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자 시집 『푸른 새벽 서정』 해설
시인의 자부심과 온유한 사랑
손해일(시인, 국제PEN한국본부 이사장)
1. 들어가면서
문학은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요, 인간의 영혼을 카타르시스하는 청량제이다. 시집 역시 저자의 인생족적과 문학적 역량과 인생관이 투영된 종합 결정판이다. 시가 곧 사람이다. 따라서 작품해설은 저자가 은유와 상징 또는 직설적으로 토로하는 표현의 행간에 숨어있는 의식의 그림자를 추적하는 작업이다.
시작품을 평가하고 분석하는 여러 비평방법론 중 역사주의와 형식주의를 대조적으로 꼽을 수 있다. 역사주의비평은 작품을 둘러싼 시대배경, 주위환경, 가족사항, 이력, 성격, 창작동기 등 작품 외적요인을 참작해 작품을 분석하는 방법이다. 형식주의비평은 작품 외적인 요인을 배제하고 오로지 작품 자체만을 평가 분석하는 방법이다. 김윤자 시인의 작품은 현란한 표현기교보다는 생활주변의 에피소드나 기행시, 가족사랑 등을 직설적으로 쉽게 토로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역사주의비평이 실체접근에 보다 유효하다고 본다.
김윤자 시인(이하 김시인)이 두 번째 시집『푸른 새벽 서정』을 엮는다. 첫 시집을 2001년에 내고 16년 만에 내는 너무도 귀한 시집이다. 저자의 말로는 2004년 한국문협 캐나다 세미나 참석을 시작으로 세계문학탐방을 하며 발표한 세계기행시들을 연작시집으로 묶으려 했으나 아직도 세계여행이 진행 중이어서 뒤로 미루고, 세계기행시들를 제외한 일반시들을 묶은 것이 이번 시집이라고 한다. 문학기행시는 묵은 포도주로 더 익도록 놓아두지만, 16년의 숙성을 거쳐 개봉하는 이번 시집 또한 감칠맛을 더했으리라는 기대감이 크다. 등단 전 어설픈 습작이나 등단하자마자 설익은 시들을 조급하게 출간하는 요즘 세태에 비하면 그 진중한 기다림과 시에 대한 외경심을 높이 살만 하다.
김시인은 참으로 복받은 분이다. 서점을 경영하셨다는 훌륭하신 부모님의 훈도와 형제간의 돈독한 우애로 성장하고, 금융계(우리은행 지점장)출신의 배우자 유기섭 선생과 결혼 후에도 본인은 시인으로, 남편은 수필가로 문학의 길을 함께 한다는 자체가 남다른 축복이다. 김시인의 형제자매와 자녀들 또한 사회 각 분야에서 훌륭한 리더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니 자존감을 더해준다. 김시인은 일생에 큰 굴곡을 겪지 않고 풍파도 겪지 않고 충만한 사랑의 일상 속에서 작품활동을 할 수 있어서 스스로도 복 받았다고 말한다. 이것은 김시인의 타고난 복이기도 하지만, 긍정적이면서 온유하고 예의바른 김시인의 외유내강과 부단한 노력의 결과라고 본다.
김시인 부부와의 인연은 10여 년 전부터 필자가 서초문협회장, 한국현대시협 이사장, 한국문협 이사, 국제PEN한국본부 부이사장 등을 역임하면서 각 단체의 멤버로 만나 서로 친분을 두텁게 해오고 있다. 특히 필자가 이사장에 당선된 이번 제35대 국제PEN한국본부 집행부에서는 부부 모두 이사로 선임되어 자랑스럽고 기대도 크다.
김윤자 시인과 부군 유기섭 수필가는 바늘과 실처럼 항상 부부동반으로 오누이처럼 문단행사에도 참석하고 해외여행도 함께 하고 있어 금슬좋은 부부로 세간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한마디로 예의바르고 올곧은 모범 문인 부부이다. 김윤자 시인의 살아온 족적과 문학의 길은 이번 시집 곳곳에 언급되고 있다. 김시인의 시는 현란한 언어유희보다는 진솔한 자기 삶의 성찰과 은유적 기록이 강점이어서 읽기에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이번 시집은 총 99편의 작품을 4부로 나누어 제1부 생의 빛줄기(29편), 제2부 내 정원의 깊은 소리(22편), 제3부 길목의 눈부신 등불(21편), 제4부 한반도의 슬기로운 맥(27편)이라는 소제목을 붙이고 있다.
