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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2장 형제들의 재회와 하나님의 양심추적
본 장은 도단 사건 이후 기나긴 역경의 세월을 거쳐 애굽의 국무총리가 된 요셉이 약 20년 만에 형제들과 재회를 하는 장면이다. 요셉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했던 가문의 애굽 이주가 실현되고 있었던 것이다.
세기적 기근은 팔레스틴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야곱 가족은 큰 기근을 당하자 할 수 없이 애굽으로 양식을 사러 가게 된다. 형제들과 첫 대면을 하는 요셉은 형제들을 애굽의 정탐꾼으로 몰아세우고 형제 사이의 분열을 조장하여 그들의 인격의 성숙도를 시험해 본다.
우리는 팔렸던 자 요셉과, 팔았던 자 형제들이 20년이 지난 후 심문하는 총리와 두려워 떠는 피의자의 신분으로 만나는 장면에서 가히 인생의 아이러니를 느낀다. 또한 이는 전날 요셉이 집에서 꾼 꿈의 예언적 성취이기도 하였다.
사실 형제들과 첫 만남부터 요셉은 자신과 형제 사이의 갈등이 하나님의 섭리에 따른 것으로 생각했으며 이는 오히려 큰 축복의 계기가 된 것을 깊이 깨닫고 이미 형제들을 용서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요셉은 형제들이 미워서가 아니라 형제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내가 희생함으로 모두가 살아남을 수 있다는 진리를 깨우쳐 주기 위해 시험을 행한 것이었다.
1. 기근의 확산과 애굽으로 떠나는 요셉의 형제들
애굽의 기근 현상이 온 세상으로 확산되어 마침내 가나안 땅에 거주하는 야곱의 집안에도 영향을 미쳤다. 애굽에 양식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야곱은 아들들에게 애굽에 내려가서 양식을 구해 오라는 명령을 하였고 자식들은 애굽으로 여행을 떠난다.
지금까지 야곱과 그의 자식들은 점점 타락해 가는 가나안 땅에 머물면서 선민의 특권을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가나안 족속들과 함께 살아가는 선민에게는 모든 삶이 부담이었고 신앙은 날이 갈수록 연약하여졌다.
‘그 때에 야곱이 애굽에 곡식이 있음을 보고’
요셉이 총리직에 오른 지 8년쯤 되는 해이다. 이때 야곱의 나이는 129세 정도 되었다. 애굽에 곡식이 있다는 정보는 야곱뿐만 아니라 아들들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떤 대책을 세우지도 못하고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던 것이다.
저들은 기근에 대해 아주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며 우유부단한 태도로 일관하였다. 야곱 가정은 유목민이기 때문에 농사일에나 식량을 비축하는 일에 비교적 관심이 적었을 것이다. 유목민들은 생활의 거의 대부분을 가축에 의존하며 살고 있기 때문에 기근에 대한 대비책이 부족했을 것이며 막상 곡식이 없어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이러한 자식들의 무지에 대해 야곱은 심하게 책망하며 애굽에 내려가서 양식을 사오게 하였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흉년이 들자 애굽으로 이주해 간 적이 있었으나 야곱은 조상들처럼 자기 가족을 애굽으로 이주시킨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대신에 아들들에게 애굽으로 가서 양식을 사오라고 명령했던 것이다. 그 이유는 세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첫째, 애굽으로 전체가 이주하기에는 가족과 소유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둘째, 애굽 역시 기근이 들어 민심이 흉흉했기 때문이다.
셋째, 선조들의 역사를 볼 때 애굽은 선민들이 머무를 거주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멀리 애굽에 양식이 있다는 소식은 혹독한 기근에 처한 야곱의 일가에 한 줄기 희망의 빛이었다. 그러나 이 소식은 단지 전해들은 소식일 뿐 사실을 확증할 근거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의 판단에 의존하는 아들들은 애굽에 가기를 주저하고 머뭇거렸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늙은 야곱은 서로 관망만하고 있는 아들들에게 명한다. ‘너희는 그리로 가서 우리를 위하여 사오라. 그러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이는 당시의 기근 상태가 생사를 주장할 만큼 심각했다는 것을 나타낸다.
생명의 촌각을 다투는 일에는 주변의 상황을 저울질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없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당황하게 되고 판단이 흐려지게 되어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데 나이 많은 야곱은 어떻게 이런 현명한 판단을 한 것일까.
