을 요구하며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른바 ‘2ㆍ26 사건’이었다.
장교들은 내각을 습격, 다카하시 대장상과 사이토 내무대신, 와타나베 교육총감 등을 살해하고 수상관저와 의사당, 육군성을 포위했다. 27일에는 도쿄에 계엄령이 시행됐고, 28일에는 이들에게 ‘원대복귀’ 명령이 내려졌다. 29일에는 2만4천여명의 군병력이 이들을 포위, 선무방송과 비라살포를 시작했다.
자신들이 천황에 의해 반란군으로 단정됐다는 소식에 동요하기 시작한 사병들은 대부분 원대복귀했으나 장교단 중 나카야마 대위는 책임을 지고 권총으로 자살했다. 다른 청년장교들은 무장해제된 후 체포돼 법정에서 15명이 교수형에 처해졌다.
‘2.26사건’은 육군 내부에 존재해 온 두 개의 파벌이 원인으로 작용했다. 전쟁준비를 위한 국내체제 확립과 고도의 국방국가실현을 목표로 하는 ‘통제파’와 관념적 행동방식에 의한 국가 개조를 계획하는 ‘황도파’가 이들이다. 통제파가 주로 참모본부, 육군성 등 중앙의 참모장교로 이루어졌다면, 황도파는 위관급의 청년장교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1933년, 천황은 국가통치권의 주체가 아니라 국가에 속하는 최고기관으로 통치권을 행사할 뿐이라는 ‘천황기관설’ 논쟁이 발단이 되어, 통제파가 황도파를 요직에서 내쫓으려 하자 두 파의 싸움이 격화되어 이날의 ‘2.26 사건’이 일어나게 됐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군부 실권을 장악한 통제파는 일본을 파시즘의 길로 내몰았다./조선
[1919년] 미국의 그랜드캐년, 국립공원(면적 2,600km2)으로 지정됨
그랜드 캐년의 자연보호는 역대 미국 대통령 중 윌리엄 해리슨(William Harrison)과 디오도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그리고 우드로우 윌슨(Woodrow Wilson)에 의해 주도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랜드 캐년의 자연보호 과정은 다시 언급하기로 한다. 1919년 2월26일 민족 자결주의를 외쳐 유명해진 미 28대 우드로우 윌슨 대통령에 의해 125만 에이커에 달하는 이 지역 일대가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미연방 정부의 관리와 보호 속에 있게 되었다.
[1903년] 이탈리아 화학자 나타(Natta, Giulio, 1903~1979) 출생
임페리아 출생. 1924년 밀라노공과대학 화공과를 졸업하고, 로마대학 등을 거쳐 1938년 밀라노공과대학 교수가 되었다. X선에 의한 결정구조 연구, 합성고분자의 연구에 종사하고, 폴리프로필렌 등의 합성섬유, 에틸렌프로필렌 등의 합성고무의 제조법을 발명하였다. 또한 고분자의 입체규칙성의 개념을 확립하여, 규칙성이 없는 것은 어택틱중합체, 규칙성이 있는 것은 신디오택틱중합체와 아이소택틱중합체로 분류하여 입체구조의 차이에 의한 성질의 구별을 명확히 하였다. 1963년에는 독일의 K.치글러와 함께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1890년] 이형우[李亨雨] (한국 독립운동가) 출생
1890. 2. 26 충북 제천~1958. 6. 10.
1908년 만주 북간도로 이주했으며, 1918년 왕칭 현[汪淸縣]에서 광복단에 입단하여 청년계몽운동 및 한인 교포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시켰다. 일제의 간도출병으로 광복단원과 함께 노령으로 일단 이동했다가, 그곳에서 총기·탄약 등을 구입하여 다시 왕칭 현으로 가서 국내진입작전을 전개했다. 50여 명의 대원을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오봉산에 잠입하여 경찰서를 습격하는 등 많은 활약을 하다가 1922년 강원도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징역 3년 6개월의 언도를 받았으나 감형으로 1925년 7월 28일 출옥했다. 그뒤 3년 동안 각처를 전전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원산에서 다시 체포되어 징역 7년을 언도받아 함흥형무소에서 복역했다.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1876년] 부산 개항
1800년대의 부산은 어부들의 흥겨운 가락 속에 저무는 한가로운 어촌이었다. 항내에는 배의 항해가 어려울 만큼 해조류가 무성해 어장으로서 알맞은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일부 수공업이나 농업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을 빼곤 대부분 어민이었다.
