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足)이 없으면
예를 하나 들어보자.
정형외과 전문의사 의학박사인 최우진정형외과는 족부전문만 치료하고 있는 의사이다.
한명의 의사가 되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걸음걸이를 두개의 다리에 의지하며 걸어야 할 것인가.
특히나 인턴이나 레지던트 1년차일 때가 생각되고 있다.
레지던트인 전공의 1년차에는 병원에서 집에는 1주일에 한번 오면 다행이다.
심지어는 아내와 병원으로 찾아간다. 입고 있던 옷을 받아오고 새로운 옷을 건네준다.
점심시간때라 점심을 함께 하자고 해도 시간이 없다며 돌아선다.
이처럼 병원환자들이 이곳 저곳에서 불러대니 잠도 쪽잠이란다.
인턴과정을 마치고 전공의가 되기를 포기하고 군에 입대를 한다.
자신이 원하는 전문과를 제대로 찾지 못한 때문이기도 하다.
경상북도 영천에 있는 군의학교이다. 아내와 아들 모두 세명이 대구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영천에 도착하여 아들과 목욕탕을 찾는다. 몸의 피로를 플어주기 위함이렸다.
시간에 맟추어 군의학교로 들어선다. 아마도 1월 말일인가 2월초든가 생각도 가물가물이다.
연병장에는 싸늘한 모레바람이 숨을 막히게 하고 있다. 어찌할까.
자식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아들은 두달인가 석달인가를 군의관 훈련을 받는 게다.
아내와 단둘이 서울로 귀가를 하여 마음을 굳힌다.
아들이 없는 자리가 이리도 허전할 줄이야 생각 밖이다.
" 동아국제마라톤" 에 난생 처음 출전을 하리라 다짐을 한다.
아들이 고생하며 군생활을 시작하는데 애비로서 조금이나마 위안을 삼으려는 것이다.
국제마라톤이라 세계 각국에서 유명한 마라토너들이 출전이다.
일반인들은 그들의 뒤를 이어 출발이다.
광화문에서 출발하여 강동구를 거쳐서 잠실에 있는 종합경기장으로 골인하는 것이다.
이때 이 노객의 연세는 겨우(?) 50대 중반을 넘긴 시절이다.
한달정도 달리기 연습을 한다.
강변역에서 여의도를 지나 김포까지도 달리기도 한다.
망우리를 향하고 오르고 묘역의 둘레길도 달린다.
하지만 42.195Km 완주가 아닌 Half 코스를 선택이다. 송파구에 있는 올림픽공원으로 골인하는 순간이다.
기념메달도 가슴에 받는다. 어떻게 알았는지 여약사들도 환영의 박수를 치고 있다.
어느 날인가 고교동기생의 전화를 받는다.
" 정남아 ~~ 너 동아일보에 이름이 실렸더구나. 마라톤 완주자들의 명단에 말이야 ~~"
이런 생각도 못하고 단지 아들의 훈련 고역만을 염두에 둔 것이다.
아들은 의사로서 이십대 초반의 싱싱하고 겁없이 꿈만을 향하여 달리고 있는 시절이리다.
특별한 운동을 별로 하지도 않은 바쁘디 바쁜 의대 6년과 인턴 1년을 마친 것이다.
군인들의 기본적인 훈련을 적응키도 따라하기도 버거웠을 것이리다.
무릎도 붓고 아프고 발바닥도 붓고 염증도 통증도 심하고 훈련을 접고 자퇴를 생각도 하는 순간도 있다.
군의학교 훈련받는 군의관 후보들이 주위에는 정형외과 전문의를 비롯하여 각과 모든 전문의들이 있다.
한의대를 졸업한 의사들도 있다. 기껏해야 소염진통제뿐으로 갈길은 요원하게 느낄 뿐이다.
4주일 지나 잠시 휴가를 집에 온 것이다. 어떻게든지 자식인 아들이 무사히 훈련을 마쳐야만 하지 않는가.
그래야 군의관 3년의 복무도 마칠 예정이다.
약사로서 진통소염제 근육이완제 혈액순환제 스테로이드제제 종합비타민 등 양약뿐 아니라 한약성분의
환제(丸劑)도 대야에다 넣는다.
대야에는 생리식염수 1,000ml 짜리 다섯병을 물론 항생제 정맥주사도 5바이알 같이 함유를 시킨다.
아픈 발을 그곳에 담그기를 계속이다.
복용약도 며칠분을 지어준다. 사흘정도 지나니 그토록 힘들고 아프고 훈련도 포기하려던 마음을 접는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훈련과정을 마친 것이다.
군의관으로 최전방의 신병교육대 군의관으로 발령이다.
경기도 문산을 거쳐 선유리라는 곳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신병교육대이다.
사회를 접고 신병훈련소에 몸을 담은 초년병들이다. 무척 긴장하고 모든 것이 낯설은 곳이 아닌가.
" 의사이기 이전에 신입훈련병들에게 인간다운 모습으로 대해 주거라 " 군의관인 아들에게 들려준 한마디가 아직도 새롭다.
그 당시의 집은 광진구 강변역 근처 아파트였다. 출퇴근도 무리라고 아내가 문산에 있는 아파트를 구입해 준 것이다. 그 당시 그곳 의 아파트값이 25평이던가 3천만원에서 4천만원 정도로 기억하고 있다.