야곱은 아무리 기근이 심해도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위하여 피할 방도를 만들어 놓은 것을 믿었을 것이다. 그때 마침 애굽에 양식이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그 소식을 복음의 소식으로 확실하게 믿고 그 즉시 아들들에게 명하여 양식을 구하게 했던 것이다. 이처럼 갈급한 심령이 복음을 접할 때는 주저 없이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야곱 가문의 사람들을 애굽으로 이주시키기 위할 목적으로 근동 지방에 대기근을 내리셨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의 수레바퀴가 택한 백성을 중심으로 도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시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모든 재앙과 하나님의 심판은 인간 각자에게 부여된 독특한 자유 의지에 근거한 인간의 책임과 결코 무관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출발한 애굽 행은 형제 상봉이라는 놀라운 기적을 창출하게 된다.
‘야곱이 요셉의 아우 베냐민은 그의 형제들과 함께 보내지 아니하였으니’
야곱은 그의 아들 십 인을 애굽에 내려 보냈는데 그 이유는 장거리 여행에 자식들의 신변의 안전을 고려한 면도 있었을 것이며, 또한 한 번에 많은 양의 곡식을 구매해야 했기 때문이며, 애굽에서 양식을 살 때에 일인당 구매량이 정해져 있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야곱이 광야에서 들짐승에게 찢겨 죽은 것으로 알고 있는 요셉의 운명을 생각하여 그의 동생 베냐민은 보내지 아니하였다. 야곱은 아직까지도 요셉을 잊지 못하고 있으며 라헬의 마지막 소생인 베냐민을 요셉처럼 아끼고 사랑했던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야곱의 자식 사랑이 오히려 요셉의 마음에 베냐민을 걱정하는 마음으로 작용하였고 베냐민을 만나기 위한 작전을 수립함으로 형제들의 양심을 추적하는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양식 사러 간 자 중에 있으니’
얍복 나루터에서 하나님은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개명하여 주셨다. 이 이름은 특별히 하나님의 구속 역사와 관련하여 언급된 이름이다. 따라서 식량 구입을 위해 애굽으로 내려간 야곱의 아들들이 ‘이스라엘의 아들들’이라고 불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하신 원대한 구속 역사가 지금부터 서서히 시작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나타난 것은 야곱의 신앙이 영적으로 신령한 상태에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야곱은 단순히 육체적 생명의 연장을 위하여, 혹은 자식들의 생활을 위하여 양식을 사러 보낸 것이 아니었다.
야곱은 마음속에는 선민의 사상이 흐르고 있으며 자식들을 통하여 이루어나가실 하나님의 구속 사역이 중단되면 안 되기 때문에 언약 백성의 보존을 위해서 긴급 양식 후송이라는 대책을 간구한 것이다.
2. 형들을 시험하는 요셉
‘요셉의 형들이 와서 그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매’
요셉은 국무총리로서 모든 곡물의 매매를 직접 관장하고 처리하였다. 다시 말하면 내국인은 각지에서 관할 하급 공무원이 이를 집행하고 추후 보고하는 절차를 진행했으며 외국인은 누구든지 일단 요셉의 면전에서 먼저 심사를 받고 허락을 직접 득하도록 체계를 갖추었다.
이러한 요셉의 지혜는 형들과의 극적인 재회를 불러왔다. 그들은 애굽의 총리인 요셉 앞에 서자마자 땅에 엎드려 절부터 하였다. 이는 일찍이 요셉이 꾸었던 꿈을 성취시킨 것이다. 특히 ‘절하다’ 라는 말 ‘솨하’는 요셉이 꿈을 이야기하면서 ‘당신들의 곡식단이 내게 절하더이다.’ 라고 한 말과 동일한 것으로 예언이 철저히 성취되었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일점일획도 변개하지 아니하시고 철두철미하게 그대로 이루어 나가시는 분이시다.
‘엄한 소리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요셉은 형들을 단숨에 알아보았다. 그래서 그들에게 애굽 말로 말하고 형들은 히브리말로 말하였으므로 피차간에 통역을 세워 대화했던 것이다. 요셉이 애굽의 위대한 통치자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형들은 자기들 앞에 있는 총리가 요셉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애굽 사람의 단정한 용모, 능란한 애굽의 말솜씨, 통치자의 권위 있는 위엄, 거기에다 상대의 면모를 똑바로 바라볼 수 없는 상황에서 어찌 요셉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요셉은 형제들의 용모와 말투에서 한 눈에 그들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공개하지 않고 반대로 그들에게 엄하게 힐문하였다. 이러한 요셉의 행동을 혹자는 형들에게 대한 복수심이라고 하나 터무니없는 말이다.
