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068
3월18일 [사순 제2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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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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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zakAVbswl78 (전찬용 요한보스코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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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집단적 악의 세력이 휘둘러대는 광기 앞에 필요한 것은, 바로 우리들의 양심입니다!>
집단적 악과 개인적 양심 사이에서 고민하고 갈등하는 인간 군상의 모습이 오늘 첫 번째 독서인 창세기를 통해 잘 그려지고 있습니다.
아버지 이스라엘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동생 요셉의 모습에 형들은 질투심으로 똘똘 뭉치게 되었고, 요셉은 그야말로 공공의 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가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 아직 철이 없어서 그런 것인데도 불구하고, 형들은 아버지로부터 총애를 받는 동생의 모습을 견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어느 날 집단적 악이 결정적으로 발동됩니다. 평소 각자 마음속에 품고 있던 악의가 동시에 표출된 것입니다.
“저기 저 꿈쟁이가 오는구나. 자, 이제 저 녀석을 죽여서 아무 구덩이에나 던져 넣고, 사나운 짐승이 잡아먹었다고 이야기하자. 그리고 저 녀석의 꿈이 어떻게 되나 보자.”(창세기 37장 19~29절)
형들이 그런 악의를 품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으니, 아버지 야곱의 편애와 요셉이 꾼 특별한 꿈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요셉을 늘그막에 얻었으므로, 다른 어느 아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였다. 그래서 그에게 긴 저고리를 지어 입혔다. 그의 형들은 아버지가 어느 형제보다 그를 더 사랑하는 것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정답게 말을 건넬 수가 없었다.”(창세기 37장 3~4절)
“내가 꾼 꿈 이야기를 들어보셔요. 우리가 밭 한가운데에서 곡식 단을 묶고 있었어요. 그런데 내 곡식단이 일어나 우뚝 서고, 형들의 곡식 단들은 빙 둘러서서 내 곡식단에게 큰절을 하였답니다.”(창세기 37장 7절)
요셉의 꿈 이야기를 들은 형들은 분기탱천하기 시작하였고, 큰 시기심과 질투심으로 들끓었고, 마침내 집단적인 광기와 폭력성으로 연결되고 만 것입니다. 결국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요셉은 가족들과 생이별을 하고, 이집트로 팔려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생만사 세옹지마’라고, 남의 나라 땅에서 셀 수도 없이 많은 위기를 지혜롭게 극복한 요셉은 대제국의 제2인자로 우뚝 서게 되고, 후에 대기근으로 굶어죽게 생긴 가족들을 살리게 되는 드라마틱한 대반전 스토리를 엮어갑니다.
인류 역사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역사를 돌아봐도 집단적인 악, 집단적인 광기가 지속적으로 되풀이되어왔습니다. 600만 명이 넘는 유다인 대학살, 수많은 청춘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대전쟁들은 집단적 악의 결과입니다.
불행하게도 우리 백성은 아직도 집단적 악의 난동으로 인해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아직도 하이에나 떼처럼 무리를 지어 다니며 선량한 국민의 삶을 힘겹게 하는 검찰 집단, 기레기 집단, 국민 민폐당, 사이비 종교 단체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다행히 요셉이 기적적으로 죽음을 모면하고 살아날 수 있었는데, 그것은 한 인간의 내면이 남아있는 개인의 양심 때문이었습니다. 일말의 양심이 남아있던 르우벤은 이렇게 말합니다.
“목숨만은 해치지 말자. 피만은 흘리지 마라. 그 아이를 여기 광야에 있는 이 구덩이에 던져버리고,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는 마라.”(창세기 37장 21~22절)
집단적 악의 세력이 휘둘러대는 광기 앞에 필요한 것은, 바로 우리들의 양심입니다. 악이 더 큰 악으로 확산되기 전에 어떻게 해서든 막아보려는 일말의 양심입니다. 거대 악을 목격하고서도, 그 악으로 인해 드러나는 참혹한 현실을 직면하면서도 그것을 외면하는 것은 또 다른 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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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CHgrer4Oya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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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 인간을 지옥에 보내실 수밖에 없는 이유>
오늘 복음은 못된 소작인들의 비유입니다. 이것은 분명 ‘십일조’ 봉헌에 관한 내용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주님께 봉헌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주시는 감사한 분이라는 것에 대한 믿음을 상실했음을 말해줍니다. 그렇게 첫 조상들은 ‘생명 나무’를 먹지 못하게 되었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납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는 말은 사실 ‘지옥’에 떨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은 곳이 지옥인데, 하느님께서 사시는 곳이 에덴동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그래도 인간을 지옥에 보내실 수가 있나?’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지옥에 보내실 수 있는 이유는 모든 것을 주시는 사랑 자체이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어떤 사람은 누구에게 조금 주다가 상대가 그것을 줘봐야 고마워할 줄 모르면 바로 주는 것을 그만둡니다. 그러나 사랑 자체이신 분은 그래도 다 준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소출을 바치지 않고 하인들까지 죽이는 그들에게 아드님까지 주십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영화 ‘해바라기’(2006)는 그냥 단순히 한 명의 깡패 영화 같은데 지금까지 남는 여운이 있습니다. 무언가 묵직하게 가슴을 누릅니다. 어쩌면 끝까지 주님을 거부하는 우리의 결말을 미리 보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미친개로 이름 날렸던 오태식이 주인공입니다. 조폭과 시비가 붙어 싸우다 한 명을 죽이고 교도소에 갇힙니다. 그런 오태식에게 죽임당한 남자의 어머니 양덕자가 면회를 오고 오태식은 그녀에게 감화돼 개과천선을 결심합니다. 그리고 그분을 자기 새어머니로 삼습니다.
오태식은 10년 수감생활 동안 자신의 목표를 수첩에 적으면서 출소 후 지키겠다 다짐합니다. 특별히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겠다. 다시는 싸우지 않겠다. 다시는 울지 않겠다”, 이상 세 가지는 새엄마 양덕자가 꼭 지켜달라고 한 것입니다. 한편 오태식이 수감된 중에 마을을 차지하려던 병진이 시의원 조판수와 마을을 접수하고 오태식의 똘마니 양기와 창무도 조판수 밑에 들어갑니다. 오태식이 출소하자 그들은 모두 긴장합니다. 시의원인 조판수는 마을 일대를 재개발하려고 하지만 그곳에 양덕자가 해바라기라는 식당을 하고 있었고 오태식이 그 집에서 살게 되는데 개과천선하려는 그의 마음과 달리 주변 사람들은 그를 제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오태식은 새엄마의 말대로 절대 싸움을 하지 않고 맞아주기만 합니다.
