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연산방에서/고두현
─『무서록』을 읽다
문향루에 앉아 솔잎차를 마시며
삼 면 유리창을 차례대로 세어본다
한 면에 네 개씩 모두 열두 짝이다
해 저문 뒤
『무서록』을 거꾸로 읽는다
세상일에 순서가 따로 있겠는가
저 밝은 달빛이 그대와 나
누굴 먼저 비추는지
우리 처음 만났을 때
누구 마음 먼저 기울었는지
무슨 상관 있으랴
집 앞으로 흐르는 시냇물 앞서거니 뒤서거니
뒤에 앉은 동산도 두 팔 감았다 풀었다
밤새도록 사이좋게 노니는데
시작 끝 따로 없는
열두 폭 병풍처럼 우리 삶의 높낮이나
살고 죽는 것 또한
순서 없이 읽는 사람이
먼 훗날 또 있으리라
<시 읽기> 수연산방에서/고두현
─『무서록』을 읽다
고두현 시인의 시집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를 읽다가 시집의 맨 앞에 수록된 위 작품에서 눈길을 멈추고 말았습니다. 특히 위 시를 지탱하고 있는 세 가지 인상적인 이름 앞에서 그것들이 간직한 의미를 마음껏 탐하느라 오랜 시간을 보냈습니다. 수연산방, 무서록, 문향루가 그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한자로 표기해야 그 울림이 생생하면서도 중후하게 살아납니다. 壽硯山房, 無序錄, 聞香樓와 같이 말입니다.
‘수연산방’은 소설가 상허 이태준이 살았던 성북동의 목조한옥에 붙은 현판의 이름이자 현재 그의 종손녀가 보수하여 찻집으로 운영하는 그 집의 상호이기도 합니다. 수연산방의 수연을 오래가는 벼루처럼 좋은 글, 또는 그러한 문인이라는 뜻으로 주관적인 해석을 해봅니다. 그렇다면 수연산방은 그런 글의 산실이거나 그런 문인들이 모이는 곳쯤으로 해석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이제 그 집은 찻집이 되었으니 이런 세계를 그리워하거나 음미하면서 차를 마시고 싶은 곳이라고 그 의미를 바꾸어 생각해볼 수 있겠지요.
위 시의 시인은 이런 수연산방에 들러 차를 마시는 것으로 작품을 시작합니다. 그 수연산방 가운데에서도 특히 상허가 그의 기역자 한옥 한쪽에 문향루라 이름 붙인 곳에서 차를 마시는 것으로 위 작품은 시작됩니다. 문향루란 문자 그대로 ‘향기를 듣는 누각’이라고 해석될 수 있습니다. 향기를 듣는다는 말이 놀랍고 이채롭습니다. 차를 마시면서 그 향기를 듣는 경지에까지 도달했거나 그런 경지를 꿈꾼다는 것은 그야말로 다茶문화의 진수를 포착한 경우입니다. 향기를 듣는다는 이 공감각적인 표현 속에는 감각의 유연성과 상호소통 그리고 교감이 빚어내는 여러 감각의 어울림과 신선한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면, 수연산방의 경우도 그렇지만 문향루와 같은 이름 붙이기는 일종의 시적 은유놀이입니다. 이런 은유 놀이는 인간들로 하여금 무상의 정신적인 귀족으로 살게 합니다. 해를 맞이해 들인다는 뜻의 영일루迎日樓, 마음을 씻는다는 의미의 세심루洗心樓, 계곡을 베고 누운 침계루枕溪樓, 달과 더불어 지낸다는 반월루伴月樓 등과 같은 이름은 다 그런 시적 은유놀이가 누정에 붙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이런 문향루의 은유적 사유에 안겨서 솔잎차를 마시며 그 마루를 둘러싸고 있는 유리창을 “차례대로” 세어봅니다. 그는 이렇게 세어본 결과 한 면에 “네 개씩 모두 열두 짝”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계산을 해냅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차례대로 계산하여 합리란 이름의 편리한 답을 말끔하게 산출해내는 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표현할 수 없는 세계까지도 표현할 수 있는 세계로 바꾸고, 질서화할 수 없는 세계까지도 질서화하고, 수식으로 표현할 수 없는 세계까지도 수의 힘을 빌려 정리하려고 대는 것입니다.
시인은 자신 속에서 이런 습관을 봅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보고’ 있기 때문에 곧이어 ‘무서록’을 이야기하고, 그 ‘무서록’을 거꾸로 읽은 일에 대해 말합니다. ‘무서록’이란 상허 이태준의 수필집 제목으로 그의 고풍스러우면서도 유미적인 내면과 삶과 그리고 취향을 담은 글들의 모음집입니다. 여기서 ‘순서가 없다’는 뜻의 ‘무서록’이란 말이 예사롭지 않게 들려옵니다. 어디를 먼저 읽어도, 어느 곳을 먼저 펼쳐도 상관이 없다는 이 표면적인 뜻과 방편으로 만들어진 세상의 편리한 질서와 순서를 전복시키고자 하는 저자의 속뜻이 함께 전해 오기 때문입니다. 고두현 시인은 이 무서록을 해 저문 뒤 거꾸로 읽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행위는 폭력적이리만큼 일직선적인 단선화를 고착시킨 세상에 대한 비판이자 그것을 슬쩍 벗어나는 일탈의 자유를 홀로 즐기는 일입니다.