요셉은 겉과 속이 다른 표리부동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형제들의 마음 상태를 알아보고 연로하신 아버지와 어린 동생의 안부를 진정으로 알아보기 위해 저들의 정신 상태를 시험한 것이었다.
‘엄하게’ 라고 번역한 ‘카쉐’라는 말은 ‘혹독하다’ ‘명렬하다’ ‘포학하다’ 라는 의미로 잘못을 강하게 추궁하듯이, 혹은 그들의 정체를 심하게 의심하듯이 물었던 것이다. 요셉은 형들을 질책하면서 그가 가나안 땅에서 꾼 꿈을 기억했던 것이다.
어린 나이에 형제들에게 자신감 있게 선포했던 그 꿈이 현실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요셉의 심경이 어떠했으랴.
‘너희는 정탐꾼들이라 이 나라의 틈을 엿보려고 왔느니라.’
애굽은 다른 나라에 대해 상당히 배타적인 나라였다. 아프리카에 속한 애굽이 특히 팔레스틴 쪽의 아시아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였다. 역사적으로 볼 때도 애굽은 남쪽 아프리카 지역의 국가들과 전쟁을 한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북쪽에 있는 앗수르, 바벨론, 바사, 헬라, 로마와 끊임없는 영토 전쟁을 하였으며 패권국으로서 저들의 위세를 자랑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함 족속의 애굽은 셈족, 야벳족속과 대등한 위치에 서기 위하여 갈등하고 전쟁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요셉의 이러한 추리는 정확했으며 그의 질문은 송곳같이 상대의 허점을 찔렀던 것이다. 이 당시는 애굽에만 식량 비축이 충분했기 때문에 자국 보호 차원에서 주변국 사람들을 경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또한 개인적으로 볼 때 요셉의 이러한 추궁은 일단 형들에게 죄를 뒤집어 씌워서 저들의 변명과 해명을 통해 선한 양심이 있는가, 아니면 아직도 거짓으로 위기를 모면하기에 바쁜 악한 심령인가를 가늠해 보고자 한 것이다.
사람은 억울한 누명을 씌우면 금방 그 사람의 진가가 탄로 나게 마련이다. 선한 자의 입에서는 선한 말이 나오고 악한 사람의 입에서는 악한 말이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요셉은 누구보다도 억울한 누명을 쓴 사람으로 이런 일을 당한 사람의 감정을 소상히 알고 있었다.
‘내 주여 아니니이다. 당신의 종들은 곡물을 사러왔나이다.’
요셉의 형들은 갑자기 정탐꾼의 누명을 쓰자 당황하여 자신들이 애굽에 온 목적을 거듭 밝힌다. 그러나 별 다른 증거가 없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가족 상황과 신앙에 대하여 자세히 밝히면서 무죄를 입증하고자 했다.
형들은 자신들을 최대한 비하시키면서 종이라 지칭하고 상대를 주라 높여 불러 호감을 사려고 노력하였다. 어쩌면 좀 비굴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자 자칫하면 정탐꾼으로 몰려 감옥에 들어갈 수 있으므로 궁색한 표현을 한 것이다.
형들은 자신들의 아버지는 한 사람이라고 하여 마치 형제우애가 아주 좋은 친형제인 것처럼 말하고 또한 독실한 자라 하여 정직을 나타내었다. ‘독실한 자’ 라는 말은 ‘거짓이 없는 사람’ ‘솔직한 사람’ 이라는 뜻으로 진실한 자들을 의미한다.
따라서 자신들의 행위의 정당성을 피력하고 진실한 사람임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증거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요셉이 이미 형들의 악함과 거짓됨을 조사하여 아버지에게 보고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아니라 너희가 이 나라의 틈을 엿보러 왔느니라.’
