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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
이 태 준
“가만히 눴느니 반침이나 좀 열어보구려.”
“건 또 무슨 소리야?”
“책이 모두 썩어두 몰루?”
하고 아내는 몰래 감추어두고 쓰는 전기다리미 줄을 내다가 곰팡을 턴다.
“책두 본 사람이 좀 내다 그렇게 털구려.”
“일이 없어 그런 거꺼정 하겠군! 좀 당신 건 당신이 해봐요. 또 남보구만 그런 것두 못 보구 집에서 뭘 했냐 마냐 하지 말구…….”
“쉬― 고만둡시다. 말이 길면 또 엊저녁처럼 돼.”
하고 나는 마룻바닥에서 일어나 등의자로 올라앉았다. 등의자도 삶아낸 것처럼 늑눅하다. 적삼 고름으로 파놓은 데를 쓱 문대겨 보니 송충이나 꿰뜨린 것처럼 곰팡이와 때가 시퍼렇고 시커멓게 묻어난다. 나는 그제야 오늘 아침에 새로 입은 적삼인 것을 깨닫고 얼른 고름을 감추며 아내를 보았다. 아내는 아직 전기다리미줄만 다른 행주로 홈치고 있었다. 보았으면 으레 “어린애유? 남 기껀 빨아 대려 입혀놓니까…….” 하고, 한마디 혹은 내가 가만히 듣고 있지 않고 맞받으면 열 마디 스무 마디라도 나왔을 것이다. 늙은 내외처럼 흥흥거리기만 하고 지내는 것은 벌써 인생으로서 피곤을 느낀 뒤이다. 젊은 우리는 가끔가다 한 번씩 오금을 박으며 꼬집어 떼듯이 말총을 쏘고 받는 것도 다음 시간부터의 새 공기를 위해서는 미상불 필요한 청량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요즘 두 주일 동안은 비에 갇혀 내가 나가지 못한 때문인지 공연히 말다툼이 잦았다. 부부간의 말다툼이란(우리의 길지 못한 경험 에선) 언제든지 지내놓고 보면 공연스러웠던 것이 원칙으로 우리가 엊저녁에 말다툼한 것도 다툴 이유로는 여간 희박한 내용이 아니었다. 소명이란 년이 하루에 옷을 네 벌을 말아놓았다는 것이 동기였다. 해는 나지 않고 젖은 옷은 썩기만 하는데 왜 자꾸 비를 맞고 나가느냐고 쥐어박으니 아이는 악을 쓰고 울었다. 나는 듣그러우니까 탄할밖에 없었다. 아이들이란 비도 맞고 놀아 버릇을 해야 감기 같은 것에 저항력도 생기는 것인데 어른이 옷을 말려댈 수가 없다는 이유로 감금을 하려 들 뿐만 아니라 구타까지 하는 것은 무슨 몰상식, 무책임한 짓이냐고 하였더니 아내는 지지 않고 책임이라 하니 그런 책임이 어째 어멈에게만 있고 애비에겐 없을 리가 있느냐는 것이다. 또 그러게 아이들이 하루에 옷을 몇 벌을 말아놓든지 달리지 않게 왜 옷을 여러 벌 사다 놓지 못하느냐? 또 젖은 옷도 썩을 새 없이 말릴 만한 그런 설비 완전한 집을 왜 지어놓지 못하느냐? 그러고도 큰소리만 탕탕 하고 앉았는 건 남편이나 애비된 자로서 무슨 몰상식, 무책임한 짓이냐 하고 우리 집 경제적 설비의 불완전한 점은 모조리 외고 있었던 것처럼 지적해가면서 특히 ‘왜 못하느냐’에 강한 악센트를 내가며 나의 무능을 힐책하는 것이었다.
이런 경우에 나의 말막음은 역시 태연한 것으로,
“또 이건 무슨 약속 위반이ㅇψ 혼인하기 전에 물질적으로는 어떤 곤란이 있든지 불평하지 않기로 약속한 건 누구야?”
그래도 저쪽에서 나오는 말이 많으면 최후로는,
“그럼 마음대로 해봐.”
이다. 이 마음대로 해보라는 말은 가장 함축(含蓄)이 많은 술어(術語)로서 저쪽에서 듣고만 있지 않고,
“마음대로 어떻게 하란 말야?”
하고 해석을 요구하는 경우에는 얼마든지 폭탄적 선언으로 설명을 들려줄 수 있는 것이니 아내의 비위를 초점적으로 건드리는 데는 가장 효과 있는 말이 된다.
어제는 이 술어를 설명하는 데까지 이르렀더니 아내의 골은, 밤 잔 원수가 없다는 말은 아무 의미도 없게, 아침까지 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비는 어쩌면 그칠 듯하다. 나는 마루 밑에서 구두를 꺼냈다. 안팎으로 곰팡이가 파랗게 피었다.
“여보?”
나는 엊저녁 이래 처음으로 의논성스럽게 아내를 불러본다. 아내는 힐끗 보기만 한다.
“여보?”
“부르지 않군 말 못하나.”
“곰팡이가 식물이든가? 동물이든가?”
“승겁긴…….”
나는 사실 가끔 승겁다.
오래간만에 넥타이를 매느라고 거울을 들여다보았더니 수염이 마당에 잡초와 같이 무성하다.
‘면도를 하구 나가?’
