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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의 관문… 6,740m 매리설산
흔히 달라이 라마의 나라로 알려진 티베트(중국 서장자치구)는 금세기를 마감해가는 지금도 옛날의 전통 생활방식을 유지하고 있는 몇 안되는 세계 오지중 하나다.중앙일보사는 한국언론으론 처음으로 지난 6월6일부터 한달 보름간 한국티베트 연구소(소장 박철암 경희대 명예교수)와 공동으로 「티베트고원 1만㎞ 대탐사」를 마쳤다.탐사팀은 서장자치구 6개 지구중 윈난(운남)성과 경계를 이루는 창두(창도)지구와 나취(나곡)지구를 거쳐 티베트수도 라사,평균 해발고도 5천의 창 탕고원등을 차례로 탐험했다.하루 평균 2백50여㎞의 강행군이었다.특히 충츠런(종차인) 서장대 생물학과교수는 『창탕고원의 성후(성호) 당러융춰(당야옹착)는 외국인으로서는 세계 최초의 탐험』이라고 평가해 의의를 더해주었다.티베트의 독특하고도 생생한 삶의 모습을 주1회씩 모두 10회에 걸쳐 게재한다.<편집자주>
중국 상하이(상해)와 쿤밍(곤명)을 거쳐 탐사팀을 실은 비행기가 리장(여강)에 도착했다.리장 공항은 지난해 가을 이곳을 찾았을 때만 해도 없었던 공항이라는 것이 신덕영 대원의 설명이다.그래서 그런지 활주로에는 탐사팀이 타고온 비행기 한대뿐이었다.시골역처럼 비좁은 입국장에는 짐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북새통이 한동안 계속됐다.리장은 해발 2천4백m에 위치한 인구 33만명의 제법 큰 마을.하지만 중국 변방지역이 초행길인 이방인의 눈에는 리장 시가지가 허술하기만 했다.이 지역은 지난 2월 지진이 강타한 탓에 군데군데 무너져 내리거나 금이 간 건물들이 당시의 참상을 느끼게 했다.
이튿날 리장에서 중뎬(중전)까지 가는 길은 이곳에서는 보기 드문 아스팔트 포장길.양쯔(양자)강의 상류인 진사(김사)강을 따라 나란히 뻗은 도로 위에는 수확한 보릿짚단이 무수히 널려있었다.탈곡기가 드문 이곳에서 지나가는 자동차 바퀴를 이용해 탈곡하는 것이다.
물살이 험한 협곡이 있어 호도협으로 불리는 마을을 거쳐 해발 3천2백m를 넘어서면서 너와집과 티베트 고유 의상을 입고 바구니를 짊어진 한무리의 처녀들이 눈에 띄었다.지붕이 높고 널찍한 너와집들과 목재로 만든 곡식 건조대가 군데군데 눈에 띄는 것이 부유한 장족(티베트족)마을로 짐작됐다.
해발 3천5m백인 중뎬에서는 회교도들을 위한 식당인 청진반관이 눈길을 끌었다.청진반관은 돼지고기를 안먹는 이슬람교도를 위한 깨끗한 식당이라는 뜻이다.식당 문간에 주렁주렁 매달아 놓은 말린 양고기에 파리떼 가 들끓어 「깨끗한 식당」과는 거리가 멀었다.
다음날 탐사팀은 더친(덕흠)을 향해 출발했다.백망설산이 지척에 보이는 정상을 지나 더친방향으로 내리막길을 5㎞쯤 내달리자 이번에는 해발 6천7백40m의 매리설산이 매혹적인 자태를 드러냈다.하도 아름다워 너나 할 것없이 『딩처(정지)』를 동시에 외쳐댔다.몇차례 셔터를 눌러댔지만 때마침 마주 비추는 역광 때문에 결과는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더친에서 묵게된 숙소 이름도 매리주점이었다.더친은 해발고도 3천3백m에 불과하지만 가파른 산악 지형에 시가지가 걸 쳐있는 듯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튿날 아침 매리설산을 촬영하기 위해 출발을 서둘렀다.아침 햇살을 받고있는 매리설산은 더욱 눈부셨다.좌측의가냘프고 뾰족한 봉우리와 우측의 주봉이 한데 어우러진 모습이 지순한 처녀와 우직한 총각을 대하는 듯했다.매리설산은 윈난(운남)성에 속하지만 티베트인들이 성산으로 떠받드는 이유를 알만했다.이 산은 89년 17명의 일본·중국 합동원정대가 눈사태를 만나 몰사당해 아직도 미답봉으로 남아있다.물론 티베트인들은 산신령이 노한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탐사팀은 정신없이 셔터를 눌러대다 티베트 불탑인 조르텐 앞 에서 향불을 피우고 불공을 드리고 있는 노파를 발견했다.불교 경전을 오색 헝겊에 인쇄한 타르초가 바람에 휘날려 경건한 분위기를 더해 주었다.산으로 약초 캐러가는 길이라는 이 할머니는 돌아오는 길에도 이곳에서 예불을 올린다고 한다.탐사대원들도 무사히 탐사를 마칠수 있도록 해달라고 마음속으로 기원했다.
◎달라이 라마의 나라 티베트/남한 12배 넓이의 고원지대/불교에 토속 가미한 라마교/중국자치구… 독립활동 활발
티베트의 면적은 1백22만평방㎞로 남한의 12배가 넘는 고원지대다.그러면서도 인구는 2백만명에 불과하다.인도·네팔·부탄·미얀마등과 접경을 이루고 있으며 중국과 인도대륙,중앙아시아,나아가 동남아시아를 연결하는 중간지대의 성격을 갖고 있다.중국의 행정구역상 명칭은 서장자치구.산난(산남)·창두(창도)·아리(아리)·나취(나곡)·린지(임지)·르카저(일객칙)지구등 6개 행정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우리 국사책에 토번국으로 소개되고 있는 티베트는 한때 당나라와 맞설 만큼 강성해 641년 당태종이 딸 문성공주를 송첸캄포티베트왕에게 시집보내기도 했다.이때 문성공주가 시집오면서 가지고온 불경·불상이 티베트에 불교를 전파한 계기가 된 것으 로 알려지고 있다.티베트 불교인 라마교는 대승불교에 티베트 고유의 토속신앙과 풍속이 가미된 신앙이다.
5백여년동안 중국을 압박할 정도로 강력한 제국을 이뤘던 티베트는 13세기중반 몽고제국에 점령당하면서부터 중국세력과 「갈등과 조화」의 역사를 겪게된다.티베트는 금세기로 접어들면서 외침으로 점철된 뼈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조공국으로서 청나라와 우호관계를 유지해오던 티베트는 1904년 영국의 문호개방 요구와 함께 침략을 받게 된다.청나라의 영향력이 급속히 쇠퇴한 가운데 1911년 중국의 신해혁명 발발과 함께 독립을 선포한 티베트는 51년까지 독립을 유지했다.그 러나 50년 10월 중국이 티베트를 침공하고 다음해 수도 라사에 중국 군대의 주둔권을 허용하는 조약을 체결,티베트는 중국의 지배아래로 들어갔다.59년 중국의 지배를 벗어나려는 티베트인들의 봉기와 함께 지도자 달라이 라마가 인도망명에 올랐으며 중국은 65년 티베트를 서장자치구로 중국에 공식편입시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티베트는 4천7백만년전 바다가 융기한 고원지대로 흔히 「세계의 지붕」으로 표현된다.수도 라사가 해발고도 3천6백m인 것을 비롯,창탕고원이 5천m,아리고원은 4천5백m에 달한 다.티베트인들은 대부분 목축업에 종사해 주로 야크와 양을 키우고 있으며 산난지구에선 보리·밀·감자등의 농업이 성한 편이다
염정에 노천 돌소금광산 눈길
메이리쉐(매리설)산과 작별을 한 탐사팀은 점심때쯤 윈난(운남)성과 맞닿아 있는 서장자치구(서장자치구·티베트)의 옌징(염정)마을에 도착했다.성과 성이 경계를 이루는 곳이어서 마을 입구 검문소 공안원의 검문이 까다로웠다.
『여행허가서 사본만 가지고 다니는 것을 뻔히 알면서 원본을 보자고 하니 시간 좀 걸리겠다』며 가이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일행은 차에서 내려 검문소 맞은편에 앉아 기다리다 희한한 풍경을 보게 됐다.
방역 기능도 함께 수행하는 공안원들이 자동차를 소독한다며 소독기구를 둘러메고 나타났다.탐사팀은 지프 두대를 타고왔는데 지프 한대에만,그것도 바퀴에 소독약을 형식적으로 뿌리고 물러나는 것이었다.쓴웃음이 절로 나왔다.옌징마을은 문자 그대로 소금우물마을.동네로 들어서니 마침 트럭에서 자루에 든 화물이 내려지고 있었다.자루속 물건은 뒷산에서 캔 거무튀튀한 돌소금 알갱이였다.맛을 보니 혀가 아릴 정도로 짠맛이 강했다.
티베트는 약 4천7백만년전 바다 밑바닥이 융기해 생성된 지역으로 옌징마을 같은 노천 소금광산이나 염호가 유난히 많은 곳이다.
해발 4천4백70의 훙라(홍납)산을 넘어 도달한 곳이 망캉(망강).망캉 초대소 에는 이곳부터 나머지 일정을 안내할 티베트인 가이드와 운전사 두명,요리사 한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탐사대를 환영한다』며 대원들에게 비단으로 짠 흰색 스카프 「하다」를 한장씩 목에 걸어 주었다.하다는 티베트인에게 행운을 상징하는 물건이다.티베트인들은 신년초에 가족끼리 목에 하다를 걸어주며 한해의 행운을 기원해주는 풍습을 가지고 있다.
티베트를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고산병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탐사팀이 가장 어려움을 겪은 것도 고산에서의 활동이었다.보통 해발 5천2백에서의 산소량은 평지의 절반 이하로 희박해진다.게다가 날씨는 매우 건조하고 일교차가 심하다.여름 철이 되면 하루에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을 느낄 수있는 곳이 티베트다.
산을 넘을 때는 뇌속으로 공급되는 산소가 희박해 저절로 잠이 오기 일쑤다.머리를 바늘로 찌르는 듯하고 뒤통수가 무거운 것이 고산병의 다음 단계 증상.고산증세가 계속 악화되면 구토와 함께 코피를 쏟으며 균형감각을 상실한다.균형감각을 상실한 뒤에는 공중으로 붕뜨거나 땅으로 꺼져 내려가는듯한 느낌이 든다.최악의 경우 뇌수종이나 폐수종 또는 전혈증으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다음날 망 캉을 출발한 탐사대는 해발 5천8의 둥다(동달)산을넘었다.도춘길 대원이 지난해 경험했다는 고산 증상이 자연히 화제에 올랐다.5천가 넘는 고지에서 바늘로 머리를 찌르는 듯 했다는 것이다.
둥다산으로 다가가면서 「언제쯤 바늘로 찌르는 듯한 고산증상이 나타날까」 바짝 신경을 곤두세우다 잠이 들어버린 모양이다.고개를 넘은 직후 지프가 서자 잠이 깼다.
둥다산 고개에서 고지 적응을 위해 시험삼아 걸어보았다.잰 걸음으로 걸으니 숨이 찼다.마치 알맹이 없는 공기를 마시는 듯했다.내리막길로 들어서자 개울가의 독수리 한마리가 자동차소음에 퍼드득 날았다.차를 세우고 다가가니 키가 1도 넘꽉 독수리떼가 날개를 퍼득이며 맞은편 언덕으로 부리나케 도망가고있었다.독수리들이 있던 곳에는 죽은 야크 한마리가 독수리들에게 살을 뜯긴 처참한 모습을 드러낸 채 누워있었다.
다음날 아침 창두(창도)로 향하는 길에 당나귀를 몰고 나무를 해오는 티베트 일가족을 만났다.아버지는 나귀를 끌고 갓난아이를 안은 엄마와 아이 4명이 일행이었다.
탐사팀은 이들 일가족의 사진을 찍은 뒤 초콜릿을 나눠주었다.평생 처음 본 초콜릿을 아이들은 물론이고 어른들마저 껍질째 입에 넣고 먹으려해 대원들이 일일이 껍질을 까주었다.
창두로 가는 길은 좁다란 비포장 산길이었다.협곡이 천길 낭떠러지밑으로 내려다 보였다.도대체 이런 곳에 어떻게 도로를 닦았는지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이윽고 앙취(앙곡)강이 휘감아도는 창두가 모습을 드러냈다.<고창호 기자>
◎티베트의 일처다부제/척박한 땅에서의 생존방식/재산상속권도 여자가 가져
티베트에는 씨족사회의 모계풍습이 아직도 남아있다.티베트인들의 일처다부제는 흔히 티베트를 찾는 이방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고유 풍습중 하나다.티베트 창탕고원 니마(이마)현에서 만난디기(18)라는 처녀는 『언니의 남편이 세명이며 집안의 재산상속과 가계도 언니가 이어간다』고 수줍어하면서 귀띔해 주었다.일처다부제는 오지 유목민들만의 풍습이 아니다.티베트 수도 라싸의 한 여행사 사무실에 근무하는 여직원은 남편을 두명 두고 있었다.
