훼르난도 보테로, Woman Crying 1949
우는 여자
글쓴이 : 반숙자 베르나데트 l 수필가
울어 에일 슬픔도 없으면서 울고 싶은 날이 있다.
울고는 싶어도 울어지지 않는 그런 날 골방에 들어가 화집을 펴본다.
꽃봉오리 같은 아들을 떠나보낸 어머니가 아들을 기리는 마음으로 세웠다는
경주의 선재미술관에서 한 그림과 조우했다.
화제가 “우는 여자”라는 그림은 콜롬비아의 화가 훼르난도 볼테르의 작품이다.
볼테르하면 부풀린 듯한 그림이 특징으로 상식을 파괴하고 관념을 벗어버린
특색 있는 화가라고 알고 있었는데 마침 그곳에서 전시회를 열고 있었다.
사람과 동물은 물론 심지어는 나무나 과일, 꽃까지 그의 시선이 닿는 대상은
풍만하고 과장되어 정물까지도 특별한 유머감각과 남미적 정서를 보여 준다.
종이에 수채화로 1949년에 제작된 그림은
굵은 선과 강한 색채만으로 우는 여자를 표현했다.
머리채가 긴 여자가 무릎은 세워 잡고
또 한손으로는 얼굴을 가린 채 벽에 기대어 흐느끼고 있다.
눈물은 보이지 않고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지만 얼굴 전체를
가리다시피 한 손의 표정까지도 격렬한 슬픔을 느끼게 한다.
전라(全裸)의 모습으로 우는 여인,
혼자 울어본 사람이라면 이 여자의 슬픔에 충분히 공감이 갈 것이다.
그런데 그 그림을 보는 순간, 내 마음속에 노래 한 소절이 새어나왔다.
“사랑의 기쁨 어느덧 사라지고 ... 슬픔만 남았네 ”하는 마르티니의 곡이다.
그림의 분위기가 노래의 이미지와 잘 어울렸다.
또 한 그림은 얼굴 표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늙지도 젊지도 않은 여자가 눈을 내리감은 채 울고 있다.
찌푸러진 미간, 볼 위로 방울져 내리는 눈물, 반쯤 벌린 입을 수건으로 막고 있다.
사실적인 표현인데 그림을 보고 있으면 깊은 내면으로부터 표출된
진한 비애가 느껴지며 한참 뒤에는 이상한 카타르시스를 맛보게 된다.
슬픔도 녹아내리면 이슬이 되는 것일까.
속시원히 울어 본 것이 오래된 것 같다.
어려서는 동네에 초상이 나서 꽃상여가 나가면 상주보다 더 울어서
이상한 애라는 핀잔도 들었다.
조금 자라서는 영화를 보며 너무 울어서 줄거리도 잊어먹는 일이 많았다.
한때는 가족들과 텔레비전을 시청하다가도 돌아앉을 때가 많았고
신문에서 감동적인 기사를 만나도 ,
병석에서 일어섰다는 친구의 소식에도 눈물을 흘렸다.
반가워도 안타까워도 솟아나던 눈물, 내 설음에 울기보다
남의 일에 더 아파하고 울던 때가 분명 있었는데 눈물이 사라져간다.
눈물이란 게 과학적으로 따지자면 미세한 분자의 염분과 산소와 수소라지만
마음이라는 강을 건너 표출되는 감정의 발산이고 보면
눈물이 사라진다는 것은 마음이 사라진다는 또 다른 의미가 아닐까 싶다.
눈물이 메마르는 것처럼 감동이 사라진다.
어떤 대상에 순수하게 몰입될 때 감동이 되는데
명색이 작가라는 입장에서 보면 순수가 사라진다는 것은 애석한 일이다.
눈물 중에도 자기의 허물을 뉘우치는 눈물이 가장 값지다는 이야기도 있다.
회개의 눈물일 터이다.
어떤 이는 여자의 눈물에 속지 말라고 경고를 한다.
그러나 나는 울고 있는 사람은 악인이 아니라고 믿는다.
웃음에는 헛웃음이 있지만 울음에는 헛울음이 없다.
가끔 연속극에서 우는 장면을 볼 때면 탤런트가 그 작품에
동화되었는지 아닌지를 우는 장면에서 알 수 있다.
감정은 맨숭한 채 인위적으로 액체를 눈에 넣어 흘리는 경우 시청자들은 가짜구나 한다.
이 시대는 눈물이 없다.
자기 자신을 위해 흘리는 눈물보다
남을 위해 흘리는 눈물이 많을 때 사회가 정화되고
정의가 살아나겠지만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울 때가 왔다.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세상이고 보니
울 필요가 없겠으나 눈물과 더불어 빵을 먹어본 사람이 아니면
인생의 참맛을 모른다는 명언의 의미를 새겨 보아야할 것이다.
나는 오늘 마르티니의 ‘사랑의 기쁨‘을 흥얼거리며 화집을 들고 골방으로 들어간다.
사랑은 슬픔만 남기고 흘러갔고 가슴은 텅 비어버린 오후,
이제야말로 나를 위해 울 때가 오지 않았나 싶다.
언제 하루 날을 잡아 국민전체가 한바탕 울었으면 좋겠다.
여자가 울고, 남자도 울고 노인도 울고 대통령도 울고,
야당 당수도 울고 각료도, 법조인도, 기업주도 노동자도 대학생도
그리고 종교인까지 진정으로 자기 마음 안으로 걸어 들어가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으면 한다.
그리고 눈물에 씻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해 보면 어떨까.
-「 이쁘지도 않는 것이」 中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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