필자 나름대로 김시인의 작품세계 특징을 (1)시인의 자긍심과 선비정신 (2)자연친화와 측은지심 (3)온유한 인간애와 가족사랑 (4)국토예찬 기행시편 등 네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2. 시인의 자긍심과 선비정신
김윤자 시인의 작품 곳곳에서 배어나는 것은 시에 대한 열정과 시인으로서의 자존감이다. 여성이지만 선비 같은 깨끗하고 곧은 결기가 느껴진다. 조선조 정신세계의 최고 덕목인 선비정신은 주로 남성적인 것으로 여겨왔지만, 여성인 김시인의 작품 저변 곳곳에 배어 있어 이채롭다. 그것은 평생의 사표로 삼아온 부친의 엄하면서도 자애로운 훈도와 화평한 가족 유대, 공주교대를 나와 교편생활을 했던 경력, 장녀로서 가족간의 중심위치, 양반고을 충청도 출신이라는 지역적 특성도 영향을 주었으리라고 생각된다. 여기서 다 밝힐 수는 없지만 형제자매나 자녀들이 성공해 사회 각 분야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한다.
시에 대한 김시인의 애착과 자부심은 서문 작가의 말에 잘 드러나 있다.
시는 내 생애를 밝혀주고 이끌어주는 빛줄기다. 그 빛줄기는 목숨만큼 소중하고,
내 안에 들어와 영혼을 다듬는다. 광활한 세계를 질주할 수 있는 용기를 부여하기도
하고, 어느 아픈 마디에서 지쳐 누울 때, 나를 지탱해주는 버팀목이기도 하다.
내 정원에 흐르는 깊은 소리와 길목에서 만나는 눈부신 등불, 그리고 한반도의
슬기로운 맥까지 찬란한 예찬을, 시는 내게 허락했다. 여문 속살을, 꼿꼿한 자존을,
훈훈한 가슴을 시 속에 담으려 최선을 다 했다. 그것이 시에 대한 예의이며, 시인의
사명에 충실한 것이라고, 나는 늘 생각한다.
김시인에게 ‘시는 생애를 밝혀주고 이끌어주는 빛줄기, 심신이 아프고 지칠 때 지켜주는 버팀목이다’ ‘한반도의 슬기로운 맥, 여문 속살, 꼿꼿한 자존, 훈훈한 가슴’을 시에 담는 것이 시에 대한 예의와 사명이라고까지 말한다. 시에 대한 애착과 자긍심이 대단하다.
백지의 외길을
끈질기게 파고 또 파는 시인은
민들레입니다.
땅을 부둥켜안고 쥐어짜낸
쓰디쓴 진액, 그래도 꽃은 핍니다.
갓 깨어난 병아리 숨결로
살짝살짝 일어서서
때가 되면 몸을 접을 줄 알고
세상 필요한 곳에 날아갈 줄도 알고
척박한 땅, 기름진 땅 가리지 않고
뿌리내릴 줄도 압니다.
푸른 혼 하나 스러지지 않고 지키려
하늘을 날고 땅을 파는 강인한 힘
그것이 시인입니다.
― <민들레, 그리고 시인> 전문
민들레는 흔한 야생초이지만 귀한 한약재이고 그 질긴 생명력과 상징성으로 인해 자주 시화되는 모티브이다. 김시인은 시인을 민들레에 비유하고 있다. ‘백지의 외길을 끈질기게 파고 또 파며’ ‘푸른 혼 하나 지키려 하늘을 날고 땅을 파는 강인한 힘’이 시인의 속성이다. 쓰디쓴 진액을 짜내 꽃을 피우고 자유자재로 하늘을 날고, 척박한 땅 여부를 가리지 않고 뿌리내리는 민들레의 속성을 시인에 비유했다. 이것은 김시인 자신이 지향하는 시인의 초상이기도 할 것이다.
이번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푸른 새벽 서정>은 도시의 직장인 또는 직장으로 고통을 겪는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시다.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어도 좌절하지 않도록 세상 사람들에게 빛을 실어주고 있다. 김시인의 긍정적인 삶의 자세와 강한 의지가 담긴 시다.
동녘 태양이 어둠을 삼키고
자동차가 풍요의 시동을 켤 때
눈 먼 절름발이 현실은
웅크린 등줄기로 넘어가리라 믿는
고양이의 푸른 새벽 서정
― <푸른 새벽 서정> 일부
<But이 아니라 And로 곧은 나무>에서는 시인의 결기와 굳은 의지가 극명히 나타난다.
내 몸엔 마디가 없습니다.
But이 아니라 And로만 자랐음입니다.
내 스스로 쪼개져 촉살이 될지언정
천둥번개님의 호령으로 부서질 순 없습니다.
내가 짜내는 무늬는
But이 아니라 And로 곧은
백혈무사의 날선 검입니다.
