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0년대를 대표하는 한국 문학가
비평의 ‘뜨거운 상징’ 또는 영원한 상징
출생 | 1942년 |
---|---|
사망 | 1990년 |
문학을 “여러 사람의 공감 · 반발 · 저항을 일으키는 뜨거운 상징”이라고 규정한 이는 김현(1942~1990)이다. 그는 빼어난 문학 평론가이자 불문학자이고, 오랫동안 서울대학교 불문과 교수를 지낸다. 그가 1990년 마흔여덟 살의 나이로 세상을 뜨자, 고종석은 『한겨레신문』의 기사에서, 사르트르가 죽었을 때 김현이 쓴 “사르트르가 갔다. 아, 이제는 프랑스 문화계도 약간은 쓸쓸하겠다.”라는 표현을 흉내내어 “이제 김현이 갔다. 한국 비평계에 적지 않은 쓸쓸함을 남기고.”라고 쓴다.각주1)
김현은 죽은 뒤 “1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평론가”라는 말이 나올 만큼 당대의 한국 문학에 넓고 깊은 영향을 미친 평론가다. 갓 스물이던 1962년에 『자유문학』 신인 공모에 당선되면서 비평 활동을 시작한 그는 “내 육체적 나이는 늙었지만, 내 정신의 나이는 언제나 1960년의 18세에 멈춰 있었다. 나는 거의 언제나 사일구 세대로서 사유하고 분석하고 해석한다.”고 고백함으로써 자신의 세대적 정체성을 드러낸다. 이렇듯 그는 저희 또래가 4월혁명의 이념인 자유와 민주 정신을 이어받은 적자라고 굳게 믿으며, 식민지 언어에 기생하지 않고 한글로 사유하고 한글로 글을 쓴 제1세대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만큼 4·19혁명은 비평가 김현의 아이덴티티의 기반을 이루고 있다.
김현에 따르면 4·19는 유교에 바탕을 둔 봉건적 전근대 이데올로기를 극복하고 “한글로 사유하고 글을 쓰고 행동하는 세대”가 시민 의식과 개인주의에 새롭게 눈뜨게 된 직접적인 계기다. 김현이 비평 활동을 통해 줄기차게 옹호한 문학의 자율성, 개인주의 정서, 개인 의식, 시민 민주주의 등은 4·19혁명에서 길어올린 정신사적 가치들이다. 그가 해방을 문화사의 측면에서 중대한 사건으로 받아들인 것도 그 때 비로소 한국어로 사유하고 행동하는 것, 즉 한국어가 사상과 실천의 중요한 도구가 되었기 때문이다. 해방은 지배 언어로서의 일본어와 한자를 몰아내고 한국어를 모국어로 복권시킨다. 비평가 김현의 생각으로는 그것을 더욱 꽃피게 만든 것이 4·19다.
그는 엄청난 독서량과 섬세하면서도 날카로운 작품 분석, 인문학 전분야를 아우르는 드넓은 지적 관심, 그리고 명료하고 아름다운 문체로 비평을 창작에 기생하는 장르가 아니라 독자적인 문학 장르로 끌어올린 최초의 비평가로 꼽힌다.
나는 이제야말로 문학 비평가가 정말 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명확하게 생각해야 할 시기라고 생각한다. 반체제가 상당수의 지식인들의 목표였을 때, 문학 비평이 무엇이냐는 질문은 사치스럽기 짝이 없는 질문처럼 생각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문학 비평은 문학 비평이 문학 비평으로 남을 수 있게 싸워야 한다. 그 싸움과 동시에 문학 비평은 문학 비평이 정말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문학 비평이란 무엇인가라는 자신에 대한 질문과도 싸워야 한다.
문학의 자율성을 일관되게 옹호한 그의 비평 글은 스스로 털어놓고 있는 바와 같이 “리듬에 대한 집착, 이미지에 대한 편향, 타인의 뿌리를 만지고 싶다는 욕망, 거친 문장에 대한 혐오” 등을 특징으로 한다.
