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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불교신문 신춘문예 당선작-단편소설 정유진 '목련의 잉태'
삽화=용정운
[단편소설 당선작]
목 련 의 잉 태
흰 속옷에 빨간 혈흔이 묻었다. 속옷을 갈아입고 누웠다. 서연의 눈이 번쩍 떠졌다. 침대 옆 시계가 11시 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두 시간의 짧은 잠이었지만, 깊은 어둠 속에서 빠져나온 것 같았다.
서연의 몸은 보이지 않는 자석에 이끌리듯 부엌 식탁으로 향했다. 그녀의 손은 핸드폰을 향해 뻗어갔고, 위치 앱을 열었다. 화면 속에서 파란 점이 깜빡거렸다. 그 점은 은우의 존재를 나타내는 유일한 증거였다. 집 근처 대형 병원 장례식장 앞, 십 차선 대로변. 파란 점이 깜빡일 때마다 숨이 막혔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왜 남편은 상점이 전혀 없는, 가로수만 늘어선 도로에 서 있을까? 그 생각이 든 순간, 서연은 다급하게 바지를 갈아입고 모자를 썼다. 잠바를 집어 들고 밖으로 나섰다. 서늘한 밤공기가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 장례식장까지는 택시로 금방 갈 수 있는 거리였지만, 이 시간에 택시 잡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걸어간다면 삼십 분은 족히 걸릴 거리였다. 택시가 손님을 내려주는 게 보였다. 서연은 달려가 택시 문을 잡았다.
“기사님, 병원 뒤 장례식장 입구까지만 가주세요.”
택시는 조용한 거리를 달렸다. 미터기의 숫자가 올라갈 때마다 누군가 서연의 심장을 끌어내리는 것 같았다. 이런 날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다른 층 복도에서, 영하 날씨에 주차장에서, 오늘은 십 차선 도로변에서. 회식이 있는 날이면 서연은 저녁 11시쯤부터 문자를 보내고, 답이 없으면 그를 찾아 나서야 했다. 술에 취해 정신을 잃고 쓰러진 그를 찾아내기까지, 저녁 시간 내내 가슴을 졸이고 있었다. 택시에서 내린 그녀는 횡단보도 앞에 섰다. 신호등이 바뀌기를 초조하게 기다리며 건너편을 봤다. 좌측으로 삼사십 미터 떨어진 곳에 경찰차 한 대와 경찰관 한 명이 보였다. 신호가 바뀌자마자 서연은 뛰기 시작했다. 십 차선을 내달렸다. 운동화가 아스팔트를 치는 소리가 점점 빨라졌다. 횡단보도 앞 주택단지 입구로 들어가는 작은 길에서 또 다른 경찰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여기 대로변에 술 취한 남자 보셨나요?”
경찰이 골목 안쪽을 가리켰다. 서연은 그곳으로 달려갔다. 고개를 숙이고 핸드폰을 든 채 흔들리는 남자의 뒷모습. 은우였다.
서연은 순간 어금니를 물었다. 그녀는 다가가 은우의 등을 치며 소리쳤다.
“도대체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집에 가자.”
은우는 고개를 들었다. 서연은 마치 누나처럼 서 있었다. 아니 어쩌면 누나는 서연처럼 서 있었던 걸까. 서연은 누나처럼 뭐든지 잘하는 여자였다. 기억이 뒤엉켜 있었다.
은우는 운구차 위에 앉은 흰 나비 한 마리를 보았다. 마치 누나가 마지막 인사라도 하듯, 나비는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 영산강에 누나를 뿌리던 날, 은우는 차 안에서 엄마의 울부짖던 소리가 차 안으로 밀려 들어오던 그 날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엄마의 그 울음을 온몸에 담고 지금까지 버텨왔다. 서연이 배에 주사를 맞을 때마다, 그는 도망치듯 밖으로 나왔었다. 누군가의 고통을 다시 지켜봐야 한다는 것이 그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배에 빨간 주사 자국 하나하나가 그의 부재를 증명하는 것만 같았다. 누나의 링거 바늘이 겹쳐 보였다. 은우는 느린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몸에서는 알코올 냄새가 풍겼다.
“그쪽 아니야! 큰길로 다시 나가야 택시를 잡지, 왜 반대쪽으로 가는 거야? 저쪽이라고!”
서연은 그의 팔을 잡아끌었지만, 성인 남자의 팔을 당겨 방향을 바꾸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들이 얼마를 걸었을까, 갑자기 택시 한 대가 나타났다. 서연은 망설임 없이 택시를 향해 달려갔다. 손님이 내리고 있었다.
“잠시만요 아저씨. 여기 가까운 곳이 집인데, 이 시간에 택시 잡기가 힘들어서요. 태워주실래요?”
서연은 마른침을 삼켰다. 택시 문을 열어놓고 비틀거리며 걷고 있는 남편 등을 힘껏 밀어 택시에 태웠다.
서연이 현관문을 열자, 은우는 거실에 그대로 쓰러져 코를 골며 잠들었다. 서연은 방으로 들어왔다. 시계는 새벽 세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까 남편이 있던 곳에서 가까운 파출소를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전화를 걸었다.
