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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3684
11월24일[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연중 제33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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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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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0CIfJeSmFf4
[서울대교구 나종진 스테파노 신부님 집전(사목국 노인사목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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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가 비록 이 세상에서는 더 이상 보지 못할지라도…>
오늘은 베트남의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의 기념일입니다. 베트남 가톨릭교회는 여러모로 특별합니다.
1975년 베트남이 공산화 이후, 가톨릭교회가 큰 타격을 입었지만, 경제 개방과 더불어 강경했던 공산 정권의 교회에 대한 규제가 느슨해진 틈을 타, 교세가 가파르게 성장해왔습니다.
현재 베트남의 가톨릭 신자율은 8퍼센트를 넘어선 것으로 추정됩니다. 베트남의 인구가 올해로 1억 명을 돌파했으니, 가톨릭 신자 수는 800만 명을 넘어섰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직도 주교 임명이나 사제서품 대상자 숫자를 정부가 관여하거나 통제하고 있는 등 제약이 많지만, 어려움 속에서도 점진적인 성장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중국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괄목할만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베트남 가톨릭교회 성장의 비결은 무엇일까요? 공산 정권이 들어선 다음 13년간 수감 생활을 거친 후 바티칸으로 추방되셨지만, 그 혹독한 여건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베트남 가톨릭 신자들을 영적으로 동반하셨던 반투안 추기경님 같은 걸출한 사목자의 역할도 크리라고 확신합니다.
반 투안 추기경님께서 독방에 투옥되고 난 직후의 일이었습니다. 경제 상태가 극도로 열악했던 당시, 공산 정권은 재소자들의 식량이나 생필품 지급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재소자들은 가족이나 친지들의 경제적 지원을 받아야 했습니다.
다른 재소자들은 가족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대부분 식품이나 담요, 생필품을 보내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런데 반 투안 추기경님은 ‘위장약으로 사용할 포도주 한 병’을 청했답니다. 교우들은 즉시 반 투안 추기경님의 의중을 알아차렸습니다.
포도주 병 겉에다가 다음과 같은 메모를 붙였습니다. ‘위염 치료를 위한 약품.’ 그리고 옷가지 속에다가는 제병을 잘 숨겨서 소포를 보냈습니다.
소포를 받아든 반 투안 추기경님은 세상을 다 얻은 듯 기뻤습니다. 그 순간의 기쁨을 이렇게 회상하셨습니다. “그동안 교도소 안에서 제가 지니고 있었던 가장 큰 두려움은 언제 다시 미사를 봉헌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는데, 포도주와 제병을 받았을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 손바닥에 포도주 세 방울과 물 한 방울을 떨어뜨려서 매일 미사를 드렸습니다. 바로 그때 제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사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파블로 도밍게스, 마지막 피정, 성바오로)
그뿐만 아니라 베트남 가톨릭교회는 오랜 박해의 세월 속에서 탄생한 무수한 순교자들의 후광을 업고 있습니다. 1533년 최초로 그리스도교가 전파된 이래, 1625~1886년까지 총 53차례의 박해가 계속되었습니다. 그 와중에 13만 명 가량의 선교사들과 가톨릭 신자들이 순교의 영예를 얻었습니다.
그 가운데 총 117분 명의 순교자들이 1988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에 의해 시성되었습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격인 안드레아 둥락 사제를 필두로 26명의 베트남 사제들, 59명의 평신도들, 8명의 외국인 주교들, 그리고 13명의 외국인 사제들이 시성의 영광을 획득했습니다.
박해가 한창이던 1843년 목숨을 무릅쓰고 전교에 열중하던 바울로 레바오틴 신부님께서 모국에 있는 신학생들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그들이 얼마나 영웅적인 순교자들이었는지를 생생히 파악할 수 있습니다.
“제가 지금 갇혀 있는 감옥은 영원한 지옥에 비길 만하니, 족쇄, 쇠사슬, 포승 등 온갖 종류의 잔인한 형벌과 더불어 미움, 복수, 비방, 폭언, 불평, 악행, 거짓 맹세, 저주와 궁핍과 근심 등이 가득합니다.
그러나 옛적에 세 소년을 불가마에서 구원하신 하느님께서 언제나 함께 계시면서 나를 이 고난에서 구하시고, 이 고난을 달게 받게 하여 주셨습니다. 그분의 자비는 영원하십니다.
우리의 스승이신 그분은 그 무거운 십자가를 전적으로 지시고, 저에게는 겨우 한쪽 끝부분만 지게 하셨습니다. 그분은 제 싸움을 구경만 하시지 않고, 친히 싸우시고 승리하시며 모든 번민을 이기십니다. 그 까닭으로 그분은 머리에 승리의 관을 쓰셨으며, 그분의 지체들은 그 영광에 참여하게 됩니다.
주님, 주님의 권능을 보여주시고, 저를 구원하시며 붙들어 주시어, 제 연약함 안에 주님의 능력이 드러나고, 사람들이 주님께 영광을 드리게 하소서. 그리하여 행여나 제가 고난의 도정에서 비틀거려 원수들이 거만하게 머리를 쳐들지 못하게 하여 주소서.
저는 이 폭풍우 가운데서 제 마음에 자리를 잡고 있는 하느님의 옥좌에 희망의 닻을 던집니다. 여러분은 제가 당당하게 싸우도록, 훌륭하게 싸우고 끝까지 싸우며 달릴 길을 다 달리도록 기도로 저를 도와주십시오.
우리가 비록 이 세상에서는 다시는 보지 못할지라도, 후세에서는 흠 없는 어린양의 옥좌 앞에서 승리의 기쁨에 넘쳐, 한마음으로 영원토록 그분을 찬양하는 행복을 누릴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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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pcyhBEpHI3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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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은 언제 강도들의 소굴이 되는가?>
오늘 복음은 ‘성전 정화’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시며 슬퍼하신 후, 성전으로 들어가 장사꾼들을 쫓아내십니다. 우리 모두도 성전인데 성전이 강도들의 소굴이 되면 예루살렘처럼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라고 호되게 야단치십니다. 우리도 우리 마음 안에서 주님을 만나는 성전이 되지 못하면 강도의 소굴이 되고 맙니다.
자연인으로 소개된 인물 중에 ‘씨돌’씨가 있습니다. 본명은 김용현이고 세례명은 요한입니다. 그는 가톨릭 재단에서 운영하는 ‘SOS 어린이 마을’에서 자랐습니다. 미혼으로 사는 여성이 고아 아이를 맡아 기르는 시스템인데 1호 엄마의 1호 아들이었습니다.
