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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의 생애(4)
유비생애 후기
제갈량을 파견하다
손권의 수하 노숙은 죽은 유표의 조문을 핑계로 형주로 왔다. 목적은 내부 염탐.(노숙전) 이때는 조조가 공격하기 이전이었으므로 혹시 형주에 내분이 있다면 손권이 끼어들 기회가 있지 않을까 기대한 것이었다.
노숙은 본래 서주 임회군(臨淮郡) 동성현(東城縣) 출신으로 대단히 부유한 호족이었지만 서주 대학살을 피해 강동(江東)이라고 불리던 양주로 이주한 사람이었다.
이런 말을 손권에게 하면서 노숙이 유비를 평하는 것이 흥미롭다. 노숙은 유비를 일컬어
“유비와 같은 천하의 영웅이 조조와 불화가 있어 유표에게 의탁했지만, 유표는 그의 재능을 질시하여, 중용할 수 없었습니다.”
라고 말한 것이었다. 하북에서부터 항상 패배해서 쫒겨다니던 유비가 천하의 영웅으로 일컬어지게 된 것인데, 이는 유비에 대한 동시대 인물들의 시선을 알 수 있게 해준다.(노숙전)
유종이 조조에게 항복했다는 소식을 들은 노숙은 돌아가는 길에 장판파 패주 당시 유비를 만난다. 이때 유비의 병사들은 뿔뿔히 흩어졌고 노숙과 유비가 만났을 때는 일교(一校, 천명)도 되지 않았다고 노숙전 주석 오록에서 노숙이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장판에서 조조에게 깨지고 나서 직후의 상황을 과장한 것이고, 이후 위에서도 나오듯이 유비는 곧바로 유기가 주둔한 하구로 이동하여 관우의 수군, 패잔병들 수습, 유기의 1만명을 합쳐 2만명의 병력을 재구축하고 제갈량은 2만의 병력이 유비에게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게 된다.
하여간 노숙은 유비가 머무르는 하구까지 따라가면서 손권과 힘을 합치는 것이 유리하다고 유비에게 설명한다. 당시 손권은 노숙을 보내 유표의 두 아들에게 조문하고 아울러 유비와 결친하도록 했다.
노숙이 미처 도착하기 전에 조조가 이미 한진(漢津)을 건넜으므로 노숙이 앞으로 나아가 당양에서 유비와 서로 만났다. 이에 손권의 뜻을 전하고 천하의 사세를 의논하며 은근한 뜻을 드러냈다. 또 유비에게 어디로 갈 것이냐고 물었는데 유비는 창오 태수 오거에게 의탁하러 간다고 짐짓 떠 보았다.
노숙은 "토로장군 손권께서는 총명, 인자하여 현인을 공경하고 선비를 예우하니 장강 이남의 영웅호걸들이 모두 그에게 귀부했습니다. 이미 여섯 군(郡)을 점거하고 군사는 정예하며 군량이 많아 족히 대사를 이룰 만합니다.
지금 그대를 위한 계책으로는, 심복을 보내 동쪽과 결친하여 연합의 우호를 다지고 함께 세업을 이루는 것만 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거에게 투탁하신다 하나, 오거는 범상한 인물로 먼 군에 치우쳐 있어 장차 남에게 병탄될 것이니 어찌 족히 의탁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말했으며 유비는 노숙의 계책을 마음에 들어하고 노숙의 말에 따라 진격하여 강하군 악현에 머물고는 번구에 주둔한 후 제갈량을 노숙과 함께 오로 가게 한다.(노숙전)
이때 제갈량이 손권과 면담하게 되는데 그에게 `조조는 강성하니 항복할 수밖에 없다.'라는 주장을 한다. 그러자 손권은 `그럼 유비는 왜 항복을 안하는가?'라고 되물었고 제갈량은 `유비는 뛰어난 영웅인데 어찌 남의 밑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55]'라고 말을 한다. 이에 손권은 분노하였고 조조에 맞서 싸울 것이라고 말하게 된다.(제갈량전)
노숙이 되돌아간 뒤 오에서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에 대해 회의를 벌였는데 유종의 대신들처럼 손권의 대신들은 모두 조조에게 항복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손권은 불쾌해하였지만 신하 모두의 생각이었으므로 뭐라 하지 못했다.
그가 잠시 옷을 갈아입으려고 몸을 일으키자[56] 그동안 아무 말도 없었던 노숙이 뒤를 따라갔고 손권이 노숙에게 의견을 묻자 노숙은 조조와 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실 제갈량과의 면담 이후 손권도 주전론으로 마음이 기울었으므로 그는 노숙을 칭찬한다.(노숙전)
이때 주전파인 주유는 파양에 있었으므로 이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다. 노숙은 주유를 수도로 불러들였고 대신들과의 회의 석상에서 주유는 이름난 무장답게 조조군의 약점을 지적하고(먼 거리를 와서 싸움, 유리하지 않은 지형에서 싸움, 단합이 안 됨, 겨울이라 말먹이 등 식량 조달에 곤란을 겪음) 오군의 강점을 지적하면서 싸우면 승산이 있다고 주장하며 항복론자를 제압한다.(주유전)
이때 유비의 역할이 중요한 것이 손권은 힘으로 호족들과 한나라의 정당한 지방관들을 깔아뭉갠 손책의 후계이므로 통치의 마땅한 명분이 없었다는 점이다. 조정의 영수인 한나라의 승상인 조조가 통치권한을 내놓라고 하면 명분이 없었다는 것이다.
장소같은 손권의 신료만 봐도 이 문제를 그렇게 보고 있었고, 그러나 유비는 황제로부터 역적 조조를 토벌하라는 밀서를 받은 몸이며 한나라의 중앙 관직인 좌장군을 역임하고 있었으므로 손권에게 있어서 조조와 해당하기 위해선 최상의 명분이 되어 줄 존재였다는 것이다.
즉, 적벽대전 때는 조조와 전쟁할 이유 자체가 성립이 안 되어서 아주 곤란한건 맞다. 그러나 유비 덕에 명분이 생겨도 적벽대전 당시에 동원된 병력은 손권과 주유, 정보 등이 데리고 있던 군사조직 뿐이었다. 즉 싸울 명분이 생겨도 호족들이 병력을 지원하지 않고 저울질하는 수준에서 그쳤다. 유비와는 비교도 안 되는 영지를 가지고 있는 손권이 달랑 3만밖에 동원 못한 이유이다.
강하에 주둔해 주유와 만나다
어쨌거나 손권은 이에 주유, 정보에게 총 3만의 병력[57]을 지휘하게 하고 노숙과 제갈량을 동행하게 한다. 유비는 주유와 만났고 유비에겐 2만여 병력이 있었으므로 이들과 병력을 합치게 된다. 유비가 강하에 머물면서 주유가 만난 사람이 유기가 아니라 유비라는 점에서도 이 시점에 강하에 유비가 세력을 잡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번구에서 손권의 원군만을 기다리고 있던 유비는 드디어 손권이 보낸 주유의 배를 발견하고 사람을 보내 주유를 위로한다. 그런데 자신의 아랫사람이 되는 주유는 부서를 떠날 수 없다면서 거꾸로 유비보고 오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유비는 관우, 장비에게 이 자리에서 이미 힘을 합치기로 했는데 부르는 것을 안 갈 수는 없다면서 말하는데 아무래도 동맹이랍시고 이렇게 나오는 주유의 이런 태도에 저 둘이 화가 난 모양이라 달랜 모양이다. 그래서 유비는 직접 호위도 대동하지 않고 주유를 찾아간다.
그곳에서 유비는 주유의 군대가 그렇게 많지도 않은 3만인 것을 주유에게 듣고 발견한다. 노숙의 말에 허풍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겨우 3만?[58]유비가 실망감을 나타내며 적다고 말하자 주유는 실병력도 2만인 주제에 3만이라고 뻥카를 치면서 '그냥 자신이 공을 세워 적을 쳐부수는 것을 지켜보기나 하라'고 오히려 핀잔을 준다.