요셉은 물론 형들이 정탐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들의 인격과 양심을 재확인하려고 억지를 부려 극한 상황으로 몰고 가고 있다. 자신들이 정탐꾼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거해 줄 사람도 없고 무슨 국적이나 신분증이 없는 상황에서 한 아버지의 아들이라든지, 자기 스스로 정직한 사람이라는 말을 믿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형들은 변명의 궁색함을 느끼고 그들의 가정사를 낱낱이 고함으로 정탐꾼의 오해에서 풀려나기를 원했다. 그래서 자신들의 형제들은 열둘이라는 고백을 함과 동시에 한 아들은 이미 죽었으며 막내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있다고 하였다.
형들은 요셉의 행방이 20년 째 묘연함으로 그가 이미 죽은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그래서 하나는 없어졌다고 한 것이다. 만약 이 때에 형들이 정말 독실한 사람들이었다면 하나가 없어졌다고 할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애굽에 팔았다고 해야 옳았을 것이다.
형들이 요셉을 미워하여 죽이려고 하다가 차마 죽일 수 없어서 애굽으로 가는 상인들에게 은을 받고 노예로 팔았다고 시인했더라면 저들의 정직성을 지금이라도 인정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형들의 정직성이 아직 그런 수준에 도달하기에는 너무나 미흡하고 부족했던 것이다.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후대 히브리인들은 맹세할 때에 ‘내가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두고 맹세하노니’라고 하였지만 애굽 사람들은 바로의 생명을 맹세의 증거로 내세웠다. 애굽인들에게 있어서 바로는 신적 권위를 부여 받은 절대적 존재로 맹세의 확실성에 보증이 되었다.
요셉이 형들을 시험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 형들이 과거의 죄를 뉘우치고 자신들의 잘못을 진심으로 깨닫게 하기 위해서다.
둘째, 죄의 결과에는 심각한 보응이 뒤따른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
셋째, 이제는 육신적 정욕과 안목을 버리고 회개하여 참 된 여호와 신앙을 회복시키기 위함이다.
그러나 요셉이 가장 궁금한 것은 아버지 야곱의 안부와 친 동생 베냐민의 소식이었다. 형들이 베냐민을 상해하지 않았다면 베냐민이 애굽에 동행하였을 것인데 베냐민이 보이지 않은 것은 필시 어떤 곡절이 있지 않나 하는 의문을 가진 것이다.
그 일을 명백히 알아보려고 요셉은 한 방법을 형들에게 제시하였다. 즉 베냐민을 이곳에 데려오지 않으면 모두를 정탐꾼으로 확증하고 절대로 애굽을 떠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다. 베냐민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한 최선의 조치를 취한 것이다.
같은 어머니에게서 난 친동생 베냐민에 대한 요셉의 애틋한 정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요구는 형들에게 대단한 부담을 안겨 주었다. 왜냐하면 아버지 야곱이 가장 친애하는 베냐민을 애굽으로 보내 줄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너희 중 하나를 보내어 너희 아우를 데려오게 하고’
정탐꾼의 누명을 벗으려면 당장 한 사람이 대표로 가나안 땅으로 가서 말째 아우를 데리고 와서 진정 아버지와 함께 평안히 잘 지내고 있었음을 증명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즉각적인 요구와 요셉의 불같은 호령은 형들에게 큰 위압과 공포를 느끼게 했을 것이다.
요셉의 가중되는 요구는 형들을 궁지에 몰아넣었으며 이로 인하여 전날 자신들이 요셉에게 행한 행동을 기억하고 하나님께서 그 죄에 대한 보응을 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너희의 말을 시험하여 너희 중에 진실이 있는지 보리라.’
참으로 무서운 말이다. 이 말은 만약 그 말이 거짓이라면 그에 대한 혹독한 처벌이 있을 것이라는 엄중한 경고의 메시지였던 것이다. 형제들의 총리의 엄포에 간담이 서늘했을 것이며 앞으로 이 일이 어떻게 될 것인지 불안과 초조에 몸서리를 쳤을 것이다.
요셉은 형들을 다 같이 삼 일을 옥에 가두었는데 이는 요셉이 애굽에서 옥살이한 삼 년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요셉은 형들을 삼 일 동안 옥에 가두어 놓고 저들이 얼마나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는지 보려 했을 것이다.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노니’
형들이 옥에 갇힌 지 삼 일만에 요셉은 그들에게 인정을 베풀었다. 철저히 애굽인으로 가장한 모습을 약간 벗어버리고 이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 처신한 것이다. 요셉이 경외하는 하나님은 ‘엘로힘’ 즉 창조주 하나님이셨다.