본명이 광남(光南)인 김현은 1942년 7월 29일 전라남도 진도군 진도읍 남동에서 태어난다. 섬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거기서 어린 시절을 보낸다. 어린 시절과 관련해 그의 기억을 채우고 있는 것은 옻나무, 발목까지 빠지던 뻘의 감촉, 가도 가도 끝이 없던 여름날의 황톳길, 더위, 모깃불의 매캐한 냄새 등이다. 그는 섬에서 초등 학교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부모를 따라 뭍으로 이사해 7월에 목포 북교국민학교로 전학한다. 그의 아버지는 목포 공설 시장 앞에서 ‘구세약국(救世藥局)’을 열어 양약 도매업에 종사했는데, 충청 이남의 양약 공급을 장악할 만큼 사업에 크게 성공한다. 목포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1957년 서울에 올라와 경기고등학교 입학 시험을 치나 떨어지고, 목포의 문태고등학교로 진학한다. 그러나 입학한 뒤 그는 곧 서울의 경복고등학교로 전학한다. 뒷날 화제가 되기도 한 그의 다독 습관은 어릴 적부터 나타나는데, 이에 대해 김현 자신은 다음과 같이 돌아본다.
국민학교 오학년 때의 일이다. 그때의 내 고향에는, 유식한 피난민들이, 할 장사가 없었기 때문에 벌여놓은 헌책방들이 숱하게 많이 있었고, 나는 깍듯한 서울말을 쓰며, 항상 깨끗한 옷을 입고 다니는, 이름도 계집애처럼 부용이라고 불리는 한 아이 뒤를 쫓아다니면서, 그 헌책방의 소설책들을 거의 다 읽어냈다. 읽었다고는 하지만, 지루하고 무슨 소린지 잘 알 수가 없는 지문은 성큼성큼 뛰어넘고, 멋진 대화같이 느껴진 것만을 읽어가는 괴상한 독법으로 읽은 것이었다. 겨울밤에, 가슴에 베개를 괴고, 해남 물고구마를 눌어붙도록 쪄가지고 먹어대며, 이형식에서 오유경에게로, 허숭에서 임꺽정에게로, 그리고 오필리아에서 파우스트로 정신 없이 뛰어다닌다.
김현은 경복고등학교를 거쳐 1960년 서울대학교 문리대 불문과에 입학한다. 그는 서울대 재학 시절 한국 문학을 주도하게 될 많은 친구를 사귀게 되는데, 김화영 · 유평근(불문과 1년 아래) · 김치수 · 김승옥(불문과 같은 학년) · 곽광수(불문과 1년 위) · 조동일(불문과 2년 위) · 김주연 · 이청준 · 염무웅(독문과 같은 학년) · 박태순(영문과 같은 학년) · 김지하(미학과 1년 위) 등이 그들이다.
1962년 그는 『자유문학』 3월호에 「나르시스 시론(詩論)」을 ‘김현’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하며 문단에 나온다. 그의 등단 평론은 『자유문학』 제5회 신인 공모 당선작이다. 재학 시절 일찌감치 평단에 나와 ‘산문시대(散文時代)’와 ‘사계(四季)’의 동인으로 활동하던 그는 1964년 2편의 논문과 등단 평론을 포함한 4편의 평론을 묶어 첫 번째 평론집 『존재와 언어』를 5백 부 한정판으로 찍어낸다. 이 무렵부터 김현은 당대의 문학계를 이끌 만한 잠재력을 지닌 이들과 만나 교유하는데, 이 중에는 당시 환속해 제주도 화북에 머물고 있던 고은을 비롯해, 김승옥의 자취방에서 만난 이청준, 그리고 이듬해인 1965년에 알게 된 황동규 · 정현종 · 박상륭 등이 포함되어 있다.
1968년 김현은 1960년대 초에 동인 ‘산문시대’를 태동시킨 김승옥 · 최하림 · 강호무 · 김성일 · 김치수 · 염무웅과 ‘사계’에 가담한 김화영 · 황동규 · 정현종 · 김주연, 여기에 박상륭 · 박태순 · 이청준 · 홍성원 · 이성부 · 이승훈 · 김병익 등을 끌어들여 이른바 ‘4·19 세대’가 대거 참여하는 동인 ‘68그룹’을 꾸린다. 이들은 대부분 1960년대 한국 문학의 새로운 주역으로 떠오르며, 한국 문학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이는 성과를 일궈낸다. 결성 연도인 1968년을 기려 동인의 명칭을 ‘68그룹’으로 정한 이들은 “샤머니즘적인 것과 관념적인 유희와 비슷한 것이 되는 대로 결합하여 빚어지는 정신의 혼란 상태”가 한국 문학이 당면한 위기의 근원이라고 진단한다. 1969년 1월, ‘정신의 리버럴리즘’을 향해 나아갈 것을 결의한 이들에 의해 『68문학』 1집이 탄생한다. 이 1집에는 ‘68그룹’의 창립 취지를 밝힌 「편집자의 말」 외에 소설 4편, 시 21편, 평론 5편이 실린다.