화산의 불기둥이 회오리쳐도 타지 않을
파란 자존이 꼿꼿이 솟고 있습니다.
― <But이 아니라 And로 곧은 나무> 일부
작품의 화자인 나는 마디 없는 나무이다. 마디가 있다는 건 모진 풍파와 압력에 휘어지거나 꺾인 고통과 좌절의 흔적일 것이다. 강한 의지와 자존감으로 곧게 자란 인생의 징표이다. But으로 상징되는 단절과 좌절이 아니라 And로 상징되는 굳은 의지와 일관된 연속성이 잘 표현되어 있다.
화자는 바람이 아무리 흔들어대도 외압에 굴복치 않으며, 천둥번개로도 부서지지 않을 것이다. 세상의 불의와 잡스러운 유혹에 한눈팔지 않고 곁가지 없이 일관되게 곧은 뿌리를 내려온 나무이며, 언제나 And로 곧은 ‘백혈무사의 날선 검’이다. 화산에도 불타지 않을 파란 자존이 꼿꼿이 솟고 있다. 김시인의 곧은 성품과 외유내강 속에 숨은 강인한 의지와 시인으로서의 자긍심이 느껴진다.
모난 바위를 만나도
살짝 돌아가는
인내를 배우고 싶다.
서슬 퍼런 얼음장 속에서
죽지 않고 살아 숨쉬는
강인함을 배우고 싶다.
물꼬를 돌려주면
선뜻 알아듣고 선한 길 찾아가는
순종을 배우고 싶다.
높은 곳으로 치오르지 않고
낮은 곳으로 향해 가는
겸손을 배우고 싶다.
― <물길> 일부
물은 자연의 생명수이며 우주의 필수원소이다. 김시인은 여기서 물 자체보다 물길 즉 인생길의 교훈을 얻으려 한다. ‘모난 바위를 살짝 돌아가는 인내’ ‘얼음장 속에서도 살아남는 강인함’ ‘선한 길 찾아가는 순종’ ‘낮은 곳으로 향하는 겸손’을 배우고 싶다고 한다. 물에게서 배울 것이 많겠지만 특히 김시인이 배우고자 하는 것은 선비다운 삶이며, 넓게 포용하는 인자(仁者)의 삶이다. 이 시에서 김시인이 지향하는 인생관을 엿볼 수 있으며, 필자가 보는 김시인의 성품도 이와 유사하다.
붉은 집념이 일어섰다.
조선의 아씨
논개의 예리한 입술로
구국의 혼을 부르며
당찬 몸매로 서 있다.
뜨거운 약속을 쥐고
쏟아내는 저 빛 고운 희망
― <홍매화> 일부
김시인의 시각은 단순한 자연물인 홍매화에도 깊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붉은 집념’ ‘조선의 아씨’ ‘논개’ ‘구국의 혼’ ‘당찬 몸매’ ‘뜨거운 약속’ ‘쏟아내는 고운 희망’등의 표현에서 보듯 홍매화를 통해 주로 애국심이나 여인의 절개 이미지를 떠올린다. 북풍한설을 이고 피는 홍매화가 예로부터 선비나 열녀의 기상으로 상징되곤 했지만 김시인의 이런 표현을 보면 심층에 선비다운 결기가 살아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나는 조선의 옥토에서
자음과 모음이 만나 탄생한
한글입니다.
수백 년 동안 자손대대로
흠집 없이 지켜온 보물입니다.
때로는 짓궂은 바람이 담장을 넘어와
숨통을 조여도
굳건한 뿌리로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문인들의 펜 끝에서 받아온 사랑으로
날개도 돋아났습니다.
세계 어느 곳에도 갈 수 있고
어느 열사의 땅, 어느 동토의 땅에서도
오롯한 발바닥으로 일어서서
찬란한 모국의 언어를 꽃 피울 수 있습니다.
나는 세상에 단 하나의 꽃송이
한글입니다.
― <세상에 단 하나의 꽃송이> 전문
위의 시는 이른바 한글 예찬이다. 배우기 쉽고 과학적인 한글은 이미 전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문자로 정평이 나 있다. 국제PEN한국본부 주최로 올 9월에도 제3회 세계한글작가대회를 개최하는 목적도 전세계 한글작가들이 우수한 한글문학, 한국문학을 현창해 전세계로 알리는 데 있다. 김시인은 이러한 한글을 예찬하여 ‘조선의 옥토에서 자음과 모음이 만나 탄생한 한글은 찬란한 모국의 언어를 피울 수 있는 세상에 단 하나의 꽃송이’ 라 하고 있다.