조판수 패거리가 양덕자의 해바라기 식당을 부수며 모녀를 위협하고 오태식이 일하는 카센터까지 가서 집단 폭행해서 사장의 팔을 부러뜨립니다. 이에 양덕자가 조판수를 찾아가 자신이 아들이 쓴 일기장 복사본을 보여주며 엄포를 놓습니다. 그 일기장에는 조판수가 양덕자 아들에게 시킨 안 좋은 일들이 다 적혀 있습니다.
하지만 조판수는 멈추지 않습니다. 양덕자의 딸 희주가 벽돌에 맞아 얼굴을 다칩니다. 그러자 결국 양덕자는 식당을 포기하기로 합니다. 그리고 오태식은 조판수를 찾아가서 함께 떠나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더는 건들지 말아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조판수는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 세상 이치가 아니던가?”라고 하며 그 대가로 태식 오른손의 힘줄을 끊으라고 시킵니다. 병진이라는 형이 그의 힘줄을 끊는 시늉만 합니다.
집도 내어주어 쇼핑몰을 짓게 하고 가장 싸움 잘하는 아들의 손목의 힘줄도 자르고 딸의 얼굴도 망가뜨렸습니다. 그러나 조판수에게 여전히 양덕자는 위험인물이었습니다. 자기 비밀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양기를 시켜 양덕자를 죽입니다. 조판수는 나이트클럽에서 자축 파티를 하고 있었고 오태식은 자신의 다짐을 깨고 조판수를 찾아갑니다. 술도 마시고 새엄마의 영정 앞에서 울기도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싸우지 않겠다던 약속도 지키지 않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내가 10년 동안 울면서 후회하고 다짐했는데, 꼭 그렇게…. 다 가져가야만 속이 후련했냐?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 한다고 한다더군. 그래서 지금부터 내가 너희들에게 벌을 주겠다.” 희주를 급습한 놈을 찾고 오태식은 병진에게 나가 있으라 말합니다. 병진은 태식의 힘줄을 끊지 않고 상처만 내 준 사람입니다. 그후 그곳은 쑥대밭이 됩니다.
이야기의 개연성도 부족하고 비현실적이지만 왠지 태식이 그렇게 하는 것이 시원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태수는 자기 손목과 어머니 집을 내어놓았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까지 죽였으니 더는 그 집에 살 수 없게 하는 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저희 어머니가 제가 어렸을 때 길거리 아이를 데려와 씻겨주고 재워주신 적이 있습니다. 저는 사실 그 아이를 계속 키우실까 봐 걱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우리 삼 형제가 학교 간 사이에 돼지 저금통을 다 털어 도망가버렸습니다. 이것만 해도 함께 살 수 없을 텐데, 만약 저희까지 해를 끼쳤다면 어떨까요? 아들 중 하나를 죽였다면 그래도 어머니는 그 아이를 집에 데려다 놓고 살아야 할까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무언가 잘못해서 벌을 받는다면 괜찮겠지만, 다 주고도 생명과 같은 존재까지 빼앗는 벌을 받으면서 자기 집에 살게 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부터는 강도에게 집을 빼앗기는 것이지 사랑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받은 것에 대해 감사할 줄 모르는 소출을 봉헌하지 않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태수는 자신을 받아 준 새어머니에게 신발을 사드렸습니다. 고마움의 표시입니다. 그렇게 그곳에 살 자격을 얻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살려고 하면서 어머니까지 죽인다면 그건 아닙니다. 인도에서 부부가 20원 때문에 싸우다가 남편이 아내를 죽인 사건이 있습니다. 작은 것에 감사하지 못하는 것이 결국 하느님까지 죽이는 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감사의 십일조를 하지 못하면 이런 형국까지 올 수 있을 것입니다. 못된 소작인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때가 되면 소출 일부를 주님께 감사히 봉헌하는 일을 멈추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럴 일은 없지만, 태아가 엄마 배를 갉아 먹는다면 그 태아는 더는 그 배에서 살 수 없습니다. 에일리언 영화에서 에일리언은 인간을 숙주로 새끼를 사람 몸에서 키웁니다. 그러면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에일리언 새끼를 몸속에서 빼내야 합니다. 선악과를 따먹는 것은 하느님 몸속에서 그분의 생명을 갉아먹는 것과 같습니다. 그곳에 살려면 최소한의 감사의 표시를 해야만 합니다. 성경은 이를 가지게 된 것의 십분의 일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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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1,33-43.45-46 : 저 자는 상속자다. 자, 저 자를 죽이자!
오늘 복음의 밭 임자는 포도밭을 일구고 울타리를 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소작인들이 했어야 할 일들을 직접 하였다. 소작인들은 그렇게 많은 일을 해야 했던 것이 아니다. 주어진 것을 잘 지키기만 했어도 되었다. 모든 것이 다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나왔을 때, 율법을 주셨고 도시를 세워주셨으며 성전을 마련해 주셨고 제단을 준비해 주셨다.그러고는 “멀리 떠나셨다.”(33절) 하느님께서는 끈기 있게 그들을 기다려 주셨다.
