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고 볶으면서도 시간은 흘러 겨울이 점차 물러가고 있습니다. 시절은 좋은 때가 되어가는데 한참을 조용하던 지구촌이 다시금 전쟁의 소용돌이에 처하는가 싶습니다. 중동의 전쟁이야 하도 빈번해서 그러려니 지내왔는데 이번에는 유럽에서 벌어진 전쟁입니다. 1,2차 세계대전 후 오랜만에 벌어진 사태가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야 멀리 떨어졌으니 뭔 상관이겠는가 생각하겠지만 그게 아닌 줄 압니다. 손가락 끝에 가시가 들면 몸에서 멀다고 아프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이 조그만 땅덩이 안에서 일어난 사태인데 나 몰라라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따지고 보면 개인이든 나라든 욕심이 원인 아니겠는가 생각합니다. 서로의 양보가 필요한 일입니다.
전쟁은 이기든 지든 모두의 고통을 수반합니다. 무엇보다 이 땅덩이가 망가지니 말입니다. 어서 조용해지기를 바랍니다. 코로나로 2년을 힘들게 하더니 이제는 전쟁이라, 거참 세상 정말 살기 힘드네요. 길지도 않은 인생들 살아가느라 애씁니다. 지지고 볶아도 살아가야 합니다. 이왕이면 즐겁고 행복하게 말이지요. 춘3월이 오고 있습니다. 희망의 봄소식도 기다려봅니다. 건강하고 행복한 주말을 빕니다. ^&^
2022년 2월 26일 김종우 목사
<나일강의 죽음>
사랑에는 심판도 규칙도 없다,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그래서 불륜도 생기는가봅니다. 그리고 불륜에 대해서조차 일말의 동정이 가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겠지요. 사랑의 상징이 하트(심장)인 것은 사랑이 없으면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라는 말도 수긍이 갑니다. 인생이 대단한 것은 어쩌면 이 사랑의 힘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업적을 만들어내도 그 사람의 인생 속에 그려지는 사랑보다 더 흥미를 일으키는 사건은 없을 것입니다. 사실 영웅적인 삶보다는 사랑 이야기가 더 관심을 끌고 오래 기억될 수도 있습니다. 영웅의 삶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 사랑은 보다 많은 사람이 쉽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공감할 수 있다는 뜻이지요.
세상일에 다 포함될 수도 있지만 사랑에도 참과 거짓이 있다는 것은 그 순수함을 생각한다면 매우 마음 아픈 일입니다. ‘사랑’이라고 하면 왠지 따뜻하고 정답고 친절하고 순수함이 떠오릅니다. 그런데 가끔은 바로 그것을 이용하여 사람을 곤경에 빠뜨리기도 합니다. 전쟁에서 ‘미인계’를 쓰는 것도 그 점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특히 남자는 예쁜 여성에 맥을 못 추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약점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적을 사랑에 빠뜨리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에게서 필요하고도 요긴한 정보를 캐냅니다. 소위 사랑에 눈이 멀어서 자기가 하는 말에 대한 결과를 망각합니다. 대부분 비극적인 결말을 맞게 됩니다. 물론 그러다 여성까지 진심으로 그 사랑에 빠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본분을 잊고 자기를 버리게 됩니다.
상황에 따라 그리고 사람마다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보고 읽을 때마다 다양한 맛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수천 년 인간의 역사와 함께 끊이지 않고 사랑 이야기는 계속 생산되고 있습니다. 누구나 가슴 졸이며 재미있게 남들 이야기에 빠져듭니다. 하기야 내가 경험하는 사랑은 나 하나로 한정됩니다. 그 한정된 내 사랑에 이러저러한 다양한 색깔을 가미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보고 읽는 것이지요. 그냥 대리만족이라 해도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어쩌면 사랑은 그만한 가치가 있기도 합니다. 말 그대로 인생에 사랑의 향기가 없다면 무슨 맛으로 살겠습니까? 그리고 살고자 하는 의지도 의욕도 사라질지 모릅니다. 인생은 다양한 사랑으로 엮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진짜 사랑을 보다 화려하고 풍요롭게 만들기 위해 가짜 사랑을 만듭니다. 아마도 두 연인은 처음부터 그렇게 의기투합하여 철저히 계획하고 실행하였겠다 싶습니다. 필요한 것은 그의 막강한 부입니다. 그것을 도적질하여 자기네 사랑을 풍요롭고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러나 당사자는 눈치를 채지 못합니다. 정말 사랑에 빠집니다. 어째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없는지 대단하기도 합니다. 가장 가까운 친구의 약혼자를 빼앗은 일인데 말입니다. 원수지간이 되었습니다. 복수심을 갖는 것은 당연지사입니다. 그들의 신혼여행에까지 따라나섭니다. 은근히 두렵지요. 절친에서 껄끄러운 관계가 되어 서로를 본다는 것은 행복한 신혼여행마저 흔들리게 만듭니다.
