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은혜
신약성서의 바울서신 13권은 한 서신도 빠짐없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로 시작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에게 항상 있을지어다’로 끝납니다. 그리고 그 서신 13권에는 은혜(恩惠)라는 단어가 90여 회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믿는 자라면 항상 그리스도의 은혜 가운데 살아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은혜란 국어사전에 보면 ‘베풀어주는 혜택’‘고마움’‘신세’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공의롭지 못한 사적인 욕망과 이기심을 충족시켜 주는 행위를 일컬을 수도 있습니다. 가령 남의 것을 빼앗아 그것으로 이웃에게 혜택을 베풀거나 권력을 이용하여 도의와 질서를 무시하고 소위 특혜를 베푸는 행위를 받는 자의 입장에서는 ‘고마움’이요 ‘신세’이므로 은혜가 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겸손한 자에게 값없이 주시는 한량없이 풍성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의 선물로 죄 사함, 회개, 은사, 칭의, 믿음, 부르심, 구원, 연보, 양육, 나눔, 도움, 위로와 소망, 주를 위한 고난, 사랑의 징계, 합력하여 이루는 선 등입니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잠 3:34, 약 4:6, 벧전 5:5)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겸손한 자들에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수 있는, 창세전에 예정되어 있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섭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인들은 내 뜻대로, 내 소원대로, 내가 기도한대로 이루어지면, 육신적인 유익과 평안을 누릴 수 있다면 하나님의 섭리와는 관계없이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은혜라고 믿고 경솔하게 간증하고 자랑합니다. 오늘날 제도교회가 집단적 이기주의자들로 오해받고 있는 원인을 규명해 보면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문화 및 경제 수준이 비슷한 교인들이 모여 사는 호화빌라나 고급아파트 밀집지역에는 소위 사회적 명사들이 출석하는 교회가 많습니다. 그들은 다양한 일류 직업을 소유하고 있으므로 그 분야에서는 무소불위의 능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에 피차 혜택을 나눌 수 있는 범위와 효력은 지대합니다. 그러므로 그 행위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포장될 때 그들의 신앙생활은 바로 사회적 형통한 삶으로 직결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모습을 잘 표현해 주고 있는 사례로 명사들의 신앙 체험 수기 또는 간증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어느 명사의 간증 수기를 보면 국회의원, 장관, 판검사, 의학박사, 사업가, 문학인, 연예인등이 서로가 자신들의 직능으로 혜택을 주고받는 행위를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간주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곳에서는 ‘갈릴리’ 사람들이 발붙일 틈이 없습니다. 오직 ‘예루살렘’의 명사들만이 교통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마 5:46) 이어서 “네가 무엇이든 베풀려면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 갚을 것이 없는 자들에게 베푸는 것이 네게 복이 되리라”(눅 14:12)고 하셨습니다.
김진홍 목사님의 <새벽을 깨우리로다>라는 책을 보면, 병들어 죽어 가는 여인이 목사님의 등에 업혀 이 병원 저 병원을 헤매다가 끝내 길에서 죽고 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만일 현재의 그 목사님이 어떤 병자를 데리고 병원을 찾는다면 그를 거절할 병원은 한 곳도 없을 것입니다. 공의와 공평과 정직이 없는 세상인심은 그런 것입니다. 성공하고 신분이 달라지면 본인보다도 남들이 먼저 그의 위상을 바꿔놓습니다. 그것이 세상의 법이고 육신의 법입니다. 성령의 법이 아닌 육신의 법에 의한 은혜는 하나님의 은혜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물질적으로 풍요한 삶이나 육신적으로 편안하고 만족한 삶을 위한 교인들의 교제(Give and Take)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인 사랑으로 나눠주고 용서하고 대접하고 희생하고 섬기고 위로하고 권면하고 선을 좇는 행위이며 아울러 자신의 불의와 불법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입니다. 다시 말하면 범한 죄에 합당한 징계를 받는 것 곧 회개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마 3:8, 행 26:20)
모세와 다윗의 삶에서 홍해를 가르고 골리앗을 쓰러뜨린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의한 능력이었고 그들에게 베풀어 진 하나님의 은혜는 므리바 물의 사연으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밧세바를 범한 죄로 압살롬 등에게 고난 받는 것이었음을 깨달아 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이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로 또는 성군으로 삶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징계로 지도자의 책임을 완수케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된 것입니다.