그가 유명해진 것은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와 같은 TV를 통해서입니다. 맨발로 벌거벗고 다니며 자연과 혼연일체가 되는 삶을 사는 그의 모습은 많은 이들에게 큰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런데 다시 SBS 스페셜 제작팀에서 「어디에나 있었고, 어디에도 없었던, 요한, 씨돌, 용현」을 방영하여 그의 실제 모습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1980년대 후반 민주화 운동 당시 가장 앞에서 언제나 자리를 지켰던 인물입니다. 고문으로 허리를 다쳐 평생 아픔을 감내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약자들 편에 서는 것을 선택하였습니다. 군대에서 기압을 받다가 갑자기 사망했다는 정연관 상병의 누명을 벗겨준 주인공도 김용현입니다. 17년 만에 정 상병이 야당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고참에게 구타를 당해 사망한 것이라는 사실을 끈질기게 밝혀냈습니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 때 누구보다 먼저 달려가 눈물을 흘리며 구조작업을 도왔습니다. 그리고 카메라가 자신을 비추려고 할 때 사라졌습니다.
그를 만났던 모든 사람은 그를 ‘의인’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뇌출혈로 병자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에게 왜 그런 삶을 살아왔느냐고 묻는 말에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왼손으로 이렇게 씁니다. “인간으로서 당연한 일”
그에게 인간이 어때야 하는지를 알려준 분은 당연히 그를 키워주신 어머니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왜 사제들과 종교와 단절하고 산에서 살았을까요? 최근에 종교에 대한 문제가 불거지자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안다고 도리를 지키고 사는 게 아니야. 측은지심이 필요해. 신천지는 개천지. 종교가 기생충. 종교가 다 거짓말해. 요한이라는 이름을 돌려주고 싶어. 도둑놈들.”
저는 한 인간으로서 인간임을 지키기 위해 살아온 이분의 삶을 존경하면서도 이분을 끝까지 품어주지 못했던 우리도 반성해야 하지 않는가 생각했습니다. 한 인간으로 살고 싶은 사람에게까지 요한이란 이름을 돌려주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게 만든 것은 우리의 책임도 크겠습니다.
‘기도의 집’이 왜 ‘도둑의 소굴’이 되는 것일까요? 오늘 복음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장사꾼들을 쫓아내신 후 성전에서 가르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즉, 날마다 진리의 가르침이 지속하지 않기 때문에 강도의 소굴이 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 개인도 마찬가지고, 성당도 마찬가지입니다. 진리의 가르침이 멈추면 그 자리에 세속적 욕심이 끼어듭니다. 우리가 강도가 되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주님의 진리가 선포되는 곳이어야 합니다.
‘SBS 세상에 이런 일이’에서는 「34년째 길 위에서 사는 남자의 사연」이 소개되었습니다. 제보를 받은 제작팀은 4차선 도로 밑에 작은 움막을 짓고 산에서 약초나 떨어진 이삭 등을 주워서 끼니를 때우며 사는 한 사람을 취재했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버지가 집을 나간 뒤, 어머니와 동생과 누나를 부양하겠다며 돈을 벌러 집을 뛰쳐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돈을 벌어도 모이지 않았습니다. 일단 나왔으니 성공해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34년을 길거리에서 살게 된 것입니다.
제작진은 누나를 찾아갔습니다. 동생을 만나고 싶냐고 했더니 당연히 그러겠다고 말했습니다. 동생에게 이 말을 전하니 동생도 누나를 만날 용기가 생겼습니다. 그렇게 34년 만에 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누나는 왜 살아 있었으면서 돌아오지 않았느냐며, 그 세월을 허비한 게 아깝지 않으냐며 오열하였습니다. 동생도 눈물을 흘립니다.
만약 제작팀이 그분의 가족을 찾아서 그 가족의 마음을 전해주지 않았다면 이 프로그램은 강도의 소굴이 되었을 것입니다. 자기 이익을 챙기기 위한 프로그램일 것입니다. 그러나 가족의 마음을 알려주어 동생에게 용기를 주었고 그렇게 34년 만에 용기를 낼 수 있게 했습니다. 그러니 기도의 집 역할을 한 것입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하느님과 항상 만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로 나오는 이들에게 하느님을 만나 받은 말씀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이 용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런 가르침이 지속되어야 강도의 소굴이 되지 않습니다. 이 가르침이 없다면 교회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신자들을 이용하게 될 것입니다. “요한이라는 이름을 돌려주고 싶어”란 말을 다시 듣지 않도록 우리 교회가 하느님을 만나 말씀을 받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야겠습니다.
하느님을 만나 전할 말씀을 받지 않으면 자연적으로 강도의 소굴이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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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산보 중에 ‘이단(異端)과 사이비(似而非) 종교’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이단은 다르지만 끝이 다른 것이라고 합니다. ‘신당동 떡볶이, 장충동 족발, 종로 닭 한 마리’에는 ‘원조’라는 이름의 가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변에 원조와 비슷한 이름의 가게들이 함께 있습니다. 이단은 맛이 조금 다르지만 그렇다고 먹어서 건강에 해로운 것은 아닙니다. 보통은 원조 집에 손님이 많지만 자리가 없으면 다른 집에서 식사하기도 합니다. 취향에 따라서 원조가 아닌 집을 선호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교회는 ‘가톨릭, 동방 가톨릭, 그리스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 개신교’로 나누어 졌습니다. 시작은 같지만 교리와 제도의 해석에 따라서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예전에는 교리적인 이유와 더불어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목적에 따라 이단을 단죄하였고, 전쟁까지 벌였습니다. 현대에는 공동선을 위해서 서로 협력하고, 배려하고 존중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이방인, 과부, 고아를 잘 돌보아야 한다. 한때는 너희도 이방인, 과부, 고아로 떠돌아다니지 않았느냐?”
