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 뿌리-
史料찾아 姓氏의 歷史
三韓이 성립되기 이전에는 각 개인을 나타내는 성씨가 존재(存在)하지 않았다.
단지 각 씨족들 에게는 자신들의 존재를 다른 씨족들과 구분하기 위한 명칭이
있었고 이것이 한문자(漢文字)가 들어오면서부터 성(姓)으로 표현되기 시작한
것으로 짐작 된다.
성씨는 누가 언제 만들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인류가 자기 혈통을 기억하고 같은 조상에서 나온 가족 관계를 나타내기 위해
만든 것이 성씨 이다.
한국인 성씨는 아버지 쪽 핏줄을 따라 부여하는 것으로 외국과 달리 결혼이나
이사 등의 환경변화 에도 절대로 변하지 않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우리나라의 족보(族譜)는 아버지 쪽 가문의 역사를 기록(記錄)하는데 성(姓)
의 첫 주인공 시조(始祖)에 대한 기록부터 자세하게 기록 한다.
시조에 대한 기록은 처음 그 성을 가지게 된 내력 부터 밝히는데 시조는 같은
핏줄을 나눈 자손들의 중심이 된다.
조상의 이야기는 가문(家門) 안에서 신성(神聖)하게 이어진다.
성씨 시조가 탄생하고 그로부터 성씨가 부여되는 일련의 이야기 구성(構成)
전반을 성씨신화(姓氏神話) 라고 말 한다.
성씨신화 는 같은 핏줄(血統)이 생겨난 내력(來歷)을 밝히고 조상(祖上)에
대한 신성(神聖)함 과 아울러 시조탄생 의 타당(妥當)한 이유를 밝히게 된다.
성씨신화는 그 성씨를 지닌 한 핏줄 집단 안에서 전승(傳承)하며 족보, 사록,
전, 실기 등에 기록되어 전(傳)하게 된다.
삼국(三國) 가운데 고구려(高句麗)는 장수왕(413∼491)대 부터 고(高)씨 성,
백제는 근초고왕(346∼374)부터 여(餘)씨라 하였다가 무왕(600~640) 때
부여 씨 라 칭하였다가 백제가 망하고 의자왕 아들 서씨로 칭(稱)한다.
신라(新羅)는“삼국사기”를 비롯한 고대사서 에 박(朴)· 석(昔)· 김(金)의 3성
(三姓)이 나오고...
이(李)·최(崔)·정(鄭)·손(孫)·배(裵)·설(薛)의 6촌장의 성(姓) 이름이 보이기
시작 한다.
이 가운데 신라의 성씨 들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였기 때문이고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의 성(姓)은 국가의
멸망과 함께 점차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많은 계층이나 사람이 성(姓)을 사용한 것은 아니었다.
한자 성은 7세기 후반부터 신라의 진골(眞骨)과 육두품(六頭品) 등
그 사회를 주도하는 계층에서 먼저 사용하기 시작 하였다.
그 당시 성씨(姓氏)를 갖는다는 사실은 다른 계층(階層)과 구별되는
특권의식 의 표출(表出)이기도 하였다.
신라사회(新羅社會)가 왕경인(王京人)이라 하여 귀족층 을 포함한
지배세력(支配勢力)들이 신라의 수도(首都)인 경주(慶州)에 모여 살았던
것과 같이 당시에 성씨의 취득은 특권계층(特權階層) 의 전유물(專有物)
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史實)은 이후 통일신라 가 멸망의 징후(徵候)를 보이게 되는
후삼국시대 에 이르러서 지방의 호족이나 촌주(村主) 등이 자칭성(自稱姓)·
모성(冒姓) 등의 방법을 통해 성씨를 취득하는 데에서 잘 드러난다.
<사성(賜姓)>
1. 왕이 내린 성, 즉 임금이 신하 에게 성을 하사 하는 행위를 사성 이라 한다
<자칭성(自稱姓>
1. 스스로 자기의 성을 만들어 사용하는것 이다,
<모성(冒姓)>
1. 남의 성을 사칭(詐稱)하다
2. 양자·데릴사위·)등으로 성(姓)을 갖는것도 포함된다.
창성(創姓),
1. 새로 성을 만들어 사용한다.
2. 외국인들이 귀화 하면서 성을 만드는것 이 포함된다.
그 당시 사회에서 성씨의 취득(取得)이 특권층의 특권의식을 뜻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서로 성을 취득하여 다른 계층과 구분하려 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성씨를 취득함으로써 자신들의 우월성을 확보 할수 있었고 대민지배를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이용하였다.
이러한 현상을 현실정치에 적절히 이용한 것은 후삼국을 통일 하여 고려를
건국한 왕건(王建)이었다.
그는 후삼국을 통일한 후 통치조직을 정비하기 위해 전국의 군·현을 개편하는
과정에서 토성(土姓)을 분정(分定)하였다.
고려의 건국 과정에서 태조 왕건(太祖王建)을 도와준 지방호족들이 중심이
되었다.
왕건 은 자신을 도운 지방세력 이나 공신에게 성씨를 내림으로써 그들을 논공
(論功)하였고, 그들은 왕으로부터 직접 성(姓)을 사여(賜與) 받으면서 남들과
다른 위치를 점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무엇 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를 계기(契機)로 전국의 군·현(郡,縣)에
각기 출신지(出身地)와 거주지(居住地)토성(土姓)이 분정(分定)되면서
성씨체계(姓氏體系)가 확립 되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본격적(本格的)으로 성씨가 보급(普及)된 시기는 고려초(高麗初)라
말할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성씨체계(姓氏體系)는 고려를 거쳐 조선에 이르기까지 귀족·관료층을
거쳐 점차 양민층 으로 확대 되었다고 정리 할수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이르렀다고 해서 당시의 모든 사람들이 성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18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전체 인구의 절반50%가 천민계층의 무성층(無姓層)
이었다.