유비는 예전에 만났던 노숙 등을 불러다가 함께 얘기를 하자고 하지만 주유는 이번에도 '노숙은 명을 받아 움직일 수 없으니 (본인이) 보고 싶으면 직접 찾아가라고 공명도 조금 있으면 올테니 그때까지 기다리라' 말한다.
아랫사람이 이렇게까지 대하니 빡칠만도 하지만 유비는 노숙을 부르려고 했던 자신의 잘못에 부끄러워하는 한편 한 군대를 이끌 주유의 엄정함을 확인한 것에 대해서는 기뻐한다.
이 기록은 선주전의 강표전에 있는 기록인데 이 뒤에 유비는 주유가 대단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이기지는 못할 것이라고 보고 2천 명을 이끌고 형세를 관망했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손성은 이 기록에 대해
유비는 웅재로, 필히 죽을 형편에 처하자 위급함을 오에 고해 도움을 얻어 달아날 수 있었으니, 다시 강변을 고망[59]하며 훗날의 계책을 품을 까닭이 없다. 강표전(江表傳)의 말은 응당 오인(吳人)들이 전미[60]하려는 말이다.
라고 기록했으며 자치통감 또한 강표전의 내용은 기록하되 유비가 주유를 이기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한 부분과 관망했다는 내용은 제외하고 기록했다.
이후 적벽대전에 나온 위 측의 기록(정사 삼국지)을 보면 유비는 오히려 주유 이상으로 적극적으로 싸웠으며, 조조를 철저하게 작살냈음을 알 수 있다.
적벽대전
유비는 이들과 병력을 합쳐 총 5만의 병력으로 적벽에서 조조군의 수십 만[61] 대군과 싸운다.(선주전) (적벽대전) 자세한 내용은 적벽대전 해당 문서를 참고할 것.
적벽에서 화공으로 대승을 한 뒤 주유와 유비는 힘을 합쳐 조조군을 맹추격한다. 조조는 화용도에서 진창을 풀로 메꿔가면서 길을 만들어 간신히 탈출할 정도로 처참하게 패배한다.(탈출하면서 "유비는 내 맞수지만 계책을 쓰는 건 늦다."며 비웃는 구절이 있는데, 이건 까놓고 말하면 제발 유비가 그러지 말기를 간절히 염원했다는 속내를 감추려는 허세라고 볼 수 있다.)
애초에 적벽대전은 수전이었으니 승리 직후 곧바로 추격을 했더라도 육지인 화용도에 상륙하려면 조조가 탈출할 시간을 벌려고 남은 후군을 뚫어야 하니 유비가 화용도에 화계를 했을 무렵에 걸리적거리는 아군까지 밟아가며 필사적인 조조는 이미 탈출했을 수밖에 없다.
일각에서는 주력은 대부분 탈출하는데 성공했다는 식으로 피해를 작게 보는 시각도 있긴 한데 이건 어디까지나 무제기만을 본 서술. 조조는 이후 몇 년 동안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으며, 남하 당시 획득한 형주 땅에서 조인이 1년여를 버티는 데도 제대로 지원해주지 못했다.
물론 이 와중에도 서황, 악진, 문빙 등이 북쪽 길을 막은 관우 상대로 계속 승리를 거두지만 결과적으로 본래 목적인 포위망을 풀어낼수는 없었고 결국 조인은 형남 일대를 버리고 형북으로 피신한다.
삼국지 연의에서는 관우가 화용도에서 조조를 그냥 살려보내준 내용이 나오는데, 이는 소설에만 나오는 완전한 창작이다. 화용도 문서 참조.
형주를 차지하다
이 후 조조군과 싸워 유비는 남군과 형남 4군을 얻는다. 다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유비가 아예 땅을 빌리지 않았다, 형남 4군 중 일부도 손권에게 받아 빌린 것이다 등 여러가지 설이 있고 꽤나 경과가 복잡하기에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형주 공방전의 형주 정복 부분 참고.
그 뒤 주유는 촉 정벌을 하기 위해 강릉을 떠나 파구까지 가다가[62]도중에 죽었고, 이후 손권이 '장로가 조조의 눈과 귀가 되어 익주를 노리고 있고 조조가 장로를 통해 익주를 얻으면 형주가 위험해진다'며 손유를 보내 익주를 취하려고 했으나, 유비는 본인이 익주를 도모할 작정이었으므로 '장로는 진심으로 조조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이 아니며 촉의 지형이 험난하니 지금 (손권이) 촉(蜀), 한(漢)으로 무리하게 출병해도 군대의 길이가 만 리에 이르니, 싸워서 이기고 공격해서 차지하고자 하면 비록 실리(失利)하진 않는다 하더라도, 그 일을 잘 해낼 수 없을 것이고 그 사이에 조조가 니네 치면 망하는 거 뻔한 거 아니냐?'며 반대한다.
손권이 이럼에도 출진을 강행하려고 하자 유비는 쫄아서 순순히 손권의 말을 따르는 게 아니라 아예 "너희가 촉을 취하려 하면 나는 응당 머리를 풀어헤치고 입산(入山)할 것이니, 천하에 신의를 잃을 수는 없다"라며 명분을 들고[63] 관우를 강릉, 장비를 남군 자귀현, 제갈량은 남군에 주둔하게 하고 유비 자신은 무릉군 잔릉현에 주둔하면서 길을 막고 무력시위를 하며 결사반대해 이를 좌절시킨다.
(선주전 주석 헌제춘추) 손권도 직정하고 이렇게 나오는 유비의 뜻을 알았고 정말로 익주 정벌에 주유만큼 적극적이지는 않았는지, 아니면 미리 준비한것이 먹히기엔 유비의 경계 태세가 만만치 않음을 알았는지 유비를 무시하지 못하고 그냥 계획을 취소했다.
사실 이미 유장이 장송의 계책을 받아들여 법정을 먼저 유비에게 보내 화호관계를 맺게 했으니 신의 타령이 나온 것으로 보인다.
유비가 이러는 이유는 물론 손권의 익주 점령을 막고 자기가 융중대에 따라 촉, 익주를 온전히 다 먹기 위해서 하는 짓이다. 단, 세부적으로 몇가지 설명할 것이 있는데 선주전 본전에 유비가 왜 이랬는지 분명하게 이유가 나온다.
이때 당시에 유비군 내부에서도 손권의 이런 제안에 갑론을박이 있었던 모양인데 어떤 사람들은 의당 이 청을 들어주어야 한다고 하며, 오나라는 끝내 유비가 소유한 형주 땅을 넘어 촉을 소유할 수 없으니 촉 땅은 가히 유비 세력이 차지할 수 있다고 봤다. 그러나 이런 논리에 형주 주부 은관이 반대하고 나섰다.
만약 오의 선두, 선봉이 된다면, 나아가서는 능히 촉을 이길 수 없고, 물러나서는 오가 이를 틈탈 것이니 일이 어그러질 것입니다. 지금 다만 그들이 촉을 치는 것을 도와주는 것처럼 하되, 우리가 새로이 여러 군을 점거하여 군을 일으켜 움직일 수 없다고 하면, 필시 오는 감히 우리를 넘어 홀로 촉을 취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진퇴지계(進退之計)를 이처럼 하면 가히 오, 촉의 이익을 거둘 수 있습니다. - 선주전
혹여 오군의 선봉을 우리가 맡게 된다면 대사는 물 건너가는 겁니다. 지금은 그저 이 요청에 찬성만 하시고, 새로 여러 군을 얻은 지 얼마 안 되어 움직일 수 없다고 하십시오. 그는 필시 우리 (형주 쪽)를 건너서 촉에 손에 넣으려고 하지는 않을 겁니다. - 화양국지 유선주지
손권은 주유가 강릉에 있을 때 익주를 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던지, 아니면 뭔가 꿍꿍이가 있던지, 하여간 주유와 같이 익주를 공격하려던 손유를 시켜 형주를 경유해 익주를 공격하게 하려고 했다. 내세울수 있는 가장 강력한 지휘관인 주유가 죽었고 이제 강릉은 유비의 손아귀에 들어갔으니 일단 제안한 것만 따지면 손권은 유비의 군사력과 유비 본인의 지휘력을 이용하여 그들을 선봉에 세우려고 한 모양이다.