3. 자연친화와 측은지심(惻隱之心)
김시인의 작품 곳곳에 나타나는 자연친화와 미물 하나하나에 대한 사랑, 가족사랑, 겸손, 애국심 등은 유교의 4단7정론에 가깝다. 김시인이 이런 거창한 이론을 염두에 두고 작품들을 썼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김시인의 시에 나타나는 선비다운 결기나 작품 <물길>에서 배운다는 인내, 강인, 순종, 겸손은 유교적 인성 덕목들이다. 또한 제3부의 가족사랑 시편들을 보면 김시인의 성장배경이나 성격도 고려해야겠지만 근본적으로 선한 심성을 가졌다는 반증이다. 김시인의 시에 자주 언급되는 자연과 인간사랑은 4단7정론에 연유한 바 크다고 본다.
성리학에서의 4단(四端)은 인간본성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씨, 즉 선천적이며 도덕적인 능력을 말한다. 4단은 맹자의 <공손추> 상편에 나오는 말로 조선조에서는 실천도덕의 근거로 삼았다. 측은지심(惻隱之心)은 남을 불쌍히 여기는 착한 마음. 수오지심(羞惡之心)은 자신이나 남의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는 마음, 사양지심(辭讓之心)은 겸손하여 남에게 양보하는 마음, 시비지심(是非之心)은 사리의 잘잘못을 가리는 마음이다. 7정(七情)은 희(喜) 노(怒) 애(哀) 구(懼) 애(愛) 오(惡) 욕(欲)으로 인간의 본성과 자연적인 감정의 종류이다. 인간의 외적행동을 유발하는 내적심리 요인은 대부분 이 7정의 범주에서 촉발된다.
벌레가 내 앞에 오면
나는 우주가 보인다.
내가 벌레를 잡으려 하면
우주 저 너머 큰 손이 보인다.
벌레는 내 안의
가장 인간적인 양심을 끌어낸다.
아무도 보지 않는
외딴 산길에서 만난 벌레가
내게 우주의 섭리를 가르치고
삶의 질서를 가르친다.
― <벌레 앞에서> 전문
이 시에서 김시인은 벌레에게서 우주를 보고, 내 안의 인간적인 양심을 보고, 우주의 섭리와 삶의 질서를 배운다. 앞서 언급한 4단의 발현이다. 해와 달, 별, 우주에서 인생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작은 벌레를 통해서도 우주를 본다는 것은 남다른 혜안이다. 대부분은 벌레를 하찮은 미물로 무시하거나 살생도 서슴치 않는 경우가 일반적인 성향이기 때문이다. 생존을 위한 약육강식이 세상 질서이지만 생물이건 무생물이건 확대 해석해서 다 우주 가족이니 아이러니컬한 이치이다.
얕은 물에서 놀지 말라는
삶의 법칙을
어미로부터, 아비로부터 배웠을 텐데
빗줄기에 춤을 추느냐
네 얇은 몸놀림에
흘러넘치는 물 구비까지 쓸려 왔으니
비가 그쳐 저수지 물넘이가 마감되면
호흡이 끝나는 것을
― <물고기의 슬픈 행로> 일부
물고기들의 합동 장례식장에
부조금도 없이 빈손으로 다녀왔다.
저수지의 마른 바닥
하얗게 죽어 널브러진 잔해
붉은 눈물이 흐른다.
거대한 불도저와 굴착기가
울어주는 장송곡만이 장엄하다.
― <물고기를 위한 장송곡> 일부
예시작품 <물고기의 슬픈 행로>는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얇은 몸놀림으로 물길에 휩쓸렸다가 시멘트 물길에 낙차해 길바닥에 튀어올라 몸부림치는 물고기를 그렸다. 홍수에 쓸리는 게 물고기로서는 불가항력이겠지만 미물인 물고기의 죽음을 매우 불쌍하게 여기는 측은지심의 발로이다. 보통사람이라면 자연재해라 으레 그러려니 했을법한 작은 사건도 김시인에게는 아픔으로 다가오는 모양이다.
<물고기를 위한 장송곡> 역시 가뭄으로 말라붙은 저수지 바닥에 하얗게 널브러져 죽은 물고기를 보며 붉은 눈물을 흘린다. 거대한 불도저와 굴착기의 굉음만이 무성한 마른 저수지 바닥을 장송곡처럼 파고 있다. 부조금도 없이 조문하고 왔다는 김시인의 측은지심이 잘 나타나 있다.