이 하나님의 명칭은 형들에게 아주 친근한 것으로 자신들이 섬기는 하나님을 경외하다는 말에 그들이 다소 안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셉은 아직까지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음으로 자신의 정체를 계속 숨기고 있는 것이다.
요셉이 창조주 하나님의 명칭을 거론한 것은 형제들을 안심시킬 목적도 있었지만 자신은 신앙인으로서 종교적 양심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절대로 약속을 어기지 않는다는 것을 밝히고 자신이 제안한 조건을 수락하여 생명을 유지하라는 것이었다.
‘너희 형제 중 한 사람만 옥에 그 옥에 갇히게 하고’
요셉은 가나안 땅에서 양식을 기다리며 굶주리고 있을 아버지와 가족들을 생각하여 연민의 정을 베풀고자 하여 자신이 내린 결정을 번복하였다. 처음의 결정은 한 사람만 빈 몸으로 가서 베냐민을 데리고 오라는 것이었지만 이제는 한 사람만 남고 나머지 아홉 사람은 양식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는 것이다.
요셉은 악을 선으로 갚았다. 형들은 자신을 돈을 받고 노예로 팔았지만 그는 형들의 가족을 생각하여 양식을 풍족히 보내고 배불리 먹게 하여 생명을 보존하도록 한 것이다. 요셉은 자신을 빈 구덩이에 던져 넣고 굶어 죽게 한 형들에게 자비심으로 대신 갚았던 것이다.
형들은 애굽 총리의 뜻밖의 선한 제안에 응락할 수밖에 다른 길이 없었다. 물론 다시 올 때는 동생 베냐민을 데리고 온다는 부담스러운 조건을 여전히 안고 있지만 이것은 형들의 철저한 회개를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극복해야 할 과제였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거듭되는 심적인 시련 속에서 마침내 형들은 20년 전에 동생 요셉을 판 행위에 대하여 뉘우치기 시작하였다. 성도에게 있어서 시련은 회개의 기회를 제공하고 회개는 더 큰 축복으로 인도하는 관문이 된다.
*롬5:3-4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형제들은 자신들이 당하고 있는 고난을 과거에 요셉에게 지었던 범죄에 대한 보응으로 시인하고 이를 뉘우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고난과 죄는 그 상관관계가 매우 밀접하다. 성도는 고난이 임하면 먼저 자신이 지은 죄를 기억하게 되고 그 죄를 하나님 앞에 자백하게 된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비로소 자신들이 현재 당하고 있는 괴로움을 인과응보의 차원에서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형들의 모습이 나타난다. 형들은 지금 당하고 있는 고통의 원인을 자신들에게서 찾으며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허물을 기억하시고 이제 보응하신다고 믿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고통이 억울한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의 징계로 인식했던 것이다.
인과응보의 사상은 모든 인간들이 지니고 있는 본래적인 양심을 일깨우는 기능을 한다. 그러므로 인과응보라는 상식이 결여된 사람에게는 도덕적 행위를 기대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우리가 만든 법이라는 것도 인과응보의 도덕적 질서를 현실로 끌어들인 것이다.
물론 기독교 사상은 단순한 인과응보적 사상을 극복하고 초월한다. 그러나 일면에는 이러한 사상을 배제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갈6:7-9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요셉의 형제들은 과거에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이 드디어 자기들에게 돌아오고 말았다고 고백을 한다. 이처럼 인간은 자신이 저지른 범죄에 대하여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잠28:13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요셉이 죽지 않았다고 해서 과거에 그들이 저지른 죄가 소멸되거나 용서되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흐른다고 그 죄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인간의 두뇌는 과거의 죄를 기억하지 못하고 망각하는 수가 있으나 죄 자체는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것이다.
형제들이 공통적으로 이렇게 인식하기 시작하자 맏형인 르우벤이 과거의 일을 회상하면서 형제들에게 피 값에 대한 원리를 상기시킨다.