티베트 일처다부제의 생활방식은 여성우위의 사회풍습을 통해 그대로 간직되고 있다.티베트에서는 야크를 끄는 힘든 일을 제외하고는 김매는 밭일,초원에서 양떼를 몰거나 양젖을 짜는 일등이모두 여자들 몫이다.요리나 빨래·바느질등 가사는 남녀가 같이 하지만 가정의 중요 결정권은 여자쪽에 있다.
일처다부제 가정은 전체 가구수의 25%를 차지하고 5%는 일부다처제의 가족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처다부제에서 남편은 형제간이 가장 일반적이고 친구간 또는 심지어 부자간에 남편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다.부자간에 부인을 공유하는 경우는 아버지가 홀아비가 됐을때에 한한다.반면에 일처다부제에 비해 보기 드문 일부다처제는 자매 또는 어머니와 딸이 남편을 공유하는 경우다.어머니와 딸이 한 남편을 섬기는 일부다처제는 어머니가 과부가 된 뒤 가족을 부양할 남자가 필요한 경우에만 이뤄진다.과부가 된 어머니는 먼저 새 남편을 맞이한 뒤 딸이 성장하면 계부와 결혼시켜 남편을 공유하는 것이다.
티베트의 일처다부제나 일부다처제는 외부세계와의 접촉이 어려운 척박한 땅인 고지에서 유목민들이 생존의 한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이뤄낸 독특한 풍습이다.따라서 티베트인의 이름은 혈연에 바탕을둔 성 개념은 전혀 없고 오직 이름만이 있을 뿐이다.이름마저도 단순해 구별이 어려울 때는 이름 앞에다 늙고 젊음,출생지,생김새의 특징 등을 곁들여 이름짓는 것이 일반적이다
라싸 가는길 곳곳 순례자 행렬
두(창도)에서 딩칭(정청)으로 가는 길에 일어난 일이다.취야(곡아)촌을 거쳐 산마루를 오르고 있을 때 산 정상에서 한무리의 티베트인들을 발견했다.대원중 두명이 차에서 내려 손을 흔들자 티베트인들이 일렬횡대로 쏜살같이 뛰어내려오는데 햇빛에 반짝이는 것이 도끼를 들고있는듯 했다.
『도끼다.』 공포에 질린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운전사에게 출발하도록 다급하게 서둘렀다.그러나 가까이 다가온 티베트인들의 손에 들린 것은 곡괭이였다.그들은 약초를 캐러다니는 사람들이었다.지나가는 외국인 관광객에게 약초를 팔기 위해 반가운 마음에 단숨에 달려온 것이었다.
긴박감은 사라지고 탐사팀 모두 가슴을 내리쓸며 쓴웃음을 지었다.지프를 둘러싼 티베트인들은 손에 든 동충하초를 내밀며 저마다 사줄 것을 간청했다.동충하초는 해발 4천m가 넘는 고지에서만 자생하는 약초다.
동충하초는 버섯의 진균을 먹고 자란 벌레가 겨울에 말라죽은 자리에서 자란다.봄에 버섯 꽃이 핀뒤 여름에 길이 7∼9㎝의 약초로 자라는 티베트의 특산물이다.
티베트인들은 갓 캐어내 흙이 그대로 묻어있는 동충하초의 값을 개당 중국돈 3위안(약 3백원)씩 요구했다.흥정이 오가다 개당 2위 안으로 정해졌다.동충하초의 껍질을 벗겨 먹어보니 덜 여문 날밤 맛처럼 연하고 고소했다.동충하초는 티베트 에선 흔히 임산부들이 산후조리를 위해 닭과 함께 고아먹는 보양제다.
탐사팀은 딩칭으로 가는 산길에서 우연히 오체투지례를 올리며 라싸(납살)로 향하는 순례자 한명을 만났다.이름은 쒀바(삭파·28).칭하이(청해)성에서 목축업을 하는 티베트인이다.그는 지난해 11월 고향을 떠나 풍찬노숙을 마다하지 않고 여덟달째 땅바닥에 엎드려 절을 올리며 라싸를 향해 가고 있었다.그는 먼 거리를 절을 하며 가기 위해 몸 앞에는 양가죽을 대고 양손에는 양철과 가죽으로 만든 보호대를 낀 모습이었다.
절을 할 때는 두 손을 모아 합장한 손이 머리 위로 올라갔다가 머리에서 내려오는 손이 입술을 한번 건드리고 가슴서 멈춘다.무릎을 꿇은 뒤 두손으로 바닥을 밀면서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땅에 밀착한다.두 팔을 머리 위로 곱게 편다.
세 발짝 걸어가 절 한번 하고 일어날 때마다 4씩 전진하는 의식이 반복된다.두 팔을 쭉 뻗어 넙죽 업드리며 이마가 땅에 닿는 오체투지례를 올릴 때마다 진지함과 경건함이 배어나왔다.뒤에는 그의 약혼녀로 보이는 처녀가 이불·풍로·식기 등을 실 은 손수레를 끌며 묵묵히 따라오고 있었다.
언제쯤 순례 목적지인 라싸 조캉사원에 도착할 것 같으냐는 질문에 그는 『앞으로 1년쯤 걸릴 것같다』고 말했다.사흘 뒤면 라싸로 들어갈 예정인 탐사팀에게는 그의 고행길이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안갔다.그는 오랫동안 노숙을 한 탓에 몸에 서 쉰내가 나고 지친듯한 모습이었지만 표정만은 밝았다.아마도 순례를 통해갖게 된 종교적 확신이 표정에 담겨있는 것같았다.
도대체 무엇이 이처럼 엄청난 종교적 정열을 이끌어내는 것일까.아마도 사람이 죽으면 49일 안에 환생한다는 라마교의 교리가 이들이 힘겨운 오체투지 순례에 나서게 하는 힘의 원천일 것이다.즉 순례 여행을 통해 내세에 좀더 나은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믿음이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다.
오체투지 순례객은 나취(나곡)에서 티베트 수도 라싸까지 뻗어있는 109선 포장도로에서도 만날 수 있었다.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칭하이성 위수(옥수)현 출신의 단체 순례객이었다.7가구에 29명이나 됐다.할아버지·할머니에서부터 1 0세쯤 돼보이는 어린 아이까지 순례라기보다 그들이 믿는 라마교의 본산 라싸로 향하는 단체 여행객들 같았다.
마침 점심시간이 돼 부녀자들이 점심을 준비하고 있었다.부녀자들은 오체투지례를 위해 절할 때마다 얼굴이 땅바닥에 닿았던 흔적인 회색 빛이 이마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점심을 서두르는 부녀자의 손이 연신 말린 야크 똥 연료 풍로에 바람을 불어넣고 있었다.양가죽 주머니 「비바」가 쇠파이프에 연결돼 풍로에 바람을 넣어주는 것이다.물의 끓는 온도가 섭씨 80도 밖에 안돼 고산지대에서는 풍로에 바람을 끊임없이 공급해야 음식이 제대로 익는다는 것이다.비바는 풍로에 바람을 불어넣을 뿐만 아니라 깔고 앉거나 밤이 되면 요로도 활용되는 이 지역 유목민들의 다목적 생활용품이다.
점심을 기다리는 할머니가 한 귀퉁이에서 「옴마니반메훔」 6자 진언을 중얼거리며 마니퇴를 돌리고 있었다.마니퇴는 「기도 바퀴」로도 불리는 티베트 라마교의 일상화된 기도 기구.원통형의 기도바퀴에 손잡이 축이 꽂혀 있어 오른쪽 방향으로 돌리면서 6자 진언을 염송하면 원통 안의 불교 경전을 읽은 것과 같다는 것이 라마교 신자들의 믿음이다.마니퇴는 문맹자가 많은 티베트에서 라마 불교 대중화를 위해 만들어낸 것이다.
탐사팀은 사흘 뒤 라싸에서 109선 도로를 되돌아 나취로 향할 때에도 이들 순례객을 만났다.그들의 위치는 전에 만났던 곳에서 라싸 방향으로 20㎞도 채 안 떨어진 곳이었다.이들이 오체투지를 하며 라싸로 다가가는 거리는 하루에 7㎞도 채 안된다는 계산이 나온다.이들이 라싸 조캉사원에 도착할 때쯤이면 탐사팀은 이미 서울로 돌아갔을 것이다
포탈라궁·조캉사원 옛 영화 말해주는듯
탐사팀은 티베트 수도 라싸(납살)로 향했다.라싸로 들어가는 길목은 보리밭·밀밭 사이 사이에 유채꽃이 활짝 펴 화려하고 넉넉해 보였다.해발 3천6백㎞에 위치해 있는 라싸를 찾은 탐사팀은 우선 고도가 낮아지고 있다는 안도감에서 한결 여유를 찾아갔다.
인구 18만명의 라싸는 티베트 말로 「성스러운 땅」이라는 뜻이다.시내 도로에 늘어선 아름드리 가로수들이 티베트의 유서깊은 도읍임을 짐작케 했다.라싸 시내 한가운데 말포리산 언덕에 우뚝 솟아있는 것이 포탈라궁.세계 7대 불가사의중 하나인 포탈라궁은 가파른 언덕에 직벽으로 솟아있는 모습이 마치 요새와 같다.
포탈라궁은 티베트를 최초로 통일한 송첸감포 왕이 서기 6백41년 당태종의 딸 문성공주를 맞아들이면서 거처로 지은 궁이다.그러나 당시에 지어진 궁은 화재로 소실되고 5대 달라이 라마가 포탈라궁의 중건을 추진,1693년 현재 모습을 갖춘 궁이 완공됐다.그 뒤 포탈라궁은 14대 달라이 라마가 59년 인도로 망명할 때까지 티베트 정교일치의 절대권력자 달라이 라마의 상징이었다.
포탈라궁은 높이가 1백19m,너비가 3백60m나 된다.9백99개의 방과 40개의 불당,1천개의 불상,1만5천개의 나무기둥등으로 이뤄진 거대한 건축물이다.이 거대한 건축물이 순전히 나무와 흙으로 세워졌다.단지 지진 피해를 막기 위해 수천의 구리를 녹여 흙에 섞은 뒤 두께 3m의 벽을 쌓았을 뿐이다.
포탈라궁은 크게 홍궁과 백궁·부속건물등으로 나눌 수 있다.홍궁은 달라이 라마가 종교의식을 주재하던 곳으로 불당과 역대 달라이 라마 여덟명이 묻힌 영탑이 모셔져 있다.
백궁은 달라이 라마의 거처로 정사를 펴던 곳이다.왕궁의 아름답고 화려한 건물 밑에는 승려들과 시중들이 거주하던 방이 있으며 그 밑에는 식량창고와 포탈라궁 안의 많은 방을 밝히기에 충분한 기름창고가 있다.마지막으로 건물 바닥에는 지하감옥이 있다.포탈라궁의 신비한 곳은 지하 동굴 미로.이 미로는 현재 인도에 망명중인 14대 달라이 라마조차 완전히 알지 못할 정도로 불가사의한 곳이다.현재 라마승들이 관리하는 국립박물관격인 포탈라궁을 돌아볼 때는 후문으로 들어가 위에서 아래로 시계방향으로 따라가게 돼 있다.
후문으로 입장해 램프가 밝히는 어두컴컴한 불당이 이어진다.불당에는 때묻은 시줏돈이 촛불 앞에 수북하다.개중에는 한국돈 만원권과 천원권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건물 벽과 기둥·추녀마루 등을 장식하고 있는 세밀하고 화려한 탱화나 조각들이 저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포탈라궁은 2천년 티베트 문화가 응축돼 있는 거대한 전시장이었다.
포탈라궁 계단을 내려와 오른편으로 돌아가면 궁 옆에 1백8개의 황금빛 원통형 「기도바퀴」가 일렬로 늘어서 있다.포탈라궁 다음으로 찾아간 곳이 오체투지 순례자들이 모여드는 조캉사원.불교속에 살아 숨쉬는 티베트인들의 삶을 이해하려면 반드시 조캉사원을 돌아봐야 한다.
당태종의 딸 문성공주가 송첸캄포 왕에게 시집오면서 가지고 온불상과 불경을 모시기 위해 창건한 조캉사원은 이 절에서의 참배가 평생 소원일 만큼 종교적으로 가장 신성시되는 곳이다.순례객들은 수천㎞ 떨어진 서쪽 끝이나 북쪽의 칭하이(청해)성,서남쪽의 네팔,심지어 인도에서까지 몇개월,몇년이 걸려서라도 이곳을 찾는다.그리고는 오체투지 예를 끝없이 반복하는 것이다.티베트인은 순례도중 돈이 떨어지면 구걸에 나서는데 구걸이 전혀 흠이 되지 않는다.조캉사원 앞 팔각거리에서 만난 한 라마승도 다가와 「당신이 최고」라는 뜻으로 엄지 손가락을 들어보이며손을 내밀어 동냥을 구했다.승려가 합장 대신 엄지 손가락을 내미는 것이 어쩐지 어색해 보 였다.라마승도 구걸을 하느냐는 질문에 현지 안내자는 『조캉사원 순례뒤 돌아갈 여비 마련을 위해 동냥을 하는 것 같다』며 라마승을 옹호했다.