사이비는 비슷한 것 같지만 완전히 다른 것을 이야기합니다. 어릴 때 먹던 ‘불량식품’과 같습니다. 욕심 때문에 몸에 해로운 음식을 파는 경우가 있습니다. 겉보기에 비슷해서 사 먹지만 먹으면 설사를 하기도 하고, 심하면 사람이 죽을 수도 있습니다. 불량식품의 유형을 이렇게 나누기도 합니다. “불량식품은 ① 위해식품, ② 병든 동물고기 등을 사용한 식품, ③ 기준·규격이 고시되지 않은 화학첨가물 등이 첨가된 식품, ④ 유독기구 등을 사용한 식품, ⑤ 기준과 규격이 정해지지 않은 포장을 사용한 식품, ⑥ 허위표시, 과대포장 등을 한 식품 등 6가지로 유형화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사이비는 종교를 가장하여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범죄자들입니다. 사이비 종교도 종교를 '가장'하고 기존 종교의 교리를 따오는 경우가 많아서 종교의 계통학적 구분으로써 답을 찾으려 하다 보면 사이비 종교를 구별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사이비인지 아닌지를 구별하는 확실한 방법은, 그 나라의 사법체계 안에서 '사이비다'라고 판정이 나거나, 그에 상응하는 유죄판결을 받은 단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짧게 요약하자면 사이비종교는 이단에 포함되지만 모든 이단 종파가 사이비 종교는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정화’를 하십니다. 사이비들이 기도하는 하느님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변질시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이비들의 위선과 허위에 대해서도 ‘정화’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저들의 가르침은 따라라. 그러나 저들의 행동은 따르지 마라. 저들은 자기들도 하느님께 가지 않으면서 남들도 하느님께 가는 것을 막기 때문이다.”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 있지만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의로움을 따르지 않는다면 자신의 욕망에 따라서 산다면 그 역시 사이비입니다. 공동체를 갈등과 분열로 이끈다면 그 또한 사이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라고 칭찬하셨던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뜻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뜻만 생각한다.” 바오로 사도는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교우라고 하는 사람이 불륜을 저지르는 자거나 탐욕을 부리는 자거나 우상 숭배자거나 중상꾼이거나 주정꾼이거나 강도면 상종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자와는 식사도 함께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여러분 가운데에서 그 악인을 제거해 버리십시오.”
나의 말과 행동 그리고 생각이 사이비는 아닌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백성은 크게 기뻐하였다. 이렇게 하여 이민족들이 남긴 치욕의 흔적이 사라졌다.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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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9,45-48: 너희는 하느님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성전이 장사치의 소굴이 아니라, 거룩한 집이기를 바라신다. 그분은 사제의 직무가 부정직한 종교적 의무 수행이 아니라, 자발적인 순명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라신다. 주님께서는 성전에서 세속적인 교환행위가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신다. 즉 돈 바꾸는 환전상들을 성전에서 쫓아내기까지 하셨다. 주님의 돈으로 이익을 챙기려 하는 자는 바로 환전상이다. 그 주님의 돈은 성경이다. 성경을 가지고 자기 이익을 챙긴다고 한다면, 그는 성경을 파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들은 모두 환전상들이지 참 목자가 아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성경을 가지고 현세의 이익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이제 없어지고, 우리 신앙인들의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행실, 흠 없는 삶의 영광, 영광과 진리 안에서 드리는 향기로운 예배가 빛을 내야 한다. 이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성전 정화이다.
주님께서는 성전의 주인으로서 당신의 권한을 행사하신 것이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비롯하여 유대인 지도자들 모두의 죄가 더욱 크다. 배우지 못한 백성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였고, 그 구원의 말씀을 단비처럼 받아 마셨다. 그들의 마음은 열매를 맺을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분의 가르침에 따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을 지도하는 자들은 주님을 거역하고 살인을 계획하고 있다. 그들은 모퉁이 돌에 걸려 넘어지고 말 것이다. 주님의 집은 하느님과 우리의 형제들을 만나는 장소이다. 이 만남은 사랑의 만남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 하느님의 집이 어느 개인의 욕망을 해소하기 위한 장소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오늘 복음에서 보여주고 있다.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몸도 성령의 궁전이라고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셨다. 이 궁전을 인간적인 욕심으로 채우려고 한다면 하느님의 성전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언제나 주님을 모실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그래서 세상을 비출 수 있는 신앙인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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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베트남 교회 역사는 1533년 포르투갈 선교사들과 함께 시작됩니다. 베트남은 한국보다 200년가량 일찍 신앙을 접하였는데, 오랜 교회 역사를 가진 만큼 고통과 아픔도 깊습니다. 베트남 왕실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거부할 것을 강요하며 신자들에게 십자고상을 밟고 지나가게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침묵하고 계신 것처럼 느껴지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한 고통과 절망의 한가운데에서 인간은 그분의 존재를 의심하기도 합니다. 당신 정의는 어디에 있으며 당신 사랑은 왜 침묵뿐이냐며 울부짖기도 합니다. 내가 생각하는 정의와, 내가 바라는 사랑과, 내 기도가 실현되지 않는 어둠의 심연에서 믿음은 위기에 놓이게 됩니다. 비록 지금은 하느님께서 침묵하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 기울이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저주받은 자의 모습으로 죽음을 받아들이셨음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그저 이천여 년 전 과거의 일회적 사건이나 나의 오늘과 아무 상관 없는 사건에 그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모든 미사 가운데, 그리고 우리의 현재 안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습니다.
하느님께서 침묵하시고 내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느껴지는 순간에도 우리는 어떻게 믿음을 간직합니까? 고통받는 나에게, 무의미함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방황하는 나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어떤 의미입니까?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미사에 참례하면서 나와 하느님과 맺는 관계, 나와 예수님과 맺는 관계에 대하여 깊이 묵상하는 시간을 가져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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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성전을 정화하시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았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도를 찾지 못하였다. 온 백성이 그분의 말씀을 듣느라고 곁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루카 19,45-48)
복음서 저자는 예수님의 ‘성전 정화’ 때문에 사람들이 둘로 갈라졌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성전 정화를 반대했고, 예수님을 죽일 방법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성전 정화를 지지했고, 예수님 곁을 지켰습니다. 48절에는 ‘온 백성’이라고 표현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온 백성’은 아니었을 것이고, ‘다수의 백성’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한쪽에 서지 않고 중립을 지키려고 한 사람들도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중간 지대에 있었던 그 사람들에 대해서는 예수님의 다음 말씀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루카 11,23)
‘선’과 ‘악’의 싸움에서 중립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적극적으로 ‘선’의 편에 서지 않는 것은 모두 ‘악한 것’입니다. <분명하게 살아 있는 것이 아닌 것은 죽어 있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것도 아니고 죽어 있는 것도 아닌 것은, 중간 상태나 중립이 아니라, 그냥 죽어 있는 것입니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을 한 마디로 줄이면 ‘기득권층’입니다. 기득권층 사람들은 왜 성전 정화를 반대했을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예수님의 성전 정화로 큰 손해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왜, 반대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을까?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것들을 모두 잃을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이 예수님의 성전 정화를 지지한 이유도 간단합니다. 성전 정화는 백성들에게 큰 이익이 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물질적으로도, 또 영적으로도…….>
백성들 가운데에는 물질적인 이익만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영적인 이익을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기득권층’ 사람들은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린 자들입니다. 예수님을 지지한 백성들은 성전이 ‘기도의 집’으로 회복되기를 원한 사람들입니다. ‘강도들의 소굴’에서 물질적인 이익만 챙기는 것은 강도들이 하는 짓이고, ‘기도의 집’에서 영적인 이익을 얻기를 희망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것은 하느님의 참 백성이 하는 일입니다.
