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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점] 제방
그 후 기타하라에게서 두어 차례 더 편지가 왔으나, 요코는 번번히 봉투도 뜯지 않고 태워 버렸다. 요코는 어떤 변명도 듣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서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이고 싶다.’
고 간절히 바랐던 요코에게 기타하라와 다른 여자가 정다운 포즈로 찍은 사진은 큰 상처를 주었다.
7월이 되자 도오루가 여름방학을 맞아 집으로 돌아왔다.
“기타하라는 네가 어디 아파서 누워 있는 게 아닐까하고 걱정하던데. 녀석은 맹장을 도려내고 쭉 입원해 있었거든.”
“입원?”
요코는 가슴이 막혔다.
“상태가 많이 나빠?”
“지금은 위기를 넘겼을 거야. 한때는 혈압이 많이 내려가 위험했었지만.”
“그렇게 안 좋았어?”
요코는 만일 기타하라가 죽기라도 했다면 하는 생각만 해도 몸이 떨려왔다.
”기타하라는 여자들에게 인기 만점이야. 언제 가 봐도 아가씨들이 문병 와 있었어.“
지금이라도 달려가 문병하고 싶다고 생각하던 요코의 마음에 찬물을 끼얹는 말이었다.
”그런데 오빠, 승마 실력은 많이 늘었어?“
요코는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기타하라에게 상처받은 자신을 숨기고 싶었다.
도오루가 돌아오자 역시 집안 분위기가 환해졌다. 그러나 요코의 마음은 쓸쓸했다. 병원에 있을 기타하라의 일이 언제나 마음에 걸렸다. 한번 만나 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였다. 작년 이맘때 숲속에서 처음 기타하라를 만났다는 생각이 들자 요코는 숲속에 들어가 보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요코는 기타하라와 처음 만난 그 날 스트로브소나무 숲속의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있었다. 요즘 와서 요코는 기타하라를 만나고 싶으면 항상 그 나무 그루터기에 가서 앉아 있곤 했다. 그곳에 가 있으면 기타하라가 티모시가 하늘거리는 오솔길에서 불쑥 나타날 것만 같았다.
‘이렇게 만나고 싶은데......하지만 나는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없어.’
요코는 기타하라가 병으로 누워 있다는 말을 듣고도 위문 편지 한 장 보내지 않는 자신에게 놀라고 있었다.
‘사랑이란 증오일까?’
요코는 자신의 이상야릇한 마음의 움직임이 야속했다. 예전의 요코는 이렇게 사람에게 화를 내고 미워하고 망설이고 그리워하는 격한 감정 같은 것은 가져본 적이 없었다.
요코는 나무 그루터기에 걸터앉아 하늘을 쳐다보았다. 스트로브소나무의 부드러운 초록색 나뭇가지가 햇살에 반짝이는 흰 구름 속을 마냥 흘러가는 것 같았다.
이때 뒤에서 발소리가 났다. 순간 요코는 숨을 죽였다.
‘기타하라 씨가 왔을 리는 없어.’
요코는 쓴웃음을 지었다.
“요코, 왜 그렇게 멍하니 앉아 있지?”
돌아보니 흰 바탕에 검정 무늬 옷을 입은 도오루가 서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요코는 명랑한 얼굴로 일어나 소매 없는 옷을 입고 있어 다 드러난 팔로 가볍게 팔짱을 끼는 시늉을 햇다.
‘만일 이곳에 기타하라 씨가 나타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가슴에 매달려 흐느껴 울까, 아니면 재빠릴 도망칠까? 오빠에겐 그 어느 쪽도 할 수 없어.’
“요즘엔 어쩐지 기운이 없어 보이는구나.”
도오루는 기타하라와 요코가 정월 이후로 다시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하자 요코를 독점해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지금 자신의 눈앞에 하얀 팔을 드러내고 서 있는 요코를 보자, 도오루는 새삼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야, 이렇게 기운이 팔팔한데. 나 술레잡기하고 싶어. 도망칠게, 오빠.”