면도칼을 꺼내 보니 녹이 슬었다. 여럿이 쓰는 물건 같으면 또 남을 탓했을는지 모르나, 나 혼자밖에 쓰는 사람이 없는 면도칼이라, 녹이 슨 것은 틀림없이 내가 물기를 잘 닦지 못하고 둔 때문이다. 녹을 벗기려면 한참 갈아야 되겠다. 물을 떠오너라, 비누를 좀 내다 다우, 다 귀찮은 노릇이다. 링컨과 같은 구레나룻을 가진 이상(李箱)의 생각이 난다. 사내 얼굴에는 수염이 좀 거칠어서 야성미를 띠어보는 것도 좋은 화장일지 모른다. 그러나 내 수염은 좀 빈약하다. 사진을 보면 우리 아버지는 꽤 긴 구레나룻이셨는데 아버지는 나에게 그것을 물리지 않으셨다.
아직 열한점, 그러나 나랑(樂浪)이나 명치제과(明治製菓)쯤 가면, 사무적 소속을 갖지 않은 이상이나 구보(仇甫) 같은 이는 혹 나보다 더 무성한 수염으로 커피잔을 앞에 놓고, 무료히 앉았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내가 들어서면 마치 나를 기다리기나 하고 있었던 것처럼 반가이 맞아줄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요즘 자기들이 읽은 작품 중에서 어느 하나를 나에게 읽기를 권하는 것을 비롯하여 나의 곰팡이 슨 창작욕을 자극해주는 이야기까지 해줄는지도 모른다.’
나는 집을 나선다. 포도원 앞쯤 내려오면 늘 나는 생각, ‘버스가 이 돌다리까지 들어왔으면’을 오늘도 잊어버리지 않고 하면서 개울물을 내려다본다. 여러 날째 씻겨 내려간 개울이라 양치질을 하여도 좋게 물이 맑다. 한 아낙네가 지나면서,
“빨래하기 좋겠다!”
하였다.
이런 맑은 물을 보면 으레 ‘빨래하기 좋겠다!’나 느낄 줄 아는, 조선 여성들의 불우한 풍속을 술퍼한다.
푸른 하늘은 한군데도 보이지 않는다. 고개에 올라서니 하늘은 더욱 낮아진다. 곰보네 가게는 유리창도 열어놓지 않았고, 세월 잃은 ‘아스꾸리’통은 교통 방해가 되리만치 길가에 나와 넘어졌다.
“저따위가 누굴 쇠기긴…… 내가 초약이 되는 거야, 이리 내애…….”
열둬 살밖에 안 된 계집애 목소리 같은 곰보 아내의 날카로운 소리다. 나는 곰보 가게라고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흔히 안주인을 표준으로 곱추 가게라고 한다. 얼굴은 늘 회충을 연상하게 창백한데, 좀 모두가 소규모여서 그렇지, 그만하면 이쁘다고 할 수 있는 눈이요, 코요, 입을 가져서 곱추만 아니었다면 곰보로는 을러보지도 못할 미인이다. 병신이 되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이 고갯마루턱에다 빙수 가게나 내고 앉았는 곰보에게 온 모양으로, 속으로는 남편을 늘 네까짓 것 하는 자존심이 떠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가끔 지나는 귓결에 들어보아도 색시는 그 패이다 만 앳된 목소리로 남편에게 “저따위가” 어쩐다는 소리를 잘 썼다. 그러면 아내와는 아주 딴판으로 검고 우악스럽게 생긴 남편은 “요것이…‥” 하고 눈을 희뜩거리며 쫓아가 어디를 쥐는지 “아야얏” 소리가 반은 비명이요, 반은 앙탈이게 멀리 지난 뒤에도 들리는 것이었다. 사내는 그 가냘픈, 그리고 방아깨비 다리처럼 꺾여진 색시에게 비겨, 너무나 우람스럽게 튼튼하다. 어떤 날 보면 보성 학교 밑에서부터 고갯마루턱 저희 가게 앞까지 사이다니 바나나니를 한 짐이나 되게 장본 것을 실은 자전차를, 사뭇 탄 채로 올
라오는 것이었다. 그런 장정에게 한 번 아스러지게 잡히고 앙탈스런 비명을 내는 것도, 그 색시로서는 은연히 탐내는 향락의 하나일지도 모른다. 비는 오고 물건은 팔리지 않고 먹을 것은 달린다 하더라도 남편과 단둘이 들어앉아 약이니 띠니 하고 무슨 내기였든지 화투장이나 제끼는 재미도, 어찌 생각하면 걱정거리 많은 이 세상에서 택함을 받은 생활일지도 모른다.
비는 다시 뿌린다. 남산은 뽀얗게 운무 속에 들어 있다. 고개는 올라올 때보다도 내려갈 때가 더 무엇을 생각하며 걷기에 좋다.
얼굴 얽은 이와 등 곱은 이의 부처, 저희끼리 ‘난 곰보니 넌 곱추라도 좋다’ ‘난 곱추니 넌 곰보라도 좋다’ 하고 손을 맞잡았을 리는 없을 것이요 누구라도 새에 들어서서, 그러나 한쪽에 가서는 신랑이 곰보라는 말을 반드시 하였을 것이요, 또 한쪽에 가서는 신부가 곱추라는 것을 반드시 이야기하고서야 되었을 것이다.
‘자기와 혼인하려는 처녀가 곱추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 총각의 심경은 어떠하였을 것인가?’
나는 생각하기에도 괴롭다.
아직도 고개는 더 내려가야 한다.
‘우리 부처는 어떻게 되어 혼인이 되었더라?’
나는 우리 자신의 과거를 추억해본다. 나는 강원도, 아내는 황해도, 내가 스물여섯이 되도록, 한 번도 본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었다. 다만 인연이란 내가 잘 아는 조양(지금은 그도 여사이나)이 내 아내와도 친한 동무였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조양 때문에 우연히 서로 보고 로맨스가 일어난 것도 아니었다. 혹 그런 기회가 있었더라도 나면 모르나 내 아내란 위인이 결코 로맨스의 여왕이 될 소질은 피천 한푼어치도 없는 사람이다. 애초부터 결혼을 문제 삼아 가지고 조양이 우리 두 사람을 맞대놓았다. 조양은 저쪽에다 나를 무엇이라고 소개했는지는 모르지만 나한테다는,
“첫째 가정이 점잖고, 고생을 못해봤으나 무어든 처지대로 감당해나갈 만한 타협심이 있고, 신여성이라도 모던과는 반대요, 음악을 전공하나 무대에 야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취미에 그칠 뿐이요 인물은 미인은 아니나 보시면 서로 만족하실 줄 압니다.”