부를 쌓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잘 아는 대로 산업혁명 이후 세계는 역사상 대단한 발전을 이루며 물질적 부를 축적해갑니다. 그것은 개인과 국가가 함께 이루어내는 작업이었습니다. 국가적으로는 식민지 쟁탈전이 발생하였고 개인적으로는 노동력 착취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렇게 쌓은 부이니 그 속에는 사람들의 원망이 스며있기도 합니다. 엄청난 부를 상속받은 ‘리넷’은 선대의 쟁취한 부를 누리고 삽니다. 그 힘으로 친구의 약혼자까지 빼앗습니다. 그 일뿐만 아니라 주변에는 그녀의 부를 시기하거나 탐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선대의 불미스런 축적으로 원망을 산 일과 더불어 본인의 곱지 못한 일까지 보태져 주변이 조용할 수가 없습니다.
특히 약혼자를 빼앗긴 친구 ‘재클린’이 자꾸 신경 쓰게 만듭니다. 그러니 일단 유명한 탐정을 신혼여행에 동행시킵니다. 일종의 보디가드로 고용한 셈이지요. 그리고 가까운 사람들이 축하객으로 이집트 나일강 유람선에 동승합니다. 그야말로 호화 파티를 벌입니다. 재클린이 거기까지 따라옵니다. 정식 초청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탈 수 있었을까요? 잠시 쉬는 사이 큰 사고를 당할 뻔하였습니다. 그런데 사고를 일으킨 사람은 리넷의 재정회계를 담당하는 직원이었습니다. 물론 나중에야 밝혀진 사실입니다. 더 이상 위험을 감수하며 여행을 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돌아가기로 결정합니다. 다음 날 돌아가기로 하였는데 그 밤에 총 한방으로 저 세상 길로 갑니다.
이제 ‘포와로’ 탐정이 범인 찾기 놀이(?)를 시작합니다. 이미 축하객들의 신원을 파악하고 승선하였지요. 돈이 많으면 진정한 친구가 없다고요? 일리도 있지만 꼭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가 어떻게 살아왔느냐, 어떻게 부를 사용하느냐 하는 문제가 변수입니다. 살인사건은 한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목격자가 있기 때문이고 범인은 그를 가만둘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런 일련의 사건 속에서 포와로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조사합니다. 과연 수사하는 그 과정이 흥미를 돋웁니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극은 그 재미로 보는 것입니다. 영화 ‘나일강의 죽음’(Death on the Nile)을 보았습니다.
<터미널>
나라가 건강하게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좋고 감사한 일인지 새삼 깨닫습니다. 부모를 잃으면 미아가 되듯이 나라가 갑자기 문제가 생기면 그 나라 안이 아니라 나라 밖에 있을 때 국제 미아가 될 수도 있구나 싶습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도 있을까요? 막 타국에 도착했는데 입국 심사 중에 고국에 쿠데타가 발생하였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그 순간 그 나라의 법적 지위가 상실되고 자연히 여권의 효력도 사라집니다. 입국 심사장에서 여권은 압수되고 여행객은 그곳에 발이 묶입니다. 고국으로 오가는 비행기는 모두 중단됩니다. 그러니 돌아갈 수도 없습니다. 들어가고자 하는 나라의 언어도 제대로 모르니 소통에도 어려움이 있습니다. 어쩌지요?
공항 안에서도 문제입니다. 엉뚱한 사람이 들어왔는데 입국시켜줄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 사람을 내쫓을 수도 없습니다. 어떻게 하지요? 물건이라면 간단하겠지요. 주인이 없으면 버리든지 경매처분하면 됩니다. 그러나 그럴 대상이 아닙니다. 생명체이니 함부로 다룰 수도 없습니다. 더구나 동물도 아니고 사람입니다. 잡아두기는 했는데 죽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는 일입니다. 문제는 숙식이지요. 일단 하루 정도는 아무데서라도 지내라고 합니다. 공항 내 식당의 식권까지 내줍니다. 그러나 하루 뒤에는 어쩌지요? 이 사건이 기약이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저 나라의 사태가 언제 어떻게 해결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이 일을 어떻게 진행해야 합니까?