요코는 재빨리 도오루의 옆을 지나쳐 단숨에 제방을 향해 뛰어갔다. 제방 끄트머리에 푸른 하늘이 보였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니 제방 위의 요코가 마치 푸른 하늘 속을 달려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을 보자 도오루도,
“좋아.”
하고 소리치고는 뒤따라갔다. 도오루가 제방으로 뛰어오르자 요코는 벌써 제방을 내려가 흰 스커트를 펄럭이며 어두컴컴한 독일 가문비나무 숲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컴컴한 숲속에 들어가자 도오루는 소나무 뿌리에 발이 걸려 넘어질 뻔했다. 게다를 신고 달린다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이 들어 도오루는 천천히 걷기 시작햇다. 조릿대 숲과 움푹 팬 땅을 보니 어렸을 때의 놀이터였던 생각이 나서 도오루는 그리운 듯이 멈춰 섰다. 등산모를 쓰고 윤척(나무의 지름을 측정하는 자)를 든 청년이,
“아,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하면서 지나갔다. 이곳 시험림을 관리하고 있는 아사히가와 영림국의 직원이었다. 도오루는 어렸을 때도 그들의 모습을 이 숲에서 자주 봤던 생각이 났다.
숲속만은 옛날의 이미지가 변치 않을 것 같았다.
‘그 무렵에는 요코를 친동생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요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빨리 와.”
숲 밖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숲을 빠져나가자 요코가 강가의 나무에 등을 기대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요 근래에 이렇게 힘차게 달려 본 적이 없었어. 오빠 덕분에 무척 즐거웠어.”
“그거 잘 됐구나. 난 게다를 신고 있어서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어.”
도오루는 웃으면서 풀 위에 주저앉았다. 요코도 나란히 앉았다.
하늘이 맑게 개어 있어 도카치다케의 연이은 푸른 봉우리들이 한결 아름답게 보였다.
“요코.”
“응?”
“끝말잇기놀이 할까?”
“좋아.”
요코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연상(連想)놀이 쪽이 더 재미있는데.”
“알았어. 사이를 두지 말고 곧장 대답하지 않으면 지는 거야. 알겠어? 숲.”
“폭풍의 언덕.”
하마터면 요코는 기타하라의 이름을 댈 뻔했다.
연상놀이에 싫증이 나자 도오루와 요코는 말없이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오루는 연한 풀을 뜯어 손으로 훑어보곤 하다가 한 움큼 쥐어 강물에 던졌다. 풀은 한 바퀴 빙 돌아 강물을 따라 흘러갔다.
“요코.”
“응?”
“진학할 학교는 결정했니?”
요코는 말없이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빨리 결정하고 수험 대책을 세우는 게 좋을 텐데.”
“난 대학에 안 갈 거야.”
“안 가? 왜?”
도오루는 깜짝 놀라 요코를 바라보았다.
“더 이상 공부하고 싶지 않아.”
“거짓말 마. 넌 수학 공부를 하고 싶어했잖아?”
그 말에 요코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요코는 진학반에 들어가지 않았니?”
“오빠, 난 역시 뒤틀려 있는 건지도 몰라. 고등학교를 마치는 것만으로도 과분하다고 생각해.”
“바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오빠, 야단치지 마. 솔직히 말해서 난 대학에 보내 달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어. 그보다도 난 내 힘으로 일하고 싶어. 난 고집불통인가봐. 그렇지 않으면 마음이 비뚤어진 건지도 몰라.”
요코는 쓸쓸해 보였다.
“요코는 조금도 비뚤어지지 않았어. 하지만 좀 마음에 걸리는걸.”
“뭐가?”
“요코, 고등학교를 마치면 취직할 생각이지?”
“응.”
“무슨 일을 할 거야?”
“국가 공무원 시험을 봐서 영림국에라도 들어가 일하고 싶어.”