라싸 중심지에 위치한 팔각거리는 관광객을 상대로 한 수공예품노점상들의 호객행위와 동냥객들의 구걸 때문에 걸음이 더뎌지게 마련이다.조캉사원의 황금빛 지붕이 올려다 보이는 팔각거리는 조캉사원 건립 당시의 영화는 온데간데 없이 조락한 모습이었다.
◎물 퍼내며 라싸강 건너는 가죽배 ‘아슬아슬’/마을마다 강 많아 교통수단 역할/생각보다 수송력 뛰어나고 안전
티베트는 설산으로부터 녹아내린 물이 골짜기를 타고 흘러내려 마을마다 강이 형성돼 있다.강이 많기 때문에 강을 건너기 위한 운송수단이 발달하게 마련이다.
라싸(납살)남부지역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라싸강의 강폭은 최고 1백m에 이를만큼 큰 강이다.석양이 비치는 라싸강에 8명쯤 태운 2척의 「주크」가 아슬아슬하게 강을 건너고 있었다.배의 크기에 비해 사람이 좀 많이 탄듯한 것이 위태위태해 보였다.물살을 헤치며 유유히 건너가는 주크는 티베트에서만 볼 수 있는 이색적인 모습이다.
주크는 우리의 나룻배같은 역할을 하는 티베트의 전통 가죽배.야크나 양가죽을 꿰매 만든 것으로 가볍기 때문에 등에 짊어진 채로 옮길수도 있다.
야크 가죽으로 만든 주크는 길이 3m·폭 150㎝의 비교적 큰배와,길이 2m·폭 1m 크기의 작은배 2종류가 있다.큰배는 대개 야크 가죽 8장,작은 배는 5장을 이어 만든다.
양가죽 주크는 내장을 빼낸 통 양가죽에 바람을 넣어 부풀게한뒤 가죽을 연결,그 위에 뗏목처럼 나무를 얹은 것이다.대개 양가죽 16장을 이은 길이 230㎝·폭 150㎝ 크기의 배가 일반적이다.
이들 주크는 3백㎏이 넘는 야크도 거뜬히 실어나를만큼 수송력이 뛰어나다.강을 건너는 간이 배이기 때문에 배를 나아가게하는 노는 한쪽 방향에만 매단 경우가 일반적이다.
야크 가죽을 꿰매 만든 주크는 바닥이 촘촘하지 않아 물이 바닥으로 스며든다.따라서 운행중 물을 퍼내면서 도강하기 때문에 처음 타보는 사람은 불안하게 마련이다.하지만 그렇게 위험한 것은 아니다.
티베트에서 인구가 밀집해 살고있는 라싸강과 르카쩌(일객칙)지구에서 산난(산남)지구로 흐르는 얄룽창포강에서 주크를 흔히 볼 수 있다.
티베트에서 주크가 운송수단으로 큰 역할을 하는 것은 다리를 놓더라도 여름 우기가 되면 다리가 쉽게 유실되는 것은 물론 도로 도 두절되기 일쑤기 때문이다.게다가 주크는 손쉽게 만들수 있어 티베트 서민들의 발이 되고 있다
장례 의식
티베트 여행중 조장에 관해 물어보면 티베트인들은 이내 불쾌한 낯빛을 보이는 경우가 다반사다.철저히 함구령이 내려진듯 말대꾸 조차 않는다.
라싸 북쪽에 있는 써라(색납)사원을 찾았을때 탐사팀은 사원 뒷산에 독수리 떼가 나는 광경을 우연히 발견했다.호기심에 찾아가 본 곳이 조장터였다.말로만 듣던 조장터지만 입구에서부터 장의 관리인의 완강한 제지를 받았다.조장은 가족들마저 보지 못하게 한다고 한다.
티베트의 장의법은 흔히 독수리에게 시신을 먹이는 조장으로 알려져 있다.티베트에서 「자토」라고 불리는 조장은 「새에게 먹인다」는 뜻이다.티베트인들이 자토를 치르는 것을 목격하게 되면 몸서리 쳐진다.
티베트의 조장은 「조자바」라는 전문 장의사가 사흘 또는 닷새 동안 집안에서 조문받은 시신을 장지까지 짊어지고 간다.이때 가족은 따라올 수 있으나 「도우토우」(조장장) 입구에서 향을 피우고 고인의 명복을 비는기도를 올리며 기다릴 뿐 이다.도우토우는 대개 절이 내려다보이는 산 중턱에 위치한다.
라마승은 새를 불러들이기 위해 사람 뼈로 만든 퉁소인 「강당」을 불거나 볶은 보리인 「잠바」를 뿌린 소나무에 불을 붙여 연기를 내 독수리 를 불러들인다.이때 조자바는 칼과 도끼로 시체를 토막내고 장기와 골수도 잠바에 버무려 독수리에 게 나눠준다.
날개를 퍼덕이며 머리 위를 활공하던 독수리들이 마침내 토막난 시체로 달려든다.남은 뼈조차 장례식이 치러지는 도우토우의 작은 바위 구멍에 넣고 망치로 부순 다음 잠바 가루에 섞어 독수리에게 던져진다.이윽고 독수리가 사람 고기를 말끔히 쪼아먹고 날아가면 유가족은 새가 죽은 이를 데리고 하늘로 날아간 것으로 여긴다.결국 도우토우에는 머리카락 한줌과 백골 일부만 남은채 다시 정적이 감돌 뿐이다.
물론 이같은 조장은 인건비등 비용이 많이 들어 부유하지 못한 사람은 엄두를 내지 못한다.사정이 여의치 않은 사람은 조장과 견장을 함께 하는 절충형의 장례를 지낸다.즉 살점만 독수리나 까마귀에게 나눠주고 뼈와 뼈에 남아있는 살점은 개에게 주는 형식적인 조장을 지낸다.
티베트에서 조장이 성행하게 된 것은 새에 보시한다는 라마 불교적 믿음과 티베트인들이 이상적인 장의 방법으로 여기는 화장을 할만한 땔감이 부족하기 때문이다.티베트는 1년중 8개월 이상이 눈으로 뒤덮이는 동토다.겨울이 지나 만물이 소 생하는 철에도 티베트의 들판엔 풀뿐이다.그 래서 유목민들조차 야크나 양등의 똥을 말려 연료로 사용한다.때문에 화장을 치른다는 것은 보통의 티베트인들에게는 사치스러운 것일 수밖에 없다.
티베트 장의 풍속중 가장 최상의 것은 영장이다.영장은 국왕인 달라이 라마나 왕의 스승인 린포체의 시신을 미라로 만들어 탑에 모시는 왕장이다.
다음으로 화장이 최선의 장의 방법이지만 일반인은 엄두를 못내고 큰 부자나 고승들의 전유물이다.화장하려면 값비싼 땔감이 필요하고 화장을 진행할 장소인 화장용 불탑도 건립해야 한다.게다가 장의 기간도 49일씩이나 된다.웬만한 부자가 아니면 화장 대신 조장을 택할 수밖에 없다.결국 조장이 대부분의 티베트인들이 원하는 현실적인 장의법이다.
모든 사람이 죽은 뒤에 조장으로 장례를 치르는 것은 아니다.장의 방식은 라마승이 사망자의 생전 행적을 토대로 결정한다.생전에 믿음이 독실했다면 조장을 치르게 된다.종교적 수행이 부족한 사람이거나 어린이가 죽으면 살점을 잘라 강물에 버려 물고기 밥이 되게 하는 수장을 치른다.
흙 속에 묻는 토장은 30㎝만 파도 바위층이 드러나는 티베트의 토질 때문에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이는 전염병 환자나 범죄자의 전용 장례법으로 누 구나 기피한다.기피하는 이유는 시신이 매장되면 사자의 영혼이 시신으로 다시 들어가려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그렇게 되면 시체에 악령이 깃들이게 된다고 한다.
관념의 차이지만 티베트인들은 죽음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다.사람이 죽으면 혼은 더이상 몸에 머무르지 않는다고 한다.죽음은 육체로부터 의식체를 완전히 분리하는 한 과정으로 생각한다.이때의 의식체를 티베트에서는 바르도체라고 한다.바르도체란 생과 사후세계의 중간상태인 바르도에 머물러 있을때 갖는 몸을 의미한다.
티베트인들은 적어도 조장을 지낼만큼 성실하게 살아온 인간이라면 49일만에 환생한다고 믿고 있다.따라서 사흘에서 닷새 뒤에 시신을 집에서 옮긴 뒤에도 사자의 초상물을 시신이 놓였던 방 구석에 두고 초상물 앞에는 바르도의 49 일이 끝날때까지 계속 음식을 차려둔다.환생을 빨리하고 못하고는 어떤 방식으로 장의를 치르느냐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티베트의 장례의식은 결국 다시 이세상에 태어나는 환생을 목표로 하고 있다.
티베트의 조장 풍습은 2백여년전인 1793년 청왕조가 금지 포고령을 내렸지만 막지 못했다고 한다.금세기 들어서는 처참한 조장의 현장이 사진을 통해 바깥 세상에 낱낱이 알려져 천하에 몹쓸 야만집단으로 매도되자 조장은 더욱 베일속으로 숨어버렸다.
티베트의 조장은 문명화한 외지인들에게는 이질적이지만 결국 그나라 고유의 풍습이라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해발 5천m 창탕고원
티베트 수도 라싸(납살)를 뒤로 하고 나취(나곡)를 거쳐 창탕고원으로 향했다.나취부터는 평균 해발 5천인 티베트 최고의 고원 창탕고원이 펼쳐진다.
창탕고원에 들어선 탐사팀의 눈에는 푸른 초원이 끝없이 펼쳐져 있고 코발트빛 하늘에 뭉게구름이 둥실둥실 떠가는 풍광이 그저 꿈을 꾸는 듯했다.창탕고원은 계절이 여름으로 접어들면 유목민들이 야크·양등 가축들을 몰고 방목에 나서는 고원 지대다.
티베트 유목민들이 목초지를 따라 고지대를 오르내리면서 유목하는 시기는 대개 5월초부터 9월초까지.5월이 되면 해발 4천부터 풀이 돋아나기 시작해 7월말이 되면 해발 5천6백까지 초지가 형성된다.
유목민들은 가축을 몰고 고원을 오르며 방목한 뒤 여름이 막바지로 접어들면 고원을 내려오면서 가축들에 풀을 먹인다.창탕고원은 8월 중순만 되면 눈이 내리기 때문에 고원을 내려오는 시기도 유목민들이 촉각을 곤두세우는 관심사다.
안둬(안다)로 향하던 탐사팀은 한무리의양떼가 있는 곳에서 차를 세웠다.드넓은 초원에 모자간으로 보이는 티베트 여인과 어린 아이가 수백마리의 양떼를 몰고 있었다.여인은 「구르또」라는 굵은 끈으로 『딱,딱』 땅바닥을 때리며 양떼들의 대 오 이탈을 막고 있었다.구르또는 땅바닥을 두드리는것 뿐만 아니라 끝에 자갈을 매달아 던져 멀리있는 가축들을 끌어모으는 티베트 고유의 유목 도구다.
점심식사를 위해 자리잡고 앉자 초원의 풀은 「풀이 아닌」 가시방석 같은 느낌이었다.평지의 연한 풀과 달리 고지의 풀은 뻣뻣했다.뻣뻣한 풀을 먹고 자라는 이곳의 야크와 양은 이빨이 평지의 가축보다 유달리 강하다.
티베트 고원의 초지에서는 말뚝과 철조망이 쳐진 구역을 흔히 볼 수 있다.이들 구역은 주인이 따로 있는 곳으로 예상밖으로 티베트의 목초지에도 임대형식이긴 하지만 사유재산은 존재했다.
탐사팀은 안둬에서 하룻밤을 묵게 됐다.해발 4천7백m인 안둬는 하늘이 잔뜩 찌푸린 가운데 바람마저 불어 싸늘했다.초대소 주인은 방마다 난로를 피워 탐사대 일행의 객고를 풀어주었다.그런데 난로 연료가 무척 희귀했다.연료는 다름 아닌 말린 야크똥이었다.얼핏 화력이 약할 것 같았지만 물이 끓을 정도로 쓸만했다.
티베트의 고원에서는 땔감을 전혀 구할 수 없기 때문에 야크나양의 똥 말린 것을 땔감으로 요긴하게 사용한다.