개항직전 부산포(釜山浦)에는 1백30여곳에 어장(漁場, 일종의 정치망)이 설치 돼 2천여 어민이 여기에 종사했다. 이 무렵 이미 일본인 80여명이 살고 있었다. 세종(世宗) 5년(1423)에 잦은 왜구의 침범을 막기 위해 이들에게 제한된 지역에서의 장사가 허용되어 여리왜선(與利倭船)에 부산포(釜山浦) 3포(浦)를 개항했던 것. 이에 따라 지금의 자성대(子城臺)에 왜관(倭館)이 설치되고 그 뒤 두모포(豆毛浦)(지금의 고관)으로 옮겼다. 왜관은 숙종(肅宗)때(1678년) 초량항(草梁項)(용두산(龍頭山)밑)으로 다시 옮겨 쓸모없는 용두산(龍頭山)일대 11만평에 자리잡았다.
부산(釜山)토박이들이 지금도 광복동(光復洞)이나 남포동(南浦洞)을 (관) (왜관(倭館)의 뜻)이라 부르는 연유는 여기에 있다. 그러나 개항과 더불어 사정은 급변했다. 부산은 일본(日本)세력의 급팽창으로 판도가 달라졌다.
고종이 등극하자 그들은 침략은 가일층 노골화되어 북으로 로서아가 국경지대에 나타났고 1866년(고종 3년)에는 미국상선 샤만호의 대동강 침입사건이 일어난 것을 시초로 1866년(고종3년)에는 미국 상선의 부산진사·전양에의 표착, 1870년(고종 7년)독일함대 헬타(THA)호의 부산항침범 등 외국선박·군함의 침범이 잇따랐다 이에 집정자 대원군은 군비를 강화, 무력으로서 그들 침략자를 격퇴하는 결의를 천명하였으니 그것이 1871년 즉 신미년의 미국 함대의 침입후에 전국 각지에 세워졌던 척화비는 현재 용두산공원에 서 있어 일본인등 숱한 관광객의 구경거리가 되고 있다.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 다음해인 1877년 1월 부산포조계조약(釜山浦租界條約)이 체결됐다. 이 조약으로 초량(草粱)왜관은 그대로 치외법권적인 일본전용거유지(日本專用居留地;조계(租界))로 개방된 것 따라서 용두산을 중심으로 부평동(富平洞)·대신동(大新洞)·부민동(富民洞) 방면으로 발전돼갔다. 또 영도(影島)에도 조차지가 생겨 주위의 토지를 차지하면서 초량 방면으로 그 세력을 뻗어갔다.
당시 서양(西洋) 열강의 군함에 의한 침범보다 이곳 부산의 관민을 위협한 것은 일본의 명치정부(明治政府)의 무력(武力)을 배경으로 한 개국(開國)강요와 이에 편승, 부산에 거류(居留)하였던 일본인의 횡포(橫暴)와 만행이었다. 이때 동래부사(정현덕(鄭顯德)) 그는 대원군(大院君)의 심복으로 대원군의 쇄국책(鎖國政策) 이른 바 위정척사(偉正斥邪)의 정치노선을 강력히 밀고 나갔다. 그는 일본(日本)의 위협에 대비하여 군비를 확충, 동래성(東萊城)을 수축(修築)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아래 계속적인 일본의 외교교섭이 좌절되자 일본(日本)정치인 사이에는 정한론(征韓論)이 대두되는 한편 일본인의 부산에 있어서의 만행이 그칠 사이 없이 야기되었다.