밭 임자는 “소출을 받아 오라고”(34절) 자기 종들, 즉 예언자들을 보냈다. 소출은 행실로 드러나는 복종심을 뜻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토록 세심한 보살핌을 받고 나서도 게으름을 피워 소출을 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자신들을 찾아온 종들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밭 임자에게 용서를 청해야 했지만 그들은 성을 내고 자신들의 손에 피를 묻히기까지 했다. 그러나 주인은 그들의 회개를 위해 계속 종들을 보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인은 아들을 보낸다.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37절) 이 말은 글자 그대로 소작인들이 그렇게 할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주님은 소작인들이 아들을 죽일 줄 알고 있었다. 소작인들은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듣든, 또는 듣지 않든”(에제 2,5)이라며 다른 곳에서 말씀하신다. 그들이 당신의 종들에게는 완고하게 굴었을지라도 아들의 존귀함에는 경의를 표했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소작인들은 어떻게 했는가? 자기들의 잘못에 대해 용서를 청할 시간이 있었지만, 예전에 저지른 죄보다 더 큰 죄를 짓는다.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하고 말하면서,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38-39절)고 한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하고 소리치며, 주님을 도성 밖에서 십자가에 못 박기도 하였다. 그들은 율법이라는 상속재산을 차지하지 못하였고 스스로에게 죽음을 선고하고 말았다.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40절)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그렇게 악한 자들은 가차 없이 없애 버리고,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41절)고 대답한다.그 대답으로 그들은 자기들의 죄를 인정하였다. 주님께서도 당신의 말씀으로 이것을 암시하셨다. “집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동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42-43절)
그리스도께서 ‘돌’로 불리시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그분께서 놓으신 기초는 튼튼하여 그분 위에 서 있는 이는 거짓스런 속임수에 넘어가거나 박해의 폭풍에 흔들리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 사악한 자들은 그분 안에서 완전하게 파멸하기 때문이다. 돌과 부딪히는 것은 산산조각 나지만 돌은 멀쩡하다. 돌 위에 떨어지면 스스로 부서지고 만다. 그들의 파멸은 돌의 힘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떨어진 그들의 잘못이 그들을 그렇게 만든다.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자기들에게 하는 이야기인 줄 알고 예수님을 죽이자고 마음먹었지만 군중이 두려웠다. “군중이 예수님을 예언자로 여겼기 때문이다.”(46절)그 군중들에게 변을 당할까 두려워 한 것이지만 그 군중들도 결국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하고 외칠 사람들이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참으로 주님의 일을 올바로 따르고 있는 소작인의 삶을 살고 있는가? 반성하며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을 청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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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다른 비유를 들어 보아라. 어떤 밭 임자가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그는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 오라고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보냈다.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들을 붙잡아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였다. 주인이 다시 처음보다 더 많은 종을 보냈지만, 소작인들은 그들에게도 같은 짓을 하였다."(마태 21,33-36)
이 말씀은, 하느님의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인 이스라엘의 역사를 비유로 표현한 말씀입니다. 여기서 ‘주인 몫의 소출’은, 즉 소작인들이 주인에게 내야 할 소작료는 ‘회개’와 ‘충실한 신앙생활’을 뜻합니다. ‘종들’은 하느님의 예언자들입니다. 예언자들의 주 임무는 회개하라는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인 것은 ‘회개하라는 말이 듣기 싫어서’, 또는 ‘회개하기가 싫어서’였습니다.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인 것은 회개하기를 거부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이스라엘을 ‘소작인들’이라고 표현하셨을까? 아마도 사람들이 소작인들처럼 살고 있는 것을 꾸짖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그리고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자녀라면 자녀답게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만일에 신앙생활을 사랑으로 하지 않고 억지로(의무감으로) 한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소작인으로 전락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큰아들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루카 15,29) 아버지가 큰아들을 노예로 부린 것이 아니라, 큰아들 자신이 ‘사랑 없이’ 의무감으로만 일하면서 스스로 노예의 위치로 내려갔습니다. 그러면서 그의 마음속에는 ‘불평불만’이 가득했습니다. ‘사랑으로’ 일하는 자녀의 마음속에는 ‘기쁨’이 가득한 법입니다. 혹시 지금, 기쁨은 없고 불평과 불만만 가득하다면, 그것은 신앙생활을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인은 마침내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아들을 보자,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마태 21,37-39)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암시하신 말씀입니다. 주인이 아들을 보낸 것은 소작인들을 타이르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비유에서는 소작인들이 아들을 알아보고 죽인 것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실제 상황에서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알아보지 못했고,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인정하지도 않았고, 믿지도 않았습니다. 또 비유에서는 소작인들이 주인의 재산을 차지하려고(빼앗으려고) 아들을 죽인 것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실제 상황에서는 유대인들은 하느님께 충성한다는 명목으로 예수님을 죽였습니다.(요한 16,2) 그러나 하느님께서 보내신 아드님을(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고(믿지 않고) 죽인 것은 사실상 하느님께 반역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자기들 마음대로 판단해서 거부한 것 자체가 죄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려는 의도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메시아께서 주시는 하느님 나라를 거부하는 것은 자기들 마음대로 하느님 나라를 세우려고 하는 것과 같고, 그것은 하느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그렇게 악한 자들은 가차 없이 없애 버리고,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 하고 그들이 대답하자"(마태 21,40-41)
여기서 유대인들의 대답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 자신들의 죄에 대한 처벌을 선고한 셈이 되었습니다. 이 말에서 예수님의 재판 때에 유대인들이 했던 말이 연상됩니다. “그러자 온 백성이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질 것이오.’ 하고 대답하였다."(마태 27,25) 이 말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자기들은 잘못한 것이 없다는 자만심에서 한 말이지만,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 자신들에게 유죄선고를 내리는 말이 되었습니다. 어쩌면 최후의 심판은 그렇게 진행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느님께서 유죄선고를 내리시기 전에 죄인들 자신들이 스스로 자신들에게 유죄선고를 하고, 합당한 처벌을 선고하는 것이 최후의 심판일 것입니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마태 21,42-43)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은 “집을 짓는 데에 아무 쓸모가 없다고 여겨져서 그냥 버린 돌”인데,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을 모독한 죄인’으로 생각해서 죽였지만, 그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이고, 하느님이신 분입니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라는 말씀을 설명한 것과 같은 말이 사도행전에 나옵니다. “이스라엘 온 집안은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사도 2,36)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인간의 생각을 초월한다는 뜻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에게는 놀라운 일이겠지만, 믿는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라는 말씀에는 “너희가 끝까지 회개하지 않으면”이라는 조건이 붙어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이 말씀은 유대인들에게만 하시는 경고가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하시는 경고입니다. 누구든지 회개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지 못합니다. ‘소출을 내는 민족’은 제대로 회개하고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에는 특권도 없고, 특혜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야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대원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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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2013년에 ‘람페두사’를 방문하였습니다. 람페두사는 이탈리아 남단에 있는 작은 섬입니다. 섬은 아름다운 자연과 바다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관광지입니다. 그러나 섬은 아프리카와 가까이 있기에 난민들이 찾는 피난처이기도 합니다. 난민들은 뗏목을 타고 오기도 하고, 정원을 초과해서 배를 타고 오기도 합니다. 그런 과정에서 많은 난민들이 섬에 오기도 전에 바다에서 죽음을 맞이하기도 하였습니다. 교황님은 이웃의 고통에 익숙해진 현대인의 모습을 지적하며, “무관심의 세계화는 우리 모두를 무책임한 ‘익명의 사람들’로 만든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교황님은 인간 역사의 여명기에 하느님께서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네 아우는 어디 있느냐?” 하신 질문을 상기시키고 “이 질문은 이 시대의 모든 이들에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던지시는 질문”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교황님은 “누가 이들을 위해 울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하였습니다. “여기 형제, 자매들의 죽음에 누가 애통해하고 있습니까? 이 (죽음의) 배를 탄 사람들을 위해 누가 울고 있습니까? 어린 것들을 안고 있는 이 젊은 엄마들을 위해, 가족을 위해 일자리를 찾아 나선 이 남자들을 위해서 누가? 우리는 어떻게 울어야 할지를, 어떻게 연민을 경험해야 할지를 잊었습니다. 이웃과 함께하는 ‘고통’ 말입니다. 무관심의 세계화가 우리에게서 슬퍼하는 능력을 제거해버렸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교황님은 회칙 ‘찬미 받으소서.’를 통해서 우리 이웃의 범위를 확대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주인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세상을 맡겨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세상을 보존하고, 후손들에게 물려줄 사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께서 맡겨 주신 이 세상을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파괴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욕심과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더불어 살아가야 할 생명을 죽음으로 내 몰고 있습니다. 교황님은 지구를 보호할 다양한 방안을 제시하면서 우리의 지구를 위해서 기도할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지구를 위한 기도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온 세계에 계시며 가장 작은 피조물 안에 계시나이다. 하느님께서 존재하는 모든 것을 온유로 감싸 안으시며 저희에게 사랑의 힘을 부어 주시어 저희가 생명과 아름다움을 보살피게 하소서. 또한 저희가 평화로 넘쳐 한 형제자매로 살아가며 그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게 하소서. 오, 가난한 이들의 하느님, 저희를 도와주시어 저희가 하느님 보시기에 참으로 소중한 이들, 이 지구의 버림받고 잊힌 이들을 구하게 하소서. 저희 삶을 치유해 주시어 저희가 이 세상을 훼손하지 않고 보호하게 하시며 오염과 파괴가 아닌 아름다움의 씨앗을 뿌리게 하소서. 가난한 이들과 지구를 희생시키면서 이득만을 추구하는 이들의 마음을 움직여 주소서. 저희가 하느님의 영원한 빛으로 나아가는 여정에서 모든 것의 가치를 발견하고 경외로 가득 차 바라보며 모든 피조물과 깊은 일치를 이루고 있음을 깨닫도록 저희를 가르쳐 주소서. 하느님, 날마다 저희와 함께해 주시니 감사하나이다. 비오니, 정의와 사랑과 평화를 위한 투쟁에서 저희에게 힘을 주소서.”