그러나 얼마 뒤 동인 가운데 김현 · 김치수 · 김병익 · 김주연이 따로 『문학과 지성』을 창간하고, 염무웅 등이 『창작과 비평』 진영에 들어감으로써 ‘68그룹’은 동인지 1집만을 내고는 저절로 해체된다.
1970년 가을, 김현은 김병익 등과 손잡고 드디어 문학 계간지 『문학과 지성』을 창간한다. 『문학과 지성』은 당시 이미 나오고 있던 『창작과 비평』의 참여론에 대응해 문학의 자율성을 외치며 등장한 잡지로 김현 · 김치수 · 김병익 · 김주연이 편집 동인으로 참여한다. 김현은 ‘문지’의 문학적 이념을 선도하고 자신의 글과 편집 · 기획을 통해 이를 현실화한다. 이른바 문단의 ‘4K’라고 불린 창간 동인 가운데 『문학과 지성』의 발간에 가장 열성을 보인 이가 김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필자 선정에서 원고 검토까지 두루 감당하며 문지의 깃발을 지킨다.
김현은 1971년 3월 서울대학교 교양 과정부 전임 강사로 임명된다. 이 무렵 그는 같은 학교의 교수인 김윤식과 『한국 문학사』를 펴낼 계획을 세우기도 한다. 이듬해인 1972년에는 김병익 · 김치수 · 김주연 · 김현 공저로 『한국 문학의 이론』이 ‘민음사’에서 나온다. 당시 『동아일보』는 네 사람에 대해 “우리 문단에서 희귀한 에콜을 형성하고 있는 이들”이라고 언급하는데, 이 때 처음으로 공식 매체인 신문에서 ‘문지 4K’라는 표현을 쓴다. 1974년 서른두 살의 김현은 몇 달 앞서 떠난 김치수에 이어 유학차 북프랑스 스트라스부르로 간다. 그는 거기서 바슐라르 연구가인 망수이 교수 밑에서 공부를 하다가 8개월 만에 돌아온다. 김현이 예정보다 일찍 귀국한 것은 표면상 가정 문제 때문이지만, 박사 학위를 피하려는 속내가 작용한 결과라고 한다. 말하자면 김현은 학위 없는 대학 교수라는 전례를 만들고 싶어한다. 그는 가까운 동료이자 시인인 황동규에게도 학위 없는 교수이자 시인임을 자랑스럽게 여기길 바란다.
프랑스에서 돌아온 김현은 『문학과 지성』 1975년 겨울호부터 「한국 문학의 위상」을 연재한다. 이 글의 기본 발상은 “문학은 억압을 하지 않되 억압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확실히 문학은 이제 권력에의 지름길이 아니며, 그런 의미에서 문학은 써먹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문학은 그 써먹지 못하는 것을 써먹고 있다.······ 문학은 유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억압하지 않는 문학은 억압하는 모든 것이 인간에게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은 문학을 통하여 억압하는 것과 억압당하는 것의 정체를 파악하고, 그 부정적 힘을 인지한다. 그 부정적 힘의 인식은 인간으로 하여금 세계를 개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당위성을 느끼게 한다.김현, 『한국 문학의 위상』(문학과지성사, 1977)
문학은 인간에 대한 비억압적인 현실 초월의 기능 때문에 억압적인 세계를 ‘추문’으로 만들고, 현실에 대한 자기 반성을 낳는다. 문학의 비억압성은 문학이 현실적으로 유용하지 않기 때문에 생긴다. 김현에 따르면 문학은 세계 개조의 현실적 도구가 아니라 그 반성적인 힘으로 “세계를 개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당위성을 느끼게” 하는 무엇이다.
김현은 문학에 대해 “문학은 고통이다.”, “문학은 꿈이다.”라는 두 가지 중요한 명제를 제시한다. “문학은 꿈이다.”라는 명제는 김현 문학 이론의 한 핵심이다. 문학의 고유한 기능이 삶에 유익한 교훈을 주는 것과 함께 즐거움, 즉 쾌락을 느끼게 하는 데 있다는 사실은 이미 공인된 상식이다.