“저 아까 자정에 병원 앞 대로변으로 남편을 데리러 갔었던 사람인데요. 그때 파출소로 무슨 사건이나 싸움에 관한 신고가 있어서 가신 거였나요?”
“아니요. 사건 신고는 없었어요. 그 도로를 지나던 어느 운전자가 파출소로 전화했어요. 여기 십 차선 대로변에 사람이 쓰러져 누워있다고요. 길에 아무도 없고 새벽에 위험하니까요. 신고를 받고 출동해서 남편분을 댁에 모셔다드리려고 했지만, 집이 어디인지 말을 안 하셔서 모셔다드리지 못했어요.”
경찰관의 대답에 서연은 전화기를 꽉 쥐었다.
은우가 십 차선 도로에 쓰러져 있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서연은 문득 은우가 들려준 누나의 교통사고 이야기를 떠올렸다. 도로 위에 쓰러진 은우는 그날의 누나처럼 보였을까. 서연은 자신이 갑자기 눈이 떠지지 않았다면 어땠을지 생각했다. 그리고 온몸에 한기를 느꼈다. 전화를 끊고 서연은 멍하니 앉아 있었다.
두 시간쯤 자고 일어난 은우가 갑자기 일어나 방문 앞으로 와서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 지갑, 가방 어디 있어?”
서연은 몹시 화가 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당신 미쳤어? 왜 한밤중에 십 차선 도로에 누워있어? 죽고 싶었어? 죽고 싶어 환장했냐고!”
서연의 그 떨림이 은우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은우의 꿈속에서는 늘 누군가가 떠나갔지만, 지금, 이 순간 누군가는 봄을 기다리고 있었다. 서연은 매일 아침, 저녁 자신의 몸에 봄을 심고 있었다. 목련처럼, 언젠가는 하나가 아닌 둘이 목련꽃을 볼 것이라 믿었다.
“응”
은우는 망설임 없이 한 마디 내뱉는다. 단호하면서도 담담했다. 폭풍우 치는 하늘을 가르는 화살처럼, 그의 한 마디는 서연의 마음에 꽂혔다. 서연의 입술이 떨렸다. 그의 고백 같은 대답의 무게에 서연은 순간 숨을 멈췄다. 은우는 서연 뒤 창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바라보았다.
은우는 서연의 핸드폰으로 은행에 전화를 걸어 카드를 모두 정지시켰다. 은우가 숫자 버튼을 누를 때, 서연은 몇 시간 전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던 오른손등에 살이 까지고 피가 난 상처를 발견했다. 손바닥도 어딘가에 긁힌 듯 까져 있었다. 오랫동안 한쪽으로 누웠다 일어난 사람처럼 머리 한쪽이 눌려 있고, 등에 흙이 묻어 있었다.
카드를 취소한 은우는 옷을 갈아입고 안방 침대에 서연을 등지고 누웠다. 방은 긴장된 침묵에 빠졌고, 금세 은우의 잠자는 숨소리가 일정한 리듬을 이루며 방안을 채웠다.
거실로 나와 소파에 앉았다. 거실에 아침 햇살이 쏟아졌다. 하지만 어둠은 여전히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은우의 “응”이라는 한 마디가 그 그림자를 더욱 짙게 만들었다. 창밖으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방에서 은우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해”
은우가 잠결에 중얼거렸다. 누구를 향한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서연은 조심스레 방으로 들어가 이불을 끌어 올려 웅크린 은우를 덮어줬다.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시험관 시술로 매일 주사를 맞는 자신의 배처럼, 은우의 어깨는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그 단단함 아래 숨겨진 아린 기억을 서연은 어렴풋이 느꼈다.
거실 창가에 걸린 커튼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또다시 시작이다. 그녀의 배는 바늘을 기다리고, 그의 발걸음은 어제의 거리를 더듬을 것이다. 둘은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었다. 간격 없이 스며드는 숨소리가 방을 채웠다. 서연은 그 소리에 귀 기울였다.
한 시간쯤 자고 일어나 출근 준비하는 은우에게 말했다.
“어제 생리 시작했어. 내일 나 병원 가. 다시 시작이야.”
은우는 책상 위에 소지품을 챙겨 말없이 가방을 들고 현관문을 나섰다. 거실에 아침 햇살이 쏟아졌다.
*
다음날 서연은 병원을 방문했다. 진료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간호사가 이름을 불렀다. 의사는 초음파 먼저 보자고 하며 진료실 옆 공간으로 갔다. 반쯤 불이 커진 아늑한 공간에 모니터 두 대와 시술 의자가 있다. 의사는 초음파 기계로 난포 크기를 확인했다. 진료실을 나와 주사실로 갔다. 간호사가 건네는 흰 쇼핑백에 오늘부터 8일간의 시간이 담겨 있다. 차가운 주사기와 약은 서연의 체온을 기다리고 있었다. 체온으로 녹아들어야 할 얼음 같은 기다림이었다.
