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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역사) 스크랩 해동역사(海東繹史)--서,단군,기자,위만조선,삼한,예,맥,부여,옥저,사군
라디오 추천 0 조회 109 09.04.25 12:5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해동역사...한치윤(1765~1814) >>>

 

한치윤 [韓致奫, 1765~1814]
요약
조선 후기의 학자로 실증적으로 한국사를 편찬하여 10년에 걸쳐 《해동역사(海東繹史)》70권을 저술하였다. 후에 조카 한진원이 <지리고> 부분을 추가하여 모두 85권이 되었다.  
본관 청주
옥유당
별칭 자 대연
활동분야 문학
출생지 서울
주요저서 《해동역사》
본문
조선 후기의 학자로 본관은 청주, 자는 대연(), 호는 옥유당(?)이다. 아버지는 통덕랑()을 지낸 한원도()이며, 어머니는 고령신씨이다. 서울에서 출생하였으며 남인계열로 정국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1789년(정조 13) 진사시()에 합격한 뒤 학문에만 전념하여 약관에 문명을 날렸다. 당시로서는 남인이 국정에 참여하기보다는 정치에서 멀리 떨어져 학문 연구에 전념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그도 당색을 초월하여 폭넓은 교우관계를 유지하면서 학문에 매진하였다. 그런 가운데 족형()인 한치응()이 청나라에 사행으로 가게 되어 이를 따라가 북경에 머물면서 청나라 문물과 고증적 학술방법을 배워 귀국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한국의 역사가 엉성하고 조잡하게 편찬되어 있는 것을 보고 한국사의 참모습을 찾기 위한 목적에서 실증에 의거한 한국사 저술에 착수하여 10년만에 《해동역사()》 본편 70권을 저술하였다. 그리고 미처 마무리 하지 못한 〈지리고()〉 부분은 뒤에 그에게서 학문을 배워 감사를 지낸 조카 한진서()가 15권을 속편으로 완성하였다.

지나칠 정도로 객관적이고 실증적으로 역사서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일부 중국의 사료를 무비판적으로 인용하는 우를 범하기도 했지만, 저자 나름대로의 역사 해석과 고증을 시도하는 등 한국사 연구의 새로운 방법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깊다.
<이상배>

 

 

<<< 海東繹史 序文---유득공 >>>

 

우리나라의 역사책이 무릇 몇 종이던가. 이른바 고기(古記)라 하는 것들은 모두가 치류(緇流)들의 허황되고 황당한 말이라서 사대부들이 입에 담을 수 없는 것이다. 김부식(金富軾)이 지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대해 사람들은 ‘소략하여 볼만한 것이 없다’고 허물하고 있다. 그러나 명산(名山)의 석실(石室)에 보관되어 있는 자료가 하나도 없었으니, 김부식인들 그런 처지에서야 어떻게 할 수 있었겠는가. 그렇다면 오로지 정인지(鄭麟趾)가 지은 《고려사(高麗史)》가 있을 뿐인데, 고려 이전의 사실에 대해서는 무엇을 보고서 상고하겠는가. 이에 내가 일찍이 중국의 21사(史)에서 동국전(東國傳)만을 뽑아 모아 중복된 부분을 삭제하고서 주석을 내고 변증을 하고자 하였다. 그런 다음 《삼국사기》와 《고려사》 두 사서와 함께 참조하여 보면 징신(徵信)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았는데, 끝내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항상 가슴속에 맴돌고 있었다.
나의 친구인 상사(上舍) 한대연(韓大淵)은 성품이 고요하고 서책을 간직하기를 좋아하였다. 문을 닫고 들어앉아 역사를 연구하였으며, 개연히 우리나라의 역사에 관심을 가져, 나와는 서로 상의하지 않아도 의기가 통하였다. 그런데 또 이를 미루어 넓혀서 정사(正史) 이외의 것까지도 섭렵하여, 우리 동방 수천 년의 사실에 대해 경전(經典)에서 패설(稗說)에 이르기까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것을 찾아내고 베꼈으며, 또 손수 자르고 붙이면서 분류하기도 하고 합하기도 하였다. 머리는 헝클어지고 땀은 비오듯 흘리면서 밥먹는 것조차 잊은 채 5, 6년이나 공력을 쏟은 끝에 비로소 종류별로 나누고 조목을 세워 한 부(部)의 서책을 만드니, 모두 몇 권이나 되었다. 그 가운데는 세기(世紀)도 있고, 열전(列傳)도 있으며, 천문(天文), 지리(地理), 예악(禮樂), 병형(兵刑), 여복(輿服), 예문(藝文)에 대해 각각의 지(志)가 있어서 저절로 역사서가 되었는데, 이를 이름하여 《해동역사(海東繹史)》라 하였다. 내가 생각은 있었으나 미처 이루지 못하였던 것을 하루아침에 얻으니 그 역시 시원스런 일이 아닌가.
우리나라 사람들이 혹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사적(史籍)은, 평양(平壤)에 있던 것은 이적(李勣)에게 모두 불탔으며, 전주(全州)에 있던 것은 견훤(甄萱)이 패하면서 모두 불에 탔다.”고 하는데, 이 역시 근거 없는 낭설이다. 우리나라에 어찌 사적(史籍)이 있었던가. 기자(箕子)의 시대는 당우(唐虞)부터 위만(衛滿) 이전에 해당하고 보면 역사를 쓰지 않는 시대에 속한다. 그리고 한(漢)나라 4백 년 동안에는 내복(內服)의 나라였으니, 낙랑 태수가 어떻게 사관(史官)을 둘 수 있었겠는가. 이 때문에 일사(佚事)와 이문(異聞)을 반드시 중국 쪽에서 구한 다음에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영동(嶺東)의 예(濊)와 한수(漢水) 남쪽의 한(韓), 개마산(蓋馬山) 동쪽의 옥저(沃沮)에 대해 참으로 진수(陳壽)가 아니면 어떻게 그런 나라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겠는가. 저 진수란 자가 붓을 잡고 바다 바깥의 우리나라의 일에 대하여 이와 같이 상세하게 쓸 수 있었던 것은 또 어째서인가. 공손씨(公孫氏)가 대대로 요동 태수가 되어 대방군(帶方郡)을 세워 한(韓), 예(濊)의 여러 부를 통괄하다가 사마의(司馬懿)에게 멸망되었으니 산천(山川), 도리(道里), 물산(物産), 풍요(風謠)에 대하여 반드시 태사씨(太史氏)가 전해 들었을 것이다.
이 이후로는 삼국(三國)이라 하며, 또 가라(加羅)니 탐모라(耽牟羅)니 하는 족속이 있어서 모두 사신을 보내고 폐백을 바치면서 상국(上國)에 알현하였다. 그러므로 남조(南朝)와 북조(北朝)의 여러 역사책에서 이에 따라서 기록하였는바, 이 모두가 우리나라의 사적인 것이다. 다행히 대연(大淵)이 지은 책이 지금 또 이루어져 풍부히 모두 갖추어지게 되었다.
옛날에 섬자(剡子)가 노(魯)나라에 조회 가자 소자(昭子)가 “소호씨(少?氏)가 새의 이름으로 관명(官名)을 삼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고 물으니, 섬자가 말하기를, “나의 조상들의 일이니 내가 그 일을 잘 알고 있다.”고 하였는데, 공자(孔子)가 그 말을 듣고서 나아가 배웠다. 그리고 적담(籍談)이 주(周)나라에 가서 진(晉)나라가 주나라로부터 명기(名器)를 나누어 받은 것에 대해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자, 왕이 말하기를, “숙씨(叔氏 숙(叔)은 적담의 자(字)임)이면서도 그 사실을 잊었단 말인가?” 하였다. 이 때문에 본국(本國)의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을 옛날의 군자들은 부끄러워하였다. 그런데 어떻게 이 책을 읽지 않을 수 있겠는가.

유주(儒州) 유득공(柳得恭)은 서(序)한다.



海東繹史序
東史 凡幾種哉 所謂古記 都是緇流荒誕之說 士大夫不言 可也 金富軾三國史 人咎其脫略不足觀 而名山石室 茫無所藏 雖金富軾 亦且奈何 然則唯有鄭麟趾高麗史而已 高麗以前何從而鏡考乎 余?欲取二十一史東國傳刪其重複 以注以辨 與三國高麗二史相依而行 則庶或有資於徵信 卒卒未遂 亦未?不去來于胸中 吾友韓大淵上舍 性恬靜喜蓄書 閉戶考古 慨然有意于東史 與余不謀而合 又推而廣之 汎濫乎正史之外 我東數千年事實 自經傳以至?稗在在散見者 幾盡搜剔抄寫 又手刀與糊 離而合 合而離 蓬首流汗 殆忘寢食 用五六年之力始分類立目 勒成一部 凡幾卷 有世紀焉 有列傳焉 天文地理禮樂兵刑輿服藝文 各有其志 則居然而史矣 名之曰海東繹史 余所有意而未遂者 一朝焉獲之 不亦快哉 東人或言東方史籍在平壤者 焚於李勣其在完山者 又焚於甄萱之敗 此亦無稽之談 東方豈有史籍 箕聖之世斯可以斷自唐虞衛滿以前 屬之不修春秋 漢四百年自是內服 樂浪太守焉得立史官哉 此所以佚事異聞 必求諸中國然後可得也 嶺東之濊 漢南之韓 蓋馬山東之沃沮 苟非陳壽 惡能知其有無哉 彼陳壽者 秉筆而書海表之事 能若是之詳者 又何也 公孫氏世襲遼東太守 立帶方郡以統韓濊諸部 司馬懿滅之 則其山川道里物産風謠 必爲太史氏所得也 自是以後曰三國 又有加羅耽牟羅之屬 皆能發使執幣 見于上國 南北諸史 從而記之 此莫非東方史籍也 幸而大淵之書 今又成矣 富哉無所不有 昔剡子朝魯 昭子問少?氏鳥名官何故也 剡子曰 吾祖也我知之 孔子聞而學之 籍談如周 不能對晉之分器 王曰叔氏而忘諸乎 是故不知本國之史者 古之君子?之 若之何不觀是書也 儒州柳得恭序

[주D-001]海東繹史序 : 경인문화사(景仁文化社)에서 영인한 《해동역사》 최남선장본(崔南善藏本)에 있는 서문(序文)을 첨부한 것이다.

 

 

 

<<< 동이총기---東夷總記 >>>

 

 ○ 군자국(君子國)이 북쪽에 있으니, 관(冠)을 쓰고 검(劍)을 차며, 짐승을 먹는다. 두 마리의 문호(文虎)를 곁에 두고 있다. 사람들이 사양하기를 좋아하여 서로 다투지 않는다. 훈화초(薰華草)가 있어서 아침에 피어났다가 저녁에 죽는다. 《산해경(山海經)》
○ 군자국은 땅이 사방 1천 리이고 목근화(木槿花)가 많다. 《고금주(古今注)》

곽박(郭璞)이 찬하기를,
동방의 기운은 어질어서 / 東方氣仁
나라에 군자가 많다 / 國有君子
훈화초를 먹으며 / 薰華是食
문호(文虎)를 부린다 / 雕虎是使
본디 예양을 좋아하고 / 雅好禮讓
예는 사리에 따른다 / 禮委論理
하였다. 《산해경찬(山海經?)》

○ 공자(孔子)가 구이(九夷) 지방에 살려고 하자, 혹자가 말하기를, “누추해서 어떻게 살겠는가?” 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군자가 살고 있는데 어찌 누추한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논어(論語)》 ○ 《설문(說文)》에는, “공자가 말하기를, ‘도가 행해지지 않으니 뗏목을 띄워 바다로 나가 구이(九夷)가 사는 곳으로 가고 싶다.’ 하였다.” 하였다.

동이에 살고 있는 사람 가운데 군자가 누구인가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동이란 주나라 조선(朝鮮) 땅이다. 기자(箕子)가 조선에 봉해져서는 도를 미루어서 풍속을 교화시켰으며, 백성들에게 예의(禮義)와 농사짓는 법과 누에 치는 법을 가르쳤다. 이에 지금까지도 그 백성들이 먹고 마심에 변두(?豆)를 귀중하게 여기고, 의관(衣冠)과 예악(禮樂)이 중국과 같다. 이는 기자가 교화를 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러니 군자가 산다는 한 구절은 아마도 기자를 가리켜서 말한 것이지 공자가 자신을 가리켜서 군자라고 한 것은 아닌 듯하다.”
하였다. 《십일경문대(十一經問對)》
살펴보건대, 동방삭(東方朔)의 《신이경(神異經)》에 이르기를,
“동방에 사람들이 살고 있으니 남자들은 모두 흰 띠에 검은 관을 쓰고 여자들은 모두 채색 옷을 입는다. 항상 공손하게 앉아 서로를 범하지 않으며, 서로 칭찬하고 헐뜯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어려움에 빠진 것을 보면 목숨을 내던지면서까지 구해 준다. 얼핏보면 바보스러운 것 같은데, 그를 이름하여 ‘선인(善人)’이라고 한다.”
하였다. 선인과 군자국은 모두 우리나라를 지칭하여 말한 것이다. 당(唐) 현종(玄宗)이 신라(新羅)를 두고 ‘군자의 나라’라고 하였고, 또 고려(高麗) 때에는 표사(表詞)에서 우리나라를 칭하여 ‘근화향(槿花鄕)’이라고 하였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군자의 나라라는 호칭이 있었는바, 공자께서 가서 살고자 하는 뜻을 가졌던 것이 어찌 이 때문이 아닌 줄을 알겠는가.

○ 동방(東方)의 오랑캐를 이(夷)라고 하는데, 머리를 풀어헤치고 몸에 문신을 새겼으며, 화식(火食)을 하지 않는 자가 있다. 《예기(禮記)》 ○ 《이아(爾雅)》에는, “구이(九夷)ㆍ팔적(八狄)ㆍ칠융(七戎)ㆍ육만(六蠻)을 일러 사해(四海)라고 한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설문(說文)》에, “이(夷)는 대(大) 자에 궁(弓) 자를 붙여 쓴 글자로, 동쪽 지방의 사람을 가리킨다.” 하였다.

○ 동이(東夷)에는 9종이 있으니, 견이(?夷)ㆍ우이(于夷)ㆍ방이(方夷)ㆍ황이(黃夷)ㆍ백이(白夷)ㆍ적이(赤夷)ㆍ현이(玄夷)ㆍ풍이(風夷)ㆍ양이(陽夷)가 그것이다. 《후한서(後漢書)》

중국 동북쪽 변경에 있는 자를 구이라고 하는데, 상고 시대 때 견이(?夷)ㆍ우이(?夷) 바로 우이(于夷)이다.ㆍ방이(方夷)ㆍ황이(黃夷)ㆍ백이(白夷)ㆍ적이(赤夷)ㆍ현이(玄夷)ㆍ남이(藍夷) 바로 풍이(風夷)이다.ㆍ양이(暘夷)라는 바로 양이(陽夷)이다. 칭호가 있었다. 《동래집(東萊集)》
구이를 또 현토(玄兎)ㆍ낙랑(樂浪)ㆍ고려(高驪)ㆍ만칙(滿飭)ㆍ부유(鳧臾)ㆍ색가(索家)ㆍ동도(東屠)ㆍ왜인(倭人)ㆍ천비(天鄙)라고도 한다. 《풍속통(風俗通)》 ○ 삼가 살펴보건대, 부유는 바로 부여(夫餘)이다. 부여기(夫餘紀)에 상세히 보인다.
구이는 동쪽에 있다. 《이아주(爾雅註)》
동방의 오랑캐에는 9종이 있다. 《논어집해(論語集解)》
살펴보건대, 구이는 바로 동북 오랑캐 종족의 총칭으로, 우리나라 강역 안에 있는 것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미 선유(先儒)들의 여러 가지 설이 있으므로 지금 모두 아울러서 기록하여 참고에 대비한다.

○ 요 임금이 희중(羲仲)에게 따로 명하여 우이(?夷)에 살도록 하니, 바로 양곡(暘谷)이란 곳이다. 떠오르는 해를 공손하게 인도하여 봄농사를 일과로 삼게 하니 날은 춘분이오 별은 주조(朱鳥)라. 이로써 중춘(仲春)에 맞게 한다. 《상서(尙書)》 ○ 살펴보건대, 《사기(史記)》에는 우이(?夷)가 욱이(郁夷)로 되어 있다.

우공(禹貢)에서 청주(靑州)에 대해 말하기를, “우이가 이미 경략하였다.” 하였으니, 우이는 청주에 살고 있었다. 요 임금이 희중(羲仲)에게 동방 청주 우이의 지역을 다스리라고 명한 것이다. 해가 나오는 곳을 이름하여 ‘양명지곡(陽明之谷)’이라 한다. 《사기정의(史記正義)》
살펴보건대, 자허부(子虛賦)에서는 제(齊)의 오른쪽은 양곡(暘谷)으로 경계를 삼는다고 하였고, 호위생(胡渭生)은 《우공추지(禹貢錐指)》에서 《한서(漢書)》를 인용하여 우이를 조선 땅이라고 하였다. 이덕무(李德懋)는 말하기를, “만약 이 설과 같다면 우이는 바로 경상도 영해(寧海)나 혹은 강원도 강릉(江陵) 등의 지역으로, 요 임금이 도읍한 곳에서 불과 6, 7천 리밖에 안 되니, 어찌 멀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 우(禹)가 9주를 평정한 다음 각각 그 직책으로 와서 공물을 바쳤는데, 황복(荒服)에 이르러서는 북쪽으로 산융(山戎)ㆍ발(發)ㆍ식신(息愼)을 무마하고, 동쪽으로는 장이(長夷)ㆍ조이(鳥夷)를 살펴보건대, 《사기정의》에는 조이(鳥夷)가 혹 도이(島夷)로 되어 있는데, 백제(百濟) 서남쪽의 바다에 있는 여러 섬에 사는 사람들을 도이라고 한다. 다음에 상세하게 나온다. 무마하여 모두 순 임금의 공을 떠받들게 하였다. 《사기》

장이(長夷)니 조이(鳥夷)니 하는 것은, 지금 《대대례(大戴禮)》를 살펴보건대, 역시 장이(長夷)라고 하였는바, 장(長)은 바로 오랑캐이다. 《사기색은(史記索隱)》
조이(鳥夷)는 동북쪽의 백성으로 새와 짐승 고기를 나누어 먹는 자들이다. 《사기주(史記註)》

○ 기주(冀州)의 도이(島夷)는 가죽 옷을 공물로 가지고 오는데, 오른쪽으로 갈석(碣石)을 끼고 황하(黃河)로 들어간다. 《상서(尙書)》 ○ 삼가 살펴보건대, 도이가 《사기》에는 조이(鳥夷)로 되어 있다.

도이는 바다 섬에 사는 오랑캐이다. 기주의 동북쪽에 있는 나라인데, 요동이나 조선의 땅과 같이 청주(靑州)에 부용(附庸)하지 않고 기주에 속한 자이다. 공물은 가죽 옷으로 바쳤는데, 《이아(爾雅)》에 이른 바 ‘동북방의 문피(文皮)’라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통감전편(通鑑前編)》
마한(馬韓)ㆍ진한(辰韓)ㆍ변진(弁辰) 삼한(三韓)은 바로 기주를 설명하는 데에서 말한 도이로 가죽 옷을 입는 자들이다. 《우공추지(禹貢錐指)》
살펴보건대, 기주의 동북쪽은 옛날에 동이의 지역이었으므로 우(禹)의 발자취가 갈석(碣石)을 오른쪽에 둔 곳까지 미쳤는데, ‘도이는 가죽 옷을 입는다.’고 하였으니, 도이는 바로 우리나라를 가리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지형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서 그 형상이 섬과 같으므로 《한서》에 ‘조선은 바다 가운데 있는 월(越)의 형상이다.’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말한 것이다. 요 임금과 순 임금 때 덕스러운 교화가 점차 퍼져 귀화하는 동이가 점차 많아지자 기주 동북쪽에 있는 의무려(醫無閭) 지방을 나누어 유주(幽州)로 삼았는데, 지금의 요하(遼河) 이서의 지역이고, 청주(靑州) 동북쪽 바다 너머의 지역을 영주(營州)로 삼았는데, 지금의 요하 이동의 지역이다. 이는 대개 후세의 기미주(羈?州)와 같이 이맥(夷貊)을 붙잡아 매어 두기 위한 것이었다.
또 살펴보건대, 《관자(管子)》 경중편(輕重篇)에서, 발(發)ㆍ조선(朝鮮)의 문채나는 가죽 옷으로 내어 폐백을 삼는다고 하였는데, 이는 바로 《상서》 우공(禹貢)에서 ‘도이는 가죽 옷을 입는 자이다.’라고 한 것이다.

○ 바다와 대산(岱山) 사이에는 청주(靑州)가 있다. 우이(?夷)가 이미 평정하였다. 《상서》

청주(靑州)를 말하면서 먼저 우이를 썼는데, 다른 여러 주를 말하면서는 이런 예가 없다. 단지 청주에는 실로 바다를 건너서 동이(東夷)가 있으며, 또 아울러서 요 임금이 희중(羲仲)에게 명하여 우이에 살면서 해가 떠오르는 것을 맞이하라고 명하였기 때문에, 특별히 앞에다가 써서 표출한 것이다. 《통감전편》

○ 회수(淮水)와 바다 사이에는 양주(揚州)가 있다. 도이(島夷)는 초복(草服)을 입는다. 《상서》

《괄지지(括地志)》에 이르기를,
“백제국(百濟國)의 서남쪽 큰 바다 가운데에 큰 섬 15개가 있다. 모두 부락이 있고 사람이 살고 있는데, 백제에 속하는 곳이다. 또 왜국(倭國)은 이름을 고쳐 일본(日本)이라 하는데, 백제의 남쪽에 있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섬에 살고 있는데, 모두 1백여 개의 작은 나라가 있다.”
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양주(揚州)의 동쪽에 있는 도이들이다. 살펴보건대, 동남쪽 오랑캐들의 초복(草服)은 갈월(葛越)이나 초죽(蕉竹) 등으로 만들어 입는데, 월(越)은 바로 모시이다. 《사기정의》

○ 하(夏)의 우(禹)가 동쪽으로 가서 구이(九夷)를 가르쳤다. 《묵자(墨子)》
○ 후상(后相)이 원년 무술에 즉위하여 상구(商邱)에 살면서 견이(?夷)를 정벌하였다. 《죽서기년(竹書紀年)》
○ 2년에 풍이(風夷)와 황이(黃夷)를 정벌하였다. 《상동》
○ 7년에 우이(于夷)가 와서 조공하였다. 《상동》
○ 견이가 와서 조공하였다. 《통감전편(通鑑前編)》

옛날에 하후씨(夏后氏) 태강(太康)이 나라를 잃자 사이(四夷)가 모두 배반하였다. 후상이 즉위함에 미쳐서 견이를 정벌하였는데, 7년이 지난 뒤 와서 조공하였다. 《후한서》

○ 소강(小康)이 즉위하고 2년이 지난 뒤 방이(方夷)가 와서 조공하였다. 《죽서기년》 ○ 살펴보건대, 《회기(會紀)》에는 원년의 일로 되어 있다.
○ 제저(帝?) 8년에 살펴보건대, 《통감전편》 및 《회기》에는 5년으로 되어 있다. 동해(東海) 및 삼수(三壽)를 정벌하여 여우 한 마리를 잡았는데, 꼬리가 9개였다. 《상동》
○ 제분(帝芬) 3년에 동쪽의 구이(九夷)가 와서 복속하였다. 《상동》 ○ 살펴보건대, 《사기》 본기(本紀)에는 제분이 제괴(帝槐)로 되어 있다.
○ 후망(后芒)이 즉위한 지 3년이 지난 뒤 구이가 와서 조공하였다. 《책부원귀(?府元龜)》
○ 후설(后泄) 21년에 살펴보건대, 후설은 16년간 재위하였는데 이곳에서는 21년이라 하였으니, 상세하지가 않다. 《통감전편》과 《회기》에는 모두 원년 을사로 되어 있다. 견이ㆍ백이(白夷)ㆍ적이(赤夷)ㆍ현이(玄夷)ㆍ풍이(風夷)ㆍ양이(陽夷)를 명하였다. 《죽서기년》

육이(六夷)가 와서 복속하였다. 이에 비로소 작명(爵命)을 가하였다. 《노사(路史)》
상(相)이 즉위하여 견이를 정벌하였다. 설(泄)에 이르러서 비로소 작명을 가하니, 이로부터 복종하였다. 《후한서》

○ 후발(后發)이 즉위하였다. 원년에 제이(諸夷)가 왕문(王門)에 조공하면서 들어와서 춤을 추었다. 《죽서기년》
○ 제계(帝癸) 3년 갑오에 삼가 살펴보건대, 《회기》에는 갑오가 을사로 되어 있다. 견이가 기(岐) 땅에 들어와서 반란하였다. 《상동》
○ 탕(湯)이 걸(桀)을 정벌하려고 하자, 이윤(伊尹)이, 공물을 저지하고 줄여서 그가 하는 짓을 보기를 청하였다. 걸이 노하여 구이(九夷)의 군사를 일으켜 정벌하였는데, 이윤이 말하기를, “아직 안 됩니다. 걸은 아직도 구이의 군사를 일으킬 수가 있습니다. 이는 죄가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탕이 걸에게 사죄하고 다시 공물을 바쳤다. 다음해에 또 공물을 바치지 않자 걸이 구이의 군사를 일으켰다. 그러나 구이의 군사가 일어나지 않았다. 이에 이윤이, 이제 된다고 말하였다. 탕이 이에 군사를 일으켜 정벌한 다음 걸을 남소(南巢)에다가 옮겨 살게 하였다. 《설원(說苑)》

성탕(成湯)이 즉위하여 견이를 정벌하였다. 이에 앞서 후걸(后桀)이 난정(亂政)을 하자 견이가 빈(?)과 기(岐) 땅 사이에 들어와서 살았는데, 성탕이 군사를 일으켜 정벌하고 그 지역을 도로 빼앗은 것이다. 《후한서》

○ 태무(太戊) 61년에 동쪽의 구이가 와서 조공을 바쳤다. 《죽서기년》
○ 중정(仲丁)이 즉위하였다. 6년에 남이(藍夷)를 정벌하였다. 《상동》
○ 하전갑(河亶甲) 4년에 남이를 정벌하였다. 《상동》
○ 주(周) 무왕(武王)이 상(商)을 이기고 드디어 구이(九夷)와 팔만(八蠻)에 길을 통하였다. 《상서》

해동의 여러 오랑캐들이 무왕(武王)이 상을 이기자 모두 길을 통하였다. 성왕(成王)이 정사를 하자 반란을 일으켰는데, 정벌하니 복종하였다. 《상서전(尙書傳)》

성주(成周)의 회합에서 서면(西面)한 자는 정북방의 양이(良夷)로, 재자(在子)이다. 《급총주서(汲?周書)》

양이는 바로 낙랑(樂浪)의 오랑캐로 기이한 짐승을 공물로 바쳤다. 《급총주서주(汲?周書註)》

○ 주공(周公)이 은(殷)을 이기고 나서 상합(商蓋)을 공격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신공 갑(辛公甲)이 말하기를, “큰 나라는 공격하기가 어렵고 작은 나라는 복종시키기가 쉽습니다. 그러니 여러 작은 나라를 복종시켜서 큰 나라를 위협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였다. 이에 구이(九夷)를 공격하니, 상합이 복종하였다. 《한비자(韓非子)》 ○ 《여씨춘추(呂氏春秋)》에는, “성왕(成王)이 서자 상(象)이 동이(東夷)에게 포학하게 굴었다. 이에 주공(周公)이 드디어 군사를 일으켜 축출하였다. 강남(江南)에 이르러 삼상(三象)을 만들어서 그 덕을 기렸다.” 하였다.
○ 성왕이 제후들과
기양(岐陽)에서 맹세하면서 초(楚)를 형만(荊蠻)으로 삼은 다음 띠풀을 엮어서 자리를 만들고 망표(望表)를 세워서 표시를 하고는 선모(鮮牟)와 더불어 횃불을 지키게 하였다. 《국어(國語)》

선모(鮮牟)는 동이의 나라이다. 《국어해(國語解)》

○ 제(齊) 환공(桓公) 23년에 북쪽으로 산융(山戎)을 정벌하고 영지(令支)를 제압하고 고죽(孤竹)을 참수하자 동이들이 비로소 복종하였다. 《책부원귀》

제나라가 바다를 건너서 동쪽으로 구이(九夷)와 통하였다. 《박물지(博物志)》
왕제(王制)에 이르기를, “동쪽의 오랑캐를 이(夷)라 한다.”고 하였다. 이(夷)란 저(?)이니, 어질어서 살리기를 좋아하여 만물이 땅에 뿌리박고 자란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천성이 유순해서 올바른 도리로 거느리기가 쉽다. 이에 심지어는 군자(君子)가 죽지 않는 나라까지 있다. 이(夷)에는 아홉 종족이 있다. 그러므로 공자가 구이(九夷)의 나라에 가서 살고자 한 것이다. 옛날에 요 임금이 희중(羲仲)에게 명하여 우이(?夷)의 지역에 살게 했는데, 양곡(暘谷)은 대개 해가 돋는 곳이다. 하후씨(夏后氏)의 태강(太康)이 덕을 잃자, 동이들이 반란하기 시작했다. 소강(小康)이 즉위한 이후로는 대대로 왕의 교화를 입어 드디어 왕의 궁문에 나와서 복종하면서 음악과 춤을 바쳤다. 걸(桀)이 폭정을 하자 여러 오랑캐들이 내침하였는데, 은(殷)의 탕(湯) 임금이 혁명을 일으켜 정벌해서 안정시켰다. 중정(仲丁)에 이르러서 남이(藍夷)가 침략해 왔다. 이로부터 3백여 년간 혹 복종하기도 하고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무을(武乙)이 쇠약하고 피폐해지자 동이가 점차 강성해졌다. 이에 드디어 회(淮)ㆍ대(岱) 지방으로 옮겨오더니, 점차 중원 지방에 살게 되었다. 무왕(武王)이 주(紂)를 멸망시키자 숙신(肅愼)이 와서 석노(石?)와 고시(?矢)를 바쳤다.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이 주나라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고는 이적(夷狄)들을 불러들였는데, 주공(周公)이 이를 정벌하여 드디어 동이가 평정되었다. 강왕(康王) 때에 숙신이 다시 왔다. 그 뒤에 서이(徐夷)가 왕호(王號)를 참칭하고는 구이를 이끌고 주나라를 쳐서 서쪽으로 황하(黃河) 가에까지 이르렀다. 목왕(穆王)은 그들의 기세가 한창 치성한 것을 두려워하여 동쪽 지방의 제후들을 나눈 다음 서언왕(徐偃王)에게 이들을 다스리게 하였다. 여왕(?王)이 무도하자 회이(淮夷)가 쳐들어왔다. 이에 왕이 괵중(?仲)에게 명하여 정벌하게 하였으나 패하고 말았다. 선왕(宣王)이 다시 소공(召公)에게 명하였는데, 정벌하여 평정하였다. 유왕(幽王)에 이르러서 유왕이 몹시 음란하자 사방의 오랑캐가 번갈아 쳐들어왔다. 제(齊) 환공(桓公)에 이르러서 패업(?業)을 이루어 이들을 퇴각시켰다. 초(楚)나라 영왕(靈王)에 이르러서 신(申) 땅에서 회맹(會盟)할 때 역시 와서 회맹에 참여하였다. 그 뒤에 월(越)나라가 낭야(瑯?)로 옮겼을 때 이들이 월나라와 함께 전쟁을 일으켜, 드디어 중국을 업신여기고 작은 나라들을 침략하였다. 진(秦)나라가 육국(六國)을 병합하자 회이(淮夷)와 사이(泗夷)들이 모두 흩어져서 민호(民戶)가 되었다. 진섭(陳涉)이 기병하여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연(燕) 사람 위만(?滿)이 난을 피하여 조선(朝鮮)으로 가서 그곳의 왕이 되었는데, 1백여 년 뒤에 한 무제(漢武帝)가 멸망시켰다. 이에 동이가 비로소 상경(上京)과 통하게 되었다. 《후한서》
넓은 골짜기와 큰 냇물 간에는 제도가 서로 다르고 사람들이 그 사이에 살면서는 풍속이 서로 달라, 좋아하는 것이 같지 않고 언어가 통하지 않는 법이다. 성인이 이를 인하여 가르침을 베풀었는바, 이는 그들의 뜻을 서로 통하게 하고 풍속을 서로 통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구이(九夷)들이 사는 곳은 중국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러나 천성이 유순하여 포악한 기풍이 없다. 이에 아득히 먼 산골짜기와 바닷가에 살고 있기는 하지만 올바른 도리로 이끌기가 쉽다. 하(夏)나라 때에는 가끔씩 와서 조회하기도 하였다. 기자(箕子)가 조선 땅으로 피하여 감에 미쳐서 비로소 팔조(八條)의 금법(禁法)을 만들었는데, 소략하나 빠뜨린 것이 없었고 간략하나 오래 시행할 수가 있었는바, 그 교화에 감화된 바가 천년 동안 끊어지지 않았다. 지금 요동의 여러 나라들이 혹 의복의 제도에 있어서 관면(冠冕)을 사용하기도 하고, 음식을 먹을 때 조두(俎豆)와 같은 그릇을 쓰기도 한다. 그리고 경술(經術)을 숭상하고 문사(文史)를 좋아하여 중국의 서울로 유학 오는 자들이 줄을 잇고 있으며, 혹 죽을 때까지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있는 자들도 있다. 참으로 선철(先哲)의 유풍이 아니라면 그 누가 이처럼 되게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공자가 말하기를, “말이 믿음직하고 행실이 독실하면 오랑캐의 나라에서도 통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는데, 이 말이 참으로 믿을 만하다. 그들의 풍속 가운데서 채납할 만한 것이 어찌 고시(?矢)를 바친 그 일뿐이겠는가. 《북사(北史)》


부록(附錄)
○ 청구국(靑邱國)이 그 북쪽에 있다. 그곳 사람들은 오곡을 먹으며 사백(絲帛)을 입는다. 혹은 조양(朝陽)의 북쪽에 있다고도 한다. ○ 청구(靑邱)의 나라에는 여우가 있는데, 꼬리가 아홉 개다. 태평 시절에는 나와서 상서를 알린다. 온순하고 소박한 백성들이 있으니, 이곳이 바로 영토(?土)의 나라이다. 영(?)은 비옥하고 아름답다는 뜻이다. ○ 《이상 모두 산해경》
○ 찬하기를,

청구에 사는 기이한 짐승 / 靑邱奇獸
꼬리가 아홉 달린 여우라네 / 九尾之狐
도가 있는 세상이면 나타나는데 / 有道翔見
나타날 땐 글을 물고 나타난다네 / 出則銜書
상서로움을 전문(篆文)에 나타내어 / 作瑞周文
신령스러움을 표시한다네 / 以標靈符

하였다. 《산해경찬》
○ 황제(黃帝)가
치우(蚩尤)를 청구에서 죽이고 강고곡(?鼓曲) 10장을 만들었다. 《귀장(歸藏)》 ○ 《포박자(抱朴子)》에는, “황제(黃帝)가 동쪽으로 청구에 도착해서 풍산(風山)을 지나다가 자부(紫府) 선생을 만나 삼황내문(三皇內文)을 받아 이로써 만신(萬神)을 불렀다.” 하였다. ○ 《회남자(淮南子)》에는, “요 임금이 예(?)를 시켜서 청구의 못에서 대풍(大風)을 돌리게 하였다.” 하였다. ○ 《여씨춘추》에는, “우(禹)가 동쪽으로 가서 큰 나무가 있는 곳, 구진(九津)에서 해가 떠오르는 청강(靑羌)의 들판, 나무가 모여 있는 곳, 하늘까지 닿은 큰 산, 조곡(鳥谷) 청구(靑邱)의 향(鄕), 흑치(黑齒)의 나라에 이르렀다.” 하였다. ○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에는, “청구는 고려의 경계 안에 있다. 자허부(子虛賦)에, ‘가을에 청구에서 사냥한다’ 하였으니, 대개 이것을 말한 것이다. 복건(服虔)이 말하기를, ‘청구국은 해동 3백 리 되는 곳에 있다’ 하였고, 《진서(晉書)》 천문지(天文志)에 ‘청구 칠성(靑邱七星)은 진수(軫宿)의 동남쪽에 있는데, 청구는 만이(蠻夷)의 나라 이름이다.’ 하였고, 당나라가 고구려를 토벌하고는 청구도 행군총관(靑邱道行軍摠管)을 두었다고 한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곽박(郭璞)이 말하기를, “우(禹)가 수해(竪亥)에게 청구의 북쪽을 명하였다.” 하였고, 《회남자》에 말하기를, “청구는 제(齊)의 바다 바깥에 있다.” 하였으니, 청구라는 것은 대개 동방에 있는 나라이다. 《천문유초(天文類抄)》에 “청구 칠성은 동방 삼한(三韓)의 나라를 주관한다.” 하였으니, 이것 역시 지역으로 이름한 것이다.

한안(韓雁)은 바다 가운데 도주(都州)의 남쪽에 있다. 《산해경》
○ 한안과
시구(始鳩)는 바닷가에 있다. 《산해경찬》
《산해경》에서 이른 바 한안은 바로 지금의 요동인 듯하다. 《산해경석의》

[주C-001]동이(東夷) : 동이라고 하는 명칭은 중국의 입장에서 볼 때 동방 민족, 즉 산동반도(山東半島)와 회하(淮河) 유역 및 발해(渤海) 연안과 그 이동(以東)의 민족을 지칭하고 있다. 대개 한(漢)나라를 전후로 하여 동이의 지리적인 위치가 약간 다른데, 은주(殷周) 시기의 동이는 산동반도 및 회하 유역의 민족을 지칭하였고, 그 후 전국 시대와 한(漢)나라 이후의 동이는 발해 연안 내지 그 이동의 여러 민족을 지칭하였다.
[주D-001]문호(文虎) : 얼룩무늬가 있는 호랑이를 말한다. 최남선(崔南善)은 군자국의 이러한 정경을 우리 민속 가운데 산신(山神)이나 혹은 독성(獨聖)을 묘사한 것으로 보고 있다.
[주D-002]훈화초(薰華草) : 무궁화 꽃을 말한다.
[주D-003]자허부(子虛賦) : 한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지은 부이다.
[주D-004]발(發)ㆍ식신(息愼) : 이 부분이 《관자》 권23 규도편 경중갑에는 ‘발조선(發朝鮮)’으로 되어 있다. 이 부분의 해석에 대해서는 ‘발(發)의 조선(朝鮮)’으로 해석하는 설과 ‘발과 조선’으로 해석하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한편 경인문화사에서 영인한 《표점 교감 사기》에는 ‘발’과 ‘식신’을 두 종족으로 구별하여 해석하였다. 김정학(金廷鶴)은 “숙신과 조선은 고대의 음이 약간은 차이가 있으나, 《관자》에서는 ‘발ㆍ조선’이라고 한 것을 《사기》에서는 ‘발ㆍ식신’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서도 같은 부족명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고 하여, 숙신과 조선을 동일한 부족으로 보았으며, 발과 식신을 두 개의 부족으로 구별하여 서술하고 있다.《한국 상고사의 제문제, 정신문화연구원, 1987》 천관우(千寬宇)는 “《일주서(逸周書)》의 ‘발인(發人)ㆍ녹인(鹿人)’의 예로 보아 ‘발조선’도 역시 ‘발과 조선’으로 읽는 것이 좋다.”고 하여 두 종족으로 보았다.《古朝鮮史三韓史硏究, 일조각, 1989, 77쪽 주》 북한의 《조선전사》에는 “중국의 옛날 책들에 고조선족을 ‘발조선’이라 한 것은 고조선족을 박달족이라고 하였다는 것을 시사해 주는 것일 수도 있다. 박달에서의 ‘박’은 백악산(白岳山)이나 태백산(太白山)에서의 백(白)과 같은 뜻으로서 그 어원은 ‘밝다’이며, ‘밝’은 ‘박’이나 ‘발’로 발음된다. 따라서 ‘발조선’의 ‘발’은 고조선족이 자기족을 표시하여 부르던 박달에서 온 이름이라고 생각된다.”고 하여 ‘발조선’을 하나로 보았다.《조선전사 권2 고조선사》 이 ‘발식신’ 부분은 《관자》의 ‘발조선’ 부분과 함께 신채호(申采浩) 등 ‘막ㆍ진ㆍ번 삼조선(莫眞番三朝鮮)’ 논자들의 중요한 논거가 되고 있는데, 이에 대해 북한의 이지린은 “어떤 자는 ‘발ㆍ조선’을 ‘발조선’으로 해석하여 조선을 국호가 아니라, 그것이 마치 종족명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으나, 나는 이에 대해 동의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고조선연구, 과학원출판사, 1963, 12쪽》 지금 번역하면서는 발과 식신으로 나누어 번역하였다.
[주D-005]갈석(碣石) : 갈석은 조선 후기 실학파(實學派) 이래로 ‘조선’과의 관련 가능성이 지적되어 왔는데, 그 위치에 대해서는 예전부터 큰 혼란이 있어 왔다. 《통전》에는 고구려 구계(舊界)인 낙랑군(樂浪郡) 수성(遂城)이라는 설, 난하(?河) 하류의 노룡(盧龍)이라는 설, 상곡군(上谷郡) 역현(易縣) 방면의 수성(遂城)이라는 설을 열거하고 있으며, 국내에는 갈석산이 한반도의 낙랑군 수성현(遂城縣)에 있었다고 하는 견해가 예로부터 있어 왔고, 또 그와는 반대로 낙랑군이 본래부터 평양이 아니라 난하 하류였다고 하는 견해가 있어 왔다.《천관우, 古朝鮮史三韓史硏究, 일조각, 1989, 120쪽 주》 북한의 이지린은 산해관(山海關) 부근이라 하였다.《고조선연구, 과학원출판사, 1963, 210쪽》
[주D-006]의무려(醫無閭) : 산의 이름으로, 광녕우위(廣寧右?)의 서쪽 5리에 있는 산이며, 사산(蛇山), 반산(盤山), 첨산(添山), 백운산(白雲山), 안산(鞍山) 등 12개의 산으로 이루어져 있다.《讀史方輿紀要 卷37 山東條》
[주D-007]성주(成周) :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낙양현(洛陽縣)의 동북쪽에 있는 지명이다. 주(周)나라 경왕(敬王) 때 이곳으로 도읍을 옮겼으며, 전국 시대 때에는 낙양(洛陽)이라고 이름을 고쳤다.
[주D-008]기양(岐陽) :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부풍현(扶風縣) 서쪽에 있던 옛 지명이다.
[주D-009]산융(山戎) : 춘추 시대 때 지금의 하북성(河北省) 북방 천안현(遷安縣)의 산간 지대에 살던 오랑캐의 족속으로, 바로 후대의 흉노족(凶奴族)을 가리킨다.
[주D-010]영지(令支) : 춘추 시대 때 산융(山戎)의 속국(屬國)으로 있던 종족이다. 지금의 하북성 천안현 일대에서 살았다.
[주D-011]고죽(孤竹) : 상(商)나라 때의 나라 이름으로, 지금의 하북성 노룡현(盧龍縣)에서부터 열하성(熱河省) 조양현(朝陽縣) 일대에 있었다.
[주D-012]숙신(肅愼) : 만주 동쪽에 거주하던 종족으로, 고조선 때 만주 동쪽에서 수렵 생활을 하고 있었다. 고구려 서천왕(西川王) 때 종족의 일부가 병합되었고, 광개토왕 때 완전히 병합되었다. 뒤에 숙신의 후예로 추정되는 말갈(靺鞨), 읍루(揖婁)의 종족이 일어났다. 식신(息愼), 직신(稷愼) 등으로도 표기된다.
[주D-013]석노(石?)와 고시(?矢) : 석노는 돌화살촉이며, 고시는 고나무로 만든 화살이다. 고나무는 백두산에서 나는데, 견고하고 곧아서 그것으로 화살대를 만들면 습기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한다. 석노와 고시는 모두 고대에 우리나라에서 중국에 공물로 바쳤다.
[주D-014]회이(淮夷) : 주나라 때 회수(淮水)의 남쪽과 북쪽에 있던 동이(東夷)로, 서이(徐夷)와 함께 산동(山東) 해안 지역에 할거하면서 노(魯)와 주(周)를 침공하는 일이 잦았다. 《사기》 주본기(周本紀)에 “소공(召公)이 보(保)가 되고 주공(周公)이 사(師)가 되어 동쪽으로 회이(淮夷)를 정벌하였다.” 하였고, 노주공세가(魯周公世家)에 “관숙(管叔), 채숙(蔡叔), 무경(武庚) 등이 과연 회이를 거느리고 반란을 일으키자, 주공이 성왕(成王)의 명을 받들어 군사를 일으켜 동쪽으로 정벌하였다.” 하였다.
[주D-015]위만(?滿) : 《사기》에는 만(滿)으로 되어 있으며, 《삼국유사》에는 위만(魏滿)으로 되어 있다. 위(?)가 만(滿)의 씨성(氏姓)인지 아닌지 분명치 않으나, 일반적으로 이를 씨성으로 간주하여 그의 나라를 위씨조선(?氏朝鮮)이라 명명하고 있다.
[주D-016]팔조(八條)의 금법(禁法) : 이른바 기자(箕子)가 지었다고 하는 고조선의 법률을 말한다. 고조선에는 일찍부터 8개의 금법이 있어 각종 범죄를 처벌하였는데, 그 가운데 현재 사람을 죽인 자는 죽인다[相殺償以命], 사람을 상하게 한 자는 곡물로 보상한다[相傷以穀償],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그 집의 노비로 삼는다[相盜者沒爲其家奴婢]는 3개 조항만이 전하고 나머지는 전하지 않는다. 이수광(李?光)은 《지봉유설(芝峯類說)》 권2 제국부(諸國部) 본국조(本國條)에서 “오륜(五倫)을 합해 8조목인 듯하다.” 하였고, 안정복(安鼎福)은 《동사강목(東史綱目)》 기자조(箕子條)에서 “팔조는 아마도 홍범(洪範)의 팔정(八政)을 가리키는 듯하다.” 하였다. 이병도(李丙燾)는 “오늘날 기자의 동래(東來), 동봉설(東封說)을 부인하는 입장에서 볼 때 소위 낙랑조선민(樂浪朝鮮民)의 범금팔조(犯禁八條)란 것은 기자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조선의 본유본래(本有本來)의 법금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하였다.《이병도, 韓國古代史硏究, 박영사, 1976, 58쪽》 북한(北韓)의 이지린은 “범금팔조는 고조선 국가가 실시했던 역사적 사실이며, 기자가 팔조의 금법을 만들었다고 하는 전설은 고조선의 범금팔조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반고(班固)의 주관인 것이다.” 하였다.《이지린, 고조선연구, 과학원출판사, 1963, 353쪽》
[주D-017]치우(蚩尤) : 황제(黃帝) 때의 제후(諸侯) 이름으로, 《상서(尙書)》 공안국전(孔安國傳)에서는 옛 구려국(九黎國)의 임금이라고 하였고, 《예기》 정현(鄭玄)의 주(注)에서는 삼묘(三苗)를 치우라고 하였으며, 응소(應邵)는 옛날의 천자(天子)라고 하여 그 설이 서로 다르다. 《사기(史記)》 오제기(五帝紀)에는, “치우가 난을 일으켜 황제의 명을 따르지 않았다. 이에 황제가 제후들에게서 군사를 징발하여 치우와 더불어 탁록(?鹿)의 들판에서 싸워 드디어 치우를 사로잡아 죽였다.” 하였다.
[주D-018]강고곡(?鼓曲) : 악곡(樂曲)의 이름으로, 《구당서(舊唐書)》 음악지(音樂志)에는 “진뢰경(震雷驚), 맹호해(猛虎駭) 등 10개의 곡이 있는데, 그 내용을 지금은 상고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주D-019]풍산(風山) : 청구국에 있는 산의 이름으로, 이곳에는 항상 뇌성벽력이 치며, 자부궁(紫府宮)이 있어 천진선녀(天眞仙女)가 그곳에서 노닌다고 한다.
[주D-020]수해(竪亥) : 하(夏)나라 사람으로 걷기를 잘했던 사람의 이름이다. 우 임금이 그를 시켜서 거리를 재게 하였다 한다.
[주D-021]한안(韓雁) : 명나라 왕숭경(王崇慶)은 지금의 요동 부근에 있던 나라의 이름으로 보았으며, 최남선(崔南善)은 한안이 한(韓)ㆍ한(寒) 등의 글자와 마찬가지 글자로, 동이(東夷)의 국가를 표현한 것으로 보았다.
[주D-022]시구(始鳩) : 옛 나라의 이름이라고도 하며, 또 새의 이름이라고도 한다.