그러나 김현은 삶에 대한 반성을 방해하고 주어진 조건 속에 주체를 방기하게 만드는 ‘일시적인 쾌락’의 제공은 ‘나쁜 문학’의 한 징표라고 본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문학은 쾌락을 주기보다는 고통스럽게 현실과 자아를 직시하게 만들어야 한다. 따지고 보면 문학보다 현실이 늘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현실 세계는 우리의 몸과 마음에 직접 압박을 가해오지만―며칠 쫄쫄 굶거나 칼에 손을 베는 그 생생한 고통을 상상해보라.― 문학의 세계는 우리가 마주치고 있는 현실과 거리를 둔 언어 저편의 세계다. 마르쿠제는 『미적 차원』에서 “아우슈비츠와 미라이촌(村), 고문, 기아, 죽음―이런 세계가 ‘단순한 환상’이나 ‘지독한 기만’으로 생각될 수 있는가? 그것은 ‘지독하고’ 상상을 넘어서는 현실이다. 예술은 이 현실로부터 움츠러든다.”고 말한다. 문학은 본질적으로 현실로부터 비켜나 있는 상상의 세계, 비현실의 세계, 허구의 세계다.
그러나 작가에 의해 창조된 상상이며, 비현실이고, 허구의 세계인 문학, “현실 속에서 억눌리고 왜곡되어 있는 실재의 세계”인 문학은 그 안에 일상적 현실보다 더 많은 진리를 머금고 있기 때문에 현실의 허위와 기만성을 낱낱이 까발리곤 한다. 문학이 고통인 것은, 일상에 머물며 편안함에 길들여진 인간의 의식을 소환해 일상적 삶보다 더 많은 진리를 내포한 창조된 세계의 당위적 진정성 앞에 세움으로써 잠들어 있는 ‘본래적 자아’를 일깨우기 때문이다. 진정한 문학은 그것을 읽는 독자를 당위적 현실의 진정성에 비추어 이제까지의 삶이 허위와 가식의 삶이었다는 반성으로 이끈다. 반성은 고통이다. 왜냐하면 그 반성하는 자아가 지금까지 모른체하며 덮어두고 있던 일상적 삶의 허위와 가식을 직시하도록 끊임없이 ‘자극’하고 ‘고문’하기 때문이다. 한번 깨어난 의식은 다시 아무렇지도 않게 그 이전처럼 일상의 맹목적 탐닉으로 돌아가지는 못하게 된다.
김현은 탁월한 비평가이자 동시에 프랑스 문학 연구자였다. “유럽 문학, 특히 내가 도취되어 있었던 프랑스 문학을 나는 나의 정신의 선험적 상태로 받아들였다.”(「한 외국 문학도의 고백」)고 그는 말한다. 김현은 프랑스 문학, 더 넓게는 서구의 인문적 교양과 서양적 이념에 경도되었던 사람이다. 4·19 세대의 문학에 대한 자긍심이 컸던 김현도 한국 문학 전체로 눈길을 돌리면, 유보적이고 자기 부정적인 태도로 바꾸어 “한국 문학은 주변 문학을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는 서구 문학에 대한 한국 문학의 콤플렉스, 즉 한국 문학이 중심이 아니라 주변부에 갇혀 있다는 쓰디쓴 인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주장은 현대 한국 문학이 우리의 생래적 기질과 무관하게, 거의 강제로 이 땅에 옮겨 심어진 서구 근대 문학 장르들의 무단 차용, 각종 문예 사조의 추종, 이에 따른 착종과 파행, 가위눌린 삶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혼미한 언어들로 얼룩져 있다는 점에서 그 한계성과 관련해 설득력이 없지 않다.