서연은 병원문을 나와 승강기를 탔다. 두 여자의 대화가 서연의 귀에 들려왔다. 한 여자가 물었다.
“저기 무슨 병원이야?”
“얘 못 낳는 여자들이 다니는 병원이래.”
그 말은 서연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약 봉투를 가방 깊숙이 밀어 넣으면서도, 누군가 자신의 비밀을 들여다보는 것만 같아 손끝이 떨렸다. 서연은 승강기에서 내리다 문득 삼 년 전 시골에 갔던 날이 떠올랐다. 결혼 후 처음으로 시어머니의 친척 집을 찾은 날이었다. 결혼식 때 많은 시댁 식구를 봤지만, 정신이 없어 다 기억하지 못했다. 두 번째 만나는 시이모님은 처음 보는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과일을 내놓으시고 잠시 후, 대뜸 물으셨다.
“왜 새끼 안 달고 왔나?”
은우는 배 주사를 한번 놔준 적이 있다. 이후 은우는 “내가 안 하면 안 될까”라는 말을 꺼낸 후, 다음날부터 출근 시간을 앞당겼다. 아침이면 서연이 무언가를 말하려 할 때마다 서둘러 현관문을 나섰다. 대신 식탁 위에는 매일 따뜻한 국이 놓여 있었다. 말 없는 미안함이었다. 은우에게 그녀의 배를 찌르는 일이 다른 남편들처럼 쉽게 용기 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주사약이 뱃속으로 들어갈 때 아파하는 그녀의 얼굴을 보는 일은 그에게 또 다른 고통이었다. 은우가 열두 살 때, 병실 누워있던 작은누나는 세 번의 다리 수술 끝에 떠났다. 병실에서 항상 주사기를 꽂고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던 창백했던 누나 얼굴이 떠올랐다.
*
다음날부터 서연은 의식을 치르는 사람처럼 준비해야 했다. 물약과 주사기, 알약들을 식탁 위에 가지런히 놓았다. 소독솜으로 배를 문지르자 아빠가 늘 하던 말이 떠올랐다. ‘네가 태어날 때 아빠는 이란에 있었어. 엄마가 네 발 사진을 보내줬지.’ 서연은 항상 자기 몸 어딘가에 엄마가 함께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지금도 몸에 새 생명을 심으려 할 때마다 엄마를 만나는 것만 같았다. 물약의 뚜껑을 열고 주삿바늘을 집어넣었다. 바늘 뒤를 잡아당기며 약을 주사기 안으로 옮겼다. 주사기 안으로 물약과 함께 “응”하던 은우의 목소리가 들어간다. 약통에서 주사기를 빼고, 작은 주삿바늘로 교체한다.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천천히 내쉬고 배꼽 아래 한 지점을 응시했다. 배를 불룩 앞으로 내밀고, 왼손으로 배꼽 아래 살을 힘껏 잡았다. 배꽃 같은 흰 피부 위 차가운 금속이 내려앉는다. 소독솜 한 장을 집어 배에 문지르며 심호흡을 다시 한번 길게 “후”하고 내뱉었다. 시계 초침 소리만 울려 퍼지는 정적 속에서 윗니로 아랫입술을 꽉 깨문다. 온몸을 아랫입술에 매달았다. 액체의 강이 흐른다. 검은 고무 패킹이 천천히 눈금을 하나씩 지나간다. 창밖의 달빛은 그녀의 얼굴을 비춘다. 바늘을 빼고, 소독솜으로 배를 닦는다. 서연은 잠시 눈을 감고 깊은숨을 천천히 내뱉었다. 주사기를 놓을 때마다 만남이 한 걸음씩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서연이 주사를 맞는 시간, 은우는 퇴근길에 들른 빵집 앞에 서 있었다. 은우의 코끝을 스치는 단팥빵 향기는 시간의 벽을 무너뜨렸다. 그 순간, 그는 다시 열두 살이 되어 있었다. 기억 속에서, 작은누나의 손을 잡은 그의 손은 지금보다 훨씬 작고 부드러웠다.
“누나 나 단팥빵 먹고 싶어.” 은우는 작은누나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엄마는 안 사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누나에게 먼저 말했다. 작은누나는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니까, 작은누나가 말하면 엄마는 들어줄 것 같았다. 작은누나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 우리 엄마한테 사달라고 해볼까?” 작은누나는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는 잠시 주저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누나 손을 잡고 엄마를 따라 걸었다. 골목길을 나와 큰 길가를 걸어 서방 시장으로 향했다. 세탁소와 방앗간, 양장점을 지나 사거리 빵집 앞으로 왔다. 엄마는 순간 머뭇거렸다. “오늘 말고, 다음에 사줄게. 그냥 가자.” 엄마는 몸을 돌렸다.
은우는 작은누나와 빵집 유리창 앞에서 고소한 냄새를 맡으며 잠시 멈췄다.
“은우야 가자.”
작은누나가 은우 손을 잡으며 말했다. 가게 앞을 지나 엄마가 간 길을 따라나섰다. 은우는 작은누나와 서로 밀치며 장난스럽게 걸었다.