1872년(高宗 9년) 5월27일에는 부산주재 일본 의무성관리와 왜관(倭館)의 일인들이 모의, 외교 교섭문제를 타개한다는 명목으로 왜관(倭館)의 일인 50여명이 무장하여 왜관 지역을 벗어나 보행이 금지되어있는 초량(草梁)길을 돌진하고 두모포영(豆毛蒲營, 수정(水晶)동). 개운포영(開雲浦營, 좌천(左川)동)을 차례로 돌파, 끝내는 동래성(東萊城)에 난입하였다. 또한 같은 해 9월10일에는 왜관 사무 정리를 구실로 춘일(春日), 유공(有功)의 두 일본군함이 부산항에 침입하였다. 기실 군반(軍盤)의 주목적은 부산근해(釜山近海)를 측량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사건에 부산진첨사(釜山鎭僉事)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 두모포· 개운포· 포이포만호(包伊浦萬戶) 등을 비상소집, 군민(軍民)·수병(水兵)들로 하여금 야간경비를 강화하였으며 9월16일에는 철시(撤市)하고 그들에게 물자공급을 거부하면서 철수를 요구하였다. 일인(日人)의 불법적인 만행에 대해 우리 측은 그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1873년(高宗 10년)에는 부사(浮莎)의 명령으로 왜관(倭館)경역에 있는 선창(船艙)조사를 위해 입관(入館)을 요구하는 한편 총병(銃兵) 100명을 해안에 배치, 수군(水軍)으로 해안의 경비를 강화케 하였다.
그리고 부산일원의 군대도 훈련하고 군사적시위(軍事的示威)도 전개하였다. 3월20일에는 동래부(東萊俯)에서 군사연습이 벌어졌으며 4월15일에는 개운포에서 초량 앞바다에 이르는 해안을 중심으로 동래·부산지역의 수륙대연무(水陸大鍊武)가 거행되었다. 여기에는 동래육군(東萊陸軍) 부산 각진영(各鎭營)의 수군(水軍)과 승병(僧兵)까지 동원되어 해안에 봉화(烽火)를 붙이고 대포를 발포하면서 일대 군사연습을 단행하였다.
그리고 이어 5월13일에는 전일의 연습보다 규모가 큰 수륙(水陸)의 대연습이 펼쳐졌다.
1873년(高宗 10년)말에 대외정책에 강경책을 쓰던 대원군의 하야라는 정국의 일대변화가 있었다. 이에 따라 민(閔)씨정권이 수립되면서 동래부사 정현덕은 해임되고 박제관(朴濟寬)이 임명되었다.
이러한 정국(政局)의 변동·혼란속에서 일본측은 무력(武力)을 배경으로 지금까지 해결하지 못하던 외교통상(外交通商)관계를 한꺼번에 타결코자 하였다. 부산에 주재하던 일본 외교관리의 요청으로 부산에 입항한 군함 운양호(雲揚號)·제2정묘함(丁卯艦)은 1875년(高宗 12년) 6월 14일 연습이라 일컬어 시위를 감행함으로써 부산지방의 관민(官民)을 전율케 하고 개항(開港)교섭을 측면에서 후원하였다.
이해 9월에 그 유명한 강화도(江華島)에서의 운양호사건에 이어 10월에는 거류민의 보호를 구실로 다시 군함(軍艦) 맹춘호(孟春號)와 제이정묘함(第二丁卯艦)을 부산에 입항케하여 예포라는 이름 밑에 함포 사격을 실시, 주민들이 개전(開戰)이라고 오인할 정도로 공포 속에 몰아넣었다.
동래부사 홍유창(洪裕昌)은 이에 엄중히 항의하였으나 그들의 행패는 그치지 않았다. 12월13일(양력)에는 일본 해병 58명이 불법적으로 왜관을 나와 부산진(釜山鎭)으로 향하여 우리 군민(軍民)과 충돌, 일본 해병들의 야만적인 발포와 총검(銃劍)돌격으로 한국인 중경상자 12명을 내게 했다.
이와 같은 일련의 도발에 경상감사(慶尙監司)는 부사(府使)나, 각진장(各鎭將)의 처벌을 요구하였을 뿐 정부는 이렇다할 대응책(對應策)을 세우지 못하였으며 결국 운양호(蕓揚號) 사건을 계기로 1876년(고종 13년) 강화도(江華島) 조약이 체결되고 이곳 부산은 그들에게 개항되었던 것이다.
[1864년] 에버셰드 (영국 천문학자) [Evershed, John] 출생
1864. 2. 26 영국 서리 곰섈~1956. 11. 17 서리 유허스트.
