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카손주쿠(松下村熟)
일본이 신청한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유산목록에는 희한하게도 산업시설도 아니며 메이지시대 것도 아닌 특이한 것이 하나 끼어들어있다. 쇼카손주쿠(松下村熟)가 그것이다. 쇼카손주쿠는 조슈번(야마쿠치현)의 시골마을 하기에 있는 서당격으로 일종의 사설학당이었다. 일본은 시골마을의 이 조그만 일개 사설서당을 왜 산업혁명유산에 끼워 넣은 것일까? 쇼카순주쿠가 자리하고 있는 요시다쇼인 신사 입구에 ‘메이지유신태동지’라고 쓰인 커다란 돌비석이 그 이유를 말해주고 있다.
막부시대가 시작된 12세기부터 천황가는 700년 동안 제사지내는 것 외에는 아무 할 일도 없는 있으나마나한 존재였다. 그러다가 700년만인 19세기 중반, 천황숭배자 양성소인 쇼카손주쿠에서 배출된 인물들이 사쓰마번(가고시마현)과 연합세력을 이루어 무력으로 도주가와 막부를 무너뜨리고 뺏은 정치권력을 천황가에 그대로 다 넘겨줌으로, 천황가는 700년 만에 다시 일본의 정치중심무대의 전면으로 화려하게 부활했기 때문이다. 천황가로서는 가만있다가 넝쿨째 굴러들어온 호박을 받은 것이다. 이것이 1868년의 메이지유신인 것이다. 일본근대화의 출발’이기도 하다.
그러나 근대화의 공과로 말하자면 사쓰마번이 단연 압도적으로 앞선다. 그럼에도쇼카손주쿠가 유신의 태동지로 꼽히는 것은 쇼카손주쿠가 천황가 숭배와 천황가 부활의 본산이기 때문이다. 유신 이후 쇼카손주쿠 출신이 요직 발탁에서 단연 앞서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후 일본이 근대 산업화보다는 군국침략주의로 흐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쇼카손주쿠는 하급무사가문 출신의 시골 서생인 요시다 쇼인이 1850년대에 이곳에서 훈장을 한 곳이다. 쇼인의 사상적 뿌리는 8세기에 편찬된『일본서기』의 만세일계설이다. 천황가는 태고적부터 신의 혈통을 받은 신의 자손으로서 한번도 대가 바뀌지 않은 만세일계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거짓말을 진짜인 것처럼 다시 불씨를 살려낸 것이 17세기에 태동한 고쿠가쿠(國學)였다.
고쿠카구 학자들은 일본의 천황혈통은 만세일계이므로 일본이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완벽한 나라라고 주장했다. 요시다 쇼인은 이것을 진실로 받아들여 천하는 천황이 지배하고, 그 아래 만민은 평등하다는 일군만민론을 주창하여 훗날의 메이지유신 주역들을 대거 배출시켰다. 이렇듯 쇼카손주쿠는 산업혁명유산과는 무관하게 천황숭배자 양성소의 본산인 것이다. 150년 전 천황가 부활의 태동 지였던 이 쇼카손주쿠를 세계문화유산이란 미명으로 부활시켜 다시 제2의 천황가 부활의 태동지로 삼으려는 것이다. 따라서 유네스코는 마땅히 쇼카손주쿠 등재를 거부해야 할 것이다.
쇼카손주쿠는 정한론의 태동지
요시다 쇼인은 만세일계설 뿐만 아니라『일본서기』의 삼한정법설도 맹신한 인물이다.『일본서기』는 신라․고구려․백제를 삼한이라 지칭하면서 4세기에 삼한을 일본의 속국으로 삼았다는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4세기의 고구려는 광개토대왕 때로서 세계 최초의 고구려 철갑 기마대를 거느리고 대륙을 종횡무진 호령하던 시기였던 반면 4세기의 왜국은 제철능력조차 없어 가야로부터 철을 수입했던 시기였다.『일본서기』가 남긴 신공황후의 삼한정벌설은 신공왕후의 규슈정벌을 방향만 180도 거꾸로 돌려놓은 것이다. 규수를 정벌한 신공의 아들인 응신왕은 일본의 실질적 초대 왕이다. 이처럼 쇼인은 역사적 사실과 너무나 거리가 먼 날조된 삼한정벌설을 근거로 삼아 조선멸시관과 조선침략사상을 강렬하게 주입하였다. 이렇게 이곳 쇼카손주쿠에서 정한론이 태동되었다. 1850년대였다.
