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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壬寅年 *정착과 부흥의 해* 3月 ☞소통과 합력의 달☜
창1:20-25절) 물고기와 새와 짐승
아이들이 있는 집에 가면, 어디든지 동물들의 사진이나. 그림이 있습니다. 동물 그림책은 물론이고. 카드나〈동물의 왕국〉같은 비디오테이프도 있습니다.
아이들은 수많은 동물들의 생김새나 이름이나 특징에 가장 큰 흥미를 느낍니다. 동물들은 하나하나가 너무나 개성 있게 생겼기 때문에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습니다.
아이를 돌볼 때, 가장 어려운 점은 아이들이 쉽게 싫증을 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돌보거나 가르치는 사람들은 늘 새로운 아이디어를 짜내야 합니다.
머리가 굳어 있는 어른들, 특히 남자 어른에게 아이를 봐달라고 하면, 울려버리는 일이 예사입니다. 새로운 생각을 해내지 못하거든요.
그러나 아이들을 데리고 동물원에 가거나, 자기 집에 직접 동물들을 키우면 싫증을 내는 법이 없습니다. 동물들을 보면, 얼마나 재미있는지 모릅니다. 한 마리만 있어도 너무나 재미있습니다.
동물의 종류가 보통 많은 것이 아니지만, 그 하나하나가 다 개성이 있고, 특징이 있기 때문에 절대로 싫증이 나지 않습니다.
역사 소설 중에서 최고의 소설은 역시<삼국지>입니다. 삼국지가 그렇게 수백 년 동안 읽히고, 수십 가지로 번역된 이유는 여기 나오는 인물 하나하나가 개성이 넘치기 때문이고, 다루는 주제가 충성이나 의리 같은 진지한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동물의 세계가 바로 그렇습니다. 동물 하나하나가 그렇게 개성이 있을 수 없습니다. 사자는 용감합니다. 사자가 비겁하게 뒷걸음치는 일은 자고로 없습니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지요.
거기에 비해서 표범은 아주 날쌥니다. 기린은 목이 아주 깁니다. 하마는 엉덩이가 굉장히 큽니다. 미련하고, 둔하면서도 물속에서는 자유롭습니다.
또 악어도 있고, 코끼리도 있습니다. 말도 있고, 사슴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동물 하나하나는 생존이라는 엄숙한 하나의 과제를 두고, 아주 진지하게 반응하고 있습니다.
사슴이 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뒤에서 표범이 쫓아오니까 목숨 걸고 뛰는 겁니다. 또 표범은 사슴을 잡아먹고, 살려고 뜁니다.
생존과 종족 보존이라는 이 엄숙한 문제를 놓고 동물들이 너무나 진지하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동물의 세계는 아주 흥미진진하고, 재미있습니다.
물고기의 종류가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물속에는 작은 물고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길이가 수십 미터에 이르는 큰 물고기도 있습니다.
우리가 이름을 모르는 새들도 많습니다. 다리가 긴 새, 턱 밑에 뭐가 난 새, 소리가 아름다운 새, 음침한 새 등 아주 다양한 새들이 있습니다. 어떤 새는 계절마다 아주 먼 거리를 이동하기도 합니다.
사람이 만든 것 중에서 이렇게 다양하면서도 특징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것은 무엇인가 흉측하고, 괴기한 것들, 아니면 아주 단조로운 것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만드신 동물의 세계는 개성이 넘치면서도 다양합니다.
그래서 동물의 세계는 우리 주위에 있는 세계에 흥미와 관심을 갖게 만듭니다.
Ⅰ.말씀으로 창조하셨다.
가장 원시적인 종교의 형태는 토테미즘입니다. 토테미즘은 특징 동물을 숭배하는 종교형식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아주 옛날에 곰이 변하여 사람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그리고 시골에서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집에 있는 구렁이 뱀을 *지킴이*라고 해서 신성(神性)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구렁이가 나가거나 죽으면, 그 집에 반드시 불길한 일이 생긴다는 미신(迷信)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 인도에서는 아직도 소를 숭배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런 동물숭배 의식이 생기게 된 것은 인간이 너무 나약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떤 짐승은 너무나 사나 워서 마음대로 다룰 수가 없고, 어떤 짐승들은 너무 귀해서 마음대로 다룰 수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곰 같은 사나운 짐승이 습격할 때, 막아낼 수 있으면, 다행이지만, 막아낼 힘이 없으면, 곰을 숭배(崇拜)하면서 *제발 성질을 자제해*주기를 바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짐승도 굳이 사람들을 해칠 필요가 없습니다. 때가 되면, 처녀나 맛있는 음식을 바치니까 사납게 설칠 필요가 없지요.
