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산대첩비지 전경입니다. 여기가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인데 운봉(雲峰. 雲峯)은 구름위의 마을이란 의미로 분지입니다.

황산대첩비 터를 알리는 비석입니다.
사적 제104호.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
이곳은 고려말 이성계가 왜구와 싸워 대승을 거둔 전적지이다. 금강어귀에서 퇴로가 막힌 왜구는 이곳에 주둔하면서 장차 바다로 달아나려 하였다. 고려군의 지휘관인 이성계는 적장 아지발도와 치열한 전투를 벌렸다. 이성계가 먼저 활을 쏘아 아지발도의 투구를 떨어트리고, 뒤이어 이두란(李豆蘭)이 쏜 화살이 그의 머리를 맞혔다. 이에 힘입어 고려군은 지휘자를 잃고 우왕좌왕하는 왜구를 섬멸하였다. 선조때 왕명을 받아 김귀영(金貴榮)의 글, 송인(宋寅)의 글씨로 대첩비를 세웠으나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이 부수었다. 광복후 옛비석을 복구하였다가 1972년 신석호가 한글로 글을 지어 새롭게 세웠다. 우리선조들이 왜구의 침탈에 맞서 꿋꿋하게 일구어낸 역사의 향취가 물씬 풍기는 곳이다. (위 사진 三門 오를쪽 안내판의 글)

삼문을 통과하여 안으로 들어갑니다.

황산대첩기념비의 확대사진과 글 내용은 아래를 참조하세요.

이곳은 고려말기에 왜구를 전멸시킨 전승지이다. 일본은 16세기 말에 임진왜란을 이르켜 7년동안 우리강토를 유린하였고 최근 36년간에는 우리의 주권을 강탈하여 민족을 압박착취한것은 기억에 생생한바로서 의분을 참을수 없거니와 그 이전에도 여러차례 왜구라 하는 해적단을 조직하고 금수강산 아름답고 평화스러운 조국에 침입하여 살인 방화 약탈을 자행하였다. 특히 고려말기 40년간이 더욱 심하였으니 그 중에도 우왕6년(1380) 8월 진포구 충남 서천에 침입한 왜구가 가장크고 악한자들이였다. 이때 왜선 500여쌍이 진포구에 들어와 여러고을에 흩어져 사람을 죽이고 쌀과 어린이를 배에 실어가므로 羅世 沈德符 崔茂宣등이 처음으로 최무선이 제조한 화포를 사용하여 외선을 다 불태워버리니 배에 있던자는 불에 타서 죽지 않이하면 물에 빠져 죽고 육지에 올라온자는 돌아갈길이 없게되자 이들은 옥천 이산 영동 황간 중니 화령 근성 청리 상주 선산등지를 통과하면서 이르는 곳마다 폐허를 만들고 함양동쪽 사근내역에서는 배극렴등 구원사(九 元師)와 싸워 박수경 배언등 두 원사와 군인 500여명을 죽이고 함양을 분당하고 9월에는 운봉(雲峯) 인월역에 이르러 장차 광주(光州)에서 말을 먹이고 북으로 진격하겠다고 떠드니 왜구의 피해가 이보다 더 심한때는 없었으며 중외(中外)의 인심은 크게 동요되었다. 이보다 앞서 나라에서는 찬성사(贊成事) 이성계를 양광 전라 경상도 도순찰사에 찬성사 변안련을 도체찰사에 임명하고 왕복명 우인렴 도길부 박임종 홍인계 임성미 이원계를 원사에 임명하여 이들을 토벌케 했다. 이성계 변안련등 토벌군이 남원에 이르러 적이 인월역에 있다는 말을 듣고 운봉을 넘어 황산 서북쪽 정산봉(鼎山峯)에 올라가 길 오르편에 험한 지름길이 있는것을 보고 적이 반드시 이길로 나와서 아군의 뒤를 습격하리라고 판단하고 이성계자신이 그 길을 담당하고 다른 장수들은 평탄한 길로 나가게 하자 과연 적의 정예가 험한길로 튀어 나왔다. 이성계가 대우전(註:大羽箭:깃을 크게 댄 화살)과 유엽전(註:柳葉箭:버드나무 잎처럼 생긴 활촉을 가진 화살의 일종)을 쏘아 선봉의 적을 거의 다 살하자 적장 아지발도(阿只拔都)는 투구와 갑옷으로 전신을 무장하고 백마를 타고 선봉에서 대항했으나 이성계와 이두란(李豆蘭)이 이를 쏘아 죽이니 적진은 크게 무너저 말과 장비를 버리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에 아군은 일제히 진격하여 적을 섬멸시켰는데 적의 시체는 골에 쌓이고 냇물은 피로 물들어 몇일동안 물이 맑지 않이했으며 노획한 말이 일천육백여필이요 병기는 헤아릴수 없었다하니 왜구침입이래 이와같이 대승한 예는 없었다. 이 승리로 왜구가 차차 고개를 숙이기 시작하였으니 황산대첩(荒山大捷)의 의의는 실로 크고 청사에 빛나는 것이다. 그후 나라에서는 이곳에 황산대첩비와 사적비를 이곳에 세워 그날의 승첩을 기리어 왔으나 경술국치이후 일인들에 의해 파괴되어 황폐되었던 것을 남원군에서 국고보조와 군비로 경역을 정화하였으니 이는 황산기슭에 메아리친 구국의 승전을 널리 선양하고 우리와 우리 후손에게 나라를 스스로 지키는 자주국방정신을 길이 계승케 함이다. 1973년 현충일. 신석호 짓고 김기승 쓰고 남원군이 세우다.