4. 온유한 인간애와 가족사랑
제2부 ‘내 정원의 깊은 소리’는 이를테면 김시인의 가족 일대기이다. 조부모로부터 아버지, 어머니, 부부, 자녀, 손자손녀까지 언급하면서 진한 혈육의 정을 직정적으로 그리고 있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라는 옛말이 있다.
‘치국평천하’까지는 아니더라도 수신제가에서 자식으로서, 부부로서, 어머니 할머니로서 화목한 가정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김시인의 모습이 역력하다. 가족사의 성격상 직정적이긴 하지만, 서술이 아니라 정제된 언어로 비유되고 있어 시적 완성도도 높다.
김시인이 제일 존경하는 분이 아버지라고 한다. 그 아버지의 상징적 꿈의 아이콘은 ‘새나라 서점’이다. 김시인의 부친은 둘째 아들로 태어나 부모로부터 받은 유산을 털어 서점을 차렸다고 한다. 당시에도 수익성 좋은 사업을 젖혀두고 서점을 차렸다는 것은 부친이 독서취미나 애서가로 문화마인드가 남달랐다는 얘기다. 서점이 생업인 만큼 애착 속에 혼신을 다했을 것도 불문가지이다.
그럼에도 그 ‘새나라 서점’이 6.25동란의 폭격 분진에 사라지고 말았으니 그 절망감이야 오죽했으랴. 그 허탈감은 꿈의 좌절이다. 그럼에도 꿋꿋하게 재기하여 그 어려운 시절 농촌에서 생업인 서점까지 잃었지만 남녀 차별 없이 다섯 남매를 모두 대학까지 보냈다고 한다. 김시인이 제일 존경하는 분이 아버지라고 한 연유를 짐작할 수 있다. 아래의 시들은 김시인의 애틋한 사부곡이다.
거기에 아버지의 꿈이 있었는데
아버지는 지금도
그 길을 따라 걷고 또 걷고
낡아진 책을 베고 누우시고
아버지만의 지도 따라
아버지만의 고유한 칩을 따라
그 골목 서점 앞을 서성이시고
아버지의 새나라 서점은
이미 동란의 폭격 분진 속에
증발 되었는데
아버지는 허공에 매달린 꿈 조각들을
두 눈 속 빨아들이시고
아버지, 아버지는 지금
전철을 이리 몰고 저리 몰고
청꿈을 찾아 헤매신다.
잃어버린 세월을
잃어버린 새나라 서점을
― <새나라 서점> 전문
6.25동란의 폭격으로 허공에 증발된 ‘아버지의 꿈’ 새나라 서점의 잔영을 찾아 아버지는 그만의 칩을 따라 옛서점 골목을 서성이고 헌책을 베고 누워 잃어버린 꿈을 찾아 헤매신다. 아래의 시에서는 ‘새나라 서점’의 꿈을 폭격으로 잃고 가족을 위해 ‘검정 고무신과 지게의 낡은 목발’의 곤고한 삶으로 헌신한 아버지의 삶을 반추하고 있다. 아버지의 정을 토로한 작품이다. ‘삭풍은 아비의 등에서 꺾어지리라’는 신념을 주시는 아버지에 대해 김시인은 ‘산더러 바다라 하시어도 그리 믿고 살아 왔다’며 감사와 존경과 애틋한 그리움을 토로하고 있다.
검정 고무신과 지게의 낡은 목발이
전부의 힘이었어도
선뜻 그 누구도 택하지 않는 힘든 길을
걸어가지 않으면 안 되는 사유를
젖은 달빛 소리로 읊으셨다.
삭풍은 아비의 등에서 꺾어지리라
그림자도 살아 일어서던 그 깊은 소리
산더러 바다라 하시어도
그리 믿고 살아 왔습니다.
아버지
― <깊은 소리> 일부
잠시 밀려드는 바닷물에 잠길지언정
결코 비틀거리거나
쓰러지지 않으셨다.
지지 않는 노을빛 섬을 만났다.
아버지를 만났다.
― <섬은 쓰러지지 않는다> 일부
5남매와 가족부양을 위해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를 향해 역경을 헤쳐가는 아버지의 강인한 삶은 ‘잠시 바다에 잠길지언정 결코 비틀거리거나 쓰러지지 않았다.’ 김시인은 마침내 지지않는 노을빛 섬, 아버지를 만났다. 아버지 테마의 시는 <깊은 소리>, <새나라 서점>, <섬은 쓰러지지 않는다>, <휘어진 시계>, <뜨거운 목숨> 등이다
김시인은 아버지에 대한 추억시편에 이어 어머니에 대한 유년의 회상과 남편을 먼저 보낸 어머니의 모습을 애틋한 사모곡으로 노래하고 있다. 어머니 곁에 가면 항상 배부름과 평화가 넘쳐서 나는 항상 ‘덩치 큰 아가’였다. 어머니 테마의 시는 <찔레꽃>, <어머니 집에 가면 >, <들꽃>, <벗꽃, 바람부는 날의 고독>, <능소화>, <파도와 어머니>, <엄마, 가자> 등이다.