오늘 독서에서 형제들은 아버지가 보낸 동생 요셉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은전 서른 닢에 팔아넘겼듯이, 형제들은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동생 요셉을 은전 스무 닢에 팔아넘겼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포도원 소작인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소작인들은 주인이 보낸 종들을 쫓아내고, 죽였습니다. 주인의 아들까지도 죽여 버렸습니다. 요셉을 팔아넘긴 형제들은 가난한 이웃을 외면하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나쁜 포도원 소작인들은 자연을 파괴하고 더불어 살아가야 할 생명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내면에 있는 ‘시기와 질투, 욕심과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 마음 안에 요셉이 보여주었던 ‘인내와 용서’를 채워야 합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었지만 비천한 종의 모습으로 오셨던 예수님의 ‘겸손과 희생’을 채워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참다운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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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락 타대오 신부님]
우리는 창세기의 요셉 이야기가 어떤 결말에 이르게 되는지를 이미 알고 있습니다. 요셉은 형들의 시기로 이집트로 팔려 가지만, 이렇게 해서 요셉이 먼저 이집트로 내려가지 않았더라면 후에 큰 기근이 닥쳤을 때에 야곱 집안은 살길을 찾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화답송 시편에서는 주님께서 역사 안에서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여러 사건을 기억하면서, 그분께서 “한 사람을 그들 앞에 보내셨으니”라고 노래합니다.
죽음의 위험을 겪고 상인들에게 팔려 간 요셉은, 가족과 백성을 살리려고 다른 이들의 손에 넘겨진 한 사람이었습니다.
포도밭 소작인들의 비유에서도, 소작인들은 밭 주인의 아들을 죽이지만 그 이야기의 결말은 더 많은 이에게 하느님의 나라가 주어진다는 것으로 끝납니다.
“소출을 내는 민족”은, 예수님께서 유다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넘겨지시고 죽임을 당하신 다음, 그분을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수많은 이, 곧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을 일컫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고백대로, 그들의 잘못으로 세상이 풍요로워졌고 그들의 실패로 다른 민족들이 풍요로워졌습니다.(로마 11,12 참조)
많은 이의 구원을 위해 바쳐진 요셉과 예수님의 목숨!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구원과 생명이 주어진 것은 바로 이 길을 통해서였습니다.
우리 인간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이들의 의롭고 안타까운 죽음, 심지어는 억울하고 기막힌 죽음을 통하여 우리 사회는 발전해 왔고 우리 모두는 그분들의 죽음의 수혜자가 되었습니다.
사순 시기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하고 카야파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해의 대사제로서 예언한 것이라고 전하는 요한 복음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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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정완 고스마 신부님]
오늘 복음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언자들을 박해한 역사와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인 교회의 출현을 소작인들의 이야기로 엮은 우화입니다. 줄거리를 뽑아보면 이렇습니다.
①어떤 지주가 포도원에 포도나무를 심고 그것을 농부에게 도조로 내어 주고 떠났습니다.
② 포도철에 그 지주는 종을 소작인들에게 파견하여 농부들에게서 포도원의 소출을 받도록 했습니다.
③ 그런데 소작인들은 파견된 종을 때리고 빈손으로 보냈습니다.
④ 그러자 지주는 다신 다른 종을 그들에게 파견하였으나, 소작인들은 그마저 머리를 치며 모욕하였습니다.
⑤ 마지막으로 지주는 자기 아들을 소작인들에게 파견하면서 ‘내 아들이야 존중하겠지’ 하며 자기 아들을 보냈습니다.
⑥ 하지만 소작인들은 ‘이 자가 상속자다. 가서 그를 죽여 버리자. 그러면 상속을 우리 것이 될 것이다’ 하고 서로 짜서, 그 아들을 잡아 죽이고 포도원 밖으로 내던졌습니다.
⑦ 그러니 포도원 주인은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주인은 가서 농부들을 없애고 다른 이에게 포도원을 줄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지주와 소작인으로 대표되는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관계를 참 잘 설명해 주고 있구나 하는 감탄을 하게 됩니다. 지주는 자신의 포도밭을 가꾼 후 그 포도밭을 도조로 줍니다. 그런데 당연히 받아야 할 도조를 소작인들에게 착복 당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주는 심부름꾼들을 보내며 결정적으로 자신의 아들까지 보내며, 소작인들을 끝까지 믿습니다.
자기 아들도 사지로 보내는 순박한 지주의 모습은 참아주시는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소작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포도밭을 임시로 맡아 관리하는 소작인들은 주인의 포도밭을 자신의 포도밭인 양 모든 소출을 자기 것으로 합니다. 간이 점점 커져 도조를 받으러 오는 종을 때리고 모욕을 줍니다. 이제 간이 배밖에 나와 지주의 상속자를 죽입니다. 점점 악해져서 멸망의 길로 가는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이야기를 말씀하셨을 때, 예언자들의 운명을 마음에 두셨을 것입니다. 하느님 창조 질서로 돌아오라는 예언자들의 말을 아니꼽게 들은 이스라엘은 예언자들을 하나같이 가만 놓아두지 않았습니다.