이들 가축 똥 연료는 유목민들에게 귀중한 자원일 수밖에 없다.탐사팀은 탐사중 초원에서 유목민들이 야크똥을 수집하는 모습을 여러차례 목격했으며 유목민들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야크나 양의똥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말리는 모습을 자주 확인했다.그것은 기나긴 티베트의 겨울에 대비한 유목민들의 월동준비인 셈이다.
다음날 안둬를 출발해 지프는 다시 드넓은 초원을 달리고 있었다.티베트 운전기사 쌍주(상주)가 『양젖 짜는 유목민들이 멀리 보인다』며 구경해 보겠느냐고 말했다.그러나 전방에 아무것도 확인할 수 없어 의아해 했다.
자동차로 1㎞이상 나아가서야 비로소 어릿어릿하게 나타나는 양떼를 확인할 수 있었다.몽골인들의 시력이 유난히 좋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티베트인들도 그에 못지 않은 「망원경 시력」을 가진 모양이다.
가까이 다가가니 양젖 짜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야크털로 짠 검은색 유목민 텐트 「빠」 옆에 티베트 아낙네들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두줄로 묶어놓은 양들 뒤에서 잰 손놀림으로 젖을 짜고 있었다. 유목민들은 야크와 양의 젖으로 치즈나 버터를 만들어 저장하고 이들 가축의 털을 깎아 옷감을 짠다.털을 깎아 실을 만들어 놓은 뒤 옷감을 짜는 것은 한가한 겨울 몫이다.
자신들의 정착촌으로 돌아오는 9월이 되면 유목민들은 겨울동안 가축에 먹일 목초를 베어 저장하기 위해 일손이 바쁘게 마련이다.티베트 유목민들은 물론 방목하던 모든 가축을 그대로 가지고 겨울을 나지는 않는다.
특히 마릿수가 많은 양의 경우는 수십마리의 「종자양」만 남기고 모두 교살한다.종자양만 남기는 것은 겨울을 나기 위한 건초의 양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9월이 되면 티베트 유목민들의 「전성시대」는 막을 내리고 유목민들은 기나긴 「겨울터널」로 진입하게 된다.<고창호 기자·박철암 경희대명예교수>
◎식생활 문화/볶은 보릿가루·야크버터차가 주식/닭고기·오리고기는 안먹어/땔감부족… 말린 생고기 즐겨
티베트인들은 「잠바」라는 볶은 보릿가루와 버터차인 수유차(소유다)를 주식으로 한다.
쌀·보리·밀 등 갖은 곡물이 생산되지만 밥을 짓는다는 것이 고원의 희박한 공기로는 여간 힘든게 아니다.해발 평균 4천m 이상인 티베트에서는 물이 끓는 비등점이 섭씨 80도밖에 안돼 곡식이 제대로 익지 않는다.식당에서 쌀밥을 주문해 보면 밥같지가 않다.대개 서둘러 지은듯 밥이 선 맛이다.어떤 때는 생쌀을 씹는 듯한 느낌이다.게다가 밥먹듯 이동하며 살아가는 유목생활에다 땔감조차 부족하니 곡식을 익 혀 식사하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한다.때문에 볶은 보릿가루인 잠바가 티베트인의 이상적인 대용식이되고 있다.
잠바와 같이 먹는 것이 티베트 전통 야크 버터차.수유차로 불리는 버터차는 왕대나무통으로 자른 듯한 「뚱모」라 부르는 차통에 야크젖으로 만든 버터를 넣고 그 위에 전차라는 벽돌모양의 발효차를 끓인 것을 붓는다.소금과 입맛에 맞는 향료를 넣고 피스톤같이 생긴 자루를 두손으로 절구질하듯 아래 위로 골고루 섞는다.이것을 다시 데우면 수유차가 된다.단백질과 지방질이 풍부하고 비타민과 카페인이 함유된 버터차가 되는 것이다.처음 수유차를 마시는 사람은 비릿한 야크 버터 냄새에 비위가 거슬리지만 2∼3잔 마시고 나면 이내 친숙해진다.
티베트인들이 주로 먹는 육류는 야크와 양고기.티베트인들이 야크와 양고기를 즐기는 것은 발굽 달린 동물을 먹으라는 라마교의 교리에 따른 것이다.닭고기나 오리고기 또는 물고기는 입에도 대지 않는다.야크나 양을 잡을 때도 도살 대신 끈으로 묶어 교살한 뒤 살을 발라낸다.이것도 라마교의 풍습에 따른 것이다.육류도 땔감이 부족한 탓에 불에 익히기보다 바람에 말린 생고기를 허리에 차고 다니는 칼 「또」를 이용해 베어 먹는다.티베트인들이 육식과 함께 즐기는 전통술은 「치앙 주」.보리를 발효시켜 만든 치앙주는 맛이 우리의 막걸리와 비슷하다.단지 알콜기가 덜할 뿐이다.
티베트인들이 즐기는 별미식품으로는 티베트 밀가루 도넛의 일종인 「케이스」가 있다.기름에 튀긴 케이스는「티베트 설」때나 귀한 손님에게 만들어주는 전통식품이다.
창탕고원은 야생동물의 낙원이다.창탕이라는 뜻은 티베트어로 북방의 공지를 의미한다.
해발 평균 고도 5천m인 창탕고원은 공기가 희박하고 날씨마저 한랭·건조하다.연간 강우량이 60㎜에 불과해 인간이 살기에 부적합한 곳이다.
따라서 창탕고원은 1년중 석달도 채 안되는 여름철동안 유목민들이 가축을 몰고 찾을 뿐 인적이 드문 무인지대다.창탕고원의 광활한 초원은 야생동물이 모여드는 천국일 수밖에 없다.
티베트를 통치하고 있는 중국 정부도 93년 독일 크기만한 30만평방㎞의 창탕고원 일부를 「야생동물 보호구역」으로 지정해 야생동물을 보호하고 있다.
탐사중 야생당나귀와 처음 조우한 곳은 니마(이마)현에서 성호당러융춰(당야옹착)로 찾아가는 도중이었다.탐사 차량이 접근하자 야생당나귀가 내달리기 시작했다.한동안 차량과 나란히 달리던 야생당나귀는 이내 차량을 추월하기 시작했다.
○중국,보호구역 지정
차 안의 탐사대원들은 운전기사에게 『더 빨리』를 외치며 야생당나귀를 따라잡아달라고 주문했다.
하지만 비포장 초원 길을 시속 60㎞로 달려도 「고원의 경주자」 야생당나귀는 한발 앞서 달아났다.
뿌연 흙먼지를 날리며 오른편 산등 성이로 사라지는 날씬한 야생당나귀의 잔영이 아쉬움을 남겼다.
탐사팀은 잠시 차를 달려가다 일행을 잃고 홀로 헤매는 야생당나귀 한마리를 발견했다.50m쯤 가까이 다가가자 당나귀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 달아났지만 도망가는 기색은 아니었다.
덕분에 야생당나귀를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야생당나귀는 귀가 크고 전체적으로 몸에 균형이 잡혀 늘씬한 모습이었다.목부터 가슴과 엉덩이는 흰색이고 나머지는 회갈색인 것이 질주할 때의 기품은 보는 이가 한눈에 반하기에 충분했다.
당러융춰로 가는 길에 발견한 또 다른 야생동물이 영양이다.갈색의 몸 뒤편에 새하얀 엉덩이를 드러내는 것이 영양의 특징이다.사람만 보면 달아나기 바쁜 영양은 민첩성에서 야생당나귀보다 한수 위다.시속 80㎞의 속력을 자랑하는 영양은 탐사팀을 만나면 사정없이 내빼다가 반드시 뒤를 돌아보고 다시 달아나는호기심 많은 동물이다.
영양은 평소에는 제각각 활동하지만 교배기가 되면 초원에 집결해 암컷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수컷들끼리 각축을 벌인다.
교배가 이뤄진 뒤 5월로 접어들면 영양은 새끼를 낳기 위해 기러기가 있는 북쪽으로 3백∼4백㎞씩 이동하는 장거리 여행을 떠난다.
이곳에서 영양 새끼들은 기러기의 분비물을 먹고 자라 고기러기도 영양 새끼의 태반과 탯줄등을 먹으며 공생한다.새끼들이 어느정도 자라는 늦은 여름이 되면 영양은 다시 남쪽으로 귀향여행을 떠난다.
귀향여행중 강을 만나면 수컷들은 강으로 들어가 일렬로 줄을 지어 새끼들이 등을 밟고 강을 건너도록 하는등 「아버지 역할」을 톡톡히 한다.
영양은 봄이 되면 가죽속에 사는 벌레 배충이 등가죽을 뚫고 나와 가려움증 때문에 골치를 앓는다.영양은 별 수 없이 설산으로 올라가 배충을 동면시켜 가려움증을 해결한다.때문에 영양은 봄만 되면 설산을 오르내리는 「번거로운 등반」을 반복한다.
○영양,설산 오르내려
당러융춰에서 하룻밤을 묵은 뒤 니마현으로 되돌아오는 길에마주친 것이 야생 야크다.
야생 야크는 티베트어로 「예머뉴」라고 부른다.예머뉴는 주로 해발 5천m이상의 고지에 사는 야생동물로 중량이 무거운 것은 1천㎏에 달한다.몸 밑으로 커튼처럼 드리운 긴 털을 빗자루로 땅을 쓸듯 설렁설렁 움직이는 야생 야크는 위엄있고 당당해 보였다.
더욱 가까이 가보자는 탐사대원들의 요구에 티베트인 운전기사는 『워낙 사나워 위험하다』며 더 이상의 접근을 꺼려했다.
야생 야크는 티베트 유목민들에게 인기있는 생활필수품을 제공해준다.야생 야크로부터 얻는 것은 머리빗이다.야생 야크의 혀에는 가시가 돋아있어 한번 사람의 얼굴을 하아내리면 살갗이 벗겨진다고 한다.티베트 유목민들은 사냥한 야생 야크의 혀를 햇볕에 말려 머리빗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들쥐는 꼬리없어
창탕고원 뿐만 아니라 티베트 초원을 여행하다 보면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초원의 수많은 쥐구멍과 들쥐다.티베트의 들쥐는 털이 회색·갈색·흰색과 회색이 섞인 것등 3종류가 있는데 모두 꼬리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유목민들은 이곳저곳을옮겨다니며 목초지를 황폐케 하는 들쥐 때문에 골치를 앓는다.들쥐를 잡아먹는 족제비·매·들고양이등이 있지만 천적은 되지 못한다.<고창호 기자>
◎티베트 고산초화/5월 새싹… 프리물라 등 3천여종/바위틈·눈속에서 끈질긴 생명력
티베트 같은 고산지대에서는 수목이 자라기 힘들다.대개 해발 2천8백 이하인 지형에서 소나무를 볼 수 있으며 2천8백∼3천8백m에는 가문비나무와 전나무가 자생하고 있다.3천8백m 이상에는 참나무·고산 버드나무·진달래등이 자라지만 4천m가 넘어가면 나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티베 트고원의 황량한 모습을 달래주는 것이 고지대 바위 틈이나 눈을 뚫고 자라나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는 고산 초화들이다.
티베트고원에서 5월부터 불과 넉달남짓 동안에 새싹이 돋아 화려한 꽃을 피우는 고산초화는 3천여종에 달한다.
티베트에 봄이 찾아오면 제일 먼저 피는 것이 「프리물라」다.앵초과에 속하는 프리물라는 티베트의 봄이 시작되는 5월 중순께 해발 3천m부터 꽃이 피기 시작한다.
「메코노프시스 인테그리폴리아」는 해발4천9백m이상 바위틈 눈속에서 고고하게 꽃망울을 터뜨린다.샛노란 꽃잎이 하얀 눈과 어울린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신비한 생명력에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티베트의 고산초화중에는 해발 4천7백m 이상에서 자생하는 「사우레아」라는 진기한 꽃이 있다.사우레아는 반투명한 꽃잎이 꽃송이를 감싸 온실 역할을 하며 꽃을 피우는 특징이 있다.티베트인들은 사우레아를 눈을 짊어진 꽃이라는 의미에서 설하화라 부른다.이 꽃의 뿌리는 약으로도 사용한다고 한다.
티베트인들은 수많은 고산초화중 설련을 으뜸으로 친다.설련은 해발 5천2백∼5천8백의 만년설 고산지대에 자생하는 초화류다.때문에 티베트인들은 눈밭에서 꿋꿋하게 한떨기 꽃을 피 우는 설련을 가장 순결한 꽃으로 여긴다.티베트인들은 설련의 꽃과 뿌리를 보혈·강심제로 이용하거나 술을 담가먹기도 한다
성호 당러융춰 비경에 압도
성호 당러융춰(당야옹착)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니마(이마)를 출발해 당러융춰로 향한 탐사 지프를 따르던 지원 트럭이 강가 모래밭에 틀어박혔다.빠져나오려고 시도해봤지만 헛바퀴 소리만 요란할 뿐 트럭은 모래밭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지름길로 간다는 것이 오히려 시간을 더 잡아먹게 됐다.