그때였다. 뒤쪽 오르막길에 세워둔 용달차가 브레이크가 풀린 채 천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갑자기 들려온 비명, 쾅, 유리창 깨지는 소리. 용달차는 작은누나를 밀고 옷 가게 유지창을 부쉈다. 차체와 유리창 사이에 끼인 다리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 누나의 짧고 높은 비명에, 길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앞서 걸어가던 엄마는 순간 뒤를 돌아봤다. “현우야” 사거리에 울린 엄마의 외침과 다급한 발소리가 다가왔다. 어디선가 나타난 아저씨는 용달차를 잡으며 소리쳤다. “여기와 다 같이 차를 듭시다. 도와줘요!’
은우의 눈앞에서 과거와 현재가 겹쳤다. 빵집 유리창에 비친 그의 모습은 어느새 그 사거리에 서 있던 아이로 변해있었다. 은우는 그 자리에 서서 얼어붙었다. 사람들의 발소리와 외침이 사방에서 몰려들었다. 다 같이 한쪽에서 차를 들었다. 하나, 둘, 셋, 그리고 엄마가 누워있는 작은 누나를 안고 나왔다.
엄마의 흰색 꽃 치마는 누나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 은우의 코끝에 단팥빵 냄새는 사라지고 피비린내가 스쳤다. 사거리는 비명만이 가득했다. 엄마는 누나를 안고,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택시로 달려갔다. 은우는 순간 집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버스 정류장을 향해 뛰어갔다. 다리에 약간 피가 나고 있었지만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버스는 금방 도착했다. 버스 의자 손잡이를 잡고 서 있었다. 버스 안에 사람들이 은우의 다리를 힐끔힐끔 쳐다봤다. 은우는 창밖만 보며 빨리 집에 가서 알려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집을 향해 내달렸다. 아빠, 큰누나와 택시를 타고 시내 병원으로 갔다. 응급실 앞, 녹색 택시 한 대가 멈춰 서 있었다. 운전사는 담배 연기 사이로 응급실 입구를 살폈다. 뒷문이 열린 채로 있었고, 검은 시트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손님, 괜찮으세요?”
빵집 주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은우는 그제야 자신이 한참 동안 유리창 안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었고,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 네 죄송합니다.” 은우의 목소리는 작고 쉬어 있었다.
그는 빵집을 뒤로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해 질 녘 하늘은 완전히 해가 저물지도 완전히 떠올라 있지도 않았다. 집이 가까워질수록 은우의 마음은 더욱 복잡해졌다. 집 현관 앞에 선 은우는 잠시 눈을 감았다. 깊은숨을 내쉬며, 그는 과거의 기억을 밀어내려 애썼다. 하지만 그의 손에 느껴지는 문손잡이의 차가움은 그날 버스의 손잡이를 꼭 쥐고 있던 열두 살 때 손을 떠올리게 했다.
*
새벽 여섯 시, 알람 소리가 울렸다. 난자를 채취하는 날이다. 8일 동안 맞았던 주사와 약이 끝났다. 서둘러 나와 병원에 도착했다. 번호표를 뽑는 서연의 손가락은 미세하게 떨렸다. 두 명의 대기. 상담실에서 간단한 신분 확인을 마치고 나왔다. 차트 번호, 부부의 이름, 의사명 그리고 바코드가 찍혀진 분홍색 종이띠가 그녀의 오른쪽 손목을 감쌌다.
대기실에서 분홍색 가운을 입은 여자들이 모여 있었다. TV 화면만이 깜박거렸고, 여성들은 각자의 침묵 속에 잠겨있었다. 마치 봄날 분홍색 꽃들이 새로운 봄을 준비하는 듯 각자의 침묵 속에서 생명의 계절을 기다리고 있었다. 서연의 이름이 불렸다. 순간 그녀의 심장은 한 박자 빠르게 뛰었다.
커튼이 쳐진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삼십 분쯤 지나서 그녀의 침대가 시술실로 밀려들어 갔다. 서연은 복도 천장의 형광등을 바라보았다. 그 빛은 마치 또 다른 세계로 가는 문 앞의 경계를 비추는 듯했다. 환한 조명이 있는 수술실에 다섯 명의 간호사가 서 있었다. 그들은 동시에 시술대로 다가왔다. 눕는 것을 도와드린다고 하며 손길은 부드러웠지만, 시술대 위에서 서연의 몸은 굳어갔다. 다리 쪽에 있던 간호사는 다리를 묶는다는 말과 함께 다리걸이에 묶었다. 이어서 팔도 묶었다. 팔과 다리가 묶이는 순간, 서연의 체온이 차가운 시술대에 닿았다. 간호사는 서연의 배 위로 작은 초록색 커튼을 쳤다. 머리 위쪽에 서 있던 마취과장 목소리가 들려왔다.
“금방 끝날 거예요. 마취약이 들어갑니다.”