이들이 성을 가지게 되는 시기는 한말에 이르러서 였는데 다시 말해 갑신정변
(1884년)이후 였다.
우리의 성과 본관(本貫)은 가문을 나타내고 이름은 그 가문의 세대를 알려주는
‘항렬(行列)’과 개인을 구별하는 ‘자(字)’로 구성되어 있어 성씨를 통해 개인은
물론 그 가문(家門)의 세대까지 알 수 있는 과학적(科學的)인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는 성의 숫자도 270여 성으로 중국· 일본 에 비해 극히 적으며,
김· 이· 박· 최· 정 5대성이 인구의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이와 아울러 우리는 전통적 으로 혈연적(血緣的)인 귀속의식(歸俗意識)과
뿌리깊은 성씨의식(姓氏意識) 을 강하게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부계(父系)를
중요시(重要視)하면서도 성은 변하지 않는다는 ‘성불변(姓不變)’의 원칙이
지켜져 왔던 것이다.
여자가 출가(出家)하면 남편의 성(姓)을 따르는 외국과 달리 여자가 결혼해서
남편의 호적(戶籍)에 올라가 있더라도 본래(本來)부터 가지고 있던 자기 성은
바뀌지 않는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사회가 여성(女性)의 성(姓)을 존중(尊重)했음을 알려주는
동시에 한국사회 에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타민족(他民族)보다 높았을 것
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성씨는 분화과정 에서 성(姓)만으로는 같은 족속(族屬)을 구분 할수 없게 됨
으로 본관(本貫)이 도입 되었다.
그러나 본관 역시 성씨와 마찬가지로 분관(分貫)분적(分籍)이 늘어 처음에는
시조의 발상지를 본관으로 하였으나 점차 군(君)으로 봉토받은 곳, 벼슬이름,
후손의 일부가 새로 이주한 곳 등이 새로운 본관지가 되기도 하였다.
이것이 바로 중시조(中始祖)이다.
본관제는 고려초 호족들이 점차 중앙의 귀족으로 신분을 상승하여 새로운
관료군 으로 편입되자, 현 거주지가 아닌 조상의 본거주지 를 본관으로 칭
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다시 말하면 각 지방의 호족들이 서울로 들어와 벼슬을 하면서 모여 살게
되자 다른 가문(家門)과 자신의 가문을 구분하기 위해 사용한 것이다.
그러나 본관이 하나일 경우 점차 그 가문의 수가 느는 것을 감당할 수가 없어
전의 본관 과 는 다른 본관을 사용하게 되었다.
특히 이러한 현상은 후손들 가운데 현달(顯達)한 자가 있는 경우, 자기의
가문을 구분하기 위해 자신을 중시조로 본관을 창출하였던 것이다.
또한 족보도 성씨와 관련하여 빼놓을 수 없는 것의 하나로 성씨체계와 본관
체계 에 따라 발전 하게 된다.
성씨관계의 제1차 사료라 할수 있는 족보의 편찬은 조선시대 왕실과 관부
(官府)에 의해 처음으로 작성· 간행되기 시작했다.
그러던 것이 명문가에 의해서도 간행되었는데,16세기 중반부터 명문세족
들이 앞을 다투어 족보를 간행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결과 17세기 이후부터 족보가 쏟아져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 전기에 족보를 간행내지 초안해 놓았던 가문들은 충실하고
정확한 족보를 발간하였으나 이러한 중간단계를 거치지 않은 가문들은
관계자료 의 불충분으로 인하여 자의적(恣意的)인 수식(修飾)이 가(加)
하여졌다.
그리하여 자신의 조상을 극단적으로 미화(美化)시키고, 선대의 관직들이
지나치게 과장(誇張)되어 있으며 심지어는 조작(造作)된 경우도 많이
보인다.
또 모화사상(慕華事大思想)에 젖어 시조(始祖)의 유래를 중국에 두기도
하였다.
중국에서 자신의 조상이 우리나라로 이주(移住)해 시조가 되었다는
식인데 이는 중화사상에 물들은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관념에서 나타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족보의 간행(刊行)을 자기 가문의 자랑으로 여겨 일실된
선대의 자료를 보완치 않고 성급히 간행한 결과로 야기된 것이다.
성씨와 본관에서 우리가 주의하여야 할 점이다.
특히 성과 본관을 바꾸려는 사람들 성과 이름이 없던 계층들과 하층의
계급에서 성장한 신흥세력 들은 당시의 대성(大姓)과 거족(巨族)에
함부로 자신들의 성과 이름을 투탁(投託)함으로써 자신의 지위를 높이려
하였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요즘 족보의 대부분이 19세기 말이나 일제시기에 간행되었다는 사실은
이를 증명해주기도 한다.
앞에서도 족보편찬(族譜編纂의 허구성(虛構性)을 언급 하였지만 이러한
족보를 무비판적으로 기록된 그대로 이용할 경우 성씨나 본관 또는 선대
인물의 평가를 제대로 할 수가 없을 것이다.
다음에서 서술할 내용이지만 집성촌(集姓村)의 경우도 고려 초 부터
거주했다든지 선대가 높은 벼슬을 했다든지 하는 내용을 전적으로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곧 족보의 내용을 완전하다고 믿는 생각은 위험천만한 일이며, 반드시
당시의 사료와 비교·검토해서 보완 하여야 올바른 역사가 제대로 파악 될수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