이미 안둬(안다)에서 두차례 탐사 차량이 진흙탕 길에 빠져 곤욕을 치른바 있는 탐사팀은 트럭바퀴 주위를 삽으로 파고 돌을괸 뒤 지프로 끌어보았지만 바퀴자국만 파일 뿐 허사였다.
때마침 부슬부슬 내리는 가랑비가 모래를 흥건히 적셔 자력 탈출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지프를 몰고 니마로 돌아가 중국돈 3백위안(약 3만원)을 주고 「구원 트럭」을 불러온 뒤에야 모래밭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지름길을 포기하고 돌아가는 길로 접어든 탐사팀은 해 떨어지기 전에 당러융춰에 도착해야 한다는 강박감에 점심도 거르고 갈 길을 재촉했다.
전날 니마까지 오는 도중 차량을 세대밖에 보지못했던 탐사팀은 당러융춰로 가는 길에는 한대도 볼 수 없었다.대신 야생당나귀·영양 등 동물들이 탐사팀을 반겨주었다.
탐사팀은 가는 길이 험했지만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라싸(납살)에서 만난 서장대 생물학과 쭝츠런(종차인)교수가 『창탕고원의 성호 당러융춰는 외국인으로는 세계 최초의 방문』이라고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한동안 초원을 달리다 산양 두마리가 뛰어노는 가파르고 좁다란 산언덕을 넘자 그림 같은 경치가 한눈에 들어왔다.당슝(당웅)마을이었다.
30호남짓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마을 저편 설산이 마을 앞 호수에 그대로 투영된 모습이 아름답기 그지 없었다.
당슝 마을 앞 호수를 끼고 돌아 벌판으로 접어드니 뛰노는 영양이 탐사차량 소음에 놀라 달아나기 바빴다.
당슝에서 당러융춰로 찾아가는 길은 아무도 찾아본 흔적이 없는 「원시 상태」그대로였다.
마침 석양이 비추는 회갈색의 민둥산과 반대편 초원의 응달이 만든 조화가 태고의 신비를 연상케 했다.
게다가 멀리 보이는 설산에는 눈과 구름이 걸쳐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초원 너머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당러융춰는 태고의 신비를 더해주었다.당러융춰의 둘레는 1백40㎞.티베트에서 세번째로 큰 호수인 당러융춰는 두가지의 신비한 전 설이 내려오고 있는 곳이다.
이곳에는 스코틀랜드의 네시처럼 전설적인 괴물이 살고 있어 호숫가에 불시에 나타나 물을 먹는 야크를 단숨에 잡아먹는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전설은 당러융춰가 1천5백㎞ 이상 떨어진 티베트의 또 다른 성호 마팡융춰(마방옹착)와 지하로 물이 흐르는 통로가 있다는 것이다.
당러융춰 호숫가 마을인 원부샹(문포향)마을 주민들에게 확인해본 결과 이를 사실로 믿고 있지는 않았다.원부샹 마을은 인구 8백명이 모여 사는 규모가 적지않은 마을이었다.
하지만 티베트인이 아닌 문명세계의 외지인을 처음 본 주민들은 탐사팀이 마을로 들어서자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모여든 주민들은 남녀노소 구분이 없었다.「기도바퀴」 마니퇴를 돌리는 할머니부터 코흘리개 꼬마까지 모두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외지인들의 일거수 일투족에 눈길을 뗄줄 몰랐다.
탐사팀이 민박지로 정한 집 앞은 삽시간에 문전성시를 이뤄 출입이 곤란할 지경이었다.
민박집 주인은 둘러앉은 손님에게 버터차인 수유차를 연신 권했다.비릿한 맛에 한잔을 채 비우지 못하자 주인장은 수유차를 다시 따라주었다.
탐사팀의 피로를 풀어주려는 배려에서 나온 것이나 탐사팀이 티베트에서는 수유차 찻잔을 비워야 그만 달라는 뜻이라는 것을 몰라 억지로 두잔 이상씩 마셔야 했다.
이튿날 이른 아침 마을 언덕을 내려와 근거리에서 바라본 당러융춰는 호숫가 산세 너머 비치는 아침 서광을 받아 더욱 신비해 보였다.
손가락을 담가 물맛을 보니 짠 맛이었다.티베트 대부분의 호수처럼 당러융춰도 염호였다.
탐사팀은 호수의 깊이는 얼만지,호수에 사는 물고기는 어떤 종류인지 떠오르는 의문을 다음 탐사팀의 몫으로 돌린채 당러융춰와 아쉬운 작별을 하고 발길을 돌렸다.
당러융춰에서 돌아오는 길에도 먹구름이 몰려오고 바람이 강하게 불어닥치는 가운데 탐사 차량의 타이어가 펑크나는 바람에 갈때 못지않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당러융춰를 오가는 동안 겪은 어려움은 티베트의 성호를 다녀왔다는 뿌듯함에 묻혀버렸다.<고창호 기자>
◎신년풍속/흰색 명주 ‘하타’ 목에 걸어주며 행운기원
티베트에서는 음력처럼 60년마다 한 주기를 이루는 달력을 사용하고 있다.티베트 달력은 29일 또는 30일인 열두달이 모여1년을 이루며 3년마다 윤달을 둬 농사의 절기를 맞춘다.
따라서 「티베트 설」인 신년 축제는 우리의 설날과 비슷한 시기에 시작된다.티베트인들이 신년을 축하하는 풍습은 남다른 정성을 담고 있다.
티베트인들은 신년 축제를 위해 한 달전부터 준비를 한다.「만전」이라 부르는 이동식 제단이 티베트인들이 신년 축제를 위해 준비하는 필수품이다.티베트어로 「추수취마」라 불리는 만전은 화려한 조각을 한 직사각형 나무통 한쪽에 볶은 보리 낟알을,또 한쪽엔 볶은 보릿가루 「짬바」와 야크젖으로 만든 버터를 섞은 것을 놓는다.그위에는 갖가지 색깔로 물들인 보리·조·밀·수수등 이삭을 꽂는다.
만전에 꽂힌 곡식대들은 한달전에 실내에서 씨를 뿌려 이삭이팬 것으로 새해의 풍년을 기원하는 뜻이 담겨 있다.티베트인들은 신년 첫날 정성들여 만든 만전을 서로 교환한다.만전 교환이 끝나면 가족끼리 모여 만전의 곡식 이삭을 뽑아 낟 알을 신에게 바친다는 뜻으로 공중으로 던지고 일부는 씹어 먹는다.
새해의 행운을 비는 의식을 마치면 기름에 튀긴 티베트 도넛 「케이스」와 곁들여 전통주 「치앙주」를 마시며 신년을 축하한다.
행운의 상징인 흰색 명주 「하타」를 가족끼리 서로 목에 걸어주며 새해의 행운을 빌어주는 의식도 신년 축제 첫날 흔히 볼수 있는 풍습이다.
신년 둘째날에는 친척 또는 친구들과 신년 축하인사를 서로 나눈다. 셋째날에는 마을 집밖에 둘러모여 한가운데에 풀을 태우고한 움큼씩 쥔 짬바 가루를 뿌리며 폭죽을 터뜨림으로써 신년 축제분위기를 절정에 이르게 한다.짬바 가루를 뿌리는 것은 악귀를쫓는 티베트인들의 전통풍습에서 유래한 것이다
천혜요새 ‘구게왕궁’
니마를 출발한 탐사팀은 아리고원으로 접어들었다.모래바람이 휘몰아치는 카이쩌(개칙)와 거지(혁길)를 거쳐 인도와 국경이 가까운 국경마을 수취안허(사천하)에 도착하는데 꼬박 사흘이 걸렸다.국경마을 수취안허는 황량하기 그지없는 카이쩌·거지에 비해 훨씬 정돈된 도시였다.우선 비포장이 아닌 시멘트도로여서 지겨운 흙바람을 피할 수 있었다.
다음날 구게왕국을 찾아가기 위해 수취안허 공안국의 여행허가를 받으러 간 가이드가 『구게왕국을 갈 수 없게 됐다』고 전해 왔다.라싸(납살)에서 여행허가서를 내준 공안원이 구게왕국을 여행코스에서 빠뜨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탐사팀은 머리가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공안국 관계자와 몇차례 대화를 시도했으나 『구게왕국을 가려면 라싸까지 되돌아가 허가를 받아 와야 한다』는 원칙적인 대답만 반복할 뿐이었다.보름 이상걸려 달려 온 라싸까지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은 구게왕국답사를 포기하라는 의미로밖에 받아들일 수 없었다.그러나 하루종일 답답한 소식만 들으며 기다린 탐사팀에 저녁 늦게 낭보가 전해졌다.구게왕국 여행허가가 떨어졌다는 것이다.
가이드는 같은 티베트사람인 공안국 관계자를 설득했다고 말했 지만 아침부터 안되던 것이 갑자기 뒤바뀐데는 말 못할 사정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됐다.
어찌 됐건 구게왕국을 찾아갈 수 있게 됐다는 안도감에 탐사팀은 단잠을 청할 수 있었다.
이튿날 새벽 칠흑같은 어둠속에 이틀 동안 묵었던 아리빈관을 빠져나와 차에 올랐다.새벽 티베트의 하늘에는 별들이쏟아져 내릴 듯 가득했다.출발한지 2시간 지나서야 설산 멀리 먼동이 터 오기 시작했다.구게왕국으로 가는 길은 고난의 연속이었다.모래 언덕길에 탐사차량의 바퀴가 빠지고 탐사지프의 보닛까지 물이 차는 강물을 건너야 했다.지름길로 접어들자 지원트럭은 길이 좁아 더 이상 갈 수 없어 카일라스산 아래 강디씨빈관(강저사빈관)에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탐사팀을 태운 지프는 차 한 대가 가까스로 다닐 수 있는 좁고구불구불한 산길을 거슬러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갔다.5천m가 넘는 황막한 고지를 두 차례나 넘은 뒤에야 기기묘묘한 형상의 황금빛 모래탑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풍광으로 바뀌었다.구게왕국으로 가는 길목으로 들어선 것이다.
언뜻 보기에 모래탑 하나하나가 오랜 세월 풍화작용을 받아 조각해 놓은 듯 신비했다.모래탑은 사열받는 병사의 모습 같기도 하고 섬세한 조각을 해놓은 성곽 같기도 했다.모래탑이 줄지어선 모습은 「조물주의 걸작품」 그 자체였다.
한동안 털털거리며 모래탑 숲을 달리던 탐사차량은 깊게 팬 계곡 너머 자다(찰달)마을이 멀리 보이는 길로 접어들었다.햇살이 사정없이 내려쬐는 자다마을앞에 자그마한 호수가 있는 것 같았다.호수는 자동차가 움직임에 따라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호수가 아니라 사막에서 흔히 느낄 수 있는 신기루 현상이었다.
사방에 풀 한 포기 없는 황량한 곳에 위치한 자다마을은 30가구 남짓한 토담집들 사이에 나무 몇 그루가 있어 「사막속의 오아시스」 같은 느낌이 들게 했다.
구게왕국의 본거지는자다마을에서 20㎞ 더 들어가는 사파랑마을.사파랑마을을 찾아가기 전에 자다마을 행정기관에서 1인당 중국돈 5백위안(약 5만원)씩 주고 입장권을 사야 했다.외국인관광객에게 내국인보다 턱없이 비싼 입장료를 물리는 중국의 정책이 이곳에도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설레는 마음에 달려간 사파랑마을(해발 4천3백m)의 구게왕국은 가파른 언덕 꼭대기에 왕궁이 있었다.높이가 1백70m나 되는 계단을 숨을 몰아쉬며 올라가지만 너무 비좁았다.『왕궁은 어디 있느냐』고 관리인에게 묻자 멋쩍은 표정 을 지으며 『이 조그만 건물이 왕궁』이라고 대답했다.
구게왕국은 서기 866년 중앙티베트의 불교박해 정책을 피해 토번국의 왕족들이 세운 불교왕국이다.7백60여년 동안 남한면적의 2배에 가까운 18만평방㎞의 영토를 자랑했던 구게왕국이지만 왕궁은 생각보다 너무 왜소했다.
왕궁의 면적은 30평 남짓했다.그러나 앞에는 인더스강으로 합쳐지는 강물이 흐르고 좌우와 뒤편은 깊고 넓은 계곡이 자리한 천혜의 요새였다.
왕궁을 둘러싼 황토산 암벽에는 8백79개의 동굴들이 벌집처럼 촘촘히 박혀 있고 내려오는 계단을 따라 부처를 모신 5개의 사찰이 있었다.관리인이 차례로 문을 열어준 사찰마다 먼지가 뽀얗게 앉은 벽화와 부서진 불상들이 지난 세월을 말해주는 듯했다.부서진 불상은 티베트 대부분의 사찰이 그러하듯 문화혁명때 당한 무자비한 탄압의 상처였다.불교신자가 아닌 이방인의 눈에도 안쓰러운 느낌이 들었다.