하였다. 나는 곧 만날 기회를 청했었다. 조양은 이내 그런 기회를 주선해주었다. 나는 이발을 하고 양복에 먼지를 털어 입고 구두를 닦아 신고 갔었다. 내가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나도 뵈는 터이라 얼떨떨하여서 테이블만 굽어보고 있었으나, 대체로 그가 다혈질(多血質)이 아닌 것과 겸손해 뵈는 것과 좀 수줍은 티가 있는 것과 얼굴이 구조무자형(九條武子型)인데 마음에 싫지 않았
다.
‘그러나 결혼엔 사랑이 있어야 한다는데, 사랑을 언제 해 가지고 결혼에 도달할 건가? 이렇게 미리부터 결혼을 조건으로 하고 만나는 데는 순수한 사랑이 얼크러질 리가 없다. 이건, 아무리 서로 마음에 들어 활동사진에 나오는 것 같은 러브 신을 가져본다 하더라도 어데까지 결혼하기 위한 선보기의 발전이지 로맨스일 리는 없다…….’
나는 차라리 만나본 것을 후회하였다. 다만 조양을 그의 인격으로나 교양으로나 우정으로나 모든 것을 믿는 만큼, 모든 것을 맡겨버리고 서로 미지의 인연대로 약혼이 되게 하였더면, 그랬더면 그 혼인식장에 가서나 아내의 얼굴을 처음으로 대하는, 그 고전적인, 어리석은 홍미란 얼마나 구수한 것이었으랴. 나는 그렇게 못한 것을 지금까지도 후회하거니와 나는 이왕 만나본 김에야 좀더 사귀어볼 필요가 있다 하고, 한번 같이 산보할 기회를 청해보았다. 저쪽에서 답이 오기를 자기도 그렇게 하고 싶다고 하였고, 토요일 오후에는 두시서부터 다섯시까지 세 시간 동안은 학교에서 나가 있을 수 있는데, 무슨 공원이나 극장 같은, 번잡한 데는 싫다고 하였다.
나는 그때, 서대문턱 전차 정류장에서 그를 만나 가지고 어데로 걸어야 좋을지 몰랐다.
“어느 쪽으로 걸을까요?”
“전 몰라요.”
하고 그는 붉어진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는 동무나 선생을 만날까 봐 얼른 그 자리를 떠나자는 눈치였다.
“이 성 밑으로 올라갈까요?”
그는 잠자코 걷기 시작했다. 한참 올라가다가,
“그럼 이 산 위로 올라가볼까요?”
하고 향촌동 위를 가리켰더니,
“거긴 동무들이 산보 잘 오는 데예요.”
하였다. 할 수 없이 나는 중학 때 원족으로 진관사(津寬寺) 가던 길을 생각하였다. 서대문 형무소 앞을 지나 무악재를 넘어서면 저 세검정(洗劍亭)에서 내려오는 개천이 모래도 곱고, 물도 맑았다. 철도 그때와 같이 가을이라 곡식 익는 향기와 들국화와 맑은 하늘과 새하얀 모새길이 곧 우리를 반길 것만 같았다. 그래서 먼지가 발을 덮는 서대문 형무소 앞을 참고 걸어서 무악재를 넘어섰다. 고개만 넘어서면 곧 길이 맑고 수정 같은 개천이 흐르리라고 믿었던 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얼마를 걸어도 먼지만 풀썩풀썩 일어난다. 거름 마차만 그 코를 찌르는 냄새에다 먼지를 일으키며 지나간다. 자동차가 한번 지나면 한참씩 눈도 뜰 수가 없고 숨도 쉴 수가 없다. 벌써 한 시간이나 거의 소비했다. 조용한 말이라고는 한마디도 못해보았다. 그 세검 정서 내려오는 개천은 여간 더 멀리 걷기 전에는 만날 것 같지도 않았다. 햇볕은 제일 뜨거운 각도로 우리를 쏘았다. 나는 산을 둘러보았다. 이글이글 단 바위뿐이다. 그러나 산으로나 올라가 앉을 자리를 찾는 수밖에 없었다. 산은 나무가 좀 있는 데를 찾아가니 맨 새빨갛게 송충이 먹은 소나무뿐이었다. 그리고 좀 응달이 진 데를 찾아가 앉으니, 실오리만한 물줄기에는 빨래꾼들이 천렵이나 하듯 법석이었다. 빨랫방망이들 소리에 우리는 여간 크게 발음을 하지 않고는 서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아내는 성북동(城北洞)으로 처음 나와 볼 때, 왜 그때 이렇게 산보하기 좋은 데를 몰랐느냐고 나를 비웃었고, 소설을 쓰되 연애 소설은 쓸 자격이 없겠다 하였다. 나의 변명은 그때 우리는 연애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런 소리를 하면 아내는 실쭉해져서,
“그럼 한이 풀리게 연애를 한번 해보구려.”
하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가끔 연애욕이 일어난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영원한 식욕일지도 모른다. 또 얼마를 해보든지 늘 새로운 것이어서 포만될 줄 모르는 것도 이것일지 모른다.
버스는 오늘도 나를 놀리고 간다. 우산을 접으며 뛰어가려니까 스타트해버린다. 나는 굳이 버스의 뒤를 보지 않으려 그 얄미운 버스 뒤에다 광고를 낸 어떤 상품의 이름 하나를 기억해야 할 의무를 가지지 않으려 다른 데로 눈을 피한다.