그러나 은관의 진언에 따르면 당시 유비군 상황으로 촉을 공격하는건 쉬운 일이 아니었고 여기서 유비가 실패하면 뒷감당은 유비 본인이 해야하는 데다가 (한창 결혼 동맹 이후 내부에서 손부인이 오나라 신하들과 군대를 이끌고 유비 치소 옆에 성까지 짓고 깽판을 부리는 와중에) 손권이 무슨 수작으로 형주를 가만히 둘지는 알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강릉에 주유가 있을때는 익주 공격은 (어차피 유비를 믿지도 않았던) 주유의 오나라 혼자하는 군사 행동이라 군대의 보급로가 한없이 길어지고 촉 공격에 문제가 되는 영안 공격은 주유가 해야하니까 유비가 책임질 일은 없으니[64] 그냥 주유가 뭔 짓을 하든 가만히 두었지만, 이제는 유비가 온전히 길목인 남군에 있는 상황. 아직 남군을 다 얻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형주를 완전히 안정시키지 못한 상황에서 이 공격이 실패하면 유장의 적대감이나 군사적 손해는 고스란히 유비가 감당해야 한다. 즉, 당시에 오는 촉을 못 먹는다는 것이 이미 유비군 내 여론이다.
게다가 주유도 없는 상황에서 제1차 합비 공방전 당시 손권이 보여주었던 군사적 능력만 봐도 유비 입장에선 회의적일 수밖에 없었다.
또 하나의 이유는 장송, 법정, 맹달과의 커넥션에서 찾을 수 있다. 유장전을 보면 장송은 적벽대전 때 조조를 찾았지만 채용하지않고 무시하자 원망을 품는다. 그리고 적벽대전 직후 돌아와 조조와 관계를 끊을 것을 설득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유장을 설득하며 말하길 "유예주(劉豫州)는 사군(使君)의 지친이시니, 가히 통교할 수 있습니다."라 했다. 유장은 그 말이 모두 옳다고 여겨, 법정(法正)을 보내 선주와 화호관계를 맺게 하고, 곧장 또 법정 및 맹달(孟達)에게 영을 내려 병사 수천을 보내어 선주를 도와 수비토록 하였는데, 법정은 마침내 돌아왔다.
유비의 입촉은 이후에 다시 장송이 건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장송의 커넥션이 있는 상황에서 일단은 화호관계라고 알려진 유장의 신임을 잃을까 염려하여 신의를 내세워 손유의 진군을 막았다고 추정할 수 있다.
선주전의 어떤 사람이 촉을 치자고 하는 것은 장송과의 커넥션은 아직 공공연한 사실이 될 수 없으므로 최고위직들이나 일부 고위직만 공유하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또 유비의 익주 점령 과정을 봐도 212년~214년 3년이 걸렸다. 익주 내부 장송과 법정의 커넥션과 1년간 익주에 주둔하며 익주호족들과 접촉하고 민심을 얻은 과정, 안팎으로 익주를 뒤흔들었음에도 3년인 것이다.
당시 손권이 합비 전투에서의 실패나 주유 사망 및 유비군 내 판단을 고려할 때 애초에 그 당시를 기준으로 하더라도 익주 침공은 꿈에 불과한 것이었다는 것이 유비군내 현실적인 판단이었을 것이다.
또 유비 본인의 말대로 손권이 오나라에서부터 병력을 익주까지 보내면 조조가 그 틈을 노려 오나라로 치고 들어가지 말란 법도 없었다.[65] 어쨌거나 익주를 자력으로 먹어야 한다고 생각한 유비는 이미 유장(과 유비에 협력하는 내부세력)측과 커넥션을 맺은 상태였다,
이 상황에서 아직 여러군을 안정시키지 못했다는 핑계로 자력으로 익주에 온전히 힘을 투사할 수 있을 때까지 시간을 벌 필요가 있었고 혹시나 이런식으로 유비군의 힘을 약화시키고 익주에 간다는 핑계로 형주, 남군에 눌러 앉아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르는 손권군의 움직임도 경계해야 했다.
한마디로 마치 연의에서 주유가 그랬던 것처럼 손권이 가도멸괵의 계책으로 나오지 말란 법도 없었다. 이런 의미에서 유비는 은관의 계책을 채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 '천하에 신의를 잃을 수 없다'는 말은 손권의 익주 진격을 반대하기 위한 핑계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유비 본인의 진심이기도 했을 것이다. 까놓고 맨주먹으로 일어선 군벌 유비가 그때까지 살아남을 수 있던 이유가 저거고, 저런 식으로 자신의 야망을 달성하려고 했던 인물이 유비다.
유비는 근본적으로 서주 때도 그렇고 형주 때도 그렇고 지역 주민들 상대로 명분을 충분히 쌓고 인의를 내세우고 해당지역을 안정시켜, 그 지역 인심의 힘에 의지해 한 지역을 다스리는 방식을 매우 선호했고, 후일 익주에 들어가서도 바로 유장을 치자는 말에 '아직 은혜와 신의를 (이 지역 사람들에게) 드러내지 못했는데 그리 할 수는 없다'면서 일부러 돌아가는 길로 가면서 은덕을 후하게 베풀어 주변의 민심을 거두고, 주민들을 포섭하는데 시간을 보내고, 결국 그것을 통해 혼란했던 익주를 완전히 손에 넣는 데 성공했던 인간이다.
여기서 유비 본인의 말을 보자, "지금 내게 있어 물과 불 같은 관계에 있는 자가 조조요. 조조가 급하면 나는 너그럽게 하고 조조가 사나우면 나는 인덕을 베풀고 조조가 속임수를 쓰면 나는 충실했으니, 매번 조조와 반대로 하여 일을 이룰 수 있었소.
지금 사소한 이유로 천하에 신의를 잃는 것은 내가 취할 바가 아니오.", 유비는 근본적으로 덕으로서만 세상 사람들을 따르게 할 수 있고 그들의 마음을 얻으면 천하를 손에 쥘 수 있다고 확신한 인간이다. 물론 필요하면 무력탈취도 꺼리낌없이 행하기는 했지만 그것도 합당한 이유와 지지를 받아가면서 했고 애먼 사람들에게 피해를 안 주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괜히 아직 시세가 안정되지도 못했는데 성공할지나 모를, 아니 솔직히 익주를 먹을 생각이 있는지도 의문인[66] 원정의 고기 방패 선봉 짓으로 익주민들을 자극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설령 유비가 익주를 공격하더라도 그 시점은 유비군이 만만의 준비를 이루어 낸 상태에서 최대한 적절한 타이밍에 천천히 익주민을 회유하는 형태로 진행했을 것이다.
여기에 실제로 결국에는 이런 준비가 만만하게 갖추어진 상황에서 익주 내부의 혼란스러운 사정을 해결하기 위해 장송, 법정 등 익주 신하들이 믿을 건 유비밖에 없다면서 알아서 유비한테 익주를 가져다 바치도록 내부에서 협력하고 나아가 작전 참모로 까지 합류한 절호의 기회까지 왔으니 이는 실로 융중대에서 제갈량이 익주의 사람들은 혼란한 정치에 지처 영명한 군주를 기다릴 것이라고 예측한 것과 유비가 은관의 계책을 받아들인 게 실로 맞았던 것이다.
익주로 가다
한편 이에 앞서 장송이 208년 적벽대전 전에 조조가 형주를 얻었다는 소식에 유장의 사신으로 갔으나 푸대접을 받고[67] 불만을 품었다. 이내 조조가 적벽대전에서 깨졌고 장송은 조조와의 관계는 끊고 유비와 제휴할 것을 유장에게 권하였다. 누가 가면 좋겠냐는 물음에 평소 친한 법정을 추천하였다.
이로써 유장은 유비와 연합하였고 이어서 법정과 맹달을 통해 수비할 병사 수천 명을 지원해주었으며 전후로 선물도 막대하게 하였다. 법정이 돌아와 장송에게 이르길 유비에겐 웅대한 계략이 있다고 칭찬하였다. 211년, 조조가 한녕태수 장로를 정벌하려 한다는 소문에 유장이 두려워하였다.