그 말과 함께 호흡을 깊게 들이마시자, 약 냄새가 코와 목을 찔렀다. 마치 봄비에 목련꽃이 떨어지듯, 마취제가 의식을 떨어뜨렸다. 소독약 냄새가 하얀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간호사가 움직이는 소리, 시술 도구가 부딪치는 소리가 그 안개 속을 헤집고 지나갔다. 형광등 불빛이 눈꺼풀 위에서 춤을 추다가, 서서히 멀어져갔다. 서연은 눈을 감았다. 그녀는 6살 이후 단 하루도 죽음을 잊어본 적이 없다. 엄마가 그랬듯이, 나도 그렇게 가면 어쩌지. 떠나간 사람 뒤에서 남겨진 사람이 바라봐야 하는 떠난 빈자리의 그림자는 끝이 보이지 않는 불가설불가설(不可說不可說轉)이었다. 과거를 현재로 가져오지 않으려고 했다. 코에 올린 산소호흡기가 기억을 되돌린다.
서연은 눈을 떴다. 산소 호흡기와 각종 측정기가 그녀의 몸에 연결되어 있었다. 모니터에서 갑자기 삑삑 소리가 났고, 간호사가 달려와 혈압을 확인했다. 서연의 침대 옆 커튼 너머로 의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 채취했는데 난포가 안 나왔어요. 가끔 세포질이 나오기도 하고 공난포가 나오기도 합니다. 힘내시고 다음 달 생리 시작하면 다시 병원에 오세요. 그동안 주사 맞느라 고생했어요.”
의사가 가고, 잠시 후 간호사가 여자에게 설명해 준다. 여자는 침대에서 일어나 잠시 앉아 있는 듯했다. 곧이어 슬리퍼를 신고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의사는 서연의 침대로 “오늘 세 개 채취했어요. 수고했어요”라고 말한 뒤 갔다. 간호사가 서연에게 엉덩이를 들고 다리를 벌려보라고 한다. 몸 안에서 삼십 센 치쯤 되는 거즈를 쭉 빼낸다. 몸에서 빠져나가는 이물질이 느껴지는 불편함에 서연은 미간을 찌푸렸다. 주의 사항을 듣고 처방전을 받고 나왔다. 십 년째 반복되는 이 시술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며칠 만에 찾은 미술실, 서연은 묵묵히 붓을 움직였다. 수업이 끝나고 뒷정리하는 동안 교실 뒤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공기를 가르며 날아왔다.
“인물화를 정말 잘하네. 색감이 외국 스타일이야. 어쩐지 외국에서 좀 살다 온 것 같아….”
붓을 씻던 서연의 손이 잠시 멈췄다. 육십 대 여성의 칭찬이 길게 이어졌다가, 마지막 한 마디가 등 뒤에 날카롭게 꽂혔다.
“그런데 서연 씨는 일부러 아이를 안 가진 거예요, 아직 안 생긴 거예요?”
여성은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친구에게 말을 이어갔다. “내가 젊었을 때 말이야. 결혼하고 얘 없으니까 사람들이 무시하더라고. 아기 낳고 나니까 무시하지 않더라고.”
서연의 손등에 물방울이 떨어졌다. 붓에서 흘러내린 물인지, 다른 무언가인지 알 수 없었다. 가방을 들고 먼저 가보겠다는 인사를 하고 나왔다. 2월의 찬바람이 볼을 스쳤다. 서연은 걸음을 재촉했다. 결혼 생활 오 년쯤 되었을 무렵, 외할머니댁에 갔던 날이 떠올랐다. 구십 세가 되신 외할머니는 여전히 농사일하실 만큼 정정하셨다. 절을 마치자마자 외할머니가 물었다.
“밥값은 안 하나?”
서연은 순간 말을 잃었다. 방 밖으로 나와 거실 퇴청 마루에 앉아 있다가 부엌에서 엄마가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밥 먹을 테니, 밥상을 차리라는 것이다. 냉장고를 열어 반찬을 꺼내 접시에 담으면서도, 서연의 머릿속에는 외할머니의 말이 맴돌았다. 밥값. 그녀는 아직 그 값을 치르지 못한 것이다. 속이 불편하다며 식사를 거른 서연은 마당 우물가로 가 손을 씻고 세수했다. 우물 위를 지나는 빨랫줄에 걸린 수건 하나를 잡아 얼굴을 대충 문지르고 대문을 나왔다.
대문을 나서자, 골목길에 강아지 한 마리가 새끼 셋과 앞으로 간다. 서연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길에 지나가는 개도 세상의 유기체적 순리 질서 속의 조화로 돌아가고 있다. 그 순리를, 그녀는 주삿바늘로 찾아가고 있었다. 시장기가 뱃가죽을 스쳤지만, 발걸음을 돌리지 않았다. 담장에 막혀 미로처럼 이어지는 골목길처럼, 그녀의 앞에 놓인 길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
배양실에서 3일간 자란 배아를 이식하는 날이다. 새벽 여섯 시, 하얀 커튼 사이로 여명이 스며들 때 서연은 이미 깨어있었다. 병원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무거웠지만, 새벽빛이 어둠을 밀어내는 듯했다.