모두다 손 대어, 명대로 죽은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들을 모욕하고 더러는 죽이고 한 이스라엘의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예수께서 이 이야기를 발설하셨을 때는 자신의 운명을 어느 정도 직감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뒤로 물러 나시지 않으십니다. 자신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는 대사제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 앞에서 이 말씀을 하셨으니, 자기 아들을 사지로 보내는 지주 마냥 예수님도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은 만용을 부리다 죽은 어리석은 사람의 객기라 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남아 우리들에게 새로운 빛을 주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과 도조를 잘 내는 새로운 소작인 때문일 겁니다. 이 새로운 소작인은 하느님의 심부름꾼인 예언자들을 함부로 대하거나, 서로 음모를 짜서 예언자들을 없애버리지 않습니다.
인류가 예언자도 죽이고 아들까지 죽이는 죄악 속에 파묻혀 있더라도, 하느님의 구원은 끊임없이 계속됨을 오늘 복음에서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새로운 소작인으로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참여하는 일은 놀랍고도 위대한 일일 것입니다. 새로운 소작인들이 할 일은 간단합니다.
하느님의 심부름꾼을 모욕주거나 때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심부름꾼은 누구이겠습니까? 하느님의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일 것이고,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우리가 하느님의 사람이 되는 일일 것입니다. 죄악 속에 버려져 있고, 죽음이 언제 덮칠지 모르는 우리이지만, 이런 우리를 새로운 사람으로 뽑아 주신 하느님께 감사 드립니다.
오늘 복음에 나온 시편의 말씀이 우리를 향한 하느님 축복의 말씀이니 한번 더 마음에 새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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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성주 프란치스코 신부님]
여러분들은 자신보다 먼저 남을 배려해주는 사람들을 보시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따뜻한 마음을 느끼시지요. 그와는 반대로 남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것만 챙기려는 사람들을 보시면 기분이 썩 좋지 않으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말씀은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면서, 그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욕심으로 사랑을 배신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소작인들에게 땅만 빌려준 것이 아니라 포도를 수확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들을 만들어서 빌려줍니다. 포도나무를 심어주고 울타리를 만들어주고 포도즙을 짜는 확을 파주고 맹수들과 도둑들이 오는 것을 미리 알기 위해서 망대까지 세워 줍니다. 그리고는 일하는 사람들이 부담가지지 않게 하기위해 멀리 떠나갑니다. 일하는 사람들을 위해 큰 배려를 베푸신 것입니다.
나아가 포도를 수확하는 때가 되자 바쁘게 일하는 사람들을 위한 배려로 직접 임대료를 가지고 오라 하지 않고 종을 보내어 주는 사랑까지 베푸십니다.
그런데 이런 사랑스러운 배려를 소작인들은 욕심에 눈이 멀어 배반하고 맙니다. 임대료를 받으러 여러 차례 보낸 종들을 때리고, 머리를 쳐서 상처를 입히고, 더러는 죽이기까지 합니다.
그리고는 내 아들이야 알아주겠지 하는 마음으로 보낸 주인의 아들까지 죽여 버리고 맙니다. 상속자를 죽이면 자기들이 그 포도원을 차지할 수 있으리라는 허황된 꿈을 꾸었던 것입니다.
욕심이 눈을 가린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분수에 맞게끔 살아야 되는데, 지나치게 더 가지고 싶어 하는 마음이 하느님의 사랑과 배려를 저버린 것입니다.
주인이 울타리를 쳐주고 망대를 세워준 것은 나쁜 것들로부터 포도원을 잘 지킬 수 있도록 하는 배려인데, 오히려 그 망대에 올라서서 돈을 받으러 오는 종들과 아들을 불안 가득한 마음으로 쳐다보면서 나쁘게 할 궁리를 했던 것입니다.
하느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창조하신 모든 것들을 인간이 잘 관리함으로써 창조사업에 협조할 수 있는 위치를 우리에게 부여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헛된 욕망과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교만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등을 돌립니다. 하느님이 주시는 것을 잘 다스려야 하는데 오히려 자기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배은망덕한 짓을 저지르곤 합니다.
복음에 등장하는 대사제와 율법학자들 그리고 원로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으면서 자기들을 두고 하는 말씀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렇다면 뉘우쳐야 되는데 적반하장 격으로 예수님을 잡으려 합니다.
하느님 것을 차지하려는 인간의 죄를 깨달아야 되고 하느님께 용서를 청해야 되는데,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사랑이 싫었고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더 무섭고 두려워서 예수님을 어떻게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아는 사람들은 이웃을 배려할 줄 알고 사랑할 줄 압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숨결로 창조된 우리이기에 하느님의 마음이 우리 안에 머물고 그 마음이 우리의 망대가 되어서 악의 유혹들로부터 피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제대로 두려워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욕심꾸러기, 욕심쟁이들은 하느님 것을 제 것처럼 여기고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 힘만 믿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다보니 남들로부터 자기를 지켜야 되고 자기 마음 안에 남을 불신하고 자기만을 보호하려는 망대를 세웁니다. 그 망대에 올라가서 늘 불안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리고는 하느님보다 사람들을 더 두려워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많은 선물을 주셨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은 하느님이 세상을 잘 다스릴 수 있도록, 구원사업에 협력할 수 있도록 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그분의 깊은 사랑을 잘 깨달아야 됩니다. 우리의 힘의 원천은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뿌리를 거역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마음 안에 서 있는 망대에서 우리의 눈을 하느님께로 돌립시다.
하느님께로 눈을 돌릴 때 우리는 인간을 사랑하시는 그분의 마음을 깨닫고 이웃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끝없이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을 느끼면서 하느님을 제대로 두려워하게 됩니다.
끝으로 오늘 화답송으로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겠습니다. 복되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이여, 당신의 계명을 큰 낙으로 삼는 이여, 그 후손은 세상에서 강성하리라, 의인의 자손은 축복을 받으리라. 복되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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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오늘 <복음>은 ‘포도밭의 사랑의 노래’를 들려줍니다. 포도밭 주인(하느님)은 당신의 포도밭(이스라엘 백성)을 소작인(백성의 지도자)들에게 맡깁니다. 그리고 주인은 당신의 종(예언자)들을 여러 차례 보내지만 소작인들은 그 종들을 학대합니다.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돌로 쳐 죽이고, 결국 주인이 사랑하는 아들(예수 그리스도)까지 보내지만, 그마저도 포도밭 밖으로 끌어내어 죽입니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신뢰하고 사랑하고 계시는지를 실감나게 해 주는 노래입니다. 그 신뢰와 사랑이 너무도 커서 아들의 목숨까지도 건네주어 버리는 무방비의 신뢰와 사랑의 노래입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이 신뢰와 사랑의 노래는 애절한 그 신뢰와 사랑이 거절당하고, 배반당하고, 끝내는 목숨까지 살육당하는 처참하기 그지없는 가슴 아픈 노래입니다. 이 크신 하느님의 사랑과 신뢰에 우리는 얼컥 눈물이 젖습니다.