 

 

<<< 단군조선---檀君朝鮮 >>>

 

살펴보건대, 《사기색은(史記索隱)》에 이르기를, “조(朝)의 음은 조(潮)이고 선(鮮)의 음은 산(汕)이다. 조선에는 산수(汕水)가 있으므로 그렇게 명한 것이다.” 하였고, 복생(伏生)이 쓴 《상서대전(尙書大傳)》에 이르기를, “기자(箕子)가 조선으로 달아나자 무왕(武王)이 이를 듣고는 그곳에다 봉(封)하였다.” 하였다. 그렇다면 기자 이전에도 조선이라는 칭호가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단군 시대 때의 조선을 칭하는 것인지의 여부는 분명하지가 않다. 《여사(麗史)》에서 단군 시대를 전조선(前朝鮮)이라고 하고 기자 시대를 후조선이라 하였기 때문에 지금 그대로 따른다.

○ 당요씨(唐堯氏)가 천하의 임금으로 있은 지 29년째인 무진(戊辰)에 단군씨(檀君氏)가 서서 처음으로 도읍을 다스렸는데, 평양(平壤)에다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조선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단군조선(檀君朝鮮)이다. 환웅(桓雄)은 천신(天神) 환인(桓因)의 아들이다. 태백산(太白山)의 박달나무 아래로 내려와 사람으로 변하여 웅녀(熊女)와 합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박달나무 아래에서 낳았으므로 인하여 단군이라고 하였다. 단군의 이름은 검(儉)으로, 나면서부터 신명하여 구이(九夷)가 임금으로 삼았다. 은씨(殷氏) 무정(武丁) 8년 을미에 단군이 구월산(九月山)으로 들어가서 신이 되었다고 한다. 나이가 1천 48세였다. 《조선세기(朝鮮世紀)》

살펴보건대, 우리나라의 사책에서 말하는 단군에 대한 일은 모두가 허황하여 이치에 맞지 않는다. 단군이 맨 먼저 났으니 반드시 그 사람에게는 신성한 덕이 있었을 것이다. 옛날에 신성한 사람이 태어남에는 참으로 일반 사람들보다 특이한 일이 있기는 하나, 어찌 이처럼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경우가 있었겠는가. 고기(古記)에 나오는 ‘환인(桓因)’이니 ‘제석(帝釋)’이니 하는 등의 말은 《법화경(法華經)》에 나오는 말인바, 신라(新羅)와 고려(高麗) 시대에 불교를 숭상하였으므로 그 폐해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다. 우리나라가 여러 차례 병화(兵火)를 겪어 비장(?藏)되어 있었던 국사(國史)가 모두 불타 남아난 것이 없게 되고, 승려들이 기록한 것만이 암혈 속에서 보존되어 후세에 전해졌다. 이에 역사를 쓰는 자들이 기록할 만한 것이 없어서 답답한 나머지 간혹 이를 정사(正史) 속에 편찬해 넣었다. 그런데 세대가 오래될수록 그 말이 사실로 굳어져서 중국에까지 흘러들어가 드디어는 인현(仁賢)의 나라인 우리나라를 말이 괴이한 나라로 만들고 말았으니, 통탄을 금할 수 없다.
또 살펴보건대, 《회기(會紀)》에 상(商)나라 무정 8년은 을미년이 아니라 갑자년으로 당요 무진년부터 무정 갑자년까지는 1천 17년이 된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의 사서에서는 모두 단군의 나이가 1천 48년이라고 하고 있으니, 그 설이 이치에 맞지 않아 상고할 수가 없다.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시에,
몇 대를 이어왔는지 모르겠으나 / 傳世不知幾
지난 햇수는 천년이 넘더라 / 歷年曾過千

하였는데, 이는 대개 1천 17년으로 세대를 전한 햇수를 삼은 것으로, 이 설이 옳다.

 

 

<<< 기자조선---箕子朝鮮 >>> 

 

○ 기자(箕子)는 주(紂)의 친척이다. 주가 처음에 상아로 젓가락을 만들자 기자가 이를 탄식하여 말하기를,

“상아로 젓가락을 만들었으니 반드시 옥술잔을 만들 것이고, 옥술잔을 만들면 반드시 먼 외방의 진기하고 괴상한 물품을 좋아할 것이다. 수레와 말과 궁실을 호화롭게 꾸밀 조짐이 이로부터 시작되어 진작될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주가 음란한 행실을 하자 기자가 이를 간하였으나 주가 따르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떠나는 것이 옳다.” 하니, 기자는,

“남의 신하가 되어 간하다가 듣지 않는다고 해서 떠난다면 이는 임금의 악을 드러내어서 스스로 백성들에게 환심을 사는 것이다. 나는 차마 그렇게는 못하겠다.”

하였다. 그러고는 머리를 풀어 헤치고 거짓 미친 체하여 남의 종이 되었다가 마침내 숨어 버리고는 거문고를 타면서 스스로 슬퍼하였다. 그런 까닭에 세상에서는 이를 ‘기자조(箕子操)’라고 전한다. 《사기》 ○ 《고시기(古詩紀)》의 기자조(箕子操)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아아, 주왕이 무도하여 비간을 살해했도다. 아아, 어찌하여 홀로 옻칠을 해 몸을 헐게 하고 머리를 풀어 헤쳐 미친 체하였나. 지금 종묘를 어찌하리오. 하늘이여, 하늘이여, 돌을 안고 강물 속으로 뛰어들고 싶구나. 아아, 사직을 어찌하리오.[嗟嗟 紂爲無道殺比干 嗟復嗟 獨奈何漆身爲? 被髮以佯狂 今奈何宗廟 天乎天哉 欲負石自投河 嗟復嗟 奈社稷何]”

사마정(司馬貞)이 말하기를,
“사마표(司馬彪)는 기자의 이름이 서여(胥餘)라고 하였다. 마융(馬融)과 왕숙(王肅)은 기자를 주의 제부(諸父)라고 하고, 복건(服虔)과 두예(杜預)는 주의 서형(庶兄)이라고 하였다.”
하였다. 《사기주(史記註)》
살펴보건대, 《유하동집(柳河東集)》의 기자비주(箕子碑註)에 “기자의 이름은 수유(須臾)이다.” 하였는데, 사마표는 이름이 서여(胥餘)라고 하였는바,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기에 지금 두 가지를 다 기록하여서 참고하게 한다.

○ 제신(帝辛) 51년에 기자를 가두었다. 《죽서기년(竹書紀年)》 ○ 살펴보건대, 제신의 재위는 32년밖에 안 되니, 여기에서 말한 51년은 잘못된 것이다. 《회기(會紀)》에는 32년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 주나라 무왕이 상나라의 정사를 뒤엎고는 정사를 예전대로 회복한 다음 기자를 석방하였다. 《상서(尙書)》
○ 무왕이 은나라를 이기고서 기자를 찾아와 물으니, 기자가 홍범(鴻範)으로 대답하였다. 이에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다가 봉하고 신하로 삼지 않았다. 《사기(史記)》

《서전(書傳)》에 이르기를,
“무왕이 기자를 석방하니 기자가 주나라가 석방해 주는 것을 차마 받아들이지 못하여 조선 땅으로 도망쳤다. 무왕이 그 사실을 듣고는 인하여 조선에다가 기자를 봉하였다. 기자가 이미 주나라에서 봉해 주는 것을 받고는 신하로서의 예를 갖추지 않을 수 없으므로 13년 만에 와서 조회(朝會)하였다. 무왕이 기자가 조회를 오는 것을 인하여 홍범(洪範)을 물었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이 서(序)에서 “기자에게 돌아가서 홍범을 짓게 하였다.” 하였으니, 이미 기자가 갇힌 것을 풀어 주고 즉시 돌아가게 한 것이지 달아나게 하였다가 뒤에 와서 조회하게 한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그리고 조선에서 주나라까지의 거리가 1만 리나 되니, 기자가 있는 곳을 들은 뒤 봉하고, 봉작을 받고 와서 조회하자면 반드시 여러 해가 지났을 것으로, 그대로 12년간을 있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사기》의 송세가(宋世家)에서 “이미 홍범을 짓자 무왕이 이에 조선에다가 봉하였다.” 한 것이 사실을 제대로 말한 것이다. 《상서소(尙書疏)》
살펴보건대, 기자는 주 무왕 원년 기묘에 봉작을 받았는데, 《통감전편》에도 역시 이해로 되어 있다. 그런데 《갑자회기(甲子會紀)》에서는 “성왕(成王) 3년 무자(戊子)에 미자(微子)를 송(宋)에 명하고 기자를 고려(高麗)에 명하였다.” 하였으니, 이는 틀린 것이다. 무왕이 상(商)을 정벌하고 즉시 여러 성인의 후손들을 봉하였다. 그러므로 《사기》와 《상서대전》에 모두 기자가 봉작을 받은 것이 무왕 때라고 하였는바, 이것이 옳다.

○ 기자가 중국 사람 5천 명을 거느리고 조선으로 들어갔는데, 시서(詩書), 예악(禮樂), 의약(醫藥), 복서(卜筮)를 하는 자들이 모두 따라 갔다. 시서로써 사람들을 가르쳐서 사람들로 하여금 중국 예악의 제도를 알게 하였으며 위문(?門), 관제(官制), 의복(衣服) 등의 제도를 모두 중국의 것을 따랐다. 《삼재도회(三才圖會)》
○ 은나라의 도가 쇠해지자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 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사기》에 ‘무왕이 주를 정벌하고서 기자를 조선에다가 봉하였다.’고 하였으니, 이것과 다르다.” 하였다.
그곳의 백성들에게 예의와 누에 치는 법과 직조술(織造術)을 가르쳤으며, 낙랑ㆍ조선 백성들의 범금팔조(犯禁八條)는……[敎其民以禮義田蠶織作 樂浪朝鮮民犯禁八條……] 《한서》 ○ 풍속지(風俗志)와 형지(刑志)에 상세히 보인다.
○ 기자가 평양(平壤)에 도읍하였다. 이것이 후조선(後朝鮮)이다. 《초학집시주(初學集詩註)》
○ 무왕 16년에 기자가 와서 조빙(朝聘)하였다. 《죽서기년(竹書紀年)》
○ 기자가 주나라로 조빙하러 가는 길에 은나라의 옛 도읍터를 지나다가 궁실이 모두 무너지고 그 자리에 벼와 기장이 자라는 것을 보았다. 기자가 몹시 상심하였으나, 목 놓아 울자니 옳지 않고, 눈물을 흘리자니 아낙네와 같겠기에 맥수시(麥秀詩)를 지어 노래를 불렀다. 시는 예문지(藝文志)에 보인다. 은나라 백성들이 그 노래를 듣고는 모두 눈물을 흘렸다. 《사기》

무왕이 상나라를 쳐부순 다음 기자를 조선에다가 봉하고는 신하로 대우하지 않았다. 그러니 ‘주나라에 조빙하였다.’는 것은 이른바 주나라에 손님으로 갔다는 말이다. 《남풍집(南?集)》
살펴보건대, 주나라에 조빙한 일에 대해서 《사기》와 《죽서기년》에는 모두 기자의 일로 기록하였는데, 유독 《상서대전》에서만은 맥수가를 미자(微子)가 지은 것으로 기록하였다. 이에 뒷사람들이 이것과 ‘신복(臣僕)이 되지 않았다.’는 말을 이끌어 대어 기자가 반드시 주나라에 조빙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는데, 이 설은 틀렸으며, 증공(曾鞏)의 설이 옳다. 그리고 《춘추좌전》으로 증명해 보면, 희공(僖公) 15년에 진 목공(秦穆公)이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당숙(唐叔)이 봉해졌을 때 기자가 ‘그 후손이 반드시 창성할 것이니 진(晉)이 어찌 바라겠는가.’ 하였다 한다.” 하였다. 기자가 봉작을 받았을 때에는 당숙은 태어나지도 않았으니, 참으로 조회하러 오가지 않았다면 이 말이 어떻게 나왔겠으며, 비록 사사로이 말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저 서융(西戎)의 임금이 어떻게 그것을 들을 수 있었겠는가.
태사공(太史公)이 찬하기를,
아, 기자여 / 嗟箕子乎
아, 기자여 / 嗟箕子乎
바른 말을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 正言不用
이에 도리어 종이 되었구나 / 乃反爲奴
하였다. 《사기》
사마정(司馬貞)이 찬하기를,
은나라에 세 사람의 어진 이가 있었는데 / 殷有三仁
미자와 기자는 주왕의 친척이었네 / 微箕紂親
한 사람은 갇히고 한 사람은 떠나가서 / 一囚一去
자신의 일신을 돌아보지 않았다네 / 不顧其身
아름다운 그 사실 찬미하는 시인 있고 / 頌美有客
서경에선 손님으로 대우했다 칭하였네 / 書稱作賓
마침내 집안의 후사를 전하여서 / 卒傳家嗣
그로써 떳떳한 인간 도리 폈다네 / 式敍?倫
하였다. 《사기색은》
도잠(陶潛)이 찬하기를,
고국을 떠나는 서글픈 마음에도 / 去鄕之感
오히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법인데 / 猶有遲遲
하물며 나라가 뒤바뀌는 즈음을 당하여 / ?伊代謝
보이는 사물마다 모두 다른 데이랴 / 觸物皆非
애처롭고 애처로운 불쌍한 저 기자여 / 哀哀箕子
어찌 능히 그 마음이 편하였다 하리오 / 云胡能夷
기자가 지어 부른 교동 노래 들으니 / 狡童之歌
그 곡조 처연하고 그 소리 비통하네 / 悽矣其悲
하였다. 《도정절집(陶靖節集)》
살펴보건대, 기자는 40년간 재위하고 주 성왕(成王) 33년 무오에 훙(薨)하니, 나이가 93세였다.

○ 기자가 죽은 뒤에 조선후(朝鮮侯)는 주나라가 쇠약해지자 연(燕)나라가 스스로를 높여서 왕이라 하면서 동쪽으로 치려고 하는 것을 보고는 또한 스스로 왕이라 칭하면서 군사를 일으켜 연을 쳐서 주나라 왕실을 높이 받들려고 하였다. 그러다가 대부(大夫) 예(禮)가 간하자 중지하였다. 그러고는 예로 하여금 연나라로 가서 유세하게 하니, 연나라도 멈추고서 공격하지 않았다. 그 뒤에 자손들이 점점 교만해지자, 연나라에서 장수 진개(秦開)를 보내어 서쪽 지방을 공격하여 2천여 리의 지역을 차지한 다음 만반한(滿潘汗)으로 경계를 삼았다. 이에 조선이 비로소 약해졌다. 《위략(魏?)》
○ 조선이 진(秦)나라의 전성기 때부터 복종하여 신하가 되었는데, 뒤에 또 험준한 곳에 군사를 주둔시키고는 진출하려고 꾀하였다. 《사기(史記)》 율서(律書) ○ 《사기》의 시황본기(始皇本紀)에는, “26년에 천하를 나누어 36군으로 만들었는데, 지역이 동쪽으로는 바다와 조선에까지 이르렀다.” 하였다.
○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고서
몽염(蒙恬)을 시켜서 장성(長城)을 쌓아 요동에까지 이르게 하였다. 이때에 조선 왕 비(否)가 즉위하고는 진나라가 습격할 것이 두려워 진나라에 복속하기는 하였으나 조회(朝會)하려고 하지 않았다. 비가 죽고 그의 아들 준(準)이 즉위하였는데, 20여 년 만에 진섭(陳涉)과 항적(項籍)이 기병(起兵)하였다. 살펴보건대, 진시황 33년 정해(丁亥)에 진나라에서 장성을 쌓았고, 5년 뒤인 이세(二世) 원년 임진(壬辰)에 진섭(陳涉)과 항적(項籍)이 기병하였으니, 여기에서 20여 년이라 한 것은 틀린 것이다.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연(燕)ㆍ제(齊)ㆍ조(趙)의 백성들이 이를 근심하여 점점 도망쳐 조선의 준(準)에게 귀화하였다. 《후한서》에는 도망친 자가 수만 명이었다고 하였다. 준은 이들을 서쪽 지방에서 살게 하였다. 《위략》
○ 기자가 죽은 뒤 40여 세대가 지나서 조선후(朝鮮侯) 준(準)이 스스로 왕이라고 칭하였다. 《후한서》
○ 한(漢)나라 때에 이르러서 노관(盧?)을 연왕(燕王)으로 삼고 조선과는
격수(?水)를 경계로 하였다. 그 뒤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하여 흉노(凶奴)로 들어감에 미쳐서, 연나라 사람 위만(?滿)이 망명하여 오랑캐의 옷을 입고 동쪽으로 격수를 건너와 준에게 가서 항복하였다. 그러고는 준을 설득하여 서쪽 경계에 있는 옛 중국 땅에 살면서 망명해 온 자들과 함께 조선의 번병(藩屛)이 될 것을 청하였다. 준은 그를 믿고 총애하여 박사(博士)를 제수하고 규(圭)를 주고 1백 리의 땅을 봉하여 준 다음 서쪽 변방을 지키게 하였다. 위만은 도망해 온 무리들이 조금 많아지자 준에게 사람을 보내어, 한나라의 군사가 열 갈래의 길로 나누어 쳐들어온다고 거짓으로 고한 다음, 들어가서 숙위(宿?)하겠다고 청하였다. 그러고는 도리어 준을 공격하였다. 준은 위만과 싸웠으나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위략》 ○ 삼가 살펴보건대, 격(淏)은 패(浿)의 잘못으로 기자강역조(箕子疆域條)에 상세히 보인다.
○ 조선후 준이 이미 참호(?號)하여 왕이라 칭하다가 위만에게 공격당하여 나라를 빼앗겼다. 이에 부하들과 궁인들을 거느리고 바다로 들어가서 한(韓) 땅에 살면서 스스로 한왕(韓王)이라고 칭하였다. 《삼국지(三國志)》 ○ 《박물지(博物志)》에는, “기자가 조선에 살았다. 그 뒤에 연(燕)을 정벌하고 다시 조선으로 갔다가 도망하여 바다로 들어가서 선국사(鮮國師)가 되었다. 두 처(妻)는 묵색(墨色)이고, 두 마리의 푸른 뱀을 귀에 걸치고 있으니, 대개 구망(句芒)이다.” 하였다.

고조선은 1천여 년을 누리다가 한나라 고제(高帝) 때 이르러 멸망하였다. 《통전(通典)》
살펴보건대, 주나라 무왕(武王) 원년 기묘에 기자가 봉작을 받은 때부터 한 혜제(漢惠帝) 원년 정미에 조선후 준이 남쪽으로 도망친 때까지 총 41세(世) 9백 29년이다. 준이 남쪽으로 도망쳐서 마한(馬韓)을 공격하여 쳐부수고 스스로 마한왕이 되어 금마군(金馬郡)에 도읍하였다. 삼한기(三韓紀)에 상세히 보인다.


 

[주C-001]기자조선(箕子朝鮮) : 은(殷)나라의 현인(賢人)인 기자가 은나라가 망하게 되자 조선(朝鮮)으로 동주(東走)하여 나라를 세웠는데, 이 나라가 곧 기자조선이다. 이 시기를 고고학적으로 편년하면 대개 청동기 시대에 해당된다. 우리나라 학계에서는 이 기자조선의 존재에 대해 부정하고 있는데, 그럴 경우 고조선(古朝鮮)의 실체가 공허하게 되므로 한씨조선(韓氏朝鮮)ㆍ개아지조선ㆍ예맥조선(濊貊朝鮮) 등으로 대체(代替)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설도 그 어느 것 하나 꼭 합당하다고는 할 수가 없다. 중국 문헌에 수록된 기자와 조선의 관계를 보면 기자와 기자조선은 존재했던 것으로 보여지며, 최근 중국 요령성(遼寧省) 대릉하(大凌河) 유역에서 은말주초(殷末周初)의 청동기(靑銅器) 유물이 많이 출토되고 있고, ‘기후(箕侯)’, ‘고죽(孤竹)’이라고 하는 명문(銘文)이 보이고 있어서 중국 사서(史書)에 보이는 기자조선이 이 발해 연안 일대에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학설이 나오고 있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정신문화연구원, 1987, 140쪽》
[주D-001]그곳의 …… 범금팔조(犯禁八條) : 원본에는 ‘敎其民以禮義 因蠶織 作樂浪朝鮮民犯禁八條’로 되어 있으나, 이는 편찬자가 범금팔조를 기자가 만들었다는 종래의 학설에 구애되어 ‘전(田)’ 자를 ‘인(因)’ 자로 바꾸어서 잘못 기록한 듯하기에 《한서(漢書)》 권28 지리지 제8연조(燕條)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이 부분에 대해 이병도는 “기자가 조선에 와서 팔조의 금법을 만들어 인민들을 교화시켰다는 전설의 유래를 고찰할 필요가 있다. 이 전설의 장본(張本)은 《삼국지》 위지(魏志)의 ‘昔 箕子旣適朝鮮 作八條之敎 以敎之’와 《후한서》의 ‘昔 武王封箕子於朝鮮 箕子敎以禮義田蠶 又制八條之敎 其人終不相盜’에 있는데, 이는 이 두 책의 찬자(撰者)가 《한서》에 나오는 ‘敎其民以禮義田蠶織作 樂浪朝鮮民犯禁八條’의 구절을 ‘敎其民以禮義田蠶織 作樂浪朝鮮民犯禁八條’로 오독(誤讀)하여 생긴 결과이다. 즉 작(作) 자는 위 구절의 직(織) 자와 연결하여 직조(織造)란 뜻으로 사용한 말인데, 작 자를 분리시켜 아래 구절에 붙인 것은 확실히 오독의 탓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위지》의 ‘作八條之敎’나 《후한서》의 ‘又制八條之敎’는 모두 그러한 불정독(不精讀)에서 범한 두찬(杜撰)인 것이다.”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57~58쪽》
[주D-002]스스로 …… 칭하면서 : 조선후가 왕을 칭한 연대는 분명하지 않으나 연(燕)나라가 왕을 칭한 것이 역왕(易王) 10년(기원전 323)인 바, 이와 거의 같은 시기로 보면 대략 기원전 320년경이라고 짐작된다. 왕을 칭한 것은 다만 수장(首長)의 호칭의 변개(變改)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고조선 사회가 분명한 국가 형태를 이루게 된 것을 선포하는 중대한 정치적 변화로 이해되며, 이를 한국사상(韓國史上)의 고대(古代)의 개막으로까지 보려는 견해가 있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0쪽》
[주D-003]대부(大夫) 예(禮) : 대부는 고조선의 관직 이름이고, 예는 인명으로 짐작된다.
[주D-004]만반한(滿潘汗) : 만반한의 위치에 대해서는 정설이 없으며, 요동군의 속현(屬縣)인 문현(文縣)과 번한현(番汗縣)으로 보는 견해와 평안북도 박천군(博川郡)으로 비정(比定)하는 설이 있다. 이병도는 “패수(沛水)와 패수(浿水) 양수의 위치를 상고하는 것이 곧 번한현(番汗縣)의 위치와 요동군의 동계(東界)를 밝히는 첩경이 될 것이다. 패수(沛水)는 지금의 박천강(博川江), 패수(浿水)는 지금의 청천강(淸川江)이 틀림없다. 따라서 번한현의 위치를 지금의 평안북도 박천군에 비정하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하였다.《이병도, 韓國古代史硏究, 박영사, 1976, 71쪽》 천관우는 문현(文縣)을 태자하구(太子河口)인 영구(營口)의 남쪽, 즉 개평(蓋平)일 것으로 보아 만반한은 만주의 개평과 평북(平北) 박천(博川)을 연결하는 선으로 추리하였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0쪽》
[주D-005]몽염(蒙恬)을 …… 하였다 : 진시황(秦始皇) 32년(기원전 215)에 진나라 장수 몽염이 군사 30만 명을 거느리고 융적(戎狄)을 친 뒤 감숙(甘肅)에서 요동(遼東)에 이르는 장성(長城)을 증축하였다.
[주D-006]격수(?水) : 패수(浿水)의 잘못이다. 패수는 고조선의 서쪽 경계를 이루는 강으로, 그 위치에 대해 여러 학자들의 견해가 서로 달라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패수의 위치에 대해, 안정복은 “여러 설 가운데서 대동강을 패수라고 칭한 설이 가장 명백하다. 그 나머지는 모두 옳은지 모르겠다.” 하여 대동강으로 비정하였으며, 정약용(丁若鏞)은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에서 “패수에는 네 개의 패수가 있는데, 한나라와 고조선이 경계를 이룬 패수는 지금의 압록강이다.” 하였고, 이병도는 청천강(淸川江)이 틀림없다고 보았고, 북한에서는 “고조선의 서쪽 경계선은 시기에 따라 좀 들쭉날쭉하였으나, 대체로 패수 즉 오늘날의 대릉하(大凌河)였다.” 하였다.《조선전사 권2, 93쪽》
[주D-007]박사(博士) : 지방 장관의 직명으로 생각된다. 즉 고조선의 서부 국경 지대에 집단으로 거주하였던 중국으로부터의 유이민사회(流移民社會)에 대한 감독과 통솔의 권한을 위임받은 특수 관직일 것으로 생각된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1쪽》
[주D-008]구망(句芒) : 오행신(五行神)의 하나로 목(木)을 주관하는 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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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왕 만(滿)은 옛 연나라 사람이다. 《사기》
○ 만은 연나라 사람으로 성은 위(?)이다. 조선 왕을 격파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한서》
○ 처음 연나라가 전성기 때 일찍이
진번(眞番)서광(徐廣)은 말하기를, “어떤 곳에는 번(番)이 막(莫)으로 되어 있다. 요동(遼東)에 번한현(番汗縣)이 있다.” 하였다. ○ 《사기색은》에서 말하기를, “처음 연나라가 전성기 때라는 것은 육국(六國)의 연이 한창 전성하였을 때를 말한다. 일찍이 연이 진번과 조선 두 나라를 침략하여 복속시켰다.” 하였다. 조선(朝鮮)을 공략하여 복속시킨 다음 관리를 두고 장새(障塞)를 쌓았다. 진나라가 연나라를 멸망시키고는 요동의 외요(外?)에 붙였다. 한나라가 천하를 평정하고는 멀어서 지키기가 어렵다고 여겨 다시 요동고새(遼東故塞)를 수축하고 패수(浿水)까지를 경계로 하여 연나라에 소속시켰다. 연왕 노관(盧?)이 한나라를 배반하여 흉노로 들어가자 위만이 망명하였는데, 1천여 명의 무리를 끌어 모은 다음 상투를 틀고 동이(東夷)의 옷을 입고 동쪽으로 달아나 요새를 나와 패수를 건너가 진나라의 옛 공지(空地)인 상장(上?)과 하장(下?)에 살았다. 《사기색은》에, “지리지(地理志)를 살펴보건대, 낙랑(樂浪)에 운장(雲?)이 있다.” 하였다. 위만이 조선을 격파하고 점차 진번, 조선의 만이(蠻夷) 및 연나라와 제나라에서 망명해 온 자들을 복속시킨 다음 그들의 왕이 되어 왕검(王險)에 도읍하였다. 마침 한나라의 효혜(孝惠)와 고후(高后) 때 천하가 비로소 평정되자 요동 태수(遼東太守)가 즉시 위만과 약조를 맺어, 위만으로 하여금 외신(外臣)이 되게 하여 변방 밖을 지키면서 만이(蠻夷)들이 변경을 침입하지 못하게 하고, 만이의 군장(君長)이 중국 천자에게 알현하러 가는 것을 금지시키지 말게 하였다. 그런 다음, 이를 조정에 보고하니, 조정에서 허락하였다. 이 때문에 위만은 병권과 재물을 얻어서 주위에 있는 여러 작은 고을을 침입하여 항복시켰다. 그러자 진번ㆍ임둔(臨屯) 등이 모두 다 와서 복속하여 《사기색은》에는, “동이의 작은 나라들은 뒤에 군(郡)으로 되었다.” 하였다. 지역이 수천 리나 되었다. 위만이 죽으면서 나라를 아들에게 전하고 다시 손자인 우거(右渠)에게 전하였는데, 우거에게 꾀여 중국에서 망명하여 온 자들이 더욱 불어났다. 또 일찍이 중국에 들어가 천자를 알현하지도 않았으며, 진번(眞番) 등 주위 여러 나라가 살펴보건대, 《한서》에는 ‘진번과 진국(辰國)’으로 되어 있다. 안사고(顔師古)는 ‘진(辰)은 진한(辰韓)의 나라이다.’ 하였다. 글을 올려 천자를 알현하려 하는 것을 중간에서 가로막고서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 《사기》 ○ 또 《사기》 자서(自序)에는, “연(燕)의 태자(太子) 단(丹)이 요(遼) 지방에서 난을 일으키자 위만이 도망한 백성들을 끌어 모아 해동(海東)에 살면서 진번을 복속시켜 변방에 성채를 쌓고는 외신(外臣)이 되었다.” 하였다.
○ 원봉(元封 한나라 무제(武帝)의 연호임) 2년(기원전 109)에 한나라에서 사신 섭하(涉何)를 보내어 우거를 꾸짖고 달래었으나, 우거가 끝내 조칙(詔飭)을 받들지 않았다. 섭하가 도로 돌아가다가 경계인 패수 가에 이르러 마부를 시켜서 전송나왔던 조선의
비왕(裨王) 장(長)을 찔러 죽이고 《사기정의(史記正義)》에, “안사고는, 장(長)은 비왕의 이름으로, 섭하를 전송하기 위하여 패수 가에 이르렀을 때 섭하가 이를 틈타 찔러 죽인 것이라고 하였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비왕 및 장사(將士) 장(長)이니, 아마도 안사고가 잘못 본 듯하다. 즉시 패수를 건너서 요새로 들어갔다. 《사기정의》에, “평주(平州)의 유림관(楡林關)으로 들어간 것이다.” 하였다. 그러고는 드디어 돌아가서 천자에게 ‘조선의 장수를 죽였다.’고 보고하였다. 그러자 천자가 그 공을 아름답게 여겨서 섭하를 꾸짖지 않고는 즉시 섭하를 요동 동부도위(遼東東部都尉)에 제수하였다. 조선에서는 섭하를 원망하여 군사를 일으켜 섭하를 죽였다. 이에 천자가 죄수들을 모집하여 조선을 쳤다. 그해 가을에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을 보내어 제(齊)에서 발해(渤海)로 배를 띄웠는데, 군사가 5만 명이었다. 한편 좌장군(左將軍) 순체(荀?)가 요동으로 나와 우거를 토벌하자, 우거는 군사를 일으켜 험한 곳에 주둔하였다. 좌장군(左將軍)의 졸정(卒正) 다(多)가 요동의 군사를 이끌고 먼저 나왔다가 패하였는데, 다는 도로 달아났다가 군법을 적용받아 참수되었다. 누선장군이 제의 군사 7천 명을 거느리고 먼저 왕검(王險)에 도착하였다. 우거는 성을 지키고 있으면서 누선군(樓船軍)의 군사가 적은 것을 알아채고는 즉시 성을 나와 누선군을 공격하니, 누선군이 패하여 도망쳤다. 누선장군 양복은 군사들을 잃고 산속으로 도망하였다가 10여 일 만에 흩어졌던 군졸을 수습해 모았다. 좌장군은 조선의 패수 서군(浿水西軍)을 공격하였으나 깨뜨리지 못하였다.
천자는 두 장수의 전세가 불리하다고 여겨 위산(?山)을 시켜 군사의 위엄을 보이면서 우거에게 가서 달래게 하였다. 우거는 사신을 보고는 머리를 조아리면서 사과하기를, “항복하고자 하였으나 두 장수가 신을 속이고서 죽일까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이제 사절(使節)을 보았으니 항복하고자 합니다.” 하였다. 그러고는 태자(太子)를 보내어 들어가서 사례하고 말 5천 필과 군량(軍糧)을 바치게 하였다. 그러자 태자가 그의 무리 1만여 명에게 무기를 들려 가지고 막 패수를 건너려고 하는데, 사자(使者)와 좌장군 순체가 조선쪽에서 변란을 일으킬까 염려하여, 태자에게, “이미 항복하였으니 사람들에게 무기를 버리라고 명하라.” 하였다. 그러자 태자도 사자와 좌장군이 자신들을 속여서 죽일까 염려하여 드디어 패수를 건너지 않고는 도로 돌아갔다. 위산이 돌아가서 천자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자, 천자가 위산을 목 베었다.
좌장군이 패수 상군(浿水上軍)을 격파하고 그대로 앞으로 달려가서 왕검성 아래에 이르러 서쪽과 북쪽을 포위하였다. 누선군도 달려가서 성 남쪽을 점거하였다. 이에 우거가 드디어 성을 굳게 지켰으므로 몇 달 동안을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좌장군은 본디 시중(侍中)으로 있으면서 천자를 가까이서 모셨고, 거느리고 있는 연(燕)과 대(代)의 군사들은 억센 데다가 승세마저 타서 교만한 마음이 많았다. 누선장군이 거느린 제(齊)의 군사는 바다에 들어온 뒤로 이미 여러 차례 패하여 군사를 잃었고, 그 선봉이 우거와 더불어 싸워 곤욕을 치른 채 도망쳤으므로, 군사들은 모두 두려워하였고 장수들은 부끄러운 마음이 있었다. 이 때문에 우거를 포위하게 되어서도 누선군은 화친하려는 마음이 있었다. 좌장군이 급히 공격하고자 하자, 조선의 대신(大臣)이 몰래 염탐을 하고 사람을 시켜 사사로이 누선장군에게 항복할 것을 약속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서로 왕래하면서 항복에 관한 말만 하였지, 확실한 결단은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좌장군이 자주 누선장군과 함께 싸울 약속을 하였으나, 누선장군은 조선과의 약속을 성사시키고자 하여 좌장군과의 약속을 어겼다. 좌장군 역시 사람을 시켜서 기회를 틈타 조선으로 하여금 항복하게 하였으나, 조선에서는 따르지 않으면서 마음속으로 누선장군 쪽에 항복할 마음을 두었다. 그로 인해 두 장군이 서로 반목하면서 협력하지 못하였다. 좌장군은 속으로 ‘누선장군은 앞서 군사를 패망시킨 죄가 있고 이제는 조선과 친하게 지내면서 항복받지도 못하고 있으니, 아마도 배반할 마음이 있는 것 같다.’고 여겨 의심하였으나 감히 발설하지는 못하였다.
천자가 이르기를,

“장수들이 제대로 통솔하지 못하고 있다. 이에 전에는 위산(?山)을 시켜서 우거를 항복하도록 회유하게 하자, 우거가 태자를 보냈는데도 위산이 결단을 내리지 못하였다. 그러고는 좌장군과 계책이 서로 어긋나 마침내 약속을 어그러뜨리고 말게 하였다. 지금도 두 장수가 성을 포위하고서도 또 서로 계책이 어긋나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결판을 못내고 있다. 그러니 제남 태수(濟南太守) 살펴보건대, 《한서》에는 ‘고(故) 제남 태수’로 되어 있다. 공손수(公孫遂)를 시켜 가서 정벌하게 하되, 《한서》에는 정벌한다는 ‘정(征)’ 자가 ‘정(正)’으로 되어 있다. 편리한 대로 종사(從事)하게 하라.”

하였다. 공손수가 도착하자, 좌장군이 말하기를,

“조선을 항복시킬 수가 있었는데도 아직까지 항복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은 그럴 만한 사정이 있다.”

하면서, 누선장군이 자주 약속을 어기고 군사를 출동시키지 않은 사실을 말하면서, 평소에 생각하고 있던 것을 공손수에게 다 고하였다. 그러고는 말하기를,

“지금 상황이 이와 같은데도 누선장군을 체포하지 않을 경우에는 아마도 큰 해가 있을 것이다. 비단 누선군뿐만 아니라 장차 조선과 더불어서 우리 군사를 함께 멸망시킬 것이다.”

하였다. 그러자 공손수가 드디어 그 말이 옳다고 여겨 절(節)을 보내어 누선장군을 소환하면서 좌장군의 군영으로 들어와서 일을 계획하라고 명하였다. 그런 다음 즉시 좌장군의 휘하에게 명하여서 누선장군을 잡게 하고, 그 군사를 병합시켰다. 천자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니, 천자가 공손수를 잡아 죽였다.
좌장군이 이미 두 군사를 병합하고는 곧바로 서둘러서 조선을 공격하였다. 그러자 조선(朝鮮)의
상(相) 노인(路人), 상(相) 한음(韓陰), 살펴보건대, 《한서》에는 한도(韓陶)로 되어 있다. 이계(尼谿)의 상(相) 삼(參), 살펴보건대, 이계는 예(濊) 음의 반절(反切)이다. 장군(將軍) 왕협(王?)이 《한서음의(漢書音義)》에 이르기를, “무릇 다섯 사람이다. 융적(戎狄)이 관기(官紀)를 잘 모르므로 모두 상이라고 칭한 것이다. 협의 음은 협(頰)이다.” 하였다. ○ 살펴보건대 《한서》의 주에 “안사고가 무릇 네 사람이라고 하였다.” 하였다. 서로 더불어서 모의하기를,

“처음에 누선장군에게 항복하려고 하였으나 누선장군은 이미 잡혔다. 현재 좌장군이 혼자서 두 군사를 거느렸으니 장차 싸움이 더욱 급박해질 것으로, 그들을 당해 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왕은 항복하려고 하지 않는다.”

하고는, 한음, 왕협, 노인이 모두 도망쳐 나와 한나라에게 항복하였는데, 노인은 도중에서 죽었다. 《상동》
○ 원봉(元封) 3년 여름에 이계(尼谿)의 상(相) 삼(參)이 사람을 시켜서 조선왕 우거를 살해하고 와서 항복하였다. 그러나 왕검성만은 항복하지 않은 채 우거의 대신(大臣)이었던 성기(成己)가 또다시 반란을 일으켜 한나라의 관리를 공격하였다. 이에 좌장군이
우거의 아들인 장(長)과 항복한 상(相) 노인(路人)의 아들 최(最)를 시켜서 그 백성들에게 유시하여 성기를 죽이게 하였다. 이에 드디어 조선을 평정하고 사군(四郡)을 설치하였다. 진번(眞番)ㆍ임둔(臨屯)ㆍ낙랑(樂浪)ㆍ현도(玄?)이다.
삼(參)을 봉하여 획청후(?淸侯)로 삼고, 한음(韓陰)을 봉하여 적저후(荻?侯)로 삼고, 왕협(王?)을 봉하여 평주후(平州侯)로 삼고, 장(長)을 봉하여 기후(幾侯)로 삼고, 최(最)는 아비가 죽었고 자못 공도 있으므로 온양후(溫陽侯)로 삼았다. 좌장군을 서울로 불러들였다. 그런 다음 공을 다투어서 서로 시기하여 계책을 어긴 죄를 적용해 기시(棄市)하였다. 누선장군 역시 군사가
열구(列口)에 이르렀을 때 좌장군이 오기를 기다렸어야 하는데도 마음대로 먼저 출동하여 군사를 많이 잃은 죄를 적용해 사형에 처하는 것이 마땅하나, 속(贖)을 바치고 서인이 되게 하였다. 《상동》 ○ 《후한서》에는, 한나라 때 와서 재주와 힘이 있어 광록대부(光祿大夫) 부누선장군(副樓船將軍) 양복(楊僕)을 시켜 조선을 격파하였다.” 하였다.
○ 처음에 우거(右渠)가 격파되지 않았을 때
조선상(朝鮮相)인 역계경(歷谿卿)이 우리에게 간하였으나, 그 말을 듣지 않자 동쪽으로 진한(辰韓) 땅으로 갔다. 이때에 백성들 가운데서 따라가 산 자가 2천여 호였다. 역시 조선ㆍ진번과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위략(魏?)》

태사공(太史公)은 말하기를,
“우거는 견고함을 믿었다가 나라의 제사가 끊어지게 하였다. 섭하는 거짓으로 공을 세웠다고 속여 전쟁의 발단을 만들었다. 누선은 장수감이 되기에는 부족하여 서광(徐廣)은 “그 거느린 군졸이 적은 것을 말한다.” 하였다. 난을 당하고 허물에 걸렸으며, 반우(番?)를 잃은 것을 후회하여 도리어 의심을 받았다. 순체는 공로를 다투다가 공손수와 함께 복주(伏誅)되었다. 수군ㆍ육군이 모두 치욕을 당해 장수 가운데 제후에 봉해진 사람이 없었다.”
하였다. 《사기》
반고(班固)가 서문에서 찬하기를,
저 조선이란 나라는 / 爰?朝鮮
연 땅 바깥에 있도다 / 燕之外區
한나라가 일어나 잘 어루만져서 / 漢興柔遠
부절을 쪼개서 나누어 주었도다 / 與爾剖符
그런데도 지형이 험함만을 믿고는 / 皆恃其阻
굽신굽신하다가는 교만해짐에 / 乍臣乍驕
효무제가 군사를 출동시켜서 / 孝武行師
바다 모퉁이의 조선을 멸망시켰도다 / 誅滅海隅
하였다. 《한서》
사마정(司馬貞)이 찬하기를,
위만은 연나라 사람으로 / ?滿燕人
조선의 왕이 되었네 / 朝鮮是王
왕검성에 도읍하여 / 王險置都
노인을 재상으로 삼았네 / 路人作相
우거는 오랑캐의 우두머리가 되었고 / 右渠首羌
섭하는 천자를 속였네 / 涉何?上
화란이 이로부터 시작되어 / 兆禍自斯
두 장수는 서로 의심을 하였네 / 狐疑二將
위산과 공손수는 처형되었으니 / 山遂伏法
시끄러운 그 일들 모두가 형편없네 / 紛?無狀
하였다. 《사기색은》
범엽(范曄)이 찬하기를,
우이의 지역에 살게 하니 / 宅是?夷
해가 뜨는 양곡이네 / 曰乃暘谷
산골짝과 바닷가에 모여 사니 / 巢山潛海
그 종족이 아홉이네 / 厥區九族
진나라 말년에 어지러워지니 / ?末紛亂
연나라 사람들이 피난을 갔네 / 燕人違難
중국 습속 어지럽히고 동이 풍속 물들이고는 / 雜華?本
드디어 한나라와 길을 텄네 / 遂通有漢
위소(韋昭)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위만이 조선에 들어가 이미 중국과 오랑캐의 풍속을 뒤섞어 놓았으며, 또 그곳 본래의 습속마저 뒤흔들어 놓은 다음, 한나라와 통하였다.”
아득히 먼 저 나라를 통역하자니 / ??偏譯
순종도 하고 배반도 하였네 / 或從或畔
하였다. 《후한서》
살펴보건대, 위씨(?氏)는 한 혜제(漢惠帝) 원년 정미에 나라를 세워 한나라 무제(武帝) 원봉(元封) 3년 계유에 한나라에 항복하였다. 총 3세(世) 87년간 존속하였다.