현장 관계자는 승진을 앞두고 있습니다. 곧 근무평가 심사도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행여 이 불청객이 공항 내에서 무슨 문제라도 일으키면 만사가 도루묵이 될 것입니다. 안절부절 못합니다. 이런 경우를 처음 겪으니 어찌하면 좋을지 모릅니다. 그냥 사라져버리면 딱 좋겠는데 가라면 가겠습니까? 어디로 가라고 하지요? 하루하루가 지옥 같은 마음으로 지나갑니다. 그를 감시하는 것이 일과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얼마를 기다려온 승진의 기회인데 이번을 놓치면 남은 평생 이대로 눌러앉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됩니다. 이 무슨 날벼락입니까? 어떻게든 이 방해물을 처치해야 합니다. 도대체 무슨 방법으로 밀어내지요?
한 가지 방법이 생각났습니다. 일단 공항 밖으로 나가도록 해서 불법입국자로 만들어 경찰에 넘기는 것입니다. 자기 손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되니까요. 그 뒤로는 나 몰라라 할 수 있습니다. 경찰에서 알아서 처리하겠지요. 그렇게 계획을 짜서 ‘빅터’에게 공항 밖으로 나가는 것을 허락하는 것처럼 설득시킵니다. 과연 제대로 알아들었을까요? 문 하나만 통과하면 바로 미국입니다. 그 문이 그렇게도 지나가기 힘든 곳입니다. 짐을 다 들고 문 앞까지 나섭니다. 이미 지시가 내려져 있기에 그 5분간은 지키던 공항 경비원도 잠시 자리를 비워둡니다. 문만 통과하면 미국, 그러나 얼마 못가서 기다리던 경찰에 잡히고 말 것입니다. 빅터는 그 순간 돌아섭니다.
공항 안에는 이런 곳도 있구나 싶습니다. 국제선 환승장입니다. 그곳은 어찌 보면 중립지대입니다. 여권이 없어도 비자가 없어도 머물 수 있는 곳입니다. 물론 거기까지 오느라 여권을 소지하고 있었겠지요. 그곳에 당도하여 문제가 생겼으니 공항 측에서도 머물 수 있는 공간을 그 외에 달리 제공해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루만, 하고 임시방편으로 내준 것인데 언제라는 기약이 없습니다. 언제까지 있어야 이 문제가 해결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빅터는 그 공항 환승장 안에서만 자유입니다. 하루도 어렵게 지냈는데 그 뒤에는 잠자리는 그렇다 치고 먹는 것이 문제이지요. 누가 음식을 거저 주겠습니까? 어떻게 벌어 먹고삽니까?
우리 흔히 하는 말로 ‘어떻게든 먹고살게 되어 있다,’고 합니다. ‘산 입에 거미줄 치랴?’ 그러지요. 이래저래 그 안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지고 먹을 것을 구하는 길도 이 모양 저 모양 생깁니다. 이런 저런 사람들도 접하게 됩니다. 꼭 해가 되는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아무리 보잘 것 없어도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 처한 환경에 따라 서로 주고받으며 사는 것이지요. 시간이 꽤 지나니 공항에 상주하는 사람들과도 익숙해집니다. 해가 되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다만 공항 관리 담당 부국장만 나서서 해코지하려고 애를 씁니다. 자기 승진에 막대한 장애가 되리라 잔뜩 겁을 먹고 있으니 말입니다.
아홉 달이 지나서야 고국의 사태가 안정이 됩니다. 그래서 여권을 회복합니다. 다행히 도움을 받아 하루 비자까지 얻습니다. 그런데 악감을 가지고 있던 부국장이 이번에는 빅터를 그냥 자기 고국으로 출국시키려 합니다. 그 동안 도움을 주고받으며 함께 하였던 그곳 사람들이 힘을 모아 부국장의 의도를 부숴버립니다. 빅터는 바로 그 문을 통과하여 드디어 미국 땅을 밟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소원을 이루어드리고 다시 귀국 길에 오릅니다. 그 아홉 달의 시간이 아마도 평생 만든 이야기보다 더 깊은 추억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영화 ‘터미널’(The Terminal) 2004년 작품인데 실화를 바탕으로 했답니다. 정말 이런 일이 있다니 놀랐습니다.
- 질문 3
창 1 : 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여기 우리가 누구죠? 하나님이 몇 명 되나요? 삼위 하나님이라고요? 그러면 더욱 이상합니다. 창 3 : 22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기 ‘우리’는 누구인가요? 삼위 중 한 분이 배반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