“하지만 요코, 네가 일해 봤자 집에 큰 보탬이 되는 것도 아니고, 대학에 간다고 해서 우리 집 재산이 그리 축나는 것도 아니잖아?”
“그건 알고 있어. 문제는 나 자신에게 있어. 난 내 자립심을 존중하고 싶어. 내가 어른이 된다는 건 경제적으로 자립하는 거라고 생각해.”
도오루는 불안한 듯이 요코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요코 혹시 고등학교를 마치면 바로 집을 나가려는 생각 아니야?”하고 말했다.
“아니야. 직장이나 갖겠다는 거야. 집을 뛰쳐나가거나 하지는 않아. 그런 짓을 하면 지금까지 키워준 아버지 어머니에게 죄송하잖아.”
“그래?”
도오루는 마음이 놓이는 듯이 빙긋 웃었다.
“내가 집을 나가는 건 죽었을 때뿐일 거야.”
요코의 말에 도오루는 가슴이 뜨끔했다. 요코는 결혼할 때가 집을 나가는 때가 아닌가.
‘혹시 요코는 결혼하지 않을 생각인가? 아니면......’
도오루는 청년다운 자만심을 갖고 요코를 바라보았다.
“요코, 집을 나가는 건 결혼할 때가 아닌가?”
도오루는 시치미를 떼고 말햇다. 강물이 햇살에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싫어, 난 결혼 같은 건 안 할 거야.”
“왜?”
“왜는 뭐.....그냥.”
“그럼 평생 혼자 살 거야?”
“그러면 안 될까?”
“요코의 나이 때에는 누구나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느니 하고 곧잘 말하는 거야.”
도오루는 요코가 기타하라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그런 걸까? 하지만 난 정말 언제까지나 집에 있고 싶어.”
요코는 기타하라의 사신을 떠올리고 잇었다. 쓸쓸했다. 숲속에서 산비둘기가 나직하게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요코.”
“응?”
“요코가 정말 언제까지나 집에 있어 준다면.......”
도오루는 말을 더듬거렸다. 요코가 언제까지나 집에 있고 싶다는 것은 혹시 자기와 함께 있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도오루는 생각했다.
“참, 오빠가 결혼하면 곤란하겠구나. 시누이인 내가 집에 계속 눌러붙어 있으면 말이야.”
요코는 익살스럽게 목을 움츠리고 킥킥 웃었다. 그러나 도오루는 웃지 않았다. 요코가 자기와의 결혼을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말인지, 전혀 그럴 생각이 없는지 도오루로서는 알 수 없었다.
“난 말이지.......”
‘요코와 결혼하고 싶어.’
남매로 자랐다는 것이 도오루를 망설이게 했다. 좀 더 거리를 두고 생활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말이었다.
“혹시 다쓰코 아줌마 얘기 들었어?”
도오루는 나쓰에한테서 들은 말을 떠올렸다.
“다쓰코 아줌마에게 무슨 일이 있었어?”
“널 달라고 했대.”
“어머, 정말?”
“아줌마에겐 자식이 없잖아. 어차피 요코는 결혼하면 집을 나갈 테니까 차라리 지금 달라고 한 게 아닐까?”
도오루는 자세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그래서 나쓰에가 말한 것만 전할 수밖에 없었다.
‘태어나자마자 남의 손에 넘겨졌는데 또다시 남의 집으로 가야 하다니....’
자신이 너무도 좋아하는 다쓰코 아줌마네 집이라도 요코는 몹시 서글펐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달라’느니 ‘준다’느니 하는 말이 오가는 자기 자신이 무척 가엾게 생각되었다.
“어머니는 뭐라고 했을까?”
“어머니야 지금까지 애써 키웠으니까 신부 모습으로 집을 내보내고 싶다고 했대.”
요코의 얼굴이 반짝 빛났다.
다쓰코의 집에 보내면 요코는 대학에 진학하게 될 것이고 거기다가 많은 재산을 물려받게 되지 않을까 해서 나쓰에가 그렇게 말한 것을 도오루나 요코가 알 리가 없었다.
