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동호극장
2.묵호극장
3.묵화극장
4.보영극장
5.중앙극장
6.동해극장
김○훈(남, 45세) 씨는패기가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실천력이 뛰어났다. 정말 뭘 해도 될 그런 묵호의 인재였다.
그는 현재 부모님이 하시던 부광상회를 이어받아 하면서 유통업으로 무역을 하고 있다.
그런데 그의 꿈은 가장 번창했던 시절의 묵호를 다시 만드는 것이다.
김○훈 씨는 1980년대 동해시가 생기고 묵호의 전성기가 막 쇠퇴할 무렵에서부터 동해시의 변화상을 보아왔다.
그리고 그 이전의 묵호 모습은 부모님이나 선배로부터 듣고, 문헌을 통해 익숙하게 보았다. 묵호의 모든 게 김○훈 씨의 관심 영역이기에 누구보다도 열심히 찾아다녔다.
김○훈 씨의 현재 관심사는 극장과 묵호 부흥이다. 그는 일백 평이 넘는 창고에 4만 여점이 넘는 유물을 수집해서 보관하고 있다. 유물에는 별의 별 것들이 다 있다.
묵호를 광고하던 필름, 영화필름, 영화포스터, 영사기, 라디오, 장난감 피규어, 만화 등이다. 이 가운데 영화포스터만 4천여 개가 넘는다고 한다. 정말 대단한 수집광이다.
묵호에 있었던 극장의 변천사도 잘 알고 있었다. 묵호에서 처음 연 극장은 1950년대 말에 생긴 동호극장이라 한다.
이 극장은 건물을 완벽하게 지어서 상영을 한 것이 아니라, 천막극장의 형태였다. 천막도 그냥 천막이 아니라 건물이 허름해서 개구멍으로 빠져 들어갈 수 있는 모습이었다.
그 후 묵호극장이 발한삼거리에 세워졌다. 이 극장은 80년대 초까지 존재했다. 그리고 안묵호에 태평양수산 있는 곳에 문화극장이 있었다. 이 극장은 행사도 많이 하고 규모가 제일 컸다.
이어서 보영극장이 세워졌다. 중앙극장도 1980년대에 세워졌다. 그 가운데 보영극장은 1997년에 폐업을 했다. 경영난을 극복하려고 둘로 나눠 동해극장과 보영극장으로 운영했으나 역시 역부족이었다.
묵호가 번창할 수밖에 없는 조건은 물고기였다. 엄청나게 잡히는 오징어와 명태 등은 가난한 사람들이 발을 붙이고 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김테훈 씨가 묵호초등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학생이 1,800명이 넘었다고 한다. 게다가 주변에 창호초등학교 등까지 합하면 엄청 났다. 그렇게 아이들이 많아도 아이들이 누릴 수 있는 문화시설이 없었다.
겨우 오락실 몇 개에 문방구 정도였다. 그러나 1980년대 시청이 천곡동으로 가고 물고기도 덜 잡히기 시작하면서 묵호는 인구가 줄었다. 1,800명 정도 되던 초등학생 수가 100여 명 밖에 안 된다. 그래서 동해시에서도 묵호 사람들도 어떻게든 묵호를 살리려고 애를 쓰는 중이다.
극장을 운영하던 사장님은 굉장한 부자였다. 그러나 버티지 못하고 말았다.
결국 김○훈 씨가 보기에 묵호의 경제 역사는 극장의 번창과 쇠퇴와 함께한 것이었다. 그래서 김○훈 씨는 극장 관련 유물 수집을 해서 묵호의 옛 영화를 살리고 싶은 것이다.
2013년 포스터 그리는 분도 찾았으나 만나기 직전에 세상을 떠났고, 가지고 있던 자료는 동생이 태웠다고 했다.
묵호의 극장에 매달리는 이유 중 하나는 극장이 묵호의 문화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학예회, 콩클대회, 장기자랑 등이 극장에서 행해졌다. 그 때문에 묵호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극장의 추억이 남아 있다.
김○훈 씨는 묵호에 와야만 먹을 수 있는 특화된 상품을 개발하려고 노력 중이다.
묵호는 아무래도 물고기 때문에 번창한 도시이기 때문에 물고기를 접목한 상품 개발에 열중이다.
그 가운데 ‘어라빵’과 ‘어라멜’이라는 빵과 캐러멜을 개발 중이다. 어라빵은 ‘물고기와 그물을 통해서 만선 이미지를 가진 빵’이다. 그래서 동해에서 나는 오징어, 문어, 새우 등의 물고기를 빵에 찍어서 모양을 내고 맛을 낸 물고기빵이다.
어라멜은 수산물을 이용한 수제 캐러멜이다. 지금 개발을 하고 있다. 이제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 이뿐이 아니라 물고기 관련 산업을 다시 특화 시키고자 한다. 그래서 오징어양념을 만들어 거기에 전분 가루를 입혀 구운 ‘오징어화석과자’, 생오징어를 바로 눌러 구운 ‘묵호누름’ 등을 연구 중이다.
김○훈 씨의 묵호 발전 구상은 끝이 없었다. 이런 사람들이 묵호에 있는 한 묵호는 멀지 않은 날에 멋진 묵호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