마빈 해리스라는 인류학자가 인도의 소를 연구한 책을 보았는데, 인도 사람들은 소가 없으면, 도저히 살 수가 없다고 합니다. 인도에서 가장 중요한 연료는 소똥입니다. 나무로는 연료를 공급받을 수 없고, 소똥을 잘 말려서 때면, 아주 귀한 연료가 되기 때문에 석유 같은 것은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벽에 바르는 것도 시멘트가 아니라, 소똥입니다. 소똥을 물에 개어서 쓰면, 위생적일 뿐 아니라, 아주 향토적이고, 좋은 냄새가 납니다. 좌우간 인도에서는 소가 없으면, 안 됩니다. 소와 인간은 협력을 해야만 하는 관계였습니다. 그래서 소를 숭배(崇拜)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던 애굽은 토테미즘의 왕국이었습니다.
많은 동물들이 숭배(崇拜)의 대상이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큰 숭배(崇拜)의 대상은 독사(毒蛇)였습니다. 특히 물리면 몇 분 안에 죽게 되는 코브라는 가장 두려운 대상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독사(毒蛇)가 설치지 못하도록 계속 숭배(崇拜)하면서 두려워했습니다. 개구리도 신(神)이었습니다. 아마 그들에게는 나일 강에서 올라오는 이 똥배 나온 동물이 아주 신기해 보였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개구리를 신(神)으로 등록해 놓고 숭배(崇拜)했습니다. 소는 너무 귀했기 때문에 신(神)의 대접을 받았습니다. 옛날 우리 시골에서도 소가 없으면, 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촌에서 가장 큰 경사는 소가 쌍둥이를 낳는 것입니다.
성경은 모세를 통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이 모든 동물들을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사실은 아주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동물을 창조하심으로써 인간이 이유 없이 두려워하던 그 모든 것을 완전히 끝내셨기 때문입니다.
해와 달과 별을 두려워하거나, 숭배(崇拜)하면 안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이 모든 것들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뱀이나 소나 다른 동물들을 숭배(崇拜)하면 안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창세기는 어떤 동물이든지 사람보다 훨씬 열등(劣等)하고, 약(弱)한 존재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기보다 약(弱)한 존재를 의지하고, 숭배(崇拜)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자기보다 못한 것은 어떻게 대해야 합니까? 잘 지도하고,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사실 동물들은 미련하기 때문에 사람의 도움이 필요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 팬 성도들이 사는 호주 북부에 노던 테러토리라는 데가 있습니다. 이곳은 세 개의 악어 강이 합치는 곳으로서 악어가 우글거리는 곳입니다. 그런데 2차 세계대전 후에 수십만 마리의 악어가 여자들의 핸드백으로, 또 남자들의 허리띠로 팔려 나갔습니다.
그래서 호주에서는 악어를 보호하기 위해서 법(法)을 만들어 절대로 악어를 잡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어의 숫자가 계속 줄어들자 조사를 했는데, 그 조사 결과 큰 악어들이 새끼 악어들을 다 먹어치운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호주 당국에서는 악어 농장을 만들어서 악어가 충분히 클 때까지 보호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악어의 수가 5%정도 성장률을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악어를 도와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악어를 너무나 흉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욥기에 보면 욥도 *악어를 누가 잡겠느냐* 하면서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악어를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즉 동물은 두려워할 대상이 아니라, 잘 보호해 주고 도와주어야 할 대상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동물을 창조하시는 데에는 특징이 있습니다.
1:20-21절)하나님이 이르시되 동물들은 생물로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하나님이 큰 바다 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 말씀을 자세히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동물에게 명령을 내리시고 계십니다. *동물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마치 바다에 무슨 귀가 있고, 의식이 있어서 하나님의 명령을 들을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과 우리들이 하는 말의 차이입니다.
우리가 하는 말은 어떻습니까? 사람의 지각에만 영향을 주기 때문에 상대방에게 의식이 있어야만 전달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바다와 땅에 바로 명령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바다에 *생물들이 있게 하라*고 하면, 그대로 되고. 땅에 *짐승들이 있게 하라*고 하면, 그대로 되는 그런 말씀을 하십니다. 땅과 바다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늘 두 손을 모으고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할 자세가 되어 있습니다.
이 땅은 임자 없는 땅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라*하면 이렇게 하고 *이렇게 하지 마라*하면 죽어도 안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바다에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고 하시고 땅에게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라*고 하십니다.
물이 여러 가지 물고기를 내고, 땅이 여러 가지 가축을 낸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물에 창조의 능력이 있고, 땅에 창조의 능력이 있어서 수많은 짐승과 가축을 만든다는 뜻이 아닙니다.
모든 새와 물고기와 짐승을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만약 물이나 땅에 그런 것들을 만들 능력이 있다면, 사람들은 물과 땅을 숭배(崇拜)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고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물에게 이런 생물들이 계속 살 수 있도록 책임지고 지켜주며, 보호해 주라는 것입니다. 즉 물에게는 많은 물고기들을 번식시킬 책임이 있습니다.
물이 *난 싫어! 왜 물고기들이 여기 있는 거야? 내 물에서 다 나가!*하면 물고기들은 살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물에 이상이 생기면, 물고기는 더 이상 물속에서 살지 못하고, 멸종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물이 너무 차가워지면, 물고기들은 물에서 살 수 없지요. 다 죽습니다. 또 물은 적당한 염도(鹽度)를 유지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매일 염도를 체크하시면서 너무 짜면 *왜 짜냐?*고 물으시고, 너무 싱거우면 *왜 이리 싱거워?*하십니다.