전역후에는 매매를 한 것이다. 그냥 놓아두었다면 지금은 재개발한 곳이라 엄청 가격이 치솟았을 것이다.
직접 부딫혀 경험한 사람만이 알것이다.
" 아 빠 ~~~ 그때 무슨 약으로 치료를 해주셨나요 "몇년 뒤에야 묻는 아들이다.
정형외과에서도 족부전문의로 대학병원에 근무하던 때가 아닐까. 무척 궁금했었던 모양이다.
돌아간 대답은 여러분들의 상상에 맡기련다.
의과대학은 예과 2년 본과 4년 졸업후에 의사국가시험에 합격해야 의사가 된다.
의사면허증은 가슴에 달았으니 병원(의원)은 개원할 수가 있다.
전문의사가 되려면 의대 졸업후에 인턴1년 , 자신이 원하는 전문진료과를 선택하여 전공의 4년의 과정을 마쳐야 한다. 전문의자격시험에도 통과해야 해당과의 전문의사 자격증을 획득하는 것이다.
군복무도 3년의 세월이 기다리고 있다. 의대 를 입학하여 14년이 흐른 시점이다.
물론 이후로는 전문과를 내세울 수 있는 전문의사가 된 것이다.
그렇다고 전공분야의 모든 환자를 치료가 가능하려는가.
정형외과 내과 소아과 산부인과 ~~~ 그 이외의 여러 전문과도 많다.
예를 들어서 정형외과를 들여다 보자.
그 과를 전공했으나 모든 정형외과에 해당하는 질병을 전부 진료 처치 완치를 할 수는 없는 사실이다.
허리 목 팔 다리 족부 무릎등등 관절 부위에 따라 자신만의 전문부위가 있는 현실이다.
이처럼 자신만이 선택한 질병을 임상경험은 최소한 5년 이상이 필요하리라고 본다.
문외한인 노객이자 약사의 편견에 불과 할것이 아닐까.
이런 과정을 모두 거친 시점에서 전문의사의 연세는 몇살인가.
20세에 의대신입생으로 시동을 밟았다면 아마도 중년의 시작인 40세 전후가 되리다.
태여나 돌이 지나는 즈음에 첫 발을 아장마장 내딛는 순간일 게다.
이때 부터 앞으로는 백세가 평균수명으로 다가올 운명이 아닐까.
발(足)이 있어야 걷고 뛰고 산행도 하고 온갖 운동도 할 수가 있지 않은가.
남정네들에게는 또 더 중요하고 고귀한 또 한개의 족(足)이 있다. 무엇이던가.
옆에 계신 제수들께 엿쭤보거라. 가운데 다리가 아마도 가장 중요한 다리라고 할거다.
여인네들은 두개의 다리와 연못이 있을게다.
젊어서 50대까지는 그 깨끗한 연못에서 향기로운 샘물과 빠알간 장미꽃 한송이가 손짓하며 흔들다가 오무리고 빨아드리기도 하리다.
남정네들 뻣뻣이 치솟은 가운데 다리가 그토록 빨고 있는 연못으로 헤엄쳐 들어오기만 학수고대 하리다.
허나 70대 후반에는 연못의 샘물은 물론이며 빠알갛던 장미꽃은 어드메로 갔을까.
빠싹 말라버린 연못엔 물한방울도 없고 갈라진 논뚜렁엔 흙먼지 뿐으로 만져보기도 싫은 사막이 아닌가.
가운데 치솟던 다리도 쯔그렁 방텡이로 존재감도 없는 노객들의 오줌길일 뿐이리다.
언제 다시 "앗 ~~•뜨거워••• " 아 야~~퍼" 소리가 진동하는 꽃피고 새가 우는 화사한 봄날이 오려는가.
한숨뿐이 아니려나.
지금은 5년동안 경영하던 연세 * *병원을 접고 사당역 11번 출구에 최우진정형외과를 개원한 아들이다.
자신의 전문분야인 족부전문만을 내세우고 있다. 여타 관절질환은 사절이다. 족부에 대한 질환만을 사전에 예약환자만 진료를 하고 있다. 금년 2월초에 개원했으니 겨우 두달이 지났다.
" 원장님 명성으로 족부환자 진료에 시간가는 줄도 모르겠어요 "라는 간호부장 말 한마디가 약제실 근무약사로서의 자부심도 가져본다.
군의학교 훈련중에 발바닥 통증 염증 부종으로 치료를 주면서도 족부전문의사가 되리라는 생각은 상상도 하지 못한 것이 아니였는가.
매일 아침이면 기상과 동시에 한강가로 들어선다. 하루는 동호대교 방향으로 그 다음 날에는 잠실의 123층 쪽으로 향한다. 천천히 걷다가 조금 더 빠르게 걷기도 운동기구에 여기저기 매달려 흔들고 뒤틀곤 한다.
집에 도착 시간은 거의 두시간이 소요되는 일상이다.
나에게 발이 없으면 어떤 모습의 삶이련가. 생각키도 끔찍한 상상으로도 당혹스럽기만 하다.
신체 모든 부위는 인간들의 절대적인 생명체를 유지시키는 기본적인 필수조건이 아닌가.
오늘도 청담공원아파트를 뒤로 하고 한강가로 걷고 있는 모습이 신기하고도 행복한 삶의 순간이리다.
항상 같이 있는 육체의 각부분에 대한 감사함을 드리는 순간이기도 하다.
2023년 4월1일 무 무 최 정 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