구게왕국 유적지를 돌아보는 사이에 어느덧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고 있었다.구게왕국의 잔영도 땅거미와 함께 다시 어둠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티베트인의 「적자생존」 육아법/신생아 스스로 울때까지 그대로 방치
티베트의 육아법은 적자생존식이다. 산모가 신생아를 낳으면 아기를 그대로 방치해 둔다.
깨끗이 닦아주지도 않고 첫 울음을 터뜨리기 전에는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티베트인들은 열악한 환경때문에 스스로 울지 않는 아기는 병약한 아기로 간주해 탄생을 인정하지 않는 오랜 풍습을 갖고 있다.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아기는 스스로 울기 시작한다.그때야 비로소 아기의 탄생을 인정하는 것이 티베트인들의 불문율이다.
신생아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는 것은 태아의 생존본능을 십분 활용하기 위한 것이다.아기는 먹을 것을 안주면 본능적으로 손에 묻은 태반액을 빨아먹게 된다.
아기가 빨아먹은 태반액은 장속에 들어가 일종의 방역기능을 하게 된다고 한다.때문에 신생아들이 흔히 걸리는 황달을 앓는 아기를 티베트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산모가 아기에게 처음 젖을 주는 것은 새끼손가락만한 배내똥을 보고난 다음이다.
배내똥이란 아기가 태내에 있을때 탯줄을 통해 배설을 하고 남은 똥이다.
신생아 체내에 축적된 찌꺼기인 배내똥이 몸에 남아 장이나 위로 올라올 경우 아기는 토하게 되고 소화장애등 갖가지 병의 원인이 된다.
일단 아기가 울기 시작하면 약간의 물과 야크젖으로 만든 버터를 섞어 먹인 다.
아기 뱃속에 들어간 물과 버터는 배를 부글부글 끓게해 저절로 설사를 하게 된다.그것으로 배내똥을 배설시키는 것이다.티베트의 산모는 배설한 배내똥을 확인한 다음 비로소 젖을 물린다.
생후 1백일된 신생아를 사원으로 데리고 가 건강을 기원하는 의식을 벌이는 것도 티베트의 전통 육아관습이다.
라싸 북쪽에 있는 써라(색납)사원을 찾았을 때 사원 입구에 갓난 아기를 땅바닥에 놓고 강보에 다시 싸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사원안 불상앞에는 갓난 아기를 안은 엄마들이 예불을 위해 줄지어 서 있었다.
갓난 아기를 안은 엄마들은 자신의 차례가 되면 성인 머리가 들어갈 만한 크기의 구멍이 나 있는 불상아래 구멍에 아기머리를 넣었다 빼며 고개숙여 예를 올렸다
‘신비의 성산’ 카일라스
구게왕국을 뒤로 한 탐사팀은 성산 카일라스를 향해 출발했다.카일라스는 불교와 힌두교인들에게 신이 사는 성스러운 산으로 알려져 있는 곳이다.
불교신자에게 카일라스는 부처의 현신인 뎀초크가 살고 있는 성지인 반면 힌두교도들에게는 파괴의 신 시바가 살고 있다고 전해내려오는 곳이다.
인더스·갠지스·스트레치·프라마푸트라 등 4대 강의 발원지인 카일라스는 이들에게 「세상의 중심」으로 인식되고 있다.
때문에 카일라스는 험한 길에도 불구하고 신도들의 순례 행렬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아마도 티베트인들에겐 카일라스가 라싸 조캉사원 다음으로 신을 공양하는 순례자들이 많이 찾는 장소일 것이다.
고개를 몇차례 넘고 평지에 접어들었다.카일라스로 가는 길은 비가 곧 내릴듯 하늘이 잔뜩 찌푸린 모습이었다.오후로 접어들자 소나기가 거세게 퍼붓더니 대지를 적신 뒤 먹구름이 사라지기 시작했다.신기한 것은 차량이 가는 곳만 따라다니며 비가 오는 것이었다.인근에는 햇볕이 쨍쨍한 것이 우리의 여름날 소낙비내리는 모습과 흡사했다.한 대원은 『오늘은 티베트 여우가 시집가는 모양』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오후 늦게 탐사 지프 오른편으로 구름 속에 카일 라스 산이 모습을 살짝 드러냈다가 다시 구름 속으로 숨어버렸다.탐사팀은 카일라스 산을 필름에 담아보려 30여분동안 기다렸으나 실패했다.대신 반대편 해발 7천6백94의 구르라만다라(납목 나니) 설산을 찍는데 만족해야 했다.
결국 카일라스 산 촬영은 다음날로 미루고 지원 트럭이 먼저 가 기다리고 있는 숙소 강디쓰(강저사) 빈관으로 향했다.
카일라스 산자락 밑에 있는 강디쓰빈관은 「만국인 숙소」였다.저녁식사 시간에 버너를 빌려달라는 인도인,빈관 앞 야영지에 텐트를 친 미국·독일인,옆방의 일본인,한국인 탐사팀 등 다양한 나라 여행객들이 강디쓰빈관을 메우고 있었다.정작 티베트인들은 노숙하며 카일라스를 찾는다는 것이 빈관 주인의 설명이었다.
카일라스 산은 둘레가 52㎞에 이르는 성산으로 순례자들은 대개 「산돌기 순례」를 위해 찾는 것이다.카일라스 산돌기 순례는불교에서는 「코라」,힌두교에서는 「파리카마」라고 부른다.
산을 한바퀴 돌면 순례자가 평생 지은 모든 죄를 용서받을 수 있고 1백8바퀴를 돌면 깨달음의 최고 경지인 「니르바나(열반)」에 이르게 된다고 한다.
다음날 아침 탐사팀은 카일라스 산을 향해 나섰다.카일라스로 다가갈수록 탐사 팀도 자연히 순례자들의 움직임에 관심이 갔다.하지만 손과 무릎이 피로 얼룩진 채 산돌기를 하는 「독실한 순례자」를 만나지는 못했다.대신 카일라스에 도착한 것에 만족해하는 칭하이(청해)성 출신 일가족 8명의 순례자들을 만났을 뿐이다.집을 떠난지 11개월만에 카일라스에 도착했다는 이들은 카일라스 산 땅바닥에 입을 맞추고 흙을 집어먹는 등 감격해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여전히 구름에 가려 산 모습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 카일라스를 뜨기로 한 탐사팀은 성호 마팡융춰(마방옹착)와 라앙춰(납앙착)로 발길을 돌렸다.
마팡융춰에는 마침 티베트 양가죽 옷 「추빠」를 입은 순례객들이 앉아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한동안 기도를 마친 순례자들은 둘레가 1백㎞에 달하는 거대한 마팡융춰 호 돌기에 나섰다.질풍같은 맞바람에 몸이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기 어려운 상황인데도 순례객들은 묵묵히 앞으로 나아가며 「옴마니반메훔」 6자 진언을 외고 있었다.아마도 순례객들은 「석가모니의 고행」을 몸으로 느끼고 있는 듯했다.
탐사팀이 마팡융춰 다음으로 찾아간 곳이 라앙춰 호.
카일라스 산이 호수 너머로 보이는 라앙춰에서 1시간30여분동안 기다린 뒤에야 탐사팀은 구름 걷 힌 카일라스 산을 간신히 필름에 담을 수 있었다.다음에는 구르라만다라를 카메라에 담기 위해 복주머니 모양의 라앙춰 반대편으로 찾아갔다.
설산 구르라만다라와 갈매빛 라앙춰가 수려한 모습을 드러냈다.그런데 어찌된 노릇인지 라앙춰 호숫가에 마치 바다처럼 파도가 치는 것이었다.호수가 워낙 큰데다 바람이 강하게 불기 때문이었다.
마팡융춰 인근 민가에서 민박을 하게 된 탐사팀은 마을 노천온천물로 오랜만에 세수를 제대로 할 수 있었다.이튿날 비라도 내리면 길이 두절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갈길을 서둘렀다.나흘동안 파양·사가·녜라무를 거친 뒤 국경마을 장무(장목)를 통해 네팔로 빠져나왔다.탐사를 시작한지 꼬박 한달 보름만이었다.
◎티베트의 젖줄 야루창부강/강변따라 ‘촌락벨트’… 농산물 90%이상 생산
티베트의 남부지방을 가로질러 흐르는 야루창부(아노장포)강은 길이가 1천7백80㎞에 달하는 티베트 최대의 강이다.
야루창부의 발원지는 성산 카일라스산으로 알려져 있다.하지만 히말라야 설산에서 흘러내리는 수많은 지류들도 동쪽으로 흐르는 야루창부강으로 흘러들어 노도와 같은 물살을 만들어낸다.야루창부는 히말라야의 동쪽 끝에서 남쪽으로 돌아 인도와 방글라데시를 거쳐 벵골만으로 흘러들어간다.때문에 인도와 방글라데시에서는 야루창부가 프라마푸트라강으로 통한다.
야루창부는 일교차가 심한 여름날 오후 강 수면이 올라갔다가 밤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수면이 줄어드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설산의 빙하가 녹아내려 강물이 되기 때문에 여름의 야루창부는 수량 변화가 시간대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반면 여름을 제외하고는 강우량이 적은데다 설산에서 유입되는 수량도 미미해 강답지 않다.
어디를 가나 강이 있는 곳에는 사람들이 모여살게 마련이고 거기에 문화를 꽃피우게 마련이다.평균 해발고도 3천1백m인 야루창부 강변에는 화려한 유채꽃을 비롯해 보리와 밀·감자 경작지가 발달돼 있다.
야루창부 인근 경작지에서 티베트 농산물의 90%이상이 생산된다. 농산물이 풍부하기 때문에 야루창부 지역은 티베트에선 보기드물게 사람들이 많이 모여사는 「촌락 벨트」를 형성하고 있다.티베트 제2의 도시 르카쩌(일객칙)와 취수이(곡수)·자샹(찰양) 등 도시들이 야루창부강을 따라 위치하고 있다.
야루창부는 해발 7천7백82의 히말라야 동쪽끝 봉우리 난자바와(남가파와)를 끼고 돌면서 여러 단계의 폭포를 이 루며 해발 8백m까지 떨어져 설산을 배경으로 보기 드문 절경을 연출해 낸다고 한다.하지만 자동차가 갈 수 없는데다 지형이 험해 외부인의 접근은 불가능한 「오지의 절경」으로 남아 있다
독립염원’ 비추는 달라이 라마의 빛
세계의 지붕’ 히말라야에 자리잡고 예로부터 외부의 간섭을 거부해 온 신비의 땅 티베트. ‘서쪽의 감춰진 땅’으로 불리고 있는 티베트는 아직도 외부인의 출입이 자유롭지 못한 곳이다. 지난 50년 중국군이 진주한 이후 티베트의 분리 독립을 요구하는 티베트인들의 시위가 끊이지 않았고, 이에 대한 중국의 강경진압은 세계의 주목을 받아왔다.
〈한겨레신문〉은 한국 신문사로는 처음으로 티베트 자치구의 정식초청을 받아 티베트에 들어가 티베트인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었다. 티베트의 정신적 지주로 독립운동을 주도하는 달라이 라마의 실체와 그들의 알려지지 않았던 독립투쟁, 종교 및 일상생활 등을 차례로 소개한다.<편집자 주>
“지난 5월5일 라사에는 두개의 태양이 솟았습니다. 푸달라궁 하늘의 동쪽과 서쪽에서 두개의 태양이 찬란하게 빛났습니다.”
해발 3천6백m 고지에 있는 티베트의 중심도시 라사에서 만난 많은 티베트인들은 주변을 살피며 과학적으로는 도저히 설명하기 어려운 ‘두개의 태양’에 대해 숨죽여 이야기하곤 했다. 그날은 바로 달라이 라마 14세의 61번째 생일이었다.
1959년 티베트를 침공한 중국에 저항해 대규모 시위를 벌이다가 실패한 뒤 8만여명의 지지자를 이끌고 인도로 망명한 달라이 라마.
티베트인들이 ‘환생한 부처’로 믿고 있는 달라이 라마는 중국 정부에 의해 국가분열을 꾀하는 ‘최고의 범죄자’로 지목됐으나 티베트인들에게는 여전히 정신적·정치적 지주로 남아 있다.
○“우리에겐 두개의 태양”
그는 현재 인도와 티베트 접경지역인 달람살라에서 망명정부를 이끌며 중국에 대해 비폭력 저항투쟁을 벌이고 있다. 지난 89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는 등 각종 인권상을 받았다.