벌써 삼 년째 거의 날마다 집을 나와서는 으레 버스를 타지만, 뛰어오거나 와서 기다리거나 하지 않고 오는 그대로 와서, 척 올라탈 수 있게, 그렇게 버스와 알마치 만나본 적은 한 번도 없다. 그 여러 백 번에 한두 번쯤은 그런 경우가 있는 편이 도리어 자연스러운 일일 것 같은데 아직 한 번도 그 자연은 오지 않는다.
‘그러나 어디로 먼저 갈까?’
나는 한참 생각하다가 어느 편으로고 먼저 오는 버스를 타기로 한다. 총독부행(總督府行)이 먼저 온다. 꽤 고물이 된 자동차다. 억지로 비비고 운전사 뒷자리에 앉았더니 기계에 기름도 치지 않았는지 차를 정지시킬 때와 스타트 시킬 때마다 무엇인지 불부삽자루만한 것을 잡아당겼다 밀었다 하는데 그놈이 귀가 찢어지게 삐익― 삐익 소리를 낸다. 그러나 이 총독부행의 코스를 탈 때마다 불쾌한 것은 돈화문(敦化門) 정류장을 거쳐야 하는 데 있다. 거기 가서는 감독이 꼭 가래야만 차가 움직이는데 감독의 심사는 열 번에 한 번도 차를 곧 떠나게 하는 적은 없다. 차 안에 모든 눈이 ‘이 자식아, 얼른 가라구 해라’ 하는 듯이 쏘아보기를, 어떤 때는 목욕탕에 들어앉았을 때처럼 ‘하나 두울…….’ 하고 수를 헤어보면, 무릇 칠십 팔십까지 헤도록 해야 가라고 하는 것이다. 그나 그뿐이 아니라 뻔쩍하면 앞차로 갈아타라 뒤차로 갈아타라 해서, 어떤 신경질 승객에게서는 “바가야로” 소리가 절로 나오게 되는데 제일에 나 같은 키 큰 승객이 욕을 보는 것은 기껏 자리를 잡고 앉았다가 앉을 자리는 벌써 다 앉아버린, 다른 차로 가서 목을 펴지 못하고 억지로 바깥을 내다보는 체하며 서서 가야 하는 것이다.
“망할 자식, 무슨 심사루 차를 이렇게 오래 세워둬.”
또,
“저 자식은 밤낮 앞차로 갈아타라고만 하더라. 빌어먹을 자식…….”
하고 욕이 절로 나오지만, 생각해보면 그 감독이란 친구도 고의로 그러는 것은 아닐 뿐 아니라 승객 일반을 위해서는 그런 조절, 정리가 필요할 것은 무론이다.
그러나 이런 사회학적 사고(思考)는 나중 문제요, 먼저는 모두 저 갈 길부터 바빠서 욕하고 눈을 흘기고 하는 것이 보통이니, 이것은 조선 사회에 아직 나 같은 공덕 교양(公德敎養)이 부족한 분자가 많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버스 감독이란 것도 형사(刑事)나 세관리(稅關吏)만 못하지 않게 친화력과는 담 싼 직업이다.
오늘도 다행히 차는 바꿔 타란 말이 없었으나 헤이기만 했으면 아마 일흔은 헤었을 듯해서야 차가 움직이었다.
안국동(安國洞)서 전차로 갈아탔다. 안국정(安國町)이지만 아직 안국동이래야 말이 되는 것 같다. 이 동(洞)이나 리(里)를 깡그리 정화(町化)시킨 데 대해서는 적지 않은 불평을 품는다. 그렇게 비지니스의 능률만 본위로 문화를 통제하는 것은 그릇된 나치스의 수입이다. 더구나 우리 성북동(城北洞)을 성북정 (城北町) 이라 불러보면 ‘이주사’라고 불러야 할 어른을 ‘리상’이라고 남실거리는 격이다. 이러다가는 몇 해 후에는 이가니 김가니 박가니 정가니 무슨 가니가 모두 어수선스럽다고 시민의 성명까지도 무슨 방법으로든지 통제할는지도 모른다.
모든 것에 있어 개성(個性)을 살벌하는 문화는 고급한 문화는 아닐 게다.
“조선중앙일보사 앞이오.”
하는 바람에 종로까지 다 가지 않고 내린다. 일 년이나 자리 하나를 가지고 앉았던 데라 들어가면 일은 없더라도, 인전 하품 소리만큼도 의의가 없는 “재미 좋으십니까?” 소리밖에는 주고받을 것이 없더라도, 종로 일대에서는 가장 아는 사람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이라 과히 바쁘지 않으면 으레 한 번씩 들러보는 것이 나의 풍속이다.
그러나 들어가서는 늘 싱거움을 느낀다. 나도 전에 그랬지만 손목만 한번 잡아볼 뿐, 그리고 옆에 의자가 있으면 앉으라고 권해볼 뿐, 저희 쓰던 것을 수굿하고 써야만 한다. 나의 말대답을 하다가도 전화를 받아야 한다. 손은 나와 잡고도,
“얘! 광고 몇 단인가 알아봐라.”
소리를 급사에게 질러야 한다. 선미(禪味) 다분(多分)한 여수(麗水)가 사회부장(社會部長) 자리에서 강도나 강간 기사 제목에 눈살을 찌푸리고 앉았는 것은 아무리 보아도 비극이다. 동아에선 빙허(憑虛)가 또 그 자리에서 썩는 지 오래다. 수주(樹州) 같은 이가 부인 잡지에서 세월을 보내게 한다.
“이렇게까지들 사람을 모르나?”