병원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간호사가 한 여성의 이름을 불렀다. 중년 여자와 대화를 나누던 젊은 여성이 일어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중년 여성이 서연에게 다가왔다. “우리 딸이 오늘 이식인데 뭘 먹어야 착상이 잘 되나요?” 서연은 숨을 참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때 간호사가 서연의 이름을 불렀다. 이름이 불리는 순간, 삶의 새로운 문턱 앞에 선 것 같았다.
“서연 님 많이 기다리셨죠.”
간호사를 따라 시술실로 들어갔다. 간호사는 ‘오늘은 마취 없이 이식 진행하니까, 하의만 모두 탈의하시면 돼요’라고 설명했다. 서연은 탈의실에서 옷을 벗고 무릎까지 오는 분홍색 가운을 걸쳤다. 일회용 위생 모자를 쓰고, 대기실로 들어가 침대에 누워 기다렸다. 시술실로 들어서서 시술대에 올라 누웠을 때, 발끝이 차가워졌다. 파란 마스크의 간호사가 다가와 손을 잡아주었다. 그 따뜻한 온기에 불안한 마음이 조금 누그러들었다.
삽화=용정운
“이서연 님 안녕하세요.” 서연의 발아래 쪽에서 모니터를 보던 의사가 말했다. “화면을 보시면 세 개의 배아가 보이시죠? 상태가 아주 좋은 상급 배아들입니다. 이 세 개를 이식할 건데, 금방 끝날 거예요.”
서연은 왼쪽 벽 디지털시계의 빨간 숫자를 보았다. 10시 32분. 오른쪽 모니터의 배아를 보며 문득 여덟 장 꽃잎의 목련이 떠올랐다.
의자 바퀴 소리와 함께 의사가 서연의 다리 사이로 다가왔다. “소독합니다.”라는 말과 함께 차갑고 단단한 의료기구가 몸 안으로 무겁게 밀려 들어왔다. 무언가를 돌리는 소리가 나며 몸 안의 통로를 열었다.
의사의 “준비되었습니다”라는 말이 떨어지자, 간호사가 무균실에서 배아를 건네받았다. “이서연 님 배아 들어갑니다”라고 크게 외치며 의사에게 건네주었다. 서연의 손을 잡은 간호사가 다시 본인 이름과 남편 이름을 말해보라고 묻는다. 몸 안으로 가느다란 관이 들어오는 느낌이 났다.
1분이 지나 시계는 10시 33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단 1분 만에 서연은 혼자가 아닌 둘이 되었다. 서연은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하얀 목련을 보듯, 모니터 속 배아는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우주의 어둠 속 반짝이는 별처럼, 생명은 한 점 빛으로 시작되었다. 겨울 끝에 피어나는 목련처럼, 어둠을 뚫고 나타나는 별처럼, 이 생명도 긴 기다림이 필요했다. 목련은 겨울을, 별빛은 수천 광년을, 생명은 수많은 시술의 시간을 견뎌야 했다. 마침내 그 억겁의 시간을 뚫고 나온 별을 품은 듯했다.
“화면에 여기 보이죠? 자궁 한가운데 잘 들어갔습니다.”
그때 문득 기억이 되살아났다. 여섯 살 서연에게 엄마는 내년에 목련꽃을 다시 보자고 했다. 그리고 엄마가 사라진 자리에 긴 그림자가 드리워졌고, 그 그림자는 지금까지 그녀를 따라왔다. 이제 그녀는 그림자를 지우는 대신, 그 속에 작은 빛을 심으려 했다.
“선생님, 왜 저렇게 하얗게 보이죠?”
“초음파로 보기 때문에 그래요.”
그녀는 몸 안에 들어간 그 작은 생명체를 생각했다. 그것은 단순한 세포 덩어리가 아니었다. 그 안에는 은우가 열두 살에 보았던 병실에 누워 있던 창백했던 누나의 얼굴과 서연이 엄마와 함께 마지막으로 갔던 동물원과 목련 나무 아래 떨어진 목련꽃을 보던 시간이 들어가 있었다. 심장이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DNA 정보만 있는 별 같은 배아를 바라봤다. 모니터 안에서 하얗게 빛나는 별, 인간이 되기 위해 모든 정보가 담긴 최초의 수정체. 꽃잎 여덟 장이 겹쳐있는 듯한 8세포기 안에는 은우의 기억과 서연의 기억이 담겨있었다. 잊지 못한 인연과 아직 오지 않은 인연 사이에서 서연은 기다리고 있었다.
이동식 침대로 옮겨간 서연에게 의사가 말했다.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랍니다.”
간호사는 이불을 덮어주고 서연의 침대를 다시 대기실로 옮겼다.
이식 다음 날부터 그녀는 주사 자국을 더듬어가며 다음 주사를 놓을 부드러운 곳을 찾았다. 배 안에 딱딱하게 뭉친 근육을 피해 가며 주사를 놓았다. 인연은 가만히 기다리면 만나는 지는 게 아니었다. 질정과 알약, 투명한 액체가 온몸에 퍼져야 만날 수 있는 것이었다. 수십 번도 넘게 한 배 주사는 처음처럼 낯설고 떨렸다. “와줄래… 와줄래…” 낮고 작은 목소리로 읊조리며 주사 안으로 속삭임을 실었다.