그는 이 무서록의 정신에 기대어 기세 좋게 그의 시를 유려한 문체로 펼쳐 나갑니다. “세상일에 순서가 따로 있겠는가”라고 강하게 물음을 제기하며 그는 순서와 서열에 예속되었던 우리들의 경직되고 속박된 삶을 일시에 거풍하듯 거둬버리고자 합니다. 그의 말을 들어봅니다.
세상일에 순서가 따로 있겠는가
저 밝은 달빛이 그대와 나
누굴 먼저 비추는지
우리 처음 만났을 때
누구 마음 먼저 기울었는지
무슨 상관 있으랴
위 인용부분을 읽고 나면 “차례대로” 줄 세웠던 세상의 편견과 작은 순서에 목숨 걸었던 째째한 우리의 다툼들의 봄날의 눈 녹듯 스르르 녹아버립니다. 그리고 이내 몸이 대지처럼 부드러워지며 피가 잘 도는 것 같은 느낌에 젖어듭니다. 이것은 고체의 딱딱함이 액체이 유연함으로, 배제의 인색함이 포용의 푸근함으로 금세 화학적 변화를 일으키는 일입니다. 이런 화학적 변화 속에서 세상은 ‘무서록’이 말하는 바처럼 편안하고 자유롭게 뒤섞이며 제 모습대로 경계없이 존재하고, 모든 것이 다 중심이되 어느 것도 중심이 되지 않는 다원성의 바다를 이루게 됩니다.
시인은 내친 김에 집 앞의 시냇물과 그 뒤의 동산을 이끌어들이며 위에 인용한 다음 연에서도 순서의 폭력 없이 무위의 아름다움을 사랑으로 구현하고 있는 현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집 앞의 시냇물이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흐르며 노는 모양과 뒷동산이 두 팔을 서로 감았다 풀었다 하며 노는 모습이 그것입니다. 그가 보여준 이 모습에서 우리는 평화로운 시골 마을 앞으로 흐르는 잔잔한 시냇물과 그 마을의 뒤를 감싸고 있는 뒷동산의 편안한 풍경이 새롭게 연상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인상적인 이미지로 ‘무서록’의 정신을 구체화한 시인은 이제 마지막 연에서 자신의 의견을 조금 강하게 전면으로 드러내 보이면서 이미지보다는 요약된 철학적 전언으로 ‘무서록’을 읽는 일의 핵심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바로 바로 삶 속의 일상들은 물론, 생과 죽음이라는 거대한 문제까지도 실은 이 모든 것들이 처음과 끝이 일직선적으로 차별을 두고 존재하는 선조적 세계가 아니라 동시성, 다발성, 예측불가능성, 모순성, 초합리성, 다원성, 대화성, 다성성 등을 드러내는 시비是非와 경중輕重의 너머에 있는 세계라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런 역설은 점수화하고 서열화하고 조직화하고 수치화하고 재단으로 일관했던 세계를 인간이 개입하기 이전 혹은 그 이후의 단계로 되려놓거나 풀어놓습니다. 그의 이런 행위는 여태껏 우리를 옥죄었던 세상의 견고한 사슬 하나를 툭 끊어놓는 역할을 한 셈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분명 자유로 가는 인간의 길목을 넓힌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이 마지막 연에서 누군가가 뒷날 그 자신처럼, 세상의 모든 것들을 ‘무서록’의 ‘무서無序’가 가리키는 것처럼 순서 없이 풀어서 읽는 있는 시간이 올 것이라고 또한 기대해봅니다. 그렇게 누군가가 세상을 ‘무서록’의 정신으로 해체할 때, 그가 그랬듯이 이후의 세상 또한 그 편견과 경직성을 저버리고 자유분방하면서도 유연한 세계로 거듭날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시인이 기대하는 그 누군가는 우리들일 수도 있고, 또 우리들 뒤의 누구일 수도 있습니다.
위 시에서 ‘수연산방’은 단순한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문학과 고전과 여백의 고요가 담긴 동양화적 세계입니다. 그리고 그 속의 문향루는 차를 마시는 기능적이며 상업적인 공간이 아니라 감각을 예술로 들어 올리는 미학적인 세계입니다. 그런 배경 속에서 이루어지는, 무서록을 거꾸로 익는 행위는, 단순한 동작이 아니라 세상을 제자리로 해체시켜 풀어놓는 자유분방한 춤사위입니다. 세상의 어느 곳으로도 당신은 진입할 수 있고 그곳에서 당신만의 흔적을 홀로 만들어갈 수도 있고 허락하는 열린 텍스트가 이와 같은 무서록의 춤사위에 의해서 탄생됩니다.
수연산방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머무는 곳에서, 우리가 좋아하는 차의 향기를 들으며, 세상이라는 책을, 우리의 자연스러운 마음이 이끄는 대로 편안하게 이곳저곳 넘겨보면, 세상의 해체와 전복을 은밀히 꿈꾸고 실천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그런 시간이 잦을수록 우리는 보다 너그럽게 열린 세상에서 우리 속에 깃든 자유의 총량을 늘리며 제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정효구, 『시 읽는 기쁨』, 작가정신,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