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창궐한 코로나19 바이러스는 그동안 병증처럼 가지고 있던 문제들이 심화한 것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인간을 기계처럼 부리는 자본과 권력, 혐오와 배제를 바이러스처럼 전파하는 종교, ‘영끌’하여 각자도생하기를 권면하는 사회는 ‘코로나 시대’ 이전에도 우리를 지속해서 황폐하게 만들어왔다. 인간의 얼굴을 가졌지만, 사실 ‘좀비’와 다를 바 없고, ‘악귀’가 빙의했다고 믿고 싶은 사람과 그들이 만들어내는 풍경을 마주하는 순간이 잦아졌다.
그래서일까? 최근 몇 년 동안 넷플릭스 〈킹덤〉을 비롯하여 〈스위트홈〉에 이르기까지 괴물화한 인간을 재현한 크리쳐(creature) 드라마가 등장하고 있다. 초자연적인 ‘악귀’를 쫓아낸다는 종교적 의미를 넘어, 사회적 의미로 재해석한 엑소시즘(exorcism) 드라마도 많아지고 있다. OCN 〈손 the guest〉가 대표적이고, 〈프리스트〉가 뒤를 이었다. 크리쳐 드라마 속 좀비나 괴물, 액소시즘 드라마 속 악귀의 기원은 모두 ‘인간’이다. 인간이 가진 악한 품성과 습성, 인간이 만든 시스템에서 잉태된 것들이다. 〈킹덤〉은 지배 세력의 탐욕과 무능이 좀비를 양산하는 계기가 되었고, 〈스위트홈〉의 괴물들은 ‘그린홈’이라는 생활공간에 존재한다. 〈보건교사 안은영〉이나 〈경이로운 소문〉은 권력과 개발의 불의한 이해관계가 촘촘하게 얽혀 있다.
어떤 히어로를 상상하는가?
이렇게 인간이 만들어낸 사회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도리어 악을 재생산할 때 우리는 그것을 제압할 능력을 갖춘 특별한 존재, ‘히어로’를 상상하게 된다. 그렇다면 드라마 속 히어로는 어떻게 재현되고 있을까? 과거처럼 스판 소재 바지 위에 팬티를 입는다던가, 고독하게 빌딩 숲을 배회하는 재력가의 형상일까?
동명의 소설을 드라마화 한 넷플릭스 〈보건교사 안은영〉의 안은영은 특이한 ‘히어로’다. 안은영은 산 사람이 내뿜는 ‘엑토플라즘’(영적 에너지의 물질적 형태)을 직접 볼 수 있는 퇴마사다. 비록 안은영이 이런 능력을 갖췄다고는 하지만, 악한 존재를 압도할 힘을 가졌거나, 대단한 용기가 있는 건 아니다. 안은영이 가진 무기라고는 장난감 칼과 비비탄 총이 전부다. 그 엄청난(!) 무기를 가지고 안은영은 ‘학교’라는 공간을 지배하는 악한 기운에 맞서 약한 이들을 보호한다. 굳이 표현하자면, 무섭지만 도망가지는 않고, 근근이 버티는 무해한 히어로랄까. 그는 약하지만, 무책임하지 않다.
〈보건교사 안은영〉 스틸컷
OCN 〈경이로운 소문〉의 ‘히어로’들도 마찬가지다. 〈경이로운 소문〉은 가상의 도시 ‘중진시’를 배경으로 국숫집 직원으로 위장한 악귀 사냥꾼 ‘카운터’들이 악한 기운을 가진 인간의 몸에 들어가 악행을 저지르는 악귀를 물리치는 신개념 히어로물이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인 ‘융’(영혼을 접수하고 저승으로 보내는 출입국 관리소) 세계의 영혼들은 코마 상태에 빠진 인간을 선발하여 ‘카운터’로 임명한다. 이 인간 ‘카운터’는 융 세계의 영혼들과 파트너가 되어 서로 교통하며 악귀를 찾아내고, 물리친다. 중진 시장과 건설사가 수상하게 얽힌 사건을 수사하다가 의문의 폭력배들에게 살해당할 위기에 처했다가 혼수상태에 빠진 가모탁은 팀 내에서 ‘힘’을 담당한다. 운전면허 시험장에서 증명사진을 찍다 사고를 당한 사진사 추매옥은 상처를 치유하는 능력이 있다. 가족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현장에서 혼자 생존한 도하나는 멀리 있는 악귀를 감지하는 레이더 역할을 하고, 상대의 손만 잡아도 과거를 읽어내는 ‘사이코메트리’(psychometry) 능력이 있다. ‘장물 유통’ 회장 최장물은 이들의 물주 역할을 하는 인물이다. 여기에 7년 전 교통사고로 부모(가모탁의 경찰 후배)를 잃고, 한쪽 다리에 장애를 가지게 된 고등학생 소문이 새로운 ‘카운터’로 선발된다. 소문은 힘과 학습력을 가졌고, 다른 ‘카운터’는 할 수 없는 ‘땅을 만드는’ 능력까지 갖춘 ‘경이로운’ 존재다.
드라마 〈경이로운 소문〉 공식 포스터
모두 ‘슈퍼’가 될 필요는 없다
‘카운터’들은 대단한 힘을 가진 존재가 아니다. 그래 봐야 일반인의 2~3배이며 간헐적으로 열리는 ‘땅’의 기운을 받으면 5배 정도의 능력이니, 다른 히어로들에 비해 시시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히어로들이 고독한 단독자였다면, ‘카운터’들은 팀을 이루어 활동하며 분업을 통해 악귀를 잡는다. 도하나가 악귀를 감지하거나 정보를 읽어내면, 가모탁이 힘으로 제압하고, 팀원이 다치면 추매옥이 치료를 한다. 이 팀을 유지하는 데는 최장물의 자본력이 중요하다. 이렇게 분업화한 공동체이기에 감당하기 버거운 악귀도 무사히 ‘소환’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부단히 훈련하기를 게을리 하면 쓸모가 없어지는 법. 이들은 훈련도 열심히 하는, 성장하는 히어로다.
〈보건교사 안은영〉이나 〈경이로운 소문〉 속 히어로들은 지금까지 우리가 만나왔던 히어로들과는 다르다. ‘힘’을 가진 심판자이기보다는 평범한 ‘힐러’(healer)에 가깝다. 또한 그동안 약하게 여겨진 여성, 장애인, 학생, 노인 등이 히어로가 되거나, 그의 조력자가 된다. 어떤 인간은 악을 도모할 때 누군가는 자신의 약함을 무릅쓰고 서로를 돕는다. 모두 ‘슈퍼’가 될 필요는 없다. 웹툰 〈경이로운 소문〉 속 대사처럼 “옳게 된 사람들의 단단한 서사 덕에 세상은 살아있다”라는 걸 증명하듯 그저 각자의 자리에서 물러서지 않고 서로를 돌보며 성장하기를 멈추지 않는 존재가 이 시대의 ‘히어로’인 것이다.
오수경
낮에는 청어람ARMC에서 일하고 퇴근 후에는 드라마를 보거나 글을 쓴다. 세상의 수많은 이야기에 관심이 많고 이웃들의 희로애락에 참견하고 싶은 오지라퍼다. 함께 쓴 책으로 《을들의 당나귀 귀》 《불편할 준비》 등이 있다.
첫댓글 그저 각자의 자리에서 물러서지 않고 서로를 돌보며 성장하기를 멈추지 않는 존재가 이 시대의 ‘히어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