1909년 태양흑점(太陽黑點)의 중심에서 주변으로 흐르는 가스의 수평운동을 발견했다. 이 현상은 때때로 에버셰드 효과라고 한다. 1906년 인도의 코다이카날 및 마드라스 천문대의 부대장이 되었으며, 나중에 대장이 되었다. 1915년 카슈미르로 원정하는 동안 무거운 천체(이 경우에는 태양)에서 방출되는 빛의 파장은 국소중력장(局所重力場)의 세기에 비례하는 양만큼 증가할 것이라는 아인슈타인의 예측을 뒷받침하는 측정을 처음으로 했다. 1923년 은퇴한 뒤 영국에 돌아와 1925년 유허스트에 자신의 태양관측천문대를 세웠다. 그는 개기일식을 관측하기 위해 노르웨이(1896)·인도(1898)·알제리(1900)·스페인(1905)·오스트레일리아(1922)·요크셔(1927) 등 6차례나 원정대에 참가했다.
[1861년] 불가리아 왕 페르디난드(Ferdinand, 1861~1948) 출생
1861. 2. 26 빈 ~ 1948. 9. 10 독일 코부르크.
정식 이름은 Ferdinand Karl Leopold Maria.
페르디난드는 엽관제도를 활용해 불가리아 내정을 굳건히 다졌다. 1908년 10월 5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합병 전야 기회를 이용해 오스만 제국으로부터의 불가리아 완전 독립을 선언했으며 왕, 즉 차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제국주의적 야심도 품고 있었던 그는 발칸 동맹의 형성(1912)을 주도했다. 불가리아·세르비아·그리스·몬테네그로(비공식적으로 참여)로 구성된 이 동맹은 유럽 지역에 속한 투르크의 분할을 추구했다(제1차 발칸 전쟁, 1912. 10~1913. 5). 그의 영토적 야심은 승리를 거둔 동맹국들간에 점령된 투르크 영토의 배분 문제를 놓고 의견일치를 보지 못해 좌절되었고, 세르비아와 그리스로 하여금 불가리아에 대항해 동맹을 결성하도록 만들었다. 투르크·루마니아도 참가하게 된 이 동맹에서 패한 불가리아는(제2차 발칸 전쟁, 1913. 6~7) 발칸 인접 국가들과 적대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이에 분노한 페르디난드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불가리아는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편에 서서 참여한다는(1915~18) 결정을 내렸다. 불가리아의 군사적 패배(1918)로, 그는 아들 보리스 3세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1918. 10. 4). 그뒤 코부르크에서 여생을 보냈다.
[1852년] 켈로그 (미국 의사) [Kellogg, John Harvey] 출생
1852. 2. 26 미국 미시간 타이론~1943. 12. 14 미시간 배틀크리크.
미국의 의사, 건강식품 개척자.
건조된 조반용 곡물가공식품을 개발했고, 곡물식품을 얇은 조각 모양으로 만드는 산업을 개척했다. 제7일안식일예수재림교도이자 채식주의자였던 켈로그는 1875년 뉴욕 시의 벨뷰의과대학을 졸업하고, 1876년 제7일안식일예수재림교 건강개선연구소를 지도·관리하게 되었다. 이 연구소는 나중에 배틀크리크 요양소가 되었고, 1959년 배틀크리크 건강 센터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는 환자의 식단을 다양화하기 위해 그래노즈와 콘플레이크로 불리던 얇은 조각의 밀을 비롯하여 수많은 견과식·야채식을 개발했다. 콘플레이크 자체는 새로운 것이 아니었지만 조반용 곡물가공식품으로 쓰이게 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의 동생인 W.K. 켈로그는 자신의 곡물가공식품 회사를 차렸으며, 요양소의 환자였던 C.W.포스트도 곡물가공식품 회사를 차려 유명해졌다. 켈로그는 배틀크리크대학의 창립자인 동시에 초대 총장(1923~26)이 되었으며, 1931년에는 플로리다 주의 마이애미스프링스에 마이애미배틀크리크 요양소를 건립했다. 그밖에도 많은 의학서적을 저술했다.