장송이 유장에게 유비를 불러들여 장로를 공격해 한중을 합병하자고 간언한다. 유장은 이를 옳게 생각하고 법정을 유비에게 사신으로 보내고 유비는 이에 응한다.
앞서 부손은 유종에게 유비는 유종이 부하로 다룰 만한 자가 아니며 조조를 막아내면 형주는 유비의 것이 될 것이라고 간언한 적이 있다. 이는 유장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데 유장은 유비를 다룰 수 없을뿐더러 유비가 장로를 합병하고 조조를 막는다면 촉은 유장의 것이 아닌 유비의 것이 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부손이 예측한 식으로 장송이 예측하지 못했을 리 없다. 장송은 아예 처음부터 유비를 불러들여 그를 촉의 주인으로 삼을 속셈으로 유장에게 이런 간언을 한 것 같다. 이것은 법정전을 보면 알 수 있는데
“익주별가 장송(張松)이 법정과 서로 친했는데 유장이 함께 큰 일을 하기에 부족하다 하며 늘 남몰래 탄식했다.”
라고 말한 것을 보아 장송과 법정은 유장에 대해 그다지 충성을 하고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68] 이 둘은 이전부터 유장과는 함께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남몰래 탄식해왔던 터라 유비를 받들 모의를 하고는 때를 기다렸다.
이는 제갈량이 일찍이 익주의 선비들은 유장의 정치에 불만을 품어 명군 얻기를 고대하고 있다는 예견과 같았다. 게다가 장송이 유비를 만난 뒤 보낸 사신은 다름아닌 법정이었다.
유비가 익주에 도착했을 때 유장이 군사를 늘려주었고 그 결과 그 병사는 3만이 되었다고 한다. 이때 손권은 유비를 활로(猾老: 교활한 늙은이)라고 욕하였다. 유비의 나이는 당시 50대로 이 시절 기준으로 노인이 맞다.
유비는 211년부터 212년까지는 장로를 공격하는 시늉만 하면서 민심을 얻기위해 인심을 후하게 베풀어 익주 지방을 장악하였다.(선주전)[69]
당시의 유비가 처음부터 익주 대신 한중으로 진공해서 한중을 차지했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70] 그러나 만약 당초 계획대로 북형주가 있었다면 북형주에서 조조를 막으면서 한중으로 진공이 가능했을 것이나(실제로 융중대를 처음 제시할때 제갈량은 북쪽 한중의 장로와 남쪽 유장의 익주를 통틀어 익주라고 표현하며 같이 차지해야 할 대상으로 봤다.)
후일 조조에게 북형주를 빼앗기면서 번성-양양의 물적, 인적자원, 교통로를 모두 장악당해 빼앗기고 남형주를 기반으로 했어야 했던 것이 유비 세력이었다. 따라서 이렇게 될 경우 천혜의 요새인 상용과 한중의 험지를 익주라는 풍요롭고 병력이 충분한 배후지 없이 아직 점령한지 얼마 되지 않고 상대적으로 미약한 남형주만을 가지고 돌파해야 한다는 난점이 생긴다.
거기다가 만에 하나 차지한다고 해도 이를 뒷받침할 익주가 없으므로 서쪽의 한중부터 남쪽의 남형주까지 영토가 길고 좁게 형성되고, 그곳 중 어느 한 곳이 끊겨버리면(예를 들어 중간의 상용이라던가) 관중이나 익주 등 어디 외부로 진출하기도 전에 각 지방에 주둔한 군세가 고립되어 외각에서부터 먼저 각개격파 될 수도 있는 치명적인 문제가 생긴다.
원 역사에서도 유비가 익주로 자리를 비운 사이 남형주에서 조조군과의 청니대치가 발생했는데, 만약 영토가 이렇게 될 경우 위험성은 더더욱 증가한다. 한 마디로 남군을 비롯한 남형주만을 가지고 있던 당시의 유비세력이 한중을 우선해 먹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 당시 세력구도를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배후지인 익주를 완전히 유비가 차지하지 않는 이상 한중만 먹는다고 조조까지 칠 수 있다고 보는건 여러 가지로 무리수에 뒷통수가 간질간질한 일이었던 것이고 유비가 먼저 익주를 온전히 석권하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다만 관서 군벌들이 적당한 선에서 전역을 종료시키거나 유비가 익주를 먹을때까지 버틴 게 아니라 마초, 한수를 제외하고 다시 재기하지 못할 정도로 조조와의 싸움에서 완패당한 게 문제였을 뿐. 하다 못해서 마초가 기성 전투 이후 양주를 석권했을 때 하후연을 물리친 다음 양부 같은 내부 불안 요소를 제거하고 버티기라도 했다면 판도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한수도 아직 재기를 노리는 판국이었고.
어쨌거나 입촉한 후 유비는 매사에 조조와 반대로 하여 성공하였다고 자신을 평하면서 익주 점령에 고심했는데 이에 방통은 오늘 우리가 취하지 않으면 끝내 남을 이롭게 할뿐이라며 유비를 설득한다.
방통이 유비를 설득했다.
형주는 황폐해져 사람과 물자가 고갈되었고, 동쪽으로 오(吳)의 손권이 있고 북쪽으로 조씨(曹氏)가 있어 정족지계(鼎足之計)의 뜻을 펼치기에 곤란합니다. 지금 익주는 나라는 부유하고 백성은 강성하여, 호구수 백만에 사부 병마(四部兵馬)로 나오는 바가 잘 갖춰져 있으니 보화(寶貨)를 밖에서 구할 필요 없이 지금 임시로 빌려 대사를 정할만 합니다.”
유비가 말했다.
“지금 내게 있어 물과 불 같은 관계에 있는 자가 조조요. 조조가 급하면 나는 너그럽게 하고 조조가 포악하면 나는 인을 베풀고 조조가 속임수를 쓰면 나는 충실했으니, 매번 조조와 반대로 하여 일을 이룰 수 있었소. 지금 사소한 이유로 천하에 신의를 잃는 것은 내가 취할 바가 아니오.”
방통이 말했다.
“형편에 맞추어 대응할 때는 오직 한 가지 길로 평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약한 자를 아울러 강한 자를 공격함은 춘추오패가 했던 일입니다. 역리로 취하되 순리로 지킴하여 의리로 보답하고 대사가 이룬 뒤 대국(大國)에 봉해 준다면 어찌 신의에 위배되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취하지 않으면 끝내 남을 이롭게 할 뿐입니다.”
유비가 마침내 이를 행했다.
정사 삼국지 방통전 주석 구주춘추
유비는 이후에도 기습을 제안하는 방통에게 은혜와 신의를 아직 드러내지 못했는데 그럴 수는 없다며 민심을 잡는 일에 주력했는데 방통은 이에 상, 중, 하 3계책을 진언하고 유비는 중책을 취하기로 한다.(방통전)
다음해 212년, 손권이 조조에게 공격을 받자 손권은 유비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유비는 유장에게 조조가 승리한다면 형주를 통해서 익주로 공격이 들어올 것이지만, 장로는 한중에 틀어박혀 웅거하고 있기 때문에 크게 위협적이지 않으니 우선 형주로 가서 조조를 막겠다고 전달하고 병사 1만과 물자를 부탁했다. 유장은 병사 4천만 빌려주고 물자도 요청한 양의 절반 정도만 지원했다.
그러자 유비는 포상도 없으면서 사대부[71]들에게 사력을 다하라는게 말이 되느냐며 분노했는데 명분적으로 유비에게도 충분히 일리가 있는 상황이었다. 당시 유비는 어디까지나 표면적으로는 장로를 제대로 공격할 능력도 없었던 유장이 스스로 요청해서 용병으로서 도와주러 온 것이었고 장로는 한중에 웅거한다고 해도 수만 명의 병력을 일거에 동원할 수 있을 정도의 군벌이었다.
게다가 한중은 천혜의 요새지, 이런 곳을 공략하기 위해선 많은 병력이 필요한것은 자명한 이치다. 그런데 지원해준 게 원래 요구하는 병력과 물자의 절반도 되지 않으니 유비 입장에선 일단 자기 근거지도 위태로운 상황인데 조조 막은 후에 다시 돌아와서 제대로 장로를 공격하지 말라는 얘기냐는 불만을 제시할 수 있는 사항인 것이다.
