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독일의 국민들은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처럼 해외에 큰 식민지를 구축하기를 원했다. 몇 년 전 대독일제국의 재상이 된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식민지 구축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원 역사와는 달리 다민족국가를 총 포괄한 대국이 된 독일의 국민들은 영국, 프랑스를 제치고 세계 제 1의 식민지 구축 국가로 우뚝 서길 바랬다. 그래서 정부는 국민들의 의견을 수렴, 오만령 잔지바르를 뜯어낼 준비를 하였다.
외정 중에서도 내치에 힘쓰기 위해 노르트라인에 기본 산업 육성을 지시했다.
독일 제국은 제국 내 소수민족들의 적극적인 동화를 지향했다. 그때문에 소수민족들의 특성이 대독일제국에 영향을 끼쳐 한동안 연구 속도가 느려지게 할지라도...
독일에서 새롭게 출세하기 시작한 관료계급과 전통적인 융커를 중심으로 한 족벌세력의 격돌은 대독일의 사회 개혁 욕망을 꿈틀거리게 만들었다.
자유주의자가 상원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고, 여당인 보수당은 황제의 엄명만을 믿고 개길 뿐이었다. 자유주의자들의 열망에 따라, 대독일 제국은 포로의 인격적 대우 등을 강조하는 제네바 협정에 비준했다.
1년 후, 독일은 오만을 상대로 선전포고했다. 대독일의 해외 확장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제대로 된 군이 없는 오만 따위야 한방이었다.
곧 독일은 고대하던 해외 거점 확보에 성공했다. 덴마크에게서 강탈한 가나와 점령한 줄루에 이은 성과였다.
독일의 우월한 공업력은 무역박람회를 통해 전 세계에 널리 알려졌다. 황제는 자기 개인 돈을 기부하여 박람회의 성공적인 개최를 지원하였다.
독일의 대표적인 군수기업인 크루프 가문은 노르트라인 지역에 제철소를 짓길 바랬다. 하지만 현 정당인 보수당은 정부의 공장건설은 반대하는지라 일시적으로 국가에 의한 국내 공장 건설을 지지하는 국민당을 여당으로 삼았다.
그리고 쾰른에 크루프 가문이 고대하던 제철소가 들어섰다.
자유주의자들의 득세는 자유 언론운동의 대대적인 열망으로 발전했다. 이걸 억제했다가는 뭔 일이 터질지 몰랐다.
결국 정부는 아니꼽긴 해도 자유 언론 개혁을 승인했다.
이즈음 프랑스에서 왕가의 계곡을 발굴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것은 독일에게 있어서 외부에 대한 신비로운 느낌과 배아픔(...)을 동시에 가져다주었다.
그래서 독일 황제는 우날라스카 식물 조사대를 보내기로 했다.
비스마르크가 원하던 대로 유럽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한참을 잉여롭게 보냈건만... 프랑스는 잃어버린 엘사-로트링겐을 다시 알자스-로렌으로 바꾸기 위해 전쟁을 걸었다.
독일 군대는 허겁지겁 프랑스의 노도와 같은 군세를 막아야만 했다. 근데 그 와중에 배후에서 러시아가 원군으로 프랑스를 도와주었다. 그때문에 동프로이센이나 트란실바니아 일대가 쑥밭이 되게 생겼다. 이는 독일의 융커들이나 여타 토지귀족들을 격발시켰다.
독일 귀족들과 자본가들의 분노를 이기지 못한 비스마르크와 외교부는 러시아에 복수를 할 겸 정당화를 걸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 들통이 나는 바람에 악명을 먹어야만 했다.
하지만 프랑스군은 한층 더 업그레이드된 독일군에게 살살 녹아났다. 그 와중에 토스카나 지방에서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이 일어났다.