 

[주C-001]위만조선(?滿朝鮮) : 고조선(古朝鮮)의 삼조선 중 단군조선(檀君朝鮮)ㆍ기자조선(箕子朝鮮) 다음으로 등장하는 시대가 바로 위만조선인데, 이 시기는 고고학상으로는 철기 시대로 편년된다. 위만과 위만조선에 대해서 사마천(司馬遷)은 《사기》 권115 조선열전(朝鮮列傳)에서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으며, 반고(班固)의 《한서(漢書)》와 진수(陳壽)의 《삼국지》에서도 이를 기록하고 있는데, 이상의 중국 사서들은 위만이 중국 사람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그와 조선과의 관계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학계 일각에서는 위만이 조선계(朝鮮系)의 연인(燕人)이라는 설을 주장하고 있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42쪽》
[주D-001]진번(眞番) : ‘眞番’의 음이, 북한에서 발간된 《조선전사》에는 ‘진반’으로 표기되었으며, 옥편에도 ‘番’의 음이 ‘땅 이름 반’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남한에서 발간된 책에는 ‘진번’으로 표기되었기에, 지금 번역을 하면서는 ‘진번’으로 표기한다.
[주D-002]번한현(番汗縣) : 요동군의 속현(屬縣)이다. 이병도는 “패수(沛水)와 패수(浿水) 양수의 위치를 상고하는 것이 곧 번한현(番汗縣)의 위치와 요동군의 동계(東界)를 밝히는 첩경이 될 것이다. 패수(沛水)는 지금의 박천강(博川江), 패수(浿水)는 지금의 청천강(淸川江)이 틀림없다. 따라서 번한현의 위치를 지금의 평안북도 박천군에 비정하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하였다.《이병도, 韓國古代史硏究, 박영사, 1976, 71쪽》
[주D-003]요동의 외요(外?) : 이에 대해서는 ‘요동군 외부의 간접적 지배 지역’이라는 설과 ‘군(郡) 밖으로 나가서 이민족이 거주하는 지역에 목책(木柵)을 세우고 병사를 주둔시켜 이를 진무하고 그 침략을 차단하는 요새’라는 설 등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43쪽》 이병도는 이 요동의 외요를 하장(下?)으로 보아 대동강 북안(北岸)이라고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72쪽》
[주D-004]요동고새(遼東故塞) : 이병도는 요동고새는 바로 번한새(番汗塞)라고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71쪽》
[주D-005]공지(空地)인 상장(上?)과 하장(下?) : 이병도는 “공지는 일종의 완충 지대로서, 인민의 거주를 허락지 아니한 까닭에 공지라 한 것이다. 그리고 상하장(上下?)은 상하 2개소의 장새(障塞)를 말한 것으로, 상장은 번한새(番汗塞), 즉 박천(博川)을 말한 것이고, 하장은 열수(列水), 즉 대동강 북안(北岸)에 비정되어야 한다.”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71~72쪽》
[주D-006]왕검(王險) : 왕검성(王儉城)을 말하는데, 그 위치에 대해서는 대동강 북쪽의 평양(平壤)이라는 설과 요하(遼河) 하구(河口)의 영구(營口)라는 설이 있다. 이병도는 지금의 평양(平壤)으로 보았고,《韓國古代史硏究 82쪽》 북한의 이지린은 오늘날의 개평(開平)이라고 하였으며,《고조선연구 88쪽》 《조선전사》에서는 요하(遼河) 하류의 동쪽 유역에 있다고 하였다.
[주D-007]비왕(裨王) 장(長) : 비왕은 위씨조선(?氏朝鮮)의 관직, 특히 국왕을 시종(侍從)하는 무관직(武官職)이 아닐까 생각되며, 장(長)은 인명, 또는 수장(首長)의 뜻으로 해석하는 설이 있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2쪽》
[주D-008]누선장군(樓船將軍) : 중국 고대 군직(軍職)의 하나이다. 한나라에서 조선을 침공할 때 양복(楊僕)의 직으로서, 현재의 해군 제독에 비견되는 것으로 추정된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259쪽》
[주D-009]제(齊)에서 …… 띄웠는데 : 제(齊)는 지금의 산동(山東) 지방으로, 한나라의 수군이 이곳에서 출항하여 발해만을 횡단해 왕검성으로 향하였다는 뜻이다.
[주D-010]상(相) : 이병도(李丙燾)는 “상(相)은 중국 제도의 경상직(卿相職)을 모방한 것으로 당시 조선의 관제는 중앙의 장관(長官)이나 지방의 장관직을 막론하고 모두 상이라 하여 그 사이에 명칭상의 구별을 두지 아니하였다.”고 하였으며, 김철준(金哲俊)은 “이것은 아직 고대 국가의 관제가 제대로 성립되지 아니한 데서 온 것으로, 상은 찬(贊)ㆍ도(導)ㆍ면(勉)의 뜻이 있어 한 집단의 영도자의 지도(指導), 권면(勸勉) 등의 기능을 표시하고 있다.” 하였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258쪽》
[주D-011]우거의 …… 최(最) : 이 부분의 원문은 ‘右渠子長降相路人之子最’이다. 이 부분에서 해석상 문제가 되는 부분은 우거의 아들 이름이 장(長)인지 장강(長降)인지이다. 《사기집해》에는 “서광(徐廣)은 ‘《사기》 표(表)에는 장로(長路)로 되어 있고, 《한서》 표에는 장각(長?)으로 되어 있다.’ 하였다.” 하였고, 《사기색은》에는 “《한서》 표에 장각(長?)으로 되어 있다.” 하였다. 이에 반해 안사고(顔師古)는 “우거 아들의 이름은 장(長)이다.” 하고, 또 “상 노인이 전에 이미 한나라에 항복하고서 길에서 죽었으므로 항상(降相)이라 한 것이다.” 하여 장(長)을 이름으로 보았다. 이병도는 “아마 장은 원래의 이름이고 장각은 투항한 뒤에 고친 이름인 듯하다.”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92쪽》 지금 번역하면서는 안사고의 설을 따랐다.
[주D-012]열구(列口) : 열구(列口)의 위치에 대해서는 학계의 설이 분분하다. 안정복(安鼎福)은 “《삼국사기》 지리지에 ‘혈구현(穴口縣)은 지금의 강화(江華)이다.’ 하였으니, 혈구(穴口)는 열구의 잘못일 것이며 한수(漢水)가 바다로 들어가는 어귀에 있었다는 것을 더욱 믿을 수 있다. 어떤 이는 대동강을 열수라고도 하는데, 이는 옳지 않은 듯하다.” 하였고,《동사강목 부록 권하 지리고 열수고》 한백겸(韓百謙)은 “한강 이외에는 8백 리 되는 큰 강이 없으니 한강이 열수인 듯하고 열구 또한 한강 어귀에 있는 듯하다.” 하였고,《동국지리지》 이병도(李丙燾)는 《산해경(山海經)》의 ‘朝鮮在列陽東 海北山南 列陽屬燕’의 구절과 그에 대한 곽박(郭璞)의 주인 ‘朝鮮 今樂浪縣……列亦水名也 今在帶方 帶方有列口縣’의 구절을 인용하면서, “열양(列陽)은 열구(列口)와 마찬가지로 지금의 대동강인 열수(列水)와 관계 있는 지명으로, 열구가 열수의 하구(河口)의 뜻임에 대해 열양은 열수의 북쪽이란 뜻으로 명명된 것이다. 곽씨가 열수를 ‘今在帶方’이라 한 것은, 열수의 하류 일부가 당시 대방 경내인 지금의 황해도 서북계(西北界)를 흐르고 있던 때문이다. 나는 열구를 대동강 하류 유역인 황해도 은율(殷栗)에 비정(比定)하고, 열양은 대동강의 북쪽 특히 지금의 평양 대성산(大城山) 아래에 비정하고 싶다.” 하여 대동강 입구로 보았으며,《韓國古代史硏究 72쪽》 북한에서는 “열수는 오늘의 요하(遼河)라고 인정된다. 오늘의 요하를 열수로 보게 되는 것은 열수가 발해에 흘러든 강이고 요동 지역에 있었던 강이며, 또 요하의 옛 이름이 열수이기 때문이다. 열구는 발해 기슭의 지명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조선전사 권2 고조선사》
[주D-013]조선상(朝鮮相)인 역계경(歷谿卿) : 이 부분에 대한 기존의 해석은 모두 ‘조선상인 역계경’이라 하여 ‘조선상’은 관직으로 보고 ‘역계경’은 인명으로 보았다. 그런데 《한서》의 ‘조선의 상 노인(路人), 상 한음(韓陰), 이계(尼谿)의 상 삼(參), 장군 왕협(王?)’에 대해서, 한치윤은 “이계(尼谿)는 ‘예(濊)’의 반절이다.” 하였다. 여기에 나오는 ‘역계’ 역시 ‘예’의 반절로 볼 수 있으며, ‘경(卿)’ 역시 ‘상(相)’과 마찬가지로 관직을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는바, ‘역계의 경’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분명치 않기에 번역은 ‘조선상인 역계경’으로 하였다.
[주D-014]역시 …… 않았다 : 이 부분의 원문은 ‘亦與朝鮮貢蕃不相往來’이다. 이 부분에 대해 이병도는 공(貢) 자를 진(眞) 자의 오자로 보아 진번으로 해석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93쪽》 지금 번역하면서는 원문대로 번역할 경우 해석이 분명치 않기에 이를 따라 번역하였다.
[주D-015]반우(番?) : 지금의 광동성(廣東省)에 속하는 곳에 있는 옛 지명이다. 처음에 진(秦)나라에서 설치하였으며, 반산(番山)과 우산(?山)으로 인해 반우란 이름이 생겼다. 《사기》 식화전(食貨傳)에, “반우는 하나의 큰 도회지이다.” 하였다.

 

 

<<< 삼한---三韓 >>>

 

 ○ 해동의 여러 이(夷)에는 구려(駒麗)ㆍ부여(扶餘)ㆍ한(?)ㆍ맥(貊)의 족속이 있는데, 무왕(武王)이 상(商)나라를 이기고 이들 모두와 길을 통하였다. 《상서전》

《한서》에는 고구려(高駒麗)ㆍ부여(扶餘)ㆍ한(韓)은 있으나 여기에서 말한 이 한(?)은 없다. 이 한은 바로 저 한(韓)과 같은 것으로, 음은 같으면서 글자 모양만 다른 것이다. 《상서소(尙書疏)》 ○ 《정씨집운(丁氏集韻)》에, “한(?)은 하(河)와 간(干)의 반절(反切)로 음은 한(寒)이다. 동이(東夷) 별종의 이름이다.” 하였다.

○ 《모시(毛詩)》에,

커다란 저 한성은 / 溥彼韓城
연의 백성들이 쌓은 것이다 / 燕師所完
왕께서 한나라 제후에게 / 王錫韓侯
퇴와 맥을 다스리게 하시었도다 / 其追其貊
북쪽 나라를 모두 맡아서 / 奄受北國
그곳의 제후가 되시었도다 / 因以其伯

하였다. 《모시》

옛날에 주 선왕(周宣王) 때에도 한후(韓侯)가 있었는데, 그 나라가 연과 가까웠기 때문에 《모시》에 “커다란 저 한성은 연의 백성들이 쌓은 것이다.” 한 것이다. 그 뒤에 한의 서쪽[韓西]에서도 한씨(韓氏)라는 성(姓)을 썼는데, 위만(?滿)에게 정벌되어 바닷가로 옮겨 갔다. 《잠부론(潛夫論)》
왕응린(王應麟)이 말하기를,
“왕숙(王肅)이 ‘지금의 탁군(?郡) 방성현(方城縣)에 한후성(韓侯城)이 있다.’고 하였다. 살펴보건대, 《모시》의 한혁(韓奕)에 ‘저 커다란 한성은 연의 백성들이 쌓은 것이다. 왕께서 한나라 제후에게 퇴와 맥을 다스리게 하시었도다. 북쪽 나라를 모두 맡았도다.’라고 한 것이 바로 이를 가리키는 것이다. 《군현지(郡縣志)》에 ‘방성의 옛 성이 탁주(?州) 고안현(固安縣) 남쪽 17리 되는 곳에 있는데, 본디 연의 옛 읍이었다.”
하였다. 《지리통석(地理通釋)》
시에서 말한 퇴(追)와 맥(貊)은 연의 북쪽에 있는 나라이다. 한(韓)은 연의 북쪽에 있고 맥은 한의 북쪽에 있는 나라이다. 한이 이미 연에 귀속된 뒤에 한이 동쪽으로 옮겨 갔다. 이에 한(漢)나라 초기에는 삼한(三韓)이라고 하였다. 《연사(燕史)》 ○ 《일하구문(日下舊聞)》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연사(燕史)》를 지은 곽조경(郭造卿)의 설과 《잠부론(潛夫論)》의 설이 서로 증명이 된다.”
시(詩)에 “커다란 저 한성은 연의 백성들이 쌓은 것이다. 왕께서 한나라 제후에게 퇴와 맥을 다스리게 하시었도다. 북쪽 나라를 모두 맡았도다.” 하였는데, 이에 대해 왕숙(王肅)은 “지금의 탁군 방성현에 한후성이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또 《잠부론》에는 “옛날에 주 선왕(周宣王) 때 한후가 있었는데, 그 나라가 연과 가까웠다. 그 뒤에 위만에게 정벌당하여 바닷가로 옮겨 가서 살았다.”고 하였다. 한나라 때에는 상고 시대와의 간격이 멀지 않았으니 전해진 것이 있었을 것이다. 《일지록(日知錄)》
살펴보건대, 왕부(王符)는 “주 선왕 때 한나라가 연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 뒤에 위만에게 정벌당하여 바닷가로 옮겨 가서 살았다.”고 하였고, 왕응린(王應麟)과 고염무(顧炎武) 등 여러 사람들은 모두 그 설을 옳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시에서 말한 한나라 제후가 과연 기씨(箕氏)를 가리켜서 말한 것인가? 이것은 분명하게 증명할 수가 없다. 그러나 가령 한이 과연 희성(姬姓)의 나라로 진(晉)에서 병탄한 한(韓)이라고 한다면, 이는 연의 백성들이 성을 쌓을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러므로 정현(鄭玄)이 “평안할 때 백성들이 쌓은 것이다.”고 한 것은 천착이다. 왕숙은 “탁군 방성현에 한후성이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그 뜻이 정현을 힐난하는 데 있으나, 역시 맥(貊)과는 서로 연결되지 않는다. 왕부의 설에 의거하면 한이 연의 동쪽에 있어서 맥 땅과 연결됨을 증명할 수가 있다. 퇴(追)란 곳은 선유(先儒)들이 대부분 자세히 모른다고 하였는데, 이는 필시 예(濊)나 맥(貊)의 부(部)에 속한 종족일 것이다. 그리고 이 시에서 말한 ‘양산(梁山)’은 바로 요서(遼西)의 양문산(梁門山)인데, 《사기》의 연세가(燕世家)에 “역수(易水)의 동쪽은 나뉘어져서 양문(梁門)이 된다.” 하였고, 《수경주(水經註)》에 “습수(濕水)는 양향현(良鄕縣)의 북쪽 경계를 가로질러 양산(梁山)의 남쪽을 거쳐서 고량수(高梁水)로 나온다.” 하였다. 정현은 이에 대해 한(韓)의 진산(鎭山)이라고 하였다. 또 소(疏)에서는 《이아(爾雅)》의 “양산은 진에서 망제사를 지내는 곳이다.”라는 글을 인용하여 정현의 설을 증명하였는데, 이는 모두 틀린 것이다.

○ 한(韓)에는 세 종족이 있다. 《삼국지》에, “한은 대방(帶方)의 남쪽에 있다.” 하였다. 첫 번째는 마한(馬韓)이고 두 번째는 진한(辰韓)이고 세 번째는 변진(弁辰)이다. 마한은 서쪽에 있는데 54국(國)이며, 그 북쪽은 낙랑과 연접하였고 남쪽은 왜(倭)와 연접하였다. 진한은 동쪽에 있는데 12국이며, 북쪽은 예(濊)ㆍ맥(貊)과 연접하였다. 변진은 진한의 남쪽에 있는데 역시 12국이며, 남쪽은 역시 왜와 연접하였다. 한은 모두 78국이며, 백제(伯濟)는 그 가운데 한 나라이다. 큰 나라는 1만여 호이고, 작은 나라는 수천 호이며, 각각 산과 바다 사이에 자리 잡았다. 사방의 지역이 4천여 리이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경계 지웠는바, 모두 옛날의 진국(辰國)이다. 그 가운데서 마한이 가장 크므로 여러 한이 함께 그 종족을 진왕(辰王)으로 세웠는데, 목지국(目支國)에 도읍하여 삼한(三韓)의 땅을 모두 다스렸다. 여러 나라 왕들의 선대(先代)는 모두 마한 종족의 사람이다. 마한 사람들은 읍과 부락에 뒤섞여 살았고 성곽(城郭)이 없었다. 그리고 남쪽의 경계가 왜와 가까웠으므로 역시 문신(文身)을 한 자들이 있었다. 진한(辰韓)의 노인(老人)들이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들은 옛날의 망인(亡人)으로 진(秦)나라의 고역을 피하여 한국(韓國)으로 왔는데, 마한에서 동쪽 경계의 땅을 떼어 우리에게 나누어 주었다.”라고 하였다. 나라를 이름하여서 ‘방(邦)’이라 하고, 활을 ‘호(弧)’라고 하며, 적(賊)을 ‘구(寇)’라 하고, 술 따르는 것을 ‘행촉(行觸)’이라 하고, 서로 호칭하기를 ‘도(徒)’라 하여, 말이 진(秦)나라 사람들과 비슷하였으므로 혹 진한(秦韓)이라고도 한다. 성책(城柵)이 있고 집이 있으며, 여러 작은 별읍(別邑)에는 각각 우두머리가 있는데, 큰 우두머리는 신지(臣智)라 하고, 그다음으로는 험측(險側)이 있고, 그다음으로는 번지(樊祗)가 있고, 그다음으로는 살해(殺奚)가 있고 그다음으로는 읍차(邑借)가 있다. 변진은 진한과 더불어 뒤섞여 살았는데, 성곽이 있었고 의복이 모두 같았으며, 언어와 풍속은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그 나라가 왜와 가까웠으므로 문신을 새긴 자들이 자못 있었다. 《후한서》
마한(馬韓)에는 원양국(爰襄國) 살펴보건대 《문헌통고(文獻通考)》에는 애양국(愛襄國)으로 되어 있다.ㆍ모수국(牟水國)ㆍ상외국(桑外國)ㆍ소석색국(小石索國)ㆍ대석색국(大石索國)ㆍ우휴모탁국(優休牟?國)ㆍ신분활국(臣?活國)ㆍ백제국(伯濟國) 살펴보건대, 《문헌통고》에는 백제국(伯齊國)으로 되어 있다.ㆍ속로불사국(速盧不斯國)ㆍ일화국(日華國)ㆍ고탄자국(古誕者國)ㆍ고리국(古離國)ㆍ노람국(怒藍國)ㆍ월지국(月支國) 살펴보건대 목지국(目支國)의 잘못이다.ㆍ자리모로국(咨離牟盧國) 살펴보건대, 《문헌통고》에는 치리모로국(治離牟盧國)으로 되어 있다.ㆍ소위건국(素謂乾國)ㆍ고원국(古爰國)ㆍ막로국(莫盧國)ㆍ비리국(卑離國)ㆍ점리비국(占離卑國)ㆍ신흔국(臣?國)ㆍ지침국(支侵國)ㆍ구로국(狗盧國)ㆍ비미국(卑彌國)ㆍ감해비리국(監奚卑離國)ㆍ고포국(古蒲國)ㆍ치리국국(致利鞠國)ㆍ염로국(?路國)ㆍ아림국(兒林國)ㆍ사로국(駟盧國)ㆍ내비리국(內卑離國)ㆍ감해국(感奚國)ㆍ만로국(萬盧國)ㆍ벽비리국(?卑離國)ㆍ구사오조국(臼斯烏朝國)ㆍ일리국(一離國)ㆍ불리국(不離國) 살펴보건대, 《문헌통고》에는 불미국(不彌國)으로 되어 있다.ㆍ지반국(支半國)ㆍ구소국(狗素國)ㆍ첩로국(捷盧國) 살펴보건대, 《문헌통고》에는 서로국(棲盧國)으로 되어 있다.ㆍ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ㆍ신소도국(臣蘇塗國)ㆍ막로국(莫盧國)ㆍ고랍국(古臘國)ㆍ임소반국(臨素半國)ㆍ신운신국(臣雲新國)ㆍ여래비리국(如來卑離國)ㆍ초산도비리국(楚山塗卑離國)ㆍ일난국(一難國)ㆍ구해국(狗奚國)ㆍ불운국(不雲國)ㆍ불사분야국(不斯?邪國)ㆍ원지국(奚池國)ㆍ건마국(乾馬國)ㆍ초리국(楚離國) 등 총 50여 국이 있다. 그 가운데 큰 나라는 1만여 호이고 작은 나라는 수천 호로, 총 10만여 호이다. 백성들은 한곳에 뿌리박고 살며 농사를 짓는다. 산골짜기와 바닷가에 흩어져 살고 있고, 국읍(國邑)에는 비록 주수(主帥)가 있기는 하나 고을과 마을에 뒤섞여 살고 있어서 제대로 잘 제어하지 못한다. 《삼국지(三國志)》 ○ 《진서(晉書)》에는, “마한에는 무릇 작은 나라가 56개가 있으며 각각 우두머리가 있다.” 하였다. ○ 삼가 살펴보건대, 마한의 여러 나라에 대해서, 《후한서》에서는 54개 나라라고 하였는데, 《위지(魏志)》에는 막로국(莫盧國)이 거듭 실려서 55개 나라로 되어 있으니, 하나는 삭제하는 것이 마땅하다.
진한(辰韓)은 옛날의 진국(辰國)이다. 마한의 동쪽에 있으며, 처음에는 6개 나라였다가 나뉘어져서 12개 나라로 되었고, 변진(弁辰) 역시 12개 나라이다. 이저국(已?國)ㆍ불사국(不斯國)ㆍ변진미리미동국(弁辰彌離彌凍國)ㆍ변진접도국(弁辰接塗國)ㆍ근기국(勤耆國)ㆍ난미리미동국(難彌離彌凍國)ㆍ변진고자미동국(弁辰古資彌凍國)ㆍ변진고순시국(弁辰古淳是國)ㆍ염해국(?奚國)ㆍ변진반로국(弁辰半路國)ㆍ변락노국(弁樂奴國)ㆍ군미국(軍彌國)ㆍ변군미국(弁軍彌國)ㆍ변진미오야마국(弁辰彌烏邪馬國)ㆍ여담국(如湛國)ㆍ변진감로국(弁辰甘路國)ㆍ호로국(戶路國)ㆍ주선국(州鮮國)ㆍ마연국(馬延國)ㆍ변진구야국(弁辰狗邪國) 살펴보건대, 제국기(諸國紀)에 상세히 보인다.ㆍ변진주조마국(弁辰走漕馬國)ㆍ변진안야국(弁辰安邪國)ㆍ마연국(馬延國)ㆍ변진독로국(弁辰瀆盧國)ㆍ사로국(斯盧國)ㆍ우유국(優由國)이 있는바, 변한과 진한을 합하여 모두 24국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군미국 아래에 또 변군미국이 있으며, 또 마연국이 두 곳에 있으니, 이는 반드시 베껴 쓰는 자가 잘못 적은 것이다. 이 두 나라를 삭제하면 24국이 된다. ○ 또 살펴보건대, 변진 역시 진한이다. 그 지역이 서로 맞물려 있어서 백성들이 뒤섞여 살고 있는 탓에 어디에서 어디까지가 어디라고 분명하게 나눌 수가 없다. 그러므로 《위지》에서도 뒤섞어서 쓰면서 오로지 변진의 여러 나라에 대해서는 변진 두 자를 붙여 표시하였는바, 그들이 뒤섞여 살았음을 알 수가 있다. 큰 나라는 4, 5천 호이고, 작은 나라는 6, 7백 호로 총 4, 5만 호이다. 이들 12개 나라는 진왕(辰王)에게 속하였는데, 진왕은 항상 마한 사람을 왕으로 삼아 대대로 세습하였고, 진왕이 스스로 서서 왕이 될 수는 없었다. 《상동》 ○ 《위략(魏?)》에는, “그들은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이었으므로 마한에게 제압당한 것이 분명하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옛날에 한수(漢水) 남쪽의 지역이 삼한(三韓)이었는데, 그 가운데서 마한이 가장 커서 지금의 전라도, 충청도 및 경기의 남쪽 지역을 점유하였다. 그 뒤에 진(秦)나라 사람들이 망명하여 동쪽으로 나오자, 마한에서는 지금의 경상도 지역을 떼어 주고는 그곳을 진한이라고 칭하였다. 진(秦)이 진(辰)임은 《춘추좌전》의 ‘진영(辰?)’을 근거로 하여 증명할 수가 있다. 진한 가운데서 또 한 종족이 나뉘어졌는데, 이를 변진(弁辰)이라 한다.

○ 당초에 조선 왕 준(準)이 위만(?滿)에게 격파당하고는 남은 무리 수천 명을 이끌고 바닷가로 달아나 마한을 공격하여 격파하고는 스스로 서서 한왕(韓王)이 되었다. 《후한서》 ○ 《위략》에는, “준의 자식과 친척으로서 조선에 남아 있던 자들이 이를 인하여 한씨(韓氏) 성을 썼다. 준은 바다로 가서 왕이 되어서는 조선과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하였다.
○ 준이 마한의 땅인 금마군(金馬郡)에 살펴보건대, 지금의 익산군(益山郡)이다. 도읍을 정하니, 백성들이 많이 귀속하였다. 54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는데, 이가 바로 마한 왕으로, 진한과 변한이 모두 그에게 귀속하였다. 《조선세기(朝鮮世紀)》
○ 준왕의 후예는 끊어졌다. 《삼국지》에, “지금 한인(韓人) 가운데에 여전히 그의 제사를 받드는 자가 있다.” 하였다. 마한 사람들이 다시 스스로 서서 진왕(辰王)이 되었다. 《후한서》
○ 원봉(元封) 초에 진번(眞番)과 진국(辰國)이 안사고가 말하기를, “진(辰)은 진한의 나라이다.” 하였다. 글을 올리고는 천자를 알현하고자 하였는데, 조선 왕 우거(右渠)가 가로막고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 《한서》 ○ 삼가 살펴보건대, 《후한서》에, “마한이 가장 커서 함께 그들의 종족을 세워 진왕으로 삼았다. 그 뒤 조선후 준(準)이 위만에게 격파당하고는 바닷가로 달아나 마한을 공격하여 격파한 다음 스스로 서서 마한 왕이 되었다. 준의 후예가 끊어졌다. 그러자 한인(韓人)들이 다시 스스로 서서 진왕이 되었다.” 하였다. 그렇다면 우거 때 진국이라 칭하는 것은 바로 기준(箕準) 이후의 마한이니, 안사고가 이를 진한(辰韓)이라 한 것은 틀린 것이다.

진서(鎭書)가 삼가 살펴보건대, 기씨(箕氏)가 멸망한 것은 이미 우거 때보다 앞이었다. 그렇다면 기준이 취한 마한, 기씨 이후의 마한, 기씨가 세운 마한, 합하여 세 마한이 있는 것이다.

○ 후한 광무제(後漢光武帝) 건무(建武) 20년(44)에 한(韓)의 염사(廉斯) 사람 소마시(蘇馬?) 등이 낙랑(樂浪)에 와서 조공을 바쳤다. 염사는 읍명(邑名)이다. 광무제가 소마시를 봉하여 한염사읍군(漢廉斯邑君)을 삼고는 낙랑군에 속하게 한 뒤 사시마다 조회하게 하였다. 《후한서》

마한은 후한 때 중국과 통하였다. 《문헌통고》

○ 안제(安帝) 건광(建光) 원년(121) 12월에 고구려ㆍ마한ㆍ예ㆍ맥이 현도성을 포위하였다. 부여 왕(夫餘王)이 아들을 파견하여 주군(州郡)과 힘을 합쳐서 격파하였다. 《후한서》 ○ 삼가 살펴보건대, 이것은 금마군(金馬郡)에 있었던 마한이 아니다. 혹 백제(百濟)를 가리키는 것은 아닌가?
○ 영제(靈帝) 말기에 한(韓)과 예(濊)가 강성해져 군현들이 제압할 수가 없었다. 백성들이 난리에 고통을 받아 유망하여 한으로 들어오는 자가 많았다. 《상동》
○ 헌제(獻帝) 건안(建安) 연간에 공손강(公孫康)둔유현(屯有縣) 이남의 황무지를 쪼개어 대방군(帶方郡)을 만들었다. 그런 다음 공손모(公孫模)와 장창(張敞) 등을 보내어 유민들을 수습하고 군사를 일으켜서 한과 예를 치자, 옛 백성들이 조금씩 돌아왔다. 이 뒤로 왜와 한이 모두 대방군에 속하였다. 《삼국지》
○ 위(魏)나라 경초(景初) 연간에 명제(明帝)가 몰래 대방 태수 유흔(劉昕)과 낙랑 태수 선우사(鮮于嗣)를 보내어 바다를 건너가서 대방과 낙랑 두 군을 평정하였다. 한(韓) 땅에 있는 여러 나라의 신지(臣智)들에게 읍군(邑君)의 인수(印綬)를 하사하고 그다음의 사람들에게는 읍장(邑長)을 주었다. 그들의 풍속은 책(?)을 쓰기를 좋아하여 하호(下戶)가 군(郡)에 나가서 조회할 때는 모두 책을 빌려 쓰고서 나갔으며, 스스로 인수를 차고 책을 쓴 자들이 1천여 명이나 되었다. 《상동》
○ 위 제왕(魏齊王) 방(芳) 정시(正始) 7년(246) 2월에 유주 자사(幽州刺史) 관구검(?邱儉)이 고구려를 토벌하고, 5월에 예(濊)ㆍ맥(貊)을 토벌하여 모두 격파하였다. 한(韓)의 나해(那奚) 등 수십 나라가 각각 종족을 거느리고 항복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나해국은 마한에 소속된 구해국(狗奚國)인 듯하다. ○ 부종사(部從事) 오림(吳林)이 낙랑이 본디 한국을 통치하였다고 해서 진한의 8국을 분할하여 낙랑에 붙였다. 그런데 그 당시에 역관(譯官)이 말을 전하는 과정에서 차이가 있자, 신지(臣智)가 한(韓)의 분노를 자극해서 대방군(帶方郡) 기리영(崎離營)을 공격하였다. 이에 대방 태수 궁준(弓遵)과 낙랑 태수 유무(劉茂)가 군사를 일으켜서 정벌하여, 두 군이 비로소 한국을 멸망시켰다. 《이상 모두 상동》 ○ 삼가 살펴보건대, 부종사는 바로 낙랑 남부(南部)의 종사(從事)이다. 오림이 진한을 공격한 것은 정시(正始) 7년의 일이다. 이 일은 사군사실조(四郡事實條)에 상세하게 나와 있다.
○ 진류왕(陳留王) 경원(景元) 2년(261) 7월에 낙랑의 외이(外夷)인 한(韓)과 예(濊)가 각각 그 족속을 이끌고 와서 조공(朝貢)하였다. 《상동》
○ 진 무제(晉武帝) 함녕(咸寧) 2년(276) 2월에 동이(東夷) 8개 나라가 귀화하였다. 7월에 동이 17개 나라가 내부(內附)하였다. 《진서(晉書)》 ○ 살펴보건대, 진(晉)나라 때 동이가 조공하고 내부한 것은 모두 삼한(三韓)의 여러 나라들이 한 것이다.
○ 3년에 마한의 임금이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바쳤다. 동이의 세 나라에서 전후로 1천여 명이 각각 종족과 부락을 이끌고 와서 내부하였다. 《상동》
○ 4년 12월에 동이의 9개 나라가 내부하였다. 《상동》
○ 태강(太康) 원년(280)에 마한의 임금이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면서 방물(方物)을 바쳤다. ○ 진한의 왕이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삼가 살펴보건대, 진한의 왕은 신라 왕(新羅王)을 가리킨다. ○ 6월 갑신에 동이 10개 나라가 귀화하였다. 《이상 모두 상동》
○ 2년 6월에 동이 5개 나라가 내부하였다. 《상동》
○ 3년에 장화(張華)가 도독유주제군사(都督幽州諸軍事)가 되어 신구(新舊)를 모두 어루만져 받아들이자, 오랑캐와 중국 사람들이 모두들 흠모하였다. 이에 산골짜기와 바닷가에 살면서 중국과 4천 리나 멀리 떨어져 있어 대대로 중국에 부속되지 않고 있던 동이의 마한ㆍ신미(新彌) 등 20여 개 나라가 모두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바쳤다. 《상동》
○ 8년 8월에 동이의 2개 나라가 내부하였다. 《진서》
○ 9년 9월에 동이의 마한 등 7개 나라가 교위(校尉)에게 나아가 내부하였다. 24개의 군국(郡國)에 누리가 있었다. 《상동》
○ 10년 5월에 동이 11개 나라가 내부하고, 12월에 동이 가운데 아주 먼 곳에 있는 30여 나라가 와서 포로를 바쳤다. 《상동》
○ 태희(太?) 원년(290)에 마한, 진한이 또 동이 교위(東夷校尉) 하감(何龕)에게 나아가 방물을 바쳤다. 《상동》
○ 진 혜제(晉惠帝) 원강(元康) 원년(291)에 동이 17개 나라가 교위에게 나아와 내부하였다. 《상동》
○ 진 효무제(晉孝武帝) 태원(太元) 7년(382) 9월에 동이 5개 나라가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상동》

진 무제 함녕 연간에 마한 왕이 와서 조공을 바쳤는데 이 뒤로는 소식이 끊겼다. 삼한은 대개 백제와 신라에 병탄(幷呑)되었다. 《통전》 ○ 삼가 살펴보건대, 마한 왕은 본디 자신이 직접 조회한 일이 없으니, 두우(杜佑)의 설은 틀렸다.
지금 사람들 가운데에는 요동(遼東)을 일러 삼한(三韓)이라고 하는 자가 있다. 이에 대해 상고해 보면, 《상서》의 서(序)에 “성왕이 이미 동이를 정벌하였다.” 하였고, 《상서전》에 “해동의 여러 나라에는 구려(駒麗)ㆍ부여(扶餘)ㆍ한(?)ㆍ맥(貊) 등의 족속이 있다.” 하였고, 《상서정의》에는 “《한서》에 고구려(高駒麗)ㆍ부여(扶餘)ㆍ한(韓)만 있고 이 한(?)은 없는데, 한(?)은 바로 한(韓)이다.” 하였고, 《후한서》 광무기(光武紀)에는 “건무(建武) 20년에 동이의 한국(韓國) 사람이 백성을 이끌고 낙랑에 와서 내부하였다.” 하였고, 동이전(東夷傳)에는 “한(韓)에는 세 종류가 있다. 첫 번째는 마한이고, 두 번째는 진한이고, 세 번째는 변진(弁辰)이다. 《진서(晉書)》와 《양서(梁書)》 두 책에는 변한(弁韓)으로 되어 있다. 모두 78국이다.” 하였고, 《삼국지(三國志)》의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에는 “정시(正始) 7년에 관구검(?邱儉)이 고구려를 격파하자 한(韓)의 나혜(那奚) 등이 각각 종족을 이끌고 와서 항복하였다.” 하였고, “진류왕(陳留王) 경원(景元) 2년에 낙랑의 외예(外裔)인 한(韓)이 각각 그 족속을 이끌고 와서 조공하였다.” 하였으며, 《진서》의 장화열전(張華列傳)에는 “동이의 마한, 신미 등의 여러 나라가 모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하였고, 두우의 《통전(通典)》에는 “삼한의 땅은 해도(海島)의 가에 있으며, 조선의 동남쪽에 있다.” 하였다. 이상이 그 봉역(封域)과 조공(朝貢)에 대한 본말이다.
유희(劉?)의 《석명(釋名)》에는 “한양(韓羊), 한토(韓兎), 한계(韓鷄)는 본래의 법이 한국(韓國)에서 하는 바에서 나온 것이다.” 하였고, 후위(後魏)의 양고(陽固)가 지은 연색부(演索賦)에는 “아득히 먼 삼한이여, 풀옷 입은 사람들이 유유하구나.” 하였다. 이상이 그곳의 풍토이다. 《송사(宋史)》 천문지(天文志)에는 “구국(狗國) 사성(四星)이 건성(建星)의 동남쪽에 있으면서 삼한(三韓)ㆍ선비(鮮卑)ㆍ오환(烏桓)ㆍ험윤(??)ㆍ옥저(沃沮) 등을 주관한다.” 하였다. 이상이 그곳의 점상(占象)이다. 《송사》 고려열전(高麗列傳)에는 “숭녕(崇寧 송나라 휘종(徽宗)의 연호) 이후에 비로소 삼한통보(三韓通寶)를 주조하였다.”는 말이 있고, 《요사(遼史)》 외기(外紀)에는 “고려 왕자(高麗王子) 삼한국공 훈(三韓國公勳 순종(順宗)을 말함), 삼한국공 옹(三韓國公? 숙종(肅宗)을 말함), 삼한국공 우(三韓國公? 강종(康宗)을 말함)”라는 말이 있고, 지리지(地理志)에는 “고주(高州)에 삼한현(三韓縣)이 있다. 진한(辰韓)이 부여로 되고 변한(弁韓)이 신라로 되고 《북사(北史)》에는 “진한(辰韓)이 신라로 되었다.” 하였다. 마한(馬韓)이 고려로 되었다. 개태(開泰) 연간에 성종(聖宗)이 고려를 정벌하고 삼한의 유민(遺民)을 포로로 잡아 와 그들이 머무는 곳에 현(縣)을 두었다.” 하였다.
이것에 의거하여 본다면 삼국의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 와 내지(內地)에다가 두고 그들이 있는 곳을 현으로 삼으면서 삼한(三韓)이라는 이름만 취한 것이다. 이는 바로 한(漢)나라 때 상군(上郡)에 구자현(龜玆縣)이 있는데, 이를 서역(西域)에 있는 나라라고 하여서는 안 되는 것과 같다. 지금 사람들이 이에 요동을 삼한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내지를 가지고 외국(外國)이라고 지목한 것이다. 그 까닭을 따져 보면, 천계(天啓 명나라 희종(熹宗)의 연호) 초에 요양(遼陽) 지역을 잃어버린 이후에 장주(章奏)를 올리는 글에서 요양 사람을 일러 삼한이라 한 데에서 근본하는 것으로, 이는 요양 지역을 외국으로 치부한 것이다. 지금 요동 사람들이 이에 이것으로 자칭하는데, 이것 역시 스스로 외국으로 자처하는 것일 뿐이다. 《일지록(日知錄)》


[주D-001]한성(韓城) : 한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섬서성(陜西省) 서안시(西安市) 한성현(韓城縣)이라는 설과 하북성(河北省) 고안현(固安縣) 방성(方城)이라는 설이다. 김상기(金庠基)에 의하면 서주(西周) 시대에는 섬서성의 한성에 있다가 동주(東周) 시대에는 하북성 한성으로 이동하였다고 한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64쪽》
[주D-002]연의 백성들이 : 이 부분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가 있다. 후한 때 사람인 정현(鄭玄)의 전(箋)에는 ‘평안한 시기에 백성들이[燕師]’로 되어 있으며, 왕부(王符)의 《잠부론(潛夫論)》에는 “옛날 주 선왕(周宣王) 때에도 역시 한후(韓侯)가 있었는데, 그 나라가 연(燕)에 가까웠다.”고 하여 연을 나라 이름으로 해석하였으며, 명나라의 곽조경(郭造卿)은 《연사(燕史)》에서 “한은 연의 북쪽에 있으며, 맥(貊)은 한의 북쪽 나라이다. 한이 이미 연에 귀속된 뒤 한은 뒤이어 동쪽으로 옮겨 갔다.”고 하여, 역시 연을 나라 이름으로 해석하였으며, 청나라 말기의 학자 장병린(張炳麟)은 《태염문록속편(太炎文錄續編)》 권1에서 여기에 나오는 한성(韓城)의 위치를 북경의 북방에 있는 고안현(固安縣)으로 비정하고 연을 오늘날의 북경 일대로 비정하였다. 북한의 이지린 역시 연을 나라 이름으로 보면서 “이 연(燕) 자의 해석에 따라서 맥(貊)의 거주 지역이 달라지게 된다. 중국의 고힐강(顧?剛) 교수는 ‘서주(西周) 선왕(宣王) 때의 연은 오늘날의 산서성(山西省) 서부에 위치하였으며, 맥은 그 북쪽에 있었다.’고 하였다. 춘추 시대 때 맥의 위치는 이미 후일의 연나라의 훨씬 서북쪽까지 이르고 있는바, 《시경》 한혁편(韓奕篇)에 보이는 맥과 연은 절대로 전국 시대의 연과 그 북방과의 위치 관계로 인정할 수 없다.” 하였다.《고조선연구 153~156쪽》 지금 번역하면서는 후대 중국 학자들의 견해에 따라 연은 나라 이름으로 보고 번역하였다.
[주D-003]그 뒤에 …… 갔다 : 이곳의 원문은 ‘其後韓西 亦姓韓 爲?滿所伐 遷居海中’이다. 이에 대해 《잠부론》의 전에는 “살펴보건대, 한서(韓西)는 대개 조선(朝鮮)을 말한다. 조(朝)가 잘못하여 한(韓) 자로 되었고, 서(西)는 즉 선(鮮)이 바뀐 것이다. 그러므로 《상서대전(尙書大傳)》에는 서방(西方)을 선방(鮮方)이라고 하였다.” 하였으며, 이병도는 “여기의 한서(韓西)를 성명으로 보는 이도 있지만, 그렇게 보면 문장상 한(韓)이 겹들어 가고 또 동서(同書)의 문례로 보더라도 서(西)는 확실히 방위를 가리키는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한후국(韓侯國)의 서쪽이라고 해서는 아래의 구절과 일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래의 구절은 분명히 조선에 관한 이야기인데, 조선의 위치가 한후국의 서쪽에 있다고 해서는 말이 되지 아니하므로, 나는 일찍부터 ‘한서’를 ‘한동(韓東)’의 오(誤)로 보았다.”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48쪽》
[주D-004]국(國) : 국의 성격과 규모에 대하여 이병도는 하나의 부족 국가로서 그 영역과 인구가 한 군현(漢郡縣)의 일개 현에 불과하다고 파악하였다. 김원룡(金元龍)은 철제 농구(鐵製農具)를 사용하는 사회 계층을 기반으로 하는 부족 국가로, 천관우(千寬宇)는 지역 단위로서의 성(城)의 병합을 거치면서 성립된 것으로 이해하였다. 김정배(金貞培)는 인구 1만 명 정도의 군장 사회(君長社會)로, 백남욱(白南郁)은 국읍(國邑)과 별읍(別邑)을 중심으로 하는 상호 보완적인 생활 공동권을 형성하는 지역 집단(地域集團)으로서 대략 50리 내외의 반경을 가진 지역 범위일 것으로 추단하였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266쪽》
[주D-005]진왕(辰王) : 삼한 전체, 특히 마한 제국(諸國)의 맹주로서 아마도 여러 소국(小國)과의 주종(主從) 관계를 통하여 중국 군현과의 접촉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병도는 “진국(辰國)은 진왕(辰王)의 나라란 뜻이고, 진왕은 제부족 사회(諸部族社會)의 맹주국(盟主國)인 목지국(目支國)의 군장(君長)이다.”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240쪽》
[주D-006]목지국(目支國) : 고대 삼한 시대 마한에 있던 소국(小國)이다. 아직 국가 단계에는 이르지 못한 부족 사회였으며, 위치는 지금의 직산(稷山)이다. 목지국의 군장은 진왕(辰王)이라 하며, 주위의 모든 소국을 지배하였고, 여러 소국들은 목지국의 진왕을 최고 맹주(盟主)로 삼았다. 목지국에는 군장이 있어 이를 진왕(辰王)이라 하였다.
[주D-007]우리들은 …… 주었다 : 이 기록에 의하면 진한(辰韓) 소국(小國)이 기원전 3세기 후반에 한반도 중남부 지역으로 이주한 전국계(戰國系) 유민 집단(遺民集團)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고고학 자료를 참고로 고찰하면, 전국계 유민의 후예를 일부 포함한 위씨조선(衛氏朝鮮) 유민이 마한의 동쪽, 즉 소백산맥(小白山脈) 이동 지역인 경상도 방면으로 이주함으로 인한 새로운 정치 세력의 대두 과정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하여야 할 것이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267쪽》
[주D-008]나라를 …… 도(徒)라 하여 : 진한에서 방(邦)ㆍ호(弧)ㆍ행상(行觴)ㆍ도(徒) 등 중국어가 사용되었다는 것인데, 이 부분의 기사에 대해서는 한족(漢族)이 진시황을 피하여 한반도로 와서 정착하였다는 위의 기사와 함께 무시하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낙랑(樂浪) 방면에서의 유이민(流移民)도 있었을 것이므로, 고대 중국어에서의 차용어(借用語)가 행해진 것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999쪽》
[주D-009]말이 …… 비슷하였으므로 : 이 부분의 원문은 ‘有似秦語’이다. 이 부분이 《삼국지》에는 ‘有似秦人’으로 되어 있다.
[주D-010]신지(臣智) : 삼한 시대 군장(君長)의 칭호의 하나이다. 이병도는 “신(臣)은 대(大)를 의미하는 옛말인 것 같고, 지(智)는 벼슬아치, 장사치, 조라치, 갖바치 등의 직업자(職業者)의 호칭인 ‘치’의 사음(寫音)일 것이다. 즉 신지는 대인(大人)ㆍ대관(大官)의 뜻이다.”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240쪽》
[주D-011]마한에는 …… 있다 : 이 마한 54국의 현재 위치에 대해서는 크게 이병도의 설과 천관우의 설이 있는데,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韓國古代史硏究 262~266쪽》 《천관우, 마한 제국의 위치시론, 동양학 9, 1979》
소국명 현재의 지명
이병도 설 천관우 설
원양국 경기 수원 음덕면 일대 경기 파주, 연천 일대?
모수국 경기 수원 일대 경기 양주
상외국 경기 수원 장안, 우강면 일대 경기 파주, 연천?
소석색국 경기 서해의 섬 경기 강화 교동
대석색국 소석색국 부근 경기 강화
우휴모탁국 경기 부천 강원 춘천
신분활국 경기 양성 경기 가평?
백제국 경기 광주 서울 강남
속로불사국 경기 통진 지방 경기 김포 대곶, 월곶
일화국 미상 경기 양평, 지평?
고탄자국 미상 경기 양평, 지평?
고리국 경기 양주 풍양 경기 여주?
노람국 경기 이천군의 음죽면 일대 경기 이천군?
월(목)지국 충남 직산, 성환 평택 등지를 포함한 지역
자리모로국 경기 이천군의 일부(노람국과 인접) 충남 서산 지곡
소위건국 미상 충남 보령군
고원국 미상 충남 당진
막로국 미상 충남 예산, 덕산
비리국 전북 옥구군 회면 일대 충남 예산, 덕산
점리비국 전북 고부군? 충남 홍성군 결성
신흔국 충남 옛 진잠현? 충남 온양군?
지침국 충남 대흥 지방 충남 예산군 대흥
구로국 충남 청양군? 충남 청양군
비미국 옛 비인현(충남 서천의 일부) 충남 서천군 비인
감해비리국 충남 홍성군 충남 공주군
고포국 미상 충남 부여군
치리국국 충남 서산군 지곡면 일대 충남 서천군 한산
염로국 미상 전북 익산군 함열
아림국 충남 서천군? 충남 서천군
사로국 충남 홍성군 장곡면 충남 논산군 은진?
내비리국 미상 충남 대덕군 유성
감해국 전북 함열 전북 익산군
만로국 충남 보령군의 일부인 남포 전북 옥구군
벽비리국 전북 김제 전남 보성군 복내면 일대 전북 김제군
구사오조국 전남 장성군 진원면 일대 전북 김제군 금구
일리국 미상 전북 부안, 태인?
불리국 전남 나주군 전북 부안, 태인?
지반국 미상 전북 부안, 태인?
구소국 위명(僞名)으로 간주 전북 정읍군 고부
첩로국 미상 전북 정읍군
모로비리국 전북 고창군 전북 고창군
신소도국 충남 태안(서산) 전북 고창군 흥덕
막로국 중출(重出)로 간주 전남 영광군
고랍국 전북 남원군 전남 장성군
임소반국 전북 옥구군 전남 광산, 나주?
신운신국 충남 천안군? 전남 광산, 나주?
여래비리국 전북 여산 지방 전남 화순군 능주
초산도비리국 전북 정읍군 전남 진도군 군내면
일난국 미상 전남 영암군
구해국 전남 강진군 전남 해남군 마산
불운국 충남 공주의 서부? 전남 보성군 복내 이복성?
불사분야국 전북 전주군 전남 승주군 낙안
원지국 미상 전남 여수군
건마국 전북 익산군 전남 장흥군
초리국 미상 전남 고흥군 남양


