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할 수 있을까?
(요한1서 4:7~12 & 20~21)
눈 많고 추웠던 긴 겨울이 지나가고 여기저기서 새 봄의 기운이 솟아나고 있습니다. 저희 집 아파트 안에 있는 나무에 새 눈이 돋아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강 모라는 사람이 부녀자 7명을 죽여서 암매장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는 버스를 기다리는 여인들을 무조건 차에 태워 성폭행한 후 죽이고 암매장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내가 태운 것이 아니라 그 여인들이 스스로 탓다고 하면서 전혀 양심에 가책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남의 목숨은 그렇게 아랑곳하지 않으면서도 자기 자식에 대한 사랑은 아주 애절했습니다. 자식 때문에 죄를 고백하고 자식 때문에 자기 얼굴 비쳐주기를 거부하고 자기가 연속해서 살인한 과정을 책으로 써서 그 인세를 자녀들에게 주고 싶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편협한 사랑일까요? 놀라운 것은 이 강 모라는 사람의 얼굴이 신문과 TV에 비춰지자 인터넷에 강 모 씨의 팬클럽이 생겼고 그 회원수가 몇 일만에 15,000명을 돌파했다고 합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사랑하는 이와 갑자기 생이별하는 유족의 아픔을 생각지 않고 살인범이라도 얼굴이 잘 생겼다고 팬클럽을 만드는 사람들의 사랑은 더 이기적이고 편협합니다.
타락이란 무엇일까요? 태초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심어주신 사람의 마음을 상실한 것입니다. 즉 다시 말하면 사랑의 능력을 상실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둘 이상 모인 곳에서 그것이 가정, 직장, 어떤 공동체든 사이 좋게 지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사랑하기 힘든 이유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사랑에는 희생, 인내, 용서가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에는 고통이 따라야 합니다. 사람이 말로는 사랑한다하고 행동으로는 전혀 따라하지 않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매번 바람이나 피고 아내에게 폭력을 휘두릅니다. 왜곡된 사랑입니다. 희생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교회를 사랑한다하는데 교회를 위한 희생이 없습니다. 말로만 사랑합니다. 사람들이 희생과 고통을 싫어하기 때문에 대부분 왜곡된 사랑을 합니다. 결혼을 위해 남녀를 선택할 때도 부모님이 반대합니다. 반대하는 이유가 너는 학력이 높은데 상대방은 학력이 낮다는 것입니다. 내 딸은 200만원짜리 정도는 되는데 저 사윗감은 50만원 도 안 되는 것 같아 이것은 완전히 손해 보는 장사야 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참된 사랑이라 볼 수 없습니다.
어떤 남편이 식탁에서 아내의 허물과 결점에 대해서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당신은 음식도 잘못하고 자식 교육도 제대로 못시키지. 게다기 직장에 나가보면 당신보다 훨씬 더 나은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 이런 말로 아내의 기분을 몹시 상하게 만듭니다. 말할 것도 없이 아내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겠지요. 그런데 남편이 잠시 가게에 가서 물건을 사고 돌아왔더니 식탁 위에 이런 쪽지가 놓여있었는데 쪽지에는 부인의 글씨로 다음과 같이 씌여 있었습니다. ‘당신 부인의 허물과 결점에 대해서 너무 탓하지 마십시오. 그러한 결점들이 있었기 때문에 당신보다 더 훌륭한 남편을 만나지 못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희생과 고통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기적인 비즈니스입니다.
또 사랑은 인내가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사랑은 오래 참고’라고 했습니다. 고전 13장에서 바울은 사랑의 속성을 설명하며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래 참는다는 것은 사람과의 관계에 다른 사람에서부터 받은 악행, 공격, 상처를 견뎌내는 특성입니다.
고대 교부 크리소스톰은 ‘오래 참음은 상처를 받았을 때 복수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민족이 왜 사랑을 잘못하는가? 오래 참지를 못했습니다. 감정적이고 충동적입니다. 기분 나쁘면 천당도 안 갑니다.
사랑은 또 용서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서로 다투게 될 때 둘 사이에 어떤 사건이 일어나서 싸우게 됩니다. 가해자가 있으면 피해자가 있습니다. 참된 용서란 둘 사이에 그런 다투는 사건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한 번 다투면 평생 안 보려고 합니다. 사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타인을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이 세 가지를 다 충족시키는 완전한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심으로 희생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셨고 또 예수님은 죄 짓는 우리를 즉시 벌하지 아니하시고 인내하시고 갖은 모욕과 모함을 당하여도 인내하셨고 또 예수님은 죄를 고백하는 사람들을 무조건적으로 용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기억하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 처음 모습 그대로 받아주십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완전한 사랑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정말 타인을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유일한 방법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 속에 품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 속에 품으면 우리는 타인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남을 사랑하게 되는 유일한 길은 사람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가슴에 품을 때 우리는 그의 사랑 안에 거하게 될 것이며 그와 같이 사랑의 존재가 될 것입니다. 본문 말씀 요일 4:7~12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요일 4:20~21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라고 말씀합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찬송가 288장 완전한 사랑의 가사는 이렇습니다.
1. 완전한 사랑 하나님의 사랑 다함이 없는 사랑에 겨워
둘 한몸되어 보람있게 살라 손 모아 주님 앞에 빕니다
2. 온전한 생활하게 하옵소서 믿음과 소망 사랑 가지고
아픔과 죽음 겁을 내지 않고 주님만 의지하게 하소서
3. 슬픔을 이길 기쁨 주시옵고 다툼을 없앨 평화 내리사
사랑의 아침 환히 동 터오는 행복한 나날 되게 하소서 아멘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묵상해 보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사랑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거울 앞에 서서 그리스도의 성품을 반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부드러운 모습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슴 속에 품으십시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