그녀의 배에 남은 멍 자국처럼, 은우의 마음에도 지워지지 않는 자국이 있었다. 은우는 아침마다 일찍 일어났다. 출근 시간까지 두 시간이나 남았는데도, 일찍 일어나 책상에 앉아 일을 시작했다. 식사 시간이면 은우는 항상 텔레비전을 켜두었다. 정적을 견디지 못하는 듯했다. 서연은 가끔 그가 밥을 먹다 말고 허공을 응시하는 것을 보았다. 그럴 때면 그의 숟가락질 리듬이 열두 살 소년처럼 느려졌다. 그의 기억은 아직도 그날에 갇혀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서연은 난임 여성들의 온라인 카페에 접속했다. 화면을 훑어보던 중 공지 사항이 눈에 들어왔다. 다음 주에 시에서 하는 시장님과의 간담회를 연다고 적혀 있었다. 며칠 후 간담회가 열리는 강당에 도착하자, 입구에는 두 가지 색의 스티커가 놓여 있었다. 파란색은 사진 촬영을 허용한다는 뜻이었고, 빨간색은 얼굴을 가려달라는 의미였다. 서연은 여성 대부분처럼 빨간색 스티커를 가슴에 붙였다. 강당 안에는 이미 백여 명의 여성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두 여성의 발표가 끝나자, 시장이 참석자들의 의견을 듣겠다고 했다. 객석에서 한 여성이 떨리는 목소리로 마이크를 잡았다.
“저는 서울에서 전세를 살다가 월세로, 그리고 지금은 경기도로 밀려났습니다. 시술비를 감당하기 힘들어요.” 다음 마이크를 받은 여성은 “지방에서 서울까지 왔다 갔다 하는 것도 벅찹니다. 채취하는 날은 전날부터 병원 근처에서 묵어야 하는데….” 목소리가 흔들렸다.
그곳에는 시술비로 쪼들린 살림과 약으로 불어난 체중과 반복되는 실패로 자존감을 잃어가며, 우울증과 스트레스로 사람들을 피해 혼자 지내던 서연 같은 여자들이 모여 있었다. 회사에서, 친구 모임에서, 친척 사이에서 혼자만 아이 없는 여자로 남겨진, 외로운 싸움을 하는 여자들이었다.
마지막으로 한 여성이 마이크를 잡았다. 등에는 아기를 업고, 한 손에는 여섯 살쯤 된 아이 손을 잡고 있었다.
“저는 서른 번 가까이 시험관 시술 끝에 두 아이를 가졌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같이 긴 그 시간이 얼마나 힘든 시간인지 압니다. 오늘 이 자리에 아이들을 데려왔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 앞에 제 아이를 데려오는 것이 조심스럽지만, 그래도 용기를 내어 데려왔습니다. 나라에서 지원을 더 해주면 우리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고, 꼭 끝까지 해내서 엄마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입니다. 저처럼 용기를 내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여성들을 도와주시라고요.”
여자의 떨리는 목소리에는 단단한 힘이 실려있었다. 서연은 자신의 배를 무의식적으로 쓰다듬었다. 놓을 수 없는 이름, 함께 할 수 없는 이름, 기다리는 이름. 그 단어가 가슴 한쪽에 스며들었다. 간담회를 마치고 나오는 길, 쌀쌀한 바람이 얼굴에 스쳤다. 집으로 가는 길에 은우에게서 문자가 왔다. ‘오늘은 조금 일찍 들어갈게.’ 서연은 알았다고 답했다.
서연이 현관문을 열었을 때, 은우의 신발이 보였다.
“밥은 먹었어?”
서연이 물었다. 은우는 거실 소파에 앉아 고개를 끄덕였다. 서연은 반찬 두세 가지만 꺼내 저녁을 먹기 시작했다. 은우는 입을 열었다.
“나 할 말 있어. 사실 그날 말이야….”
서연은 그의 옆 모습을 바라봤다.
“그날 심리상담이 있는 날이었어.”
소파에 깊숙이 앉은 그처럼 목소리도 낮고 깊었다.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말했어… 상담 몇 개월 만에 그날 일을… 작은누나 이야기. 삼십 년이 지났는데도 그날은 지금도 영화의 한 장면처럼 선명해. 부모님도 큰누나도 내가 이렇게 선명하게 그날을 기억한다는 걸 몰라. 지금까지 한 번도 말한 적이 없거든. 그런데…”
은우가 잠시 말을 멈췄다. 그의 손가락이 불안하게 움직였다.
“선생님이 그러시더라. 어떻게 그날을 잊지 못하고 살았냐고 힘들었겠다고 하셨어. 그날 처음 말하고, 술을 마셨어…. 그동안 혼자 안고 있던 게 너무 무거웠나 봐.”