좋게 말하자면 사원들의 재능을 만점으로 가장 효과적이게 착취할 줄들을 모른다. 내가 한번 신문, 잡지사의 주권자가 된다면, 인재 배치(人才配置)에만은 지금 어느 그들보다 우월하겠다는 자신에서 공연히 썩는 이들을 위해, 또 그 잡지 그 신문을 위해 비분해본다.
“왜, 벌써 가시렵니까?”
“네.”
나는 언제나 마찬가지로 동경 신문 몇 가지를 뒤적거리다가는 그들이 나의 친구가 되기에는 너무 시간들이 없는 것을 느끼고 서먹해 일어선다.
“거, 소설 좀 몇 회치씩 밀리게 해주십시오.”
“네.”
대답은 한결같이 시원하다. 그러나 미리는 안 써지고 쓸 재미도 없다. 이것은 참말 수술이라도 해야 할 악습이다. 이러고 언제 신문 소설이 아닌 본격 장편을 한 편이라도 써보나 생각하면 병신처럼 슬퍼진다.
출판부(出版部)로 내려와본다. 여기 친구들도 바쁘다. 돌리는 의자를 끝까지 치켜올리고는 그 위에서도 양말을 벗어 내던진 발로 뒤를 보듯 쪼크리고 앉아 팔을 걷고 한 손으로는 담뱃재를 툭툭 떨어가면서, 한 손으로는 박짝박짝 철필을 긁어내려가는, 아명 신복씨(兒名信福氏)는 바쁜 사람 모양의 전형일 것이다.
“원고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웬 원고는요?”
난 몇 번 부탁은 받았으나 아직 써 보낸 것은 하나도 없다고 기억 된다.
“인제 써주시면 감사하겠단 말씀이죠.”
하고, 역시 여기서 간쓰메가 되어 있는 윤 동요작가(尹童謠作家)가 해설 해준다.
“그럼, 인제 써드리리다.”
하였더니 그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신복씨는 의자를 뱅그르르 돌리며 내려서더니 원고지와 펜을 갖다 놓는다.
“수필 하나 써주십시오.”
“무슨 제목입니까?”
“바다 하나 써주십시오.”
나는 작문 한 시간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바다!”
멀리 쳐다보이는 것은 비에 젖은 북한산이다. 들리는 건 처맛물 떨어지는 소리와 공장에서 윤전기 돌아가는 소리다.
“바다!”
암만 바다를 불러보아도 내가 그리려는 바다는 오백오십 리를 동으로 가야 나올 게다. 한 줄 쓰다 찍, 두 줄 쓰다 찍, 작문 시간에 학생들에게 심히 굴지 말아야 할 것을 느낀다. 파리가 날아와 손등에 앉는다. 장마 파리는 구더기처럼 처끈처끈하고 서물거리는 감촉을 준다. 날려버리면 이내 또 그 자리에 와 앉는다. 이런 때 끈끈이를 손등에다 발랐으면 요 파리란 놈이 달라붙어 가지고
처음 날릴 때 멀리 달아나지 않은 것을 얼마나 후회할까 생각해 본다. 그러다 보니 ‘바다’를 써야 할 것을 한참이나 잊어버리고 있었다.
“이선생님?”
“네?”
“『조광』 내월호(朝光來月號) 어느 날 나오는지 아십니까?”
“모릅니다.”
하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알더라도 모른다고 해야 할 대답이다. 신문들의 경쟁보다 잡지들의 경쟁은 표면화되어 있다. 중앙과 조광에 다 그만치 놀러 다니는 나를 이 두 군데서 다 이런 것을 묻기도 하는 반면 요시찰인시(要視察人視)할지도 모른다. 모른다가 아니라 그럴 줄 알아야 할 사실이다. 좀 불쾌하다. 또 깨달으니 ‘바다’를 한참이나 잊어버리고 있었다.
말동무가 그립다. 조광사(朝光社)에 들러보고 싶은 생각도 난다. 그러나 들르나마나다. 뻔한 노릇이다. 노산(鷺山)은 전화로 맞추고 가기 전에는 자리에 없기가 일쑤요, 일보(一步)는 직접 편집에 양적(量的)으로 바쁜 이요, 석영(夕影)은 삽화 그리기에 한참씩 눈을 찌푸리고 빈 종이만 내려다보아 얼른 보기엔 한가한 듯하나 질적(質的)으로 바쁜 이다.
바로 낙랑(樂浪)으로 가니, 웬일인지 유성기 소리가 나지 않는다. 그러나 문만 밀고 들어서면 누구나 한 사람쯤은 아는 얼굴이 앉았다가 반가이 눈짓을 해줄 것만 같다. 긴장해 들어서서는 앉았는 사람부터 둘러보았다. 그러나 원체 손님도 적거니와 모두 나를 쳐다보고는 이내 시치미를 떼고 돌려버리는 얼굴뿐이다. 들어가 구석 자리 하나를 차지하고 앉는다. 불쾌하다. 내가 들어설 때 쳐다보던 사람들은 모두 낙랑 때가 묻은 사람들이다. 인사는 서로 하지 않아도 낙랑에 오면 흔히는 만나는 얼굴들이다. 그런 정도로 아는 얼굴은 숫제 처음 보는 얼굴만 못한 것이 보통이다.
그런 얼굴들은 내가 들어서면, 나도 저희들에게 그런 경우에 그렇게 할 수 있듯이,
‘저자 또 오는군!’
하고 이유 없이 일종의 멸시에 가까운 감정을 가질 것과 나아가서는,
‘저자는 무얼 해먹고 살길래 벌써부터 찻집 출근이람?’
하고 자기보다는 결코 높지 못한 아무걸로나 평가해볼 것에 미쳐서는 여간 불쾌하지 않다.