티베트 자치주 종교문화부는 지난 1월24일 달라이 라마의 처소였던 푸달라궁에서 달라이 라마 사진을 철거하라고 명령했다. 라사 서북지역의 마르포리(붉은산) 언덕 위에 7세기 티베트를 통일한 송첸감포왕이 짓기 시작해 무려 1천년이 지난 뒤인 제5대 달라이 라마(1617∼1682)에 의해 완공된 푸달라궁은 티베트 불교의 상징이자 달라이 라마 권위의 징표였다.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도 불리는 푸달라궁은 1만5천개의 나무기둥으로 지어올린 13층의 건물로, 여기에 있는 1천개의 방에는 2만여개의 불상과 각종 탕카(벽에 그린 탱화), 보물들이 가득차 있다. 높이 1백17m의 푸달라궁은 지진 피해를 막기 위해 흙에 구리를 부어 2∼5m 두께로 벽을 만들었으며 철골은 쓰지 않고 나무와 흙, 돌 만으로 지었다. 티베트인들에게 푸달라궁 참배는 평생의 소원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런 만큼 중국 정부가 달라이 라마의 사진 철거를 강력하게 명했음에도 불구하고 푸달라궁 방마다 있는 각종 불상의 사이 사이에는 달라이 라마의 작은 사진이 한두장씩 붙어 있다. 티베트인의 달라이 라마에 대한 존경과 숭배를 중국 정부라 하더라도 전혀 어쩔 수 없다.
달라이 라마 사진 철거명령은 티베트인들로부터 격렬한 반발을 샀다. 라사 근교의 간덴사 승려들이 사진 철거를 거부하자 당국이 강제철거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충돌이 빚어져 승려 몇명이 살해되고 70여명이구속됐다는 소문이 라사에 나돌고 있으나 정확한 진상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푸달라궁뿐 아니라 라사에 있는 대부분의 사찰에서도 조그만 크기의 달라이 라마 사진을 ‘모시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라사의 일반 가정에서도 달라이 라마에 대한 숭배의 방법은 사찰과 다를 바 없었다. 시 정부는 올해초 각 가정의 불상에 놓여 있는 달라이 라마 사진을 치우라고 명령했으나 이 명령을 따른 라사 시민들은 거의 없다고 한다. “공안이 철거하라곤 하지만 차마 강제집행은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모든 가정에 다 있는 달라이 라마를 어떻게 억지로 없애겠습니까.” 라사 동부지역 주민 엔차이(37)는 중국의 달라이 라마 말살정책에는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티베트 동북지방의 한 농촌에서 농부의 둘째아들로 태어난 달라이 라마의 원래 이름은 ‘텐첸 카초’였다.
1933년 달라이 라마 13세는 가부좌를 튼 채 열반했다. 그의 얼굴은 남쪽을 향하고 있었고 라사 부근의 호수 수면에는 번쩍이는 기와와 긴 물받이, 그리고 ‘아·카·바’라는 세글자가 나타났다. 당시 카샥(내각)은 이 아·카·바라는 글자가 칭하이(청해)성의 한 농촌에 있는 작은 사원을 의미한다고 해석하고 현인과 고승을 그곳으로 보냈다. 과연 그 농촌에는 작은 사찰이 있었고 사찰 앞에는 번쩍이는 지붕과 긴 물받이가 있는 집이 있었다. 고승은 하인복장을 하고 그 집에 들어갔다. 3살난 그 집의 아이가 하인복장을 한 고승의 소매를 붙잡고 라사의 사원에 가자고 졸라댔다. 카샥이 달라이 라마 13세가 쓰던 일용품을 다른 물건에 섞어 아이에게 보여주자 이 아이는 13세가 쓰던 물건을 정확하게 집어냈다. 이 아이가 바로 텐첸 카초였다.
○지배정책 실효 못거둬
달라이 라마14세로 지명된 텐첸 카초는 1950년 종교와 속세를 모두 통치하는 자리에 올라, 고리채를 탕감하는 등의 선정을 펴다가 중국의 침공으로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지금도 인도에 있는 달라이 라마의 중요한 지시는 1주일이면 티베트 전역에 전파된다고 한다. 일부 티베트인들은 비밀리에 자신들의 자녀를 인도의 망명정부에 설치된 학교에 보내고 있다.
히말라야 영봉이 병풍처럼 둘러서있는 ‘세계의 지붕’ 티베트에는 10만여명의 중국 인민해방군이 진주해 사실상 계엄령 상태에 있지만 티베트인들의 독립에 대한 염원과 그들을 지탱하고 있는 달라이 라마의 절대적인 지도력은 티베트인들에게 ‘두개의 태양’을 확신케 만들고 있었다
독립 몸부림 40여년 시련의 민족항쟁
티베트인들의 성지인 라사 푸달라궁 앞에는 대규모 광장이 조성돼 있다. 베이징의 천안문 광장을 본떠 만든 푸달라궁 광장은 2년 전까지만 해도 라사 시민들이 밀집해 살았던 주택가였다.
티베트 자치구 정부는 이 지역에 살던 주민들을 강제 이주시키고 광장을 조성하기 시작해 지난해 7월1일 중국 공산당 결성 기념일에 푸달라궁 광장 완공식을 성대하게 거행했다.
이날 새벽 중국 인민해방군은 광장 한가운데에 있는 국기 게양대에 중국 오성홍기를 게양하는 식을 하기 위해 나타났다. 그러나 그 순간 중국 인민해방군 관계자들은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높은 게양대 위에는 이미 옛 티베트 국기가 휘날리고 있었던 것이다.
○“오성기 대신 티베트깃발을”
중국 공안이 총동원돼 깃발 게양자 색출작업을 벌여 일주일 만에 8명을 붙잡았다. 놀랍게도 그들은 티베트인(장족)이 아닌 중국인(한족)이었다. 쓰촨성 출신인 이들은 5백위안(약 5만원)씩의 수고료를 받고 군복을 입고군인으로 변장한 뒤 티베트 국기를 게양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공안당국은 이들을 뒤에서 조종한 배후세력을 끝내 밝혀내지 못했다. 다만 달라이 라마가 중심이 된 티베트 독립세력이라는 심증만을 가졌을 뿐이다. 8명의 범인들은 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곧 총살당했다.
지난 53년 군을 진주시켜 티베트를 강제병합한 중국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티베트인들은 몸부림치고 있으나 그런 사실은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중국 정부는 외국기자의 티베트 출입을 철저히 통제할 뿐 아니라 내부의 언론 역시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티베트인들의 저항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 외부세계에 지속적으로 흘러나오고 있다.
라사에서 3백㎞ 떨어진 티베트 제2의 도시 시가체의 타시룸포 사원은 1418년 달라이 라마 1세가 건립한 사원으로 역대 판첸 라마의 거처로 유명하다. 5백여명의 승려들이 사는 이 사원의 큰 법당에는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이 쓴 ‘호국이민’이라는 현판이 ‘부자연스럽게’ 걸려 있다. 지난해말 달라이 라마가 지명한 판첸 라마 11세가 정통성이 없다며 중국 정부가 새로 판첸 라마를 지명할 때 달아 놓은 현판이다.
지난 5월 타시룸포 사원에서 거행된 판첸 라마 11세에 대한 정위식에 이 사원의 존경받는 림포체(고승) 2명이 불참했다. 대외적으로는 다른 지역으로의 여행 등을 이유로 댔지만 중국 정부의 조처에 대한 항의의 뜻으로 불참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듯 새로 임명된 판첸 라마 11세의 사진은 이 사원의 법당에서 단 한장밖에 발견할 수 없었다. 대부분지난 시절의 역대 달라이 달마와 판첸 라마의 사진이 참배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가장 큰 법당을 지키는 승려에게 “망명한 달라이 라마를 존경하느냐”고 묻자 “그는 영원한 우리의 지도자”라고 거침없이 말한다. 그러나 바로 옆에 기자를 안내하던 티베트 자치구 외사처 직원이 있음을 의식한 듯 “종교적인 존경심은 정치노선과는 별개의 것”이라고 서둘러 덧붙였다. 이 사원에서 만난 한 승려는 “지난 5월 중국 중앙의 판첸 라마 지명에 항의하던 승려 수십명이 공안당국에 체포됐다”며 “이 사건 이후 승려로 변장한 공안원들이 사원에 침투해 있다”고 귀띔해 주기도 했다.
국제사면위원회는 59년부터 79년까지 중국정부에 대항하다 숨진 티베트인이 1백만명을 넘는다고 밝혀 국제사회를 놀라게 했다. 87년부터 93년 사이에는 해마다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고 그때마다 중국 정부는 군대를 동원해 강경 진압을 하고 계엄령을 발동하기도 했다.
티베트 독립운동 세력은 네팔과 티베트의 접경지역인 무스탕에 근거지를 두고 저항운동을 배후 조종하 거나 지휘했다. ‘평화의 전사’로 불리던 이들 게릴라들은 미 중앙정보국의 지원을 받았고 미군 수송기가 물자를 공급했다. 또 대만에서도 이들 티베트 독립운동 단체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기도 했다.
○게릴라활동 최근엔 주춤
그러나 미국과 중국이 정치·경제적으로 가까워지면서 미국은 점차 소극적으로 변했고 네팔 역시 중국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대만도 양안간의 긴장을 의식해서 점차 티베트 독립세력에 대한 원조를 줄였다. 그 결과 현재는 이 무스탕 지역의 게릴라 기지가 무력해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국제사회 환경의 변화가 가져온 결과였다.
그러나 지금도 중국의 지배에 항거해 티베트를 탈출한 뒤 달라이 라마가 있는 인도로 망명하는 티베트인들이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눈으로 덮여 있는 히말라야 산맥을 넘다가 얼어죽는 경우도 많이 있다. 티베트 망명정부는 최근 2년간 약 1만6천여명이 망명했다고 밝히고 있다. 중국정부는 최근 인도 네팔 접경지대에 국경수비대를 창설하기도 했다.
중국 55개 소수민족 가운데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가장 큰 티베트인들의 중국에 대한 저항은 곧바로 다른 소수민족을 자극할 수 있기 때문에 중국 정부 가 한발치도 양보를 하지 않고 있다. 달라이 라마의 비폭력 독립투쟁이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는 것은 오히려 중국의 이런 강경 진압에 대한 거부감에서 기인하는 부분도 있다.
척박한 땅너머 꿈꾸는 내세 행복
라사 북쪽의 서라사원 주변에는 외국인들의 접근이 ‘철저히’ 금지된 지역이 있다. 그리 높지 않은 돌산 중턱에는 조그만 절이 있고 그 옆에는 검붉은 색의 20평 남짓한 널따란 바위가 있다. 이곳이 티베트 고유의 장례의식인 조장을 치르는 조장터다.
주검을 독수리의 먹이로 제공하는 조장은 천장으로도 불리는데, 선사시대에 널리 행해졌으나 지금은 지구상에서 티베트에서만 유일하게 존재한다.
80년 초 티베트가 처음 개방됐을 때 외국인들이 조장 모습을 사진에 담아 공개하자 세계는 티베트인들을 야만인으로 몰아 붙였다. 고유한 불교적 의식세계와 생활환경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들의 잣대로만 평가하는 것에 혐오감을 느낀 티베트인들은 그 이후 외국인들의 조장 참관을 엄격하게 금지 시켰다.
라사에서 만난 현지인을 동원해 가까스로 조장터에 들어가 봤다.
화강암으로 된 널따란 조장터 바위는 붉은 빛이 짙게 배어 있었다. 한쪽 옆에는 날카로운 칼이 놓여 있고 비릿한 냄새가 진동했다. 뒤쪽은 독수리가 사는 바위산이었다.
티베트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주검을 3∼5일 집안에 안치 했다가 조장 터로 옮긴다. 조장터에 주검이 도착하면 향나무로 모닥불을 피우고 볶 은 보릿가루인 ‘짬바’를 모닥불에 뿌린다. 장의행사를 진행하는 라마승은 사람뼈로 만든 퉁소를 분다. 독수리를 부르기 위해서다.퉁소소리와 모닥불 연기냄새를 맡은 독수리들은 곧 뒷산에서 모습을 드러낸 뒤 산 중턱까지 날아온 다음 거기서부터는 걸어 내려와 시신에 다가간다.
장의사는 독수리들이 쉽게 먹도록 살갗을 벗겨내고 칼로 뼈와 살을 분리한 뒤 살을 잘게 자른다. 부유한 집안일수록 살을 세밀하게 잘라낸다. 독수리 떼가 남긴 뼈는 바위 중간 중간의 움푹 파인 곳에 모아 놓고 돌로 으깬다. 그리고 볶은 보릿가루를 섞어 놓으면 다시 독수리들이 와 마저 먹는다.
조장 진행과정은 가족들도 볼 수 없다. 혹 남아 있는 뼈가 있으면 수습해 화장한다.
티베트에 조장이 유지되는 것은 종교의식과 척박한 자연환경 탓이다. 대부분 불교도인 티베트인들은 죽은 뒤 다시 태어난다는 윤회(환생)사상을 신봉한다. 다시 복이 많은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선행(보시)의 하나로 자기 육신을 새의 먹이로 제공하는 것이다. 또 하늘 높이 나는 독수리가 자신의 육체를 먹으면 영혼이 하늘나라에 가까이 갈수 있다고 생각한다.
종교적으로 가장 가치 있다고 여기는 장례의식인 화 장에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는 현실적 이유도 있다. 산에 나무가 자라지 않는 티베트에서는 질 좋은 나무가 매우 귀해 화장은 고승이나 일부 부유한 사람만이 할 수 있다. 또 땅 자체가 바위이기 때문에 매장도 어렵다.