그래서 물이 항상 일정한 염도를 유지하게 하십니다. 즉 가물어서 바닷물이 짜지면, 비가 내리고, 강이 흘러 들어갑니다. 또 요즘처럼 오염 물질이 물에 너무 많이 들어오면, 물고기들은 다 죽습니다.
그래서 물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정화(淨化)능력을 발휘합니다. 냇물을 보십시오. 그냥 흘러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맑은 물로 변해서 내려옵니다. 그래서 위에서 누가 비누로 머리를 감았더라도 밑으로 내려오면서 정화(淨化)가 되면서 물고기들이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다나 물은 물고기들이 살 수 있게 도와주고, 보호하는 기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땅은 물과 여러 가지 푸른 채소를 공급해서 짐승들이 살 수 있게 해주어야 합니다. 가장 비극적인 일은 몇 년 동안 비가 오지 않는 것입니다. 거기에 들불까지 겹쳐서 모든 것을 다 태워 버리면, 수많은 야생 동물이나 가축들은 물이나 풀을 구하지 못해서 죽고 맙니다.
공중의 새는 날아다닐 수 있으니까 비교적 먹이를 구하기가 나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새들도 하늘이 허용하지 않으면, 날아다니지 못합니다. 하늘이 새들에게 *왜 여기를 날아다니고 난리야?*하면서 못 날게 하면, 못 나는 겁니다.
매일 비가 내려 보십시오. 새가 좀 날려고 하면, 천둥 번개가 친다고 해보십시오. 그렇게 일주일만 지나면, 새들은 다 죽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명령을 바다나 땅이나 하늘에 주신 것은 자연이 너무 변덕을 부려서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생물들을 죽이지 못하도록 보호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자연은 너무 변덕을 부리면 안 됩니다. 바다는 물고기가 살 수 있도록 늘 일정해야 합니다. 때때로 비가 오고, 번개나 천둥이 칠 때도 있지만, 새들이 다 죽을 정도로 그렇게 한다면, 하늘은 명령에 불복종하는 것입니다.
또 기근이 들어서 땅이 갈라지거나, 흉년이 들 수도 있지만, 모든 들짐승들이 죽을 정도까지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중의 새나 들짐승 한 마리, 물고기 한 마리까지 사랑하시고 지키십니다. 이 수많은 생물들은 우리 인간들의 이웃입니다.
그러나 약(弱)한 이웃들입니다. 강한 것은 사자나 코끼리가 아니고, 사람입니다. 사자나 코끼리는 죄(罪)를 지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죄(罪)라고 지어봐야 다른 동물보다 더 물어 죽였다거나 하는 죄(罪)밖에 더 있겠습니까?,
그런데 사람은 죄(罪)를 지음으로써 물과 땅과 하늘이 제 기능을 못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물고기는 물의 지배를 받아야 하고, 짐승은 땅의 보호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물이 물고기를 지켜 주지 못하고, 땅이 짐승들을 지켜 주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가 언제입니까? 우리 인간들이 죄(罪)를 지을 때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인간이 죄(罪)를 짓자 땅이 현저하게 그 능력을 잃어버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본래 땅은 굉장히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정상적인 땅에 씨를 뿌리면,백 배, 천 배를 수확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죄(罪)를 짓고 나서는 불필요한 잡초(雜草)들이 많이 나오게 되었고, 씨를 뿌려도 농사가 잘되지 않는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죄(罪)의 영향력이 실제로 나타난 것이 언제입니까? 노아 홍수 때, 노아의 네모난 배 안에 들어가지 않은 들짐승이나, 가축과 새들은 다 죽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죄(罪)를 지을 때, 하늘과 땅과 물로부터 동물을 지켜 주고 보호해 주는 능력을 빼앗아 가십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죄(罪)가 이 땅과 하늘과 바다에서 자신의 이웃을 몰아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책임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많은 물고기나, 땅의 짐승들로 하여금 아름다운 삶을 살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자신의 정욕(情慾)을 억제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바다나 땅이나 하늘도 그 말씀에 순종하여 이 수많은 이웃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에 불순종하면, 어떻게 됩니까? 바다가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하늘도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땅도 황폐하게 되어 우리들의 이 아름다운 이웃들이 다 없어지고 맙니다. 그러면 얼마냐 썰렁해지겠습니까?
오직 눈에 보이는 것이 자기 자신밖에 없다면, 사람은 고독(孤獨)해서 미쳐 죽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동물들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중요하며, 그 말씀에 얼마나 큰 능력이 있는지를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특히 그들은 목축(牧畜)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가축들이 낙태(落胎)하지 않고, 새끼를 잘 낳는 것이며, 맹수들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달려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짐승을 숭배(崇拜)하고 섬긴다고 해서 그 짐승들이 그들을 지켜 주거나 복(福)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곧 양떼와 소떼를 돌보는 것이며, 짐승들이 평안한 삶을 살게 만드는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는 수많은 이웃이 있습니다. 이 이웃들을 보면, 우리 자신의 문제에 빠질 수가 없습니다. 악어를 보십시오. 얼마나 못 생겼습니까? 다리는 짧지요, 얼굴은 우툴두툴하지요, 또 입은 왜 그렇게 큽니까?