[주D-012]진한(辰韓)은 …… 24국이다 : 한치윤은 군미국과 변군미국을 같은 나라로 보아 총 24국이라 하였으나, 이병도와 천관우는 이를 다른 나라로 보아 총 25국으로 하였다. 이들의 현재 위치에 대해서는 크게 이병도의 설과 천관우의 설이 있는데,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韓國古代史硏究 274~276쪽》 《천관우, 진ㆍ변한 제국의 위치 시론, 백산학보 20, 1976》
소국명 현재의 지명
이병도의 설 천관우의 설
이저국 경북 안동군 경북 영주군 풍기(기목)
불사국 경북 창녕군 경북 안동
변진미리미동국 경남 밀양군 경북 예천군 용궁, 상주군 함창 포함
변진접도국 경남 칠원 미상(경북 상주?)
근기국 경북 영일군 경북 청도
난미리미동국 경북 의성군 경남 창녕군 영산
변진고자미동국 경남 고성군 경남 고성
변진고순시국 미상 경남 사천, 삼천포
염해국 경남 울산군 미상(경북 대구?)
변진반로국 경북 성주군 미상(경남 합천?)
변릭노국 경남 하동군 악양면 일대 미상(경남 진주?)
군미국 미상 경북 칠곡군 인동
변군미국 경남 사천군 경북 칠곡군 약목, 성주
변진미오야마국 경북 고령 지방 경북 고령, 성산 포함
여담국 경북 군위군 경북 의성군 탑리, 군위
변진감로국 경북 금릉군 개령 일대 경북 금릉군 개령, 선산 포함
호로국 경북 상주군 함창면 일대 경북 영천
주선국 미상 미상(경북 경산군 자인, 경산?)
마연국 미상 경남 밀양
변진구야국 경남 김해 일대 경남 김해
변진주조마국 경북 금릉군 조마면 일대 경남 함안군 칠원, 마산
변진안야국 경남 함안군 경남 함안
변진독로국 경남 동래군 경남 동래
사로국 경북 경주 경북 경주
우유국 경북 청도군 경북 울진


[주D-013]준의 …… 썼다 : 이 부분의 원문은 ‘其子及親留在國者因冒姓韓氏’이다. 이에 대하여 이병도는 “《위략》의 찬자는 준왕이 ‘자호한왕(自號韓王)’이라 하였기 때문에 고국에 억류된 그의 아들과 친족들도 인하여 한씨(韓氏)를 모칭(冒稱)한 것 같이 말하였다. 그러나 이는 잘못이다. 조선 왕 준이 남쪽으로 도망해 오기 이전의 반도 중부 이남에는 아직 한(韓)의 칭호를 가진 지방이 없었고 준이 한왕이라 칭한 것도 본디 자신의 성이 한씨였기 때문에 그렇게 자칭한 것이다. 또 고국에 억류된 친족들도 새삼 한씨를 모성한 것이 아니라 그의 본성 역시 그러한 까닭에 한씨라고 인성(因姓)한 것이다.”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250쪽》 또 ‘及親’을 ‘우친(友親)’으로 보는 데 대해 상고해 보면, 《동사강목》에, “이정귀(李廷龜)가 쓴 기자숭인전비(箕子崇仁殿碑)에 ‘마한 말기에 잔손 3인이 있었는데, 친(親)이란 사람은 뒤에 한씨(韓氏)가 되고 평(平)이란 사람은 기씨(奇氏)가 되고 양(諒)이란 사람은 선우씨(鮮于氏)가 되었다.’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말한 친(親)은 바로 《문헌통고(文獻通考)》에서 말한 ‘기준의 아들 우친이 머물러 있다가 한씨로 모성하였다.’는 데에서 나온 것이다.” 하였다.《東史綱目 附錄 卷上 考異》 이병도는 “청주 한씨(淸州韓氏)의 세보(世譜)를 보면 그들의 원조(遠祖)를 기자로 삼고 있다. 이것은 《위략(魏?)》의 글에 의거한 것인데, 그 세보에는 《위략》에 운(云)이라 하고 기자의 후에 우친(友親)ㆍ우평(友平)ㆍ우량(友諒)이 있어, 그중에 우량이 마한을 공격하여 이기고 상당 한씨(上黨韓氏)가 되었다고 적혀 있다. 이는 너무도 심한 날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날조자는 《위략》의 글에 나오는 급(及) 자가 《문헌통고》와 같은 서적에 잘못 우(友) 자로 와전된 것을 그대로 보아, 그 밑의 친(親) 자와 합하여 ‘우친(友親)’이란 인명으로 오독(誤讀)한 후 진일보하여 우 자의 항렬을 붙이어 우평, 우량 두 허위 인물을 더 추가한 것이다.”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51쪽》
[주D-014]염사(廉斯) : 지금의 아산(牙山)으로 비정된다. 이병도는 “아산은 백제의 아술현(牙述縣)으로, 아(牙)의 훈(訓)은 ‘엄’이며, 아산현의 뒷날 이름이 음술[陰峯, 陰岑]로, 그 음이 염사와 흡사하다.”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245쪽》
[주D-015]공손강(公孫康) : 위(魏)나라 초기의 장수로 공손도(公孫度)의 아들이다. 공손도의 뒤를 이어 요동 태수로 있으면서 고구려 왕 이이모(伊夷模) 즉 산상왕(山上王)을 공격해 환도성(丸都城)으로 도읍을 옮기게 하고, 또 낙랑 지방에 세력을 뻗쳐 대방군을 설치하고, 한(韓)ㆍ예(濊)도 공격하였다.
[주D-016]둔유현(屯有縣) : 이병도는 “둔유현은 원낙랑(元樂浪)의 남쪽 경계로, 지금의 황해도 북단의 황주(黃州)에 틀림이 없다.”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149쪽》
[주D-017]하호(下戶) : 하호의 개념 규정 문제는 아직도 학계에서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대체로 사회경제사 측에서는 ‘노예(奴隷)’나 ‘농노(農奴)’ 혹은 그와 유사한 층으로 보는 견해가 많으며, 김철준(金哲俊)ㆍ홍승기(洪承基) 등은 ‘민(民)’으로, 김용덕(金龍德)은 ‘속민(屬民)’으로 보고 있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72쪽》
[주D-018]유주 자사(幽州刺史) : 유주(幽州)는 주대(周代)에는 산동성 북부와 하북성 및 만주의 금주(錦州), 열하성(熱河省) 동남 지방을 지칭하였다. 유주가 공식적인 지방행정 구역이 된 것은 전한(前漢) 때로, 대군(代郡)ㆍ상곡(上谷)ㆍ탁군(?郡)ㆍ어양(漁陽)ㆍ우북평(右北平)ㆍ광양(廣陽)ㆍ발해(渤海)ㆍ요서(遼西)ㆍ요동(遼東) 및 한사군(漢四郡)을 포괄하는 동북 변방 일대를 총칭하였다. 이때의 치소(治所)는 북경(北京) 부근에 있는 계(?)였다. 서진(西晉)에 들어와서는 창려(昌黎)ㆍ요동(遼東) 등지를 평주(平州)에 이관시키고 난하(?河) 이서(以西)의 지역에 한정되었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52쪽》
[주D-019]오환(烏桓) : 부족의 이름으로, 오환(烏丸)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본래 동호(東胡)의 별종으로, 한나라 때 흉노에게 멸망당하였는데, 나머지 종족들이 오환산(烏桓山)으로 도망쳐 들어가 살면서 산의 이름을 종족명으로 삼았다.
[주D-020]삼한통보(三韓通寶) : 고려 때 사용한 화폐로, 성종(成宗)에서 숙종(肅宗) 때까지 중국의 화폐를 모방하여 사용하였는데, 그 가운데 가장 먼저 만들어 사용한 것인 듯하다.

 

 

 <<< 예---濊>>>

 

○ 성주(成周)의 회합에서 서면(西面)한 자는 정북방의 예인(穢人) 전아(前兒)인데, 전아는 원숭이와 같이 생겼다. 《급총주서(汲?周書)》

예(穢)는 한예(寒穢)로 동이의 별종이다. 《급총주서주》

○ 예는 북쪽은 고구려ㆍ옥저(沃沮)와 접해 있고, 남쪽은 진한과 접해 있으며, 동쪽은 큰 바다와 맞닿아 있고, 서쪽은 낙랑(樂浪)에까지 이른다. 예와 옥저ㆍ구려는 본래 모두 조선(朝鮮)의 지역이다. 《후한서》
○ 한 무제 원삭(元朔) 원년(기원전 128)에
예군(濊君) 남려(南閭) 등이 살펴보건대, 《한서》에는 ‘동이 예군(濊君) 남려’로 되어 있다. 이에 대해 진작(晉灼)은 주석하기를, “예(濊) 자는 옛날의 예(穢) 자이다.” 하였다. 우거(右渠)를 배반하고 28만 명의 무리를 이끌고 요동으로 와서 내속(內屬)하니, 그 지역을 창해군(蒼海郡)으로 삼았다. 《상동》 ○ 《한서》에는, “무제가 즉위한 지 몇 년 뒤에 팽오(彭吳)가 길을 열어 예, 맥, 조선에 통하게 하고 창해군을 두니 연(燕)과 제(齊) 사이에 있는 백성들이 창해군 쪽으로 이동하였다.” 하였다. ○ 《사기》에는, “장량(張良)이 협객을 구해 한(韓)을 위하여 원수를 갚고자 하였다. 동쪽으로 가서 창해군(倉海君)을 만나 역사(力士)를 구해 박랑사(博浪沙)에서 진시황제를 습격하였다.” 하였다. ○ 여순(如淳)의 주에는, “진나라의 군현 가운데는 창해(倉海)가 없다. 혹자는 동이의 군장(君長)이라 한다.” 하였다. ○ 《사기정의(史記正義)》에는, “《한서》 무제기에, ‘원년에 동이 예군 남려 등이 항복하자 창해군(倉海君)으로 삼았는데, 지금의 맥예국(貊穢國)이다.’ 하였으니, 그 말이 맞다. 태사공(太史公)이 《사기》를 지을 때 이미 항복하여 군(郡)으로 삼았으므로 스스로 쓴 것이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팽오가 길을 열어 예ㆍ맥ㆍ조선에 통하게 하고는 창해군을 두었다고 하였으니, 남려가 항복한 것이 팽오가 길을 통한 때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 3년 봄에 창해군을 혁파하였다. 공손홍(公孫弘)이 “중국을 피폐하게 하면서 쓸모없는 땅을 떠받드는 것이니 혁파하기 바란다.”고 여러 차례 간하자, 상이 얼마 있다가 허락한 것이다. 《한서》
○ 원봉(元封) 3년(기원전 108)에 조선을 멸하고 낙랑ㆍ진번ㆍ임둔ㆍ현도 사군(四郡)을 나누어 두었다. 한 소제(漢昭帝) 시원(始元) 5년(기원전 82)에 임둔과 진번을 혁파하여 낙랑과 현도에 병합시켰다. 이에
단단대령(單單大領) 동쪽의 예와 맥이 모두 낙랑에 속하였다. 그 뒤에 영토가 너무 크고 멀다는 이유로 다시 나누어 영동의 7현(縣)에 낙랑 동부도위(樂浪東部都尉)를 두었다. 《후한서》
○ 한 광무제 건무(建武) 6년(30)에 동부 도위(東部都尉)를 없애고 영동의 지역을 모두 버렸다. 그러고는 그곳에다가 우두머리[渠帥]를 세워 현후(縣侯)로 삼고는 모두 새해 초에 조하(朝賀)하게 하였다. 그곳에는 큰 군장(君長)이 없고
후(侯), 읍군(邑君), 삼로(三老) 등의 관직이 있으며, 노인들은 스스로 고구려와 같은 종족이라고 하는데, 언어와 풍속이 대체로 서로 비슷하다. 《상동》

진서(鎭書)가 삼가 살펴보건대, 예국(濊國)은 지금의 강릉부(江陵府)이다. 한 무제 초년에 창해군을 두었다가 수년 뒤에 혁파하였다. 조선을 멸함에 미쳐서 예 땅에 임둔군을 두었으니, 영동(嶺東)의 7현이 바로 그 지역이다. 뒤에 7현을 도위에게 예속시켰다가 한 광무제가 도위를 혁파하고 다시 토착의 우두머리를 봉하여 예후(濊侯)로 삼았는데, 화려(華麗)와 불내(不耐) 등 여러 현이 모두 후국(侯國)을 칭하였다.

○ 예(濊)는 지금의 조선 동쪽이 모두 그 지역이며, 호구가 3만이다. 한 무제가 조선을 멸하고 그 지역을 나누어 사군을 두었다. 이로부터 중국과 오랑캐가 조금 구별되었다. 단단대산령(單單大山領) 서쪽은 낙랑에 속하고 동쪽 7군은 동부 도위가 통치하였는데, 모두 예 땅 사람들을 백성으로 삼았다. 뒤에 도위를 혁파하고 그곳 지역의 우두머리를 봉하여 후(侯)로 삼았다. 지금의 불내예(不耐濊)가 모두 그 종족이다. 한나라 말기에 다시 구려(句驪)에 속하였다. ○ 이적(夷狄)들이 다시금 서로 공격하였다. 오로지 불내예후(不耐濊侯)만이 지금까지도 공조(功曹)와 주부(主簿) 등 여러 조(曹)를 두고서 모두 예 사람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상 모두 삼국지》
○ 위 제왕(魏齊王) 방(芳) 정시(正始) 6년(245)에 낙랑 태수 유무(劉茂)와 대방 태수 궁준(弓遵)이 단단대령 동쪽의 예가 구려에 복속하였다는 이유로 군사를 일으켜 공격하였다. 이에 불내예후 등이 고을을 들어 항복하였다. 《상동》
○ 8년에 예왕(濊王)이 대궐에 나아가 조알하자, 다시 불내후(不耐侯)를 제수하였다. 예왕은 백성들과 뒤섞여 거처하였으며, 네 계절마다 군(郡)에 와서 조알하였다. 두 군에 전역(戰役)이 있거나 조세(租稅)를 거둘 일이 있을 경우, 예의 백성들에게도 조세를 내게 하고 사역을 시켜서 군의 백성들과 똑같이 취급하였다. 《상동》
○ 후위(後魏)
소성제(昭成帝) 건국(建國) 2년(339)에 동쪽의 예와 맥이 내부하였다. 《후한서》

[주D-001]예군(濊君) 남려(南閭) : 이병도는, 예군 남려는 지금의 통구(通溝) 방면에 있던 대수맥(大水貊)의 군장(君長)으로 대수와 소수(小水) 유역의 사회에서 실권을 잡고 있던 최고 맹주일 것이라고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356쪽》
[주D-002]창해군(蒼海郡) : 한나라 무제(武帝) 때 지금의 통구 부근에 설치한 군현으로 원삭(元朔) 원년에 설치되었다가 원삭 3년에 폐지되었다. 예ㆍ맥은 본디 지금의 통구 부근에 근거를 두고 있다가 세력이 약해지면서 후대에 지금의 함경도와 강원도 지방으로 옮겨 왔는데, 후대의 중국 사서(史書)에서는 이 두 예ㆍ맥을 혼동하여 예ㆍ맥이 본디 강원도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 잘못 동예전(東濊傳) 속에 포함시키기도 하였다.
[주D-003]단단대령(單單大領) : 단단대령의 위치에 대하여 안정복은 “단단대령은 지금의 철령(鐵嶺) 안팎에서 대관령(大關嶺)에 이르는 한 가닥 산령(山嶺)이 바로 그것이다. 《여지승람》에서 대관령을 또한 대령(大嶺)이라고 칭하였으니, 아마 옛 이름이 없어지지 않았던가 보다.” 하였으며,《동사강목 부록 권하 지리고》 이병도는 “《위지》의 이른바 단단대령은 지금의 대관령이 아니라, 지금의 함경도와 평안도 양도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분수령(分水嶺)을 지칭하는 것이다.”고 하였으며,《韓國古代史硏究 192쪽》 북한의 이지린은 “단단대령이란 영은 요동반도를 좌우로 나누는 산맥의 최고산인 현 마천령이다.” 하였으며,《고조선연구 310쪽》 《조선전사》에는 중국의 천산산(天山山) 줄기로 보고 있다.《조선전사 제2권, 113쪽》
[주D-004]영동의 7현(縣) : 옛 임둔군(臨屯郡)에 있었던 7현을 가리킨다. 안정복이나 한진서(韓鎭書)는 모두 이 7현의 위치를 지금의 관동 지방에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병도는 이 7현을 덕원군(德源郡) 부근에 있던 동이현(東?縣), 안변(安邊)이나 통천(通川)에 있던 불이현(不而縣) 즉 불내현(不耐縣), 문천(文川)이나 고성(高城)에 있던 사두매현(邪頭昧縣), 함흥(咸興) 부근에 있던 부조현(夫租縣), 영흥(永興)에 있던 화려현(華麗縣), 평강(平康)이나 회양(淮陽) 두 곳에 있던 전막현(前莫縣)과 잠대현(蠶台縣)이라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196~208쪽》 북한의 이지린은 “불내(不耐)를 국내성(國內城)을 제외하고 다른 곳에서는 찾을 수가 없다.”고 하면서 영동 7현의 위치를 압록강 즙안(楫安) 지역에서부터 요동반도 동해안의 지역에 있는 것으로 보았다.《고조선연구 191쪽》
[주D-005]후(侯), 읍군(邑君), 삼로(三老) : 이 세 가지 칭호는 한군현(漢郡縣)에서 조금 큰 토착 사회(土着社會)의 족장(族長)을 후로 봉하고, 그다음을 읍군으로, 가장 작은 것을 삼로로 불렀던 데서 온 것이다. 이들은 상호 같은 자격, 같은 성격을 가지고 병립할 수 있었으며, 고대국가 체제에서 볼 수 있는 하나의 지배체제 안에서의 상하(上下) 층서(層序) 구분의 칭호는 아니었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264쪽》
[주D-006]소성제(昭成帝) : 북위(北魏)의 척발십익건(拓跋什翼?)을 가리킨다. 도무제(道武帝) 때 고조(高祖)로 추존되었으며, 39년간 재위하였다.《北史 卷1》

 

 

<<< 맥---貊 >>>

 

○ 맥에는 백곡이 자라지 않고 오로지 기장만이 자란다. 성곽, 궁실, 종묘와 제사 지내는 예가 없으며, 제후의 폐백과 음식에 관한 법도가 없으며, 백관과 유사(有司)가 없다. 그러므로 세금을 20분의 1만 거두어도 풍족하다. 《맹자》

맥은 동북쪽의 오랑캐이다. 《급취편성씨주(急就篇姓氏註)》
유주(幽州)의 동쪽은 예와 맥까지이다. 《유주목잠(幽州牧箴)》
궁벽하고 먼 맥 지방은 말이 시(詩)를 채집하는 자에게 전해지지 않고, 땅에는 정삭(正朔)이 미치지 않았다. 《문선 칠명(文選七命)》

○ 무왕이 상(商)을 정벌하자 화하(華夏)와 만맥(蠻貊)이 모두 다 복종하였다. 《상서》
하관(夏官) 직방씨(職方氏)는 구맥(九?)의 사람을 관장한다. 《주례(周禮)》

구맥은 주나라에서 복속한 나라의 숫자이다. 《주례주(周禮註)》
구맥은 바로 구이(九夷)로 동방에 있다. 《주례소(周禮疏)》

○ 추관(秋官)의 맥예(?隷)는 동북쪽의 오랑캐를 정벌하여 얻은 자들을 뽑아서 원역(員役)으로 삼은 것이다. 《주례주(周禮註)》
○ 《모시(毛詩)》에,

선왕(宣王)께서 한후에게 / 王錫韓侯
퇴족과 맥족을 다스리게 하시었도다 / 其追其貊
비가죽을 조공으로 바치고 / 獻其?皮
표범가죽과 말곰가죽을 바치는도다 / 赤豹黃?

하였다. 《모시》 ○ 《주자집전(朱子集傳)》에는, “퇴(追)와 맥(貊)이란 나라가 와서 공물을 바쳤다.” 하였다.

경전(經典)에서 말한 맥은 대부분 동이(東夷)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직방씨가 사이(四夷)와 구맥(九貊)을 관장한다고 한 데 대하여 《정지(鄭志)》에, “조상(趙商)에게 답하기를, ‘구맥은 바로 구이이다.’ 하였다.” 하였으며, 또 추관(秋官)의 ‘맥예(?隷)’에 대한 주에, “동북쪽의 오랑캐를 정벌하여 얻은 것이다.” 하였다. 이 맥은 동이의 종족이다. 그런데 북쪽에 나뉘어 살았으므로 선왕 때 한후(韓侯)가 통솔한 것이다. 한(漢)나라 초기에 이르러서는 그 종족이 모두 동북쪽에 있어서 병주(幷州)의 북쪽에 다시는 맥의 종족이 없었다. 이에 또 말하기를, “그 뒤 퇴니 맥이니 하는 종족들은 험윤(??)에게 몰려 점차 동쪽으로 옮겨 갔다.” 한 것이다. 《모시정의(毛詩正義》
시에 나오는 ‘기퇴기맥(其追其貊)’에 대하여 《보전(補傳)》에서는, “맥은 북방에 있는 나라로 선성(先聖 공자를 가리킴)이 만맥(蠻貊)에 대해서 말한 설이 있다. 퇴는 북방에 있는 나라로 이곳에서 처음으로 보인다.” 하였고, 모씨(毛氏)는 “퇴와 맥은 융적(戎狄)의 나라이다.” 하였고, 소씨(蘇氏)는 “퇴와 맥의 사람을 준 것이다.” 하였고, 정씨(鄭氏)는 “한나라 초기에 맥의 종족이 모두 동북쪽에 있었다.” 하였고, 직방씨(職方氏) 구맥(九貊)의 주에서는 북방에 있다고 하였으며, 공씨(孔氏)는 “맥이라고 말한 것은 미워해서 그렇게 말한 것이다.” 하였다. 《시지리고(詩地理考)》
‘기퇴기맥’에 대하여, 정현은, 경전에서 말한 맥이 대부분 동이족을 가리키는데 한(漢)나라 때에는 이른바 예와 맥이라는 종족이 모두 동북방에 있으므로 이를 인하여 《모시전(毛詩箋)》의 끝에서 두 마디 말을 첨가하면서 “그 뒤 퇴니 맥이니 하는 종족들은 험윤에게 몰려 점차 동쪽으로 옮겨 갔다.” 하였다. 여기에서 강성(康成 정현의 자임)이 스스로 편치 못하여 그 설을 끌어다 댄 것을 알 수가 있다. 《일지록(日知錄)》

○ 《모시》에,

노 희공이 서택까지 차지하여 / 遂荒徐宅
바닷가까지 이르렀도다 / 至于海邦
회의 오랑캐와 만맥의 족속까지 / 淮夷蠻貊
모두가 따르는도다 / 莫不率從

하였다. 《모시》

노 희공(魯僖公) 때 맥이 노에 가까웠다. 《모시정의》

○ 제 환공(齊桓公)이 승거(乘車)의 회합을 세 번 열고 병거(兵車)의 회합을 여섯 번 열어 제후들과 아홉 번 회합하여 천하를 통일하였다. 북쪽으로는 고죽(孤竹)ㆍ산융(山戎)ㆍ예(穢)ㆍ맥(貊)ㆍ구진하(拘秦夏)까지 이르렀다. 《관자(管子)》 ○ 《사기》에는, “조양자(趙襄子)가 구주산(句注山)을 넘어 병(幷)과 대(代)를 격파하고 호(胡)와 맥(?)에 임하였다.” 하였다. ○ 《사기》 흉노전(凶奴傳)에는, “묵특(冒頓)이 강대하여 북방의 오랑캐를 모두 복종시켰다. 좌방(左方)의 왕(王)과 대장(大將)들은 동쪽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상곡(上谷)과 맞닿아 있고, 그 이후는 동쪽으로 예ㆍ맥ㆍ조선과 접해 있었다.” 하였다.
○ 한 고조(漢高祖) 4년(기원전 203) 8월에 한왕이 초(楚)를 공격하여 광무(廣武)에 주둔하였는데, 북쪽의 맥(?)과 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맥은 동북쪽에 있다. 삼한(三韓)의 족속은 다 맥의 종족이다.” 하였다. 연(燕)에서 날랜 군사를 보내와 한나라를 도왔다. 《한서》

신이 살펴보건대, 이것이 중국에서 오랑캐들에게서 처음으로 군사를 빌려온 것이다. 무릇 오랑캐들은 이리나 승냥이와 같으니, 그들과 함께 일을 도모하여서는 안 된다. 그들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일을 성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없다고 해서 반드시 일을 망치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일이 있을 때 그들의 힘을 빌릴 경우에는 비록 한때의 뜻은 시원하게 할 수 있다 하더라도 뒷날의 폐해는 반드시 없다고 보장할 수가 없다. 한 고조가 이런 일을 한 뒤로 후세의 중국 임금들이 가끔 오랑캐들에게서 군사를 빌렸다. 그러나 이익을 얻은 것은 적고 폐해를 받은 것은 많았다.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

○ 한 무제(漢武帝)가 즉위한 지 수년 만에 팽오(彭吳)가 안사고가 말하기를, “사람의 이름이다.” 하였다. 예ㆍ맥ㆍ조선의 길을 열었다. 《한서》

살펴보건대, 《사기》 평준서(平準書)에 “팽오가 조선을 멸하고 창해군을 두었다.[彭吳賈滅朝鮮置滄海]”고 한 데 대하여 《사기색은》과 안사고는 모두 “팽오는 사람의 이름이다.” 하였다. 그런데 《통감고이(通鑑考異)》에는 “조선을 멸하고 창해군을 둔 두 가지 일 가운데 어느 것이 가(賈)의 계책에서 나온 것인지 모르겠다.” 하였으니, 이는 팽오가(彭吳賈)를 사람의 이름으로 본 것으로,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동사(東史)에는, “우수주(牛首州)에 팽오비(彭吳碑)가 있다.” 하였고, 또 “단군(檀君)이 팽오에게 명하여 국내의 산천을 다스리게 해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게 하였다.” 하였는데, 이는 팽오가 한나라 때 사람인지 알지 못하고 우리나라가 처음 열렸을 때 팽오라는 자가 있어서 처음으로 길을 통하게 한 것으로 여겨 드디어 단군의 신하라고 한 것이니, 아주 틀린 것이다. 우수주는 지금의 춘천부(春川府)로 바로 맥국의 도읍지이다.

○ 명제(明帝) 영평(永平) 2년(59) 정월 신미에 광무황제(光武皇帝)를 명당(明堂)에다 제사 지내었는데, 오환(烏桓)ㆍ예(濊)ㆍ맥(貊)이 모두 와서 제사를 도왔다. 《후한서》 ○ 《후한서》에 또, “광무제 건무 원년에 오한(吳漢)이 우래(尤來), 대창(大槍) 등 적(賊)을 추격하여 요서(遼西)와 요동(遼東)에 들어 왔다가 오환(烏桓)과 맥(貊) 사람들에게 격파되어 몰살하였다.” 하였다. ○ 삼가 살펴보건대, 이곳에서 말한 맥 사람은 고구려와 소수맥(小水貊)을 가리키는 것이지, 춘천(春川)에 있는 맥을 가리키는 것은 아님이 분명하다.
○ 안제(安帝) 원초(元初) 5년(118) 6월에 예ㆍ맥이 고구려와 더불어서 현도를 침입하였다. 《상동》
○ 건광(建光) 원년(121) 정월에 유주 자사(幽州刺史) 풍환(馮煥)이 두 군의 태수를 이끌고 예와 맥을 토벌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 4월에 예와 맥이 다시 선비(鮮卑)와 함께 요동을 침입하였다. ○ 11월에 예와 맥이 고구려ㆍ마한과 함께 현도성을 포위하였는데, 부여 왕이 아들을 보내어서 주군(州郡)과 함께 토벌하여 격파하였다. 《이상 모두 상동》
○ 영제(靈帝) 건녕(建寧) 2년(169) 12월에 예와 맥이 유주(幽州)와 병주(幷州) 두 주를 침입하였다. 《상동》

[주D-001]정삭(正朔) : 정(正)은 1년의 시작을, 삭(朔)은 한 달의 시작을 의미하는데, 전하여 달력이나 역수(曆數)를 지칭한다. 제왕이 건국하면 달력을 고쳐 천하에 반포하여 통치 지역 내에서는 모두 그 달력을 행하였다.
[주D-002]하관(夏官) 직방씨(職方氏) : 직방씨는 주대(周代)의 벼슬 이름이다. 《주례(周禮)》 하관(夏官)에 속하여 천하의 지도(地圖)를 맡아 보았으며, 사방에서 들어오는 공물(貢物)을 관장하였다.
[주D-003]경전(經典)에서 …… 모시정의(毛詩正義) : 이 부분이 원문에서는 《모시전》의 내용으로 되어 있으나 《모시전》에는 이런 내용이 없고, 《모시정의》에 들어 있다. 원저자가 착각하여 잘못 기록한 듯하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4]구주산(句注山) : 산서성(山西省) 대현(代縣)의 서북쪽에 있는 산의 이름이다. 안문산(雁門山)이라고도 한다.
[주D-005]살펴보건대 …… 모르겠다 : 이병도는 “《한서》의 ‘팽오천예맥조선(彭吳穿濊貊朝鮮)’을 《한서》보다 앞서 된 《사기》 평준서에 대조하여 보면, 거기에는 ‘팽오가멸조선운운(彭吳賈滅朝鮮云云)’이라 하여 천(穿) 자가 가(賈)로 되고 예(濊) 자가 멸(滅)로 되어 있는데, 이는 《사기》의 원문이 어느 때 사오(寫誤) 혹은 판오(板誤)로 그렇게 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86쪽》
[주D-006]소수맥(小水貊) : 압록강의 지류(支流) 동가강(?佳江)의 예맥(濊貊), 압록강 유역의 예맥족을 대수맥(大水貊)이라 하고, 졸본 부락(卒本部落)을 소수맥이라 하였는데, 여기에서 고구려가 일어났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정신문화연구원, 1987, 172쪽 주》

 

 

<<< 부여---夫餘 >>>

 

살펴보건대, 부여국은 지금의 봉천부(奉天府)의 개원현(開原縣)이니 본디 우리나라의 구역 안에 있는 나라가 아니다. 그러나 부여는 구려(句麗)와 백제(百濟)가 일어난 곳이기에 특별히 똑같은 예로 기(紀)를 둔다.
진서(鎭書)가 삼가 살펴보건대, 《상서전(尙書傳)》에 “무왕(武王)이 상(商)을 이기자 해동(海東)의 여러 오랑캐와 부여(夫餘)의 족속이 모두 길을 통하였다.”고 하였고, 《산해경(山海經)》에는 “대황(大荒)의 북쪽에는 호(胡)가 있다. 불여(不與)란 나라로 성은 열(烈)이고, 기장을 먹는다.”고 하였다. ‘불(不)’이 중국 음(中國音)으로는 ‘부(夫)’이니 불여국은 바로 부여국이다. 그리고 《풍속통(風俗通)》에는 구이(九夷)의 조목 가운데 부유(鳧臾)가 있는데, 부유 역시 부여이다. 《통지(通志)》의 씨족략(氏族略)에 나오는 ‘부유씨(鳧臾氏)’는 백제(百濟)의 부여(夫餘)인데 음이 변하여 부유로 된 것이다. 또 기자(箕子)의 이름인 서여(胥餘)가 혹 수유(須臾)로 되어 있기도 하다. 이는 대개 부(鳧)와 부(夫)는 음이 서로 비슷하고, 유(臾)와 여(餘)는 옛날에는 서로 통용하였기 때문에 그런 것이니, 부여라는 명칭은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 부여국은 현도(玄?)의 북쪽 1천 리 되는 곳에 있다. 남쪽으로는 고구려와 경계를 접하였고, 동쪽으로는 읍루(?婁)와, 서쪽으로는 선비(鮮卑)와 접하였으며, 북쪽에는 약수(弱水)가 있다. 지방이 2천 리이고, 본디 예(濊)의 땅이다. ○ 처음 북이(北夷)의 색리왕(索離王)살펴보건대, 색(索)은 혹 고(?)로도 되어 있다. 출행(出行)하였었는데, 시아(侍兒)가 그 뒤에 임신하였다. 왕이 돌아와서 죽이려고 하자, 시아가 말하기를, “하늘로부터 계란만 한 크기의 무슨 기운이 내려오는 것을 보고 임신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에 왕이 시아를 가두었는데, 뒤에 드디어 남자 아이를 낳았다. 왕이 그 아이를 돼지우리에 버리게 하니 돼지가 입김을 불어넣어 주어 죽지 않게 하고, 다시 마구간[馬蘭]으로 난(蘭)은 바로 난(欄)이다. 옮겨 내다버렸으나 말 역시 그렇게 하였다. 왕이 이에 신령스럽게 여겨 그 어미에게 데려다가 기르게 하였는데, 이름을 동명(東明)이라 하였다. 동명은 자라나면서 활을 잘 쏘았다. 왕이 그의 용맹을 꺼려서 죽이고자 하니 동명이 남쪽으로 도망쳤다. 엄사수(淹?水)지금 고구려(高句麗) 가운데에 개사수(蓋斯水)가 있으니 이 강물이 그것이 아닌가 싶다. 이르러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떼를 지어 물위로 올라왔으므로 동명이 이를 타고 건너갔다. 이어 부여에 이르러 왕이 되었다. 동이의 지역 가운데서 땅이 가장 평평하고 넓어 오곡(五穀)이 잘 자라며, 궁실(宮室), 창고, 뇌옥(牢獄)이 있다. 사람들의 성품은 굳세고 용감하고 신중하고 관대하며, 도둑질과 노략질을 하지 않는다. 활과 화살, 칼과 창으로 병기(兵器)를 삼는다. 육축(六畜)으로 관직의 이름을 지어 마가(馬加)ㆍ우가(牛加)ㆍ구가(狗加) 등이 있으며, 읍락(邑落)은 모두 여러 가(加)에 속한다. 《이상 모두 후한서》
○ 부여국은 장성(長城)의 북쪽에 있는데 현도에서 1천 리이다. 호구가 8만이며, 산과 구릉 및 넓은 늪이 많다. 나라에는 군왕(君王)이 있다. 읍락에는 토호가 있는데, 하호(下戶)들을 모두 노복으로 삼는다. 여러 가(加)가 각각
사출도(四出道)를 주관하는데, 세력이 큰 자는 수천 호를 주관하고 작은 자는 수백 호를 주관한다. 나라의 기로(耆老)들이 스스로 “옛날에 망명해 온 사람이다.”라고 한다. 나라에 오래된 성(城)이 있는데 이름을 예성(濊城)이라고 한다. 대개 본디 예와 맥의 지역인데 부여가 그 가운데에서 왕이 되었던 것이니, 스스로 ‘망명해 온 사람’이라 하는 것은 까닭이 있어서인 듯하다. 《삼국지》
○ 한 광무제(漢光武帝) 건무(建武) 연간에 동이의 여러 나라가 모두 와서 공물을 바치면서 알현하였고, 25년에 부여 왕이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바쳤는데, 광무제가 후하게 보답하였다. 이에 사신이 해마다 통하였다. 《후한서》

부여는 고려의 북쪽, 읍루의 남쪽에 있는데, 후한(後漢) 때부터 중국에 조공하였다. 《통전》

○ 안제(安帝) 영초(永初) 5년(111)에 부여 왕이 비로소 보병과 기병 7, 8천 명을 거느리고 낙랑(樂浪)을 침략하여 관원과 백성을 살해하였다. 그 뒤에 다시 귀부하였다. 《후한서》
○ 영녕(永寧) 원년(120) 12월에 부여에서 맏아들 위구태(尉仇台)를 보내어 한나라 궁궐에 나와 공물을 바치자, 천자가 위구태에게 인수(印綬)와 금채(金綵)를 하사하였다. 《상동》
○ 연광(延光) 원년(122) 2월에 부여 왕이 아들을 부여 왕의 아들 위구태이다.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현도를 구원해 고구려,
마한, 예, 맥을 격파하였다. 《상동》
○ 순제(順帝) 영화(永和) 원년(136) 정월에 부여 왕이 경사(京師)에 와서 조회하자 순제가
황문고취(黃門鼓吹)각저희(角?戱)를 보이게 하고 전송하였다. 《상동》
○ 환제(桓帝) 연희(延熹) 4년(161) 12월에 부여 왕이 사신을 보내어 조하(朝賀)하고 공물을 바쳤다. 《상동》 ○ 《후한서》에 또, “6년에 선비(鮮卑) 단석괴(檀石槐)가 용맹이 있고 지략이 있어서 남쪽으로 변경을 침략하면서 북쪽으로는 정령(丁零)을 막고 동쪽으로는 부여(夫餘)를 퇴각시키고 서쪽으로는 오손(烏孫)을 격파하여 흉노(凶奴)의 옛 땅을 모두 점거하였다. 그런 다음 스스로 그 지역을 셋으로 나누었는데, 우북평(右北平)에서부터 동쪽으로 요동(遼東)에 이르러 부여와 예ㆍ맥과 경계를 접해 25개 고을을 묶어 동부(東部)라 하고는 각각 대인(大人)을 두어 관할하게 하였다.” 하였다.
○ 영강(永康) 원년(167)에 부여 왕 부태(夫台)가 2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현도를 침략하자, 현도 태수
공손역(公孫域)이 이를 격파하고 1천여 급을 목 베었다. 《상동》
○ 영제(靈帝) 희평(熹平) 3년(174) 정월에 다시 글을 올리고 공물을 바쳤다. 부여는 본디 현도에 속하였었는데 헌제(獻帝) 때 부여 왕이 요동에 속하게 해 주기를 청하였다 한다. 《상동》
○ 유우(劉虞)가 유주 자사(幽州刺史)로 옮겨 가자 백성들과 오랑캐들이 그의 덕화에 감화되어 선비(鮮卑)ㆍ오환(烏桓)ㆍ부여(夫餘)ㆍ예(濊)ㆍ맥(貊)의 무리들이 모두 수시로 와서 조공하였으며, 감히 변경을 소란하게 하는 자가 없었다. 《상동》
○ 한나라 말기에
공손도(公孫度)가 해동(海東)에 웅거하여 있으면서 외이(外夷)들을 위엄으로 복종케 하자, 부여 왕 위구태(尉仇台)가 다시금 요동에 예속되기를 청하였다. 이때에 구려와 선비가 강성하였는데, 공손도는 부여가 이 두 오랑캐 사이에 처해 있어 위태롭다고 여겨 종녀(宗女)를 시집보내었다. 위구태가 죽고 간위거(簡位居)가 즉위하였는데, 간위거에게는 적자(適子)가 없고 얼자(孼子) 마여(麻余)만 있었다. 간위거가 죽자 여러 가(加)들이 함께 마여를 왕으로 세웠다. 우가(牛加)의 형(兄)의 아들 중에도 위거(位居)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있었는데, 대사(大使)로 있으면서 재물을 가볍게 여겨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였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많이 따라붙었다. 해마다 사신을 경사(京師)로 보내어 공물을 바쳤다. 《삼국지》
○ 위 문제(魏文帝) 연강(延康) 원년(220) 3월에 부여 왕이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바쳤다. 《상동》
○ 제왕(齊王) 방(芳) 정시(正始) 연간에 유주 자사(幽州刺史) 관구검(?邱儉)이 구려를 토벌하였다. 현도 태수 왕기(王?)를 파견하여 부여로 보내자, 위거가 견가(犬加)를 교외로 보내어 맞이하였으며, 군량(軍糧)을 대 주었다. 위거의 계부(季父)인 우가(牛加)가 역모할 마음을 품자 위거가 계부의 부자를 죽이고
재산을 몰수한 다음 조사관을 파견하여 재산 목록을 장부에 기입하고 관가로 보내었다. 마여가 죽자 그의 아들 의려(依慮)가 나이 6세로 즉위하여 왕이 되었다. 《상동》
○ 진 무제(晉武帝) 때 자주 와서 조공(朝貢)하였다. 부여는 나라가 부유하여서 선조 때부터 나라가 피폐해진 적이 없었다. 그런데 태강(太康) 6년(285)에 이르러서
모용외(慕容?)에게 습격당하여 격파되어 왕 의려는 자살하고 자제들은 옥저(沃沮)로 달아나 목숨을 보존하였다. 이에 무제가 조서를 내기를, “부여 왕은 대대로 충성을 지켜왔는데, 몹쓸 오랑캐에게 멸망되었는바, 내가 몹시 불쌍하게 여긴다. 만약 남아 있는 무리들 가운데 나라를 다시 세울 만한 자가 있을 경우에는 계책을 세워서 그로 하여금 나라를 세울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그러자 유사가 아뢰기를, “호동이 교위(護東夷校尉) 선우영(鮮于?)이 부여를 구원하지 않아서 기회를 잃은 것입니다.” 하니, 무제가 조서를 내려서 선우영을 파면하고 하감(何龕)으로 교체시켰다. 다음 해에 부여의 후왕(後王) 의라(依羅)가 하감에게 와서, 현재 있는 사람들을 거느리고 옛 나라로 돌아가겠다고 하면서 이어 구원해 주기를 청하였다. 그러자 하감이 위에 보고하고는 독우(督郵) 가침(賈沈)을 파견하여 군사를 보내었다. 모용외가 중간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가침의 군사를 요격하였는데, 가침이 싸워서 크게 격퇴시켰다. 모용외의 군사가 물러가자 의라는 나라를 다시 세웠다. 그 뒤에도 모용외가 번번이 부여 사람들을 잡아다가 중국에다 팔았다. 이에 무제는 이를 불쌍히 여겨 또다시 조서를 내려서 관가의 물품으로 속(贖)한 다음 돌려보내었으며, 사주(司州)와 기주(冀州) 두 주에 조서를 내려 부여 사람들을 매매하지 못하게 하였다. 《진서》 ○ 《자치통감》에는, “하감이 가침을 보내어 의라를 호송하게 하였는데, 모용외가 그의 장수 손정(孫丁)을 보내어 기병을 거느리고 가서 요격하게 하였다. 이에 가침이 온 힘을 다해 싸워 손정의 목을 잘라 드디어 부여가 나라를 회복하였다.” 하였다.
○ 목제(穆帝) 영화(永和) 2년(346)에, 이에 앞서 부여가 녹산(鹿山)에 부여는 현도에서 북쪽으로 1천 리 되는 곳에 있는데, 녹산은 대개 바로 그곳이다. 있다가
백제(百濟)의 침입을 받아 부락이 쇠잔해지자, 서쪽으로 연(燕)과 가까운 곳으로 옮겨 갔는데, 연에 대해 방비를 하지 않고 있었다. 연왕(燕王) 모용황(慕容?)이 세자 모용준(慕容儁)을 보내어 모용군(慕容軍)ㆍ모용각(慕容恪)ㆍ모여근(慕輿根) 등 세 장군과 군사 1만 7천 명을 거느리고 가서 부여를 습격하게 하였다. 모용준은 군사에 관한 일을 모두 모용각에게 내맡겼다. 드디어 부여를 격파하고 부여 왕 현(玄)과 부락 사람 5만여 명을 포로로 잡아 돌아왔다. 모용황은 부여 왕 현을 진군장군(鎭軍將軍)으로 삼고 딸을 그의 아내로 주었다. 《자치통감》
해서공(海西公) 태화(太和) 5년(370)에 진왕(秦王) 견(堅)이 연의 수도인 업(?)을 공격하자 연의 산기상시(散騎常侍) 여울(餘蔚)이 부여와 고구려 및 상당(上黨)의 인질 5백 명을 이끌고 밤중에 업의 북쪽 성문을 열고 진의 군사를 끌어들였다. 《상동》
○ 효무제(孝武帝) 태원(太元) 9년(384)에 모용수(慕容垂)가 업을 취하고자 하여 군사를 이끌고 동쪽으로 왔다. 옛 부여 왕(夫餘王)인 여울(餘蔚)을 영양 태수(榮陽太守)로 삼았다. 창려(昌黎)와 선비(鮮卑)가 무리를 이끌고서 모용수에게 항복함에 미쳐서는 모용수가 여울을 정동장군 통부좌사마(征東將軍統府左司馬)로 삼고 부여 왕에 봉하였다. 《상동》
○ 21년(396)에 연왕(燕王) 보(寶)가 부여 왕 여울로 태부(太傅)를 삼았다. 《상동》 ○ 살펴보건대, 여울은 본디 부여 왕의 아들이다. 연왕 모용황이 부여를 격파하고 잡아 온 것이다. 여울은 연이 망하자 진으로 들어갔으며, 진나라가 어지러워지자 다시 연으로 돌아갔다. 이에 연왕 모용수가 부여 왕으로 봉한 것이다.