당시 야곱의 아들들도 노아 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피 흘린 자는 반드시 그 피의 값을 받게 된다.’고 하는 법칙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창9:5-6 내가 반드시 너희의 피 곧 너희의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르우벤은 지금 당하는 고통을 요셉의 피의 대가로 겸허하게 수용하고 있다. 형들은 요셉이 알아듣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자신들의 지난날을 회고하며 자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셉이 그들을 떠나가서 울고’
요셉은 하나님의 기이한 섭리와 형들을 만난 재회의 감사와 감격 때문에 마음이 북받쳐 올랐고 특히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는 형들을 보면서 악한 형들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자신들의 죄를 스스로 자복할 수 있도록 역사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 감사의 눈물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또한 지난 날 이국땅에서 받았던 서러움과 외로움이 한꺼번에 몰려오면서 그래도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처럼 형들을 만난 기쁨이 섞여 요셉은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형들을 떠나가서 아무도 모르게 울었던 것이다.
요셉은 형들 중에서 두 번째 형인 스므온을 결박하여 억류시키고 다른 형들은 석방하여 양식을 가지고 가나안 땅으로 가게 했다. 요셉이 왜 시므온을 대표로 결박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으나 대체로 몇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첫째, 시므온은 디나의 강간 사건을 해결할 때에 레위와 함께 칼을 차고 세겜 성 사람들을 살육하는데 앞장을 섰던 인물이다. 그는 영악하고 냉정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둘째, 시므온은 르우벤 다음으로 형제 서열이 높았기 때문에 요셉을 모함하고 살해하려는 계획을 주도한 주동자였을 것이다.
셋째, 르우벤과 형제들은 삼일 동안 억류를 당한 일이 요셉의 사건으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임을 자각하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인 반면 시므온은 그 일에 대한 자각이나 반성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셉은 형제들의 눈앞에서 시므온을 결박하여 형제들이 다시 애굽으로 돌아올 때까지 볼모로 감옥에 가두었던 것이다.
‘각 사람의 돈은 그의 자루에 도로 넣게 하고’
요셉은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자기가 베풀 수 있는 최선의 선을 행하였다. 그는 그들이 원하는 양식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여행하는 동안 필요한 양식을 따로 주고, 곡식 값으로 받은 돈도 그들의 자루에 도로 넣어 주었다.
나중에 형들은 돈을 도로 받은 사실 때문에 큰 시험이 들고 오해를 하고 변명하기에 급급하지만 요셉이 형들을 시험하려고 돈을 넣은 것은 아니었다. 요셉은 가족에게 돈을 받고 양식을 판다는 것이 도리에 어긋나기 때문에 돌려준 것뿐이었다.
‘하나님이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런 일을 행하셨는가 하고’
요셉의 단순하고 선한 행위가 형들에게 큰 혼란을 일으켰다. 그들이 곡식을 나귀에 싣고 가나안을 향하여 길을 떠나 한 여관에 이르러 곡식 자루를 풀어본 즉 그 자루에 돈이 그대로 들어있었다. 그들은 예기치 못한 일에 어안이 벙벙하여 사건의 실마리를 도저히 풀 수 없었다.
그들은 베냐민의 문제에 이어 또 다시 이해할 수 없는 사건에 봉착하자 이 사건 역시 자신들의 과거의 잘못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로 간주하였다.
그들은 자루 속에 든 돈에 대하여 나중에 다시 애굽에 내려갔을 때에 도둑의 누명을 씌우려고 애굽 총리가 일부러 담아 둔 것이라고 오해하고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원망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잘못을 뼈저리게 후회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요셉의 형들은 지금까지 가나안 땅에 살면서 한 번도 하나님을 두려워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양식을 구하려 애굽에 온 후로는 예기치 못한 사건이 터지자 이 모든 일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징계의 손길이 역사함을 깨닫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겨우 애굽을 벗어나 그 두려움이 없어지기 시작할 무렵 또 다시 새로운 사건이 터지자 새삼스럽게 지난날의 기억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들의 죄에 대해 하나님은 알고 계시고 이에 응보 하신다는 고백을 한 것이다.
3. 형제들의 귀환과 야곱의 탄식
‘그들이 당한 일을 자세히 알리어’
애굽에서 뜻하지 아니한 환난을 당한 형제들이 황망히 가나안으로 귀환한 후 자신들이 당한 자초지종을 아비 야곱에게 낱낱이 고하였다. ‘자세히’ 라는 말은 ‘전부’ ‘만족할 만한’ 이라는 뜻으로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조금도 남김없이 고했던 것이다.