숟가락을 놓고 김이 올라오는 흰 밥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며칠이 지나고 은우의 말투가 편안해진 것 같았다. 아침을 같이 먹을 때도 멍하니 어딘가를 응시하지 않았다. 이식하고 착상을 돕는 자가 주사를 맞은 지 12일째 되는 날, 서연은 첫 피검사를 받기 위해 병원으로 향했다. 채혈실이 여는 여덟 시에 맞춰 도착했다가, 채혈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결과가 나오는 오후 네 시까지 초조하게 시계만 들여다보았다. 전화를 끊고 서연은 멍하니 식탁의 빈 잔을 바라보며 한참을 앉아 있었다.
약을 마지막으로 먹은 지 보름이 지났다. 새벽녘에 문득 눈을 떴다. 네 시였다. 남편은 옆에서 자고 있었다. 조용히 거실로 나와 편지지 한 장을 펼쳤다. 서연은 펜을 잡았다.
“보고 싶은 내 동생에게, 은우야 오랜만이야. 우리 너무 재미있게 놀았는데, 내가 인사 못 하고 떠나왔어, 미안….” 쓰다가 멈추길 여러 번, 새 편지지를 꺼내 다시 시작했다. 마지막 줄을 쓰고 편지를 접어 노란 봉투에 넣었다. 봉투 겉면에 “사랑하는 내 동생에게”라고 썼다. 서연은 다시 침대로 돌아가 누웠다.
새벽 여섯 시쯤 은우가 일어나 거실로 갔다. 희미한 거실 불빛과 은우의 불규칙한 숨소리가 안방으로 새어 들어왔다. 서연은 눈을 떴다가 다시 감았다. 거실에서 들려오는 숨소리가 잠든 새벽 공기를 살며시 흔들었다. 서연은 배를 쓰다듬었다. 창밖으로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희미해지는 자국들처럼, 새벽 어스름도 걷히고 있었다. 하늘에 떠 있던 별이 사라지고, 아직 앙상한 목련 가지에도 봄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당선소감 / 정유진
정유진 님
힘든 이들과 나누는 기쁨
학창 시절 시인이 되고 싶어 문창과를 갔습니다. 하지만 주변의 뛰어난 문학도들 속에서 나는 문학을 사랑하는 독자로 남아야지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전공을 미술사로 바꾸었습니다. 미술 작품에 새겨진 인간의 삶을 연구하며 글을 썼습니다. 다른 길을 갔지만 글쓰기라는 테두리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않은 또 다른 글쓰기였습니다.
그렇게 독자로 문학의 언저리를 돌던 어느 날 큰 쓰나미 같은 파도가 나를 떠밀었습니다. ‘이런 삶의 무게로 힘들어하는 이들이 있다고, 그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외치고 싶다.’ 그리고 그 외침은 당선이라는 메아리로 되돌아왔습니다.
이제 무거운 가방을 메고 등산길 초입에 서서 한 걸음 뗀 기분입니다. 걸음걸음, 매 순간 정진하는 마음으로 나아가겠습니다. 부족한 글을 뽑아 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립니다. 곁에 있는 남편에게 그리고 낳아주신, 키워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기쁨은 기쁨이 아닌 위로로 지금도 어디선가 힘들어하는 모든 이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심사평 / 한승원 소설가
한승원 소설가
죽음과 고통스러운 새 생명 잉태 대비시킨 신선한 감각
소설은 거짓말 이야기(허구)를 동원하여 인간의 ‘참 삶의 길’을 암시하는 형태이다.
그리스 소설가 니코스 카잔자키스(Nikos Kazantzakis)는 소설가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한심한 영혼아, 너는 돈을 주고 빵 고기 포도주를 사먹는 것이 아니고, 하얀 종이에 빵 고기 포도주라 쓰고 그 종이를 먹는구나.”
이 말에는 깊은 역설적인 뜻이 들어 있다. 소설가는 비현실적인 사람이다. 비현실적인 거짓 이야기를 동원하여 현실적인 사람들의 비틀어진 영혼을 올곧게 바로잡아주는 것이다.
백편의 응모작 가운데서 <어머니의 초록바다>, <푸른 앵무새>, <아들이 인도로 간 까닭>, <메리, 워리, 쫑>, <우물마루 위에서>, <목련의 잉태>를 본선에 올리고 그것들을 다시 깊이 읽었다.
그 결과 <목련의 잉태>가 모든 면에서 빼어나 쉽게 당선작으로 결정할 수 있었다. 다른 4편은 문장이 선선하지 못하거나 소설작법을 제대로 터득하지 못한 것들인 반면 이 작품은 닭들 가운데 봉이라 할 만하다.
문장이 안정감 있고, 틀린 문장, 어색한 표현이 없고 비유가 적절하다. 문장에 속도감이 있고, 아름답게 승화 시키는 예술적인 감수성도, 전체적인 짜임새도 믿을 만하다. 신인으로서 소재 선택도 잘 했다 싶고 주제도 튼실하다.
심사자는 흠결을 찾을 수 없었다. 민족적인 인구 소멸의 위기에 봉착한 현 시점에서 심사자는 즐거운 마음으로 이 작품을 선택했다.
일단 응모나 해놓고 보자는 식의 무책임한 작품들이 많은데 이 작품은 모범이 될 만하다.
당선작가에게 축하하고 건필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