어머니 집에 가면
배부름과 평화가 넘실거리고
어머니 앞에서 나는
늘 아가, 덩치 큰 아가였지
― <어머니 집에 가면> 일부
다음 작품은 한량없는 모성애로 항상 따뜻하게 보살펴주었던 어머니께서 마지막 세상 떠나시던 날의 정경을 절절히 묘사하고 있다. 5년 전 먼저 작고하시어 고향 선산에 묻히신 아버지의 뒤를 잇는 어머니를 이별하는 글이라 쉽게 읽히는 독백이어서 설명은 생략한다.
엄마, 가자
오늘은 아버지가 엄마 온다고
아침부터 기뻐하시겠네
아버지 홀로 오년 동안
외롭게 기다려오신 고향 선산으로
엄마, 미안해
이렇게 말하지 않으면 엄마 못 보낼 것 같아서
― <엄마, 가자> 일부
김시인의 사랑시는 부부애로 이어지는데 <천년학>, <석류, 그 붉은 진실> 이 이에 해당한다.
내가 천 마리 학이 되어
그대에게 날아가면 아니 되겠소
나를 녹이고
나를 버리고
내가 깨어져서
청청한 사랑
우리 하나 되면 아니 되겠소
― <천년학-영화를 보고> 일부
그대에게 가는 길은
늘 침묵이어서
가슴속에 한가득
보석이 든 줄이야
침묵을 사이에 두고
단단하게 제련한 고독이
여문 사랑일 줄이야
― <석류, 그 붉은 진실> 일부
<천년학>이라는 영화를 보고 읊은 이 시는 ‘내가 그대의 천년학이 되겠다’는 사랑의 맹세이다. 종이로 접은 천마리학 대신 자신이 천마리학이 되어 그대에게 날아가 자신을 녹이고, 버리고, 깨어져 청정한 사랑으로 하나 되자고 서원하고 있다. <석류, 그 붉은 진실>은 ‘침묵을 사이에 두고 단단하게 제련한 고독이 여문 사랑’임을 깨닫는다. 잉꼬부부인 김시인 내외의 모습을 시로 표현하고 있다.
다음 시 <슬픈 짐승>은 대학입시를 앞두고 노심초사하며 고생하는 아들에 대한, <유리 언덕>은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아들에 대한 축원이자 격려사이다.
지식의 우리에 갇혀
쓰디 쓴 보약, 까만 글로
날마다 배를 채우고도
성마른 얼굴
아, 너는 슬픈 짐승
고원의 쇠북을 쳐라
대학의 문설주에
네 이름 석 자
금빛으로 떠오를 때까지
― <슬픈 짐승> 일부
한 차원 끌어올린 영역 공중에서
층층이 쌓인 유리벽을 넘으며
고독한 인내로 가슴을 키우는 작은 새야
더 높은 비상을 꿈꾸어라
도타워진 발바닥에 용기가 솟을 때 쯤
점점 낮아지는 유리 언덕은
바라보며 웃을 수 있는
동녘 샛별로 떠오르겠지
― <유리 언덕> 일부
<내 정원의 백합, 그리고 라일락>은 소나무 두 그루로 비유한 아들 형제와 큰며느리는 백합, 작은 며느리는 라일락으로 비유하고 있으며, 손자손녀는 움으로 비유하고 있다. 애정이 넘치는 이들 가족으로 인해 ‘두 나무와 두 꽃 사이에서 새롭게 솟는 행복으로 나의 정원은 늘 풍요로운 궁전이다.’ 이런 작품들은 진솔하게 축복을 더하는 가족사다.
김시인의 온유하고 애틋한 가족사랑은 손자손녀에 대한 축복으로 이어진다. <움, 꽃불로 내게오다>라는 제하의 일련의 작품이 그것이다. 우리는 흔히 내리사랑이라고 한다. 큰애보다는 막내가, 자식보다는 손자손녀가 훨씬 귀엽다는 게 인지상정이다. <움, 꽃불로 내게 오다> 1은 첫손자, 2는 첫손녀, 3은 둘째 손녀, 4는 셋째 손녀에게 보내는 축원시들이다.
발아래, 오그라드는 마당에
움이 돋고 있다.
움 속에 내가 있고
내 안에 움이 있고
내 가지들이 둥지를 떠나 허전한 빈터에
생의 심지를 돋우며
움은 꽃불로 내게 온다.