요코는 나쓰에의 말이 눈물겹도록 고마웠다.
“기뻐, 오빠.”
요코는 이렇게 말하고 도오루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자신에게 싸늘하게 대하던 나쓰에가 자기를 내보내려 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요코는 순진하게 기뻐했다. 그러나 그런 요코의 기쁨을 도오루로서는 알 리가 없었다. 쓰지구치 집에 계속 있고 싶어한는 것은 자기와 함께 사는 것을 기뻐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도오루는 제멋대로 생각했다.
두 사람은 다시 여름풀이 길게 자란 컴컴한 독일가문비 숲으로 되돌아갔다. 숲속에는 햇빛이 저녁 안개처럼 서려 있었다. 인상파 화가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이 숲은 어둡지만 참 좋아.”
“그래.”
도오루는 요코에게 하고 싶은 말이 가슴에 가득 차 있었다.
“오빠.”
요코가 멈춰 섰다. 산비둘기가 또다시 나직하게 울고 있었다.
“왜?”
“저.....저기 말이야, 오빤 내 친 아버지나 어머니에 대해 알고 있어?”
뜻밖의 물음에 도오루는 얼른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나무뿌리에 발이 걸리자 도오루는,
“아, 아파. 발이 걸렸어.”
하고 얼굴을 찌푸렸다.
“괜찮아?”
“응. 근데 조금 아파. 요코의 친아버지와 어머니를 알고 있느냐고? 나도 어렸을 때 일이라 아무것도 몰라. 우리 아버지도 모르시지 않을까?”
도오루는 마음속으로 필사적이었다.
“그래? 모를까? 오빠, 난 날 낳아 준 부모와 오빠의 어머니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어.”
요코는 중학교 졸업식 때의 답사 사건을 떠올리면서 말했다.
“하지만 이제 그런 생각은 하지 않을 거야.”
‘어머니는 나를 다쓰코 아줌마한테도 주지 않겠다고 말했는데.’
“그래. 그런 건 생각해 봐야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까.”
도오루는 한시름 놓았다. 요코가 자기를 낳아 준 부모를 꼬치꼬치 캐묻는다면 곤란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요코가 정말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코, 걱정되는 일이 있으면 뭐든지 오빠한테 말해.”
“고마워.”
요코는 도오루의 말이 고맙고도 기뻤다.
“요코가 누구와 결혼하든 혼자 살든 나는 독신으로 살 거야.”
“어머, 왜?”
요코는 순진하게 놀랐다. 도오루는 말없이 걷기 시작했다. 요코는 멈춰 서서 아무 말 없이 도오루를 지켜보았다. 갑자기 도오루가 몸을 홱 돌려 뚜벅뚜벅 다가왔다.
“요코, 우리가 남매로 자라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걸 그랬어. 기타하라가 부러워.”
도오루의 말에 요코는 깜짝 놀랐다.
“안 돼, 오빠, 그런 소리 하면.......”
요코는 독일가문비나무의 가지를 붙잡았다. 몸이 휘청거리는 느낌이었다. 도오루의 눈빛에 어린 격정이 요코를 불안하게 했다.
“요코는 내가 싫어?”
“좋아해, 아주 좋아해.”
요코는 갑자기 말할 수 없는 고독을 느겼다.
“그게 아냐. 결국 요코는 ......오빠로서 날 좋아할 뿐이지?”
“그럼 당연하잖아? 오빠니까.”
도오루는 요코의 말에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요코, 나는 말이지, 훨씬 전부터 널 여동생으로서가 아니라 핏줄이 닿지 않은 남남으로, 여성으로 생각해 왔어.”
“.........”
“하지만 요코는 날 오빠로서만 생각했을 뿐이지?”
바람이 조용히 숲속을 헤집고 있었다. 요코에는 도오루의 말이 쓸쓸하게 들렸다.