그런데도 열등감(劣等感)에 빠졌다는 악어는 한 마리도 없습니다. 또 하마를 보십시오. 얼마나 미련해 보입니까? 그래도 몸무게가 너무 많이 나간다고 다이어트를 심하게 하거나, 열등감(劣等感)에 빠지는 하마는 없습니다.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당당하지요. 기린은 목이 길다고 해서 *나는 왜 이렇게 목이 길지*하고 불평하지 않습니다. 유독 인간만 말이 많아요. 즉 목이 좀 길면 길다고, 다리가 좀 짧으면 *숏다리*라고, 엉덩이가 좀 크면 크다고, 얼굴이 좀 우툴두툴하면 *이것도 피부냐?*하면서 불평합니다.
이런 열등감(劣等感)을 고치려면, 동물들을 가까이 하는 것이 좋습니다. 동물을 키우면, 우울증(憂鬱症)에 걸릴 시간이 없습니다. 동물들을 다 몰아내고, 빈 방에 혼자 앉아서 십 년 전에 실수했던 것이나, 어제 누가 한 마디 한 것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니까 정신병(精神病)에 걸리는 것입니다.
집에서 가축을 키우면, 그렇게 앉아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밥 줄 때가 되었는데도 먹이를 주지 않으면, 시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동물들이 밥 달라고 반란(反亂)을 일으킵니다. 시끄러워서라도 밥을 주지 않을 수 없지요.
하나님이 만든 자연에는 썰렁한 구석이 없습니다. 자연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살아 있고, 약동(躍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많은 생물들을 만드신 데에는 이 지구에 나 혼자만 살고 있다는 생각을 버리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이웃과 함께 살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자기만 생각하고, 자기 문제에만 빠지는 것이 죄(罪)입니다. 특히 오늘날 우리는 도시화(都市化)현상 때문에 이웃을 다 잃고 말았습니다.
옆집에 사는 사람도 이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진정한 이웃이 없는 아주 살벌하고, 썰렁한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웃을 되찾아야 합니다.
일단 교회에서부터 이웃을 찾아야 합니다. 교회에서 다른 사람을 사귀고, 이웃을 위해서 자신의 욕망을 자제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이웃 하나 없이 문이라는 문은 다 참가 놓고, 밤 12시에 들어와서 밥 먹고 새벽에 나가고, 자기가 주차할 자리에 누가 차라도 대놓으면, 연탄재 올려놓고 멱살 잡고 싸우고.... 이런 사람은 인간이 아닙니다. 짐승도 못 됩니다.
이런 사람은 하루 빨리 이웃을 되찾아야합니다. 하나님께서 바다와 땅에 *생물들을 살게 하라*고 명령하셨지만, 실제로 그것은 우리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바다나 땅이나 하늘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움직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우리의 이웃들은 잘 지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자기를 최고의 위치에 놓고, 교만하게 살면, 이 이웃들이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하늘은 더 이상 잠잠하지 않을 것이며, 바다도 힘들게 정화(淨化)노력을 하지 않을 것이고, 땅은 황폐해짐으로써 우리는 이웃이 전혀 없는 썰렁하고 삭막한 곳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바로 거기가 하나님의 심판의 장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恩惠)가 있는 곳은 결코 그렇게 썰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썰렁하면 안 됩니다. 가정은 썰렁하면 안 됩니다. 언제나 웃음이 있고, 무언가 활동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웃을 되찾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바로 야생 동물을 사욕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나 혼자 행복하면 된다는 생각을 버리자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행복할 권한이 있으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삶도 소중하게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만의 행복을 위해 부패한 정권 토개공처럼 다른 사람의 행복을 빼앗습니다. 이런 일은 절대로 용납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많은 생물은 우리의 이웃으로서 모두 행복할 권한이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저는 성경을 연구하면서 노아의 방주에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무엇보다 노아의 방주가 비좁다는 것에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걸 보면서 *우리 각 셀(cell)공동체가 대형 교회가 아니라, 비좁아도 되겠구나.*생각했습니다. 또 노아의 방주를 생각해 보니까 노아 부인이 보기에 코끼리가 너무나 미올 것 같아요. 방주 안에 있는 모든 짐승에게 먹을 것을 주어야 하는데, 코끼리가 얼마나 많이 퍼먹었겠습니까?
자꾸만 먹겠다고 코로 치마를 막 잡아당길 때 *이놈의 코끼리, 죽어 버리지 왜 살아가지고 이렇게 애를 먹이냐?*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 여덟 식구가 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물 위에 떠 있는 동안 끊임없이 이 동물 이웃들을 퍼 먹이는 일이었습니다. 미우나. 고우나. 무조건 퍼 먹이는 거예요. 그걸 보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신경질적인지 알 수 있습니다.