메이지유신3걸의 하나로서 메이지 정부에서 제일 먼저 정한론을 주장한 기도 다카요시, 조선주재공사 이노우에 가오루, 메이지정부의 첫 총리였던 초대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 청일전쟁때 조선주둔 제1군사령관이었다가 대장․원수․총리에게까지 오른 야마가타 아리모토, 명성황후시해 주도자 미우라고로 예비역 중장, 조선병탄의 서곡인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주인공 가쓰라, 2대 조선통감 소네 아라스케,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 등이 모두 이 쇼카손주쿠의 출신이었다.
정한은 대륙침략의 저지선 돌파로서 아시아 침략 개시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한국은 이토 히로부미를 조선침략의 원흉이라 일컫지만, 더 큰 침략의 원흉은 아무것도 모르는 이토에게 조선멸시관을 심어주고 조선침략을 사주한 요시다 쇼인인 것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한국의 정부․학계․언론계에는 이 요시다 쇼인을 근대 일본의 선각자 혹은 지식인으로 미화하여 지칭하는 풍조가 만연해 있다. 이것은 프랑스가 아리안족 우월주의자 히틀러를 선각자 혹은 지식으로 지칭하는 것과 같다.
쇼카손주쿠는 일본군국주의의 태동지
쇼카손주쿠의 훈장 요시다 쇼인은 일본 군국주의의 창시자이며 침략주의의 창시자 이다. 또한 쇼카손주쿠는 일본 군벌의 뿌리로서 아시아 침략전쟁을 종용하는 신호탄이 되었다. “주력을 키워 조선․만주․지나 등 취하기 쉬운 나라를 복종시켜 미국과 러시아에 잃은 국부를 조선과 만주 토지에서 만회해야 한다.”는 쇼인의 주창이 군국 일본을 태동시켰기 때문이다.
야마가타는 조슈번(야마구치)의 최하위 무사가문 출생으로 쇼카손주쿠에서 교육 받은 뒤 존왕파의 일원으로 창수종졸로부터 출발하였지만, 군에서 출세가도를 달려 참모총장․육군대장․원수․총리대신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1895년 청일전쟁 승리 직후 러․불․독의 3국 간섭에 부딪히게 되자 그는 한반도를 양분하여 나눠먹자는 방안을 가지고 모스크바로 가 협상하였다. 이 때 이미 조선을 밥상위에 놓인 먹잇감 취급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1898년 원수를 승진하여 다시 총리대신이 되자 각료의 절반을 군장성으로 구성하여 아시아 팽창주의 정책을 더욱 가속화하였다. 또 육․해군 장교만이 육․해군 대신에 임명될 수 있도록 하여 사실상 군부를 독립시켜 정치세력화 하면서 사실상 군부 독주의 군부독재체제로 일본을 통치하였다.
1945년 종전이 되었지만, 쇼카손주쿠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2013년 아베총리는 주위의 우려와 만류에도 불구하고 현직총리로서 A급 전범14명이 참사된 야스쿠니 신사 전격 참배를 강행하여 미국을 비롯한 주변국들을 경악케 하고 긴장시켰다. 이것은 독일총리의 히틀러 무덤 참배와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베가 이토록 무모한 야스쿠니 참배를 강행한 것은 쇼카손주쿠의 혈맥이 그에게까지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아베의 고조부는 쇼카손주쿠 문하생이었으며, 아베의 정치적 스승이자 외조부이며 A급 전범이었던 기시 노부스케 전총리도 요시다 쇼인 휘하에서 정치관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아베총리는 평소 자신이 가장 존경하고 따르는 인물로 요시다 쇼인을 꼽았다. 더구나 아베총리는 미국방문길의 한 강연에서 나를 군국주의자로 불러도 좋다고 노골적으로 선언하며 쇼카손주쿠의 혈맥이 지금의 일본에까지 선명하게 이어져 있음을 섬뜩하게 보여 주었다. 이와 같이 군국 일본의 본산인 쇼카손주쿠는 지금도 군국주의자와 전쟁괴물을 계속 양산하고 있는 시설인 것이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