― <움, 꽃불로 내게 오다 1 -첫손자> 일부
너와 마주하면
천둥치듯 큰 빛으로 태어난
내 아들의 숨결이 뜨겁게 분무한다.
누가 널더러 어찌 왔냐고 묻거든
아비의 걸음을 따라
축복의 마당에서 큰 보폭으로 왔노라고
그리 대답하거라
― <움, 꽃불로 내게 오다 2 -첫손녀> 일부
5. 작고 문인, 국토, 조국예찬의 기행시들
김시인의 시선은 자연과 자신과 가족으로부터 사회현상 곳곳으로 확장된다. 주로 전국 각지의 문학기행을 통해 느낀 감상을 읊었지만 작품에 여성적 서정성보다는 조국, 국토사랑 등 남성적 색채가 짙다.
제3부 ‘길목의 눈부신 등불’(21편)은 주로 문학기행 때의 선배문인에 관한 추억과 존경심을, 제4부 ‘한반도의 슬기로운 맥’(27편)은 조국과 국토사랑을 담고 있다. 그 중 몇 편을 예로 김시인의 행적을 따라가 본다.
김시인은 <오서산>에서 고향의 거룩한 산, <안개포구>에서 대천 어항 풍경, <그날 밤 파도는>에서 무창포 용두해변을 노래하고 있다. 고향은 떠나 있을수록 ‘수구초심’으로 더 그리운 탯자리이며, 포근한 보금자리, 애틋한 어머니의 품이다.
그러나 김시인은 고향 ‘오서산’을 ‘내 가슴 속의 아버지’라는 표현으로 남성성을 강조한다. 이것은 김시인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분이 아버지라고 한 점을 생각나게 한다. 흔히 정신분석학에서 아들이 아버지에 대해 느끼는 오이디프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와는 반대로, 딸이 동성인 어머니보다 아버지를 더 그리고 따른다는 엘렉트라 콤플렉스(Elektra Complex)라고 할 수 있다.
너는 내 가슴 속의 아버지
그 거룩한 봉우리에서
내 꿈이 영글었고
너의 땀과 빛과 살빛 평화가
어느 한순간 잠들지 않고
나를 지키고 있다.
― <오서산> 일부
고향이 포근하다는 말을
그 날은 안개가 말 해주고 있었다.
대천 바다의 향수를 아느냐고
접을 수 없는 그리움을 아느냐고
― <안개 포구> 일부
김시인은 특히 <청마 생가>, <청마 문학관>, <청마, 님을 만나다>에서 청마유치환 시인을 기리며, <2월의 이별 노래>에서는 관촌마을의 이문구 선생을 추억한다. 작품 <만해 생가>는 만해 한용운 선생을, <지훈 예술제>는 조지훈 선생을, <토지의 빛>, <토지 문학제>, <조촐한 영면>, <슬기로운 땅 >은 박경리 선생을 기리는 시들이다. 작고 문인에 대한 흠모와 찬사가 넘치는 다정한 글들이다. 현란한 기교보다 마음이 앞서는 글들이므로 작품을 예시하고 부연 설명은 줄인다.
생명의 서(書)로, 행복으로
시가 열어주는 길목에서 님을 뵙다가
님의 숨결 고인 통영에서
살아진 목숨으로 님을 만납니다.
― <청마, 님을 만나다-탄신 100주년 세미나> 일부
세기의 불씨, 님의 출생은 장엄했습니다.
하늘을 울리고, 땅을 울리고
충남 홍성 만해 생가, 칼날로 일어서신
님의 뜨거운 애국 새기고 갑니다.
― <만해 생가> 일부
마흔 여덟 해 고운 생을
소슬한 붓 끝에 사르셨으니
님의 낙화에
고독한 행복으로 시의 품을 서성입니다.
― <지훈 예술제> 일부
평생 흙을 쥐고 산 여인은
눈을 감고도 놓지 못한 대지 위에서
풀과 바람까지도 쓸어안고
조촐한 영면이다.
― <조촐한 영면-박경리 묘소 참배> 일부
여기서 더 나아가 김시인은 국토 곳곳을 여행하면서 나라사랑과 애국심을 깊이 드러낸다. 이미 잘 알려진 관광지일수록 기행시가 상투적이거나 식상하기 쉬워서 감동을 주기란 쉽지 않은데 한계를 잘 극복하고 있다. 나라사랑을 장대한 톤으로 노래하는 기행시들 몇 작품을 살펴본다.