이제 우리는 진지하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오늘날의 성전은, 또는 종교는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온전히 ‘기도의 집’으로 살아 있는가?” “우리는 예수님 편에 확실하게 서 있는가?” 이 질문에서 옛날의 유명한 격언이 연상됩니다. “하느님을 우리 편으로 만들려고 하면 안 된다. 우리가 하느님 편이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
기득권층 사람들은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려고 감히 하느님을 자기들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던 자들입니다. 그 일부터가 ‘신성 모독죄’입니다. 예수님을 지지한 백성들은 하느님 편이 되려고 노력한 사람들입니다. <지금 자기가 원하는 것이 하느님 뜻에 합당한 것인지를 반성하지는 않고, “제가 원하는 그것을 저에게 주십시오.”라고 생떼를 쓰듯이 기도한다면, 아무리 간절하게 기도하더라도, 그것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느님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하는 일이 됩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에는 자신이 정말로 하느님 뜻에 합당한 것을 청하고 있는지를 충분히 묵상해야 하고, 어떤 상황이 되더라도 흔들림 없이 ‘하느님 편’에 서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기도뿐만 아니라 신앙생활 자체가 ‘하느님 편’에 서려고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그런데 성전 정화를 지지하면서 예수님 곁을 지켰던 백성들은, 예수님 수난 때에는 어디에 있었을까? 사도들처럼 모두 겁에 질려서 달아났을까? 아니면 배반자 유다처럼 기득권층 편으로 넘어갔을까? 예수님 수난 때에 사도들과 신자들이 흩어진 것은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닙니다. 신앙을 잃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겁에 질려서 잠깐만 그랬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많은 제자들이(신자들이) 떨어져 나간 것은, 그들이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요한 6,60.66) 예수님 편에 있다가 그렇게 떠나간 사람들도 많지만, 반대자였다가 회심하고 예수님 편이 된 사람들도 많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나, 예루살렘 제자들의 수가 많이 늘어나고 사제들의 큰 무리도 믿음을 받아들였다.”(사도 6,7) 사제들은 예수님을 반대하고 박해했던 사람들인데, 많은 수가 유대교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했습니다. 결국, “전에, 또는 지금 어느 편에 서 있는가?”보다 “마지막에 어느 편에 서 있는가?”가 더 중요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은 ‘끝까지’ 해야 인정받는 생활입니다. 하다가 중간에 그만두는 것은 처음부터 하지 않은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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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기원전 200년경, 팔레스티나를 지배하던 안티오코스는 유다교를 없애려고 갖은 박해를 가했습니다. 희생 제사를 금지하고, 백성에게 돼지고기를 억지로 먹이며, 이에 따르지 않은 이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고, 성전마저도 그리스의 신전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이에 마카베오라 불리는 유다를 중심으로 항쟁한 끝에 기원전 165년 성전을 되찾고는, 제1독서에서 보듯이 성전 제단을 다시 봉헌하며 제물을 바칩니다.
유다인들은 신앙의 순수성을 되찾으려고 엄청난 희생을 치렀지요. 그런데도 세월과 함께 점점 세속적이고 정치적으로 흐르면서 신앙심이 오염되기 시작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상인들을 쫓아내시며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그들이 순례자들의 절박한 처지를 악용하여 온갖 폭리를 취했기 때문입니다. 순례자들이 하느님을 더욱 가까이 만날 수 있도록, 성전을 기도하는 집으로 꾸미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신앙인의 의무입니다.
그러기에 순례자들의 순수하고 경건한 마음을 담보로 하여 어떤 모양으로든지 그들을 착취한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성전을 아름답고 장엄하게 꾸미는 이유는 주님께 집중하기 위함입니다. 거룩한 분위기에서 하느님을 뵙고 그 말씀을 더욱 깨닫도록 도와주려는 목적입니다.
우리의 성전이 순수하게 기도하는 집이 되도록, 함께 노력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몸도 성령의 궁전이 되어 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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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염철호 요한 신부님]
오늘 제1독서는 마카베오와 형제들이 독립 전쟁을 치른 뒤 이민족들에게 더렵혀진 성전을 정화하는 사건을 이야기합니다. 유다인들은 오늘날까지 이 사건을 기념하여 여드레 동안 성전 봉헌 축제(‘하누카 축제’)를 지내는데, 성전을 깨끗이 정화하며 빛을 밝히는 성전 봉헌 축제는 신약 성경, 특히 요한복음에서도 이따금 언급되는 축제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직접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이 사건은 모든 복음서가 중요하게 다루는 사건으로(마르 11,15-19; 마태 21,12-13; 요한 2,14-16 참조), 예수님께서 바라신 것은 성전 자체를 정화하시거나 부수어 없애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진정 고치고자 하신 것은, 사람들이 성전에서 하느님을 대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성전에서 하느님을 올바로 섬기지 못하는 이들을 향하여, 무엇이 참으로 올바른 예배인지를 보여주시는 것이 이 사건의 핵심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행동은 구약 성경에 나오는 예언자들이 보여주던 행동과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예언자들은 늘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잘못된 예배 행태를 비판해 왔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구약 성경을 인용하여 말씀하신 두 구절, 곧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이사 56,7 참조)와 “너희는 이곳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예레 7,11 참조)는 말씀도 바로 이 점을 지적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성전에서 이루어졌던 예수님의 예언자적 비판은 그분을 죽음으로 내모는 중대한 원인이 됩니다.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환전과 제물 판매로 많은 수입을 얻고 있던 당시 대사제들과 사제들을 직접적으로 공격한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 그리고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앨 방도를 찾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죽여야 할지 그 방도를 찾지 못합니다. 온 백성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느라 그분 곁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에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자리, 곧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 바로 하느님께서 거처하시는 참된 성전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더 이상 성전에서 환전하고 물건을 사서 하느님께 봉헌할 필요가 없습니다. 기도의 집인 성전, 곧 예수님이라는 성전 안에서 예수님을 제물로 봉헌하는 참된 제사가 이루어지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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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저는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1코린 9,22)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좋아합니다. 사제로서 신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방식이 이 말씀과 같아야 한다고 평소에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이 바라는 방식으로, 그들이 원하는 무엇인가가 되어 주는 사제, 정말 멋지지 않습니까!