한편 장송은 유비가 떠난다는 말을 듣고 당황해서 유비와 법정에게 대사가 이루어지는 마당에 왜 떠나려 하느냐고 밀서를 보냈다. 헌데 장송의 형 장숙(張肅)이 두려워한 나머지 음모를 유장에게 폭로하여 장송은 참수당해버렸다.
이 때문에 유장은 유비를 의심하고, 관문을 걸어 잠그도록 지시했다. 유비는 분노하여 유장의 백수군독인 책임자 양회, 고패의 무례함을 질책하며 불러 참수했다. 호삼성이 이르길 '그가 손님을 대접하는 예가 없음을 꾸짖은 것이다'라고 했다.
유비는 황충, 탁응에게 군을 이끌고 유장에게 향하도록 했고 곧바로 민첩하게 (백수)관[72] 안에 이르러, 여러 장수와 사졸의 처자식을 인질로 잡고, 그 김에 그들이 거느리고 있던 군사도 모두 유비군에 흡수. 병사를 이끌고, 황충, 탁응 등과 진군해 부현에 이르러, 그 성을 점거했다. 호삼성은 이는 방통의 중책을 사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양회, 고패는 유장의 명장으로 각각 강병들을 거느리고 관두(關頭, 관문, 요긴한 길목)를 점거해 지키며, 듣기로 여러 차례 유장에게 전(牋, 상주문, 서신)을 올려 장군을 형주로 돌려보내라고 간언했다 합니다.
장군께서 이르기 전에 사람을 보내 소식을 전하고 형주에 위급한 일이 있어 되돌아가 이를 구원하려 한다고 하며, 아울러 행장을 꾸려 겉으로 되돌아가는 것처럼 하십시오. 이 두 사람은 장군의 영명(英名)함에 감복하고 있었던 데다 또한 장군이 떠난다는 것에 기뻐하여 필시 가벼운 차림의 말을 타고 만나러 올 것이니, 장군께서 이 틈을 타 그들을 붙잡고 진격하여 그 군사를 차지하고 이내 성도로 향하십시오.
방통전
유장은 유괴, 냉포, 장임, 등현 등을 보내 부현에서 유비를 막게 했으나 모두 격파되었고, 물러나 광한군 면죽현에 의지했다.
조일청이 언급한 태평어람 346권에서 인용한 영릉선현전(零陵先賢傳) 에서 이르길 이 당시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유장이 유비를 부르니, 유장의 장수 양회가 여러 번 간하여, 유비는 유장의 자식 유의(劉祎)와 양회를 불렀다. 주연이 무르익었을 때, 유비는 양회가 비수(匕首)를 지닌 것을 봤다. 유비가 그의 비수를 내놓으며, 이르길 "장군의 비수가 아름다운데, 고 또한 있으니, 이를 손에 넣고 볼 수 있겠소?" 양회가 이를 줬다. 유비가 비수를 얻고는 양회에게 이르길 "너는 소인으로, 어찌 감히 우리 형제의 우호를 이간하느냐!" 양회의 욕설이 아직 이르지 못했는데, 유비가 그를 벴다.
이에 삼국지집해 저자 노필이 살피길 선주전에선 양회, 고패를 백수관에서 베며, 유장과 서로 만날 수 없었으니 영릉선현전이 잘못 본 듯하다는 언급을 했다. 다만 방통전에도 양회와 고패가 여러 번 유장에게 유비를 형주로 돌려보내라고 상소로 간했다는 기록이 있는 만큼 유장을 직접 만나 간했다기 보단 상소로 간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노필의 말이 꼭 맞다고 할 수는 없고 정황상으로도 당시 상황과 들어 맞는다고 봐야 할 것이다.
어쨌거나 이후, 유비는 유장과 전쟁을 하기 시작하였다. 유장은 다시 이엄을 보내 면죽의 여러 군대를 지휘하게 했으나, 이엄은 무리들을 이끌고 유비에게 항복했고 유비는 낙성으로 진군한다. 그러다가 213년(자치통감에서는 214년)엔 유비군이 낙성을 포위한 지 1년이 다 되어가는 무렵, 유비의 군사(軍師) 봉추(鳳雛) 방통이 낙성 공격을 지휘하다 유시(어지러이 날아오는 화살, 눈 먼 화살)에 맞아 유비군 진중에서 36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이후 유비는 낙성을 함락시킨다.
그리고 나서 성도를 포위할 무렵에 유비의 부수관 탈취와 동시에 형주에서 출병하여 익주 각지를 평정 중이었던 제갈량, 장비, 조운 등이 유비 본군(3만)과 합류한다. 214년엔 오호대장군(관장마황조)의 세 번째 장수인 서량의 마초가 서촉으로 도망쳐서 유비군에 합류하였고 뒤이어 유장이 항복하게 된다.
마초가 도착하자 군을 이끌고 성 북쪽에 주둔하게 했는데, 마초가 도착한 후 열흘이 지나기 전에 성도가 무너졌다. 당시 성도의 성벽을 사이에 두고 수십 일 동안 대치하던 유비군과 유장군의 전쟁은 마초의 전향이라는 사태를 맞아 비로소 종지부를 찍게 된 것이다.
익주를 차지하다
당시 유장은 3만의 정병과 성중의 사람들이 1년을 버틸 물자를 비축하고 있었는데 유비는 일단 병사들에게는 전리품으로 성안의 부고를 내어주고[73] 한편으로는 성중의 물품을 차지한 다음 그 다음 군사들과 백성들에게 재분배하는 과정을 수행했으며, 이 과정에서 주택, 논밭, 창고에 있던 곡식과 비단 같은 원래 익주 성도 토착 주민들의 것도 지배자로서의 권리를 행사하지 않고 원래 가지고 있었던 이들에게 되돌려 주었다.
214년 유비는 익주목을 겸하고 인사를 골고루 배치하는데 그에게 원한이 있는 자이건 혹은 유장과 친척 관계인 자건 간에 인재를 기용했다.
선주는 또 익주목을 겸했는데 제갈량을 고굉, 법정을 모주, 관우, 장비, 마초 등을 조아, 허정, 미축, 간옹을 빈우로 삼았다. 동화, 황권, 이엄 등은 본래 유장이 임용했고, 오일, 비관 등은 또한 유장의 인척이고, 팽양은 또한 유장에게 배척되었고, 유파는 예전에 원망한 자이나, 이들 모두를 현요직에 두어 그 기량과 재능을 다하게 하니, 뜻있는 선비치고 다투어 힘쓰지 않는 이가 없었다. - 촉서 선주전
자치통감은 이로서 익주 사람들은 크게 화합하였다고 기록한다. 이 외에 유언, 유장 부자와 친했으나 유장과 사이가 소원해지기도 한 방희를 사마로 기용하였다. 유비는 대체로 유장에게 소외된 인물들을 대거 기용했다.
그리고 혹여 반대파의 구심점이 될 지 모를 유장은 한지로 보내버린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이러한 일련의 정책으로 익해 익주 사람들은 크게 화목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니 유비가 익주를 점령한 이후 익주는 빠른 속도로 안정을 찾아갔던 것 같다.
유비는 익주에 입성한 뒤 토목 사업을 벌인 것 같은데 진군이 "이전에 유비가 성도로부터 백수에 이르기까지 역사를 많이 만들어 많은 인력을 소비하였다."라는 발언을 하기도 하였다.(진군전) 이 때문인지 조조가 한중으로 진군해올 무렵까지 '하루 수십 번의 동요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촉으로 공격해 보려고 했을땐 이미 유비가 익주를 완전히 장악한 후였다. 《부자》에 따르면, 7일 후 촉에서 온 투항자가 유비가 두려워하는 자들을 참했음에도 촉 사람들은 불안해 한다고 전했고, 조조는 유엽에게 촉을 쳐도 좋은지 물었는데 유엽은 이제는 안정되었으니 칠 수 없다고 답했다. 고작 일주일만에 익주가 안정되어 상황이 바뀐 것이다.[74]
한편 유비가 촉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듣고 조조의 승상연인 조전은 유비가 성공하지 못하리라 여겼으나 부간이 말하길 "유비는 관대하고 어질면서도 법도가 있고 사람을 얻는데 사력을 다하며 제갈량은 다스림에 통달하고 변화를 알고 바르면서도 모략이 있으니 재상으로 삼을 만하며. 장비, 관우는 용맹하면서도 의리가 있고 모두 만인지적으로, 유비를 보좌하는 세 사람이 인걸이니, 유비의 지략까지 더하면 무엇을 성공하지 못하겠느냐?"고 반문했다.