살펴보건대, 부여는 동사(東史)에는 부(夫)가 부(扶)로 되어 있다. 처음에 북부여(北夫餘)라고 칭하였다. 뒤에 왕인 해부루(解夫婁)단군(檀君)의 아들인 해부루(解夫婁)가 아니다. 금와(金蛙)에게 전하고 금와가 도읍을 가섭원(迦葉原)으로 옮겼는데, 이것이 동부여(東夫餘)이다. 예전의 도읍지에는 해모수(解慕漱)라고 칭하는 자가 와서 도읍하였다. 금와의 말기는 한나라 성제(成帝) 때에 해당된다. 뒤에 대소(帶素)에게 전하였는데, 고구려의 대무신왕(大武神王)에게 격살되었다. 이때는 신망(新莽) 지황(地皇) 3년(22)이다. 대소의 동생이 갈사수(曷思水)로 도망하여 스스로 나라를 세웠는데, 이가 갈사왕(曷思王)이다. 그의 손자인 도두(都頭) 때에 이르러 나라를 들어 고구려 태조왕(太祖王)에게 항복하였다. 동부여가 망한 것은 바로 한나라 명제(明帝) 영평(永平) 11년(68)이다. 그 뒤에 남은 종족이 있어 진(晉)에 사신을 통하였는데, 이름을 의려(依慮)ㆍ의라(依羅)라 한다. 왕 현(玄)에 이르러서 마침내 모용씨(慕容氏)에게 병합되었다.


 

[주C-001]부여(夫餘) : 기원전 1세기경부터 300년까지 현재의 북만주(北滿洲) 농안(農安)ㆍ장춘(長春) 일대에 웅거하였던 우리나라 고대 국가의 하나이다. 그 강역은 동쪽으로는 읍루, 남쪽으로는 고구려, 서쪽으로는 선비ㆍ오환과 인접하였다. 일찍부터 농경 생활을 하였으며, 중국의 철기 문명을 수입하고 은력(殷曆)과 복골(卜骨)을 사용하였다. 중국 정사(正史)에 보이는 부여에 관한 기록은 《삼국지》와 《후한서》가 있으며, 이밖에 《진서(晉書)》ㆍ《통전(通典)》 등에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부여의 멸망에 대해서는 상세한 기록이 없으며, 대체로 4세기경부터 고구려의 판도가 된 것으로 짐작된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49~151쪽》
[주D-001]읍루(?婁) : 만주에 있던 부족명으로, 장백산(長白山)의 북쪽 목단강(牧丹江) 유역에서 연해주(沿海州) 및 두만강에까지 퍼져 살았는데, 중국의 사서(史書)에서는 숙신(肅愼)의 후예라고 하였다. 한대(漢代) 이후 부여에 복속되어 있던 미개 종족으로 군장(君長)은 없고 각 부락마다 추장(酋長)이 있었으며, 모두 부여에 조부(租賦)를 바쳤다. 언어는 부여와 달랐으며, 주로 돼지를 사육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통상적인 유목 민족과는 다른 특성이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58쪽》
[주D-002]선비(鮮卑) : 고대 아시아 민족의 하나이다. 전국 시대 무렵에 만주(滿洲)에 웅거하여 세력을 떨쳤으며, 그 일파가 3세기경에 거란족(契丹族)으로 발전하였다.
[주D-003]약수(弱水) : 약수라는 이름은 《서경(書經)》 우공편(禹貢篇)에 처음으로 나오며, 후대의 사서(史書)에는 자주 나타나는데, 이것이 동일한 것을 지칭하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이병도는 여기에서의 약수를 송화강(松花江)을 지칭하는 듯하다고 하였고,《韓國古代史硏究 3쪽》 북한에서는 흑룡강(黑龍江)이라고 하였다.
[주D-004]색리왕(索離王) : 탁리왕(?離王)ㆍ고리왕(?離王)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이병도는 이것이 고려(高麗), 혹은 구려(句麗)를 달리 표기한 것이라고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217쪽》
[주D-005]엄사수(淹?水) : 엄니수(掩泥水)ㆍ엄시수(掩施水)로 표기되기도 한다. 이병도는 이에 대해 “여러 가지로 표기되나, 이는 엄니수(掩泥水)를 잘못 쓴 것으로, 광개토왕비문(廣開土王碑文)에 나오는 엄리대수(奄利大水)가 틀림없다. 엄리는 큰물이라는 뜻인 ‘엄내’로서 지금의 송화강(松花江)이나, 또는 송화강 상류의 휘발하(輝發河)를 지칭한 것이다.”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217쪽》
[주D-006]육축(六畜)으로 …… 있으며 : 마(馬)ㆍ우(牛)ㆍ구(狗)ㆍ저(猪) 등 가축의 이름을 붙인 것은 축목경제(畜牧經濟) 시대의 축산별(畜産別)에 의한 족장의 칭호가 그대로 계급 문화에 잔존한 것이며, 가(加)는 처음 족장의 칭호에서 씨족의 붕괴와 계급의 분열로 인하여 대관(大官)ㆍ장관(長官)의 이름으로 변한 것이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260쪽》
[주D-007]가(加) : 이병도는 “가(加)는 만몽계통어(滿蒙系統語)인 한(汗)ㆍ가한(可汗)이나 고조선 및 남방항렬 사회(南方行列社會)의 한(韓)ㆍ간(干)ㆍ한(邯)ㆍ금(今)과 같은 말로, 귀인(貴人), 대인(大人)의 칭호이니, 원래는 부족장(部族長)을 의미하는 말이다.”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214쪽》
[주D-008]사출도(四出道) :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해석이 있다. 첫 번째는 부여의 지방 행정 구역이라고 보는 설이며, 두 번째는 수도를 중심으로 하여 거기서 사방으로 통하는 네 갈래의 길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설이다. 모두 고대 국가의 지방 지배를 위한 조직이라고 하는 점에서는 일치된다. 부여는 중앙에 왕이 있고, 사방에 가(加)가 각 길에 있어서 거기에 소속된 귀족과 서민을 지배하였다. 이병도는 “당시의 행정 구역을 말한 것이지만, 특히 출도(出道)라 한 것을 보면 국도(國都)를 중심으로 하여 거기서 사방으로 통하는 가도(街道)를 의미한 것이라 하겠다.”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215쪽》
[주D-009]낙랑(樂浪)을 침략하여 : 이병도는 이에 대해 “낙랑을 침략하였다고 하는 것은 거리상으로 보아 이해하기 어려우므로, 이는 필시 현도를 잘못 쓴 것으로 고쳐 보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219쪽》
[주D-010]마한 : 이병도는 이곳의 마한은 연문(衍文)이라고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219쪽》
[주D-011]황문고취(黃門鼓吹) : 악곡(樂曲)의 이름으로, 한나라 광무제 때 황문무무(黃門武舞)를 만들고 여러 신하들과 연회할 때 연주하였다.
[주D-012]각저희(角?戱) : 옛날 중국의 유희로, 두 사람이 맞붙어서 힘을 겨루는 놀이이다. 고구려에서도 행하여졌으며, 각희(角戱)라고도 한다.
[주D-013]단석괴(檀石槐) : 선비족 부족장의 이름이다. 동한 때 흉노(凶奴)의 옛 땅을 차지하여 동부(東部)ㆍ중부(中部)ㆍ서부(西部)의 세 부를 두었다. 한나라에서 왕으로 봉하고자 하였으나, 이를 거절하고 받지 않았다.《後漢書 卷90》
[주D-014]정령(丁零) : 흉노 북쪽에 있는 작은 나라의 이름이다. 정령(丁零)ㆍ정령(丁靈)ㆍ정령(丁令)으로도 표기한다.
[주D-015]오손(烏孫) : 한나라 때 서역(西域)에 있었던 나라 이름이다. 돈황(燉煌)과 기련(祁連) 사이에 살다가 뒤에 대월지(大月氏)를 축출한 뒤 오손국을 건국하였는데, 지금의 신강성(新疆省) 경내의 온숙현(溫宿縣) 이북에서 이령현(伊寧縣) 이남이 그 지역이다.
[주D-016]공손역(公孫域) :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공손도전(公孫度傳)에는 공손역(公孫?)이라 하였다.
[주D-017]공손도(公孫度) : 후한 말기의 장군으로, 본래 요동의 하리(下吏)로 있다가 요동 태수가 되었다. 고구려와 오환(烏桓)을 공격해 세력을 떨쳤으며, 고국천왕(故國川王) 12년(190)에 요동군을 요서군(遼西郡)과 중료군(中遼郡) 두 개의 군으로 만들고 스스로 서서 요동후 평주목(遼東侯平州牧)이 되었다.《三國志 魏書 公孫度傳》
[주D-018]재산을 …… 보내었다 : 이 부분의 원문은 ‘籍沒財物 遣使簿?送官’이다. 이에 대해 이병도는 “그 재산을 적몰하고, 사람을 파견, 부렴(賦?) 즉 부세(賦稅)를 가벼이 하여 관으로 보내게 하였다.”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220쪽》
[주D-019]모용외(慕容?) : 모용씨(慕容氏)는 선비(鮮卑)의 일족으로, 모용외 때 요하(遼河) 상류에서 일어나 부여(夫餘)를 공격해 동쪽으로 옮기게 하고, 또 요서(遼西) 지방을 침략하여 지금의 금주(錦州) 부근에 있는 극성(棘城)에 도읍하였다. 그 뒤 모용외의 아들인 모용황(慕容?) 때에 이르러 스스로 연왕(燕王)이라 칭하였으며, 얼마 뒤에는 지금의 조양(朝陽)인 용성(龍城)으로 천도하여 위세를 떨치면서 고구려를 침입하였다.
[주D-020]백제(百濟) : 《동사강목》에서는 백제는 고구려(高句麗)의 오류인 듯하다고 하였고,《東史綱目 附錄 卷上 考異》 이병도 역시 “글자 그대로 보아서는 너무도 거리가 맞지 아니하므로 고구려의 오기(誤記)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221쪽》
[주D-021]해서공(海西公) : 진(晉)의 폐제(廢帝) 사마혁(司馬奕)의 봉호(封號)이다.
[주D-022]해부루(解夫婁) : ‘해(解)’는 해, 즉 태양을 의미하고, ‘부루’는 불로서 광명(光明)이나 신성(神聖)의 개념을 표시한다.
[주D-023]금와(金蛙) : 지신족(地神族)인 ‘곰’ 또는 ‘고마’에서 유래한 것이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6쪽》
[주D-024]동부여(東夫餘) : 《삼국유사》에는 북부여(北夫餘)가 하늘의 계시를 받고 동해 가로 옮겨 가서 세운 나라라고 하였다. 부여의 일족(一族)으로 보인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333쪽》 동부여의 지리적인 위치에 대해서 금서룡(今西龍)은 ‘백두산 북쪽에 남아 있던 부여족’일 것이라고 하였고, 이병도(李丙燾)는 ‘함경남도 정평(定平) 이남에서 강원도 북단(北端) 사이에 있던 동예 지방’이라고 하였고, 천관우(千寬宇)는 ‘두만강 하류’로 추정하였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512쪽》
[주D-025]해모수(解慕漱) : ‘해(解)’는 해, 즉 태양을 의미하며, ‘모수(慕漱)’는 고구려의 인명인 ‘명림어수(明臨於漱)’, ‘우수(于漱)’의 ‘어수’나 ‘우수’와 서로 통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동명왕편(東明王篇)에 해모수의 별명을 ‘천왕랑(天王郞)’이라고 한 것은 해모수의 의역명(意譯名)일 것으로 생각된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5쪽》

 

<<< 옥저---沃沮 >>>

 

○ 동옥저(東沃沮)는 고구려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쪽에 있다. 개마(蓋馬)는 현의 이름으로 현도군에 속하며, 그 산은 평양성(平壤城)의 서쪽에 있다. 동쪽으로는 큰 바다에 접하였고, 북쪽은 읍루(?婁), 부여와, 남쪽은 예, 맥과 연접하였다. 그 땅이 동서는 좁고 남북은 긴데, 긴 것을 짤라 짧은 데 보태면 땅이 사방 1천 리 가량 된다. 토질이 비옥하며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해 있어서 오곡이 잘 자라며 농사를 잘 짓는다. 읍락에는 장수(長帥)가 있다. 《삼국지》에 “호수가 5천 호이며, 대군왕(大君王)이 없으며, 읍락(邑落)에는 각각 장수(長帥)가 있는데, 대대로 세습한다.” 하였다. 사람들의 성품은 진실하고 정직하며 강인하고 용맹스러워 창을 가지고 보전(步戰)을 잘한다. 언어와 음식, 거처, 의복은 모두 구려와 비슷하다. 《후한서》

동옥저는 후한(後漢)과 통하였다. 《통전》

○ 한나라 초기에 위만(?滿)이 조선의 왕이 되었을 때 옥저는 모두 조선에 속하였다. 무제 원봉(元封) 3년(기원전 108)에 조선을 정벌하고는 그 지역을 나누어 사군(四郡)으로 삼은 다음 옥저성(沃沮城)을 현도군으로 삼았다. 그 뒤에 이맥(夷貊)의 침입을 받아 현도군을 고구려 서북쪽으로 옮기고 옥저는 도로 낙랑에 속하게 하였다. 뒤에 한나라에서 지역이 너무 넓고 먼 데다가 단단대령(單單大嶺)의 동쪽에 있다는 이유로 동부 도위(東部都尉)를 나누어 두고는 불내성(不耐城)을 쌓아 별도로 영동의 7현을 관할하게 하였는데, 이때 옥저 역시 모두 현이 되었다. 《삼국지》
○ 광무제 건무 6년(30)에 변방의 군을 줄임에 동부 도위가 이로 말미암아 혁파되었다. 그 뒤에 현에 있던 거수(渠帥)들로 현후(縣侯)로 삼으니, 불내(不耐)ㆍ화려(華麗)ㆍ옥저(沃沮) 등의 여러 현이 모두 후국(侯國)이 되었다. 옥저의 여러 읍락의 거수(渠帥)들은 모두 자칭 삼로(三老)라 하였으니, 이는 옛날 현국(縣國)으로 있었을 때의 제도이다. 옥저는 작은 나라로 큰 나라 사이에 끼어 있으면서 핍박을 받다가 드디어 구려에 신하의 나라가 되었다. 구려에서는 다시 그곳 사람 가운데서 대인(大人)을 뽑아서 사자(使者)로 삼고는 그로 하여금 거수와 함께 다스리게 하였다. 그리고 대가(大加)로 하여금 조세(租稅)를 책임지게 하여, 맥(貊)ㆍ포(布)ㆍ어(魚)ㆍ염(鹽) 및 바다에서 나는 생산물을 천 리 길에 져다가 바치게 하고, 또 미녀(美女)를 보내도록 하여 비첩(婢妾)으로 삼아 마치 종처럼 대우하였다. 《상동》
○ 위나라 정시(正始) 연간에 관구검(?邱儉)이 구려를 토벌하니, 구려 왕 궁(宮)이 옥저로 달아났다. 이에 관구검이 드디어 진격해서 옥저의 읍락을 모두 깨뜨리고 3천여 급을 참수하거나 포로로 사로잡았다. 구려 왕 궁이 다시 북옥저로 달아났는데, 북옥저는 일명 치구루(置溝?)라고도 하며 삼가 살펴보건대, 《통전》에는 매구루(買溝?)로 되어 있다. 남옥저에서 8백여 리 떨어져 있다. 그 나라의 풍속은 대개 남쪽과 같다. 경계는 남쪽으로는 삼가 살피건대, 남쪽은 마땅히 북쪽으로 되어야 한다. 옥저강역고(沃沮疆域考)에 상세히 보인다. 읍루와 접하였는데, 읍루 사람들이 배를 타고 와서 노략질을 자주 하므로, 북옥저에서는 그것을 두려워해 매년 여름이면 암혈 속에 숨어 살다가 겨울이 되어 뱃길이 통하지 않게 된 다음에야 마을로 내려 와서 살았다.

왕기(王?)가 별도로 군사를 보내어 궁을 추격하여 북옥저의 동쪽 경계까지 갔다. 그곳에 이르러서 그곳의 기로(耆老)에게 바다 동쪽에 다시 또 사람이 사는 곳이 있는가를 물으니, 기로가 말하기를,
하였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하였으며, 《후한서》에는, “혹 전하기를, 그 나라에는 신정(神井)이 있어서 그 안을 들여다 보면 문득 자식을 얻는다고 한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포의(布衣) 하나가 바다에서 떠밀려 왔는데, 몸체 부분은 중국 사람들의 옷과 같았으며, 양쪽 소매의 길이는 3장(丈)이었다. 또 난파선 한 척이 파도에 휩쓸려서 해안 가에 닿았는데, 그 안에 어떤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목 부분에 또 얼굴 하나가 더 있었으며, 살아 있었는데, 말이 서로 통하지 않았으며, 음식을 먹지 않아 죽었다.”
하였다. 이러한 나라들은 모두 옥저의 동쪽 큰 바다 가운데 있다. 《상동》
살펴보건대, 옥저는 지금의 함경 남북관(南北關)의 지역이며, 그 북쪽을 별도로 지칭하여 북옥저라고 하는데, 북옥저는 지금의 육진(六鎭) 등지의 지역이다.


 

[주D-001]개마대산(蓋馬大山) : 현재의 백두산을 가리킨다는 설과 낭림산맥(狼林山脈) 일대를 가리킨다는 설이 있다. 북한의 이지린은 “개마(蓋馬)는 ‘곰’으로 해석되며, 곰산[熊岳]이 요동에 있다.” 하였다.《고조선연구, 307쪽》
[주D-002]영동의 7현 : 옛 임둔군(臨屯郡)에 있었던 7현을 가리킨다. 안정복이나 한진서(韓鎭書)는 모두 이 7현의 위치를 지금의 관동 지방에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병도는 이 7현을 덕원군(德源郡) 부근에 있던 동이현(東?縣), 안변(安邊)이나 통천(通川)에 있던 불이현(不而縣) 즉 불내현(不耐縣), 문천(文川)이나 고성(高城)에 있던 사두매현(邪頭昧縣), 함흥(咸興) 부근에 있던 부조현(夫租縣), 영흥(永興)에 있던 화려현(華麗縣), 평강(平康)이나 회양(淮陽) 두 곳에 있던 전막현(前莫縣)과 잠대현(蠶台縣)이라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196~208쪽》 북한의 이지린은 “불내(不耐)를 국내성(國內城)을 제외하고 다른 곳에서는 찾을 수가 없다.”고 하면서 영동 7현의 위치를 압록강 즙안(楫安) 지역에서부터 요동반도 동해안의 지역에 있는 것으로 보았다.《고조선연구, 191쪽》
[주D-003]대인(大人) : 부락 단위의 군장(君長)이나 혹은 부족장(部族長)을 말한다.
[주D-004]사자(使者) : 고구려의 관직명에 나타나는 사자(使者)와 같은 것으로 여겨진다. 고구려는 인근 소국(小國)을 지배할 때 그 지역의 수장(首長)에게 고구려의 관직을 주어 그 수장을 통해 지배하는 형식을 취한 경우도 있었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54쪽》
[주D-005]구려 왕 궁(宮) : 고구려의 11대 동천왕(東川王)을 말한다. 위궁(位宮)이라고도 한다.
[주D-006]치구루(置溝?) : 이병도는 “지금의 어디인지 자세하지 않으나 북옥저의 한 지방명이 틀림없고, 남옥저에서 8백 리 떨어져 있다고 하였으니, 지금의 함경북도의 북부 지방에 해당한다고 보아야겠다.”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204쪽》
[주D-007]매구루(買溝?) : 이병도는 치구루와 매구루가 전혀 별개의 지명이라 하고, “매구루(買溝?)의 ‘구루’는 고구려어에 성읍(城邑)을 의미하는 말로 현대어의 ‘골’에 해당하고, ‘매’는 천류(川流)를 의미하는 말로 합해서 ‘천성(川城)’이나 ‘수역(水域)’이다. 이러한 관계로 볼 때 나는 저 ‘매성(妹城)’이라는 고칭(古稱)을 가진 지금의 함경남도 문천(文川)으로 비정하고 싶다.”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204쪽》
[주D-008]우리나라 …… 처넣는다 : 이병도는 “동쪽의 한 섬은 지금의 울릉도(鬱陵島), 즉 우산국(于山國)을 말하는 것이고, 그곳의 풍속 운운한 것은 추기(秋期)의 계절풍을 앞두고 해신제(海神祭)에 동녀를 희생(犧牲)하는 풍속이 있음을 말한 것 같다.”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231쪽》
[주D-009]어떤 …… 없다 : 이병도는 “아마 저 왜인 제국(倭人諸國), 특히 야마대(邪馬臺)를 치소(治所)로 한 여왕국(女王國)을 지칭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231쪽》

 

 

<<< 사군사실---四郡事實 >>>

 

한 무제(漢武帝) 원봉(元封) 3년(기원전 108) 여름에 조선이 항복하자 그 지역에 낙랑(樂浪) 살펴보건대, 치소(治所)는 조선현(朝鮮縣)이다.ㆍ임둔(臨屯) 살펴보건대, 치소는 동이현(東?縣)이다.ㆍ현도(玄?) 살펴보건대, 치소는 옥저성(沃沮城)이며 뒤에 구려(句麗)로 옮겼다.ㆍ진번(眞番) 살펴보건대, 치소는 삽현(?縣)이다. 등 사군(四郡)을 설치하였다. 《한서》
○ 한 소제(漢昭帝) 시원(始元) 5년(기원전 82) 6월에 진번군을 혁파하였다. 《상동》
○ 원봉(元鳳) 6년(기원전 75) 정월에 군국(郡國)을 불러 모아 요동과 현도의 성을 옮겨 쌓았다. 《상동》 ○ 살펴보건대, 바로 새 현도와 구려의 성이다.
○ 한 소제가 임둔과 진번을 혁파하여 낙랑과 현도에 붙였다. 현도를 다시 옮겨 구려에 있게 하였다.
단대령(單大領) 이동의 옥저ㆍ예ㆍ맥을 모두 낙랑에 속하게 하였다. 그 뒤에 다시 영토가 넓고 멀다는 이유로 다시 영동의 7현을 나누고 낙랑 동부도위(樂浪東部都尉)를 두었다. 《후한서》
○ 낙랑의 바다 가운데 왜인(倭人)이 있는데, 1백여 국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해마다 와서 조공을 바치고 알현한다. 《한서》
○ 선제(宣帝) 지절(地節) 4년(기원전 66)에 곽운(?雲)을 현도 태수에 제수하였는데, 마침 모반한 사실이 발각되어 자살하였다. 《상동》
○ 성제(成帝) 초에 오록충종(五鹿充宗)이 석현(石顯)의 당파로 몰려 현도 태수로 좌천되었고 어사 중승(御史中丞) 이가(伊嘉)가 안문 도위(雁門都尉)가 되었는데, 장안(長安)에 “이(伊)가 안(雁)으로 옮기고 녹(鹿)이 도(?)로 옮겼다.[伊徙雁鹿徙?]”는 노래가 떠돌았다. 《상동》
○ 낭야 태수(琅邪太宇) 조공(趙貢)이 고과(考課)하면서 불기 영(不其令) 설선(薛宣)을 청렴한 것으로 고과하여 낙랑 도위승(樂浪都尉丞)으로 옮겼는데, 유주 자사(幽州刺史)가 설선을 재주가 뛰어나다고 천거하여 완구 영(宛句令)으로 삼았다. 《상동》 ○ 살펴보건대, 안사고가 말하기를, “낙랑이 유주(幽州)에 속해 있으므로 유주 자사가 천거한 것이다.” 하였다.
○ 동이 영(東?令) 안사고가 말하기를, “동이는 현의 이름이다.” 하였다. ○ 삼가 살펴보건대, 동이는 처음에 임둔군의 치소(治所)였다가 뒤에 낙랑에 속하였다. 연년(延年)이 부(賦) 7편을 지었다. 《상동》 ○ 살펴보건대, 한 무제 때 제인(齊人) 연년이 글을 올려 황하(黃河)의 물길을 돌리는 계책에 대해 말하였는데, 혹 그 사람인가? 상고할 수는 없다.
○ 경시(更始) 연간에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낙랑 사람 왕조(王調)가 군수 유헌(劉憲)을 죽이고 스스로 대장군 낙랑태수(大將軍樂浪太守)라고 칭하였다. 《후한서》
○ 광무제 건무(建武) 6년(30)에 낙랑 동부도위관(樂浪東部都尉官)을 폐하고 드디어 영동(領東) 지역을 버렸다. ○ 당초에 왕조(王調)가 낙랑군에 웅거하여 복종하지 않자, 가을에 낙랑 태수 왕준(王遵)을 보내어 공격하였다. 낙랑군의 관리가 왕조를 죽이고 항복하였다. 살펴보건대, 《후한서》 왕경열전(王景列傳)에는, “왕경의 아비 왕굉(王?)이 낙랑군의 삼로(三老)가 되었는데 군의 조리(曹吏)인 양읍(楊邑) 등과 함께 왕조를 죽이고 왕준을 맞아들였다.” 하였다.
○ 9월 경자에 낙랑의 대역(大逆) 죄인 가운데 참형(斬刑) 이하를 사면하였다. 《이상 모두 상동》
○ 20년 가을에 동이(東夷)의 한국(韓國) 사람이 백성을 이끌고 낙랑으로 와서 내부하였다. 《상동》
○ 23년 겨울에 고구려가 종족을 이끌고 낙랑으로 와서 복속하였다. 《상동》
○ 화제(和帝) 영원(永元) 원년(89)에 거기장군(車騎將軍) 두헌(竇憲)이 전권을 휘두르면서 방자하게 굴었는데 탁군(?郡)의 하급 관리로 있던 최인(崔?)이 글을 올려 그의 장단점에 대해 자주 지적하였다. 이에 두헌은 그를 멀리하여 최인의 고과(考課)를 높게 매겨 바깥으로 내보내
장잠장(長岑長)이 되게 하였다. 살펴보건대, 장잠현(長岑縣)은 낙랑군에 소속되었다. 최인은 멀리 외지로 나가 뜻을 펼 수 없게 되었다고 하면서 드디어 부임하지 않은 채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상동》
○ 안제(安帝) 영초(永初) 2년(108) 10월 경인에 현도의 빈민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었다. 《상동》
○ 5년 3월에 부여의 이(夷)가 낙랑의 성채를 침입하여 관리와 백성을 살상하였다.
○ 구려 왕
궁(宮)이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바치고 현도에 속하기를 청하였다. 《이상 모두 상동》
○ 원초(元初) 5년(118) 6월에 고구려와 예ㆍ맥이 현도에 침입하였다. 《상동》 ○ 살펴보건대, 《후한서》 구려열전(句麗列傳)에는 “현도를 침입하여 화려성(華麗城)을 공격하였다.” 하였다.
○ 건광(建光) 원년(121) 정월에 초하룻날 조회에서 황제가
선국(?國)의 왕이 바친 음악과 환인(幻人)의 재주를 대궐 뜰에서 펼쳐 놓고 여러 신하들과 함께 관람하였다. 그러자 간의대부(諫議大夫) 진선(陳禪)이 자리를 뜨면서 크게 소리치기를, “제왕의 전정에서는 오랑캐의 재주를 펼치는 것이 마땅치 않다.” 하였다. 이에 상서 진충(陳忠)이 상주하여 진선이 조정을 비방하였으니 하옥하기를 청하였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체포하지 말고 현도후성 장위(玄?候城障尉)로 살펴보건대, 후성(候城)은 본디 요동군에 속하였는데, 안제(安帝)가 즉위한 다음에 현도에 속하였다. 삼게 하였으며, 또 조서를 내려 감히 관직에 나아가지 않을 경우에는 처자식과 종자(從者)의 이름을 올리라고 명하였다. ○ 유주 자사(幽州刺史) 풍환(馮煥)이 두 군의 살펴보건대, 두 군은 현도와 낙랑이다. 태수를 거느리고 고구려와 예, 맥을 토벌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 4월 갑술에 요동의 속국도위(屬國都尉) 방분(龐奮)이 거짓으로 위조한 새서(璽書)를 받고 현도 태수 요광(姚光)을 살해하였다. 요광이 인심을 잃었는데, 요광을 원망하는 자가 거짓으로 새서를 만들어 요광을 꾸짖고 사형을 집행하는 칼을 방분에게 내려 보내었다. 이에 방분이 요광을 참수한 것이다. 황제가 이를 불쌍하게 여겨 방분을 불러올려 죄주고 요광에게는 10만 금을 하사하였으며, 그의 아들을 낭중으로 삼았다. ○ 《책부원귀(?府元龜)》에는 “한 안제(漢安帝) 건광 원년(121)에 요동의 속국도위 방분이 3월 기미에 내린 조서를 받았는데, 그 조서에 ‘유주 자사 풍환(馮煥)과 현도 태수 요광을 죽이라.’ 하였다. 추안(推案)에는 기미에 내린 조서가 없었다. 이에 시어사(侍御史)를 유주목에 보내어 조서를 날조한 간신을 잡게 하였다.” 하였다. ○ 동 11월에 선비(鮮卑)가 현도를 침입하였다. ○ 12월에 고구려ㆍ마한ㆍ예ㆍ맥이 현도를 포위하였다. 부여 왕이 아들을 보내어서 주군과 힘을 합쳐 토벌하여 격파하였다. 《이상 모두 상동》
○ 연광(延光) 원년(122) 7월에
고구려 왕의 동생 수성(遂成)이 현도에 나아가 항복하였다. 《상동》
○ 3년 6월에 선비가 현도를 침입하였다. 《상동》
○ 순제(順帝) 영건(永建) 2년(127) 2월에 요동의 선비(鮮卑) 6천여 기(騎)가 요동과 현도를 침입하였다. 오환 교위(烏桓校尉) 경엽(耿曄)이 변두리 여러 군의 군사와 오환(烏桓)의 군사를 출동시켜 요새를 나가 격파하였는데, 수백 급을 참수하였고 포로와 우마 등을 많이 잡았다. 선비 3만 명이 모두 요동에 와서 항복을 청하였다. 《상동》
○ 양가(陽嘉) 원년(132) 12월 경술에 현도군의 둔전(屯田) 6부(部)를 다시 설치하였다. 《상동》
○ 질제(質帝)와 환제(桓帝) 연간에 동사(東史)를 살펴보건대, 고구려 태조왕(太祖王) 94년에 요동에 침범하였다고 하였는데, 이해는 바로 질제 본초(本初) 원년(146)이다. 고구려 왕
백고(伯固)가 다시 요동 서안평(西安平)을 침범하여 대방 영(帶方令)을 살펴보건대, 《군국지(郡國志)》에 서안평과 대방현은 모두 요동에 속한다고 하였다. 죽이고 낙랑 태수의 처자를 잡아갔다. 《상동》
○ 환제 영강(永康) 원년(167)에 부여 왕 부태(夫台)가 현도에 침입하였다. 현도 태수 공손역(公孫域)이 이를 격파하였다. 《상동》
○ 영제(靈帝) 건녕(建寧) 2년(169)에 현도 태수 경림(耿臨)이 고구려를 토벌하여 수백 명을 죽이니, 고구려 왕 백고가 항복하고 현도에 예속되기를 요청하였다. 《상동》
○ 오봉(吳鳳)을 낙랑 태수로 삼았다. 오봉은 진류(陳留) 사람 오우(吳祐)의 아들이다. 오우가 제(齊)의 상(相)으로 있을 때 마융(馬融)이 양기(梁冀)를 위하여 태위(太尉) 이고(李固)를 헐뜯는 장계를 짓는 것을 보고 꾸짖었다. 《상동》 ○ 살펴보건대, 오우가 마융을 꾸짖은 것이 환제 건화(建和) 원년(147)의 일이니, 오봉이 태수가 된 것은 영제(靈帝)와 헌제(獻帝) 때이다.
○ 중평(中平) 6년(189)이다. 처음에 양평(襄平) 사람 공손연(公孫延)이 관원을 피하여 현도에 들어와서 살면서 살펴보건대, 공손연이 현도에 들어와 산 것은 환제 영강(永康) 연간에 있었다. 아들 공손도(公孫度)에게 군리(郡吏)가 되게 하였다. 이 당시에 현도 태수는 공손역(公孫域)으로, 그의 아들 표(豹)가 18세의 나이로 일찍 죽었다. 공손도의 어릴 적 이름이 표(豹)이며 또 공손역의 아들과 나이가 같았으므로 공손역이 보고는 가까이하면서 사랑하여 스승에게 보내어 공부하게 하였으며, 아내를 구해 주었다. 그 뒤에
유도(有道)로 천거되어 상서랑(尙書郞)에 제수되고, 조금 뒤에 승진하여 기주 자사(冀州刺史)가 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같은 군의 서영(徐榮)이 공손도를 천거하여 요동 태수가 되었다. 공손도는 현도의 하급 관리에서 발신하였으므로 요동군에서 무시를 당할까 염려하였다. 이에 관가에 도착하는 즉시 법을 적용해 요동군 내에서 이름난 호족 1백여 가를 주멸하니, 요동 사람들이 벌벌 떨었다. 이어 동쪽으로 고구려를 정벌하고 서쪽으로 오환을 침에 위엄이 멀리 바다 바깥까지 퍼졌다. 초평(初平) 원년(190)에 요동군을 나누어 요서군(遼西郡)과 중료군(中遼郡)으로 만든 다음 각각 태수를 두고, 바다를 건너 동래(東萊)의 여러 현들을 거두어 영주 자사(營州刺史)를 둔 다음, 스스로 요동후 평주목(遼東侯平州牧)이 되었다. 《삼국지(三國志)》
○ 헌제 초평 2년(191)에 원소(袁紹)와 한복(韓馥)이 의논하여 유주목(幽州牧) 유우(劉虞)를 추대하여 황제로 삼고자 하였다. 이에 예전에 낙랑 태수를 지낸 감릉(甘陵) 사람 장기(張岐)를 보내어 그 의논을 가지고 유우에게 가서 즉시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하였다. 그러자 유우는 큰소리로 장기를 꾸짖으면서 “경은 충신을 욕보이려고 하는 것인가?” 하였다. 《구주춘추(九州春秋)》 ○ 살펴보건대, 장기가 낙랑 태수로 있었던 것이 어느 때인지는 상세하지가 않다.
○ 양무(凉茂)의 자(字)는 백방(伯方)이며, 산양(山陽)의 창읍(昌邑) 사람이다. 태조 때 낙랑 태수가 되었는데, 공손도(公孫度)가 요동에 있으면서 양무를 붙잡아 두고 보내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양무는 끝내 굽히지 않았다. 《삼국지》
○ 부여는 본디 현도에 속하였다. 한나라 때 부여 왕의 장례에는 옥갑(玉匣)을 사용하였는데, 미리 현도군에 갖다 두었다가 왕이 죽으면 가지고 가서 장례 지냈다.
공손연(公孫淵)이 복주(伏誅)되었을 때 현도의 창고에 옥갑 하나가 있었다. 《상동》
○ 한(韓)은 대방의 남쪽에 있다. 한나라 때 낙랑군에 속하여 철마다 조알하였다. 건안(建安) 연간에 공손강(公孫康)이
둔유현(屯有縣) 이남의 황무지를 나누어 대방군으로 삼고는 군사를 일으켜 한(韓)을 정벌하였다. 이로부터 왜(倭)와 한이 드디어 대방군에 속하게 되었다. 《상동》
○ 낙랑위(樂浪尉) 중명(仲明)이 바다에 빠져 죽었는데, 화(化)하여 심어(?魚)가 되었다.
등주(登州)와 내주(萊州) 사람들은 심어의 이름을 위어(尉魚)라고 한다. 《시조수초목충어소(詩鳥獸草木蟲魚疏)》 ○ 살펴보건대, 중명은 한(漢)나라와 위(魏)나라 사이에 살았던 사람인 듯한데, 지금은 상고할 수가 없다.
○ 위 명제(魏明帝) 청룡(靑龍) 원년(233) 12월에 공손연(公孫淵)이, 손권(孫權)이 보낸 사신 장미(張彌)와 허안(許晏)의 머리를 참하여 보냈다. 공손연을 대사마 낙랑공(大司馬樂浪公)으로 삼았다. 《삼국지》 ○ 처음에 공손연이 오(吳)에 표문(表文)을 받들고 신하를 칭하니, 오나라 임금이 태상(太常) 장미(張彌)와 집금오(執金吾) 허안(許晏)을 사신으로 보내었다. 장미와 허안 등이 양평(襄平)에 살펴보건대, 양평은 요동군의 치소(治所)로 공손연이 도읍한 곳이다. 도착하자, 공손연은 그들을 죽이고자 하였다. 이에 먼저 그들이 데리고 온 관리와 군사를 분산시켜 중사(中使)인 진조(秦朝)ㆍ장군(張群)ㆍ두덕(杜德)ㆍ황강(黃疆) 등과 관리 및 군사 60명을 현도에 살펴보건대, 이곳은 현도군의 옛 치소가 아니다. 구금하였다. 현도는 요동의 북쪽 2백 리 되는 곳에 있으며 태수인 왕찬(王贊)이 거느린 호수가 2백이다. 진조 등을 모두 민가에 가두어 두고는 음식을 받아 먹게 하였다. 40여 일이 지난 뒤 진조와 장군 등이 의논하기를, “우리들이 멀리 와서 나라의 명령을 욕되게 하면서 이곳에 버려져 있으니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 지금 이 군의 형세를 보건대 아주 약하다. 만약에 하루아침에 마음을 합하여 성곽을 불살라 버리고 우두머리를 죽여 국가의 수치를 씻은 다음에 죽는다면 여한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어찌 구차하게 목숨이나 부지하면서 포로로 잡혀 있는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 하니, 모두들 그렇다고 하였다. 이에 몰래 서로 약속하여 8월 19일 밤에 거사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그날 점심 때 군(郡)에 사는 장송(張松)이 이를 고발하자, 왕찬이 곧바로 군사를 모으고 성문을 닫았다. 이에 진조ㆍ장군ㆍ두덕ㆍ황강 등이 모두 성을 뛰어넘어 고구려로 달아났다. 《자치통감》
○ 경초(景初) 연간에 명제(明帝)가 몰래 대방 태수 유흔(劉昕)과 낙랑 태수 선우사(鮮于嗣)를 보내어 바다를 건너가서 두 군을 평정하게 하였다. 《삼국지》 ○ 살펴보건대, 이때에 두 군이 공손연에게 속해 있어서 요동의 길이 막혔으므로 사마의(司馬懿)로 하여금 공손연을 토벌하게 하고, 몰래 유흔과 선우사를 바닷길로 내보내 두 군을 평정하게 한 것이다.
○ 2년(234) 봄에 태위(太尉) 사마선왕(司馬宣王)을 보내어 공손연을 정벌하게 하였다. 8월에 공손연과 그의 아들 공손수(公孫脩)를 참하여 머리를 낙양에 전하니 요동ㆍ낙랑ㆍ대방ㆍ현도가 모두 평정되었다. 처음 공손도(公孫度)가 중평(中平) 6년(189)에 요동을 점거한 때로부터 공손연에 이르기까지 총 3대로 50년간 유지하다가 멸망하였다. ○ 6월에 왜(倭)의 여왕(女王) 비미호(卑彌呼)가 보낸 대부 난승미(難升米) 등이 대방군으로 와서 천자에게 나아가서 조알하고 공물을 바치게 해 주기를 청하였다. 이에 태수 유하(劉夏)가 관원을 보내어 그들을 경도(京都)로 호송하였다. 그해 12월에 조서를 내려서 여왕에게 말하기를, “친위왜왕(親魏倭王) 비미호에게 조서를 내린다. 대방 태수 유하가 사신을 보내어 그대가 보낸 대부 난승미와 차사(次使) 도시우리(都市牛利) 및 공물로 바치는 남자 4명과 여자 6명, 반포(班布) 2필 2장을 이곳에 도착시켰다. 그대가 있는 곳은 몹시 먼데 이렇게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바치니, 이는 그대의 충효(忠孝)에서 나온 것인바, 내가 몹시 가상하게 여긴다. 이에 그대를 친위왜왕으로 삼고 금인(金印)과 자수(紫綬)를 싸서 대방 태수에게 보내 그대에게 전해 주게 한다. 그대는 그대의 종족들을 잘 보살피면서 나에게 순종하기를 힘쓰라.” 하였다. 《이상 모두 상동》
○ 제왕(齊王) 방(芳) 정시(正始) 원년(240)에 대방 태수 궁준(弓遵)이 건중교위(建中校尉) 제준(梯儁) 등을 파견하여 조서와 인수(印綬)를 받들고 왜국에 가서 가왜여왕(假倭女王)을 제수하고 금(金)ㆍ백(帛)ㆍ금(錦)ㆍ계(?)ㆍ도(刀)ㆍ경(鏡)ㆍ채(綵) 등의 물품을 하사하게 하였다. 《상동》
○ 6년에 낙랑 태수 유무(劉茂)와 대방 태수 궁준이 영동(領東)의 예(濊)가 구려에 복속하였다는 이유로 군사를 일으켜 정벌하였다. 《상동》 ○ 살펴보건대, 백제사(百濟史)에서는 “고이왕(古爾王) 13년에 낙랑 태수 유무와 삭방 태수(朔方太守) 왕준(王遵)이 고구려를 정벌하였다.” 하였는데, 이것은 두 군이 예(濊)를 정벌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런데 대방을 삭방으로 고치고 궁준을 왕준으로 바꾸었으니, 잘못됨이 심하다.
○ 7년에 부종사(部從事) 살펴보건대, 바로 낙랑 남부종사(樂浪南部從事)이다. 오림(吳林)이 낙랑이 본디 한국(韓國)을 통솔하였다는 이유로 진한(辰韓)의 8국을 떼어 낙랑에 붙였다. 그런데 역관(譯官)이 말을 전하는 과정에서 차이가 있자 신지(臣智)가 한(韓)의 분노를 자극하여 대방군의 기리영(崎離營)을 살펴보건대, 한의 경계 지역에 군영을 설치한 것인데, 지금은 어느 곳인지 상세히 알 수가 없다. 공격하였다. 이에 유무(劉茂)와 궁준(弓遵)이 군사를 일으켜 정벌하였는데, 궁준은 이 싸움에서 전사하였으며, 두 군이 드디어 한을 멸망시켰다. 삼가 살펴보건대, 대방 태수 궁준이 이 싸움에서 죽었는데, 새 태수 왕기(王?)는 8년에 임지에 도착하였다. 그러니 한을 멸망시킨 이 싸움은 의당 7년에 있었을 것이다.
○ 유주 자사(幽州刺史) 관구검이 구려(句麗)를 침입하자 구려 왕 궁(宮)이
매구(買溝)로 달아났다. 관구검이 현도 태수 왕기를 보내어 추격하였는데, 옥저를 지나 1천여 리까지 추격하였다. 《이상 모두 상동》
○ 8년에 대방 태수 왕기가 임소에 도착하였다. 색조 연사(塞曹椽史) 장정(張政) 등을 보내어 격문으로 왜 여왕 일여(壹與)에게 유시하였다. 이에 일여가 왜 대부(大夫) 솔선중랑장(率善中郞將) 액야구(掖邪拘) 등 20명을 보내어 장정 등이 돌아가는 것을 호송하였으며, 인하여 대(臺)에 나아가 공물을 바쳤다. 《상동》
○ 소제(少帝) 가평(嘉平) 원년(249)에 하후패(夏侯覇)가 살펴보건대, 하후연(夏侯淵)의 아들이다. 조상(曹爽)이 주살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도망하여 촉(蜀)으로 들어갔는데, 하후연의 예전 공훈으로 하후패의 아들을 사면해서 낙랑군으로 옮겨 가서 살게 하였다. 《상동》
○ 6년(254) 2월에 중서 영(中書令) 이풍(李?), 광록대부(光祿大夫) 장집(張緝), 황문감(黃門監) 소력(蘇?), 영녕 영(永寧令) 악돈(樂敦), 용종복야(冗從僕射) 유현(劉賢) 등이 대장군인 사마경왕(司馬景王)을 죽이고 정서장군(征西將軍) 하후현(夏侯玄)으로 대장군을 삼고자 모의하였는데, 일이 사전에 발각되어 모두 삼족을 멸하였으며, 그 나머지 친속들은 낙랑군으로 옮겨 살게 하였다. 《자치통감》 ○ 《세설(世說) 주》에는, “이풍(李?)의 딸은 이름이 완(婉)이고 자(字)가 숙(淑)으로 가충(賈充)의 전 부인인데, 이풍이 죽자 낙랑군으로 이사갔다.” ○ 6월에 유사(有司)가 허윤(許允)이 전에 관물(官物)을 팔아 이익을 차지하였다고 아뢰자, 정위(廷尉)에게 넘겼는데, 낙랑으로 옮겨 가다가 도중에 죽었다. 《삼국지》
고귀향공(高貴鄕公) 감로(甘露) 2년(257)에 현도군 고현현(高顯縣)의 이민(吏民)들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현장(縣長) 정희(鄭?)가 도적들에게 살해되었다. 민왕(民王) 간(簡)이 상여를 메고 돌아오자 4월 계묘에 특별히 조서를 내려 간(簡)을 충의도위(忠義都尉)로 삼았다. 《상동》
○ 후한 말기에 공손도가 스스로 평주목(平州牧)이라 칭하였으며, 그의 아들 공손강(公孫康)과 공손강의 아들 공손문의(公孫文懿)가 요동을 점거하니 동이(東夷) 9종(種)이 모두 복종하여 섬겼다. 위(魏)나라에서 동이 교위(東夷校尉)를 두어 양평(襄平)에 있게 하고, 요동(遼東)ㆍ창려(昌黎)ㆍ현도(玄?)ㆍ대방(帶方)ㆍ낙랑(樂浪)의 5군을 나누어 평주(平州)로 삼았으며, 뒤에 다시 이를 합하여 유주(幽州)로 만들었다. 진 무제(晉武帝) 함녕(咸寧) 2년(276) 10월에 창려ㆍ요동ㆍ현도ㆍ대방ㆍ낙랑 등 다섯 군국(郡國)을 나누어 평주를 두었다. 살펴보건대, 《진서(晉書)》 위관열전(衛瓘列傳)에 말하기를, “위관이 태시(泰始) 7년 8월에 정북대장군 도독유주제군사 유주자사(征北大將軍都督幽州諸軍事幽州刺史)에 제수되었는데, 진(鎭)에 이르자 유주위 5군을 나누어 평주로 만든 뒤에 겸하여 살폈다.”고 하였고, 무제본기(武帝本紀)에는 말하기를, “태시 10년 2월에 5군을 나누어 평주를 두었다.”고 하였으며, 지리지(地理志)에는 말하기를, “함풍 2년 10월에 평주를 두었다.” 하여, 서로 맞지 않는다. 지금은 지리지를 따랐다. ○ 12월에 평주 자사 부순(傅詢)이 청렴결백하다는 보고가 있자 조서를 내려 비단 2백 필을 하사하였다. 《이상 모두 진서》
○ 태강(太康) 2년(281) 8월에 평주 자사를 혁파하고 3년에 한 차례씩 조정에 들어와 아뢰게 하였다.
○ 11월에 선비(鮮卑)가 요서를 침입하였는데, 평주 자사 선우영(鮮于?)이 토벌하여 격파하였다. 《이상 모두 상동》
○ 혜제(惠帝) 영평(永平) 원년(291)에 여남왕(汝南王) 양(亮)이 동안왕(東安王) 요(繇)가 작상과 주벌을 함부로 한다는 이유로 관직을 면직시키고 집에 있게 하였는데, 패망스런 말이 있다는 죄를 적용하여 3월에 폐해 대방군으로 옮겼다. 《상동》
○ 영강(永康) 원년(300)에 조왕(趙王) 윤(倫)이 배외(裴?)의 두 아들 숭(嵩)과 해(該)를 해치려고 하였는데, 동해왕(東海王) 월(越)이 배외의 아버지 배수(裴秀)가 왕실에 공이 있으니 그의 후손을 멸절시켜서는 안 된다고 하여, 목숨을 부지해 대방으로 옮겨 가서 살았다. 《상동》
○ 유민(庾珉)이 시중(侍中)으로서 장잠남(長岑男)에 봉해졌다. 《상동》 ○ 살펴보건대, 장잠은 한나라 때에는 낙랑군에 속하였고, 진(晉)나라 때에는 대방군에 속하였다.
유요(劉曜)가 약관의 나이 때 낙양(洛陽)에서 놀다가 어떤 일에 연관되어 주벌당하게 되었는데, 조순(曹恂)과 함께 유수(劉綏)에게로 도망갔다. 이에 유수가 서궤(書櫃)에다가 넣어 왕충(王忠)에게 보내니, 왕충이 다시 조선(朝鮮)으로 살펴보건대, 조선은 바로 낙랑군의 치소인 조선현으로 지금의 평양부(平壤府)이다. 보내었다. 몇 해가 지난 뒤에 기근이 들자 성명을 바꾸고는 현의 군졸이 되었다.
이때 최악(崔岳)이 조선 영(朝鮮令)으로 있었는데, 그를 보고는 기이하게 여겨 곡절을 물으니, 유요가 머리를 조아려 자수하고 눈물을 흘리며 애걸하였다. 그러자 최악이 말하기를,

“경은 최원숭(崔元嵩)이 손빈석(孫賓碩)만 못하다고 여기는가. 어찌 그렇게 두려워하는가. 지금 조칙을 내려 경을 체포하라고 다그치고 있으니, 백성들 사이에 있으면서는 목숨을 보존할 수가 없다. 이 조선현은 몹시 궁벽하고 외지니 형세상 능히 서로 구원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급한 일이 생기더라도 인수(印綬)를 풀어놓고서 경과 함께 떠나 버리면 그만이다. 나는 이미 집안이 쇠미하여 걸리적거리는 형제도 없고, 또 박복하여 아들도 없다. 경은 나의 아들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지나치게 염려하지 말아라. 대장부가 이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서는 새나 짐승이 와서 살려 주기를 바라도 구해 주려 하는 법이다. 그런데 더구나 군자가 어려움에 빠진 경우에 있어서랴.”