그러나 늘 그렇게 하지는 못합니다. 때로는 싸우고 외면할 때도 있습니다. 상처를 주고받으며 다투고 얼굴 붉히며 살아갑니다. 내 실수를 인정하며 반성하기도 하지만, 그런 자기반성보다는 상대의 아집과 욕심 때문이라 판단하고 분노하며 다투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변화하지 않고 안주하려는 마음에 안타까워하기보다는 쉽게 인정해 버리고 포기하며 외면할 때도 많습니다. 그런데 다툼과 분노가 잘못된 것일까요? 다툼과 분노 그 자체보다는 무엇을 위한 싸움이고 분열인지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분노하셨습니다. 성전에서 물건을 팔고 있는 사람들을 보시고 분노하시며, 그들의 탐욕과 잘못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날마다 하느님의 집에서 말씀을 전하시며, 그들이 성전 안에서 하느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일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마침내는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외면당하시기까지, 그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시면서도 그들 또한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싸울 수 있습니다. 누군가의 잘못을 지적하고 그 잘못 때문에 미워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싸움과 다툼, 미움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성전에서 물건을 파는 사람들과 유다의 지도자들이 예수님과 부딪친 이유와 예수님께서 그들과 부딪쳤던 목적과 이유는 다릅니다.
그들은 자신만을 위해서 다투고 싸웠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위하여 그리고 싸우고 있는 상대를 위하여 그들과 맞서 싸우셨습니다.
여러분의 ‘분노와 다툼의 이유’를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어 주는 것은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가치를 전해주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려면 맞서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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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강도의 소굴>
태국의 왕궁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발 디딜 틈도 없이 많은 관광객에 떠밀려 겉모양을 보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화려한 수공예 작품으로 꾸며진 왕궁을 보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국왕의 권위를 인정하며 존중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짧은 치마를 입은 사람은 무릎 밑으로 내리는 긴치마를 빌려 입어야 하고 슬리퍼를 신은 사람은 다른 신으로 갈아 신어야 할 정도로 국왕에 대한 예의를 차렸습니다.
왕궁의 곳곳에 그려진 벽화는 규모나 섬세함이 대단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벽화를 복원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장인 정신을 생각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들락거려 소란스러운데도 전혀 개의치 않고 온갖 정성을 들여 붓을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몇몇 한국인들이 눈에 뜨여 아주 반가웠습니다. 한국 사람은 사원이나 왕궁 등 역사적인 장소를 찾기보다는 먹고, 마시고 즐기는 곳을 즐겨 찾는다는 말을 들었기에 그들이 달리 보였습니다.
국왕의 권위를 인정하는 만큼 왕궁은 보호되겠지만 관광객으로 넘쳐 나는 왕궁은 아마도 돈벌이의 장소로 전락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잘 포장된 과일바구니를 봉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봉헌한 사람이 자리를 비우기가 무섭게 바구니는 치워지며, 이미 판매되었던 과일바구니를 다시 판매하는 모습을 보면서 봉헌의 의미가 무시되고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왕궁 덕에 백성이 산다고 하는 마음입니다. 모쪼록 왕궁이 돈벌이의 장소가 되지 않고 백성을 살리는 곳, 곧 기도의 집이 되기를 희망했습니다.
가끔은 마음이 혼란스럽습니다.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것과 마음에 끌리는 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상충할 때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이 됩니다.
마땅히 주님을 따라야 함에도 말입니다. 육적인 것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르면 몸은 고달플지라도 마음의 자유를 누립니다. 그러나 육적인 욕망을 따르면 당장은 즐겁고 기쁘지만, 주님을 따르지 못한 안타까움에 마음이 걸립니다. 사실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한 마음이 강도의 소굴입니다.
우리의 몸은 하느님의 모상을 닮았고, 하느님의 숨을 받았으며 주님을 모시는 거룩한 성전입니다. 그 몸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상태가 강도의 소굴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루의 끝맺음에 늘 “허물로 누벼 놓은 이 날 하루를 주님의 자비로 지켜주소서” 하고 기도하지만, 일관된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기엔 여전히 힘에 겹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혀에 감미로운 자는 기도의 집이요, 육의 욕망을 따르는 자는 강도의 소굴이거늘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애 버릴 방도를 모색하였습니다. 설사 그들의 계획이 성공한다 해도 진리 안에 자유를 누릴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끝내 ‘강도의 소굴’을 ‘기도의 집’으로 회복시키지 못한 채 죽음을 자초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오늘도 여전히 그들의 전철을 밟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기도의 집을 복구하는 날 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상의 권세가 아니라 백성과 인류, 세상의 성화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통치가 지배하는 나라요, 영혼이 지배하는 나라입니다.
주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신 것은 성전은 이익을 남기는 곳이 아니라 하느님을 예배하고 사람을 섬기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이 장터였다면 그들을 쫓아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밑지고 파는 장사는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건을 파는 이들은 당연히 이익을 만들어 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삶의 자리는 주님을 모시는 성전입니다. 성전의 아름다움을 잘 지킬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제일 먼저 기도하는 것을 잊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우리는 성전에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하느님 안에서 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선택하고 행해야 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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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오늘의 독서와 복음 말씀은 공통적으로 ‘성전 정화’라는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마카베오와 아들들은 이민족에게 뺏겨 이교의 제사로 더럽혀졌던 성전을 되찾아 정화하고, 주님께서는 대사제들과 장사꾼들이 탐욕으로 더럽힌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먼저 제1독서에서는 유다와 그 형제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탈환하고 정화한 사건을 다룹니다. 이민족들은 유다인들의 정신적 기반인 신앙을 무너뜨리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을 철저히 짓밟았습니다. 성소를 더럽히고 하느님을 조롱함으로써 성전을 구심점으로 하느님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 치욕을 안겼지요. 이에 격분한 유다 마카베오가 적은 수의 병사로 리시아스 군대를 무찔러 격퇴하고는 예루살렘에 올라가 성전을 정화합니다. 그렇게 이교의 제사로 더럽혀진 성전을 되찾아 다시 하느님께 봉헌한 그 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 앞에 엎드려 그분을 찬양하며 기꺼이 예물과 제물을 바칩니다.