김현은 불문학자로서 『바슐라르 연구』(곽광수와 공저, 1976) · 『현대 비평의 혁명』(1979) · 『프랑스 비평사 : 현대편』(1981) · 『프랑스 비평사 : 근대편』(1983) · 『문학 사회학』(1983) · 『제네바학파 연구』(1986) · 『르네 지라르 혹은 폭력의 구조』(1987) · 『미셸 푸코의 문학 비평』(1989) · 『시칠리아의 암소』(1990) 등을 펴낸다. 그는 자신이 연구한 프랑스 문학을 한국 문학의 화법으로 녹여내고, 그러면서도 편협한 주관성을 벗고 세계사적인 눈으로 한국 문학을 조망한다. 그에게 외국 문학은 좀더 세계적이고 보편적인 관점으로 우리 문학을 읽어내고 거기서 의미를 끌어내기 위한 장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한국 문학 속에서 숙성되고 있는 보편성을 깨닫게 함으로써 외국 문학에 대한 우리의 근거 없는 열등감과 콤플렉스를 떨쳐내게 만들며, 나아가 오히려 우리 문학의 가능성을 길어올린다.
내가 읽고 느낀 바로는 60년대 이후의 외국 문학, 특히 유럽 문학은 별로 그럴듯한 작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유럽 중심주의에 큰 피해를 입은 아프리카 · 아시아 후진국들에게서 오히려 세계 문학의 방향을 보여줄 새로운 문학이 생겨날 수 있지 않겠는가. 그 희망은 단순한 희망이 아니라, 상당한 가능성을 가진 희망이다. 그 민족주의적인 발상에서 나온 희망이 설득력을 갖고 있는 대목은, 유럽 선진국들은 제국주의적 팽창욕으로 인한 이득은 체험했지만 그 피해는 체험하지 못했다는 대목이다. 상당수의 세계인들이 체험한 것을 이해 못하고 있는 것이 유럽 문학의 최대 약점이라고 할 수 있다.김현, 『한국 문학의 위상』(문학과지성사, 1977)
그는 또 서양 문학 이론에 주눅들지 않고, 그것은 서양의 문학을 대상으로 한 논리이지 동양의 문학에서 찾아낸 원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아울러 제3세계의 문학에 어떤 형태로든 서양의 팽창주의와 식민주의로 작용하는 서양 문학 이론의 폐단을 비판하기도 한다.
김현은 문학의 도구인 언어의 문제에 유난히 예민하게 반응해 구두점 하나에까지 신경을 쓴 평론가이며, 스스로 ‘한글주의자’라고 칭한다. 김윤식과 함께 펴낸 『한국 문학사』에서 그는 “문학에 한해서만 말한다면, 근대 문학의 기점은 자체 내의 모순을 언어로 표현하겠다는 언어 의식의 대두에서 찾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하고, 해방의 문화사적 의미를 “한국민이 한국어로 사유하고 행동하는 것이 이상하거나 부자연스럽지 않게 만들어주었다.”는 데서 끌어낸다. 그의 ‘한글주의’는 단순히 한자어를 모조리 한글로 바꾸는 편협한 한글 국수주의가 아니라 되도록이면 한글로 쓰되 그 한글의 속을 생각의 겹으로 채우는 의미론적 깊이로 나타난다. 이런 김현의 비평 문체는 ‘김현체’라고도 불리며 높이 평가받는데, 비평의 대상이 된 작가들이 즐겨 읽을 만큼 독자를 매혹한다.
언어에 민감하다는 것 외에 텍스트들의 상호 맥락에 초점을 맞추는 것 또한 김현 비평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앞서 말한 대로 이 책에서 저 책으로 뛰어다니는 독서법, 스스로 ‘괴상한 독법’이라고 지칭한 김현의 독서법에서 말미암은 바 크다. 그는 텍스트들 사이에 흐르는 전후 맥락을 살피고 따져보는 방법으로 작품 분석에 임하곤 한다. 김현의 이런 방법을 문학 평론가 김인환은 “맥락의 독서”, “글쓰기의 지형학”이라고 표현한다.
