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수필/나의 종교관
요즘 나는 종종 종교에 관한 깊은 생각에 잠긴다. 나이 70을 훌쩍 넘긴 지금, 삶과 죽음 그리고 사후(死後)의 세계에 대한 관념이 점점 더 가깝게 다가오기 때문일 것이다. 종교에 대한 상념에 빠질 때마다 나는 어린 시절에 경험했던 승재골 칠성당 무속신(巫俗神)과 신앙촌 천부신(天賦神)을 떠올린다.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첩첩산중의 충청도 승재골에는 칠성당(七星堂)이라는 조그마한 사당(祠堂)이 있었다. 나는 단오(端午)와 칠석(七夕) 등 각종 절기마다 칠성당에 들러 부처에게 공손히 절하며 소원을 빌곤 했다. 나의 소원은 “공부를 잘하게 해주세요” “배고프지 않게 해주세요” “아프지 않게 해주세요” 등 지극히 단순하고도 소박한 것이었다.
승재골에 칠성당이 처음 세워진 것은 이웃집 아주머니가 신 내림(接神)했다며 자신의 초가(草家)에 사당(祠堂)을 차려놓고 부처 앞에서 주문(呪文)을 외우고 꽹과리와 징을 두들겨 대면서부터였다. 그 당시 마을 사람들은 그녀의 무당(巫堂) 입적(入籍)을 달갑게 바라보지 않았다. 가뜩이나 어려운 형편에 갖가지 명목으로 그녀에게 곡식 등 재물을 뜯기게 될 것이라는 우려가 팽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와 마을 사람 간에 한동안 잦은 마찰이 빚어지곤 했다.
하지만 평소 입담이 거칠고 몸집이 크며 사나웠던 그녀의 열정적인 포교 활동에 마을 사람들은 힐끔힐끔 서로서로 눈치를 살피며 한 사람, 한 사람 그녀에게 포섭되었다. 마을 사람 대부분이 그녀의 추종자가 되어 칠성당의 부처를 신(神)으로 받아들이기까지는 오랜 기간이 걸리지 않았다. 누구랄 것도 없이 가족 중에 우환이 있거나 각종 액운(厄運)이 생기면 어김없이 돼지 머리와 떡 그리고 얼마간의 재물을 차려놓고 그녀를 불러 푸닥거리(굿)를 했다.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신(申) 무당이라 불렀다. 승재골 신 무당에 관한 소식은 소문에 소문을 타고 인근 마을로 전해졌다. 이 과정에서 일부의 내용이 왜곡되고 부풀려졌다. 이를테면 신 내림을 받은 승재골 신 무당에게 굿거리를 하면 아무리 중한 병자도 멀쩡해진다더라하는 식으로 그녀는 신성화(神聖化)되기 시작했다. 나의 어머님도 그 무당을 모른 척할 수 없으셨는지 절기마다 부처 앞에 조금씩의 곡물을 차려놓고 소원을 빌었다. 가족의 평안을 구하려는 농촌 아낙네의 기복(祈福) 신앙에 덧붙여, 이미 마을에서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자라난 신 무당으로부터 따돌림을 받지 않기 위함이었다. 어머님은 어린 나에게도 칠성당 부처에게 정성을 다 하라고 성화를 하셨다.
내가 어머님을 따라 칠성당에 갈 때마다 신 무당은 부처에 일곱 번이나 큰절을 하는 내 모습이 대견하다면서 칠성당 부처의 자비로 큰 복을 받겠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나는 점점 그녀에게 세뇌되어 갔다. 그녀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온 가족이 평안해지고 내 앞길에 액운이 제거된다는 그녀의 말을 그냥 맹목적으로 믿고 싶었다. 나만이 아니었다. 해방 전후 혹독한 가난과 무지(無知) 로 하루하루 입에 풀칠할 것을 걱정하던 산골 농민들에게 신 무당의 칠성당과 같은 무교(巫敎)는 일종의 해방구였다. 해탈(解脫) 같은 형이상학적 가치를 중시하는 불교와 달리, 무교는 현세주의를 원리로 삼아 현실에서의 액(厄)을 풀고 복(福)을 누리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다. 인간의 관능적 욕구와 물질적 욕망을 교묘하게 파고든 무교는 가난하고 무지했던 당시 산골 농민들에게 절대적 종교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나와 신 무당과의 인연은 길지 않았다. 1950년대 초 청주(淸州) 시내의 상급 학교로 진학하여 친척집에서 하숙했기에 승재골 칠성당과는 멀어지게 되었다. 그러던 중 중학교 2학년 때 고등학생인 이웃집 형의 권유로 시내에 있는 어느 교회의 부흥회에 참석했다. 부흥회 중인 그 교회는 서울에 사는 박 장로라는 사람을 부흥 강사로 초청했다. 그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불치병을 치유할 수 있는 초인적(超人的)인 능력을 지녔다고 알려진 사람이었다.
부흥회 첫날은 그가 안수기도로 앉은뱅이를 치유하는 집회를 인도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교회의 본당은 물론 앞마당 뒷마당 할 것 없이 구름같이 몰려든 사람들로 가득히 메워졌다. 예배 시작 한 시간 전에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교회 본당 밖 구석진 위치에 겨우 자리 잡을 수 있었다. 그때는 지금과 같이 예배 상황을 중계하는 스크린이 없던 시절이다. 나는 스피커를 통해 박 장로의 설교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신도들이 “아멘! 아멘!”을 외치며 그의 설교에 뜨겁게 반응하는 소리가 본당 밖까지 울려 퍼졌다. 설교를 마치는 기도가 끝나고 “내 주를 가까이하려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하면서 찬송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때였다. 본당에서 누군가가 뛰쳐나왔다. 그는 “안수기도를 받은 앉은뱅이가 벌떡 일어났다!”고 외쳤다. 이 소식은 순식간에 온 시내로 퍼져 나갔다. 많은 사람이 그 소문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비록 앉은뱅이를 치료하는 과정을 현장에서 직접 목격하지는 못했지만 나도 이를 믿었다. 칠성당 신 무당이 굿거리를 해준 환자가 며칠 후 완치되었다고 할 때도 나는 그의 치유 능력에 대해 반신반의했었다. 그러나 박 장로는 달랐다. 서울에서 온 유명한 사람이라는 존재감과 수많은 군중을 한 자리에 동원해내는 카리스마, 그리고 설교에 나타난 해박함과 능변(能辯)이 나를 감동·감화(感化)시키기에 충분했다.