하느님께 바치는 제물은 이렇듯 기쁨과 감사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름에 따라 성전에서 바치는 예물의 의미가 퇴색되어 버립니다.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를 연결하는 소명을 지닌 사제들이 제 본분을 망각하고 하느님을 이용해 ‘장사’를 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이 더 큰 이익과 권력을 누리기 위해 복잡하고 어려운 여러 규정과 의무들을 만들어 백성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웠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상인들로부터 막대한 권리금을 받고 성전 마당에서 속죄 제사에 쓰일 짐승들과 물건들을 판매할 권리를 부여했습니다. 이권과 비리가 개입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물건값이 폭등했고, 백성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비싼 돈을 주고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성전에 내는 세금은 반드시 이스라엘 고유 화폐인 ‘셰켈’로만 내야 했기에 파스카 축제를 지내기 위해 멀리 외국에서 온 유다인들은 비싼 수수료를 내가며 환전을 해야 했습니다. 백성들 처지에서는 그런 상인들의 모습이 정말 칼만 안 들었지 강도나 다를 바 없었지요.
그런 모습을 도저히 눈 뜨고 지켜볼 수 없었던 예수님은 성전으로 들어가시어 상인들을 모두 쫓아내십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하느님께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할 성전을, 하느님을 이용하여 제 탐욕을 채우는 다시 말해 하느님을 등쳐먹는 ‘강도’들이 우글대는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고 비난하십니다. 예수님의 그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도 뼈아프게 들려옵니다. 주님께서 머무르시는 ‘성전’이 되어야 할 내 몸과 마음을 거룩하게 관리하지 못하는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해야 주님 뜻을 잘 헤아리고 따를 수 있을까를 고민하기보다, 어떻게 하면 주님을 잘 이용해서 내가 원하는 뜻을 이룰 수 있을까만 생각하는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뜻에 맞는 정의 공정 자비를 추구하기보다 더 큰 재물 명예 권력을 얻는 데에만 신경을 쓰는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내 마음과 영혼을 탐욕에 눈먼 강도들의 소굴로 내버려 둬서는 안 되겠습니다. 단호하게 욕심을 비워내고 이기심을 몰아낸 다음 안쪽 자리부터 차곡차곡 주님과 그분 뜻을 채워나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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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운전 중에 라디오를 통해 “지금 엄청난 화재가 났습니다.”라는 뉴스 속보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대부분 이런 반응일 것입니다.
“아이고, 큰 사건이 또 났네. 빨리 화재가 진압되어서 희생이 없어야 할 텐데….”
그런데 잠시 뒤에 조금 구체적인 소식을 듣게 됩니다. “이 화재는 인천 연수구에 있는 송도 신도시에서 일어났습니다.” 이 말에 저는 “아니, 우리 동네잖아? 잘하면 화재 난 것을 볼 수도 있겠는데?”라고 말할 것 같습니다. 바로 그때 뉴스 진행자의 놀라운 목소리를 듣게 됩니다.
“인천 송도신도시에 있는 성김대건 성당에서 불이 났습니다.”
이때 저는 어떻게 할까요? 그냥 남의 집에 불난 것처럼 생각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맙소사, 우리 성당이잖아?”라면서 속도를 높여 성당으로 빨리 갈 것입니다.
대부분 어떤 사건에 대해 구경꾼 신드롬(방관자 효과)을 보인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사건이 나의 일이라고 생각되는 순간, 비로소 구경꾼 신드롬에서 빠져나오게 되지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그 십자가가 여러분에게 어떤 의미입니까? 단순히 과거에 있었던 사건으로만 보면서, 자기와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누구도 제외되지 않도록, 심지어 모든 시간 속에 있는 사람을 위해서 십자가를 짊어지셨고 그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모든 시간 속에 있는 사람 중에는 구경꾼 신드롬에 빠져있었던 바로 ‘나’도 있습니다. 즉, 주님께서는 ‘나 때문에’ 돌아가셨습니다.
이제 십자가가 다르게 보이지 않습니까? 나와 너무 깊은 연관이 있는 십자가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뜨겁게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끝이 없는지는 ‘나의 주님’이라고 가슴 깊이 고백할 때 가능했습니다.
이렇게 주님을 나와 연관 깊은 분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세속적인 부분으로만 연결하려고 합니다. 과거의 이스라엘 사람도 그러했습니다. 성전에 있으면서 하느님을 바라보지 않았지요. 그래서 성전을 세속적인 물건들이 파는 곳, 장사하는 곳, 심지어 하느님께서 가장 아끼는 약자를 오히려 소외시키는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성전은 하느님의 거룩함이 드러나는 곳이고, 이 성전에서 우리 역시 거룩해지기 위해 기도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거룩함이 자신과 상관없다고 생각하면서 하느님께서 원하지 않는 모습으로 변질된 것이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 그것도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내가 만나는 장소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때 성전은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곳임을 느끼게 됩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나와 연관 있을 때 가장 큰 사랑을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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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내 곁에 벗들이 있으니>
루카 19,45-48 (성전을 정화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았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도를 찾지 못하였다. 온 백성이 그분의 말씀을 듣느라고 곁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곁에 벗들이 있으니>
“온 백성이
그분을 말씀을 듣느라고
곁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루카 19,48)
세상이
불신이어도
나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내 곁에
믿음의 벗들이 있으니
세상이
절망이어도
나의 희망은
꺼지지 않습니다
내 곁에
희망의 벗들이 있으니
세상이
미움이어도
나의 사랑은
지치지 않습니다
내 곁에
사랑의 벗들이 있으니
세상이
죽임이어도
나의 살림은
멈추지 않습니다
내 곁에
살림의 벗들이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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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주님, 저도 깨끗하게 해 주소서!>
(성전 묵상 1)
“너희는 이곳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버렸다.”
주님께서는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쫓아내시며 나무라시는데 왜 장사꾼의 소굴이 아니라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고 하실까요? 강도란 남의 것을 빼앗아 자기 것으로 만드는 사람을 일컫지 않습니까?
그것은 이런 뜻입니다. 성전은 하느님의 성전이지 나의 성전이 아닙니다. 그리고 성전에는 하느님이 계셔야지 하느님이 안 계시면 성전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계시고 하느님을 만나는 기도가 이루어져야 할 성전에 하느님은 안 계시고 인간들이 주인행세하고 기도하지 않고 장사나 하면 그것이 하느님의 집을 내 것으로 만드는 강도질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성전은 어떻습니까? 건물 성전뿐 아니라 나와 너 모두 성령께서 머무시는 성전이라고 바오로 사도 말씀하셨는데 나의 성전은 어떻습니까? 그런데 나의 성전이라고 하지만 나도 나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이고 내 안에 하느님께서 계실 때 성전이지 나로 가득하다면 성전이 아니지요.