커피 한 잔을 달래놓았으나 컵에 군물이 도는 것이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 그 원료에서부터 조리에까지 좀 학적양 (學的良心)을 가지고 끓여논 커피를 마셔봤으면 싶다. 그러면서 화제 없는 이야기도 실컷 지껄여보고 싶다.
나는 심부름하는 애를 불렀다.
“너 이층에 올라가 주인 좀 내려오래라.”
“아직 안 일어나셨나 분데요.”
“지금 몇 신데 가서 깨워라.”
“누구시라도 여쭐까요?”
“글쎄, 그냥 가 깨워라 괜찮다.”
하고 우기니깐야 그애는 올라간다.
주인은 나와 동경 시대에 사귄 ‘눈물의 기사’ 이군(李君)이다.
눈물에 천재가 있어 공연한 일에도,
“아하!”
하고 감탄만 한번 하면 곧 눈에는 눈물이 차버리는 친구로 밤낯 찻집에 다니기를 좋아하더니 나와서도 화신상회에서 꽤 고급을 주는 것도 미술가를 이해해주지 못한다는 불평으로 이내 고만두고 이 낙랑을 차려놓은 것이다.
그는 나를 만나면, 늘 조용히 하고 싶은 말이 있노라 했다. 한번은 밤에 들렀더니 이층에 있는 자기 방으로 끌고 가서, 자기가 연애를 하는 중이라고 말하였다. 상대자는 서울 청년들이 누구나 우러러보지 않는 사람이 없는, 평판 높은 미인인데, 그 모두 쳐다만 보는 높은 들창의 열쇠를 차지한 행운의 사나이는 자기란 것과,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열 몇 달이라는 시일을 두고 이 낙랑의 수입을 온통 걸어가면서 뭇 사나이의 마수를 막아가던 이야기를 눈물이 글썽글썽 해서 하였다. 그리고는,
“자네 알다시피 내겐 처자식이 있지 않나? 이를 어쩌면 좋은가?”
하고 그것을 좀 속시원하게 말해달라 하였다. 나는 오래 생각할 것도 없이 만일 내 자신에게 그런 경우가 생겨도 그렇게밖에는 할 도리가 없기 때문에,
“단념해 보게 .”
하였다.
“어느 편을?”
하고 그의 눈은 최대한도의 시력을 내었다.
“연인을.”
하니 ,
“건 죽어도ㅍ.”
하였다.
“그럼 연애를 그대로 하게나.”
하였더니 ,
“아낸 그냥 두구 말이지?”
한다.
“그럼, 몰래 하는 연애까지야 아내가 간섭 못할 것 아닌가? 결혼을 할 작정이라면 몰라도…… 자네 결혼까지 하고 싶은가?”
하였더니 ,
“그럼…… 그럼…….”
하고 그는 고개를 숙였다. 나는,
“죽어도 단념할 수는 없다니 자네 나갈 탓이지 제삼자가 뭐라고 용훼하나?”
하고 물러앉으려 하였더니 그는 내 손을 덤뻑 잡고,
“아직 우린 순결하네. 끝까지 정신적으로만 사랑해나갈 순 없을까?”
묻는 것이었다.
“그건 참 단념하는 것만은 못하나 좋은 이상이긴 하네.”
하였더니 그는,
“이상이라? 그럼 불가능하리란 말일세 그려?”
했다. 그리고 그 여자의 초상화 그린 것을 내다 보이며,
“미인 아닌가?”
하면서 울었다.
그 뒤 얼마 만에 만났더니 그는 얼굴이 몹시 상했고 한쪽 손 무명지를 붕대로 칭칭 감고 있었다. 왜 그러냐 물었더니,
“생인손을 앓아 짤라버렸네.”
하는데 그 대답이 퍽 부자연스러웠다. 나는 감격성 많고 선량한 그가 그 연애 사건으로 말미암아 단지(斷指)한 것임을 직각하였으나 여럿이 있는 데서라 다시 묻지는 봇하였는데 영업이 잘 되지 않아 낙랑도 팔아버리고 동경으로나 다시 가 바람을 쐬겠다고 하면서 낙랑 인계할 만한 사람이 있거든 한 사람 소개해달라고 하는 양이 여러 가지 비관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 뒤로는 다시 못만났는데 심부름하는 아이는 한참 만에 내려오더니,
“주인 선생님이 일어나셨는데 어디루 나가셨나 봐요. 아마 댁으로 진지 잡수러 가셨나 봐요.”
하는 것이다.
“집에? 집에 가 잡숫니, 늘?”
“어쩌다 조선 음식 잡숫고 싶으면 가시나 봐요.”
한다. 구보도 이상도 나타나지 않는다. 비는 한결같이 구질구질 내린다. 유성기 소리가 나기 시작한다. 누구든지 한 사람 기어이 만나보고만 싶다. 대판옥(大阪屋) 이나 일한서방(日韓書房)쯤 가면 어쩌면 월파(月 坡)나 일석 (一石)을 만날지도 모른다.
‘친구?’
나는 이것을 생각하며 낙랑을 나서 비 내리는 포도를 걷는다. 낙랑의 이군만 해도 서로 친구라고 부르는 사이다. 그러나 그가 그의 집으로 갔나 보다고 할 때, 나는 그의 집안을 상상하기에 너무나 막연하다. 그의 어머니는 어떤 부인이요, 아버지는 어떤 양반이요, 대체 이군은 어디서 났으며 소학교는 어디를 다녔으며 어릴 때의 그는 어떤 아이였더랬나? 나는 깜깜이다. 그가 만일 친상을 당했다 하더라도 나는 어떤 노인이 죽은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 막연할 것이다. 그의 조상에는 어떤 사람이 났었나, 그의 어린애들은 어떻게 생긴 아이들인가 모두 깜깜하다.
