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참모습, 익숙하지만 낯선 존재
우리 모두는 자신의 참모습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궁금해하지만 정작 그 모습을 보는 것은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신의 참모습이 자신이 바라는 모습과 어긋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사진작가 신디 셔먼(Cindy Sherman, 1954~)의 작품은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모습과 이러한 실상의 괴리를 너무나도 잘 보여준다.
자신을 모델로 하여 찍은 ‘무제(untitled)’라는 제목의 일련의 작품들은 그녀를 마치 헐리우드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나타낸다. 다소 극단적인 방식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모습은 우리들 모두가 현실 속에서 자신이고자 하는 모습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방식대로 자신을 상상하며, 이렇게 상상에 의해 만들어진 자신에 맞추어 욕망을 통제하며 행동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신디 셔먼은 이와는 다른 일련의 작품들 속에서 이러한 모습과 대비되는 추악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그녀는 썩은 음식물 혹은 구토한 오물 등을 사진에 담기도 하며, 심지어 어딘지 모르게 기괴스러운 인형을 사진에 담기도 한다. 이 기괴한 인형은 인간과 매우 흡사하지만 쳐다보기 흉측할 정도로 섬뜩한 충격을 준다. 아마도 이 작품의 기원은 독일의 작가 한스 벨머(Hans Bellmer, 1902~1975)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한스 벨머는 자신이 직접 인간처럼 사지를 꺾을 수 있는 구체관절인형을 제작하고 이를 사진에 담았다. 그의 작품은 매우 성적이면서도, 에로틱하다기보다는 역겹고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그의 작품이 에로틱하면서도 역겨울 정도로 충격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 작품이 우리들 자신 속에 내재한 앙면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의 작품 속에 나타난 구체관절인형은 우리와 너무나도 닮아 있기에 끔찍하고도 충격적인 것이다. 만약 우리와 전혀 무관하게 보이거나 실제로 무관하다면 이 작품을 보면서 충격도 받아야 할 어떠한 이유도 없을 것이다. 매우 익숙하지만 왠지 모르게 낯선 것 같은 이 느낌, 이것이야말로 어쩌면 자신 속에 감춰진 본연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프로이트는 이렇게 익숙하면서도 이질적인 것을 ‘익숙하지만 낯선(das Unheimliche)’이라는 용어로 표현하였다. 여기서 독일어의 어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unheimlich라는 독일어 형용사는 ‘은밀한, 비밀의, 사적인, 친근한, 고향과 같은’ 등을 나타내는 heimlich라는 형용사에 반대접두사 un을 붙인 것이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한다. 그것은 unheimlich에 반대접두사 un이 붙었지만 그 의미를 궁극적으로 파고들면 heimlich의 반대가 아닌 동일한 의미가 되어버리고 만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가장 익숙하고 친밀한 것이 가장 낯선 것이라는 뜻이다. 이 괴상한 변증법적 일치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리는 현실 속에서 의식의 통제와 검열을 받고 있을 때의 모습을 자신이라고 믿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의 모습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서 자아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경계한다. 그 모습이 진짜로 나에게 친밀한 나일까? 그것은 어쩌면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한 모습은 아닐까? 만약 현실에서 의식이 통제하고 있는 내가 진짜 내 모습이 아니라면, 어느 누구도 의식하지 않고 혼자 은밀하고 비밀스럽게 있을 때의 모습이 내 모습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모습은 자아나 의식의 통제를 벗어난 무의식의 모습에 가까울 것이다.
만약 그것이 나의 비밀스럽고도 은밀한 모습이라면 그 모습은 현실 속의 정돈된 나와는 거리가 멀다. 분명히 나의 모습과 어딘지 모르게 닮아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결코 내 의식이 감당할 수 없는 충격적이고도 이질적인 모습이다. 어쩌면 이 익숙하지만 어딘가 낯설고 기괴한 모습 속에 나의 참모습이 있는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나는 스스로 나라고 생각하지 않는 그 은밀한 곳에 존재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나의 참모습, 익숙하지만 낯선 존재 (보고 듣고 만지는 현대사상, 2015. 08. 25., 박영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