누가 좀 건드리기라도 하면, 확 신경질을 내고, 집에서 텔레비전 채널을 옮기기라도 하면 *간 큰 남자*라고 하면서 죽을래. 살래. 하는걸 보면 *야, 이건 정신병 천국이구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빨리 이웃을 되찾아야 하며, 좀 비좁게 살아야 하고, 기회가 되는대로 남을 퍼 먹여야 합니다.
Ⅱ.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하나님께서 주신 둘째 명령은 모든 생물에게 자기의 종(種)을 지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종류대로*라는 말이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생물들도 그 종류대로 살아야 하고, 날개 있는 새도 그 종류대로 살아야 하고, 땅에 있는 육축이나. 기는 것이나. 짐승도 전부 그 종류대로 보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수만 가지 생물들을 만드셨습니다. 새의 종류도 수만 가지이고, 물고기의 종류도 수만 가지입니다. 그리고 땅에 있는 짐승들의 종류도 수만 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수많은 생물의 종류마다 자기 종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아무리 역사가 흘러도 이 짐승들끼리 섞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짐승들이 자기의 특성을 잃어버린다면, 역사가 흐른 후에 남는 것은 코끼리처럼 코가 크고, 강한 쪽으로만 발달한 괴물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아주 아기자기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이것들이 끔찍한 괴물(怪物)로 바뀌지 못하도록, 각자의 아름다운 특색이 보존됨으로써 나중에 하나로 뭉뚱그려진 괴물만 남는 세상이 되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가끔 다리가 다섯 개 달린 송아지가 나옵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전부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살아남지 못합니다. 워낙 환경이 거칠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모습으로만 살아남게 되어 있습니다.
그 모습 그대로가 가장 안전하며, 가장 강한 생존력을 지닙니다. 변종(變種)은 살아남지 못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종의 유지를 명령하신 것에는 우리가 생각하기에 아무리 보잘것없고, 약(弱)한 동물이라고 하더라도 모두 이 세상에서 생존할 권리가 있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종족 보존의 명령을 내리지 않으셨다면, 이 세상에는 강(强)한 동물만 남을 것입니다. 즉 하늘에는 독수리, 땅에는 사자, 물속에는 상어만 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종족 보존의 명령을 내리셨기 때문에 아무리 약(弱)한 생물이라 하더라도 이 세상에서 살 권리가 있고, 살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강(强)한 동물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강(强)한 자가 약(弱)한 세입자를 이 땅에서 몰아낼 권리가 없으며, 약(弱)한 자도 살 권리가 있습니다. 때때로 직장을 잃거나, 이 세상에서 약자의 위치에 서게 될 때, *나는 이 세상에서 살아갈 자격과 권리가 없구나* 하는 절망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반드시 자연(自然)으로 가야 합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아주 약(弱)한 동물들도 분명히 생존해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그들을 이 땅에서 쫓아낼 권리가 없습니다. 피라미라고 해서 *물속에서 다 나가!*라고 말할 권리가 없습니다.
피라미에게는 피라미의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명령입니다. 공중 나는 새를 보라고 하면 봐야 합니다. 왜 새를 안 보고 다닙니까? 우리는 명령에 순종해야 됩니다. 새를 보는데, 언제 보라고 하셨습니까?
직장을 잃었을 때, 먹을 것이 없고. 살 길이 막연할 때, 염려와 근심이 내 마음을 짓누를 때입니다.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고 하시면 정말 보십시오. 저는 이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처음 시화에서 사례비 한 푼 없이 개척교회 할 때, 먹을 것이 없는데, 어느 권사님께서 여름에 쌀을 주시는데, 쌀벌레가 우굴 거렸습니다. 그래도 고맙고, 감사했습니다. 아내와 벌레를 골라내면서 힘든것은 자격지심이었습니다. 그래서 굉장한 좌절감에 시달렸고, 힘들었습니다.
그때 제 귀에 들리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저 참새들이 재잘거리며 감사하는 소리를 들어보라!* 너무나 생생한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때 참새를 먹이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면서 *야! 하나님은 정말 하나님이시구나!*
아무리 약(弱)한 참새라도 먹고 살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강(强)한 자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차지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무리 약(弱)한 자라도 하나님 앞에서 귀한 존재이며, 하나님 앞에서는 살 권리가 있습니다.
못생긴 사람도 살 권리가 있고, 공부를 못하는 학생들도 아름다운 삶을 살 자격이 있습니다. 공부를 못한다고 좌절하면 안 됩니다. 중간고사 성적이 떨어졌을 때, 새를 보아야 합니다. 새를 보기 힘들면, 개미라도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절대로 자기의 가치(價値)를 성적(成績)이나 외모(外貌)와 바꾸지 않습니다.