하면서, 옷을 대 주고 책을 구해 주었다. 이에 유요가 드디어 최악에게 물어서 의심나고 막힌 것을 환히 통하니, 은혜와 보살핌이 몹시 후하였다. 최악이 조용히 유요에게 이르기를,

“유생(劉生)은 자품과 기국이 뛰어나서 한 세상에 이름을 날릴 만한 인재이다. 천하에 혹시 조금이라도 소동이 있을 경우에는 영웅들의 우두머리가 되는 사람은 바로 경일 것이다.”

하였다. 유요가 사면을 받아 돌아왔다. 뒤에 대흥(大興) 원년에 황제의 자리에 참칭하여 오른 뒤 여러 신하들과 동당(東堂)에서 잔치하다가 말이 평생 겪은 일에 미치자, 저절로 눈물을 흘리면서 드디어 글을 내려 이르기를,

“증(贈) 대사도(大司徒) 열민공(烈愍公) 최악은 한창(漢昌 전조(前趙) 유요(劉曜)의 연호임) 초년에 비록 증직하기는 하였으나 예장(禮章)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였다. 지금 최악을 추증하여 사지절 시중 대사도(使持節侍中大司徒) 요동공(遼東公)으로 삼는다.”

하였다. 《상동》
○ 민제(愍帝) 건흥(建興) 원년(313)이다. 영양 태수(榮陽太守) 배의(裴?)는 하동(河東)의 문희(聞喜) 사람으로 사예교위(司隸校尉) 배창(裴昶)의 아들이다.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형 배무(裴武)로 하여금 먼저 현도 태수가 되게 하고 자신은 창려 태수(昌黎太守)가 되어 나갔다. 군에 도착하여서 얼마 지난 뒤에 배무는 죽고 배의는 서울로 올라오라는 명을 받았다. 배의는 배무의 아들 배개(裴開)와 더불어 상여를 가지고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요서에 이르러 길이 막히자 배개와 함께 모용외(慕容?)에게 투항하여 요동상(遼東相)이 되었다. 그 뒤에 다시 낙랑 태수가 되었다. 《상동》
○ 4월에 요동의 장통(張統)이 낙랑과 대방 두 군에 웅거하여 고구려 왕 을불리(乙弗利)와 살펴보건대, 동사(東史)에 미천왕(美川王)의 이름이 을불(乙弗)이라 하였다. 서로 공격하였는데, 몇 해 동안을 계속하였다. 그러자 낙랑왕 모용준(慕容遵)이 장통을 달래니, 장통이 백성 1천여 호를 이끌고 모용외에게 귀순하였다. 모용외는 그를 위하여 낙랑군을 설치하고 살펴보건대, 유성(柳城)에다가 교치(僑治)를 두었다. 장통으로 태수를 삼고 모용준으로 참군사(參軍事)를 삼았다. 《자치통감》
○ 원제(元帝) 건무(建武) 원년(317)에 모용외의 세자 모용황(慕容?)을 관군장군 좌현왕(冠軍將軍左賢王)으로 삼고 망평후(望平侯)를 봉하였다. 《진서》 ○ 살펴보건대, 망평(望平)은 본디 요동에 속하였는데 진나라 때 와서는 현도에 소속되었다.
○ 평주(平州)를 처음으로 설치하고 모용외를 자사로 삼았다. 《상동》 ○ 살펴보건대, 《진서》에는 평주를 설치한 것이 무제 함녕 2년(276)이고 모용외가 자사에 제수된 것은 원제 태흥(太興) 3년(320)이니, 이곳에서 처음으로 설치했다는 것은 동진(東晉) 이후에 처음으로 설치한 것을 말한다.
○ 태흥 4년(321) 12월에 모용외를 도독유평이주동이제군사 거기장군 평주목(都督幽平二州東夷諸軍事車騎將軍平州牧)으로 삼고 요동공(遼東公)을 봉하였다. 황제의 명을 받아서 관사(官司)를 갖추고 평주의 수재(守宰)를 두게 하였다. 모용외가 이에 요속을 갖추어 두고 한수(韓壽)를 별가(別駕)로 삼았으며, 모용한(慕容翰)을 옮겨 요동을 지키게 하고, 모용인(慕容仁)에게 평곽(平郭)을 지키게 하였다. 살펴보건대, 《신당서》에, 고구려의 건안성(建安城)은 옛날의 평곽현(平郭縣)이라고 하였다. 모용한은 백성들을 잘 안집시켜 위엄과 은혜가 있었으며, 모용인 역시 버금갔다. 《자치통감》
○ 고은(高隱)이 진(晉)나라 때 현도 태수가 되었는데, 제 고조(齊高祖) 환(歡)의 6대조이다. 《남제서(南齊書)》 ○ 살펴보건대, 고은은 본디 발해(渤海)의 수(蓚) 사람으로 영가(永嘉) 연간의 난리 때 조카인 첨(瞻)과 함께 북쪽의 유주(幽州)로 옮겨 갔다가 얼마 뒤에 최비(崔毖)에 의지하여 요동으로 갔다. 그러니 고은이 태수가 된 것은 대흥 연간이었다.
○ 명제(明帝) 태령(太寧) 3년(325)에 모용외의 세자인 모용황에게 평북장군(平北將軍)을 제수하고, 조선공(朝鮮公)으로 올려 봉하였다. 《진서》
○ 성제(成帝) 함화(咸和) 8년(333) 5월에 요동무선공(遼東武宣公) 모용외가 졸하였다. 세자 모용황이 평북장군 행평주자사(平北將軍行平州刺史)로서 부내(部內)를 통섭하면서 낭중 영(郞中令) 고후(高?)를 현도 태수로, 대방 태수 왕탄(王誕)을 우장사(右長史)로, 황보진(皇甫眞)을 평주 별가(平州別駕)로 삼았다. 《자치통감》 ○ 11월에 모용황이 그의 동생인 모용인(慕容仁)과 서로 공격하였다. 양평 영(襄平令) 왕빙(王氷)과 장군(將軍) 손기(孫機)가 요동을 들어 반란하였다. 그러자 현도 태수 고후가 성을 버리고 도망쳐 돌아갔다. 《진서》
○ 9년 8월에 황제가 알자(謁者)를 보내어 모용황을 진동대장군 평주자사(鎭東大將軍平州刺史)로 삼고 지절(持節)과 승제(承制)와 봉배(封拜)는 일체 모용외의 고사(故事)대로 하였다. 《자치통감》
○ 함강(咸康) 4년(338)에 조왕(趙王) 호(虎)가 극성(棘城)을 공격하였다. 연왕(燕王) 모용황이 두려운 기색을 보이자, 현도 태수인 하간(河間) 사람 유패(劉佩)가 “사태가 급하니 신이 나가 싸우겠습니다.” 하고는 이어 결사대 수백 기를 거느리고 조왕의 군사에게 쳐들어가니, 향하는 곳마다 적군이 모두 무너졌다. 적병을 참획하고서 돌아왔다. 《상동》
○ 목제(穆帝) 영화(永和) 8년(352)에 연왕 모용준(慕容儁)이 황제의 위(位)에 올랐다. 용도(龍都)에다가 유대(留臺)를 건립한 다음 현도 태수 을일(乙逸)을 상서(尙書)로 삼고는 유대의 사무를 독자적으로 처리하게 하였다. 《상동》
○ 9년(353)에 왕희지(王羲之)가 난정(蘭亭)에서 수계(修?)하였는데, 시를 짓지 못하여 벌주(罰酒) 석 잔을 마신 자가 모두 16인이었다. 장잠 영(長岑令) 화기(華耆)는 살펴보건대, 화기가 장잠 영이 된 것은 영화(永和) 이전의 일이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운곡잡기(雲谷雜記)》
○ 효무제(孝武帝) 태원(太元) 5년(380) 3월에 진(秦)의 유주 자사 부락(?洛)이 자칭 대도독(大都督)이라고 하였다. 진왕(秦王)이 현도 태수 길패(吉貝)를 좌장사(左長史)로 삼고, 사신을 나누어 보내어 고구려ㆍ백제ㆍ신라ㆍ
휴인(休忍) 등 여러 나라에서 군사를 징발하게 하였다.
○ 8월에 진왕 견(堅)이 유주를 나누어 평주를 두고 석월(石越)로 평주 자사로 삼고 용성(龍城)에 주둔하게 하였다. 이상 모두 《자치통감》 ○ 살펴보건대, 진(晉)나라 함녕 2년에 유주의 현도ㆍ대방ㆍ낙랑 등 5개 군을 나누어 평주를 두었는데, 모용씨(慕容氏)가 이를 도로 합하여 유주로 만들었다가, 진(秦)의 부견(?堅)이 연을 멸망시키고 다시 나누어 평주를 둔 것으로 생각된다.
○ 10년 윤5월에 연왕 모용수(慕容垂)가 대방왕(帶方王) 좌(佐)에게 용성(龍城)을 지키게 하였다. 6월에 고구려가 요동을 침입하자 대방왕 좌가 사마(司馬) 학경(?景)을 보내어 구원하게 하였는데, 고구려에게 패하였다. 고구려가 드디어 요동과 현도를 함락하였다. ○ 11월에 모용농(慕容農)이 고구려로 진격하여 요동과 현도 두 군을 수복하였다. 연왕 모용수가 모용농을 지절 도독유평이주제군사 유주목(持節都督幽平二州諸軍事幽州牧)으로 삼고 용성을 지키게 하였으며, 평주자사 대방왕(平州刺史帶方王) 좌를 평곽(平郭)으로 옮겨 지키게 하였다. 《이상 모두 상동》
○ 우문릉(宇文陵)이 연나라에서 벼슬하니 모용씨가 부마도위(駙馬都尉)에 제수하고 현도군공(玄?郡公)에 봉하였다. 주 문제(周文帝)의 4대조이다. 《후주서(後周書)》
○ 위 태무제(魏太武帝) 연화(延和) 원년(432) 8월에 평동장군(平東將軍) 하다라(賀多羅)에게 조서를 내려 풍문통(馮文通)과 대방 태수 모용현(慕容玄)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후고(?固)에서 이들을 격파하고 백성들을 포로로 잡았다. ○ 9월에 요동ㆍ낙랑ㆍ대방ㆍ현도군의 백성 3만 호를 유주로 옮기고 창고를 열어 진휼하였다. 《이상 모두 후위서》 ○ 살펴보건대, 《위서》 풍문통열전(馮文通列傳)에는, “세조가 풍문통을 토벌하자 풍문통과 요동ㆍ낙랑ㆍ대방ㆍ현도군이 모두 항복하였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진(晉) 건흥(建興) 이후로 고구려가 이미 낙랑을 획득하였고 또 현도를 함락하였으며, 백제 역시 대방의 영토를 차츰차츰 소유하였다. 이로부터 중국에서 다시는 군과 태수를 두지 못하고 낙랑과 대방의 왕공(王公)의 호를 모두 고구려나 백제의 여러 왕들에게 가하였으며, 백제 역시 스스로 대방 태수나 조선 태수 등을 두었다. 모용씨 및 후위(後魏)ㆍ북제(北齊)가 봉작(封爵)된 이름은 모두 교치(僑治)로 인해 봉작을 받은 것이지, 한(漢)이나 위(魏)에서 차지하였던 옛 땅에 봉작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 연(燕)의 낙랑왕 공손도(公孫度), 낙랑왕 온(溫), 낙랑왕 혜(惠), 낙랑위왕(樂浪威王) 주(宙), 낙랑왕 모용회(慕容會), 풍발(馮跋)의 딸 낙랑공주(樂浪公主), 후위(後魏)의 대방공(帶方公) 상희(常喜), 조선후(朝鮮侯) 상태(常泰), 낙랑왕 만수(萬壽), 낙랑강왕(樂浪康王) 악평(樂平), 낙랑왕 장명(長命), 낙랑왕 충(忠), 낙랑공 왕진(王珍), 현조(顯祖)의 딸 낙랑장공주(樂浪長公主), 북제(北齊)의 황자(皇子)인 낙랑왕 인약(仁約) 등은 모두 교치(僑治)를 둔 이후에 봉작받은 것이다. ○ 삼가 살펴보건대, 모용씨(慕容氏)의 낙랑 태수 배의(裴?)ㆍ국팽(鞫彭)ㆍ유선(游?), 조선 영(朝鮮令) 손영(孫永), 후위(後魏)의 낙랑 태수 조외(趙?)는 모두 교치를 둔 이후에 봉작받은 것이다.


 