“오빠, 오빠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줄곧 오빠야. 언제까지나 오빠로 있었으면 해.”
요코는 애원하듯이 도오루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나는 요코에게 결혼을 신청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부탁이야. 오늘부터 나를 오빠라고 생각하지 말아 주면 안 되겠어?”
도오루의 이마엔 땀이 맺혀 있었다.
“오빠가 그렇게 말하면 난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난 누구를 의지해야 하는 거야? 남매로서 자랐다는 것은 중대한 일이야. 핏줄이 연결되어 있느냐 없느냐보다도 더 중대한 일이야. 난 언제까지나 쓰지구치 집에 있고 싶었는데, 오빠가 그렇게 말하면 있고 싶어도 있을 수 없잖아?”
요코는 도오루 앞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도오루와 결혼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도오루가 싫은 것은 물론 아니었다. 요코는 이런 자기 마음을 도오루가 몰라주는 것이 괴로웠다.
“요코는 역시 기타하라를 좋아하는 구나.”
‘그것과는 별개야. 기타하라 씨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오빠와 결혼할 수는 없어.’
요코는 말없이 옆의 뽕나무 잎사귀를 하나 땄다. 잠자코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요코, 넌 기타하라와 결혼할 수 없어.”
요코는 ‘왜?’하고 붇지도 않았다. 사진에서 본 기타하라와 여학생의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다.
‘요코는 누구의 자식인지 알기나 해?’
도오루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순간 도오루는 아차 했다. 요코의 쓸쓸한 얼굴이 눈앞에 있었던 것이다.
‘나는 얼마나 비열한 놈인가! 요코를 손에 넣기 위해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그 비밀만은 입이 찢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아무한테도 말해서는 안 된다.’
저쪽에서 아장아장 걸어오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빨간 옷을 입고 있었다. 루리코가 아닌가 하고 게이조는 아이 쪽으로 걸어갔다.
‘내 정신 좀 봐. 루리코일 리가 없지. 루리코는 죽었어.’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 여자아이가 갑자기 게이조를 향해 쏜살같이 뛰어왓다. 마치 강아지가 달려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위험해. 그렇게 달리면 넘어지잖아?”
하고 게이조가 안아 올리자 그 아이는 다름 아닌 요코였다. 분명히 어린 요코를 안아 올렸는데 부풀어 오른 유방이 게이조의 가슴을 눌렀다. 이상하게 생각되어 요코의 가슴을 더듬자 풍만한 유방이 손가락에 닿았다. 게이조는 자신도 모르게 그 유방에 입술을 갖다댔다. 그러자 순식간에 검은 막이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아 게이조는 깜짝 놀라 눈을 떴다.
‘꿈이었군.’
꿈속에서 느낀 풍만한 유방의 감촉이 아직도 생생하게 손가락 끝에 남아 있었다. 꿈이라고 여겨지지 않았다. 만진 유방이 요코의 것이라는 데 게이조는 죄책감을 느겼다. 요코가 중학생 때 슈미즈 차림으로 간이의자에서 잠든 적이 있었다. 게이조는 그때 보았던 요코의 넓적다리를 때때로 떠올리곤 했다. 그것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은밀한 즐거움이었다. 그러나 방금 꾼 꿈에서는 깊은 죄악의 냄새가 풍겼다. ‘불륜’이라는 말을 중얼거려 보았다.
새벽 세 시쯤 되었을까. 짧은 여름밤이 어느새 서서히 밝아 왔다. 방안의 사물이 어슴푸레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나쓰에의 규칙적인 숨소리가 청결하고 건강하게 들려왔다. 게이조는 아내에게 말할 수 없는 꿈을 꾸고 사람들이 아직 잠들어 있는 시간에 깨어 있는 자기 자신이 부끄러웠다.
‘이 세상에서 자기 딸의 가슴을 더듬는 꿈을 꾸는 사람도 있을까?