그리고 키 작은 사람도 살 권리가 있습니다. 직장이 없는 사람도 살 권리가 있어요. 절대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사람들 관계에서는 자꾸 강(强)한 쪽이 약(弱)한 쪽을 넘겨다봅니다. 즉 강(强)한 나라는 약(弱)한 나라를 합병(合倂)하려 하고, 큰 기업(企業)은 작은 기업(企業)을 인수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큰 것이라고 해서 반드시 좋은 것이 아니며, 작은 것도 얼마든지 생존할 가치가 있고. 오히려 더 소중하다는 뜻입니다. 건강이 약(弱)한 자매도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 권리가 있습니다.
못생긴 사람을 자꾸 무시하면 안 돼요. 이것은 하나님의 법칙(法則)을 위반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이 지키십니다. 절대로 염려하지 마십시오.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종족 보존의 원리를 통하여 이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Ⅲ.동물들이 주는 교훈
이제 동물을 창조하신 일의 영적(靈的)인 의미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동물을 창조하시면서 주신 영적(靈的)교훈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들을 보셨을 때.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것입니다.
즉 바다에 있는 물고기도. 하늘을 나는 새도. 땅에 있는 모든 짐승도. 처음 창조되었을 때에는 하나님 보시기에 다 좋았습니다. 그러나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레위기에서 새로운 사실을 배우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동물들이 다 깨끗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결한 짐승이 있고, 부정한 짐승이 있습니다.
창세기는 분명히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이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통해서 짐승들 중에도 정결한 것이 있고, 부정한 것이 있으며, 악한 것이 있고, 선한 것이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공중의 새 중에도 정결한 새가 있고, 부정한 새가 있습니다. 바다에 있는 물고기 중에도 깨끗한 것이 있고, 부정한 것이 있습니다. 땅에 있는 짐승 중에도 정결한 것이 있고, 부정한 것이 있습니다. 이러한 구분은 노아 홍수 때부터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깨끗하고, 정결한 동물은 일곱 쌍씩 방주에 태우게 하시고, 부정하고, 정결하지 못한 동물들은 두 쌍씩만 태우게 하십니다. 정결한 것은 하나님께서 바치는 제물로 여분을 두어서 배에 태운 거지요.
이것이 모세의 율법에 와서는 제사 문제뿐 아니라, 먹는 문제로까지 확대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이 분명히 구별되어 있었습니다. 아무거나 먹지 못했어요, 주로 육식(肉食)은 할 수 없었습니다.
새들 중에서도 육식(肉食)은 부정한 것이어서 독수리나. 따오기나. 부영이나. 갈매기는 먹을 수 없었습니다. 바다의 불고기 중에서도 비늘이 있고. 지느러미가 있는 것은 먹을 수 있었지만, 비늘이나. 지느러미가 없는 성게나 해삼, 멍게 같은 것은 부정한 것이기 때문에 먹지 못했습니다.
조개류도 마찬가지입니다. 짐승들 중에서는 되새김질을 하고. 발굽이 갈라진 것은 먹을 수 없었습니다. 돼지는 발굽이 갈라졌지만. 되새김질을 하지 않기 때문에 부정(不淨)한 짐승입니다. 사실 동물 중에서 맛이 있는 것은 초식성(草食性)입니다. 새나. 들짐승이나. 물고기나. 육식성은 고기가 질기고, 맛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상어 고기는 대단히 질깁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을 때에는 모든 것이 아름답고, 하나님 보시기에 선(善)했습니다. 즉 생물 자체는 선(善)하거나 악(惡)하게 창조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심지어는 뱀도 선(善)하게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죄(罪)가 들어오자 동물들도 악(惡)해지게 되었습니다. 즉 짐승이 짐승을 잡아먹습니다. 물고기가 물고기를 잡아먹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먹는 것을 통하여 죄(罪)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주로 육식성 동물이거나. 육식성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 특성 자체가 사납고. 더러운 동물은 먹지 못하게 하심으로써 모든 것이 다 선(善)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실 죄(罪)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죄(罪)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나타나는 행동은 보이지 않는 생각을 행동에 옮기는 것입니다.
사실은 먹는 것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죄(罪)라는 개념을 가르쳐 주십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너무나도 죄(罪)를 모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짐승이라 하더라도 다른 짐승을 해치고. 잡아먹으면, 죄(罪)가 되는 것처럼. 사람들도 마음속으로 남을 해치고, 자기의 유익을 챙기면, 죄(罪)라는 것, 또 짐승이라도 그런 종류는 먹지 않는 것이 옳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罪)와 철저히 구별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신약 시대에 와서는 *부정한 짐승*의 개념이 없어졌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하늘에서 부정한 짐승을 싼 보자기가 내려오고, 그것을 *잡아먹으라.*는 명령이 세 번 들리는데, 베드로는 그것을 거부(拒否)했습니다.