따라서 지금도 대부분의 티베트인들이 조장을 한다. 라사 시장(서장) 대학에서 만난 한 학생은 “조장은 우리 민족의 자연스럽고 독특한 풍습”이라며 “어떤 장례의식이나 결국 자연으로 돌아가기는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다음 생의 행복을 기원하는 티베트인들의 강한 바람은 ‘전경통’에서도 엿볼 수 있다. 현지어로 ‘마니’라고 불리는 전경통은 티베트인들이 한손에 잡고 돌리는 조그만 통으로 티베트 어디서든 마니를 돌리는 모습은 흔히 눈에 띈다. 손잡이 끝에 달린 회전하는 통 속에는 ‘옴마니밧메훔’이라는 경문을 1만번 인쇄한 종이가 말려 있다. 내세의 행복을 기원한다는 뜻의 이 경문을 넣은 경전통을 한번 돌릴 때마다 입으로 1만번 외운 효과가 있다고 그들은 믿는다. 푸달라궁의 외벽을 따라 큰 전경통이 수천개 설치돼 있어 순례자들은 왼손으로는 자신의 전경통을 돌리고 오른손으로는 벽에 설치된 전경통을 차례로 돌리곤 한다. 현실이 어려울수 록 다음 내세에 대한 기대는 더 커지는 것일까
라사의 밤’은 아직은 어둡다
해발 3600m 고지에 있는 라사를 찾은 외국인들은 평지보다 20% 가량 부족한 산소로 인해 무겁게 압박하는 듯한 불쾌함과 함께 네온사인을 찾기 힘든 어두운 밤거리에 거북해 한다.
밤이 어두운 이유는 물론 전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라사 시민들은 일주일에 평균 2일 정도 전기 없는 밤을 지내야 한다. 전기가 들어오는 날도 자주 전기가 나간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이 때문에 집안에 충전장치를 갖춰 놓고 단전이 되면 평소에 충전해 놓은 전기를 이용하기도 한다.
최근 소득향상에 따라 일부 계층의 냉장고 구입이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으나 잦은 단전으로 가정집에 있는 냉장고는 무용지물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지난해 라사 시정부는 중앙에서 지원받은 9억위안(약 9백억원)으로 라사 인근 대형 호수의 물을 이용한 수력발전소를 건설하기는 했으나 공사부실로 아직 발전을 하지 못하고 있다. 부족한 전력은 티베트의 경제발전을 늦추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중국 중앙정부는 티베트사람들의 중앙에 대한 불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해마다 적지 않은 규모의 예산을 지원하고 있으나 아직 그 효과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현재 라사에 진출한 외국기업은 10여개에 불 과하고 그나마 독립 투자기업은 하나도 없다. 일본과 홍콩 독일 쿠웨이트 등의 나라에서 소규모 합자투자를 했을 뿐이다. 중국 정부는 티베트에 진출한 외국기업에 대해 다른 지역에 비해 더 좋은 투자조건을 제시하고 있기도 하다.
목축업과 농업을 주된 산업으로 하는 티베트에 외국기업의 손길이 아직 드문 이유는 교통·운송의 어려움이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티베트 주변 쓰촨성(사천성), 칭하이성(청해성), 신장·위구르 자치주와 연결되는 3개의 육로는 길이 험하고 시간도 많이 걸려 경제적 구실이 미약하다. 쓰촨성의 성도 청두를 거치는 항공로 역시 물자수송을 하기에는 부족하다.
다른 지역에 비해 2배에 이르는 임금도 외국기업의 진출을 주저케 하고 있는 요인이다.
중국 정부는 1억의 인구를 지니고 있는 쓰촨성을비롯해 티베트 주변지역에 있는 젊은 노동력을 최근 티베트에 끌어들이고 있다. 대부분 단순노동에 종사하는 이들 한족은 일정기간 돈을 번 뒤 돌아간다. 이 가운데는 가라오케 등 유흥업소에 진출하는 여성도 많다. 티베트 유흥업소의 접대여성 대부분이 외지에서 들어온 사람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에서는 중국 정부가 티베트인들의 독립에 대한 의지를 꺾기 위해 한족을 대규모로 이주시키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경제개발을 위한 티베트의 몸부림은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라사 중심부에서 동쪽으로 40㎞ 가량 떨어진 지역에는 최근 티베트 최초의 공업단지가 조성되고 있다. 지난 3월부터 시작된 단지조성 공사는 모두 5천2백만위안(약 52억원)이 투입돼 오는 11월까지 1단계 공사를 마치면 의류 냉동육 농업기계 등 5개 분야의 공장이 가동된다.
특이하게도 이 공업단지는 정부가 아닌 개인에 의해 개발된다. 공업단지의 책임자인 성룽(45)은 대학에서 의류디자인을 전공한 뒤 청두에서 의류 제조업체를 하다가 5년 전 티베트에 왔다. 공업 불모지인 라사에 최초의 공업단지를 건설하기로 작정한 성룽은 자신의 친구들이기도 한 청두의 실업가들을 설득해 투자약속을 받아낸 뒤 황량하고 척박한 땅 위에 공장을 짓기 시작한 것이다.
성룽은 “이 공업단지는 100% 민간자본으로 건설되기 때문에 정부로부터 어떤 간섭도 받지 않고 있다”며 강한 의욕을 보였다.
자오허(41) 라사 인민정부 부시장은 “비록 현재는 교통이 불편하기는 하나 오염이 전혀 안된 자연환경을 이용한 산업은 전망이 좋다”며 한국 기업들의 기초 산업시설 투자를 기대했다.
그러나 티베트인 특유의 종교생활과 경제의식은 티베트의 경제발전이 다른 지역에 비해 뒤처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느낌을 준다. 라사 중심부의 조캉 사원 주변은 항상 티베트 전역에서 온 성지 순례자들로 북적거린다. 이들 순례자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순례자들은 오체투지의 절을 하는 불교신자들이다.
온통 흙먼지로 뒤덮인 갈기갈기 찢어진 옷을 걸친 이들은 얼굴도 예외없이 흙으로 뒤덮여 있어 언뜻 보면 거지로 착각하기 쉽다. 이들은 멀리는 수백㎞ 떨어진 곳에서부터 두 무릎과 두 팔꿈치, 그리고 머리 등 신체의 다섯부분을 절할 때마다 땅에 완전 붙이는 오체투지를 하며 이동해 온 독실한 신자들이다. 걷지도 않고 라사를 향해 이렇게 절을 하며 이동하기 때문에 이들의 순례기간은 몇개월에서 몇년이 걸리기도 한다는 것이다. 일부 순례자들은 음식을 지닌 가족 한명 데리고 순례를 떠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홀로 이 멀고 험한 길을 떠난다. 이들은 순례기간중엔 자연스럽게 음식물을 구걸하기도 한다.
어떤 순례자는 그것도 모자라 조캉 사원을 에워싸고 있는 큰길에서 머리를 사원쪽으로 향한 채 오체투지 방식으로 조금씩 옆으로 이 동하며 불심을 단련하는 끈기를 보이기도 한다.
라사에서 3백㎞ 떨어진 남부도시 호카에 사는 반바츠런(61)은 해마다 5명의 가족을 이끌고 라사의 모든 사원을 순례한다. 온 가족이 차를 타고 라사에 와서 8일간 순례를 하는 데 드는 비용이 3천위안 정도인데 이들 가족의 연간수입은 4천위안 정도다. 결국 1년벌이를 성지순례에 바치는 것이다.
라사에사는 한 외국인은 종교에 온 생활을 던지는 티베트인들이 부럽다고 말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자신들이 가장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그들에게 물질은 별로 의미가 없으니까요.
중국의 이방지대
라사에는 조선족이 오직 한가족 살고 있다. 수소문 끝에 어렵사리 만난 이들은 라사 시내에서 담배장사를 하는 박씨 성을 가진 5남매였다.
라사 동쪽 주택가에 있는 자택으로 기자를 초대한 이들은 저녁식사가 끝난 뒤 안방 장롱에서 태극기에 쌓인 상자를 꺼냈다. 정성 들여 보관하고 있는 이 상자 안에는 지난 2월 93살을 일기로 사망한 이들의 아버지(박의준) 유골이 들어 있었다.
이들이 조장이 아닌 화장을 하고 유골을 집에 보관하는 이유를 장녀 자쌍(37·박순분)이 설명했다.
“생전에 고향을 간절히 가고 싶어하시던 아버지는 유언으로 화장을 해 뼛가루를 라사 앞을 흐르는 강물에 뿌려달라고 했어요. 바다로 흘러 들어간 뼛가루가 언젠가는 한반도에 도착할 것이라며요. 그러나….”
언니가 복받치는 울음에 말을 잇지 못하자 여동생 다와(33·박화)가 입을 열었다. “화장을 한 뒤 백두산 천지 물에 아버님 뼛가루를 뿌려 드리려고 했어요. 그러나 아버님이 그렇게 가고 싶어하시던 고향에 우리가 직접 가서 묻어드리는 것이 도리일 것 같아 이렇게 보관하고 있어요. 그날이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요.”
두 누나가 아버지 유언을 지키지 못한 불효를 말하는 동안 옆에 있 던 미마츠런(30·박준) 푸부츠런(25·박생) 꺼쌍(22·박춘) 등 남동생 셋도 굵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이들 남매는 정작 아버지 고향이 어딘지 모른다. 다만 아버지로부터 들은 ‘파랑도’와 ‘황도항’이라는 2개의 지명이 희미한 단서일 뿐이다.
이들이 들려준 아버지 박씨의 기구한 일생은 파란만장했던 한민족의 최근세사와 겹쳐 있다. 박씨가 중국으로 이주한 것은 3살 때인 1900년. 일제의 한반도 침탈이 본격화하던 당시 외할아버지와 어머니의 손을 잡고 만주로 온 박씨는 9살에 고아가 됐다. 외할아버지는 공장에서 사고로 숨졌고, 어머니마저 들판에서 이리떼에 희생됐다. 어렵게 자라 중국군에 입대해 항일투쟁에 참가한 박씨는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패해 러시아로 도망갔다가 결국 중국 쓰촨성까지 흘러갔다. 50년대 초중국 인민해방군이 티베트에 진주하자 박씨는 부인(중국인)과 함께 라사 부근으로 이주했다.
뛰어난 목공기술로 그럭저럭 살던 박씨에게 또다시 불행이 닥친 것은 60년대 중반 문화대혁명 때였다. 당시 한국으로부터 한통의 편지가 박씨에게 배달되자 중국인들은 박씨가 한국에서 파견된 특무(간첩)라며 인민재판을 통해 공민권을 박탈했다.
문화 혁명은 끝났으나 문맹이었던 박씨는 복권신청도 못했다. 박씨 자녀들도 학교에 가면 중국 어린이들이 조선족이라고 놀리는 바람에 모두 중도에 학업을 포기해야 했다. 박씨는 집안에서 이들에게 한국말을 가르쳤으나 배우려 하지 않았다. 현지 짱족에 동화되는 것이 살기 편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항상 우리들에게 한국인임을 기억하라고 강조하셨어요. 그러나 우리들은 그 말씀이 이해가 안됐어요.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너무나 많은 고통을 받았기 때문이죠.” 장남이 까닭을 설명했다.
박씨는 끝내 조선족임을 숨기지 않았고 이름도 바꾸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자식들은 중국인 어머니의 고집으로 짱족으로 호구 등록을 했고 이름도 짱족 이름을 쓰고 있다. 한국말이라고는 ‘담배’ ‘김치’ ‘멸치’ 등 몇 마디밖에 못하던 이들은 올해초 라사에 살고 있는 한국인 학자를 만나 조국에 대해 처음으로 깨닫게 됐다.
3년 전부터 라사 시짱대학에 교환 교수로 근무하고 있는 신근호(영남전문대) 교수는 일제 말기 티베트에 순례왔다는 3명의 조선 스님 행적을 추적하다가 이들 남매를 만나게 됐다.
70년대말 긴급조치로 해직교수가 됐던 신 교수는 티베트의 매력에 이끌려 한중 수교 전 네팔쪽에서 티베트를 연구하다가 수교 후 라사에 들어왔다. 지난 8월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라사에 티베트 문화원을 설립하기도 한 신교수는 라사에 살고 있는 조선족을 찾다가 박씨를 만났으나 이미 박씨는 병상에 누워 있었다.
박씨가 숨진 뒤 신 교수는 박씨 자녀들을 친자식처럼 보살피고 있다. 최근 한국에 일시 다녀온 신 교수는 서·남해안을 돌며 ‘황도항’과 ‘파랑도’라는 지명의 마을을 찾아 다니기도 했다. 지금도 티베트 고원 하늘을 떠돌고 있을 박씨 영혼의 안식처를찾아주기 위해서다.
박씨 자녀들은 현재 짱족으로 된 자신들의 민족을 조선족으로 고치기 위한 수속을 밝고 있다. 더이상 조선족임을 숨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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