유비는 명백히 익주를 하나의 기반으로 삼으려고 유장과 전쟁을 벌였으며 따라서 익주민들에게 최대한 인심을 얻으려는 입장에 있어 익주민들을 최대한 건드리지 않고 인심을 얻기 위해 여러 제스처를 취했다.
유장을 기습하지 않은 것도 인심을 아직 못 얻었다는 이유였고, 여러 기회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익주민을 포섭하고 되도록이면 그들의 이권을 보장하며 인심을 얻는 데 주력한다.
유장 측에서 청야전술을 한다는 것에 경악한 것도 공략의 어려움에도 자기가 기반을 잡아 궁극적인 목표인 북벌을 시행할 기반인 익주가 큰 피해를 입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또 유비는 성도에 들어서서 성도의 금은을 나누어주거나 관부를 열어 병사들에게 대접하는데 이들의 상당수는 익주에서 지원받아 흡수하거나 항복한 익주 병사들이기도 했다.
처음 입촉했을 때처럼 자비를 베풀어서 익주민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등의 노력을 보이고 이후 이릉에서의 패배 이후까지 익주 자체는 상당히 안정적인 모습을 보인다.
또 유장이 쓴 '백성들이 공격하고 싸운다'는 표현처럼 유비는 포섭한 익주 주민들과 흡수한 군사를 이용해 유장과 싸운다.
어떤 의미에선 더 이상 유장을 신뢰하지 않았던 익주 인사들이 유비를 끌어들인 전쟁이었던 만큼 이 전쟁은 일종의 내전적인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유비가 전쟁 이후 유언, 유장 시기 내부 갈등과 반란이 심했던 익주를 하나로 결속시킨 일련의 정책은 이후 촉한의 성립과 발전에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유비의 수염 콤플렉스
처음 유비가 입촉하여 유장과 만난 자리에서 장유라는 사람이 종사였는데 유비는 장유가 수염이 많은 것을 보고
"과거 내가 탁현에 살고 있을 때 모(毛)성을 가진 자가 특히 많아 동서남북 모두 `모`라는 집이 많았었소. 탁현의 현령이 `수많은 털이 탁을 에워싸고 사는구나!`라고 했소." 라며 놀린다.
여기서 여러 모씨(諸毛)란 중국식으로 저모(猪毛)와 발음이 같다. 그리고 탁(涿)이란 옛날식 발음이 돈(豚)과 가까운데, 『광아(廣雅)ㆍ석친(釋親)』에 의하면, ‘돈(豚)은 둔(臀), 볼기, 밑, 바닥’이라 했다.
장병린(章炳麟)은 이를 ‘둔(臀), 볼기’가 아니라 마땅히 ‘앞에 있는 구멍(前竅), 전규 즉 여자의 음부’라고 해석해야 한다고 했다. 요컨대 돼지털이 엉덩이나 여자의 음부를 둘러싸고 있는 꼴이라고 비웃은 것이다.
그러자 장유가 대답을 하는데
"과거에 상당군 노현의 장이 되었다가 탁현의 령으로 승진한 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관직을 떠나 집으로 돌아갔는데, 그 당시 어떤 사람이 편지를 주었습니다. 거기에는 노현이라고 기록하면 탁현을 무시하는 일이 되고, 탁현이라고 기록하면 노현을 무시하는 것이 되므로 `노탁군`으로 쓴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위 말은 유비가 탁군 출신인 점을 들어 노탁군(수염이 없는 군주)이라는 것을 은근히 비꼰 것이었다. 노(潞)란 노(露)와 동음이고 탁(涿)의 고음이 둔(臀)과 같으니, 노탁군(潞涿君)이란 노둔군(露臀君), 즉 볼기짝을 드러낸 꼴의 군자란 뜻이 된다.
유비는 이를 잊지 않고 있다가 훗날 장유가 220년 조씨의 천하로 바뀌고 유비가 222년과 223년 사이에 익주를 잃을 것이라는 예언을 하자 그를 참수한다. 이때 제갈량이 만류하자 "향기 나는 난초라도 문앞에 나 있으면 베어낼 수밖에 없소."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다만 정말 수염의 원한 때문이라고 보기는 곤란한 게 한 왕조의 정통성을 기반으로 하는 유비에게 있어서 유씨를 부정하는 장유의 발언은 상당히 위험한 발언이었고 이것 때문에 참수했다는 쪽이 더 타당하다. 화양국지에서도 이것이 실제 이유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익양대치
같은 214년, 헌제의 아내인 복 황후가 조조에 의해 살해당했다. 조조가 212년에 위공이 되어 황제인 헌제를 끌어내리고 마음대로 국상을 처리하기 시작하자 복 황후와 그녀의 외척 세력이 조조를 제거하여 황권을 다시 회복하려 하였고, 이에 조조는 화흠을 보내 복 황후를 죽이고 복 황후 소생의 두 황자도 독살하였다.[75]
외척들과 황제 쪽에 붙어있던 인사 200여 명을 죽인 후 조조는 조절을 헌제의 새 황후로 삼게 했다. 동귀인 이후 조조의 위공 등극을 반대한 순욱이 죽을때 격분했던 유비는 이 일을 듣고는 발상(發喪)했다. 당시 천하에서 감히 복황후를 발상할 수 있는 사람은 유비밖에 없었다.(후한서 효헌제기 주 산양공재기)
215년엔 손권이 유비가 익주를 얻었으니 형주를 내놓으라 한다. 이때 사신으로는 제갈근이 파견되었고 유비는 "나는 지금 양주를 취하려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양주를 평정한 후에 이내 형주를 전부 상여하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자치통감, "乃盡以荊州相與耳")
손권은 여몽을 보내 장사, 영릉, 계양을 빼앗았는데 유비는 이에 대응하여 군사 5만을 이끌고 직접 유비가 형주에 있었을 때 근거지로 삼았던 공안으로 내려왔고 관우에게 3만을 갈라줘 익양으로 파견하는 등 싸움을 지휘한 것으로 보인다.(선주전)
그런데 215년 그해 장로가 조조에게 격파당하였으므로 촉과 오는 위나라의 확장에 크게 긴장하게 된다.
이에 손유 양측은 다시 만나 합의를 거쳐 유비는 강하, 장사, 계양을 손권에게 속하게 하고 자신은 남군, 영릉, 무릉을 갖기로 합의한 후 조약을 맺고 일을 매듭짓는다. 즉 이 시점에서 형주 문제는 일단락된 것으로 보인다.
장로의 문제
익양대치에서 돌아온 유비는 황권을 시켜 조조의 침공으로 파중현에 피신해 있던 장로를 영접하려 하나 이전에 장로가 항복하는 바람에 실패한다. 그런데 이전의 몇몇 기록을 보면 장로와 유비가 대립했을 가능성이 있다.
신선들은 장수하려고 양생하면서 송화 가루와 노을도 절제하여 먹었는데 그대는 맛있는 것만 추구하니 어찌 도를 숭상할 수 있겠소?
제갈량, 장로를 비판하며 - 예문류취
위의 글은 제갈량이 장로에게 보낸 글로 알려져 있다. 보면 알겠지만 제갈량은 장로가 내세우는 종교적인 면을 비판하고 있고, 장로를 사이비 교주로 격하시킨다. 언제 쓴 글인지는 알 수 없지만, 유비 정권의 재상격이었던 제갈량이 이렇게 직접 장로를 비판할 정도라면, 유비 정권이 장로와 적대한 것으로 봐도 좋을 것이다. 사실 융중대에서부터 장로는 병탄해야 할 대상으로 봤으니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유장이 유비를 불러들인 것은 장로에 대처하기 위함으로 흔히 알려져 있다. 장로가 이끌던 오두미도 세력은 유언과 결탁했지만, 유언 사후 유장이 장로의 일족을 살해하면서 유장과 적대하게 되었다.