[주C-001]사군사실(四郡史實) : 이 한사군의 위치 및 강역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전하지 않아 여러 학자들 사이에 오랜 논의의 대상이 되어 왔다. 낙랑군에 대해서는 대체로 평안남도의 대부분과 황해도 일부 지역으로 보고 있으며, 치소(治所)는 지금의 평양(平壤)이라는 설과 토성리(土城里)라는 설이 있다. 임둔군에 대해서는, 《고려사》 지리지에 근거를 둔 지금의 대관령 이동의 강릉(江陵) 일대로 비정하는 설, 양와(養窩) 이세귀(李世龜)의 설에 근거한 대관령 동서의 지역으로 보는 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에 근거한 경기 서부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근거한 강원도와 경기도에 걸쳐 있었다고 하는 설, 일본 백조고길(白鳥庫吉)의 함경도 남부와 강원도에 비정하는 설, 이병도(李丙燾)의 철령(鐵嶺) 이북 단천(端川) 이남에 있었다고 하는 동북 해안설 등이 있다. 현도군에 대해서는, 《위지》 동옥저전(東沃沮傳)에 근거를 둔 함경도 방면에 비정하는 설, 《수경주(水經註)》에 근거를 둔 남만주 혼하(渾河) 상류 방면으로 비정하는 설, 청말(淸末)의 학자인 양수경(楊守敬)에 의한 옥저 및 고구려설, 이병도에 의한 창해군(蒼海郡)이 설치되었던 예맥(濊貊)의 지역에 있었다는 설이 있다. 진번군에 대해서는, 압록강 이북에 있었다고 하는 진번재북설(眞番在北說)과 이남에 있었다고 하는 진번재남설(眞番在南說)로 크게 구분해 볼 수 있다. 진번재북설에는 요동설(遼東說), 현도설(玄?說), 숙신설(肅愼說)이 있다. 요동설에는 《사기》 조선전(朝鮮傳)에 근거한 번한설(番汗說), 이세귀의 답씨설(沓氏說)이 있다. 현도설에는 응소(應邵)ㆍ유득공(柳得恭)ㆍ한진서(韓鎭書) 등의 압록강 상류 및 동가강 전 유역을 포함하는 지역에 있었다고 하는 고구려설과 정약용에 의한 서개마설(西蓋馬說)이 있다. 숙신설은 안정복이 주장한 것이다. 진번재남설에는, 맥족의 옛 땅이었던 강원도 방면에 비정하는 한백겸(韓百謙)의 맥국설(貊國說), 경기 및 충청남도 북부로 비정하는 양수경의 진번대방설(眞番帶方設), 황해도 재령평야(載寧平野)를 중심으로 북쪽으로 자비령(慈悲嶺)에서 남쪽으로 경기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으로 비정하는 이병도의 재령평야설이 있으며, 그 이외에도 영산강유역설(榮山江流域說), 동남해안설(東南海岸說), 진국설(辰國說) 등이 있다.《천관우, 古朝鮮史三韓史硏究, 일조각, 1989, 148쪽》
[주D-001]한 무제(漢武帝) …… 설치하였다 : 한 무제가 조선을 멸망시키고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하면서 네 개의 군을 동시에 설치한 것이 아니라, 원봉 3년에는 낙랑ㆍ임둔ㆍ진번 세 군만 설치하였고, 현도군은 그다음 해에 설치하였다.
[주D-002]단대령(單大領) : 단단대령(單單大嶺)을 말한다. 단단대령의 위치에 대하여 안정복은 “단단대령은 지금의 철령(鐵嶺) 안팎에서 대관령(大關嶺)에 이르는 한 가닥 산령(山嶺)이 바로 그것이다. 《여지승람》에서 대관령을 또한 대령(大嶺)이라고 칭하였으니, 아마 옛 이름이 없어지지 않았던가 보다.” 하였으며,《동사강목 부록 권하 지리고》 이병도는 “《위지》의 이른바 단단대령은 지금의 대관령이 아니라, 지금의 함경도와 평안도 양도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분수령(分水嶺)을 지칭하는 것이다.”고 하였으며,《韓國古代史硏究 192쪽》 북한의 이지린은 “단단대령이란 영은 요동반도를 좌우로 나누는 산맥의 최고산인 현 마천령이다.” 하였으며,《고조선연구 310쪽》 《조선전사》에는 중국의 천산산(天山山) 줄기로 보고 있다.《조선전사 제2권, 113쪽》
[주D-003]장잠장(長岑長) : 장잠현의 장(長)이다. 장잠현의 위치에 대해, 안정복은 “《성경지(盛京志)》에서는 《요사(遼史)》 지리지에 나오는 ‘숭주(崇州)는 본디 한(漢)의 장잠현이었는데, 동경(東京) 동북쪽 1백 50리에 있다.’는 것을 인용하였는데, 이 설은 잘못이다. 장잠이 만일 요 지역에 있다면 뒤에 어떻게 대방에 속할 수 있었겠는가.” 하였고,《동사강목 부록 권하 지리고》 이병도는 “황해도 풍천군(?川郡)에 비정된다.”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128쪽》
[주D-004]궁(宮) : 고구려 6대 왕인 태조왕(太祖王)의 이름이다.
[주D-005]선국(?國) : 한(漢)나라 때 서남쪽에 있었던 오랑캐 나라이다.
[주D-006]후성(候城) : 안정복은 “후성은 후한 시대에는 현도에 속하였고, 진 때에는 없었다. 지금의 철령현(鐵嶺縣) 남쪽이다.” 하였고,《동사강목 부록 권하 지리고》 이병도는 “지금의 본계(本溪) 부근인 듯하다.”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159쪽》
[주D-007]고구려 왕의 동생 수성(遂成) : 원문에는 ‘高句麗王遂成’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때의 고구려 왕은 태조왕(太祖王)으로, 태조왕의 이름은 궁(宮)이며, 수성은 태조왕의 동생으로 146년에 즉위하여 차대왕(次大王)이 되었다. 원문이 잘못되었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8]백고(伯固) : 고구려의 8대 왕인 신대왕(新大王)의 이름이다.
[주D-009]서안평(西安平) : 한나라 때 설치한 서안평현(西安平縣)으로, 고구려가 뒤에 이곳을 차지하여 박작성(泊灼城)이라 하였다. 지금의 봉천(奉天) 요양현(遼陽縣) 동쪽 60리 되는 곳에 안평(安平)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이곳이 옛날의 서안평 고성(故城)으로 추정된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72쪽 주》
[주D-010]유도(有道) : 한나라 때 천거 과목(薦擧科目)의 하나이다.
[주D-011]공손연(公孫淵) : 삼국 시대 때 요동 태수로, 공손강(公孫康)의 아들이다. 위(魏)나라에서 관구검(?邱儉)을 파견해 공손연에게 항복하기를 요구하자, 공손연이 이를 물리치고 스스로 연왕(燕王)이라 칭하였다. 다음 해 위나라에서 다시 사마의(司馬懿)를 보내 요동을 공격해 공손연을 잡아 죽였다. 이로 인해 요동ㆍ대방ㆍ낙랑ㆍ현도 네 군이 위나라의 판도로 들어갔다.
[주D-012]둔유현(屯有縣) : 이병도는 “둔유현은 원낙랑(元樂浪)의 남쪽 경계로, 지금의 황해도 북단의 황주(黃州)에 틀림이 없다.”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149쪽》
[주D-013]등주(登州) : 춘추전국 시대의 모자국(牟子國)이며, 한나라 때에는 동래군(東萊郡)이었고, 당나라 때에는 등주(登州)라고 불렀다.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모평현(牟平縣)이다.
[주D-014]매구(買溝)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조(大武神王條)에, 30년(대무신왕13) 7월에 매구곡 사람 상수(尙須)가 그의 동생 위수(尉須), 사촌 동생 우도(于刀) 등과 함께 고구려에 내투(來投)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매구를 매구루(買溝?)ㆍ매구곡과 동일한 지명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는데, 그 위치는 함경도 지역으로 추정하고 있다.
[주D-015]고귀향공(高貴鄕公) : 삼국 시대 때 위(魏)나라 조모(曹?)의 봉호(封號)이다. 제왕(齊王) 방(芳)이 폐위된 뒤 영입(迎立)되었으며, 7년 뒤에 사마소(司馬昭)에게 시해당하였다.
[주D-016]유요(劉曜) : 진(晉)나라 시대에 전조(前趙)의 임금이다. 유연(劉淵)의 아들로 처음에 한의 유총(劉聰)을 섬겨 상국(相國)이 되었다. 얼마 뒤에 황제의 위를 참칭하고는 장안(長安)에 도읍하였으며, 국호를 조(趙)로 바꾸었다. 12년간 재위하다가 낙양(洛陽)에서 죽었다.《晉書 卷103》
[주D-017]유성(柳城) : 요령성(遼寧省) 조양(朝陽)이다.
[주D-018]교치(僑治) : 어느 지역이 망한 뒤 다른 지역에다가 치소(治所)를 두고 명칭은 그대로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주D-019]휴인(休忍) : 신라 동쪽에 있었던 나라로, 뒤에 백제에 복속되었다. 위치는 미상이다.
[주D-020]부견(?堅) : 중국 오호십육국 시대 때 전진(前秦)의 왕으로, 357~385년까지 재위하였다. 소수림왕 2년(372)에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중 순도(順道)를 보내어 불교를 전하였다.
[주D-021]현조(顯祖) : 후위 헌문제(後魏獻文帝) 척발홍(拓跋弘)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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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서(尙書) : 우(虞), 하(夏), 상(商), 주(周)의 정도(政道)를 기록한 책으로, 공자(孔子)가 산삭(刪削)한 것이다. 오경(五經) 가운데 하나이다.
상서백편서(尙書百篇序) : 《상서》의 각 편 첫머리에 있는 소서(小序)를 말한다. 공자가 지은 것이라는 설과 유흠(劉歆)이 지은 것이라는 설이 있다.
상서대전(尙書大傳) : 한나라 복생(伏生)이 찬한 것으로, 총 4권이다.
상서전(尙書傳) : 한나라 공안국(孔安國)이 찬한 것이다.
상서정의(尙書正義) : 당(唐)나라 태종(太宗) 때 국자 좨주(國子祭酒) 공영달(孔穎達)이 황제의 명을 받고 당시의 대표적인 학자 21명과 함께 642년에 완성한 것으로, 총 20권이다.
홍범경전집의(洪範經典集義) : 청나라 때 손승택(孫承澤)이 찬한 것이다.
우공추지(禹貢錐指) : 청나라 때 호위생(胡渭生)이 지은 것으로, 총 20권에 도(圖) 1권이다.
모시(毛詩) : 한나라 초기에 모형(毛亨)이 전한 《시경(詩經)》을 말한다. 한나라 때 전해진 시에는 제시(齊詩), 노시(魯詩), 한시(韓詩) 3가의 시가 있었으며, 그 외에 조인(趙人) 모공(毛公)이라는 사람이 《모시》를 전하였는데, 후한(後漢) 때 이 《모시》에 정현(鄭玄)이 전주(箋註)를 붙이자 드디어 다른 3가의 시를 압도하여 크게 유행하였다.
모시전(毛詩箋) : 《모시》에 후한의 정현(鄭玄)이 전(箋)을 붙인 것이다.
시초목조수충어소(詩草木鳥獸蟲魚疏) : 삼국 시대 때 오(吳)나라의 육기(陸璣)가 찬한 것으로, 총 2권이다. 《모시》에 나오는 물명(物名)에 대해 고증한 것이다.
모시정의(毛詩正義) : 당나라 태종 때 국자 좨주 공영달이 황제의 명을 받고 당시의 대표적인 학자 21명과 함께 642년에 완성한 것으로, 총 40권이다.
시지리고(詩地理考) : 송나라 왕응린(王應麟)이 찬한 것으로, 6권이다. 《정씨시보(鄭氏詩譜)》를 전록(全錄)하였으며, 또 《이아(爾雅)》, 《설문(說文)》, 지지(地志), 《수경(水經)》 및 선현들의 전주(傳註)에서 시(詩) 가운데 나오는 지명과 관련된 것을 모두 모아서 기술하였다.
시집전(詩集傳) : 송나라 주자(朱子)가 찬한 것으로, 총 8권이다.
모시의소(毛詩義疏) : 북주(北周)의 심중(沈重)이 지은 것이다.
주례(周禮) : 여러 가지 이설(異說)이 있으나 전국 시대 말기에서 전한(前漢) 시대 사이에 편집된 것으로 추측되는 중국 경서(經書)의 하나이다. 총 6편이다.
주례주(周禮註) : 정현(鄭玄)이 지은 《주례》의 주석으로, 42권이다.
주례정의(周禮正義) : 당나라의 가공언(賈公彦)이 소(疏)를 올려 주석이 부족한 부분을 보충한 것이다.
예기(禮記)
예기집설(禮記集說) : 명나라 때 진호(陳澔)가 편찬한 것으로, 총 10권이다. 《운장예기집설(雲莊禮記集說)》이라고도 한다.
예기은의(禮記隱義) : 하예(何裔)가 찬한 것이다.
대대례기(大戴禮記) : 전한(前漢) 때 대덕(戴德)이 기록한 것으로, 85편으로 되어 있다. 주나라 말기에서 한나라 초기의 의절(儀節)과 예도(禮度)에 대해 기술하였으며, 《대대기(大戴記)》, 《대대례(大戴禮)》라고도 한다.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 : 명나라 구준(丘濬)이 찬한 것으로, 160권이다. 《대학》의 의리(義理)에 대하여 부연 설명한 것이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 전국 시대 때 좌씨(左氏)라는 사람이 지은 《춘추》에 대한 해석서로, 총 30권이다.
춘추좌전주(春秋左傳註) : 진(晉)나라 때 두예(杜預)가 《춘추좌전》에 대해 주석한 것이다.
춘추좌씨정의(春秋左氏正義) : 당나라 태종 때 국자 좨주 공영달이 황제의 명을 받고 당시의 대표적인 학자 21명과 함께 642년에 완성한 것으로, 총 36권이다.
춘추외전국어(春秋外傳國語) : 《국어(國語)》라고도 하고 《외전(外傳)》이라고도 한다. 《춘추(春秋)》에서 노(魯)나라를 내(內)로 하고 그 이외의 여러 나라를 외(外)로 하여, 외국의 일을 기술한 것을 가리킨다.
국어해(國語解) : 오(吳)나라의 위소(韋昭)가 주석한 것으로, 21권이다.
이아(爾雅) : 중국의 고대 어휘(語彙)를 보통말로 번역한 가장 오래된 사서(辭書)로, 저작자는 미상이다. 모두 19편으로 그 가운데서도 석고(釋?), 석언(釋言) 2편은 특히 오래된 것이다.
이아주(爾雅註) : 진(晉)나라 곽박(郭璞)이 주석한 것으로, 11권이다.
이아주(爾雅註) : 송나라 정초(鄭樵)가 찬한 것으로, 3권이다.
논어(論語) : 춘추전국 시대의 유성(儒聖)인 공자(孔子)와 그의 문인들이 주고받은 이야기를 기록한 책으로, 총 20권이다.
논어집해(論語集解) : 위(魏)나라 때 하안(何晏)이 썼다고 전하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되고도 완전한 논어에 대한 주석서(註釋書)로, 총 10권이다.
맹자(孟子) : 전국 시대 때 맹자(孟子)가 지은 책으로, 그의 언행록(言行錄)이다. 총 14권이다.
맹자집주(孟子集註) : 송나라 주자(朱子)가 찬한 것으로, 7권이다.
오경구침(五經鉤沈) : 진(晉)나라 양방(楊方)이 찬한 것이다.
십일경문대(十一經問對) : 원나라의 하이손(何異孫)이 지은 것으로, 《논어》, 《효경》, 《맹자》, 《대학》, 《중용》, 《시》, 《서》, 《주례》, 《의례》, 《춘추》, 《예기》의 11경에 대해 문답한 것이다.
경의고(經義考) : 청초(淸初)의 문인이며 학자인 주이존(朱?尊)이 지은 것으로, 총 300권에 목차 2권이다. 각 경서(經書)의 존망(存亡)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각 서(書)에 대하여 저자, 서명, 권수, 존망 여부를 기술하고, 원서(原書)의 서(序)와 발(跋)을 전록(全錄)하였으며, 관계 문헌을 전재(全載)하고, 때로는 자신의 생각을 부기(附記)하기도 하였다.
귀장역(歸藏易) : 삼역(三易) 가운데 하나로, 황제(黃帝)가 지은 것이라 한다.
효경구명결(孝經鉤命決)
급총주서(汲?周書) : 진(晉)나라 때 급군(汲郡)의 고총(古塚)에서 출토된 서책을 말하는데, 총 10권이다. 《일주서(逸周書)》라고도 한다.
급총주서주(汲?周書註) : 진(晉)나라의 오경박사(五經博士) 공조(孔晁)가 주석한 것이다.
죽서기년(竹書紀年) : 찬자는 미상이며, 2권으로 되어 있다. 진(晉)나라 무제(武帝) 때 급군(汲郡) 사람이 위(魏) 양왕(襄王)의 무덤을 발굴하여 죽서(竹書) 수십 수레를 얻었다. 그 가운데 《기년(紀年)》 14편이 있었는데, 하(夏)나라 이래로 위(魏)의 안리왕(安釐王) 20년까지의 일이 기록되어 있었다. 구본(舊本)에는 하(夏)나라부터 기록되어 있었는데, 지금 전하는 2권에는 황제(黃帝)부터 기록되어 있는바, 이는 후대 사람이 위찬(僞撰)한 것이다.
노사(路史) : 송나라 나필(羅泌)이 찬한 것으로, 47권이다. 전기(前紀) 9권은 삼황(三皇)과 음강(陰康), 무회씨(無懷氏)에 대해 기록하였고, 후기 14권은 태호(太昊)에서 하(夏)에 이르기까지의 일을 기술하였으며, 국명기(國名紀) 8권은 상고 시대에서 양한(兩漢) 말기까지 여러 나라의 성씨와 지리에 대해 기술하였으며, 발휘(發揮)와 여론(餘論) 16권은 변론하고 고증한 글이다.
전국책(戰國策) : 한나라 유향(劉向)이 선진(先秦) 시대 여러 나라에서 전국(戰國) 시대의 시사(時事)를 기록한 것을 모아 착란된 것은 바로잡고 중복된 것은 삭제하여 33편으로 편집한 것이다. 주(周)나라 원왕(元王)에서 진(秦)나라 시황(始皇) 25년까지 240여 년간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으며, 사마천(司馬遷)이 《사기(史記)》를 지으면서 이 책에서 많이 채록하였다.
사기(史記) :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 사마천(司馬遷)이 황제(黃帝) 때부터 한 무제 태초(太初) 연간까지 2600년 동안의 중국 역사를 기록한 중국 고대의 통사(通史)이다. 서술 체제는 기전체(紀傳體)로, 본기(本紀) 12, 표(表) 10, 서(書) 8, 세가(世家) 30, 열전(列傳) 70, 모두 130권으로 이루어졌으며, 이후 중국 정사(正史) 서술의 전형이 되었다. 제115권에는 ‘조선(朝鮮)’에 관한 사실이 최초로 입전(立傳)되어 있는바, 사료적인 가치가 크다.
사기색은(史記索隱) : 당나라 사마정(司馬貞)이 찬한 《사기》의 주석서로, 총 30권이다.
사기정의(史記正義) : 당나라 장수절(張守節)이 찬한 《사기》의 주석서로, 총 130권이다.
한서(漢書) : 후한(後漢) 시대 명제(明帝) 때 반고(班固)가 한 고조에서부터 왕망(王莽)이 멸망할 때까지 230년간의 사실을 기록한 전한(前漢)의 정사로, 본기 12, 연표 8, 지 10, 열전 70, 총 120권으로 이루어졌다. 제95권에 ‘조선전(朝鮮傳)’이 수록되어 있는데, 사군(四郡)의 명칭만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을 뿐 《사기》의 조선전 내용을 그대로 전재하였다.
한서주(漢書註) : 당나라 안사고(顔師古)가 주석한 것이다.
후한서(後漢書) : 남조(南朝) 유송(劉宋)의 범엽(范曄)이 지은 후한 14세 195년간의 정사로, 본기 10, 지 30, 열전 80, 총 120권으로 되어 있는데, 지 30권은 진(晉)나라의 사마표(司馬彪)가 보충한 것이다. 제115권 동이열전(東夷列傳)에 부여(夫餘), 읍루(?婁), 고구려(高句麗), 동옥저(東沃沮), 예(濊), 한(韓)이 실려 있는데, 후한 시대의 교섭 사실을 보완하였을 뿐 대체로 《삼국지》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의 기록을 전재한 것으로 사료적인 가치는 《삼국지》보다 떨어진다.
후한서주(後漢書註) : 당(唐)의 장회태자(章懷太子) 이현(李賢)이 주석한 것이다.
헌제기거주(獻帝起居注)
삼국지(三國志) : 진(晉)의 진수(陳壽)가 사찬(私撰)한 삼국 시대 66년간의 정사로, 위지(魏志) 30, 촉지(蜀志) 15, 오지(吳志) 20, 총 65권이다. 위서 제30권 동이전(東夷傳)에 부여, 고구려, 동옥저, 읍루, 예, 한(韓)이 수록되어 있는데, 대체로 왕망(王莽) 초부터 삼국 시대 말기까지의 사실을 수록하고 있으며, 중국 정사 가운데 처음으로 동이 각 종족의 위치, 지세, 국력, 통치형태, 생활풍습 등을 상세히 다루었으므로 사료적인 가치가 매우 높다.
위략(魏?) : 서진 무제(西晉武帝) 태강(太康) 연간에 위(魏)의 낭중(郞中)이었던 어환(魚?)이 사찬(私撰)한 삼국 시대 위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사서(史書)로, 기(紀), 지(志), 열전(列傳)의 체제로 되어 있다. 원문은 산실되어 전해지지 않으나, 《삼국지》 배송지(裴松之)의 주(注), 《태평어람(太平御覽)》, 《한원(翰苑)》 등에 일문(逸文)이 있으며, 청(淸)나라의 장붕일(張鵬一)이 그것을 집성하여 《위략집본(魏?輯本)》 25권을 편찬하였다. 진수(陳壽)가 지은 《삼국지》도 이 《위략》을 토대로 서술된 부분이 많으며, 우리나라 관계 기사의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구주춘추(九州春秋) : 진(晉)나라 사마표(司馬彪)가 찬한 것으로, 9권이다.
진서(晉書) : 당 태종(唐太宗) 정관(貞觀) 연간에 방현령(房玄齡) 등이 명을 받아 찬한 서진(西晉)의 4대 52년간, 동진(東晉)의 11대 102년간의 역사를 기록한 진대(晉代)의 정사로, 제기(帝紀) 10, 지(志) 20, 열전(列傳) 70, 재기(載記) 30, 총 130권이다. 제97권 사이열전(四夷列傳) 동이조(東夷條)에 부여, 마한, 진한, 숙신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다.
강표전(江表傳) : 진(晉)나라 우부(虞溥)가 찬한 것으로, 지금은 전해지는 본(本)이 없으며, 《삼국지(三國志)》의 주(注) 가운데 많이 인용되어 있다.
진서(秦書) : 차영(車穎)이 찬한 것이다.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 위(魏)나라 최홍(崔鴻)이 찬한 것으로, 100권이다.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의 사적을 기술하였다.
원경전(元經傳) : 수(隋)나라 왕통(王通)이 찬한 것에 당나라 설수(薛收)가 속찬(續撰)한 것으로, 10권이다. 공자(孔子)의 《춘추(春秋)》를 모방하여 지었으며, 진(晉)나라 태희(太?) 원년에서 당나라 무덕(武德) 원년까지의 사실(史實)을 기록하였다.
송서(宋書) : 남조(南朝) 제(齊)의 무제(武帝) 영명(永明) 5, 6년간에 심약(沈約)이 명을 받들어서 찬한 송(宋) 8대 60년간의 정사(正史)로, 제기(帝紀) 10, 지(志) 30, 열전(列傳) 60, 총 100권이다. 제97권 만이열전(蠻夷列傳)에 고구려국, 백제국이 수록되어 있는데, 대체적으로 유송(劉宋) 1대의 교섭 사실을 수록하고 있다.
남제서(南齊書) : 남조 양(梁)나라의 소자현(蕭子顯)이 찬한 남제(南齊) 7대 24년간의 역사를 기록한 정사로, 본기 8, 지 11, 열전 40, 총 59권이다. 제58권 동남이열전(東南夷列傳)에 고려, 백제, 가라(加羅)가 수록되어 있는데, 대체로 남제 시대의 교섭 사실을 기록하였다.
양서(梁書) : 당 태종 정관(貞觀) 연간에 요사렴(姚思廉)이 명을 받들어서 찬한 양나라 6대 56년간의 역사를 기록한 정사로, 본기 6, 열전 50, 총 56권이다. 제54권 동이열전에 고구려, 백제, 신라가 수록되어 있는데, 특히 신라전은 중국 사서에 처음으로 보이는 것으로 사료적인 가치가 높다.
양잡의주(梁雜儀注) : 당나라 단성식(段成式)이 찬한 것이다.
후위서(後魏書) : 북제 문선제(北齊文宣帝) 천보(天保) 연간에 위수(魏收)가 명을 받들어서 찬한 북위(北魏)의 건국(建國)에서부터 동위(東魏) 효정제(孝靜帝)까지 165년간의 역사를 기록한 정사로, 제기 14, 열전 96, 지 20, 총 130권이다. 제100권에 고구려, 백제, 물길(勿吉)이 수록되어 있는데, 고구려는 건국에서부터 양원왕(陽原王) 10년까지, 백제는 개로왕(蓋鹵王) 18년부터 문주왕(文周王) 1년까지의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전의 경우는 당대의 사료를 많이 이용한 것으로 보여 사료적인 가치가 높다.
북제서(北齊書) : 당나라 때 이백약(李百藥) 등이 명을 받들어서 찬한 것으로, 본기 8, 열전 42권 등 총 50권이다.
후주서(後周書) : 당 고조(高祖) 무덕(武德) 연간에서 당 태종 정관(貞觀) 2년 사이에 영호덕분(令狐德?)이 명을 받들어서 찬한 북주(北周) 5대 25년간의 역사를 기록한 정사로, 본기 8, 열전 42, 총 50권이다. 제49권에 고구려와 백제가 이역전(異域傳)의 명칭으로 실려 있는데, 고구려는 건국에서부터 평원왕(平原王) 19년까지, 백제는 초기부터 위덕왕(威德王) 25년까지의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북주 당시의 자료에 의거해 서술한 것으로, 전사(前史)에 없는 기록이 다수 보인다.
진서(陳書) : 당나라 때 요사렴(姚思廉) 등이 명을 받들어서 찬한 것으로, 본기 6, 열전 30권 등 총 36권이다.
남사(南史) : 당 태종 정관 연간에 이연수(李延壽)가 사찬(私撰)한 남조(南朝)의 송(宋), 제(齊), 양(梁), 진(陳) 170년간의 역사를 기록한 정사로, 본기 10, 열전 70, 총 80권이다. 제79권 이맥열전(夷貊列傳) 하(下)에 고구려, 백제, 신라가 수록되어 있는데, 대체로 남조의 정사를 산삭(刪削)하여 편찬한 것으로 새로운 사실은 보이지 않는다.
북사(北史) : 당 태종 정관 연간에서 고종(高宗) 현경(顯慶) 연간에 이연수(李延壽)가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서 사찬(私撰)한 북조(北朝) 233년간의 역사를 기록한 통사(通史)로, 본기 12, 열전 88, 총 100권이다. 제94권에 고려, 백제, 신라, 물길이 수록되어 있는데, 대체로 북조 정사(正史)의 동이전(東夷傳) 내용을 요약하여 기술한 것이다.
삼십육국춘추(三十六國春秋) : 양(梁)나라 소방등(蕭方等)이 찬한 것이다.
수서(隋書) : 당 태종 정관 연간에 위징(魏徵) 등이 명을 받들어서 찬한 수(隋)나라 3대 38년간의 역사를 기록한 정사로, 제기 5, 열전 50, 지 30, 총 85권인데, 지 부분은 장손무기(長孫無忌)가 편찬하였다. 제81권에 고구려, 백제, 신라, 말갈이 수록되어 있다.
구당서(舊唐書) : 후진(後晉) 고조(高祖) 천복(天福) 연간에서 출제(出帝) 개운(開運) 2년 사이에 유후(劉?) 등이 명을 받들어서 찬한 당나라 20대 290년간의 역사를 기록한 정사로, 본기 20, 지 30, 열전 150, 총 200권이다. 제199권 상 동이전에 고려, 백제, 신라가 수록되어 있는데, 고구려, 백제는 멸망 때까지, 신라는 문성왕(文聖王) 3년까지의 기사가 수록되어 있다.
신당서(新唐書) : 송 인종(仁宗) 경력(慶曆) 4년에서 가우(嘉祐) 5년 사이에 구양수(歐陽脩) 등이 명을 받들어서 찬한 당대(唐代) 290년간의 역사를 기록한 정사로, 본기 10, 지 50, 표 15, 열전 150, 총 225권이다. 제220권 동이열전에 고구려, 백제, 신라가 수록되어 있는데, 고구려, 백제는 멸망 때까지, 신라는 문성왕(文聖王) 때까지의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신당서》의 체제는 《구당서》보다 높게 평가되나, 후대에 편찬한 것이기 때문에 사료적 가치에 있어서는 《구당서》에 미치지 못한다.
순종실록(順宗實錄) : 당나라 한유(韓愈)가 찬한 것으로, 5권이다. 당나라 순종의 실록으로, 영정(永貞) 원년 정월 즉위일에서 동년 8월 붕어할 때까지의 기사를 수록하였다.
국사보(國史補) : 당나라 이조(李肇)가 찬한 것으로, 3권이다. 당나라 개원(開元)에서 장경(長慶) 연간까지의 잡사(雜事)를 기록한 것이다.
개천유사(開天遺事) : 오대 때 왕인유(王仁裕)가 찬한 것으로, 4권이다. 《개원천보유사(開元天寶遺事)》라고도 한다. 당나라 개원, 천보 연간의 유사 159조를 기술하였다.
대중유사(大中遺事) : 영호징(令狐澄)이 찬한 것이다.
당회요(唐會要) : 송나라 왕부(王溥)가 찬한 것으로, 100권이다. 당나라 정치의 강요(綱要)를 기술하였다.
당사논단(唐史論斷) : 송나라 손보(孫甫)가 찬한 것으로, 3권이다. 《당서(唐書)》를 편년체로 개찬하고, 논단을 가한 것이다.
오대사(五代史) : 《오대사》에는 송 태조(太祖) 개보(開寶) 연간에 설거정(薛居正)이 편찬한 《구오대사》와 송나라의 구양수(歐陽脩)가 편찬한 《신오대사》가 있다. 여기에서 인용한 것은 구양수가 찬한 《신오대사》로, 본기 12, 열전 45, 고(考) 3, 세가(世家) 10, 십국세가연보(十國世家年譜) 1, 사이부록(四夷附錄) 3, 총 74권이다. 제74권 사이부록에는 고려, 발해, 말갈, 신라가 수록되어 있다.
오대회요(五代會要) : 송나라 왕부(王溥)가 찬한 것으로, 총 30권이다. 태조(太祖) 건륭(建隆) 2년에 완성하였으며, 오대(五代)의 정요(政要)를 기술한 것이다.
남당서(南唐書) : 송나라의 육유(陸游)가 찬한 것으로, 18권에 음석(音釋) 1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음석 1권은 원나라 척광(戚光)이 찬한 것이다.
오월왕전(吳越王傳)
송사(宋史) : 원 순제(元順帝) 지정(至正) 3년에서 5년 사이에 탈탈(脫脫) 등이 명을 받들어 찬한 송대(宋代) 320년간의 정사로, 본기 47, 지 62, 표 32, 열전 255, 총 496권으로 되어 있다. 제487권 외국열전(外國列傳) 3에 고구려전이, 제491권 외국열전 7에는 발해전과 정안국전(定安國傳)이 수록되어 있다. 《송사》 고려열전에는 고려의 건국으로부터 예종(睿宗) 연간까지의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데, 종래와는 달리 외국전으로 기록한 것이 특징이다.
송양조천문지(宋兩朝天文志)
송삼조식화지(宋三朝食貨志)
송삼조예문지(宋三朝藝文志)
희풍일력(??日曆) : 송나라 왕명청(王明淸)이 찬한 것이다.
영화기문(寧和記聞) : 송나라 강만리(江萬里)가 찬한 것이다.
송명신언행록(宋名臣言行錄) : 송나라 주자(朱子)가 찬한 것으로, 전집 10권, 후집 14권이다. 전집에는 송나라 태조(太祖), 태종(太宗), 진종(眞宗), 인종(仁宗), 영종(英宗) 때의 명신인 조보(趙普), 조빈(曹彬) 이하 57인의 언행을 수록하였고, 후집에는 신종(神宗), 철종(哲宗), 휘종(徽宗) 때의 명신인 한기(韓琦), 부필(富弼) 이하 42인의 언행을 수록하였다.
요사(遼史) : 원 순제(元順帝) 지정 3년에서 4년 사이에 탈탈 등이 명을 받들어 찬한 요대(遼代) 219년간의 역사를 기록한 정사로, 본기 30, 지 37, 표 8, 열전 45, 국어해(國語解), 총 116권이다. 제115권 이국외기(二國外紀)에 고려전이 수록되어 있는데, 고려 건국부터 예종 15년까지의 요(遼)와의 교섭 사실을 중심으로 기술하고 있다.
요지(遼志) : 송나라 섭융례(葉隆禮)가 찬한 것이다.
요사고증(遼史考證)
금사(金史) : 원 순제 지정 3년에서 4년 사이에 탈탈 등이 명을 받들어서 편찬한, 금대(金代) 연간의 역사를 기록한 정사이다. 본기 19, 지 39, 표 4, 열전 73, 총 135권이다. 제135권 외국열전에 고려전이 수록되어 있는데, 고려 인종 때부터 고종 6년까지의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귀잠지(歸潛志) : 원(元)나라 때 유기(劉祁)가 찬한 것으로, 총 14권이다. 금나라 말기 여러 사람들의 전기(傳記)와 유사(遺事)를 잡다하게 기록하였다. 뒤에 원나라에서 《금사(金史)》를 편찬할 때 이 책을 많이 참고하였다.
원사(元史) : 명 태조 홍무(洪武) 2년에서 3년 사이에 송렴(宋濂) 등이 명을 받들어서 찬한, 원대(元代) 11대 109년간의 역사를 기록한 정사이다. 본기 47, 지 58, 표 8, 열전 97권 등 총 210권이다. 제208권 외이열전(外夷列傳)에 고려전과 탐라전(耽羅傳)이 수록되어 있는데, 고려는 고종 때부터 충숙왕 때까지의 사실을 수록하고 있다.
경신외사(庚申外史) : 권형(權衡) 등이 찬한 것이다. 원(元)나라 순제(順帝)가 재위한 28년간의 치란에 대한 대강을 기록하였다.
명사(明史) : 청(淸) 성조(聖祖) 강희(康?) 17년부터 고종(高宗) 건륭(建隆) 초 사이에 장정옥(張廷玉) 등이 명을 받들어 찬한, 명대 295년간의 역사를 기록한 정사이다. 본기 24, 지 75, 표 13, 열전 220, 목록 4권 등 총 336권이다. 제320권에 조선전이 외국열전의 이름으로 수록되어 있는데, 조선 건국 초부터 인조 15년까지의 사실을 명나라와의 교섭 사실을 중심으로 기술하고 있다.
헌종실록(憲宗實錄)
황명기사본말(皇明紀事本末) : 청나라 곡응태(谷應泰)가 찬한 것으로, 80권이다. 명나라의 전장(典章)과 사적(事蹟)에 대해 기술하였다. 《명조기사본말(明朝紀事本末)》이라고도 한다.
오학편(吾學編) : 명나라 정효(鄭曉)가 찬한 것으로, 14편 69권이다. 홍무(洪武) 연간에서 융경(隆慶) 연간까지의 일을 기술하였다.
사승고오(史乘攷誤) : 청나라 왕세정(王世貞)이 찬한 것으로, 11권이다.
황명세법록(皇明世法錄) : 명나라 진인석(陳仁錫)이 찬한 것으로, 92권이다. 명나라 태조에서 신종(神宗) 만력(萬曆) 연간까지의 모훈(謨訓), 예악(禮樂), 역상(曆象), 해방(海防), 수리(水利), 원보(元輔), 명신(名臣) 등에 대하여 기술하였다. 《황명세법요록(皇明世法要錄)》이라고도 한다.
명전고기문(明典故紀聞) : 명나라 여계등(余繼登)이 찬한 것으로, 18권이다. 《명조전고기문(明朝典故紀聞)》이라고도 한다.
국조헌징록(國朝獻徵錄) : 명나라 초굉(焦?)이 찬한 것으로, 120권이다. 명나라 초기에서 만력(萬曆) 연간까지의 전기(傳記)를 집대성한 것이다. 《헌징록(獻徵錄)》이라고도 한다.
대명집례(大明集禮) : 명나라 서일기(徐一夔)가 명을 받들어서 찬한 것으로, 53권이다. 홍무(洪武) 3년에 완성하였으며, 길례(吉禮), 흉례(凶禮), 군례(軍禮), 빈례(賓禮), 가례(嘉禮) 5례를 강(綱)으로 하고 그 아래에 26조목으로 나누어 기술하였다.
대명회전(大明會典) : 명나라 신시행(申時行) 등이 명을 받들어서 찬한 것으로, 180권이다. 명나라 제도에 대해 전반적으로 기술한 것이다.
명사의고(明史擬稿) : 청나라 우동(尤?)이 찬한 것이다.
통감전편(通鑑前編) : 송나라 김이상(金履祥)이 찬한 것으로, 18권이다. 경전(經典)을 근거로 하여 《통감외기(通鑑外紀)》의 잘못을 바로잡았으며, 당요(唐堯)에서 춘추(春秋) 이전까지를 기술하였다.
자치통감(資治通鑑) : 송나라 사마광(司馬光)이 찬한 것으로, 총 294권에 목록 30권, 고이(考異) 30권이다. 주(周)나라 위열왕(威烈王)에서 오대(五代) 후주(後周) 세종(世宗) 현덕(顯德) 6년까지 113 임금, 1361년간의 역사 사실을 편년체(編年體)로 기술한 것이다.
통감음주(通鑑音註) : 원나라 호삼성(胡三省)이 찬한 것이다.
통감고이(通鑑考異) : 송나라 왕극관(汪克寬)이 찬한 것이다.
통감지리통석(通鑑地理通釋) : 송나라 왕응린(王應麟)이 찬한 것으로, 14권이다. 역대(歷代)의 주역(州域)과 도읍(都邑) 등에 관해 기술하였다.
속송자치통감(續宋資治通鑑) : 송나라 유시거(劉時擧)가 찬한 것으로, 15권이다. 고종(高宗) 건염(建炎) 원년부터 영종(寧宗) 가정(嘉定) 17년까지의 사실을 기술하였다.
명산장(名山藏) : 명나라 하교원(何喬遠)이 찬한 것으로, 37권이다. 명대 13조(朝)의 유사(遺事)를 기술하였다.
통전(通典) : 당나라의 정치가이자 학자인 두우(杜佑)가 30년간에 걸쳐 찬한 것으로, 총 200권이다. 상고 시대부터 당대에 이르기까지의 역대 정치의 대요(大要), 제도의 변천 등을 식화(食貨), 선거(選擧), 직관(職官), 예(禮), 악(樂), 병(兵), 형(刑), 주군(州郡), 변방(邊防)의 9문(門)으로 나누어 연대순으로 서술하였다.
속통전(續通典) : 청나라 건륭(乾隆) 32년에 송백(宋白) 등이 명을 받아서 찬한 것으로, 144권이다. 두우(杜佑)의 《통전(通典)》이 천보(天寶) 연간까지만 기록되어 있으므로 그 뒤를 이어 명나라 숭정(崇禎) 말년까지를 서술하였는데, 체례(體例)와 편목(篇目)은 한결같이 통전의 예를 따랐다.
책부원귀(冊府元龜) : 북송(北宋) 초기의 정치가인 왕흠약(王欽若), 양억(楊億) 등이 진종(眞宗)의 명에 따라 1005년부터 편수(編修)하여 1013년에 완성한 것으로, 총 1000권이다. 내용은, 역대 군신의 사적(事跡)을 제왕(帝王), 윤위(閏位), 참위(僭位), 열국(列國), 저궁(儲宮), 종실(宗室), 외척(外戚), 재보(宰輔), 장수(將帥), 대성(臺省), 방계(邦計), 헌관(憲官), 간쟁(諫諍), 사신(詞臣), 국사(國史), 장례(掌禮), 학교(學校), 형법(刑法), 경감(卿監), 환위(環衛), 전선(銓選), 공거(貢擧), 봉사(奉使), 내신(內臣), 목수(牧守), 영장(令長), 관신(官臣), 막부(幕府), 배신(陪臣), 총록(總錄), 외신(外臣)의 31부로 나누고, 다시 이것을 1104문(門)으로 분류하여 편찬하였다.
문헌통고(文獻通考) : 송말(宋末) 원초(元初)의 역사가인 마단림(馬端臨)이 1319년에 찬한 것으로, 총 348권이다.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이 고대(古代)에서 오대(五代)까지의 치란과 흥망에 대해서는 상세하지만, 여러 가지 제도에 대해서는 소략함을 유감으로 여기어 당나라 두우의 《통전》을 모방하여, 고대로부터 남송 가정(嘉定) 말년까지의 여러 가지 제도에 대하여 상세히 설명하였다.
속문헌통고(續文獻通考) : 마단림이 지은 《문헌통고》를 모방하여 명나라 왕기(王圻)가 찬한 것으로, 총 254권이다.
통지략(通志?) : 송나라 정초(鄭樵)가 찬한 것으로, 《통지(通志)》 200권 가운데 51권이 들어 있다.
홍간록(弘簡錄) : 명나라 소경방(邵經邦)이 찬한 것으로, 254권이다. 가정(嘉靖) 36년에 완성하였으며, 정초(鄭樵)가 지은 《통지》의 뒤를 이어 당나라에서 금나라까지 664년간의 사실을 기술하였다.
홍간속록(弘簡續錄) : 청나라 소원평(邵遠平)이 찬한 것으로, 42권이다. 《속홍간록(續弘簡錄)》이라고도 한다.
독례통고(讀禮通考) : 청나라 서건학(徐乾學)이 찬한 것으로, 120권이다. 역대의 상례(喪禮)에 대하여 상기(喪期), 상복(喪服), 상의절(喪儀節), 상구(喪具), 장고(葬考), 변체(變體), 상제(喪制), 묘제(廟制) 8류(類)로 나누어 기술하였다.
태평광기(太平廣記) : 송대의 학자 이방(李昉) 등이 칙명에 의하여 편집한 고금(古今) 소설(小說)의 총집(總集)이다. 475종의 도서에서 모은 소설이나 신화를 92항목으로 나누어 출전을 밝혀 서술하였으며, 총 500권이다.
옥해(玉海) : 송나라 때 왕응린(王應麟)이 명을 받들어서 찬한 유서(類書)로, 총 200권에 《사해지남(辭海指南)》 4권이 붙어 있다. 천문(天文), 율력(律曆), 지리(地理) 등 21문(門), 240여 류(類)로 나누어 서술하였다.
육조사적(六朝事跡) : 남송(南宋)의 주돈이(周敦?)가 찬한 것으로, 2권이다. 소흥(昭興) 30년에 완성하였으며, 육조의 사적을 총서(總敍), 형세(形勢), 성궐(城闕) 등 14부문으로 나누어 기술하였다.
요산당외기(堯山堂外紀) : 명나라 때 장중서(蔣仲舒)가 찬한 수필록으로, 총 100권이다.
세설주(世說註) : 육조(六朝)의 송나라 유의경(劉義慶)이 지은 《세설(世說)》에 양(梁)나라의 학자 유준(劉峻)이 주(註)를 붙인 것으로, 3권이다.
도서편(圖書編) : 명나라 장황(章潢)이 편(編)한 것으로, 127권이다. 여러 가지 서책의 그림을 모아 설명을 붙인 것으로, 경의(經義) 15권, 상위역산(象緯曆算) 13권, 지리(地理) 38권, 인도(人道) 57권, 역상(易象) 1권, 유편(類編) 1권, 학시(學詩) 1권, 다식(多識) 1권으로 되어 있다.
형천패편(荊川稗編) : 명나라 당순지(唐順之)가 찬한 것으로, 120권이다. 역대 명현(名賢)들의 논문(論文)을 모은 것이다.
삼재도회(三才圖會) : 명나라 왕기(王圻)가 찬한 것으로, 총 106권이다. 천문(天文), 지리(地理), 인물(人物), 시령(時令), 궁실(宮室), 기용(器用), 신체(身體), 의복(衣服), 인사(人事), 의제(儀制), 진보(珍寶), 문사(文史), 조수(鳥獸), 초목(草木) 등에 대해 도해(圖解)한 것이다.
삼재도회속집(三才圖會續集) : 명나라 때 왕사의(王思義)가 찬한 것이다.
무비지(武備志) : 명나라 모원의(茅元儀)가 찬한 것으로, 240권이다. 무비(武備)에 관계되는 역대의 사실을 편집한 것으로, 병결해(兵訣解), 직략고(職?考), 진련제(陣練制), 군자승(軍資乘), 점도재(占度載) 다섯 부문으로 나누어 기술하였다.
대청개국방략(大淸開國方?) : 청나라 건륭(乾隆) 38년에 명을 받들어 찬한 것으로, 32권이다. 청 태조의 건국부터 세조가 중국에 들어가 평정하기까지의 사실을 편년체로 기술하였다. 《황청개국방략(皇淸開國方?)》, 《개국방략(開國方?)》이라고도 한다.
대청회전(大淸會典) : 청나라 건륭제(乾隆帝)가 명하여 찬한 것으로, 총 100권이다. 《청회전》이라고도 한다.
서경잡기(西京雜記) : 구본(舊本)에 혹 한나라 유흠(劉歆)이나 진(晉)나라 갈홍(葛洪)이 찬한 것이라 되어 있기도 한데, 실은 양(梁)나라 오균(吳均)이 찬한 것이며, 총 6권이다. 한나라 무제(武帝) 전후 시대의 잡사(雜事)에 대해 기술하였다.
양사공기(梁四公記) : 당나라 장열(張說)이 찬한 것이다.
규염객전(?髥客傳) : 당나라 장열이 지은 전기소설(傳奇小說)이다.
양태진외전(楊太眞外傳) : 송나라 악사(樂史)가 찬한 것으로, 상ㆍ하 2편이다. 당나라 양 귀비(楊貴妃)에 대하여 기술하였다.
고종행장부절차략(高宗幸張府節次?) : 송나라 주밀(周密)이 찬한 것이다.
영도선현전(寧都先賢傳) : 청나라 위례(魏禮)가 찬한 것이다.
여협전(女俠傳) : 정지린(鄭之麟)이 찬한 것이다.
양조평양록(兩朝平攘錄) : 명나라 제갈원성(諸葛元聲)이 찬한 것으로, 5권이다. 저자가 목도한 다섯 가지 큰일을 한 권에 한 가지씩 기술하였다.
승조동관습유기(勝朝?管拾遺記) : 모기령(毛奇齡)이 찬한 것이다.
동정기(東征記) : 서희진(徐希震)이 찬한 것이다.
만성통보(萬姓統譜) : 명나라 능적지(凌迪知)가 찬한 것으로, 146권이며, 《씨족박고(氏族博攷)》 14권이 붙어 있다. 고금의 성씨(姓氏)를 각 운(韻)별로 나누어 편차한 다음 각 성씨의 본성(本姓)과 역대 명인들의 사적을 수록하였다.
성원(姓苑) : 남조(南朝) 송(宋)나라 때 하승천(何承天)이 찬한 것이다.
성경(星經) : 전국(戰國) 시대 위(魏)나라 석신(石申)이 지은 것으로, 1권이다.
천문류초(天文類抄)
대명청류분야지서(大明淸類分野之書) : 명나라 유기(劉基) 등이 찬한 것으로, 24권이다. 12분야의 성차(星次)를 천하의 부현(府縣)에 나누어 배치하여 기술하였으며, 군현의 아래에 고금의 건치 연혁을 상세하게 기술하였다.
고금율력고(古今律曆考) : 명나라 형운로(邢雲路)가 찬한 것으로, 총 72권이다. 이 책은 역(曆)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서술하였으나, 율(律)에 대해서는 소략하여 6권에 불과하며, 육경(六經) 이하로부터 명나라 《대통력(大統曆)》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 고증하여 바로잡은 것이다.
산해경(山海經) : 중국 고대의 지리서(地理書)로 성립 연대는 미상이며, 우(禹) 임금 때 백익(伯益)의 저술이라 하나 분명치 않으며, 대개 전국 시대 때의 저술일 것으로 추측된다. 당초에는 13권이었으나, 한나라 때 유흠(劉歆)이 대황남경(大荒南經)에서 해내경(海內經)까지 5권을 추가하여 총 18권이다. 지리(地理), 산맥(山脈), 하천(河川), 물산(物産) 등에 대해 기록하였다.
산해경찬(山海經?) : 진(晉)나라 때 곽박(郭璞)이 《산해경》의 원문에 찬(?)을 붙인 것으로, 2권이다.
산해경주(山海經註) : 진나라 때 곽박이 《산해경》에 대해 주석한 것으로, 18권이다.
산해경석의(山海經釋義) : 명나라 때 왕숭경(王崇慶)이 지은 것으로, 18권이다.
산해경전소(山海經箋疏) : 청나라 때 학의행(?懿行)이 《산해경》의 원문을 교정하고 고증을 가한 것으로, 총 18권이다.
수경(水經) : 한나라 때 상흠(桑欽)의 저술이라는 설과 진(晉)나라 때 곽박(郭璞)의 저술이라는 설이 있으나 모두 신빙성이 없으며, 대개 삼국 시대의 저술로 생각된다. 황하(黃河)를 비롯하여 중국 각지의 하천의 수계(水系)를 표시하고 있다.
수경주(水經註) : 북위(北魏)의 관리이자 지리학자인 역도원(?道元)의 저술로 총 40권이다. 《수경》에 대한 주석서라는 체제를 취하고 있기는 하나, 완전한 지리서(地理書)로서 독자적인 내용과 가치를 지니고 있다.
수도제강(水道提綱) : 청나라 제소남(齊召南)이 찬한 것으로, 28권이다.
진태강지리지(晉太康地理志)
괄지지(括地志) : 당나라 복왕(?王) 태(泰)가 소덕언(蘇德言), 고윤(顧胤) 등에게 명하여 찬한 것으로, 본디 총 550권이나 대부분 산실되고 청나라 때 손성연(孫星衍)이 다시 수집, 편찬한 8권만 남아 있다.
고금군국지(古今郡國志) : 당나라 가탐(賈耽)이 찬한 것이다.
태평환우기(太平?宇記) : 송나라 악사(樂史)가 태평흥국(太平興國) 연간에 찬한 지리서(地理書)로, 200권인데, 현재는 193권만 전한다. 중국과 사이(四夷)의 인물(人物)과 예문(藝文)에 대해 기록하였다.
석지여론(釋地餘論) : 청나라 염약거(閻若?)가 찬한 것이다.
황여고(皇輿考) : 명나라 장천복(張天復)이 찬한 것으로, 12권이다.
광여기(廣輿記) : 명나라 육응양(陸應陽)이 찬한 것으로, 24권이다.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를 모방하여 지은 것으로, 각성(各省)을 주부(州府)로 나눈 다음 건치연혁을 기술하고 다음으로 형승(形勝), 산천(山川), 토산(土産), 관량(關梁), 사묘(祠廟), 고적(古蹟), 명환(名宦), 인물(人物)에 대해 기록하였다.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 : 명나라 이현(李賢) 등이 명을 받아서 찬한 것으로, 90권이다. 경사(京師), 남경(南京), 중도(中都), 흥도(興都)의 사대 문(門)으로 나누어 각 해당 지역의 지리(地理), 건치연혁(建置沿革), 풍물(風物), 인물(人物) 등에 대해 기록하였다.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 : 장정석(蔣廷錫) 등이 황제의 명을 받들어서 편찬한 중국 청대 전 지역의 지지(地志)로, 총 366권이다. 중국을 각 성별(省別)로 나누어서 서술하였는데, 처음에 통부(統部)가 있고, 도(圖), 표(表), 분야(分野), 건치연혁(建置沿革), 형세(形勢), 문무직관(文武職官), 호구(戶口), 전부(田賦), 세과(稅課), 명환(名宦)의 순서로 한 성의 대요(大要)를 개괄하였으며, 그다음으로 부(府), 청(廳), 직예주(直隷州)에 관해서 각각 도, 표, 분야, 건치연혁, 형세, 풍속(風俗), 성지(城池), 학교(學校), 호구, 전부, 산천, 고적(古蹟), 관애(關隘), 진량(津梁), 제언(堤堰), 능묘(陵墓), 사묘(祠廟), 사관(寺觀), 명환(名宦), 인물(人物), 유우(流寓), 열녀(烈女), 선석(仙釋), 토산(土産)의 22문(門)으로 나누어 서술하였다. 이 책은 원(元)과 명(明)의 일통지(一統志)를 답습한 것인데, 그보다 훨씬 더 기사가 정확하고 고증이 자세하며, 내용이 풍부하여 청대의 지리뿐만 아니라 중국 고래(古來)의 역사 지리를 연구하는 데 없어서는 안될 문헌이다.
성경통지(盛京通志) : 청나라 여요노(呂耀魯) 등이 건륭(乾隆) 44년에 명을 받아 찬한 것으로, 120권이다. 예전의 《성경통지》를 보충한 것이다.
황청직공도(皇淸職貢圖) : 청나라 건륭제(乾隆帝) 16년에 대학사(大學士) 부항(傅恒) 등이 명을 받들어 찬한 것으로, 총 9권이다. 조선(朝鮮) 등 조공을 바치는 여러 외국과 그 나머지 각성(各省)에 소속된 이민족(異民族)들의 풍속과 용모를 적은 것이다.
천하산하양계고(天下山河兩戒考)
해방의(海防議) : 명나라 화옥(華鈺)이 찬한 것이다.
일하구문(日下舊聞) : 청나라 주이존(朱?尊)이 찬한 것으로, 42권이다. 북경(北京)의 고사(古事)와 구문(舊聞)을 각종 서책 가운데서 찾아 모아 찬집하였으며, 원서(原書)의 이름을 수록하였다.
신원지략(宸垣識?) : 청나라 오장원(吳長元)이 찬한 것으로, 16권이다. 경사(京師)의 일에 대해 서술하였는데, 천문(天文), 형세(形勢), 수리(水利), 건치(建置), 대내황성(大內皇城), 내성(內城), 외성(外城), 원유(苑?), 교경(郊坰), 지여(識餘) 등으로 나누어 기술하였다.
연사(燕史) : 명나라 곽조경(郭造卿)이 찬한 것으로, 120권이다.
제경경물략(帝京景物?) : 명나라 유동(劉?)이 찬한 것으로, 8권이다. 당시 북경(北京)의 경물(景物)에 대해 기록하였다.
원씨액정기(元氏掖庭記) : 명나라 도종의(陶宗儀)가 찬한 것이다.
한림지(翰林志) : 당나라 이조(李肇)가 찬한 것으로, 1권이다. 한림(翰林)의 전고(典故)에 대해 기록한 것이다.
태학지(太學志) : 곽반(郭?)이 찬한 것이다.
중당사기(中堂事記) : 원나라 왕운(王?)이 찬한 것으로, 3권이다.
등과기(登科記) : 송나라 악사(樂史)가 지은 것으로, 30권이다.
천록지여(天祿識餘) : 청나라 고사기(高士奇)가 찬한 것이다.
금오퇴식필기(金鰲退食筆記) : 청나라 고사기(高士奇)가 찬한 것으로, 2권이다. 명나라의 고적(故蹟)을 탐방하고 그 개요를 기술한 것이다.
객연잡기(客燕雜記) : 명나라 육계굉(陸啓宏)이 찬한 것으로, 3권이다.
장안객화(長安客話) : 명나라 장일규(蔣一葵)가 찬한 것으로, 8권이다.
유업(游業) : 명나라 구회서(區懷瑞)가 찬한 것이다.
전료지(全遼志)
요동지(遼東志)
교광지(交廣志)
송강지(松江志)
구화산록(九華山錄) : 송나라 주필대(周必大)가 찬한 것이다.
통주지(通州志)
휘주지(徽州志) : 왕상녕(汪尙寧)이 찬한 것이다.
흡현지(?縣志)
서호지(西湖志) : 명나라 전여성(田汝成)이 만력(萬曆) 12년에 완성한 것으로, 총 24권이다. 서호의 명승지와 남산, 북산의 명승지 등에 대해 7문(門)으로 나누어 기록하였다. 《서호유람지(西湖遊覽志)》라고도 한다.
서호지여(西湖志餘) : 명나라 전여성(田汝成)이 찬한 것으로, 총 26권이다. 남송 시대의 일문(?聞)을 모아 13문(門)으로 나누어 기술하였다.
남경태상시지(南京太常寺志) : 명나라 심약림(沈若霖)이 찬한 것으로, 40권이다.
수동번풍속기(隋東蕃風俗記)
민대기(?大記)
북원록(北轅錄) : 송나라 주휘(周煇)가 찬한 것으로, 1권이다. 《고금설해(古今說海)》 가운데 들어 있다.
송막기문(松漠紀聞) : 송나라 홍호(洪皓)가 찬한 것으로, 정집 1권, 속집 1권이다. 홍호가 금나라에 사신으로 가 15년간 머물면서 금나라의 사적(事迹)을 기록한 것이다.
새북사실(塞北事實) : 문유간(文惟簡)이 찬한 것이다.
행정록(行程錄) : 허항종(許亢宗)이 찬한 것이다.
영남잡기(嶺南雜記) : 오진방(吳震方)이 찬한 것이다.
동서양고(東西洋考) : 명나라 장섭(張燮)이 찬한 것으로, 12권이다. 당시에 중국과 교역(交易)하는 여러 외국에 대해 기록한 것인데, 먼저 서양고(西洋考)에서는 15 개국을 기술하고 4 개국을 붙였고, 다음으로 동양고(東洋考)에서는 7 개국을 기술하고 12 개국을 붙였으며, 또 별도로 세향(稅餉), 주사(舟師), 예문(藝文) 등을 기술하였다.
신라국기(新羅國記) : 영호징(令狐澄)이 찬한 것이다.
고려도경(高麗圖經) : 송나라 서긍(徐兢)이 고려 인종(仁宗) 원년에 사신으로 나왔다가 보고 들은 바를 그림과 글로 적은 것으로, 40권이다. 현재 그림은 없어지고 글만 전하는데, 고려 시대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계림지(鷄林志) : 송나라 왕운(王雲)이 찬한 것으로, 30권이다. 숭녕(崇寧) 원년에 왕운이 서장관(書狀官)으로 고려에 나왔다가 돌아간 뒤에 지은 것으로, 고려의 사실을 자세하게 기술하였다. 《봉사계림지(奉使鷄林志)》라고도 한다.
계림유사(鷄林遺事) : 고려 중기에 송나라의 사신으로 온 서장관(書狀官) 손목(孫穆)이 지은 것이다. 이 책은 저자가 고려에 와서 중국인의 안목으로 본 우리나라의 인정과 풍물을 기록한 것으로, 1103~1104년경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된다. 총 3권으로 토풍(土風), 조제(朝制), 방언(方言)의 3부와 부록의 표문집(表文集)으로 되어 있던 것인데, 현재 전하는 것은 방언부와 토풍, 조제의 일부분뿐이다. 첫머리에 제목과 저자의 이름을 적고 고려의 제도와 풍습 등을 간단히 소개한 다음 방언이라는 표제 밑에 당시의 고려어를 356항목에 걸쳐 중국자음(中國子音)으로 사음(寫音)하고 있는데, 여기에 수록된 어휘는 고려어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조선세기(朝鮮世紀)
조선지(朝鮮志) : 저자는 미상이며, 2권이다. 명나라 때 조선인이 지은 것인 듯하다. 먼저 강역(疆域)과 연혁(沿革)을 기술하고, 다음으로 경도(京都), 풍속(風俗), 고도(古都), 고적(古迹), 산천(山川), 누대(樓臺) 여섯 항목으로 나누어 기술하였다. 고적(古迹) 조항은 괴이한 것이 많아서 소설(小說)과 같으며, 그 나머지 잡다한 것들은 중국 사서(史書)에 상세하지 못한 내용이 많이 들어 있다.
조선기사(朝鮮紀事) : 명나라 예겸(倪謙)이 찬한 것으로, 1권이다.
봉사록(奉使錄) : 명나라 장영(張寧)이 조선에 사신으로 갔다가 보고 들은 사실을 기술한 것으로, 1권이다.
일본기(日本記)
서록해제(書錄解題) : 송나라 진진손(陳振孫)이 찬한 것으로, 22권이다. 원본은 잃어버렸으며, 지금 전해지는 것은 《영락대전(永樂大典)》에서 뽑아낸 것이다. 역대 전적(典籍)들의 권질(卷帙)과 저자의 성명을 자세하게 기록하였으며, 득실(得失)에 대해 논하였다. 《직재서록해제(直齋書錄解題)》라고도 한다.
절강서목(浙江書目) : 청나라 종음(鍾音)이 찬한 것이다.
세선당장서목록(世善堂藏書目錄) : 명나라 진제(陳第)가 찬한 것으로, 2권이다. 세선당은 진제의 서실(書室) 이름이다.
수초당서목(遂初堂書目) : 송나라 우무(尤?)가 찬한 것으로, 1권이다. 우무의 장서실(藏書室)인 수초당(遂初堂)의 장서 목록으로, 경ㆍ사ㆍ자ㆍ집 4부, 44류(類)로 나누어 수록하고 있다.
사고전서총목(四庫全書總目) : 청나라 건륭(乾隆) 37년에 기균(紀?) 등이 명을 받들어서 찬한 것으로, 총 200권이다. 《사고전서(四庫全書)》의 총목(總目)을 경ㆍ사ㆍ자ㆍ집 4부로 나눈 다음, 이를 다시 저록(著錄)과 존목(存目)으로 분류하여 각 서의 해설을 붙였다.
방언(方言) : 한나라 양웅(揚雄)이 찬한 것으로, 13권이다. 양웅이 당시에 각 지역에서 조회(朝會)하러 오는 사자(使者)들의 방언을 모아 수록한 것으로 《양자방언》이라고도 한다. 총 11만 900여 자의 방언이 들어 있는데, 그 가운데 고려 시대의 말이 들어 있어서 이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석명(釋名) : 한나라 유희(劉?)가 찬한 것으로, 8권이다. 훈고자서(訓誥字書)의 하나로, 《일아(逸雅)》라고도 한다. 석천(釋天), 석지(釋地) 등 27류(類)로 나누어 기술하였다.
고금주(古今注) : 진(晉)나라 최표(崔豹)가 찬한 것으로, 총 3권이다. 여복(輿服), 도읍(都邑), 음악(音樂), 조수(鳥獸), 어충(魚蟲), 초목(草木), 잡주(雜注), 문답(問答), 석의(釋義) 8편으로 나누어서 명물(名物)에 대해 고증한 것이다.
급취편주(急就篇註) : 한(漢)나라 원제(元帝) 때 사유(史游)가 찬한 자서(字書)인 《급취편(急就篇)》에 당(唐)나라 안지추(顔之推)가 주석한 것이다.
급취편성씨주(急就篇姓氏註) : 《급취편》에 왕응린(王應麟)이 보주(補註)한 것이다.
통아(通雅) : 명나라 방이지(方以智)가 찬한 것으로, 52권이다. 《이아(爾雅)》의 체례(體例)에 의거하여 명물(名物), 상수(象數), 훈고(訓誥), 음성(音聲) 등 44부문으로 나누어 고증하였다.
설문(說文) : 한나라의 허신(許愼)이 찬한 것으로, 30권이다. 한자(漢字)의 기본적인 고전(古典)으로, 《설문해자(說文解字)》라고도 한다. 화제(和帝) 영원(永元) 12년에 완성하였으며, 당시 한자의 자형(字形), 의의(意義), 음성(音聲)에 대해 해설하였다.
집운(集韻) : 송나라 인종 경우(景祐) 4년에 정도(丁度)가 명을 받들어서 찬한 운서(韻書)로, 총 10권이다. 평성(平聲) 4권, 상성(上聲) 2권, 거성(去聲) 2권, 입성(入聲) 2권으로 되어 있으며, 5만 3525자를 수록하였다.
정자통(正字通) : 명나라 장자열(張自烈)이 찬한 것으로, 12권이다. 매응조(梅膺祚)의 《자휘(字彙)》를 모방하여 12권을 12간지로 표시하였다. 《자휘》의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훈고(訓?)를 더하였는데, 인용한 것이 번잡하다.
자휘(字彙) : 명나라 말기에 매응조(梅膺祚)가 편찬한 사서(辭書)로, 총 12권인데, 첫머리와 끝 부분에 두 권의 부록이 있다. 처음으로 필획(筆?) 색인(索引)을 붙인 통속의 자서(字書)라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며, 수록 자수는 3만 3172자이다.
강희자전(康?字典) : 청나라 때 장옥서(張玉書) 등이 강희제(康?帝)의 칙명으로 편찬한 자전이다. 총 12집, 40만 545자를 수록하고 있다.
해편통종(海篇統宗) : 장천여(張天如)가 찬한 것이다.
선화서보(宣和書譜) : 송나라 모진(毛晉)이 찬한 것이라 하나 자세하지 않으며, 20권이다. 송나라 휘종(徽宗) 때 내부(內府)에 소장되어 있던 고래(古來)의 묵적(墨迹)을 모아 제왕(帝王)의 서(書), 전예(篆隷), 정서(正書), 행서(行書), 초서(草書)를 수록하고, 다음으로 분서(分書)를 수록하였다.
서설(書說) : 당나라 위속(韋續)이 찬한 것이다.
서화사(書?史) : 명나라 진계유(陳繼儒)가 찬한 것으로, 1권이다.
패문재서화보(佩文齋書?譜) : 청나라 강희제(康?帝)가 칙명을 내려 찬한 것으로, 100권이다. 서화(書?)에 관한 평론과 전기를 모아 수록하였다.
환우방비록(?宇訪碑錄) : 청나라 손성연(孫星衍)이 찬한 것으로, 12권이다. 자신이 목도한 역대 비갈(碑碣)을 시대별로 나누어 기술하고 서체(書體)와 소재지를 주석하였다.
정관공사화사(貞觀公私?史) : 당나라 배효원(裴孝源)이 찬한 것으로, 1권이다. 수실(隋室)에 소장되어 있던 그림 가운데서 당나라 정관(貞觀) 연간까지 남아 있던 그림에 대해 먼저 그림의 이름을 기술하고 그다음에 작자의 이름을 기술하였다.
당조명화록(唐朝名?錄) : 당나라 주경원(朱景元)이 찬한 것으로, 1권이다. 화가(?家)를 신(神), 묘(妙), 능(能), 일(逸) 4품으로 나누어 기술하였다.
화계(?繼) : 송나라 등춘(鄧椿)이 찬한 것으로, 10권이다. 당나라 장언원(張彦遠)의 《역대명화기(歷代名?記)》와 송나라 곽약허(郭若虛)의 《도화견문지(圖?見聞志)》의 뒤를 이어서 지었으므로 《화계》라 이름하였다. 희령(?寧) 7년에서 건도(乾道) 3년까지의 화가 219인에 대해 인명과 그림별로 나누어서 기술하였으며, 자신이 본 명적(名蹟)과 그림에 관련된 잡설(雜說)을 수록하였다.
와유록(臥游錄) : 송나라 여조겸(呂祖謙)이 찬한 것으로, 1권이다. 사전(史傳)에 실려 있는 고금인(古今人)과 경승처(境勝處)에 대해 기술하였다.
화감(?鑑) : 원나라 탕후(湯?)가 찬한 것으로, 1권이다. 삼국 시대부터 원나라 때까지의 그림에 대해 기술하고 아울러 외국의 그림과 잡론(雜論)도 기술하였으며, 또 필적을 가지고 진위를 판별하기도 하였다. 미불(米?)의 《화사(?史)》와 내용이 비슷하다.
도화견문지(圖?見聞志) : 북송 때 곽약허(郭若虛)가 찬한 것이다. 장언원(張彦遠)의 《역대명화기(歷代名?記)》에 이어 당말(唐末)에서 북송 중기에 이르는 회사(繪事)를 기록한 책으로, 총 6권이다. 제1권은 화론(?論), 2권에서 4권은 기예(紀藝), 5권은 고사습유(故事拾遺), 6권은 근사(近事)를 서술하고 있다.
익주명화록(益州名?錄) : 송나라 황휴복(黃休復)이 찬한 것으로, 3권이다. 《성도명화기(成都名?記)》라고도 한다. 당나라 건원(乾元) 연간에서 송나라 건덕(乾德) 연간까지 촉중(蜀中)의 화가 58인에 대해 일(逸), 신(神), 묘(妙), 능(能) 4품으로 나누어 기술하였다.
화사회요(?史會要) : 명나라 김뢰(金賚)가 찬한 것으로, 5권이다.
역대명화기(歷代名?記) : 당나라 선종(宣宗) 대중(大中) 초년에 장언원(張彦遠)이 저술한 중국의 화론(?論)과 화사(?史)에 관한 책으로, 총 10권이다.
운연과안록(雲烟過眼錄) : 송나라 주밀(周密)이 찬한 것으로, 총 4권이다. 자신이 본 서화(書?)와 고기(古器)에 대해 품평한 것이다.
단청기(丹靑記)
연사(硯史) : 송나라 미불(米?)이 찬한 것으로, 1권이다. 26종의 벼루에 대해 기술하였다.
묵사(墨史) : 원나라 육우(陸友)가 찬한 것으로, 2권이다. 먹을 잘 만드는 자 150여 명의 사적을 모아 기술하였으며, 고려(高麗), 거란(契丹), 서역(西域)의 먹에 대해서도 언급하였고, 끝 부분에 먹에 대한 잡설(雜說)을 붙였다.
오씨인보(吳氏印譜)
본초경(本草經) : 신농씨(神農氏)가 지은 것이라고 전해지는데, 대개 후한 때에 이루어진 것이다. 《본초(本草)》라고도 한다.
명의별록(名醫別錄) : 찬자는 미상이며, 도홍경(陶弘景)이 지은 것이라는 설이 있다. 7권으로, 대략 위진(魏晉) 때 완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원본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명의별록주(名醫別錄註) : 《명의별록》에 대한 주석이다.
사성본초(四聲本草) : 오대(五代) 때 소병(蕭炳)이 찬한 것으로, 5권이다. 《본초(本草)》의 약명을 사성(四聲)으로 구분하여 기술해 검색하기에 편하게 하였다.
해약본초(海藥本草) : 전촉(前蜀)의 이순(李珣)이 찬한 것으로, 6권이다. 이 책이 완성된 시기는 미상이나 대략 전촉 때 완성되었으며, 원본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영해(嶺海)에서 생산되는 여러 종류의 약재에 대하여 잡다하게 기술하였다.
본초습유(本草拾遺) : 당나라 개원(開元) 연간에 진장기(陳藏器)가 찬한 것으로, 10권이다. 원본은 일찍 없어졌는데, 《가우본초(嘉祐本草)》에 의거하여 보면 서례(序例) 1권, 습유(拾遺) 6권, 해분(解紛) 3권인 것을 알 수가 있다. 692종의 약물에 대해 기술하였다.
남해약보(南海藥譜) : 후영극(侯寧極)이 찬한 것이다.
당본초(唐本草) : 당나라 이세적(李世勣) 등이 고종 현경(顯慶) 4년에 명을 받아 찬한 것으로, 20권이다.
개보본초(開寶本草) : 송나라 태조 개보(開寶) 연간에 마지(馬志) 등이 찬한 것으로, 21권이다.
제가본초(諸家本草) : 일화자(日華子)가 찬한 것이다.
본초도경(本草圖經) : 송나라 소송(蘇頌)이 찬한 것이다.
본초연의(本草衍義) : 송나라 구종석(寇宗奭)이 찬한 것으로, 20권이다. 정화(政和) 연간에 완성하였다. 1권에서 3권까지는 서례(序例)와 진찰하는 데 알아야 할 주의 사항 등을 기술하였고, 4권에서 20권까지는 《증류본초(證類本草)》를 대본으로 삼아 각가(各家)의 설과 자신의 경험을 참고하여 수정하고 보완하였다.
대관본초(大觀本草) : 송나라 조효충(曹孝忠) 등이 정화(政和) 6년에 찬한 것으로, 32권이다.
약성본초(藥性本草) : 당나라 견권(甄權)이 찬한 것으로, 4권이다. 약재의 성질과 맛에 대해 상세하게 기술하였다.
일용본초(日用本草) : 원나라 오서(吳瑞)가 찬한 것으로, 8권이다.
본초몽전(本草蒙筌) : 명나라 진가유(陳嘉猷)가 찬집(纂輯)한 것으로, 12권이다. 권수(卷首)에 역대 명의도설(名醫圖說)과 약물총론(藥物總論)을 수록하였고, 1권에서 12권까지는 742종의 약물을 나누어서 기술하였다.
본초강목(本草綱目) : 명대(明代)의 본초(本草) 학자인 이시진(李時珍)이 30년간에 걸쳐 저술하여 1596년에 완성한 책으로, 총 52권이다. 약용(藥用)으로 쓰이는 대부분의 것을 자연 분류를 주로 하여 분류하였으며, 총 1871종의 약재를 망라하고 있다.
남주이물기(南州異物記) : 서표(徐表)가 찬한 것이다.
유씨국보(劉氏菊譜) : 송나라 유몽(劉蒙)이 찬한 것으로, 1권이다. 명국(名菊) 35종에 대하여 기술하였다.
범씨국보(范氏菊譜) : 송나라 범성대(范成大)가 찬한 것으로, 1권이다. 범촌(范村)에 있는 국화 36종에 대해 기술하였다.
죽보(竹譜) : 청나라 진정(陳鼎)이 찬한 것이다.
화경(花鏡) : 진호자(陳昊子)가 찬한 것이다.
육가화사(六街花事)
해어(海語) : 명나라 황충(黃衷)이 찬한 것으로, 3권이다. 뱃사람들에게 그 나라의 산천과 풍속을 물어 기술한 것이다.
이어도찬(異魚圖贊) : 명나라 양신(楊愼)이 찬한 것으로, 4권이다. 어도(魚圖) 3권에는 87종에 86조의 찬(贊)을 수록하였고, 해착소(海錯疏) 1권에는 35종에 찬 30조를 수록하였다.
복기(卜記) : 왕굉(王宏)이 찬한 것이다.
보장론(寶藏論) : 승(僧) 통본(通本)이 찬한 것이다.
천지(泉志) : 송나라 홍준(洪遵)이 찬한 것으로, 15권이다. 역대의 전폐(錢幣)를 9품으로 나누어 그림으로 열거하여 수록하였다.
전보(錢譜) : 송나라 동유(董?)가 찬한 것으로, 1권이다.
여홍여지(女紅餘志) : 용보(龍輔)가 찬한 것이다.
농정전서(農政全書) : 청나라 서광계(徐光啓)가 찬한 것으로, 60권이다. 농본(農本) 3권, 전제(田制) 2권, 농사(農事) 6권, 수리(水利) 9권, 농기(農器) 4권, 수예(樹藝) 6권, 잠상(蠶桑) 4권, 잠상광류(蠶桑廣類) 2권, 종식(種植) 4권, 목양(牧養) 1권, 황정(荒政) 18권, 수(首) 1권이다.
식품(食品) : 고렴(高濂)이 찬한 것이다.
주소사(酒小史) : 주백인(朱伯仁)이 찬한 것이다.
반유십이합설(飯有十二合說) : 장영(張英)이 찬한 것이다.
굉기주(?記注) : 정해(鄭?)가 찬한 것이다.
박물지(博物志) : 진(晉)나라 장화(張華)가 찬한 것으로, 10권인데, 실은 원본이 없어져 후인이 다시 찬집한 것이다. 고대로부터 전해 오는 이경(異境)과 기물(奇物)을 집록(集錄)하였다.
속박물지(續博物志) : 송나라 이석(李石)이 찬한 것으로, 10권이다. 《박물지》를 보충한 것이다.
습유기(拾遺記) : 진(秦)나라의 방사(方士) 왕가(王嘉)가 찬한 것으로, 총 10권이다. 본래 19권 220편이었으나 부진(符秦) 말기에 산일된 것을 양(梁)나라 소기(蕭綺)가 모아 10권으로 편집하였다. 9권까지는 복희(伏羲), 신농씨(神農氏)에서 진(晉)나라 때까지의 유사(遺事)를 기록하였으며, 마지막 1권은 곤륜산(崑崙山), 구선산(九仙山) 등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내용이 황탄하여 사서(史書)와 맞지 않는 점이 많다.
술이기(述異記) : 양(梁)나라 임방(任昉)이 찬한 것으로, 2권이다. 여러 가지 소설(小說)을 모아 만든 것으로, 내용이 거칠고 잡되다.
견이기(甄異記) : 진(晉)나라 대조(戴祚)가 찬한 것으로, 3권이다. 《견이전(甄異傳)》이라고도 한다. 이문(異聞)을 집록한 것이다.
유양잡조(酉陽雜俎) : 당나라의 단성식(段成式)이 찬한 것으로, 본집 20권에 속집 10권이다. 충지(忠志), 예이(禮異), 천지(天咫) 등 30편으로 나누어 기술하였는데, 괴이한 내용이 많이 들어 있다.
운선잡기(雲仙雜記) : 당나라 풍지(馮贄)가 찬한 것으로, 총 10권이며, 고금의 일사(逸事)를 두루 수록하고 있다.
운곡잡기(雲谷雜記) : 송나라 장호(張淏)가 찬한 것으로, 4권이다. 여러 사람의 저술에 대해 고증하였다.
척이기(?異記) : 이준(李濬)이 찬한 것이다.
운계우의(雲溪友議) : 당나라 범터(范攄)가 찬한 것으로, 3권이다. 중당(中唐) 시대 이후의 잡사(雜事)에 대해 기술하였는데, 대부분이 시화(詩話)이다.
두양잡편(杜陽雜編) : 당나라의 소악(蘇?)이 찬한 전기집(傳奇集)으로 3권이다. 당나라 대종(代宗) 광덕(廣德) 원년에서 의종(懿宗) 함통(咸通) 14년까지의 진기한 이야기를 기록하였다.
영표녹이(嶺表錄異) : 당나라 유순(劉恂)이 찬한 것으로, 3권이다. 당나라 남해(南海)의 기후와 풍속, 지리, 교통 등에 대해 기록하였다.
수당가화(隋唐嘉話) : 당나라 유송(劉?)이 찬한 것으로, 3권이다. 수나라와 당나라의 일사(逸事)를 기록하였다.
호궐록(壺闕錄) : 태행산인(太行山人)이 찬한 것이다.
철위산총담(鐵圍山叢談) : 송나라 채조(蔡?)가 찬한 것으로, 6권이다. 건덕(建德) 연간에서 건염(建炎) 연간까지 200여 년간의 일사(逸事)를 기술하였다.
화만록(??錄) : 송나라 장순민(張舜民)이 찬한 것으로, 1권이다. 송나라의 잡사(雜事)를 기술하였다.
손공담포(孫公談圃) : 송나라 손승(孫升)이 찬한 것으로, 3권이다.
부훤잡록(負暄雜錄)
성사미담(盛事美談)
삼류헌잡지(三柳軒雜識) : 정계(程棨)가 찬한 것이다.
묵객휘서(墨客揮犀) : 송나라 팽승(彭乘)이 찬한 것으로, 10권이다. 송나라의 유문(遺聞), 일사(逸事) 및 시화(詩話), 문평(文評)에 대해 기술하였다.
휘진록(揮塵錄) : 송나라 왕명청(王明淸)이 찬한 것으로, 전록(前錄) 4권, 후록(後錄) 11권, 삼록(三錄) 3권, 여화(餘話) 2권으로 되어 있다. 조정의 고사(故事)를 기술하였다.
귀이록(貴耳錄) : 송나라 장단의(張端義)가 찬한 것으로, 3권이다. 1권과 2권에는 조정의 일사(逸事)와 시화(詩話), 고증(考證)을 기술하였고, 3권에는 쇄문(?聞)을 기술한 것이 많으며, 신괴(神怪)에 대한 것도 기술하였다.
견문록(見聞錄) : 서악(徐岳)이 찬한 것이다.
면수연담(?水燕談) : 송나라 왕벽지(王闢之)가 찬한 것으로, 10권이다. 소흥(紹興) 이전의 잡사(雜事)를 15류(類) 360여 조로 나누어 기술하였다.
과보문견록(果報聞見錄) : 양식부(楊式傅)가 찬한 것이다.
담원(談苑) : 송나라 공평중(孔平仲)이 찬한 것으로, 4권이다. 여러 가지 서책에서 뽑아 찬집하였으며, 잡사(雜事)에 대해 기술하였다.
현혁편(賢奕編) : 유원경(劉元卿)이 찬한 것이다.
가세구문(家世舊聞) : 육유(陸游)가 찬한 것이다.
석림연어(石林燕語) : 송나라 섭몽득(葉夢得)이 찬한 것으로, 10권이다. 장고(掌故)에 관한 기술이 많고, 특히 관제(官制)와 과목(科目)에 대해 자세하게 기록하여 사전(史傳)에 빠진 부분을 많이 보충하였다.
피서녹화(避暑錄話) : 송나라 섭몽득(葉夢得)이 찬한 것으로, 2권이다.
유환기문(游宦記聞) : 송나라 장세남(張世南)이 찬한 것으로, 10권이다. 관직에 있는 동안에 보고 들은 잡사를 109조로 나누어 수록하였다.
문견전록(聞見前錄) : 송나라 소백온(邵伯溫)이 찬한 것으로, 20권이다. 앞의 16권은 태조(太祖) 이래의 고사(故事)를 기록하였고, 18권부터는 소옹(邵雍)의 언행을 기술하였다.
문견후록(聞見後錄) : 송나라 소박(邵博)이 찬한 것으로, 30권이다. 《문견전록》의 뒤를 이어서 지은 것이며, 경의(經義), 사론(史論), 시화(詩話) 등을 첨입하였다.
사륙담진(四六談塵) : 송나라 사급(謝伋)이 찬한 것으로, 1권이다. 사륙문을 쓰는 법을 기술하였다.
계신잡지(癸辛雜識) : 송말(宋末) 원초(元初)에 주밀(周密)이 찬한 것으로, 전집ㆍ후집 각 1권, 속집ㆍ별집 각 2권이다. 남송 말기에서 원나라 초기의 사회상을 아는 데 많은 참고가 된다.
청이록(淸異錄) : 송나라 도곡(陶穀)이 찬한 것으로, 2권이다. 당나라와 오대(五代)의 신기한 말을 모아 37문(門)으로 나누어서 수록하였다.
옹유한평(甕?閑評) : 송나라 원문(袁文)이 찬한 것으로, 8권이다. 경사(經史), 천문(天文), 지리(地理), 인사(人事) 등으로 나누어 고증하였다.
연번로속집(演繁露續集) : 송나라 정대창(程大昌)이 찬한 것으로, 6권이다. 동중서(董仲舒)의 《춘추번로(春秋繁露)》에 대해 의심이 나서 지은 《연번로(演繁露)》의 속집으로, 제도(制度), 문류(文類), 시장(詩章), 담조(談助) 4부문으로 나누어 기술하였다.
동천청록(洞天淸錄) : 송나라 조희곡(趙希鵠)이 찬한 것으로, 1권이다. 고기(古器), 고화(古?)에 대해 변증한 것으로, 감식가(鑑識家)의 좋은 지침서가 된다.
청허잡저(淸虛雜著) : 송나라 왕공(王鞏)이 찬한 것으로, 1권이다. 《청허거사수수잡록(淸虛居士隨手雜錄)》이라고도 한다.
연익이모록(燕翼貽謀錄) : 송나라 왕영(王?)이 찬한 것으로, 5권이다. 건륭(建隆) 연간에서 가우(嘉祐) 연간까지의 흥혁(興革)과 득실(得失)을 126조로 나누어 상세히 기술하였다.
인기잡지(隣幾雜志) : 송나라 강휴복(江休復)이 찬한 것으로, 1권이다. 당시의 일사(逸事)에 대해 기술하였으며, 잡설도 수록하였다. 《강인기잡지(江隣幾雜志)》, 《가우잡지(嘉祐雜志)》라고도 한다.
의각료잡기(?覺寮雜記) : 송나라 주익(朱翌)이 찬한 것으로, 상하 2권으로 되어 있는데, 상권에는 시화(詩話), 하권에는 잡론이 서술되어 있다.
동파지림(東坡志林) : 송나라 소식(蘇軾)이 찬한 것으로, 5권이다. 잡설(雜說)에 관한 글을 수록하였다.
우간(寓簡) : 송나라 심작철(沈作喆)이 찬한 것으로, 10권이다.
제동야어(齊東野語) : 송나라 주밀(周密)이 찬한 것으로, 20권이다. 남송의 구사(舊事)에 대해 기록한 것이 많아 사전(史傳)에 빠진 것을 보충할 수 있다.
이명기(異名記)
옥호청화(玉壺淸話) : 송나라 승(僧) 문형(文瑩)이 찬한 것으로, 총 10권이다. 잡사를 기록하였으며, 《옥호야사(玉壺野史)》라고도 한다.
묵장만록(墨莊漫錄) : 송나라 장방기(張邦基)가 찬한 것으로, 4권이다. 잡사(雜事)에 대해 고증한 것인데, 괴이한 내용이 많이 들어 있다.
몽계필담(夢溪筆談) : 송나라 심괄(沈括)이 찬한 것으로, 26권이다. 고사(故事), 변증(辨證), 악률(樂律), 상수(象數), 인사(人事), 관정(官政), 권지(權智), 예문(藝文), 서화(書?), 기예(技藝), 기용(器用), 신기(神奇), 이사(異事), 유오(謬誤), 기학(譏謔), 잡지(雜志), 약의(藥議) 등 17부문으로 나누어 기술하였다.
보필담(補筆談) : 송나라 심괄이 찬한 것으로, 2권이다. 《몽계필담》을 이어 찬한 것이다.
이원(異苑) : 육조 때 송나라 유경숙(劉敬叔)이 찬한 것으로, 10권이다. 신기하고 괴이한 일에 대해 기술하였다.
갑을잉언(甲乙剩言) : 명나라 호응린(胡應麟)이 찬한 것으로, 1권이다.
철경록(輟耕錄) : 명나라 도종의(陶宗儀)가 찬한 것으로, 30권이다. 원나라의 법제와 지정(至正) 연간의 병란(兵亂)에 대해 기술하였다.
청파잡지(淸波雜志) : 송나라 주휘(周煇)가 찬한 것으로, 12권이며, 별지(別志) 3권이다. 송나라 사람들에 관한 잡사(雜事)를 기록하였다.
산방수필(山房隨筆) : 원나라 장자정(蔣子正)이 찬한 것으로, 1권이다. 송나라 말기에서 원나라 초기까지의 사실을 기술하였다.
삼재조이(三才藻異) : 도수충(屠粹忠)이 찬한 것이다.
노사(路史) : 명나라 서위(徐渭)가 찬한 것으로, 2권이다.
구조야담(九朝野談)
오잡조(五雜組) : 명나라 사조제(謝肇?)가 찬한 것으로, 16권이다. 천(天), 지(地), 인(人), 물(物), 사(事) 다섯 부문으로 나누어 잡사를 기술하였다.
원시비서(原始?書)
이사략(夷事?)
태평청화(太平淸話) : 명나라 진계유(陳繼儒)가 찬한 것이다.
이고록(?古錄) : 명나라 진계유가 찬한 것으로, 4권이다. 서화(書?), 비첩(碑帖), 고완(古玩)에 대한 잡기(雜記)이며, 평론과 상감(賞鑑) 및 유문(遺聞), 일사(逸事)도 기술하였다.
언폭담여(偃曝談餘) : 명나라 진계유가 찬한 것으로, 2권이다.
복수전서(福壽全書)
소하록(銷夏錄) : 명나라 진계유(陳繼儒)가 찬한 것으로, 4권이다.
단연록(丹鉛錄) : 명나라 양신(楊愼)이 찬한 것으로, 여록(餘錄), 속록(續錄), 적록(摘錄), 총록(總錄) 4종에 총 69권이다. 천문(天文), 지리(地理), 시서(時序), 화목(花木) 등 26부문으로 나누어 기술하였다.
전거을기(田居乙記) : 명나라 방대진(方大鎭)이 찬한 것이다.
농전여화(農田餘話) : 장곡진일(長谷眞逸)이 찬한 것이다.
예원치언(藝苑?言) : 명나라 왕세정(王世貞)이 찬한 것으로, 총 6권이다. 고금의 시를 논한 것으로, 서창곡(徐昌穀)의 《담예론(談藝論)》, 양신(楊愼)의 《시화(詩話)》, 엄우(嚴羽)의 《창랑시화(滄浪詩話)》를 보충한 것이다.
완위여편(宛委餘編) : 명나라 왕세정이 찬한 것으로, 19권이다.
담수(談藪) : 송나라 방원영(龐元英)이 찬한 것으로, 1권이다.
이담(耳譚) : 명나라 왕동궤(王同軌)가 찬한 것으로, 15권이다. 《상심수어(賞心粹語)》라고도 한다.
춘풍당수필(春風堂隨筆) : 명나라 육심(陸深)이 찬한 것으로, 《엄산외집(儼山外集)》 속에 들어 있다.
금대기문(金臺記聞) : 명나라 육심이 찬한 것으로, 1권이다. 《엄산외집》 속에 들어 있다.
봉창일록(蓬窓日錄) : 명나라 진전지(陳全之)가 찬한 것으로, 8권이다.
봉창속록(蓬窓續錄) : 풍시가(馮時可)가 찬한 것이다.
고반여사(考槃餘事) : 명나라 도륭(屠隆)이 찬한 것으로, 1권이다.
격고론(格古論) : 명나라 조소(曹昭)가 찬한 것으로, 13권이다. 동기(銅器), 고화(古?), 묵적(墨迹), 비첩(碑帖), 고연(古硯), 요기(窯器), 진기(珍奇), 금철(金鐵), 칠기(漆器), 기수(綺繡), 이목(異木), 이석(異石) 등 13문(門)으로 나누고 각 문마다 조목별로 나누어 고금 명기(名器)의 우열과 진가(眞假)를 서술하였다.
작몽록(昨夢錄) : 송나라 강예지(康譽之)가 찬한 것으로, 1권이다. 북송(北宋)의 일사(逸事)를 기술하였다.
전신록(傳信錄)
현람(玄覽) : 명나라 주모위(朱謀?)가 찬한 것으로, 8권이다.
현중기(玄中記)
수중금(袖中錦)
용당소품(湧幢小品) : 명나라 주국정(朱國禎)이 찬한 것으로, 32권이다.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하였으며, 간간이 고증하기도 하였다.
자가록(資暇錄) : 당나라 이광예(李匡乂)가 찬한 것으로, 3권이다. 옛글에 대해 고증하였다.
만보전서(萬寶全書) : 주문환(朱文煥)이 찬한 것이다.
장거유서(莊渠遺書) : 명나라 위교(魏校)가 찬한 것으로, 12권이다.
등단필구(登壇必究) : 명나라 왕명학(王鳴鶴)이 찬한 것으로, 40권이다. 천문(天文), 옥력(玉曆), 태을(太乙), 기문(奇門), 육임(六壬), 지리(地理) 등의 항목으로 나누어 기술하였다.
서청고감(西淸古鑑) : 청나라 건륭(乾隆) 14년에 양시정(梁詩正) 등이 명을 받아 찬한 것으로, 40권이며, 부록으로 전록(錢錄) 16권이 있다. 내부(內府)에 소장되어 있는 옛날의 정(鼎), 이(?), 병(?), 감(鑑) 등에 대하여 모양새와 크기 등을 설명하였다.
강희기가격물론(康?幾暇格物論)
인수옥서영(因樹屋書影) : 청나라 주량공(周亮工)이 찬한 것으로, 총 10권이다.
쌍괴잡초(雙槐雜抄) : 명나라 황유(黃楡)가 찬한 것이다.
동경몽화록(東京夢華錄) : 북송(北宋)의 수도(首都)인 변경(?京)의 번화한 모습을 기록한 책으로, 1147년에 저술되었으며, 총 10권이다. 송나라 맹원로(孟元老)의 저술이라 하는데, 작자의 본명과 전기(傳記)는 미상이다.
유계외전(留溪外傳) : 청나라 진정(陳鼎)이 찬한 것이다.
춘저기문(春渚紀聞) : 송나라 하원(何?)이 찬한 것으로, 잡기(雜記) 5권, 동파사실(東坡事實), 시사사략(詩詞事?), 잡서금사(雜書琴事), 기연(記硯), 기단약(記丹藥) 각 1권, 총 10권이다.
현식록(賢識錄) : 명나라 육익(陸?)이 찬한 것이다.
규거지(?車志) : 송나라 곽단(郭彖)이 찬한 것으로, 6권이다. 기이한 일에 대하여 기술하였다.
춘명몽여록(春明夢餘錄) : 청나라 손승택(孫承澤)이 찬한 것으로, 70권이다. 춘명(春明)은 금문(禁門)의 이름으로 경사(京師)를 뜻한다. 명나라의 전고(典故)를 기술하였는데, 전반부에서는 경사의 지지(地誌), 후반부에서는 직제(職制)에 관하여 기술하였다.
지북우담(池北偶談) : 청나라 왕사정(王士禎)이 찬한 것으로, 36권이다. 빈객들의 담화를 기록한 것으로, 담고(談故), 논헌(論獻), 담예(談藝), 담이(談異) 4편으로 기술하였다.
향조필기(香祖筆記) : 청나라 왕사정이 찬한 것으로, 총 12권이다. 강희 42, 43년에 기록하였는데, 고금의 득실에 대해 변론하고, 명물(名物)의 원류를 밝혔으며, 시사(時事)에 대해 직서(直書)하였고, 괴이한 사실에 대해서도 기록하였다.
균확우필(筠廓偶筆) : 채락(采?)이 찬한 것이다.
호연잡기(湖?雜記) : 청나라 육차운(陸次雲)이 찬한 것이다.
잠운루잡기(簪雲樓雜記) : 청나라 진상고(陳尙古)가 찬한 것이다.
온광루잡지(?光樓雜志) : 호조봉(胡兆鳳)이 찬한 것이다.
간재잡설(艮齋雜說) : 청나라 우동(尤?)이 찬한 것이다.
궁규소명록(宮閨小名錄) : 청나라 우동이 찬한 것이다.
운석재필기(韻石齋筆記) : 청나라 강소서(姜紹書)가 찬한 것으로, 2권이다. 주밀(周密)이 지은 《운연과안록(雲煙過眼錄)》을 모방하여 자신이 본 서화(書?)와 기완(器玩)에 대해 모양과 전수(傳受)한 시말(始末)을 기술하였다.
일지록(日知錄) : 명말(明末) 청초(淸初)의 경학자(經學者)인 고염무(顧炎武)가 자신이 일찍부터 독서하는 사이에 수시로 기록해 둔 짧은 논문(論文)을 모은 것으로, 총 32권이다. 1권에서 7권까지는 경서의 고증(考證), 8권에서 12권까지는 정사(政事), 13권은 풍속(風俗), 14권에서 15권까지는 예제(禮制), 16권에서 17권까지는 과거(科擧), 18권에서 21권까지는 예문(藝文), 22권에서 24권까지는 명의(名義), 25권은 고사(古事)의 진위(眞僞), 26권은 사법(史法), 27권은 주서(註書), 28권은 잡사(雜事), 29권은 병사(兵事)와 외국(外國) 관계, 30권은 천문(天文)과 술수(術數), 31권은 지리(地理), 32권은 잡고증(雜考證)으로 분류하여 편찬하였는데, 각 사항마다 그 증거를 고전(古典)에서 폭넓게 구하여 이동(異同)을 밝혔다.
추원잡패(秋園雜佩) : 청나라 진정혜(陳貞慧)가 찬한 것이다.
잠구차기(潛邱箚記) : 청나라 염약거(閻若?)가 찬한 것으로, 6권이다. 경적(經籍)에 대해 고증한 수필(隨筆)과 차기(箚記)로 이루어져 있다.
잠확유서(潛確類書) : 명나라 진인석(陳仁錫)이 찬집(纂輯)한 것으로, 120권이다. 천(天), 세시(歲時), 구우(區宇), 인륜(人倫), 방외(方外), 예습(藝習), 품수(稟受), 조우(遭遇) 등의 항목으로 나누어 기술하였다.
연감유함(淵鑑類函) : 청나라 강희제(康?帝)의 명으로 장영(張英) 등이 명나라 유안기(兪安期)가 찬한 《당유함(唐類函)》에 의거하여 고금의 고사(故事)의 내력을 밝히기 위해 편찬한 유서(類書)이다. 총 450권인데, 전체를 44문(門)으로 분류하고 그 밑에 천(天), 세시(歲時), 지(地), 제왕(帝王) 등 많은 항목을 설정하여 편찬하였다.
홍서(鴻書) : 유중규(劉仲逵)가 찬한 것이다.
유서찬요(類書纂要) : 주노(周魯)가 찬한 것이다.
미공비급(眉公??) : 명나라 진계유(陳繼儒)가 찬한 것이다.
우초신지(虞初新志) : 장조(張潮)가 찬한 것이다.
속설부(續說?) : 요안(姚安)이 찬한 것이다.
묵자(墨子) : 전국 시대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하나인 묵자학파(墨子學派)의 논문을 모은 것으로, 총 53편이다.
관자(管子) : 춘추 시대 제(齊)나라 관중(管仲)의 저작이라고 전해지나 전승(傳承)과 맞지 않는 내용이 많기 때문에 어느 한 사람이 일정한 시기에 지은 것이 아니라고 여겨진다. 총 24권이다.
포박자(抱朴子) : 진(晉)나라 갈홍(葛洪)이 찬한 것으로, 8권이다. 내편(內篇)과 외편(外篇)이 있는데, 내편은 신선술(神仙術), 토납술(吐納術) 등을 기술하였고, 외편은 시정(時政)의 득실과 인물의 장부(藏否)에 대해 기술하였다.
한비자(韓非子) : 전국 시대 말기의 법가(法家)인 한비(韓非)와 그 일파의 논저(論著) 55편을 모은 것으로, 총 20권이다.
회남자(淮南子) : 한 고조의 서자(庶子) 유장(劉長)의 아들인 유안(劉安)이 자신에게 식객(食客)으로 모인 여러 학파 학자들의 잡다한 주장을 총망라하여 편찬한 것으로, 원도(原道), 지형(地形), 병략(兵?) 등 21편이다.
여씨춘추(呂氏春秋) : 진(秦)나라의 정승인 여불위(呂不韋)가 많은 빈객(賓客)을 끌어 모아 찬한 것으로, 26권이며, 《여람(呂覽)》이라고도 한다. 8람(覽), 6론(論), 12기(紀)로 나뉘어 있으며, 20여 만 언(言)으로, 선진(先秦) 시대의 모든 지식을 총 결산하였다.
백호통(白虎通) : 한나라 반고(班固)가 찬한 것으로, 4권이다. 후한의 장제(章帝) 건초(建初) 4년에 여러 유생들이 북궁(北宮)의 백호관(白虎觀)에 모여 오경(五經)의 동이(同異)에 대해서 강론하였는데, 이를 반고가 찬집(撰集)한 것이다. 《백호통의(白虎通義)》라고도 한다.
설원(說苑) : 한나라 유향(劉向)이 찬한 것으로, 20권이다. 전현(前賢)과 선철(先哲)들의 일화(逸話)를 기술하였는데, 군도(君道), 신술(臣術), 건본(建本), 입절(立節) 등 20편이다.
잠부론(潛夫論) : 후한(後漢)의 왕부(王符)가 찬한 것으로, 10권이다. 모두 35편이며, 당시의 폐정(弊政)에 대해 통렬하게 논박하였다.
풍속통(風俗通) : 한나라 응소(應邵)가 찬한 것으로, 10권에 부록 1권이다. 《풍속통의》라고도 한다. 황패(皇覇), 정실(正失), 건례(愆禮), 과예(過譽), 십반(十反), 성음(聲音), 궁통(窮通), 사전(祀典), 괴신(怪神), 산택(山澤)으로 조목을 나누어 서술하였다.
화엄경(華嚴經) :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을 줄인 말로, 동진(東晉)의 불타발타라가 번역한 것은 60권, 당나라 실차난타가 번역한 것은 80권, 당나라 반야가 번역한 것은 40권이다.
회현기(會玄記) : 석보서(釋普瑞)가 찬한 것이다.
현담(懸談) : 당나라 석징관(釋澄觀)이 지은 것으로, 9권이다. 《화엄현담(華嚴玄談)》, 《화엄경소초현담(華嚴經疏?玄談)》, 《청량현담(淸凉玄談)》, 《대방광불화엄경소연의초(大方廣佛華嚴經疏演義?)》라고도 한다. 《화엄경수소연의초(華嚴經隋疏演義?)》 가운데서 화엄의 개설(槪說)에 관한 부분을 추려 내어 모은 책이다.
불조통기(佛祖統記) : 남송(南宋) 말기 천태종(天台宗)의 승 지반(志磐)이 찬술한 중국불교사(中國佛敎史)로, 본기 8, 세가 2, 열전 10, 잡전(雜傳) 2, 표(表) 2, 지(志) 30권, 총 54권이다.
석문정통(釋門正統) : 송나라 석종감(釋宗鑑)이 찬한 것으로, 8권이다. 천태종의 종통(宗統)을 기전체(紀傳體)에 의거하여 본기(本紀), 세가(世家), 지(志), 열전(列傳) 등 다섯 부문으로 나누어 기술하였다.
신승전(神僧傳) : 명나라 주체(朱?)가 찬한 것으로, 9권이다. 역대 불교 사전(史傳)에서 특별한 기행(奇行)이 있는 자를 뽑아 모았으며, 동한(東漢) 명제(明帝) 때부터 원나라 때 이르기까지 208명에 대해 기술하였다.
전등록(傳燈錄) : 석도원(釋道原)이 1004년에 지은 것으로, 비바시불(毘婆尸佛)에서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을 거쳐 보리달마(菩提達磨)에 이르는 인도의 전등(傳燈) 법계(法系)부터, 보리달마 이후 법안문익(法眼文益)의 법사(法嗣)에 이르는 중국의 전등 법계를 밝히면서, 1701명에 달하는 선종(禪宗)의 계보를 상세히 서술하였는데, 총 30권이며,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이라고도 한다.
속선전(續仙傳) : 남당(南唐)의 심빈(沈?)이 찬한 것으로, 3권이다. 상권에는 비승(飛昇) 16인을 수록하였고, 중권에는 은화(隱化) 12인을 수록하였으며, 하권에는 은화 8인를 수록하였다.
고시기(古詩紀) : 명나라 풍유눌(馮惟訥)이 찬한 것으로, 156권이다. 전집(前集) 10권에는 옛날의 일시(逸詩)를, 정집(正集) 130권에는 한ㆍ위(漢魏) 이후 진ㆍ수(陳隋) 이전의 시를, 외집(外集) 4권에는 신선이나 귀신의 시를, 별집(別集) 12권에는 전인들의 시화(詩話)를 수록하였다.
문선(文選) : 양(梁)나라 소통(蕭統)이 찬한 것으로, 30권이다. 주(周)나라에서 양나라에 이르기까지 1000여 년간의 작가 수백 명의 시부(詩賦)와 문장(文章) 약 800편을 모은 것으로, 현존하는 시문집(詩文集)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유주목잠(幽州牧箴) : 한나라 양웅(揚雄)이 찬한 것이다.
도정절집(陶靖節集) : 육조(六朝)의 시인인 도잠(陶潛)의 시문집으로 총 10권이다.
이태백집(李太白集) : 당나라 이백(李白)의 시문집으로, 30권에 부록 2권이다.
이태백시주(李太白詩注) : 원나라 양제현(楊齊賢)이 집주(集注)한 것으로, 25권이다.
두시전주(杜詩箋注) : 청나라 전겸익(錢謙益)이 찬한 것이다.
창려집(昌黎集) : 당나라 중기의 문장가인 한유(韓愈)의 시문집으로, 총 40권이다.
하동집(河東集) : 당나라 때의 문인인 유종원(柳宗元)의 문집으로, 총 45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옥계생집(玉溪生集) : 당나라 이상은(李商隱)의 문집으로, 3권이다.
옥계집주(玉溪集注) : 청나라 주학령(朱鶴齡)이 찬한 것이다.
전당시(全唐詩) : 청나라 때 조인(曹寅) 등이 강희제(康?帝)의 명을 받아 팽정구(彭定求) 등이 찬한 당시(唐詩)의 총집(總集)으로, 모두 900권에 목록이 12권이다. 당나라 일대 2200명의 시 4만 8000여 수가 망라되었다.
전당시주(全唐詩注)
당문수(唐文粹) : 송나라 요현(姚鉉)이 찬한 것으로, 100권이다. 부(賦), 송(頌), 찬(贊), 표(表) 등 문체에 따라 16부문으로 나누어 기술하였다.
문원영화(文苑英華) : 송나라 태종(太宗) 태평흥국(太平興國) 7년에 이방(李昉) 등이 명을 받아 찬한 것으로, 1000권이다. 소통(蕭統)의 《문선(文選)》의 뒤를 이어 지은 것으로, 체례(體例) 역시 《문선》과 비슷하다. 양(梁)나라 말기에서 당나라까지의 글을 모아 수록하였다.
임천집(臨川集) : 송나라 왕안석(王安石)이 찬한 시문집으로, 100권이다.
동파집(東坡集) : 송나라 소식(蘇軾)의 문집으로, 총 40권이다.
산곡집(山谷集) : 송나라 황정견(黃庭堅)의 시문집으로, 내집 30권, 외집 14권, 별집 20권, 사(詞) 1권, 간척(簡尺) 2권, 연보(年譜) 3권, 총 70권이다. 송나라의 임연(任淵), 사용(史容), 사계온(史季溫)이 주석하였다.
성재집(省齋集) : 송나라 주필대(周必大)가 찬한 것이다.
홍경집(鴻慶集) : 송나라 손적(孫?)의 시문집으로, 총 42권이다.
남풍집(南?集) : 송나라 증공(曾鞏)이 찬한 것으로, 53권이다. 《남풍선생원풍유고(南?先生元?類藁)》라고도 한다.
여동래집(呂東萊集) : 여조겸(呂祖謙)이 지은 것이다.
주자어류(朱子語類) : 송대(宋代)의 학자인 주자(朱子)가 생전에 문인(門人)들과 문답한 바를 같은 송대의 학자인 여정덕(黎程德)이 편집한 것으로, 총 140권이다.
현산시화(玄散詩話)
송시초(宋詩抄) : 청나라 오지진(吳之振)이 찬한 것으로, 4집(集) 93권이다. 송나라의 시를 초록하고, 각 시인의 소전(小傳)을 기술하였다.
송시기사(宋詩紀事) : 청나라 여악(??)이 찬한 것으로, 100권이다. 송나라 시인 3812명의 시를 뽑아 기술하고 작자의 소전(小傳)을 수록하고, 명가(名家)의 시와 대비하여 품평하였다.
당송시본(唐宋詩本) : 청나라 대제원(戴第元)이 찬한 것이다.
중주집(中州集) : 금나라 원호문(元好問)이 편(編)한 것으로, 10권이며, 《중주악부(中州樂府)》 1권이 붙어 있다. 금나라의 시를 나누어서 10집으로 만들고, 작자의 이름 아래에 소전을 기술하였으며, 가끔 그와 관련된 일사(逸事)를 기술하기도 하였다.
유산집(遺山集) : 금나라 원호문이 찬한 것으로, 40권이다. 시 14권, 문 26권으로 되어 있다.
담연거사집(湛然居士集) : 원나라 야율초재(耶律楚材)가 찬한 것으로, 14권이다.
송설재집(松雪齋集) : 원(元)나라 조맹부(趙孟?)가 찬한 것으로, 본집 10권, 외집 1권, 속집 1권이다.
안아당집(安雅堂集) : 원나라 진려(陳旅)가 찬한 것으로, 13권이다.
도원학고록(道園學古錄) : 원나라 우집(虞集)이 찬한 것으로, 50권이다. 재조고(在朝稿), 응제고(應制稿), 귀전고(歸田稿), 방외고(方外稿) 4편으로 나누어져 있다.
원시선(元詩選) : 원나라 고사립(顧嗣立)이 편한 것으로, 권수(卷首) 1권, 초집(初集) 68권, 이집 26권, 삼집 16권, 총 111권이다. 권수에는 문제(文帝), 순제(順帝)의 시를 수록하고, 초집에서 삼집까지는 각각 100명의 시인을 수록하였다. 체례는 청나라 오지진(吳之振)이 찬한 《송시초》를 모방하였다.
원문류(元文類) : 원나라 소천작(蘇天爵)이 찬한 것으로, 70권에 목록이 3권이다. 원통(元統) 2년에 완성하였으며, 원나라 초기에서 연우(延祐) 연간까지 작가의 글을 부(賦), 소(騷), 악장(樂章) 등 43부문으로 나누어 수록하였다.
중봉행록(中峯行錄) : 원나라의 승(僧) 명본(明本)이 찬한 것이다.
중봉광록(中峯廣錄) : 원나라의 승 명본이 찬한 것으로, 30권이다. 《중봉화상광록(中峯和尙廣錄)》이라고도 한다.
송학사전집(宋學士全集) : 명나라 송렴(宋濂)이 찬한 것으로, 36권이다.
화천집(華川集) : 명나라 왕위(王褘)의 문집으로, 전집과 후집을 합해 25권이다.
성재신록(誠齋新錄) : 명나라 주헌왕(周憲王)이 지은 것으로, 3권이다.
엄주속고(?州續稿) : 명나라 왕세정(王世貞)이 찬한 것으로, 207권이다. 부(賦), 시(詩), 문(文) 3부문으로 나누어 수록하였다.
엄산별집(?山別集) : 명나라 왕세정이 찬한 것으로, 100권이다. 명나라의 전고(典故)에 대해 기술하였으며, 성사술(盛事述) 5권, 이전술(異典述) 10권, 기사술(奇事述) 4권, 사승고오(史乘攷誤) 11권, 표(表) 34권, 고(考) 36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소한산집(小寒山集) : 명나라 진함휘(陳函煇)가 찬한 것이다.
무몽원집(無夢園集) : 명나라 진인석(陳仁錫)이 찬한 것이다.
허문목집(許文穆集) : 명나라 허국(許國)이 찬한 것이다.
서애집(西厓集) : 명나라 이동양(李東陽)이 찬한 것이다.
진천집(震川集) : 명나라 귀유광(歸有光)이 찬한 문집으로, 30권에 별집이 10권이다.
조선부(朝鮮賦) : 명나라 동월(董越)이 찬한 것으로, 1권이다. 동월이 성종 19년에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나왔다가 돌아간 다음 명종 때 간행하였다. 조선의 풍토(風土)에 대해 부(賦)로 읊었으며, 본인이 주석하였다.
중주집(中州集) : 고극정(高克正)이 찬한 것이다.
북해집(北海集) : 명나라 풍기(馮琦)가 찬한 것이다.
승암집(升菴集) : 명나라 양신(楊愼)이 찬하고 장사패(張士佩)가 편한 것으로, 81권이다. 부(賦)와 잡문(雜文) 11권, 시 29권, 외집 41권인데, 외집은 잡기(雜記)이다.
창하집(蒼霞集) : 명나라 섭향고(葉向高)가 찬한 것이다.
초학집(初學集) : 청나라 전겸익(錢謙益)이 찬한 것으로, 110권이다. 시 20권, 문 80권, 태조실록변증(太祖實錄辨證) 5권, 독두소전(讀杜小箋) 3권, 이전(二箋) 2권으로 되어 있다. 명나라 말기에 찬한 것이다.
유학집(有學集) : 청나라 전겸익이 찬한 시문집으로, 50권이다. 청나라에 들어와서 찬한 것으로, 청나라에 저촉되는 내용이 많아서 금서(禁書) 되었다.
목재시집주(牧齋詩集注) : 청나라 전증왕(錢曾王)이 목재(牧齋) 전겸익(錢謙益)의 시에 대해 주석한 것이다.
육연재이필(六硏齋二筆) : 명나라 이일화(李日華)가 찬한 것으로, 4권이다. 서화(書?)에 대해 논하였다.
용대집(容臺集) : 명나라 동기창(董其昌)이 찬한 것이다.
대필산방집(大泌山房集) : 명나라 이유정(李維楨)이 찬한 것이다.
황화집(皇華集) : 명나라의 사신이 조선에 왔을 때 조선측의 접대관(接待官)과 화답한 시집(詩集)이다. 영조 9년에 간행하였으며, 총 50권 25책이다.
명시선(明詩選) : 명나라 이반룡(李攀龍) 등이 찬한 것으로, 13권이다. 원래의 이름은 《황명시선(皇明詩選)》이다.
열조시집(列朝詩集) : 청나라 전겸익이 찬한 것으로, 81권이다. 명나라 열조(列朝)의 시를 수록하였다.
명시종(明詩綜) : 청나라 주이존(朱?尊)이 찬한 것으로, 100권이다. 명나라 홍무(洪武) 연간에서 숭정(崇禎) 연간까지의 시를 모으고 그와 관련되는 시화(詩話)를 붙인 것이다.
명시별재(明詩別裁) : 청나라 심덕잠(沈德潛)과 주준(周準)이 함께 찬한 것으로, 12권이다. 314명의 시 1000여 수를 수록하고 있다.
조선시선(朝鮮詩選) : 남방위(藍芳威)가 찬한 것이다.
명문기상(明文奇賞) : 명나라 진인석(陳仁錫)이 찬한 것이다.
삼속고문기상(三續古文奇賞) : 명나라 진인석이 찬한 것으로, 53권이다. 각 문체별로 수록하였다.
황명문선(皇明文選) : 명나라 왕종원(汪宗元)이 찬한 것이다.
경세굉사(經世宏辭) : 명나라 왕석작(王錫爵)이 찬한 것이다.
강희어제집(康?御製集)
담원집(澹園集) : 청나라 서건학(徐乾學)이 찬한 것이다.
복숙산방집(復宿山房集) : 명나라 왕가병(王家屛)이 찬한 것이다.
회암집(悔菴集) : 청나라 우동(尤?)이 찬한 것이다.
서당여집(西堂餘集) : 청나라 우동이 찬한 것이다.
서당잡조(西堂雜組) : 청나라 우동의 시문을 모아 기록한 것으로, 1집 8권, 2집 8권, 3집 8권, 시집(詩集) 32권으로 되어 있다.
간재권고(艮齋倦藁) : 청나라 우동이 찬한 것이다.
정림집(亭林集) : 명말(明末) 청초(淸初)의 경학자인 고염무(顧炎武)가 지은 것으로, 그의 경학(經學), 사학(史學), 정치(政治), 도덕(道德), 음운학(音韻學), 금석 문자(金石文字) 등에 대한 박학한 지식이 들어 있다. 내용은 변론(辯論) 1권, 서(序) 1권, 서(書) 2권, 기(記)와 묘지명(墓誌銘) 1권, 보유(補遺) 1권 등 총 6권이다.
서피유고(西陂類稿) : 청나라 송락(宋?)이 찬한 문집으로, 39권이다.
원서집(苑西集) : 청나라 고사기(高士奇)가 찬한 것이다.
서하집(西河集) : 청나라 모기령(毛奇齡)이 저술한 문집으로, 총 478권이다. 경집(經集)과 문집(文集)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끝 부분에 시부(詩賦)가 수록되어 있다.
청문집(靑門集) : 청나라 소장형(邵長?)이 찬한 것이다.
어양집(漁洋集) : 청나라 시인인 어양(漁洋) 왕사정(王士禎)이 저술한 것이다.
잠미집(蠶尾集) : 청나라 왕사정이 찬한 것으로, 1권이며, 《어양산인전집(漁洋山人全集)》 속에 들어 있다.
어양시화(漁洋詩話) : 청나라 왕사정이 찬한 것으로, 3권이다. 《어양산인전집》 속에 들어 있으며, 왕사정이 은거한 뒤에 지은 것으로, 근래의 시화집 가운데 으뜸이다.
용촌어록(榕村語錄) : 청나라 이광지(李光地)가 지은 것으로, 《용촌전서(榕村全書)》 속에 들어 있으며, 30권이다.
폭서정집(曝書亭集) : 청나라 주이존(朱?尊)이 찬한 것으로, 80권이다. 순치(順治) 2년에서 강희(康?) 48년까지 65년간의 시문(詩文)을 연도별로 편차(編次)하였다.
정지거시화(靜志居詩話) : 청나라 주이존이 시설(詩說)을 모아 기록한 것으로, 24권이다.
위백자집(魏伯子集) : 청나라 위제서(魏際瑞)의 문집으로, 10권이다. 임시익(林時益)이 편한 《영도삼위문집(寧都三魏文集)》 속에 들어 있다.
위숙자집(魏叔子集) : 청나라 위희(魏禧)가 찬한 것으로, 22권이며, 끝에 일록(日錄) 2권이 붙어 있다. 《영도삼위문집》 속에 들어 있다.
위흥사집(魏興士集) : 청나라 위세걸(魏世傑)의 문집으로, 6권이다. 《영도삼위문집》 속에 들어 있다.
위소사집(魏昭士集) : 청나라 위세효(魏世?)의 문집으로, 10권이다. 《영도삼위문집》 속에 들어 있다.
위경사집(魏敬士集) : 청나라 위세엄(魏世儼)의 문집으로, 10권이다. 《영도삼위문집》 속에 들어 있다.
감구집(感舊集) : 청나라 왕사정(王士禎)이 찬한 것으로, 16권이다. 저자의 사우(師友) 333인의 시 2572수를 수록하였다.
용성시화(榕城詩話) : 청나라 항세준(杭世駿)이 찬한 것으로, 3권이다. 옹정(雍正) 10년에 복건(福建)의 고관(考官)이 되었을 때 지었다. 대부분 청인들의 시에 대해 논하였고, 간간이 명인들에 대해 논하였다. 또 산천(山川)의 기담(奇談)과 기구(耆舊)들의 유사(遺事)에 대해 기술하였다.
귀우집(歸愚集) : 청나라 심덕잠(沈德潛)이 찬한 것으로, 46권이다.
장촌초당고(蔣村草堂稿) : 장형(蔣炯)이 찬한 것이다.
추가집(秋?集) : 청나라 오조건(吳兆騫)이 찬한 것이다.
이민홍광사비문(李旻洪光寺碑文)
능어동의보감서(凌魚東醫寶鑑序)