그런 망측한 질문은 아무에게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게이조는 쓴웃음을 지었다. 요즘 들어 게이조는 잠에서 깨면 이불 속에 그대로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살그머니 이불에서 빠져 나오자 나쓰에가 뒤척거렸다.
저쪽으로 돌리고 자고 있어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게이조는 문득 나쓰에가 애처로운 생각이 들었다. 애처롭다기보다는 가엾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 같았다 하지만 나쓰에가 가엾은지 부부라는 관계가 가엾은지 게이조는 알 수 없었다.
한 방에서 이렇게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함께 잔다는 것이 이상하기도 했다. 한 방에서 잔다는 것은 마음을 허락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부부라 하더라도 사실은 마음속에 무엇을 숨기고 살아가는지 피차 알 수가 없다. 어쩌면 마음속에 증오만 품고 살아가는 부부도 있지 않을까 하고 게이조는 생각했다. 한 방에서 자고 있다는 지극히 평범한 현실이 게이조의 마음에 커다란 부담이 되었다. 아마도 요코의 꿈을 꾸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게이조는 침실을 살짝 빠져 나와 서재로 들어갔다. 서재 창문의 커튼을 걷었더니 이미 밖은 훤히 밝아 있었다. 갑자기 공중에서 검은 돌멩이 하나가 날아왔다. 깜짝 놀라 자세히 보니 참새였다. 민첩한 참새는 먹이를 물고 현기증을 일으킬 정도로 재빨리 창문 앞을 날아갔다. 다시 두 마리의 참새가 마당에 내려앉았다. 바지런한 참새의 동작을 보고 있노라니 게이조는 자기 자신에게 사뭇 게을러 보였다.
‘저토록 목숨을 내걸고 살아가는가?’
다시 게이조는 꿈속에서 본 요코를 생각했다. 그때 뜻밖에도 숲속에서 사람 그림자가 나타났다. 요코였다. 게이조는 자신이 계속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요코는 게이조가 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숲의 입구에 멈춰 섰다.
요코는 물빛 블라우스에 푸른색 바둑무늬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게이조는 요코의 늘신하게 뻗은 다리를 쳐다보았다. 요코는 허리를 굽히고 무언가를 줍고 있었다. 낙엽이라도 줍는 듯한 그 몸짓에는 처녀티가 완연했다. 요코는 일어서더니 숲을 따라 오솔기롤 천천히 걸어갔다.
숲속에는 몇 개의 오솔길이 나 있었는데, 방금 요코가 들어간 오솔길은 소나무 숲으로 이어진 길이었다.
‘아직 새벽 네 시도 안 되었는데, 이렇게 일찍부터 요코는 무엇을 하고 잇는 것일까?’
요코가 다시 멈춰 서는 것이 보였다. 하반신은 풀에 가려져 게이조 쪽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요코는 멈춰 서서 뭔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 걸까?’
게이조는 조금 전에 꾼 꿈을 다시금 떠올렸다. 자기가 이불 속에서 요코의 꿈을 꾸고 있을 때, 요코는 이미 일어나 숲속을 걸어다니고 있었구나 하고 생각하자 자신의 꿈이 무척 경박하게 여겨졌다.
‘그런데 요코는 이렇게 일찍부터 무슨 생각을 하고 잇는 것일까?’
게이조는 가슴이 뜨끔했다.
‘설마 요코가 자기 부모에 대해 이미 알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 비밀은 10년 전에 어리석게도 자신이 쓴 편지 때문에 나쓰에가 알게 되고 말았다. 그리고 몇 해 전에는 도오루도 알게 되었다. 이번에는 요코에게까지 그 비밀이 알려진 것이 아닌가 해서 게이조는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요코의 모습은 이미 숲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게이조는 뒤꿈치를 들고 숲속을 바라보았다.
‘저 나이 때는 많이 자도 더 자고 싶을 텐데.’
밤에도 잠을 못 이룰 만큼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 걸까 하고 게이조는 점점 불안해졌다.