촉서유이목전을 보면, 유언이 익주로 끌어들인, 소위 동주 세력이 익주 현지인들과 충돌을 일으켰고, 이 때문에 조위의 난이 있는 등, 유장의 익주 통치가 난항을 겪은 일이 있는데, 이때 기록을 보면, '장로의 부곡이 파서 일대에 있어'라는 부분이 눈에 띤다. 오두미도 세력이 익주에서 한중 뿐만 아니라 파서 일대에 이르기까지 세를 넓히고 있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익주 평정 이후, 유비는 관우를 제외하면 최고의 장수라고 해야 할 장비를 파서 태수로 임명한다.
제갈량이 장로를 직접 비판할 시점에서, 유비 세력과 장로의 세력이 상당한 갈등을 빚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핵심 장군인 장비를 파서 태수로 임명하고 한중을 얻은 뒤에도 장비를 지속적으로 이 일대에 배치한 것은 장로의 세력이 유비에게 일정 이상 반발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유비의 생애 전성기
한중 공방전
조조는 한중에 하후연, 장합을 주둔케 하고 여러 번 파[76]의 경계를 침범했다. 그리고 216년 유비의 파서태수 장비와 위나라의 장수 장합간에 벌어진 탕거 전투를 시작으로 유비는 조조와의 전쟁에 돌입한다.
건안 22년(217년)[77] 유비는 법정의 진언을 받고건안 23년, 유비는 제장들과 군사들을 이끌고 한중으로 진격하였다. 유비가 장비, 마초, 오란 등을 보내 하변(下辯)에 주둔하게 하니, 조홍을 보내 이에 맞서게 하여 마초 등은 후퇴한다. 유비가 양평관에 머물며 하후연, 장합 등과 서로 맞섰다.
이에 호응하여 위나라에선 김의가 위의 수도인 허창에서 길본, 경기, 위황 등과 반란을 일으키고 헌제를 취한 뒤 유비를 불러들일 것을 계획하나 진압된다.(무제기)[78]
219년엔 유비군이 전투에서 대승해 위의 장군 묘재 하후연이 (황충 또는 유비에 의해) 참수된다. 이에 조조가 직접 군을 이끌고 당도하자 유비는 직접 군을 이끌고 지형을 기반해 맞서 조조에게서 한중을 수비한다.
당시 유비와 그의 모주 법정이 있던 자리에까지 화살이 날아오기도 했으나 유비는 결코 물러서지 않고 요충지를 지속적으로 지켜내 마침내 조조를 철퇴시켰다.
사실 정사 삼국지에서는 유비가 교전을 응하지 않았다 나오긴 하는데 그것도 정사 삼국지 저자 진수가 조조를 위해 좋게 써준 말에 불과하고 배송지가 주석으로 인용한 다른 사서들에는 멀쩡히 격렬한 교전이 있었다는 증거들이 나오는 데다가 심지어 유비가 양자 유봉을 시켜 조조에게 먼저 싸움을 걸며 도발하자 조조가 격노하면서 '유비 이 돗자리 장수놈이 가짜 아들로 감히 나한테 시비를 걸어? 내 아들 조창이 오기만 하면, 유비 너 가만 안 나둔다'라며 당장은 못 싸우고 부들부들거리기만 하는 상황도 나온다.
이게 얼마나 조조가 수세에 몰린 상황이냐면 이후 조조가 진짜로 북쪽에 있던 조창을 불러서 지원하게 하려 했는데 조창이 밤낮으로 달려가 한중에 도착하기도 전에 조조는 더 견디지 못하고 철수해버린다.
즉, 저 발언은 유비의 도발에도 싸울 생각은 못하고 열받으니까 빡쳐서 내뱉은 말이라는 것. 애초에 싸움이 아예 없었다면 조조가 회군을 결심할 정도로 그토록 많은 병사들이 도망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시 조조가 하후연을 장안에서 주시하며 방치하거나 이후 관우의 진격에 오만 호들갑을 떨며 천도를 논하고 관우를 치기 위해 영혼의 한타를 끌어 모아 회남 지역 방어선을 방치하는 등 전략적 감이 떨어져 있는 상태였다.
이에 유비 입장에서는 그동안 병력 차이로 깨지기만 했던 조조를 아무것도 못 하게 만들고 한중 땅을 탈취했으니 매우 고무되어 있었을 것이다.
한중왕이 되다
유비는 한중을 차지한 뒤 헌제를 협박해 위왕의 위를 받고 만인지상의 자리를 차지한 조조에 맞서 한중왕을 칭하니 마침내 유비는 천하삼분을 완료한다.
이때 유비가 자기 지배지의 중심 지역인 파나 촉을 따서 파왕이나 촉왕이라고 하지 않고 한중왕이라고 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한중 땅은 원래 유방이 한왕(漢王)으로서 대업을 시작한 땅이기 때문에 한실(漢室) 부흥을 위해 정통성을 주장하기 아주 적합한 땅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한(漢)은 이미 황조(皇朝)의 이름이 되어 있으니까 유방처럼 한왕이라고 칭하는 것은 피하고[79] 대신 지명을 그대로 따서 한중왕이라고 했다는 차이가 있긴 하다.
그리고 유비가 만약 단순히 위왕 조조와 칭호를 가지고 맞장을 뜨려고 했다면, 1자왕(一字王)[80]인 촉왕(또는 다른 1자왕)의 칭호를 사용했겠지만, 유비는 사람들에게 한나라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사람임을 강조하기 위해 조조보다 한 단계 낮은 2자왕의 칭호를 쓰는 것을 감수했다고 볼 수 있다.
한나라가 일어선 한중 땅의 왕이라 주장하는 것으로 자신은 한나라-전한의 시조인 유방과 같은 존재라고 포장할 수 있고, 따라서 유비와 대립하는 조조에게는 자연히 항우의 이미지를 덧씌울 수 있었다.
당대 사람들은 유비에 대해 옛 한고조를 떠올리게 한다고 평했는데, 이는 유비의 프레임과 잘 맞아떨어졌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이래저래 조조로서는 위왕이라는 칭호를 받은 효과가 반감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유비는 돌아와 성도를 다스렸고 위연을 발탁해 도독으로 삼아 한중을 진수하도록 했다. 전략에 따르면 이때 유비는 관사(館舍-객사, 객관)를 세우고 정장(亭障)을 쌓았는데, 성도에서 백수관까지 4백여 개에 이르렀다.
여기서 관사란 고대 역참 제도를 뜻하고 정장이란 요새, 군사 시설 등을 뜻하니 유비는 본격적으로 북벌을 준비하기 위해 내정을 다지면서 잠시 숨을 고르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유비가
한중왕을 칭한 전후로 반란이
사방에서 일어나고,
형북으로 밀고 올라가며
천하를 진동시킨 관우의 인수를 받아 허창까지
반란군이 활동하는 등,
위나라는
당시 최고로 잘나가던 유비의 기세에
흔들리고 있었다.
[55] 즉 `손권은 장강을 끼고 많은 군대와 모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조에게 항복할 수밖에 없을 것이나 우리 주군인 유비는 천하의 영웅이므로 어찌 항복하겠소?'라며 은근히 깐 것.
[56] 손권이나 노숙 항목에도 있지만 이 '옷을 갈아입다'라는 표현은 곧 화장실에 감을 의미했다. 화장실에서 일을 보려면 옷을 일부 벗어야 하는데 과거 고위층의 의복은 입고 벗는데 많은 품이 들어 널찍한 탈의실이 딸려 있었기 때문이다.
[57] 이라고는 하는데 오주전, 건강 실록에는 주유, 정보가 실질적으로 지휘하는건 2만
[58] 그나마도 건강실록, 오주전 기록에 따른다면 유비가 직접 본 병사는 2만으로 본인이 보유한 병사랑 똑같다.