그러므로 나를 하느님의 것이 아니라 내 것이라고 소유권을 주장하고, 내 안에 하느님이 아니 계시고 나만 있다면 나는 성전이 아닐 것이고, 그래서 내 안에 하느님과의 일치인 기도는 없고 나 혼자 덩그러니 있다면 그리고 사랑은 없고 욕심만 있으며 기도는 하지 않고 근심 걱정만 한다면 그때 나는 기도하는 사람이 아니라 강도가 될 것입니다.
(성전 묵상 2 )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셨다.”
이런 나라면 성전을 정화하신 주님께서 나도 정화하시지 않을까요? 그때 나의 성전도 주님께서 정화하시게 해야 할까요? 주님께서 정화하실 필요가 없도록 내가 스스로 정화해야 할까요?
물론 주님께서 정화하실 필요가 없도록 스스로 정화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 스스로 말끔히 정화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주님께서 정화해주시도록 나를 주님께 맡겨드리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요?
이렇게 나를 주님께 맡겨드리면 주님은 내 안에서 나를 억지로 몰아내는 조폭이 아니라 은혜로운 청소대행업자십니다.
그런데 다시 말하지만, 주님께서 정화하실 필요가 없도록 내가 스스로 정화하는 것이 물론 더 좋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를 바늘로 잘 찌르지 못하잖아요? 급체하여 사관을 터야 하는 그런 경우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 저도 깨끗하게 해 주소서!’ 하고 기도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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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전 정화의 일상화>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건물보다도 사람이 우선입니다. 아무리 크고 화려한 건물의 성전이라도 거기 좋은 신자가, 좋은 공동체가 없다면 참으로 허전하고 쓸쓸하기 짝이 없을 것입니다. 때론 박물관처럼 무덤처럼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날로 텅비워져가는 성전이나 번창했다가 사라져 흔적만 남은 오래된 폐사지(廢寺址)를 찾을 때마다 절로 젖어드는 비애감입니다.
정말 살아 있는 성전인 거룩한 신자가, 거룩한 공동체가 너무 소중하고 감사하게 생각됩니다. 참 좋고 거룩한 신자가 되기를, 또 좋고 거룩한 신자들의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해야 하겠습니다. 이런 거룩한 욕심의 청정욕은 얼마든지 좋습니다. 살아 있는 성전인 나부터, 공동체부터 날마다 성전 정화가 으뜸 수행입니다. 말 그대로 성전 정화의 일상화입니다.
어제 나눴던 “겨울 배나무 예찬” 고백 시를 다시 나누고 싶습니다. 많이 보완된 완결된 고백 기도시 같은 글이요, 참 좋고 거룩한 살아 있는 성전의 사람을, 공동체를 상징하는 고백시요, 배밭 수도원이라 일컫는 요셉 수도원 소속의 수도자뿐 아니라 요셉수도원을 사랑하는, 넓은 의미에서 요셉 수도원의 한가족 같은 모든 분에게도 와닿는 고백 시라 믿습니다.
-어쩜 저리도 담담할 수 있나
초연할 수 있나
초겨울 밤하늘 별들은 더욱 빛나고
땅에서는 하늘 냄새가 난다
그 크고 탐스러운 배열매들 모두 선물로 내놓고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봐주지 않아도
하늘 사랑만으로 행복하기에
묵묵히 침묵중에 말없이 책임을 다한 후
날마다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무념(無念), 무심(無心), 무욕(無慾)의 겨울 텅빈 사랑의 배나무들
텅빈 허무(虛無)가 아닌 텅빈 충만(充滿)의 사랑이구나
참 평화롭다, 놀랍다, 감동스럽다, 부끄럽다
겨울 배나무들아
너야 말로 내 겸손의 스승, 평화의 스승이구나
고요한 중에 들려오는 배나무들 고백은 바로 나의 고백이구나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루카17,10)
성전정화의 일상화로 날마다 이렇게 “종(servant)과 섬김(service)의 영성”을 살아가는 이들이 진짜 성인이요 살아 있는 참 좋고 거룩한 성전입니다. 참 좋고 거룩한 신자들 하나하나가 살아 있는, 걸어 다니는 성전입니다. 어제 저는 이런 분을 만났습니다. 루시아 자매인데 평상시에도 눈길이 갔던 분입니다. 그런데 어제 뜻밖에도 2주간에 걸쳐 기도하며 손수 손으로 뜬 겨울 쉐터를 저에게 선물했고 이 털 쉐터를 입고 강론을 씁니다. 더불어 감동적인 실화도 전해주었습니다.
-제 친구가 몇 년 전 여기 별내 신도시에 사는, 암투병 중인 오빠를 찾아 간병하며 때로 요셉 수도원을 찾았답니다. 그때는 배꽃이 피기 1-2주 전 정도는 될 것입니다. 친구는 병색이 짙은 오빠와 함께 수도원을 방문했고 마침 배밭에서 일하던 마르코 수사님이 배꽃봉오리들이 많이 달린 배가지 하나를 잘라 주며 당부했다 합니다.
“이 배나무 가지를 병에 꽂아 놓으면 얼마후 꽃이 활짝 필 것입니다.”
과연 말 그대로 얼마 후 꽃병에 꽂은 배나무 가지에서 흰 배꽃들이 활짝 피어나던 날, 친구분의 오빠는 참 편안하게 배꽃을 보며 세상을 떠났다 합니다. 아직 수사님에게는 알리지 못했지만 곧 전해드릴 것입니다.-
참 귀한 겨울 털쉐터 선물과 더불어 아름다운 실화를 선물해준 살아 있는 성전같은 아름다운 자매였습니다. 수도원에서 걸어 다니며 일하던 살아 있는 성전인 수사님을 통해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난 병자인 오빠가 활짝 핀 흰 배꽃을 보며 선종했다니 그대로 부활로 직결된 죽음임을 봅니다.
오늘 복음과 제1독서 주제도 성전 정화입니다. 제1독서 마카베오기 상권에서 유다와 그 형제들이 우선 착수한 것은 공동체의 중심인 성전 정화였습니다. 이민족들이 더럽혔던 제단을 다시 정화하여 봉헌한 것입니다. 온 백성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자기들을 성공의 길로 이끌어 주신 하늘을 찬양하였으며 무려 봉헌축제는 여드레 동안 계속됐다 합니다. 역시 축제의 이스라엘 백성임을 깨닫습니다.