러시아군의 배후 유린. 이것으로 독일은 영원히 러시아를 믿지 못하고 한 번 당한 것을 열배로 갚겠노라고 맹세했다. 그리고 이 틈을 타 득시글거리는 대독일의 인민들을 러시아 땅으로 밀어넣고 슬라브인들을 우수한 게르만 민족화 시키자는 신 동방식민운동이 촉발되었다. 러시아는 독일인들 내면의 탐욕과 분노에 불을 당겨버린 대가를 두고두고 치를 예정이었다.
전격적으로 파리가 다시 함락되자 프랑스는 평화를 청했다. 독일은 프랑스 전토를 불태우고 싶었지만, 영국이 끼어들까봐 두려웠고, 곧 러시아를 다시 패야 했기 때문에 '일단은' 수락했다. 물론 독일인들의 분노는 여전했지만.
프-러 동맹은 독일 침공이 안되니까 스페인에게 화풀이를 했다. 독일인들은 프-러동맹의 극혐성 짓거리를 보고 미개하고 영악한 라틴-슬라브 놈들이라고 조롱했다.
...그러는 독일도 크라코프를 구실로 러시아를 전쟁에 다시 끌어들이려는 교활한 짓거리를 했지만.
그리고 예정된 영토 요구가 이어졌다. 목표는 폴란드 분할 당시 러시아가 가져갔던 비엘코폴스키에 지방이었다.
러시아 군은 그저 호구였다. 독일도 시베리아까지 갈 생각은 없었기에 나폴레옹을 몰락시킨 청야전술은 택도 없었다.
가엾은 스페인은 프랑스에게 카탈루냐를 뺏기게 생겼다. 일방적인 전력차였다.
급속한 산업화는 빈민들을 양성했다. 정부는 이 패배자들에게 원조를 해서 패자부활전의 기회를 주기로 하였다.
러시아는 독일의 뒷통수를 맛깔나게 후려친 대가를 몇 배로 돌려받았다. 의리가 뭐길래 왜 독일을 공격한 것일까?
결국 독일은 비엘코폴스키에 지역을 차지했다. 독일은 슬슬 러시아로부터 영토를 뜯어내 레벤스라움을 이뤄가는 방법을 터득하려고 했다.
정부는 롬바르디아에 고급의류 공장을 건설, 밀라노를 패션의 도시로 만들기로 했다.
사회문화 면에서 독일은 지속적인 발전을 이루어갔다.
대독일제국에 경사가 벌어졌다. 구 헝가리령 티미소아라 지방에 독일의 코어가 박힌 것이었다. 이제 대독일은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가 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황제는 속 쓰리는 소식을 들어야했다. 베네치아에서 파업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이는 베네치아 인민들이 사회주의에 물들기 시작했다는 것을 뜻했다.
오스트리아 령에도 독일의 코어가 박히기 시작했다. 다민족국가 독일은 점차 하나의 국가 하에 뭉치는 느낌을 받았다.
그 와중에 독일에서 금주동맹이 벌어졌다. 술꾼들은 정부의 행동에 분노하겠지만, 뭐 상관은 없었다.
그리고 독일인들은 영국이 거대한 동방의 땅, 중국으로부터 남직례, 북강소 등의 땅을 할양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빡친 독일인들은 영길리에게 질 수 없다며 독일 진출을 꾀했다.
이제 중국 대륙은 탐욕과 경쟁심에 불타는 서구열강의 제물이 될 것이다.
다윈주의의 정리로 독일제국의 교육 효율이 크게 올라갔다. 이는 대독일의 부족한 식자율을 크게 향상시켜줄 것이다.
또한 그리스를 영국의 세력권에서 이탈시켰다. 독일제국은 지중해에도 마수를 뻗치기 시작했다.
첫댓글 어...컨셉으로 그런신 걸 수도 있는데 다른건 몰라도 산업 육성 포커스는 진짜 별로입니다.차라리 직공이나 삼 원 육성 포커스를 찍는게 나아요
맞는 말입니다. 쾰른에 제철소가 필요했는데 아오... 정당을 국민당으로 바꾸고 제철소 짓는게 빠르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