[59] 顧望 - 형세를 관망하며 거취를 결정하지 아니함.
[60] 專美 - 아름다운 명성을 독차지함. 그러니까 오나라 쪽이 적벽대전 승리를 자기들에게 좋게만 포장하려고 했다는 뜻이다.
[61] 오 약 3만, 유비군 약 2만으로 정사의 전기마다 병력 규모가 비슷하게 기록되어 있는 손유 동맹과는 달리 조조군은 20만에서 80만까지 정사의 전기마다 기록이 매우 다르다. 약 3~4세기 지나서도 쉽지 않았던 인원을 단 한 지역에서 동원한다는 건 뻥이거나 미친 짓이다. 정말로 그만한 인원을 들이고도 패배했으면, 조조의 시대도 끝났을 거다.
[62] 사실 강릉 앞에서 조조의 군대와 맞서는 가운데 일을 진행시켜야 하며 강릉성 혼자 물자를 대기는 무리므로 보급을 위해 장강 남쪽에 물길을 공유하는 유비군의 협조를 받아야 하는데 천하삼분이라는 계획이 있는 유비군이 상황이 어렵다는 식으로 제대로 협조를 할 리가 없다.
[63] 화양국지에 따르면 이때 유비는 "익주가 현명하지 않아, 좌우에게서 재앙을 얻고 있으니, 장군의 높은 의리로, 위로는 한조(漢朝)를 바로잡고, 아래로는 종실(宗室)을 돕길 바랍니다. 만약 반드시 곧 전쟁을 일으키겠다면, 이 유비는 장차 산림에서 제멋대로 하며, 감히 명을 듣지 않겠습니다."라고 했다. 좀 더 분명한 어조로 전쟁을 일으키면 재미없다고 협박하고 있다.
[64] 그리고 유비는 주유와 함께 남군 공방전을 하면서 주유가 어깨죽지에 화살을 맞아 치명상을 입은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 몸 상태로 안 그래도 성공 가능성이 먼 원정길을 그대로 성공시킨다고 보지 않았을 수도 있다.
[65] "지금 동맹이 까닭 없이 서로 공격하고 정벌해, 조조에게 계기를 빌려줘, 적에게 틈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으로, 훌륭한 계책이 아니오."라는 말에 호삼성 역시 동감했는지 이에 대해 이르길 '추(樞)는, 문호(門戶)가 움직이고 흔들리는 것에서 말미암은 것으로, 조조가 오, 촉을 흔들고자 하나, 아직 그 흔들림을 얻지 못했음을 말한다. 만약 자기들끼리 공격하고 정벌하면, 그에게 움직일 수 있는 계기를 빌려주게 되는 것이다.' 라고 했다.
[66] 당장 적벽 대전 때부터 기껏 기대했더니 병력은 적어서 실망했던 적이 있고, 이 와중에 군재가 뛰어났던 주유도 죽은 마당이다. 결국 은관의 계책을 채택한 것으로 보아 유비도 대체 손권의 군사적 능력의 뭘 믿고 원정의 선봉짓을 해야하는지 의문을 가졌다고밖에는 볼 수 없다. 하물며 안 그래도 공안에 오나라 관리와 병사들이 깽판치는 손부인 따라와 있는 마당에 익주 원정은 형주에 대규모 병력 주둔을 위한 핑계에 불과하다면, 다른 꿍꿍이가 있다면 더 위험하다.
[67] 습착치는 과거 제환공이 교만하게 굴자 배반한 나라가 아홉이었고 조조가 교만하자 천하가 삼분되었다며 수십년간 노력해도 찰나에 이렇게 되었으니 애석한 일이라고 평가했다.
[68] 유장의 지배력은 그다지 견고하지 않았다.
[69] 한편 이때쯤 헌제춘추에 따르면 순욱이 수춘에서 죽자 수춘을 도망친 어떤 사람이 손권을 찾아가 조조가 순욱에게 복황후를 죽이라고 했지만 순욱은 그 말을 따르지 않고 자살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손권은 그 사실을 촉에 알렸다. 유비는 화를 내며 늙은 도적이 죽지 않았으니 환란은 아직도 끝이 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70] 중국에서는 아예 융중대를 비판한답시고 조조가 오기 전에 신야에서부터 장로는 약해빠졌으니 한중을 노리고 연이어서 양주를 공격했어야 한다는 괴악한 글을 쓴 작자도 있다. 일단 유비를 받아들인 유표가 허락할지는 둘째치고 조조가 행여나 쳐들어오면 그나마의 근거지 신야를 잃는데다가, 신야에서 상용을 거친 후 한중까지의 거리나 보급의 불가능성, 길의 험악함은 말할 것도 없고 장로도 실제로는 만만치 않은 군벌에 지형의 이점까지 있는 상황에서 당시 형주를 온전히 아우르지 못한 유비의 세력으로 한중을 차지할 수 있을지, 그리고 연이어서 조조도 어렵게 상대한 양주 군벌 세력을 공격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다. 제갈량도 이 지역을 공격할때는 이 지역 융족과 화친하라고 조언했을 정도니 말이다. 오죽하면 한국에서 그 글을 본 사람들 가운데 '차라리 신야에서 장안을 치는 게 더 가까우니 장안을 치라고 하지 그래요?'라고 한 사람도 있다.
[71] 여기의 사대부는 후대의 사대부와 의미가 다르다. 일반 군사의 의미로 士와 관작이 있는 벼슬아치의 大夫의 합칭 정도다.
[72] 통감에선 관두(關頭)라 썼다. 호삼성이 이르길 즉 백수관두(白水關頭)다.
[73] 사실 영릉선현전 기록이 아니라 삼국지 본전 기록으로는 유비는 익주의 재정을 모두 장악하고 통제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본전 기록을 기준으로 하면 부고의 개방은 병사들이 아니라 유비가 주체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74] 자치통감의 음주자 호삼성은 이렇게 평했다. '일주일 동안에 어떻게 갑자기 다소 안정되었다고 말할수 있겠는가? 유엽은 대략 유비가 촉 지역을 지키고 있는 것을 살펴보고 범접할 수 없는 점이 있어서 이런말로 조조에게 대답했을 것이다.'
[75] 화흠이 문을 부수고 황후를 끌어내자 머리를 풀어헤친 채 산발을 하고 끌려가던 황후가 헌제에게 살려달라고 하자 헌제는 울며 "나도 언제까지 살지 모르오"라 대답하였다.
[76] 후한서 군국지에는, 파서, 파동의 명칭은 없고 파군만이 있다. 초평 원년(190년)에 파군을 갈라 영녕군을 설치하고(파군-영녕군) 그 후 건안 6년(201년)에 유장이 파군을 갈라 영녕군을 파동군으로 삼고, (기존의 파군 속현인) 점강현으로 파서군을 설치했다. 이 무렵에 파군태수가 따로 존재하는 걸 볼 때(장비가 촉으로 들어올 때 막았던 엄안이 바로 파군태수) 파군-파서-파동의 구분이다. 진서 지리지의 설명도 이와 유사한데 유비가 촉을 차지한 이래 속현 일부의 이동은 있지만 이 파-파서-파동(이른바 3파)의 체제는 그대로 이어진다.
[77] 자치통감, 촉서 법정전, 화양국지 유선주지 기록, 촉서 선주전에 따르면 218년.
[78] 후한서 효헌제기 삼보결록주에 따르면 당시 경조(京兆) 사람인 전의는 자가 덕위(德偉)로 스스로 대대로 한나라의 신하이니 이에 발분하여 경기 위황과 함께 천자를 끼고 위를 공격하고 남쪽으로 유비를 돕고자 했으나 일이 실패하고 삼족이 멸해졌다.
[79] 왕조의 이름과 동일한 봉지명을 쓰는 제후가 있을 수 없는 건 아니었다. 대표적인 예로 주나라 때의 주공을 들 수 있다. 하지만 당시 후한 황제는 한왕에서 칭호를 높인 것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한왕이라고 칭할 경우 유비가 장차 헌제를 밀어내고 스스로 한나라의 황제가 되겠다고 선포하는 것으로 해석될 위험이 있다.
[출처] 유비의 생애(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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