그 후, 하나님은 베드로를 이방인인 고넬료에게 보내서 전도하게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말씀을 증거 할 때, 성령이 역사하시는 것을 보면서 *이방인은 이제 더 이상 부정한 짐승이 아니구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셨구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내가 부정하다고 할 수 없구나*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렇게 사도행전은 부정한 음식과 부정한 동물은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은 사람, 성령이 없는 사람을 의미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부정한 짐승들을 먹게 함으로써 누구에게나 구원의 문이 활짝 열렸고, 누구나 구(求)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을 구(求)해야 합니다. 오늘도 예배를 드리면서 *주님의 성령이여, 이곳에 임하소서.*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의 성령이 계속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의 마음을 정결케 하시고, 바꾸시게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부정한 짐승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을 구(求)하기만 하면, 완전히 변하여 새 사람이 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지금도 그리스도인들이 혐오식품을 좋아하면 안 됩니다.
이제는 좋고. 나쁜 음식이 없지만, 너무 자기의 건강을 염려한 나머지, 또 너무 정욕을 채우려고 한 나머지, 모든 사람이 혐오하는 노루 피, 지렁이 탕 같은 것을 먹는 것은 덕(德)이 되지 않지요. 뱀이나 짐승의 피를 먹는 것은 사실 몸에도 좋지 않고, 정신적으로도 좋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정신적인 의미에서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별하는 일입니다. 음식은 아무것이나 먹어도 됩니다. 이제는 먹는 것을 가지고 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와 로마서에서 우상에게 바친 고기의 문제를 꺼내면서 음식 자체는 죄가 아니라는 아주 획기적인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정신은 그렇지 않습니다. 생각해야 할 것과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또 보아야 할 것이 있고, 보지 말아야 것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음식을 가지고는 죄다 아니다 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정신은 지켜야 합니다. 즉 아무 생각이나 하면 안 됩니다. 멍청하게 앉아있어서 온갖 잡념, 온갖 더러운 생각, 악한 생각을 하는 것은 그것이 사람 전체를 더럽힙니다.
처음에 모든 것을 선하게 만드셨고, 택한 백성과 성령이 없는 백성을 구분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먹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별하셨던 하나님은 이제 그 구별을 없애셨지만, 우리는 적어도 바른 생각과 바르지 못한 생각을 분명히 구분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배를 통해 받고자 하시는 것은 내 몸뚱이가 아니라, 내 마음과 정신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든지. 내 정신을 모아서 하나님 가운데 있게 하고 기도 가운데 있게 해야 하며, 설교를 들을 때에도 마음을 모아 하나님께 바치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생각할 것은 물고기와 짐승과 하늘을 나는 새의 유추(類推)를 통하여 사도 바울이 우리의 부활할 몸에 대한 교훈을 끌어내고 있다는 점입니다.
고전15:39-40절)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분명히 몸은 몸이지만. 물고기의 몸과 짐승의 몸과 새의 몸은 분명히 다릅니다. 재질부터 다릅니다. 물고기는 물속에서 살 수 있도록 지느러미와 아가미가 있습니다. 물 밖에서는 살 수 없습니다. 짐승들은 추위에 견디도록 털이 온 몸을 덮고 있습니다. 그리고 몸이 무겁습니다.
거기에 비해서 새들은 몸이 가볍고. 온 몸이 깃털로 덮여 있으며, 날개가 있습니다.
진화론자들이 동물의 진화(進化)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이 규칙적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진화론자들을 당황하게 하는 것은 그 하나하나의 간격이 너무나도 크다는 것입니다. 물고기가 새가 되었다고 하기에는 재질부터가 너무나 다릅니다.
즉 짐승이 물 안에 들어가서 물고기가 되었다고 말하기에는 재질부터가 너무나 다릅니다. 사도 바울이 이 서로 다른 몸의 유추(類推)를 통하여 우리에게 말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물고기와 짐승과 새의 몸이 완전히 다른 것처럼 우리가 부활할 때, 입을 몸도 지금의 몸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몸도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부활했을 때의 몸은 지금과 그 재질 자체가 완전히 다릅니다. 벌써 느낌이 다릅니다. 너무나도 영광스러워질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늙어 가지 않습니까? *같이 늙어 가는 처지에....*라는 말은 우리가 다 같은 재질로 만들어졌다는 생각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조금 무리하면, 병들고. 누가 때리면, 아픈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우리의 몸은 장소의 구애를 받습니다. 그러나 천국에 가면, 우리 몸의 재질이 달라집니다. 불구자가 없습니다. 그리고 남녀의 성관계가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청소년들은 실망해서 *천국에 안 가겠다*고 합니다. 즉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다니! 내가 무엇 때문에 교회에 오는데!*
그러나 성관계가 없어도 남녀 이상의 사랑을 느끼고. 더 친밀한 애정을 느낍니다. 어떤 사람은 천사와 같이 될 것이라고 하지만. 천사와는 다릅니다. 천사는 몸이 없지만. 우리는 분명히 몸이 있을 것입니다. 그 때에도 우리는 먹을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생선을 잡수셨듯이 우리도 먹습니다. 또 감정으로 사랑을 느낄 것입니다. 무엇을 만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과 다른 몸입니다. 아주 자유롭습니다. 아픈 곳이 없습니다. 강합니다. 그러므로 천국에는 피로회복제가 필요 없습니다.