한편, 이 노래는 그 큰 사랑과 신뢰를 거부해버리고 마는, 나약한 우리 인간의 배신 이야기입니다. 또한 고귀한 사랑과 신뢰마저도 한갓 우리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짓부숴버리고 마는, 배은망덕의 패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이야기를 통해, 사제들과 원로들을 고발하며 꾸짖으십니다. 어리석은 인간의 꾀와 작태를 비웃으시며, 하느님의 깊은 섭리와 계획을 밝히십니다. 집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리돌이 되었다’는 성경말씀의 인용을 통해, 비록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되겠지만 오히려 그 죽음을 통해 새로운 구원의 시대가 펼쳐진다는 역설의 신비를 가르쳐줍니다. 곧 당신께서는 버려진 돌이셨지만, 머릿돌이 되시어 새로운 집인 새로운 백성을 세우셨음을 말해줍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한정적으로 구원의 역사가 보장되었다는 유대인들의 생각은 파기되고,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인 교회공동체에 보편적 구원이 사명으로 맡겨졌음을 드러냅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특별히 포도원 주인의 믿음과 사랑을 보게 됩니다. 도조를 받으러 보낸 종들이 두 번씩이나 무참히 맞고 죽는 배신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아들을 보내주시기까지 베풀어지는 믿음과 사랑입니다. 마침내는 당신의 아들마저도 죽음을 당하지만, 끝까지 포도원을 포기하시지 않으시는 무한한 신뢰와 사랑입니다.
이는 아무리 인간의 죄가 크다 하여도 인간의 죄를 뛰어넘는 하느님 계획의 초월성과 구원의 신비를 보여줍니다. 참으로, “주께서 하시는 일이라 우리에게는 놀랍게만 보입니다.”(마태 21,42). 사실, 도조를 바치지 않고 못된 일을 저지른 소작인들, 그들은 일상의 삶 속에서 잘못과 죄를 반복하고 있는 우리들의 자아상 입니다. 소작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끊임없이 주시는 포도밭 주인에게 여전히 우리의 권리만 주장하고 있는 완고한 우리들의 자아상 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하느님을 밀쳐내고, 그분의 권리를 강탈하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탐욕으로 인해 주인의 아들마저도 죽이고 마는, 악한 마음과 배은망덕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뜻에 따라 좋은 결실을 맺고, 그 풍성한 소출을 도조로 바쳐야 할 일입니다. 바로 오늘, 그분의 신뢰와 사랑에 응답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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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마태 21,42)
주님!
당신께서 제게 하신 일, 놀랍기만 합니다.
도망칠수록 더 강한 사랑의 철창으로 꼭 가두시고,
제 안에 꿈틀거리는 반역을 멈추게 하십니다.
거부되고 버려지고 넘어져도 오히려 그를 통해 구원의 섭리로 이끄시며,
감춰둔 사랑의 신비를 보여주십니다.
하오니, 주님!
언제나 제 머리 위에 당신 사랑을 두고,
당신께 속한 이로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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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의 것은 나의 것이 아니라네>
마태오 21,33-43.45-46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그때에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비유를 들어 보아라. 어떤 밭 임자가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그는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 오라고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보냈다.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들을 붙잡아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였다. 주인이 다시 처음보다 더 많은 종을 보냈지만, 소작인들은 그들에게도 같은 짓을 하였다. 주인은 마침내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아들을 보자,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그렇게 악한 자들은 가차 없이 없애 버리고,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 하고 그들이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이 비유들을 듣고서 자기들을 두고 하신 말씀인 것을 알아차리고, 그분을 붙잡으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웠다. 군중이 예수님을 예언자로 여겼기 때문이다.
<나의 것은 나의 것이 아니라네>
처음부터
나의 것은
나의 것이 아니라네
마지막까지
나의 것은
나의 것이 아니라네
다만
나에게 왔듯이
나에게서 가야하고
오직
나에게 왔듯이
나에게서 가야만
나를 살리고
너를 살리고
모두를 살리는 것
나의 사람도
나의 무엇도
마침내 나마저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나의 것은
나의 것이 아니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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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언제나 당당하게>
우리의 삶은 하느님께서 주신 포도밭이고, 우리는 그 밭의 일꾼입니다. 일꾼은 열성으로 일을 해야 합니다. 일꾼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지 않고 주인이 원하시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좋은 열매를 맺어 그 열매를 주인께 바쳐드려야 합니다.
만약 일꾼이 주인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일을 한다면 아무리 많은 일을 하였다고 하더라도 그는 이미 일꾼으로서 자격을 잃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지 않는다면 이미 하느님의 일꾼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하느님께서 주신 포도밭에서 마음껏 일할 수 있는 하느님의 훌륭한 일꾼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아무리 많은 일을 하여도 사랑이 담기지 않으면 적게 일한 것이고, 적게 일한 것처럼 보여도 사랑이 담기면 많은 일을 한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일을 하여도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다면 적게 일한 것이고, 적게 일한 것처럼 보여도 해야 할 일을 했으면 많은 일을 한 것입니다. 일꾼은 일꾼입니다. 주인을 꿈꿀 수 있을지언정 주인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고 싶은 일에 앞서 해야 하는 일을 우선해야 합니다.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를 통해서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롭지 못한 삶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군중이 두려워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왜 군중이 두려웠을까요?
자기들이 의롭게 살았다면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의인은 아무도 겁내지 않는 법입니다. 그러나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옛말이 있듯이 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 한 것은 곧 자기들이 하는 일이 옳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말해주는 것입니다.
반면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당당하셨습니다. 바리사이나 수석 사제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하시는 일이 하늘 아버지의 뜻에 의합하고 당신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요한5,19)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보내주신 아버지의 뜻만을 추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이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아버지 안에 머무는 만큼 당당히 가실 길을 가야만 하였습니다. 우리도 예수님께서 걸으신 그 길을 당당히 걷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신상옥씨의 ‘내 발을 씻기신 예수님’을 묵상합니다.
그리스도 나의 구세주, 참된 삶을 보여주셨네.
가시밭길 걸어갔던 생애,
그분은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네.
죽음 앞둔 그분은 나의 발을 씻으셨다네.
내 영원히 잊지 못할 사랑,
그 모습, 바로 내가 해야 할 소명.
주여, 나를 보내주소서.
당신이 아파하는 곳으로
주여, 나를 보내주소서.
당신 손길 필요한 곳에
먼 훗날 당신 앞에 나설 때
나를 안아주소서.