김현은 맥락의 독서를 체질적으로 타고난 비평가이다. 하도 어려서부터 맥락을 읽는 데 습관을 붙여서 그가 텍스트 상호 관련성이라고 부른 맥락은 그의 몸의 일부가 되어 그의 피와 살처럼 그의 안에 살아서 움직인다. 그는 달마다달마다 엄청나게 많은 책을 산다. 책방을 뒤지고 프랑스 신간 목록을 뒤져서 조금이라도 흥미있는 책이면 모조리 구입하는 것이 그의 취미이다. 그는 원고료로 책을 사는 희귀한 비평가이며, 이 세상에 있는 어떤 책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고 믿는 위대한 독서가이다. 그를 만나서 이야기하다보면 누구나 저도 모르게 문학의 지형학을 익히게 되고······ 이러한 지형학은 계속해서 해체되고 구축될 것이다.김인환, 『상상력과 원근법』(문학과지성사, 1983)
김현은 당대의 영향력 있는 비평가로서는 드물게 한 번도 역사의 객관적 법칙과 이에 따른 전망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거론한 적이 없다. 그는 과격한 개혁주의를 민중적 전망주의로, 부르주아 개량주의는 문화적 초월주의로 파악해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채 거리를 유지한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사태의 중심부에서 언제나 비켜나 있다는 비난도 받는다. 그는 비평 작업에 임해 계급적 귀속성 또는 당파에 작가의 개성을 묻어버리거나 이런 잣대로 작품 세계를 재단하지 않는다. 이보다는 한 작가를 한국 문학의 문화적 흐름 안에 위치시키고 상호 영향 관계를 꼼꼼히 살피며 그가 다른 작가들과 어떻게 같고 다른지를 가려낸다. 김현은 특히 작품 분석을 중심으로 하는 실제 비평에 뛰어난 솜씨를 보이며, 이는 곧 그가 참여한 문지의 강점으로 떠오르기도 한다.
프로이트와 융과 사르트르에서 시작한 김현의 서구 사상 편력은 바슐라르와 알튀세르와 지라르를 거쳐 푸코로 마감된다. 이런 궤적은 상상력 이론과 문화 사회학, 주제 구성과 구조 분석 등을 낳는 토대가 되고, 그의 비평적 지평을 넓히는 데 이바지한다. 김윤식과 함께 『한국 문학사』(1973)를 선보이고 한국 문학의 전개와 좌표, 이론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한국 문학의 위상』(1977)을 내놓은 김현은 『상상력과 인간』(1973) · 『사회와 윤리』(1974) · 『시인을 찾아서』(1975) · 『우리 시대의 문학』(1979) · 『문학과 유토피아』(1980) · 『젊은 시인들의 상상 세계』(1984) · 『책읽기의 괴로움』(1984) · 『분석과 해석』(1988) 등의 평론집을 펴낸다.
김현은 1990년 6월 27일 새벽 2시 50분에 서울대학교 부속병원에서 지병으로 세상을 뜬다. 그가 죽은 뒤에도 『분석과 해석』 이후의 평론을 모은 『말들의 풍경』(1990), 유고 일기 『행복한 책읽기』(1992) 등이 나온다. 1991년부터 ‘문학과지성사’에서 전 16권의 『김현 문학 전집』이 발간되어 1993년에 이르러 완간된다.
본 콘텐츠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위 내용에 대한 저작권 및 법적 책임은 자료체공처 또는 저자에게 있으며, Kakao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1979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와 문학평론이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고려원’의 편집장을 거쳐 ‘청하’ 출판사를 설립해 13년 동안 편집자 겸 발행인으로 일했다. 그 뒤 동덕여대, 경희사이버대, 명지전문대 등에서 강의하며, 각종 신문과 잡지에 글을 기고하고 EBS와 국악방송 등에서 ‘문화사랑방’, ‘행복한 문학’ 등의 프로그램 진행자로, KBS 1TV 'TV-책을 말하다‘ 자문위원으로 활동했다접기
1979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와 문학평론이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고려원’의 편집장을 거쳐 ‘청하’ 출판사를 설립해 13년 동안 편집자 겸 발행인으로 일했다. 그 뒤 동덕여대, 경희사이버대, 명지전문대 등에서 강의하며, 각종 신문과 잡지에 글을 기고하고 EBS와 국악방송 등에서 ‘문화사랑방’, ‘행복한 문학’ 등의 프로그램 진행자로, KBS 1TV 'TV-책을 말하다‘ 자문위원으로 활동했다 1979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와 문학평론이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고려원’의 편집장을 거쳐 ‘청하’ 출판사를 설립해 13년 동안 편집자 겸 발행인으로 일했다. 그 뒤 동덕여..문학작품을 바탕으로 1900년부터 2000년까지 20세기 한국사의 큰 흐름과 한국인의 생활사, 문화사의 궤적을 함께 추적한다. 20세기를 연도별로 나눠 매년 그해에 일어난 각종 사건과 문단사, 주요 작품과 작가 이야기를 사진과 곁들여 읽기 쉽게 풀어냈다.접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