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2월1일(화)■
(누가복음 19장)
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묵상/눅 19:1-10)
◆ 여리고에 도착하신 예수님
(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내려오는 길은 두 가지다. 하나는 갈릴리와 예루살렘 중간에 있는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방법과 또 하나는 사마리아를 피해서 동쪽길로 우회하는 길이다. 동쪽 길로 예루살렘으로 가려면 마지막 마을이 여리고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강도 만난 사람, 제사장, 레위인도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갔다(눅 10:30). 갈릴리로 가는 일반적인 경로이기 때문이다. 여리고에서 예루살렘까지는 직선거리로 25km이고, 도보로는 36km다.
그런데 우리가 유의해서 보아야 할 것은 이 시점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열흘도 안 남은 때라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이 매우 다가왔음을 잘 알고 계셨다. 그런데 제자들도 전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너무나 똑같이 살고 계심을 본다. 이런 부분이 경이롭다.
당신이 열흘 후에 죽을 것을 알고 있다고 해보자. 당신은 어떻게 행동할까?
◆ 삭개오의 회개
(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예수님의 사역 3년 차에는 꽤 유명 인사가 되었다. 여리고를 지나실 때 이미 큰 무리가 함께 했다(마 20:29). 이제 곧 유월절이 다가오기도 하므로 이 무리 중 상당수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다.
그런데 여리고에 삭개오라는 사람이 있었다.
삭개오에 대해 간략히 소개되어 있다. 세리장이고 부자이며, 키가 작다.
일단 세리장이라면 세리 중에 으뜸이다. 백성들이 속으로는 욕하면서 겉으로는 조심했을 것이다. 잘못 보이면 세금으로 트집잡힐 수 있기 때문이다.
삭개오가 부자라고 소개되었는데, 절대로 정당한 월급만 받아서 그렇게 될 수 없다. 그동안 많은 부정을 저질렀을 듯하다.
키가 작은 것은 외모 콤플렉스가 되었을 수도 있다.
아마도 그는 세상에서 자신이 내세울 수 있는 것은 돈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피도 눈물도 없이 돈을 긁어모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유명한 예수님께서 자기 마을로 지나가신다는 소문에 구경을 나가니 사람들이 많아서 얼굴조차 볼 수가 없다. 그는 근처의 나무로 올라갔다. 개역성경에는 '뽕나무'라고 번역되었는데, 개역개정에는 '돌무화과나무'로 번역되었다.
삭개오가 나무에 올라갔다는 사실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탐욕에 찌든 삭개오는 무엇을 갈망해서 그 나무에 올라갔을까? 단지 예수님의 얼굴에 호기심이 생겨서일까? 아니면 막상 돈을 벌어서 부자는 되었지만, 몰려오는 허전함을 달랠 수 없는 상황에서 막연한 기대를 하고 올라갔을까?
만일 예수님이 진짜 그리스도라면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삭개오에게 있지 않았을까?
마침내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마을에 도착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쳐다보셨다. 삭개오는 이 신비한 분과 눈이 마주쳤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갑자기 '삭개오야'라고 하셨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이분이 내 이름을 아시다니! 정말 심장이 멈출만한 충격이다. 정말 그리스도가 맞다.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정신줄을 놓을 정도로 충격이다. 모든 사람에게 공공의 적이며 죄인이라고 손가락질받는 자기를 그리스도께서 그냥 받아주신 정도가 아니라,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하셨다. 이것은 친구로 받아주시겠다는 이야기다.
삭개오는 급히 내려와서 예수님과 제자들을 자기 집에 모셨다.
사방에서 수군거리며 예수님조차 비난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개의치 않으며 삭개오와 함께하신다. 덩실덩실 춤을 추고 싶다. 웃음이 자꾸 나온다. 삭개오는 엄청난 선언을 한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8)
삭개오 아내가 옆에 있었다면 기함했을 말이다.
율법에서 훔친 양은 네 배로 갚지만(출 22:1-4), 속여서 빼앗은 것은 오 분의 일을 더 해서 돌려보낸다(레 6:1-6). 삭개오는 후자에 속할 것이다. 그런데 삭개오는 네 배로 갚겠다고 했다. 이제 삭개오는 거지가 된다.
일시적 감정으로 객기 부려본 말이 아니다. 주님께서는 삭개오의 진심을 아시고 이렇게 선언하셨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삭개오에게 이 재산이 어떤 의미였던가? 모든 것이었다.
누가복음은 우리에게 아주 묘한 대조를 보여준다. 여리고에 도착하기 며칠 전에 만난 반듯한 부자 청년은 이 재산 때문에 근심하며 돌아갔지만(눅 18:22), 오히려 탐욕스러웠던 삭개오는 주저하지 않고 단숨에 결단했다.
삭개오는 어떻게 이런 결단을 할 수 있었을까?
삭개오는 오늘 이 모든 재산보다 더 귀한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분을 얻을 수 있다면 모든 것을 잃어도 상관없다.
천국은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다고 하셨다. 보물을 발견한 후에 자기 재산을 다 팔아서 그 밭을 샀다고 했다(마 13:44).
삭개오는 그 보물을 발견한 것이다. 신앙생활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를 알면서 시작된다.
삭개오 사건은 또 다른 흥미로운 사실을 알려준다.
회개란, 눈물 흘리는 것이 본질이 아니라, 돌이키는 것이다. 삭개오처럼 껑충껑충 뛰고 웃으면서 회개하는 사람도 있음을 기억하라.
가끔 웃으면서도 자꾸 우는 모순적인 상황이 성도들에게 발생하기도 한다. 죄를 회개하느라 그렇게 울면서도 한쪽으로는 왜 그렇게 통쾌하고, 살 것 같은지.
예수님께서 내게 오시는 날, 그날은 천하를 얻은 날이다.
생수의 강이 내게 흐르는데, 한 바가지의 물로 으스대는 사람들이 어찌 부러우랴.
주님,
저를 구원해주심을 감사합니다.
주님께서는 제 마음에 법을 새기셨습니다. 이 법은 돌비에 새긴 법과 다릅니다. 제가 성령의 법을 따르며 진실한 믿음으로 살게 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