‘설마 났에와 도오루가 요코에게 그 비밀을 말해줄 리는 없을 테지.’
게이조는 요코를 신부 차림으로 이 집에서 내보내고 싶다고 말했던 나쓰에를 믿고 싶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엔 나쓰에가 악한 마음을 먹으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다는 불신감이 없지 않았다. 나쓰에가 그 비밀을 절대로 지켜 줄 것이라고 단언할 자신이 없었다. 생각해 보니 도오루도 마찬가지일 것 같았다. 게이조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요코는 좀처럼 숲에서 나오지 않았다. 요코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게이조는 더욱 불안햇다.
‘아무래도 데리러 가야겠다.’
게이조가 막 의자에서 일어났을 때였다. 소나무 숲쪽에서 요코가 나타났다. 게이조는 그제서야 한시름 놓았다. 요코는 고개를 숙인 채 집을 향해 걸어왔다. 요코는 게이조가 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문을 밀고 들어선 요코는 자기 방문을 살짝 열었다. 요코의 방은 뜰을 향해 문이 나 있었다.
‘단지 잠이 오지 않았을 따름일지도 모른다.’
게이조는 요코의 모습을 보자 안심하고 의자에 앉았다. 자신은 아무것도 몰랐던 것으로 해 두자고 생각했다.
‘비밀을 갖고 있다는 건 불안한 일이다.’
그런 생각이 절실히 들었다. 요코를 다카기한테서 데려다 기른 후로 언제나 그의 마음속에는 응어리 같은 것이 자리잡고 있었다. 나쓰에에게 숨기고 있는 것이 꺼림칙하고 언제 사실이 드러날지 몰라 두려웠다. 그런데 결국 나쓰에가 알게 되었고 도오루에게도 알려졌다. 도오루는 그 때문에 고등학교 입학 시험도 망쳤으나, 지나고 보니 우려했던 만큼의 비극적인 결과는 아니었다. 나쓰에도 집을 나가는 소동 같은 것은 부리지 않았다고 생각하자 게이조는 새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원만하고 모범적인 가정으로 여겨지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결혼 생활을 유지해 온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상상외로 어떤 가정에나 남편의 바람기, 아내의 부정,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불화, 자식의 비행 등 남에게는 말할 수 없는 부끄러운 이야기들이 많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럭저럭 일단 체면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세상 사람들은 그 숨은 드라마가 어떤 동기에 의해 자살, 가출, 살인, 이혼 등의 형태로 나타났을 때 비로소 그것을 알아차리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니, 게이조는 새삼스럽게 요코를 맡아서 기른 자신이 무서운 사람으로 여겨졌다.
‘게다가 오늘 새벽에 꾼 꿈은 얼마나 망측한가?’
게이조는 자신의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꿈속의 나도 분명 나다. 꿈속에서의 생각이나 행동도 모두 나에게서 나온 것이다.’
게이조는 자신이 죄 많은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생각하는데도 어느 누구보다도 자신이 소중하게 여겨지니 이상한 일이었다.
‘만일 남이 나처럼 아내의 부정을 증오한 나머지 아내에게 자식을 죽인 살인범의 아이를 키우게 했다는 말을 듣는다면, 나는 그 사나이에게 한바탕 욕설을 퍼부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나 자신이 다른 여자를 상대로 부정한 짓을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나는 결코 자신을 탓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아내의 부정은 절대로 용서할 수가 없는 것이다. 도대체 이것은 어떻게 된 것일까? 남이 해서 나쁜 일은 자신이 해도 나쁜 일임에 틀림없는데.’
남의 일이라면 대답을 잘못했거나 인사를 제대로 하지 않아도 화가 나는데 어째서 자신이 한 일은 쉽게 용서할 수 잇을까. 게이조는 인간의 자기 중심적인 태도에 새삼 놀랐다.
‘자기 중심이란 무엇인가? 그것이 죄악의 근원이 아닐까?’
게이조는 요코의 방 커튼이 약간 흔들리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