그 내용을 분석해 보면,
첫째, 형제들은 요셉을 ‘그 땅의 주인인 그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이 말은 요셉의 명성이 온 천지에 이미 퍼져 있었음을 나타냄으로 야곱도 그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둘째, 요셉이 엄하게 말하고 자신들을 정탐꾼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형들은 요셉이 아주 무서운 어조로 자신들을 심문하고 조사했다는 것이다. 그 당시 그들이 받았던 충격은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것과 오랜 감옥살이를 면하지 못할 것이라는 위험부담을 느낀 것이었다.
이에 자신들은 정탐꾼의 누명을 벗기 위해 자신들의 신분과 가족관계를 확실하게 밝혔다고 하였다. 이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었음을 은연중에 아비에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이토록 소상하게 설명하는 것은 다음에 내려갈 때는 베냐민을 데리고 가야 하기 때문에 그 일을 염두에 두고 미리 배려한 것이었다.
‘각 사람의 돈뭉치가 그 자루 속에 있는지라’
그들은 한 사람의 돈만 자루 속에 있는 줄로 알았지만 집에 와서 자루를 풀어보니 각 사람의 돈이 모두 들어 있음으로 보고 크게 두려워하였다. 이 일은 야곱의 모든 가족이 다 놀라고 근심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결국 이 일은 저들의 강퍅한 마음을 돌이키는 촉진제가 되었던 것이다.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
야곱은 자녀들을 하나 둘씩 잃어버릴 것만 같은 위기의식을 느꼈다. 물론 야곱은 아직까지도 요셉이 애굽에 팔려간 사실이나 시므온이 애굽에 억류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까닭 없이 요셉이 사라지더니 이번에는 시므온이 없어져버렸다. 과연 시므온이 살아 있는지, 아니면 죽었는지 야곱으로서는 분별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이제는 베냐민을 내놓으라고 한 것이다. 왠지 모를 불안감이 야곱의 가슴에 소용돌이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한탄조의 말이 입에서 새어 나왔다. 야곱은 자식들 앞에서 ‘이것은 나 혼자 감당해야 하는 무거운 고충이구나.’ ‘나 혼자 지기에는 내 짐이 너무 무겁구나.’ 라며 한탄했던 것이다.
‘나의 두 아들을 죽이소서’
과거에 요셉의 생명을 구하려 했던 르우벤이 이제는 애굽에 볼모로 잡혀 있는 시므온과 베냐민의 목숨을 위해 자신의 두 아들을 아버지에게 담보로 맡기려 하였다. 르우벤은 장남으로서 강한 책임감과 형제 우애가 돈독했던 것 같다.
르우벤의 이러한 생명을 건 맹세의 제의는 실제로 두 아들의 생명을 야곱에게 합법적으로 위임하겠다는 비장한 결사 각오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관철되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이미 지난날에 아비의 침상에 올랐던 관계로 아비 야곱으로부터 신망을 잃고 있었으며, 동생들을 구해내지 못했다 하더라도 어찌 할아버지가 손자들을 죽일 수 있겠는가. 이런 제안은 경우에 합당하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르우벤은 ‘물의 끓음‘ 같은 자신의 성품대로 경솔히 말하고 뒷감당은 하지 못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아무리 족장시대 가부장적 제도 하에서 아비가 자식의 생사권을 쥐고 있다 하더라도 자기 아들의 생명을 이토록 경솔하게 결정하는 것은 생명의 주권자가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선민에게는 합당하지 않은 처사였다.
‘그만 남았음이라.’
사랑했던 아내 라헬이 죽고 그의 아들 요셉도 없어졌고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베냐민은 아비 야곱에게는 세상 모든 것을 다 준다 해도 바꾸지 못할 귀한 아들이었다. 그 아들을 보낸다는 것은 야곱 자신의 죽음을 내놓은 것과 하등 다를 바가 없었다.
야곱이 요셉이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고 아들의 뒤를 따라 슬피 울며 음부로 내려갈 것이라고 하였다. 이제 베냐민을 떠나보내려는 그의 심정은 또 다시 죽음과 같은 비참함을 겪게 될 것이라고 한 것이다. 야곱의 가련한 처지가 참으로 안타깝게 여겨진다. 그러나 이 또한 속이고 빼앗은 그의 일생의 삶의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야곱의 나이가 130세에 가까워 오지만 그의 인생의 험난한 여정을 아직도 끝을 보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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