‘이러고도 친구 간인가? 친구라 할 수 있는 것인가?’
생각이 들어간다. 생각해보면 오늘 만나본 중앙일보사의 모든 사람들, 또 지금부터 만났으면 하는 구보나 이상이나 월파나 일석이나 모두 안 그런 친구는 하나도 없지 않은가?
모두 한 신문사에 있었으니깐 알았고, 한 학교에 있으니깐 알았고, 한 구인회원이니깐 안 것뿐이 아닌가? 직 업적으로, 사무적으로, 자주 만나니까 인사하고 자주 인사하니까 손도 잡고 흔들게 되고 하는 것뿐이지 더 무슨 애틋한, 그리워해야 할 인연이나 정분이 어데 있단 말인가? ‘친구 간에 어쩌고어쩌고·…….’ 하는 말이 모두 쑥스럽지 않은가? 그러자 나는 몇 어렸을 때 친구 생각이 난다.
용기, 흥봉이, 학순이, 봉성이……. 그들은 정말 친구라 할 수 있을까? 어려서 빨가벗고 한 개울에서 헤엄을 치고 자랐다. 그래 서 용기 다리에는 무슨 흠집이 있고 봉성이 잔등에는 기미가 몇인 것까지도 안다. 학순이는 대운동회 때, 나와 이인삼각(二人三脚)의 짝이 되어 일등을 탄 다음부터 더 친하게 놀았다. 그들의 조부모는 어떤 사람들이고 부모는 어떤 사람들이고 죄 안다. 그들의 집 안 풍경까지도 소상하다. 누구네 집 마당에는 수수배나무가 서고, 누구네 집 뒷동산에는 밀살구나무가 선 것까지도…….
‘참! 지난봄에 학순이에게서 편지 온 걸…….’
나는 아직 답장을 해주지 못한 것을 깨닫는다. 몇 가지 부탁이 있은 것까지 모른 체해버리고 만 것이 생각난다. 그때 즉시 답장을 하지 못한 것은 바빠서라기보다 그냥 모른 척해버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의 편지 사연은 지금도 기억할 수 있다.
“어느 잡지책에선가 보니 자네가 『달밤』이란 소설책을 냈데 그려. 이 사람, 내가 얘기책 좋아하는 줄 번연히 알면서 어쩌문 그거 한 권 안 보내준단 말인가? 그런데 책 이름을 어째 그렇게 지었나? ‘추월색’이니 ‘강상명월’이니만치 운치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 내용은 물론 연애 소설이겠지? 하여간 한번 읽어보고 싶네. 부디 한 권 부쳐주기 바라며 또 한 가지 부탁은 돈은 못 부치나 담배꽁댕이를 모아 담아 먹으려 하니 아조 죄고만 고불통 물뿌리 하나만 사서 『달밤』과 함께 똘똘 말아 부쳐주게. 야시에 가면 십전짜리 그런 고불통이 있다…….”
소학교 이후 그는 농촌에만 묻혀 있으니 남의 창작집(創作集)을 『추월색』 따위 이야기책과 비겨 말하려는 것이 무리는 아니나 좀 불쾌하기도 하고 『달밤』을 보낸댔자 그의 기대에 맞을 리가 없을 것이 뻔하여 그 고불통까지도 잠자코 내버려뒀던 것이다.
나는 후회한다. 그가 알고 읽든, 모르고 읽든, 한 책 보내주어야 할 정리에 쥐쁠 같은 자존심만 낸 것을 후회한다.
나는 진고개로 들어서서 고불통, 마도로스 파이프부터 눈여겨보았다. 하나도 십 전 급엣것은 없다. 모두 오륙 원 한다. 이런 것은 그에게 『달밤』 이 맞지 않을 이상으로 당치 않은 것들이다.
대판옥서점으로 들어섰다. 책을 보기 전에 사람부터 둘러보았으나 아는 이는 한 사람도 없다. 신간서(新刊書)도 변변한 것이 보이지 않는데 장마 때에 무슨 먼지나 앉았을라고 점원이 총채를 가지고 와 두드리기 시작한다. 쫓기어나와 일 한서방(日韓書房)으로 가니 거기도 아는 얼굴은 하나도 없는 듯하였는데 그 아는 얼굴이 아니었던 속에서 한 사람이 번지르르한 레인코트를 털면서 내 앞으로 다가왔다.
“이군 아냐?”
그의 목소리를 듣고 보니 전에 안경 안 썼던 때의 그의 얼굴이 차츰 떠올라온다.
“강군…….”
나도 그의 성을 알아맞혔다. 중학 때 한 반이었던 사람이다. 그는 나의 손을 잡고, 흔들면 흔들수록 옛날 생각이 솟아나는 듯 자꾸 흔들기를 한참 하더니 나를 본정 그릴로 데리고 간다. 클로크에 들어서 모자를 벗는 것을 보니 머리는 상고머리요, 레인코트를 벗는 것을 보니 양복 저고리 에리에는 일장기 배지를 척 꽂았다. 테이블을 정하고 앉더니 그는 그 일장기 꽂힌 옷깃을 가다듬고.
“그간 자네 가쓰야꾸부리는 신문 잡지에서 늘 봤지.”
하였고 다음에는,
“그래, 돈 좀 잡았나?”
하는 것이다.
“돈?”
하고 나는 여러 가지 의미의 고소를 그에게 주었다. 그리고,
“자넨 좀 붙들었나?”
물었더니
“글쎄, 낚시는 몇 개 당거놨네만…….”
하고 맥주를 자꾸 먹으라고 권하더니 자기도 한 잔 들이키고 나서는,
“자네도 알겠지만 세상일이 다 낚시질이데그려, 알아듣겠나? 미끼가 든단 말인세, 허허…….”