다음 날은 통성기도의 날이었다. 밤새도록 통성으로 기도하며 회개한 자는 그의 안수기도를 통해 지난날의 모든 죄를 사함 받고 큰 복을 누린다고 광고했다. 그날도 교회는 신도들로 넘쳐났다. 나는 사람들 틈에 끼어 큰 목소리로 통성기도하고 목이 터져라 찬송가를 함께 불렀다. 밤샘한 나는 몹시 지쳐 있었다. 새벽 2~3시경에는 목이 쉬어 찬송은커녕 옆 사람과의 대화도 힘들 지경이었다. 앉아서 꾸벅꾸벅 졸거나 바닥에 누워 잠자는 사람도 있었다. 동이 트면서 새벽 예배가 열렸다. 예배에 이어 박 장로의 안수기도가 시작됐다는 안내 방송이 들려왔다. 긴장이 피로를 한순간에 몰아냈다. 잠시 후 박 장로에게 안수기도를 받은 사람들이 한 사람, 한 사람 걸어 나왔다. 어떤 이는 박 장로의 기도를 받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줄줄 흘렀다고 증언했다. 또 다른 사람은 박 장로의 손이 머리에 와 닿을 때 온몸에 전기가 찌르륵 찌르륵 흘렀다고도 했다. 나는 더더욱 긴장되었다.
오전 8시경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박 장로의 손이 나의 머리에 와 닿았다. “이 사람이 지금까지 지은 모든 죄를 사하여 주사옵고 앞날에 큰 복을 내려주시옵소서. 아멘!” 그의 기도는 간단명료했다. 그러나 나는 온몸이 뜨거워짐을 체험했다. 나도 모르게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나에게 종교적 체험을 안겨준 박 장로는 홀연(忽然) 혜성같이 나타나 종교계에 해일과 같은 지각변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는 각 기성교회의 초청으로 전국 각지를 순회하면서 부흥회를 인도했다. 그때마다 그의 주변은 언제나 신도들로 초만원(超滿員)을 이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감람나무이며 하나님”이라고 주창(主唱)하기 시작하면서 기성종단은 그를 이단(異端)으로 규정했다. 그는 급기야 탈(脫) 그리스도의 노선으로 치달았고 신흥 종교인 천부교(天賦敎)를 창시하고 신앙촌(信仰村)을 건설했다. 나는 그 부흥회 집회 이후 다시 박 장로를 만날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상당 기간 그에게서 안수기도 받을 때 느꼈던 전율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흐른 청년기에 심리학과 관련된 서적을 통해 그런 느낌은 심신이 피로하고 몹시 긴장되어 있을 때 어떠한 충격적인 상황을 접수(接受)하면 나타날 수 있는 자연적인 현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즉, 당시의 전율은 밤을 지새우면서 통성기도를 한 피로 끝에 박 장로의 안수기도라 는 충격이 내 몸에 가해짐으로써 일어난 자연적인 현상이었다.
극히 제한적이지만 나는 칠성당 신 무당과 신앙 촌 박 장로가 자신들을 신성화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칠성당은 관습적이며 토속적이었고, 신앙촌은 좀 더 근대적이며 진취적이었다. 하지만 병자의 치유나 장수(長壽)를 명분으로 신도를 모집하고 현혹하는 것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사람은 누구나 액을 쫓아내고 복을 누리면서 살기를 소망한다. 복중에서도 건강과 장수의 복은 더 없는 인간의 바람이다. 미신(迷信)은 인간의 이러한 본능을 파고든다.
칠성당 신 무당은 자신이 접신(接神)하였기에 병자를 고칠 수 있다는 교언부설(巧言浮說)로 무지한 산골 농부들을 꼬드겼다. 천부교의 박 장로는 자신은 하늘에서 내려온 창조주이기에 자신을 믿으면 불치병이 치료되고 인간 최고의 복인 영생을 누리게 된다는 감언이 설로 도시민을 현혹했다.
신(神)의 존재 여부는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끊이지 않는 논쟁거리다. 최근 세기적(世紀的)인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박사와 옥스퍼드 대학의 레녹스 교수의 언론 지상을 통한 설전(舌戰)도 이를 잘 반영한다. 어느 사람도 신의 유무(有無)를 확정적으로 단정할 수 없다. 따라서 유신론과 무신론에 관한 설전은 앞으로도 인류가 멸망하지 않는 한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기독교인이다. 그분이 우리가 의지해야 할 최종적인 정신적 지주(支柱)임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다. 그러나 일요일 예배에만 참석하고, 봉사 등 다른 교회 활동은 거의 하지 않는 ‘온전치 못한’ 신앙인이다. 아직 병자 치유 등 기적에 관한 성경의 일부 구절에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을 믿는 신자(信者)로서 참(懺) 신자의 길을 걷기 위해 내가 해결해야 할 숙제다.(한국문학방송간 박 봉환 문집 태풍 불던 날 나는 중에서)
2010년 11월 10일 牛步 / 朴鳳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