주님께서 걸으신 길, 기쁨으로 걸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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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마태오 복음서의 저자는 21─23장에서 수난 전 예수님의 예루살렘 활동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21,1-11 참조) 뒤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과의 논쟁이 다시 시작됩니다.(21,23-27 참조) 이 논쟁은 22장까지 이어지는데, 예수님과 반대자 사이에 점차 높아 가는 갈등의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 포도밭은 이스라엘, 소작인은 이스라엘의 지도자, 아들은 예수님, 주인은 하느님 아버지를 가리킵니다.
포도밭 소작인에 관한 비유에 담긴 상징적 의미를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의미는, 이스라엘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시기하고 모함하였으며, 정치적 상황으로 빌미를 만들어 예수님을 돌아가시게 하였습니다. 둘째 의미는, 하느님의 초월적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적대자들의 시기와 모함을 받아 누명을 쓰시고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셔야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은 끝이 아니었습니다. 시편 118편 22-23절을 인용하여 예고하였듯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죽음에서 일으키셨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비유 이야기를 통하여 거부와 회복, 죽음과 부활이라는 그리스도론적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에서는 ‘일상적 현실’을 파괴합니다. 소작인들은 주인에게 주어야 할 소출이 있었으나 그것을 주지 않았고, 오히려 주인이 보낸 종과 주인의 아들을 죽였습니다. 파괴된 현실은 지금 우리의 상황을 반영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날카롭게 경고하셨듯이, 오늘날 누군가 ‘일상적 현실’을 부정하고 거부하려고 한다면 그도 그 경고에서 예외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일상적 현실’을 살아간다는 것, 그것은 무엇일까요?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면서 살아간다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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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마태21,38)
<'이 시대 예언자는?>
오늘 복음(마태21,33-43.45-46)은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신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입니다.
'포도밭 주인'은 '하느님'이시고, '소작인들'은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예언자들'입니다. 그리고 '포도밭 주인의 아들'은 '예수님'이십니다.
구약성경 안에 잘 드러나 있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하느님께서는 많은 예언자들을 파견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런 예언자들을 거부했습니다.
"자, 예레미야를 없앨 음모를 꾸미자, 어서 혀로 그를 치고, 그가 하는 말은 무엇이든 무시해 버리자."(예레18,18)
그러자 이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하느님께서는 마지막으로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셔서,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십니다.(요한 3,16 참조)
그러나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그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립니다. 하지만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그 아들을 일으켜 세워주십니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마태 21,42)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시대 예언자는 누구일까?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뜻과 정의와 공정'을 세상에 외치고 있는 그 예언자들은 누구일까? 저는 그들이 바로 천주교 안에 있는 '정의구현사제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의구현사제단'은 정치권력과 타협하지 않으면서, 예수님의 뜻과 멀어지고 있는 세상을 향해 하느님의 정의와 공정을 외치고 있습니다.
그런 사제단을 향해 일부 사람들이 매우 왜곡된 말을 하기도 하지만, 저는 그들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 건설을 위해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예언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예언자들을 배척하거나 죽이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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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떤 형제님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가는 중에, 앞의 차가 불안했습니다. 차선을 잘 바꾸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또 급브레이크를 자주 밟았습니다. 이 차의 뒤에 ‘초보운전’이라는 글자가 크게 보였습니다.
아직 운전이 미숙한 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운전하고 있던 형제님께서 “저렇게 운전하는 것을 보니 여자가 분명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차를 추월하면서 보니 젊은 형제님께서 운전대를 잡고 있었습니다. 대체로 여성이 남성보다 운전에 미숙하다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고정관념을 가지면, 여성 운전자가 실수하면 여성이라 능력이 부족하다고 말하고, 남성 운전자가 실수하면 단순한 집중력 부족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고정관념이 과연 맞는 것일까요? 솔직히 운전을 잘하지 못하는 남성도 많습니다. 또 반대로 엄청나게 운전을 잘하는 여성도 많습니다.
고정관념은 우리의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늘 열린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과거의 이스라엘 사람들도 예수님에 대한 잘못된 고정관념으로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 말씀 역시 고정관념으로 인해 죄로 기울어지는 유다인들을 꾸짖는 말씀이었습니다. 이해를 위해 비유로 말씀하셨지만, 그 뜻은 이와 같습니다.
하느님은 자연과 인간을 창조하시고 자연의 모든 것을 인간이 경작하도록 맡기셨습니다. 사람들은 이제부터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맡은 것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할 일은 하지 않고 죄에 빠져들어 하느님과 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하느님은 사람들을 올바른 길로 되돌리기 위해 예언자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이 예언자를 학대합니다. 하느님의 인내심은 사랑으로 표현되어 끝내는 외아들을 구세주로 보내십니다. 그러나 못된 백성은 그 아들마저 죽입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에 나오는 ‘소작인의 비유’ 말씀의 뜻입니다. 그러면서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라고 하시지요. 사람들이 업신여긴 것, 쓸모없다고 버린 것을 하느님은 쓸모 있게 보시고 귀하게 여기시어 긴요한 자리에 놓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죄로부터 멀어져야 합니다. 못된 소작인과 같이 많은 은총과 사랑을 받았음에도 잘못된 판단으로 주인에게 충실하지 못한 모습이 아니라, 올바른 판단으로 언제나 주인이신 하느님께 충실한 우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올바른 판단으로 주님께 충실한 우리가 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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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살아 있는 사람이 꿈꾼다>
- 하느님의 꿈 -
꿈이 있습니까? 아주 절실한 물음입니다. 꿈이 있어야 삽니다. 사람만이, 살아있는 사람만이 꿈을 꿉니다. 짐승과 인간의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또 사람이라고 다 사람이 아닙니다. 꿈이, 고상한 꿈이 있는 사람이 진정 사람입니다. 꿈이 있어야 타락하지 않습니다. 꿈이 사람을 고귀하고 품위있게 사람답게 합니다.
그러니 꿈이, 희망이, 비전이 있어야 합(삽)니다. 아무리 세월 흘러 나이들어도 꿈만은 늘 생생해야 합니다. 나이가 적어 젊은이가 아니라 꿈이 있어야 젊은이입니다. 꿈이 있어야 나이에 상관없이 하느님 닮아 영원한 청춘입니다. 예전부터 참 많이 제 시와 강론에 등장했던 주제가 ‘꿈’입니다. 아주 예전에 써놨던 애송 자작시 2편을 소개합니다.
“창문 밖
가난한 언덕
보랏빛
은은했던
제비꽃 그 자리에
샛노란
민들레꽃
감동의 그 자리에
하얀 눈
덮여 있다
흰눈 덮인 하얀 땅
보랏빛
샛노란 빛
봄꿈을 꾸고 있겠지”-1998.1.22.
24년전 겨울 화장실 밖 흰눈 덮인 언덕을 보며, 부활의 봄을 꿈꾸며 쓴 시입니다.