파비각입니다.

日人들이 우리땅을 강제점령 당시 그들의 손에의해 파괴된 비석이 파비각안에 이렇게 누워있습니다. 비석의 글은 전부 정으로 쪼아 글자를 알아볼수가 없습니다. 비석을 이렇게 파괴 한것은 여기뿐이 아니고 충청도 화양계곡에도 일인들이 파비한 파비각이 있더군요. 이러고도 그들은 지금도 독도를 자기네 영토라고 하고 있지요.







마을 뒷산이 황산(荒山)입니다. 이 마을 한 주민 말씀에 의하면 저 황산 봉우리에는 당시 소(沼)가 있었다하고.... 산 오른쪽 아래로 피바위가 있는데 이성계장군이 저 산에서 쏜 화살에 의해 피바위에 있던 왜장의 투구가 벗겨지고... 왜구들이 많이 죽어 나갔는데 그때 바위가 온통 피로 물들었다고 합니다. 아직까지도 피가 붉게 물들어서 피바위라고 하는데 다음에 시간을 내어 황산에 올라보고, 피바위 사진도 여기에 올리겠습니다. 한글 조선왕조실록에도 피바위 사진과 설명이 실려있습니다.
왜구란 고려중기 이후 조선 초기에 이르는 동안 우리나라와 중국 연안을 무대로 사람과 재물을 해치고 약탈하던 일본의 해적을 말한다(조선왕조실록). 우리역사에서 왜구들의 침입으로 인한 피해흔적은 전국 방방곡곡에 말로 할수가 없지요. 영주 부석사까지도 동해로 들어온 왜구들의 침입과 약탈이 극심하였다고 들은적이 있습니다. 우리 후손들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것입니다.
註: 이두란(李豆蘭)은 여진인이며 성은 퉁, 본명은 두란(쿠룬투란티무르:古論豆蘭帖木兒)으로 고려때 귀화했다. 이성계와 위화도회군에도 참여하였다. 후에 이지란(李之蘭)으로 이름을 바꾸고 본관을 청해(靑海)로 받았으며 청해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자고로 동서고금에서 위대한 사람 뒤에는 도움을 주는 이가 꼭 있는 법인데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한테는 바로 이지란이 그런인물이다. 함경도 태생인 이성계와는 만주가 인근지역이다보니 자연스럽게 인연을 맺어왔던거 같다. |
첫댓글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