기독교인이라 할지라도 절도나 강도, 사기 등과 같은 형사적 현행범죄가 아니면 사회적으로 관행화 되어 있는 불의와 불법에 관하여는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사회적 질서, 도의, 윤리 등을 어기면서 자신의 유익을 도모하는 경우가 의외로 허다합니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 1:15-16)
불법으로 유통하는 물건을 싼값에 구입한다든가 부동산 투기로 거액을 챙긴다든가 사업을 위하여, 자녀들의 진학이나 취업을 위하여 또는 병역을 면제받기 위하여 지불하는 촌지나 떡값에 대하여는 오히려 세상을 살아가는 당연한 수단으로 믿고 있기에 양심의 가책조차 느끼지 못합니다. 더욱 한심한 것은 이러한 것들이 바라던 대로 이루어졌을 때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알고 감사헌금을 하는 교인들이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교회의 담임목사도 예배당을 건축할 때는 자금융자, 설계변경, 준공검사 등을 위하여 관련기관의 담당자들과의 불법적이고 음성적인 접촉을 묵인하는가 하면 그런 일을 능숙하게 처리하는 교인을 유능한 재직으로 대우하면서 교회의 기둥으로 삼는 것이 보편적인 현상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교회가 대형화할수록 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불법은 비례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결과적으로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자인하면 그 과정에서의 수단과 방법은 불법적이든 음성적이든 개의치 않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두려움도 모르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를 세우려는 인간적인 사고방식으로 자칭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기독교 사회에 난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에도 사회상은 오늘과 같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라고 예언했듯이 ‘고르반’을 핑계로 하나님의 계명을 사람의 유전으로 바꾸는 그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종교 지도자들과 사회적 명사들의 외식적인 행위로 불의, 불법이 활개를 치던 곳으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고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마 23:1-37, 눅 19:41-44)
한편, 예수님께서는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소외 받던 민중들이 사는 곳 갈릴리 지방에 사는 사람들 중에서 대부분의 제자를 선택하셨고 많은 병자들의 치유와 이적을 행하셨으며 그곳을 주된 복음사역 무대로 삼으셨습니다. 사회적 명사들인 외식자들의 눈에 예수님은 죄인들의 친구로 보일 정도로 그들에게 많은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세리와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마 21:31)
필자가 잘 아는 집사님 한 분이 있는데, 그는 많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면서도 그것이 자랑이 될 것을 염려하여 여간해서 간증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현령비현령으로 오해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침묵하면서 늘 홀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객관적인 긍정적 길을 따라가는 맹목적 신앙인은 아닙니다.
혹자는 신앙인의 선행을 율법적 행위로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항상 선을 좇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갈 6:10, 엡 2:10, 4:28, 딤전 6:18, 딛 2:14, 3:8, 벧전 2:12)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각설하고, 그가 우연한 기회에 은밀하게 들려 준, 체험담은 실로 감동적이었습니다. 듣기에 따라서는 지극히 사소한 일일 수도 있겠으나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 합당한 간증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가 들려준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지난해에 있었던 일로, 기술 연수를 위하여 3박4일 지방을 다녀온 일이 있었습니다. D 광역시의 시외버스터미널에 내려서 택시를 타고 행선지를 찾아가는데 택시기사의 잘못 아닌 잘못으로 엉뚱한 곳을 헤매다가 찾지를 못하고 결국은 다른 택시로 바꿔 타고 다시 행선지를 찾는 과정에서 역시 찾지 못하고 택시기사와의 시비 끝에 그가 찾는 곳이 D 광역시가 아닌 인근의 K 시에 소재한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연수원의 명칭이 비슷했던 탓으로 착각이 빚은 해프닝이었습니다.
그는 택시기사에게 사과하고 K 시의 목적지까지 데려다 줄 것을 간청했습니다. 택시기사는 사정을 이해하고 그를 K 시까지 태워다 주었습니다. 두어 시간 가량 늦었지만 다행이 수속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소정의 연수를 마친 그는 곧바로 D 광역시로 가는 버스를 탔습니다. 3일 전 D 광역시에서 처음에 탔던 택시기사를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그의 착각을 오히려 자신의 무지와 잘못으로 인정하고 요금까지 받지 않고 미안해하던 그 택시기사를 찾아보지 않고는 그대로 돌아 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의 머리에는 오직 그 택시기사를 만나서 자신의 실수를 말해주고 승차요금을 지불해야 한다는 일념뿐이었습니다. 택시기사의 이름은 물론이려니와 차량번호조차도 기억하지 못하면서 그를 만나려고 그는 무작정 D 광역시로 향했습니다. 그 때 그에게는 그 택시기사를 만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할 수 없는 일이 아니냐’고 하면서 그대로 돌아 갈 수 없는 마음, 그 자체가 견딜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버스에서 이런저런 상념에 잠겨있던 중에, 창세기에 등장하는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이 리브가를 만나기 위하여 메소보다미아로 가면서 하나님께 기도하던 말씀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원컨대 오늘날 나로 순적(順適)히 만나게 하사 나의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성중의 사람의 딸들이 물 길러 나오겠사오니 내가 우물곁에 섰다가.......”(창 24:12-13)
그는 기도했습니다. “엘리에셀의 기도를 들어주신 주님, 그가 리브가를 순적히 만날 수 있었듯이 그 택시기사를 순적히 만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버스가 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할 때까지 거듭거듭 기도했습니다. 드디어 버스가 터미널에 도착하자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이라고 생각하면서 곧바로 택시 정류장으로 갔습니다. 수십 대의 택시가 일렬로 줄지어 있었습니다. 차례차례 손님을 태우고 있었습니다. 그는 서울로 가는 마지막 버스가 떠날 때까지 그곳에서 찾아보기로 작정했습니다.
