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15대 대통령이던 김대중은 7대 대통령선거(1971년 4월27일 : 박정희 당선), 13대 대통령선거(1987년 12월16일 : 노태우 당선), 14대 대통령선거(1992년 12월18일 : 김영삼 당선)에 출마하였으나 모두 낙선하였는 데 제일 큰 이유는 당선된 상대 후보들이 경상도 출신(박정희 : 경상북도 구미시, 노태우 : 대구광역시 동구 신용동, 김영삼 : 경상남도 거제시)들이라 지역감정의 덫에 걸려 전체 유권자의(1/3)가량 되는 경상도에서 낮은(저조한)득표율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또한 전라도 광주지역에서 김대중 후보가 95%를 넘는(97%)득표율을 기록했기 때문이었다.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면 출신인 그는 전라도 유권자들에게는 전폭적인 지지를 얻었으나 전라도 유권자들의 수가 전체 유권자의 10분의 1(1/10)에 불과하여 늘 경상도에서 지지도가 낮아 대통령선거때마다 낙선하였던 것이다.
1997년 12월 18일에 치른 제15대 대통령선거에서 4번째 대통령선거출마를 하여 당선되었는 데 제15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하기전부터 4번째 대통령선거출마해도 낙선할 것이라는 여론이 우세하였으나 첫 대통령선거에 출마한지 26년만에 10326275표(득표율 40.3%)를 득표하며 최대의 경쟁 후보로서 993만 5718표(득표율 38.7%)를 득표하던 이회창 한나라당후보를 390557(1.6%)표 차이로 누르고 대통령 당선될수 있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전라도 출신인 그는 만약 다음의 같은 이유중 1가지라도 없었다면 대통령당선의 꿈을 이룰수 없었을 것이다.
첫째,이회창아들 병역파동으로 이회창 지지도가 급감해서였다.
당시 이회창씨가 신한국당(한나라당의 전신)의 대통령후보로 선출되었때 새정치국민회의를 중심으로한 야당이 이회창아들이 체중조작으로 병역면제되었다는 의혹을 제기하여 지지도를 끌어내릴수 있었다.
둘째,당시 IMF사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통령선거 전에 명예퇴직,도산하는 기업이 대거 느는 등 경제난으로 IMF에 구제신청을 하여 경제가 매우 어려워 진 것에 대한 당시 집권당에 대한 유권자들이 반발이 거세어 정권교체에 대한 열망이 거세었던 것 이다.
셋째,김종필의 자유민주연합과 연대하여 충청권지지도를 얻어서 였다.
중도정당의 김대중(새정치국민회의)과 보수정당(자유민주연합)의 김종필이 연대하기를 어려울것 같았으나 당시 대통령선거(1997년)전부터 이러한 설이 계속 이어지다가 결국 김종필이 출마포기하고 김대중을 지지하여 집권후 의원내각제로의 개헌(나중에 이루어지지 않죠)을 조건으로 김대중 후보로 단일화하여 충청권표를 거머쥐어 당선될수 있었다.
넷째,이인제가 개별출마하여 한나라당의 표가 상당히 분산되어서였다.
신한국당 대통령후보경선당시 이인제의 인기는 매우 높았으나 끝내 이회창에게 밀려서 2위가 되어 대통령후보가 되는 데 실패하는 데 이회창아들 병역비리의혹으로 인하여 이회창 지지도 및 인기가 급감하는 것에 고무되어 국민신당을 창당하여 출마하여 약20%의 득표율을 보이는 데 이회창 약 40%, 김대중 약40%로 1명의 후보중 절반 가까운 득표율을 보였다.
다섯째,이회창이 경상도 출신이 아니어서였다.
이회창은 황해도 서흥 출신으로 원래 이북사람이 아니라 이회창씨가 출생하던 1935년당시 공무원이던 이회창아버지의 직장일로 황해도 서흥에 거주하면서 그곳에 가족이 모두 머물면서 태어났는 데 아버지의 직장이 이직하던 두어살 무렵 황해도 서흥을 떠나 출생지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다고 한다.
그의 연고는 충청남도 예산에 있고 고등학교도 서울에 위치한 경기고등학교를 나왔으니 경상도출신이 전혀 아니어서 경상도에서 이회창의 지지도가 높지 않아서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