이어 21년전 3년후 5월초에 쓴 ‘꿈 있어야 산다’라는 시입니다.
“밖에서는 모른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잎들 다 진
겨울 나무가 그렇다
그러나 보라!
살아 있지 않은가
봄되니
피어나는 꽃들
짙어져 가는 신록들
아!
꿈 있어야 산다
꿈 있어 겨울 추위 견뎠다
꿈 없으면 죽는다
꿈은 생명이다
가슴에 담았던 꿈
활짝 피어내니
꽃이요 신록이다
아름다운 생명이다.”-2001.5.6.
하느님은 꿈꾸는 분입니다. 성서는 하느님의 꿈이 실현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성서나 교회의 사람들 모두가 하느님을 닮아 하늘 나라를 꿈꿨던 꿈의 사람들입니다. 오늘 제1독서 주인공 요셉이나 복음의 주인공은 예수님은 하느님 꿈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평생 하늘 나라의 꿈을 실현시키려 전력투구했던 분입니다. 아니 예수님 자체가 하늘 나라 꿈의 실현이었습니다. 하느님의 간절한 소망은 예수님뿐 아니라 믿는 이들 하나하나를 통해 당신 꿈이 실현되어 모두가 하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포도원 소작인들의 우화입니다. 하느님의 꿈이 좌절 실패한 듯 했지만 결국은 예수님의 부활로 하느님의 꿈이 실현됨을 보여줍니다.
세상 그 누구도 그 무엇도 하느님의 꿈을 좌절시킬수 없습니다. 짧은 생각으로는 분명 악의 승리요 하느님의 꿈이 좌절되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하느님은 예수님을 부활시키심으로 그의 꿈을 실현시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다음 시편을 렉시오 디비나 하면서 예수님의 부활을, 하느님의 승리를, 하느님 꿈의 실현을 깨달았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예수님의 입을 빌어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하느님의 꿈이 실현됨을 고백합니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 말씀을 들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그대로 2000년 교회 역사를 통해 하느님 나라의 꿈이 펼쳐지고 있음을 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믿는 하느님 꿈의 사람들에게는 절망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단히 하늘 나라의 꿈을 실현하며 살아갑니다. 꿈이 있어야 삽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 꿈중의 꿈은 하느님의 꿈, 하늘나라의 꿈, 주님 부활의 꿈입니다.
사순시기 바로 주님 부활의 봄을 꿈꾸는 은총의 시기입니다. 주님 부활을 앞당겨 꿈꾸며 기쁘게 살라는 베네딕도 성인의 당부입니다.
“그리하여 각자는 성령의 기쁨을 지니고 자기에게 정해진 분량 이상의 어떤 것을 하느님께 자발적으로 바칠 것이다. 즉, 자기 육체에 음식과 음료와 잠과 말과 농담을 줄이고 영적 갈망의 기쁨으로 거룩한 부활 축일을 기다릴 것이다.”
(성규49장, 사순절을 지킴에 대하여 6-7절)
오늘 제1독서 창세기의 요셉은 예수님의 예표가 됩니다. 요셉의 시련과 수난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보입니다. 요셉의 파란만장한 삶의 여정은 그대로 하느님의 꿈이 실현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참으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아슬아슬한 삶의 연속입니다. 형제들의 질투와 시샘으로 죽음의 위기에 직면한 요셉입니다.
“저기 꿈쟁이가 오는구나. 자, 이제 저 녀석을 죽여서 아무 구덩이에나 던져 넣고, 사나운 짐승이 잡아 먹었다고 이야기 하자. 그리고 저 녀석의 꿈이 어떻게 되나 보자.”
하느님의 개입이 참 오묘합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다 악인은 아니었습니다. 르우벤이 개입했고, 마침내 맏형인 유다의 개입으로 천우신조 요셉은 목숨을 건집니다.
“우리가 동생을 죽이고 그 아이의 피를 덮는다고 해서, 우리에게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 자, 그 아이를 이스마엘인들에게 팔아 버리고, 우리는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자. 그래도 그 아이는 우리 아우고 살붙이가 아니냐?”
유다의 개입으로 요셉은 살아났고,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은전 스무 닢에 팔아 넘기니 복음에서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 넘기는 장면과 흡사합니다. 좌우간 르우벤과 유다를 통해 요셉을 살려내어 자신의 꿈을 실현시켜 가시는 하느님의 구원 섭리가 참 오묘합니다.
중국의 삼국지에서 사마의와 그 아들들이 궁지에서 살아났을 때 제갈량의 “모사謀事는 재인在人이요, 성사成事는 재천在天이다”라는 탄식이 생각납니다. 즉 일을 꾸미는 것은 사람이지만 일을 이루는 것은 하늘에 달렸다는 고백입니다. 우리 식으로 말해 그 무엇에도 그 누구에도 좌절됨이 없이 자신의 꿈을 실현시켜가는 하느님이라는 고백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힘들고 어려워도 꿈이 있는 사람은 삽니다. 꿈중의 꿈이 하느님의 꿈이요, 주님 부활의 꿈입니다.
인명은 재천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하나가 하느님의 꿈을 실현하라 주어진 선물 인생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각자 삶의 자리에서 하늘 나라의 꿈을 실현하며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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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https://www.youtube.com/watch?v=FnOPZ6pAg1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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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마태 21, 39)
포도밭은
욕망의
산물이 아니라
가장 좋으신
하느님 은총의
선물이다.
우리의 삶이란
결코 욕망을
채우기 위한
포도밭이
아니다.
사실은
삶의 어두운
욕망의 근원이
하느님과
우리를
분리시키는 데
있음을 절실히
깨닫게 되는
은총의
사순이다.
삶의
포도밭에서
우리를
살게하시는
생명의
하느님이시다.
모든 것을
부정해도
부정할 수 없는
단 하나
그것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의
존재이다.
세상은 그걸
참 모른다.
하느님을
죽이기에
우리의 관계도
함께 죽어가고
있다는 엄연한
이 사실이다.
그래서 신앙은
거래가 아니다.
나와 너
우리의
욕심이
너무 크다.
욕심에는
길이 없다.
욕심으로
참으로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다.
포도밭에서
다시금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삶의 질서와
욕심의 절제를
다시 배운다.
하느님께서는
서로를
죽이고 또 죽이는
욕망의
포도밭이 아닌
함께 행복한
포도밭이길
간절히 원하신다.
이 사순시기
우리 삶의
포도밭을
다시 보게된다.
하느님께서
잠시 맡기신
생명의
포도밭을
잘 가꾸어
하느님께
돌려드릴
일이다.
하느님께
지나친
우리의
욕심과
파괴하는
무질서를
봉헌한다.
관계가
새로워져야
포도밭도
새롭다.
모든
관계와
포도밭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가장 좋은
흠숭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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