하고 선웃음을 치는 것이 여간 교젯속에 닳지 않았다.
“나 그간 저어 황해도 어느 해변에 가 간사지 사업 좀 했네.”
“간사지라니?”
나는 간사지가 무엇인지 모른다. 그는,
“허, 안방 도련님일세그려.”
하고 설명해주는데 들으니 조수가 들락들락하는 넓은 벌판을 변두리를 막아 다시는 조수가 못 들어오게 하고 그 땅을 개간한다는 것이다.
“한 사오십 정보 맨들어놨네.”
하더니 내가 그 사업의 가치를 잘 몰라주는 것이 딱한 듯,
“잘 팔리면 오십만 원쯤은 무려할 걸세. 난 본부에 들어가서두 막 뻗히네.”
하는 것이다.
“본부라니?”
나는 간부(姦婦)와 대립되는 본부(本婦)는 아닐 줄 아나 그것도 무엇인지 몰랐다.
“허, 이 사람 서울 헷있네그려, 본불 몰라? 총독불!”
하고 사뭇 무안을 준다. 그리고 자기는 정무총감한테 가서도 하고픈 말은 다 한다고 하면서 간사지란, 지도에도 바다로 들어가는 것인데 그것을 훌륭한 전답지로 만들어놓았으니 국토를 늘려논 셈 아닌가 하면서,
“안 해 그렇지 군수 하나쯤이야 운동하면 여반당이지.”
하고 보이를 크게 부르더니 날더러 뭘 점심으로 시켜 먹자고 한다. 런치를 시키더니,
“여보게?”
하고 목소리를 고친다.
“말하게.”
“자네 여학교에 관계한다데그려?”
“좀 허지.”
“나 장개 좀 드려주게.”
하고 또 선웃음을 친다.
몹시 불쾌하다. 점심만 시키지 않았으면 곧 일어나고 싶다.
“이 사람, 친구 호사 한번 시키게나그려? 농람이 아니라 진담일세. 나 지금 독신일세.”
나는 그에게 아직 미혼이냐 이혼이냐 상배를 당했느냐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친구라는 말에만 정신이 번쩍 났다. 그는 역시 친구라는 말을 태연히 쓴다.
“친구 간에 오래 격조했다 만났는데 어서 들게.”
하고 맥주를 권하였고,
“친구 간 아니면 갑자기 만나 이런 말 하겠나.”
하고 트림을 한다.
런치가 나오기 시작한다. 나는 이 사람이 금세 “세상일은 다 낚시질이데그려” 하던 말을 잊을 수 없다. 이것도 나의 낚시질인지 모른다. 내가 미끼를 먹는 셈인지도 모른다.
“여잔 암만해두 인물부터 좀 있어야겠데…… 자녠 어떻게 생각하나?”
나는 ‘옳지, 낚시질 시작이로구나’ 하고,
“글쎄…….”
하였을 뿐이다. 생각하면 낚시질이란 반드시 어부 편에만 이익이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고기가 미끼만 곧잘 따먹어낼 수도 없지는 않은 것이다. 그가 비싼 것을 시키는 대로, 그가 권하는 대로 내 양껏 잘 먹고 소화해볼 생각이 생긴다.
그는 나중에,
“자넨 문학가니까 연애나 결혼이나 그런 방면에 나보다 대갈 줄 아네, 자네가 간택한 여자라면 난 무조건하고 복종할 테니 아예 농담으루 듣지만 말게…… 내 자랑 같네만 본부에 있는 친구들서껀, 참 자네 ×사무관 아나?”
한다.
“알 택 있나.”
“메칠 안 있으면 도지사 돼 나갈 결세. 그런 사람들도 당당한 재산가 영양들만 소개하지만 자네 소개가 원일세. 소설에 나오는 것 같은 쪽 뽑은 신여성 하나 천해주게. 내 어려운 살림은 안 시킬 걸세.”
그리고,
“친구 간이니 말일세만 독신 된 후론 자연 화류계 계집들과 상종이 되니 몸도 이전 괴롭고 첫째 살림꼴이 되나 어디…….”
하더니 명함 한 장을 꺼내 주고 서울 오면 교제상 어쩔 수 없어서 비전옥(備前屋)에 들어 있으니 자주 통신을 달라 한다. 그리고 길에 나와 헤어져서 저만치 가다 말고 돌아서더니,
“꼭 믿네.”
하고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그가 이제부터 또 누구에게 “낚시는 몇 개 당거놨네만” 하는 말에는 오늘 나에게 런치 먹인 것도 들어갈는지도 모른다.
비는 그저 내린다. 못 먹는 맥주를 두어 곱뿌나 먹었더니 등어리가 후끈거린다. 이런 것이 다 나에게도 교젯속 공부일지 모른다.
“내 어려운 살림은 안 시킬 걸세.”
하던 강군의 말이 잊혀지지 않는다.
‘난 아내에게 어려운 살림을 시키는 남편이다!’
나는 낙랑 뒤를 돌아 중국 사람들의 거리로 들어섰다. 아내가 젖이 잘 나지 않던 어느 해다. 누가 중국 사람들이 먹는 도야지족을 사다 먹이라 하였다. 사다 먹여보니 젖이 잘 나왔다. 여러 번 먹어보더니 맛을 들여 젖은 안 먹이는 지금도 그것만 사다 주면 좋아한다. 나는 천증원(天增園)에 들러 제일 큰 것으로 하나 샀다. 그리고 그길로는 한도(漢圖)로 갔다. 고불통은 다른 날 사 보내기로 하고 우선 『달밤』만 한 책을 학순에게 부쳤다.
우리 성북동 쪽 산들은 그저 뽀얀 이슬비 속에 잠겨 있다.
-끝-
2016년 5월 19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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