늙어 가는 것, 머리털이 빠지는 것, 소화불량, 장염, 이런 것들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아주 강하고. 온전하며,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 몸입니다. 재질이 다른 몸입니다. 그 몸이 너무 아름다워서 우리 자신도 놀랄 것입니다.
자기 모습을 보면서 *이게 정말 나야?* 할 거예요. 그래서 지금 이 몸을 가지고 *미스코리아 선발대회*같은데 나가면 안 됩니다. 지금 이 몸은 변화된 몸 앞에 놓고 보면, 누더기 같고. 추한 쓰레기와 같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성형수술 같은 것 너무 하지 마세요. 웬만하면. 그대로 사십시오. 그때 변화될 것을 생각하고 만족하면서, 감사하면서 사십시오. 우리는 완전히 변화될 것입니다. 완전히 다른 재질로 변화될 것입니다. 영광스러워질 것입니다. 몸에서 빛이 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새와 짐승과 물고기를 개성 있게 만드셨습니다. 동물을 보면, 너무 재미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그렇게 재미있고. 흥미 있는 분이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아이들이 고양이나. 개와 놀다가 발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은 너무나 재미있는 분이시구나* *하나님은 동화작가보다 더 재미있구나!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상상력이 무궁무진하십니다. 다양하면서도 아름답고 독특한 동물들을 보면, 그분의 상상력을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동물 하나하나를 얼마나 개성 있게 만드셨는지요!
사람도 개성이 있습니다. 성화(聖化)된 후에도 모두 다 다릅니다. 똑같이 성숙해도 어떤 사람은 기도를 좀 더 잘하고, 어떤 사람은 말씀을 더 깨닫는 가 하면, 어떤 사람은 위로와 상담을 좀 더 잘하고, 어떤 사람은 밥하고. 설거지하는데, 놀라운 은사(恩賜)가 있습니다. 사람은 서로 같지 않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열두 지파로 표현함으로써 지파 하나하나에 특징이 있으며, 우리가 완전히 성숙했다고 해서 개성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고유한 아름다움을 유지한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은사(恩賜)를 부러워하거나. 시기(猜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날은 개성의 시대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恩賜)도 개성이 있습니다. 그것을 보면 정말 재미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이 다양한 보석(寶石)들이 빛나는 것을 볼 때, 교회가 정말 재미있고. 좋은 곳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 짐승들이 가진 삶에 대한 진지한 자세를 보십시오.
그들은 살기 위해서 달리고, 살기 위해서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뛰어다닙니다. 그들이 번식하고. 새끼를 지키는 것을 보십시오. 우리는 얼마나 진지하지 못합니까? 그저 *농담 따먹기*나 하면서 *머리나 굴리며, 쓸데없는 공상*이나 하면서 지낼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은 죄(罪)입니다.
우리는 진지(盡智)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작은 짐승들도 다 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공중 나는 새를 보라*고 하시면 보세요! 절대로 *나는 죽어야 해, 난 살 가치가 없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주위에 있는 수많은 이웃들을 보면서 자기중심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말씀대로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말씀대로 사는 것이 곧 다른 이웃들을 지켜 주는 것이며, 수많은 개성 있는 동물들을 지키는 길입니다.
정결한 동물과 부정한 동물이 있는 것을 보고. 내 생각에도 악(惡)한 생각과 선(善)한 생각이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이것은 주님이 주신 마음이다*싶으면 계속 그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 마음으로 충만 해지며, 그 마음에 압도되십시오. 그 마음을 지키십시오. 그러나 *주님이 주신 마음이 아니다*싶으면 그 마음을 빨리 버리십시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은 마귀가 준 마음이고. 악한 마음이고, 다른 사람을 해치려는 마음일 때, 마치 부정한 음식을 먹을 때처럼 내 인격을 해치려는 마음일 때, 마치 부정한 음식을 먹을 때처럼 잘라버리십시오.
또한 우리의 몸은 완전히 새로운 재질로 변화될 것입니다. 병약(病弱)한 형제자매가 있습니까? 몸 때문에 콤플렉스를 느끼는 분이 있습니까? 그 콤플렉스가 끝날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완전한 영광중에 여기서 누리지 못했던 축복과 모든 자유를 맛볼 때가 올 것입니다. 물고기와 새와 짐승은 이것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아-멘.
찬송가 597장 *이전에 주님을 내가 몰라*
율법서(모세 오경)
교회행정 서식 5.6첨부 ▣ 예배 3월 6일(주일) 셀 보고서 투명하고 정직하게
주일 예배와 헌금 봉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천국시민된 특권과 은혜감사
요4:23절)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순서 : ☆사도신경으로 시작하여 ☆성경 : 본문 읽기와 생명의 양식 공유, ☆찬송 : 삽입된 찬송, ☆헌금 : 헌금과 봉헌기도, ☆연구원을 위한 합심기도와 주기도문으로 끝내십시요.
◈후원금 외 헌금은 전체의 10/1을 연구원 설립비로 ▽입금하고, 나머지는 성도간 교제비, 애경사, 새신자 환영, 전도비 등으로 사용하십시요.
NH콕뱅크 302-8772-0191-01(헌금 종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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