[1848년] 프랑스 임시정부, 제2공화국 선포
1848년 2월 26일 프랑스 임시정부가 제2공화국을 선포했다. 1830년 앙시앵 레짐(구체제라고도 함. 프랑스 혁명 때 타도의 대상이었던 이전의 체제)을 부활시키자는 왕당파와 혁명을 더욱 강화하려는 세력과의 갈등 속에 샤를 10세는 의회 해산, 선거권 제한 등을 내용으로 하는 7월 칙령을 공포했다. 국민들은 이러한 억압적인 조치에 반대하며 시가전을 벌였고, 결국 의회는 오를레앙 공 루이 필리프를 새 입헌군주로 내세웠다. 그러나 루이 필리프의 7월 왕정이 부르주아 중심으로 사회를 개편하자 노동자들과 공화주의자들은 자유주의적인 개혁운동을 전개했다. 파리 집회를 계기로 경찰과 충돌하면서 개혁 혁명은 급속도로 번져나갔다. 2월 24일 혁명이 일어난 지 2일 만에 7월 왕정은 붕괴해 루이 필리프는 퇴위하고 라마르틴을 수반으로 하는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1815년] 나폴레옹, 엘바섬 탈출
나폴레옹(Napoleon I, 1769~1821)은 1812년 러시아원정에 실패하면서 운세도 기울어져, 1814년 3월 영국 ·러시아 ·프러시아 ·오스트리아군에 의해 파리를 점령당하고, 그는 엘바섬(Elba I.)으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1815년 2월 이 섬을 탈출하여 3월 다시 파리로 들어가 황제에 즉위하였으나, 6월 워털루전투에서 패하여 영국에 항복하였다. 그 뒤 대서양의 세인트 헬레나섬(Saint Helena I.)에 유배, 그곳에서 죽었다.
[1802년] 위고 Victor(-Marie) Hugo 출생
← 위고, Nadar (Gaspard-Felix Tournachon)가 찍은 사진
1885년 5월 22일 죽음
위고는 프랑스 낭만파 작가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로 꼽히는 극작가·소설가이며 시인이다. 만년에는 저명한 정치가이자 정치적 저술가로 활동했다. 그는 <크롬웰 Cromwell>(1827)·<에르나니 Hernani>(1829) 등을 발표하면서 낭만주의의 기수로 떠올랐는데, 1931년에는 <노트르담의 꼽추 Notre Dame de Paris>를 발표해 큰 명성을 얻었다. 1840년대에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자 귀족원 의원으로 부와 명성을 누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작가로서의 진정한 위대성에 도달한 것은 연이은 가정적 불행과 정치적 시련을 통해서였다. 1851년 프랑스 제2제정 수립에 저항하던 위고는 벨기에의 브뤼셀로 피신했고, 이후 영국 해협의 저지·건지 섬으로 옮겨다니며 20년간의 망명 생활을 했다. 불후의 명작인 <레 미제라블 Les Misérables>(1862)을 위시해 그의 심오한 작품들은 대부분 이 시기에 씌어졌다. 1870년 제3공화정이 선포되자 위고는 귀국했고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이후로 그는 진정한 민주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의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졌고, 유해는 팡테옹에 안치되었다.
"세상의 모든 군대보다도 강한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제 때를 만난 사상이다. "- 빅토르 위고
[1801년] 한국 최초의 천주교신자 이승훈 사형
← 조선 천주교 사상 최초의 영세자이자 순교자인 이승훈 선생.
1801년 2월26일, 이승훈 정약종 등 초창기 천주교 지도자 6명이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서소문 밖 네거리(지금의 서소문공원)에서 참수됐다.
청나라에서 한국인 최초로 영세(1784년)를 받고 귀국, 최초의 천주교회를 설립(1785년)하는 데 기여한 순교자 이승훈은 태어난 곳도 반석골(지금의 중구 중림동)이었고 세례명도 반석(베드로)이었다. 탄압이 거세질 때마다 배교(背敎)로 위험을 피해갔지만 결국 그에게 주어진 운명은 한국 천주교의 반석이 되는 것이었다. 아들 신규와 손자 재의가 1866년에, 증손 연구와 균구가 1871년에 순교해 4대에 걸친 순교자 집안이 됐다.