대륙에 매달려 사는 강인한 힘
가슴으로 바라보면
세찬 태풍을 끈질기게 꺾어버리는
모과 같기도 하고
― <한반도> 일부
먼 대륙을 떠돌아 보아도
가슴에 파고드는 것은
내 조국의 슬기로운 영토입니다.
작지만 강인한 힘으로
맥을 이어가는
내 조국의 땅을 사랑합니다.
― <슬기로운 땅> 일부
꺾어지고 휘어진 도로를
개미처럼 오르내리는 차안에서도
두렵지 않은 것은
향기로운 길, 향기로운 땅이기에
누가 이 땅을 고독하다 하겠는가
누가 이 섬을 가냘프다 하겠는가
― <향기로운 섬 울릉도> 일부
독도사랑 시낭송, 일백여 시인들
너를 만나러 달려왔는데
야속한 풍랑이 접안을 막아
바다 위 삼봉호에서 가슴으로 너를 보며
피보다 아픈 눈으로
눈물보다 짠 입술로 너를 만난다.
― <가슴으로 본 독도> 일부
당신에 대한 나의 사랑도 걸고 왔습니다.
나무 계단을
잘박잘박 걸어 내려오며
당신만큼 용감해지리라 다짐하였습니다.
― <한라산 백록담> 일부
짙푸른 함묵으로 동그랗게 보듬으시며
태초의 그 모습, 그 음성으로
거룩한 영토에서 큰 태동으로 일깨우시는 함성
목숨처럼 품어 갑니다.
― <백두산 천지의 함성> 일부
김시인의 여러 기행시 중 몇 편을 예시해 보았다. 내용 자체가 국토와 나라사랑이 충만한 남성적인 톤의 육성이기에 굳이 해설이 필요치 않은 작품들이다.
‘세찬 태풍을 꺾어버리는’ <한반도>, ‘작지만 강인한 힘으로 맥을 이어가는 조국을 사랑하며’ <슬기로운 땅>, ‘누가 이 섬을 고독하고 가냘프다 하겠는가’ <향기로운 섬 울릉도>, ‘당신에 대한 나의 사랑도 걸고 당신만큼 용감해 지리라 다짐하고’ <한라산 백록담>, ‘거룩한 영토에서 큰 태동으로 일깨우시는 함성, 목숨처럼 품어가고’ <백두산 천지의 함성> 등이다.
이처럼 김시인의 작품을 따라가노라면 어느새 우리는 한반도 곳곳을 누비며 울릉도와 독도, 한라산 백록담에서 백두산 천지까지 국토순례를 마치고 부지불식간에 조국사랑의 깊이를 더하게 된다.
6. 맺는 말
이상에서 김윤자 시인의 시집 『푸른 새벽 서정』의 작품 세계를 필자 나름대로 4가지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16년만에 내는 이번 시집은 묵은 햇수만큼 잘 숙성돼 내적인 성숙함을 보여주고 있다. 김시인의 작품세계 분석에는 성격과 성장배경, 가족관계, 사회활동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역사주의비평 방법이 보다 유효하였다. 김시인의 작품들이 현란한 수사보다는 내용위주의 직정적인 비유와 표현이 많았기 떄문이다. 이를 요약하면
첫째, 시인으로서의 자긍심과 선비정신이다. 시인에 대한 책무와 자부심이 강하고 아버지에 대한 존경이 남성성으로 작품 저변에 배어 있었다. 외유내강의 성격, 태생적인 환경과 성장, 가족구성 등의 영향으로 보인다. 스스로도 ‘푸른 혼 하나 지키려는 강인한 힘, 그것이 시인’이라고 밝히고 있다.
둘째, 자연친화와 측은지심이다. 벌레 하나, 사물 하나에도 관심과 사랑을 표하는 작품들이 많았는데 이는 측은지심의 발로로 김시인의 따뜻한 심성과 인정을 보여주고 있다.
셋째, 온유한 인간애과 가족 사랑이다. ‘수신제가’와 ‘가화만사성’을 기본으로 부모와 부부간, 자녀와 손자들에 대한 온유한 사랑을 일일이 시로 표현한 가족사다.
넷째, 작고문인과 국토, 조국예찬의 기행시편들이다. 바늘과 실처럼 돈독한 부부애로 많은 여행을 함께 했다고 하는데, 작품 곳곳에서 풍물보다는 인간에 대한 외경, 국토순례를 통한 나라사랑이 충일하였다.
지금까지 김윤자 시인의 작품세계를 일별하면서 우리는 인간에 대한 믿음과 온유한 사랑, 시인의 자긍심, 진한 조국애 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앞으로 김시인이 또다른 시세계로의 확장과 능동적 발전을 기원하며 이 글을 맺는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