[주C-001]중국서(中國書) 목록(目錄) : 이 해동역사(海東繹史) 인용 서목(引用書目)은 원문의 인용 서목에 역자가 해설을 덧붙인 것이므로 영인 원문에서는 이 부분을 생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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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경범례(孝經凡例) : 등익근(藤益根)이 지은 것이다.
일본서기(日本書記) : 일본 나라조[奈良朝]의 황족(皇族) 궁신(宮臣)인 사인친왕(舍人親王) 등이 편찬한 현존하는 일본의 첫 관찬 사서(史書)이다. 총 30권이며, 이른바 ‘신대(神代)’ 때부터 지통천황(持統天皇)까지의 역사를 중국의 정사체(正史體)를 모방하여 한문(漢文)으로 기술하였다. 고대의 일본 문화나 한일(韓日) 관계를 밝히고, 성덕태자(聖德太子)의 정치와 불교(佛敎)의 전래 등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일본기(日本紀) : 안마려(安麻呂)가 찬한 것이다.
속일본기(續日本記) : 관야조신진도(管野朝臣眞道) 등이 편한 것으로, 40권이다. 문무천황(文武天皇) 즉위년부터 환무천황(桓武天皇) 연력(延曆) 10년까지를 편년체로 기술하였다.
일본일사(日本逸史) : 압우지(鴨祐之)가 찬한 것으로, 40권이다. 《일본후기(日本後紀)》에 빠진 부분을 보충한 것으로, 환무천황(桓武天皇) 연력(延曆) 11년 정월부터 순화천황(淳和天皇) 천장(天長) 10년 12월까지 기술하였다. 강호(江戶) 시대의 역사서이다.
일본삼대실록(日本三代實錄) : 대장선행(大藏善行)이 찬한 것이다.
일본문덕실록(日本文德實錄) : 도량향(都良香)이 찬한 것이다.
제왕편년집성(帝王編年集成)
유취일본국사(類聚日本國史) : 관원도진(管原道眞) 등이 명을 받들어서 찬한 것으로, 200권이며, 별도로 목록 2권, 제왕계도(帝王系圖) 3권이 있는데, 지금은 산실되고 61권만 남아 있다. 《육국사(六國史)》에 실려 있는 기사를 신기(神祇), 제왕(帝王), 후궁(後宮), 인(人), 세(歲) 등의 부문으로 나누어 편찬하였다.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 : 양안상순(良安尙順)이 찬한 것으로, 105권이다. 《삼재도회(三才圖會)》를 모방하여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의 사물을 모은 다음 그림을 그려서 설명하였다. 천부(天部), 천문(天文), 천상(天象), 시후(時候) 등 105부문으로 나누어 기술하였다.
이칭일본전(異稱日本傳) : 송하견림(松下見林)이 찬한 것이다.
무림전(武林傳)
정벌기(征伐記)
모리씨가기(毛利氏家記) : 모리대장(毛利大藏)이 찬한 것이다.
유마회연기(維摩會緣起)
시학침열(時學鍼?) : 고지(高志)가 찬한 것이다.
백석여고(白石餘稿) : 실직청(室直淸)이 찬한 것이다.
조래집(?徠集) : 물무경(物茂卿)이 찬한 것이다.
남포문집(南浦文集)
봉도유주(蓬島遺珠) : 조문연(晁文淵)이 찬한 것이다.
일본명가시선(日本名家詩選) : 등원병(藤元昺)이 찬한 것이다.
객관필담(客館筆談) : 목실문(木實聞)이 찬한 것이다.

[주C-001]일본서(日本書) 목록(目錄) : 이 해동역사(海東繹史) 인용 서목(引用書目)은 원문의 인용 서목에 역자가 해설을 덧붙인 것이므로 영인 원문에서는 이 부분을 생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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