천주교가 전래된 이후 첫 대규모 박해로 기록된 신유박해는 천주신앙을 중심으로 신서파(信西派)와 공서파(攻西派)가 대립하던 민감한 시기에 정약종이 천주교 서적과 성물 등을 옮기다 발각된 것이 발단이 됐지만, 남인 시파의 기세를 꺾으려는 노론 벽파의 정치적 공세 성격도 짙었다. 신서파에 온화한 정책을 펴오던 정조가 1800년에 죽고 벽파에 치우친 영조비 정순왕후가 어린 순조의 수렴청정을 막 시작한 것도 박해를 부추겼다. 300여명이나 순교하면서 천주교는 큰 타격을 입었지만, 살아남은 신도들이 산간벽지로 숨어들어 오히려 천주신앙의 전국적인 확산을 촉진시켰다.
[1801년] 조선후기 학자이자 천주교 순교자인 정약종 사망
←정약용의 셋째 형이자 조선 최초의 천주교 회장이었던 선암 정약종 선생.
조선 후기 천주교 지도자이면서 한국 천주교 첫 교리서인 `주교요지(主敎要旨)`를 저술한 선암 정약종(세례명 아우구스티노) 선생이 1801년 2월 26일 순교했다. 그는 정약용의 셋째 형으로 당대에 천주교 교리지식이 가장 해박했던 가톨릭 신학자이자 조선 최초의 천주교 회장으로서 우리나라 천주교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1760년 남인의 명문가에서 태어난 정약종은 27세 때인 1786년 3월 둘째 형 약전으로부터 천주교에 대해 듣고, 대부인 권일신에게 교리를 배웠고,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1795년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들어와 구성한 평신도 단체 명도회(明道會)의 회장을 맡아 교회에 헌신했다.
1801년 1월 19일 정약종의 `책롱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임대인이 천주교 서적과 성물, 북경 주교의 서한 및 주문모 신부의 서한, 정약종 일기 등이 들어 있는 정약종의 책롱을 황사영의 집으로 옮기려다 발각된 사건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2월 9일 이가환, 정약용, 이승훈, 홍낙민이 검거되고, 11일에 권철신과 함께 정약종이 체포돼 의금부에 투옥됐다. 정약종은 이날 국가가 금하는 사교(邪敎)를 믿고, 국왕에 대한 불경과 국가에 대한 모반죄로 사형선고를 받고, 당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받고 42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문화관광부는 그를 `2002년 1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했다.
그밖에
2007년 부동산 실거래 첫 집계
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5000m 금메달 캐나다 클라라 휴즈
2006년 친일파 땅소송 모두 중단
2001년 고 박종철씨, 서울대에서 명예 졸업장 수여
1996년 전두환 전대통령 비자금 첫 공판
1996년 일본, 여성 결혼한 후 성(姓) 유지 가능. 결혼연령 18세로 조정
1996년 제46회 베를린영화제, 황금곰상에 리안감독 ‘감각과 분별’ 수상
1995년 김영식(9세) 킬리만자로 정복, 세계 최연소 등정
1992년 보건복지부, 태아 성감별 집중단속
1980년 서울지하철2호선중 왕십리~문래동 강북구간 건설공사 착공
1969년 독일 철학자 야스퍼스 사망
1967년 자전거 개조한 비행기 실험
1967년 KBS TV, 아침방송 실시
1960년 미국 해군기와 브라질 여객기 리우데자네이루 상공서 충돌
1954년 서독하원, 재군비허용 개헌안 가결
1952년 영국, 원폭소유 확인
1949년 유엔안보리 심사위원회, 한국유엔가입자격 가결
1948년 유엔소총회, 남한지역 총선거안 가결
1916년 독일-프랑스, 베르당 전투 시작
1908년 장지연,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해조신문(海朝新聞) 창간
1895년 교육강령조칙 영포
1876년 한일수호통상조약(강화도조약) 조인
1869년 미국 헌법개정으로 흑인에게 투표권 부여
1786년 맴돌이 전류 현상을 발견한 프랑스 물리학자 도미니크 아라고 출생
1577년 스웨덴 왕 에리크14세 사망
1564년 영국 극작가 말로우 출생
1426년 우리나라 최초의 소방관청 ‘금화(禁火)도감’ 설치
1154년 노르만계 시칠리아 왕국의 왕 루지에로 2세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