정류장 맨 앞에서부터 운전석에 앉아 있는 택시기사의 얼굴을 살피면서 다음 차로 옮겨갔습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도 서로가 만날 것을 약속이라도 했듯이 불과 여섯 번째인가, 일곱 번째의 택시에서 ‘그 얼굴’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그 순간 그는 난생처음 ‘반가운 얼굴’로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의아해하는 기사를 재촉하여 휴게소로 갔습니다. 모든 사연을 말하고 택시요금을 지불했습니다.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에 앉아 있는 그에게 차창으로 보이는 모든 풍경이 그렇게도 싱그럽고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늘을 나르는듯한 상쾌한 기분은 자동차 운전면허 시험에 합격하고 나서 ‘하이 파이브’했을 때와 같았다고 했습니다. 그는 성경대로 ‘순적히’만나게 해주신 주님께 기도했습니다. “오, 주여 정말 순적히 만날 수 있도록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남대문 입납’이라고 쓴 주소로 편지가 주인을 찾아 배달된 것입니다. 모래사장에서 잃어버린 바늘을 찾아낸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기적이니 우연이니 하는 말들로 주님의 은혜를 훼손하고 싶지 않았기에 그 사실을 홀로 평생토록 간직하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만 필자에게 말해놓고 보니, 예수님에 의해 눈이 밝아진 두 소경의 행적(마 9:27-31)을 닮은꼴이 되었다고 하면서 싱긋이 웃으며 이야기를 마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들의 삶에서 정치하는 사람이든 연예인이든 스포츠맨이든, 또는 그 밖의 어떤 직업인이든 자기 양심에 의한 스스로의 잘못이나 착각을 밝히는 사람은 만나보기가 극히 어렵습니다. 남이 모르면 요행으로 알고 넘어갑니다. 특히 순위를 다투는 운동경기에서는 만인이 눈으로 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심판 판정에 자신의 양심조차도 묻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정치인 역시 법적 증거가 없으면 오히려 큰 소리 치면서 불의가 의를 핍박합니다.
어찌 이런 일을 일일이 다 기록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신의 잘못으로 기인하는 이웃의 피해는 남이 알든 모르든 분명하게 밝힐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말은 쉽지만 행동이 따르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어려운 행동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자의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언젠가 또 한 번, 그 집사님의 체험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의 간증에 의하면, 평소 무의식중에 행한 불법에 대하여 규정된 제재를 받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지론입니다. 어느 날 승용차를 운전하고 가다가 낯선 곳에서 길을 잘못 들어 차를 되돌려야 하는데 적당한 곳을 발견할 수 없어서 좌회전 신호를 받는 곳에서 마주 오는 차도 없고 해서 U 턴을 했는데 공교롭게도 숨어서 지키고 있던 교통순경에게 적발되었던 것입니다.
별수 없이 몇 만원의 벌금 딱지를 떼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필자를 놀라게 한 그의 말인즉, 그는 다음 순간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필자도 그와 비슷한 경우를 몇 번 당해 보았으나 그 때 마다 억울하고 아쉬운 생각이 적어도 24시간은 지나서야 풀리는 것이었는데 말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반문하는 필자에게 그는 예수 믿고 신앙생활을 하게 된 지난날의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면 고의든 아니든 사회생활에서 불법을 행할 때마다 어김없이 적발되어 규정된 제재를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뒷거래로 그 제재를 모면해 볼까하는 생각도 간절했지만 예수님이 동행하심을 상기하면서 습관화된 이기심을 억누르고 달게 받는 오기(?)를 길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모든 불법을 예방하기 위하여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인다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 법이나 윤리나 질서를 잘 지킨다고 해서 그것으로 믿음이 좋다거나 또는 그것이 주님의 은혜라고 운운하는 것은 율법주의적인 사고(思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란 본래 둔한 존재이기 때문에(막 6:52) 율법이 없다면 죄를 깨닫는 기회가 없을 것이며 깨닫기는커녕 죄가 죄인 줄도 모르는 철면피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베푸시는 은혜의 권능에 붙잡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이 세상의 삶에서 무의미한 일이란, 우연한 일이란 없다고 보는 것이 신앙적인 견해입니다. 그 집사님의 삶은 기독교인답게 살겠다는 의지라기보다는 주님 앞에서 자신을 부인하려는 몸부림인 것입니다.
필자는 그 집사님의 말을 듣고 있으면 언제나 나를 경책하는 말 같아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집사님은 진정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의 숲속에 살고 있음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필자는 자신에게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 법도 지키지 못하는 주제에 성령의 법을 어떻게 지킬 수 있겠느냐?”
출처/
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
첫댓글 좋은글 감사합니다.
긴 글, 긴 감동을 선사하였지요 제 삶을 돌아보며 적용하기로 하였습니다. 퍼갑니다, 출처붙여서 사용할께요
하나님의 은혜 깨닫게 해 주시니 늘 감사 드립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은혜가되네요 선물하고싶어 퍼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