새삼 하루하루 날마다 성전 정화가, 성전 정화의 일상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기도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든 이들을 내쫓으시는 성전 정화 활동 후 본연의 "가르치는" 사명을 다하십니다. 루카복음 사가가 즐겨 쓰는 용어가 “날마다”입니다.
1)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날마다 말씀 공부의 일상화를 통해 살아 있는 성전정화는 이루어집니다. 살아 있는 주님의 말씀을 통해 회개와 정화로 깨끗해 지는 살아 있는 성전이 개인이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또 다음 두 문장에서 “날마다”란 말이 나옵니다.
2)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9,23)
공동체 형제들 하나하나가 하루하루 날마다 자신을 버리고 제 책임의 십자가를, 제 운명의 십자가를 묵묵히 지고 주님을 따라갈 때 저절로 이뤄지는 성전정화입니다.
3)“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루카11,3)
새삼 가톨릭 교회의 평생 교육 시스템에 감동합니다. 날마다의 거룩한 성체성사 미사를 통해 우리는 일용할 양식의 결정체인 주님의 성체를 모십니다. 그러니 날마다의 주님의 미사 은총은 공동체 형제들 하나하나 살아 있는 성전정화에 얼마나 결정적 역할을 미치는지요!
순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 됩니다. 참으로 교회를 풍요롭게 하는, 교회의 보물이 성인들입니다. 순교 성인들은 물론 날마다 죽을 때까지 순교적 삶에 충실했던 성인들은 우리 삶의 좌표가 될 뿐 아니라 부단한 회개의 표징, 희망의 표징이 됩니다. 이분들의 생애와 삶이 우리에게는 늘 신선한 도전이자 자극이 되며 성전정화의 일상화에도 결정적 영향을 줍니다.
오늘은 베트남 순교 성인들 축일입니다. 우리보다 200년 정도 앞선 1533년 복음이 전래된 이후 거의 200년 동안 13만의 순교자들을 배출한 베트남 교회입니다.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를 비롯한 116명 순교성인들의 구성도 참 다양합니다. 96위의 베트남인들과, 11위의 스페인 출신 도미니코회 소속 선교사, 10위의 프랑스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들입니다. 신분별로 보면, 8위의 스페인과 프랑스 출신의 주교들, 50위의 사제들(스페인과 프랑스13, 베트남37), 59위 베트남 평신도 도합 117위 순교성인들입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1988년 6월19일 로마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안드레아 둥락 사제를 비롯한 116명의 동료순교자들을 시성했고, 이들의 축일은 11월24일 오늘로 기념하도록 보편 교회 전례력에 포함시켰습니다. 참으로 오늘 성 안드레아 둥락을 비롯한 116명의 동료 순교자들의 거룩하고 치열했던 신앙의 삶이 오늘 우리의 삶을 새롭게 정화함을 느낍니다.
참으로 분투의 노력으로 “주님의 전사”답게 하루하루 날마다 순교적 삶에 최선을 다할 때 저절로 성전정화의 일상화도 이뤄질 것입니다. 주님은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당신의 성전인 공동체는 물론 우리 모두 하나하나를 정화해주시어 참으로 살아 있는 성전이 되어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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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었다."(루카19,46)
'성전 정화!'
오늘 복음(루카 19,45-48)은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시면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루카 19,46)
아름다운 성전(성당)은 '기도하는 집'입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그래서 '나의 성전인 몸과 마음이 정화되는 곳'입니다. 성전에 들어올 때 우울하고 아팠던 몸과 마음이, 말씀과 성체를 통한 예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진 후에는 "야호!" 하고 '부활한 모습으로 변화되는 곳'입니다.
'나는 그런 성전을 얼마나 자주 찾아갑니까?' '성전에서 얼마나 자주 예수님의 거룩한 몸을 받아 모십니까?'
우리는 나의 성전인 몸과 마음이 거룩한 모습으로 변모되기를 갈망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기도하고 자주 성전을 찾습니다. 그래서 어떤 형제자매님들은 매일 미사에 참례해서 거룩한 성체를 받아 모십니다. 그렇게 하여 날마다 다시 태어납니다. 다시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근본이유'이고, 매일 또는 자주 그리고 매주 주일미사에 참례하기 위해 '성전을 찾는 근본 이유'입니다.
어느 냉담 교우가 말합니다. "신부님, 제가 너무 바빠서 성당엘 나갈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믿겠다고 약속해 놓고도, 기도하고 미사 참례하고 사랑을 나누는 거룩한 일이 나의 육적인 일들의 밀리는 '들러리 같은 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나 자신을 위해 신앙생활을 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더 기쁘게 살기 위해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습니다. 마침내는 죽음 저 너머에서 영원한 기쁨 속에 머물기 위해서 성당에 다닙니다.
'이제와 영원한 기쁨을 향해 달려가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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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4yOVFYJLVW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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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루카 19, 46)
신앙의 정체성은
기도로 드러나고
기도는
우리 삶의 중심을
잡아줍니다.
중심은
중심을 지킬 때
더욱 빛나는
법입니다.
지름길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중심이
필요한 우리들
삶입니다.
신앙의 열매는
중심이
빚어내는
은총의
열매입니다.
중심을 놓치면
소중한 관계도
잃게 됩니다.
소중한 관계는
기도로 피어나고
사랑으로
공동체를 이룹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공동체를
바라보십니다.
중심이
공동체를 이끌면서
중심이 길이 되어
앞으로
나아갑니다.
삶의 중심인
여기 이곳에
주님의 성전
기도하는 성전이
있습니다.
성전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바로 우리의
예수님이십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모든 여정에
한결같이
우리의 성전이
되어 주십니다.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드는 것은
쉬지 않고
멈추지 못하는
우리의 욕심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세상의
욕심과 함께
갈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성전을
지키시는 분은
하느님 자신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을
더럽히고
어지럽히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성전은 언제나
우리의 현실을
비추는 빛입니다.
주님을 만나기 위해
먼저 우리의 진심을
만나고
성찰해야 할
우리들 마음입니다.
빛나야 할
우리의 성전이
부끄러운 성전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먼저 우리의
마음부터
바꾸어 놓습니다.
기도하는 성전
하느님께서
중심이 되는
성전은 우리의
삶으로 이어집니다.
삶과 성전은
함께 걸어가는
구원의
동반자입니다.
순교를 통해
사랑의 공동체를
드러낸 소중한
순교자들을
기억합니다.
기도와 사랑을
따르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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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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