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분청사기 지석중 년대가 확인되는 차씨 관련 지석입니다. 이 유물은 현재 이화여대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습니다.
2. 지석 내용을 실펴보면
(1) 승임랑 용강(지금의 평안남도 남포 근처) 교도 차집(車輯)이 선덕 10년(1435년)에 사망하여 장례를 치른후 아들인 유학 차치(車緻)가 지석을 만들 것입니다.
(2) 고애자라는 표현으로 보아 먼저 어머니가 사망하고 1435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두 개의 지석을 만들어 각각 부모묘에 넣은 것으로 보여집니다.
(3) 조선시대 교도 또는 훈도는 국가에서 각 지방에서 파견하는 교육기관의 책임자로 아마도 차집은 사대부 유학자로 보여집니다.
(4) 다만 조선왕조실록에 차집, 차치등은 보이지 않습니다.
3. 위 지석에 나오는 차집(?-1435) 및 차치(?-?)가 연안차씨 인지는 알 수 없고 아주 간단한 내용만 담은 지석으로 선대의 기록등이 없어서 아쉽지만 아마도 차씨 관련 지석중 가장 오래된 지석으로 보여집니다. 참고로 올려 봅니다.
<추가>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52권 / 평안도(平安道)
* 용강현(龍岡縣)
동쪽은 강서현(江西縣) 경계까지 20리, 남쪽은 삼화현(三和縣) 경계까지 12리, 서쪽은 해안까지 34리, 북쪽은 함종현(咸從縣) 경계까지 17리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6백 35리다.
【건치연혁】 옛날 황룡국(黃龍國)이었는데 고구려가 합병하였으며, 고려에서는 황룡성(黃龍城)이라 하였다. 일명 군악(軍岳)이라고도 한다. 후에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현(縣)으로 하였는데, 본조에서 그대로 따랐다.
【관원】 현령ㆍ훈도 각 1인.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7권 / 전라도(全羅道)
* 해남현(海南縣)
동쪽은 강진현 경계까지 19리, 서쪽은 진도군 경계 벽파진(碧波津)까지 53리, 남쪽은 바다까지 66리, 북쪽은 영암군 경계까지 16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1천 7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새금현(塞琴縣)이었는데, 신라 때에 침명(浸溟) -투빈(投濱)이라고도 하였다.- 으로 고치어 양무군(陽武郡)에 딸린 현이 되었다가, 고려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어 영암군에 예속시켰다. 본조 태종 9년(1409년)에 진도현에 합쳐 해진현(海珍縣)으로 되었으며, 12년에 고을의 치소(治所)를 영암에 딸린 현 옥산(玉山) 땅에 옮기었다가 세종 19년에 다시 가르고 현감으로 하였다.
【관원】 현감ㆍ훈도 각 1인.
【군명】 새금(塞琴)ㆍ침명(浸溟)ㆍ투빈(投濱)ㆍ해진(海珍).
【성씨】 본현 정(鄭)ㆍ윤(尹)ㆍ차(車)ㆍ김(金)ㆍ전(全)ㆍ갈(葛).
첫댓글 주(住) 나주(亽州)로 되어 있는데 아마 조선초기 지석이라 구결 亽(나)를 쓴 것으로 보여지고 나주(羅州)에서 거주한 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병수님께 궁금했던 것에 대한 질문입니다.
차송우가 1258년(고종45) 류경(柳璥)선조, 김인준, 임연 등과 함께 최의를 제거하고 위사공신이 되었고 차송우 고향인 염주(연안)가 1259년(고종46)에 지복주사로 승격된 것과 류경선조 고향 유주(文化)는 승격되어 문화현이 되었다는데 공신이 된후 1268년 임연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기 전까지 또는 최항집에서부터 차송우와 류경 선조가 서로 일가친족으로 호칭했는지 알려 주십시오. 원파록이 나오기 전부터 황제나 류색후손으로 지냈는지를 알고자 하는데 내가 실력이 부족해서 부탁드립니다.
차집이 1435(세종17)년 사망했다면 차원부설원기 나오기 전이라 문화류씨와는 관련이 없을 것입니다.
저는 류차동원은 족보상은 기사보이후로 관념상 류차동원만 있었을 뿐이며 실질적으로 강화된 것은 한말이후 근대의 산물이라고 봅니다. 특히나 차류대종회 결성이 큰 작용을 했습니다. 일제시대 대승공 할아버지 시제때 차씨들은 한명도 없는데 이런 집이 큰집은 아니겠죠...
그리고 류차문제를 나이 드신 어른신에게 이해시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것은 젊은 종원들이 이 사실을 올바르게 인식하여 우리 후대에게는 올바른 씨족관을 물려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다 시간이 가면 해결될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종원들을 만나보면 대학생들은 車씨와 관계를 모르고 차문 대학생들은 선조들이 왜곡한 종사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젊은이들이 많으나 60대 이상 종중 일부임원들이 문제이지만 세월이 가면 해결되리라 믿습니다.
걱정되는 것은 지금도 그러지만 종사를 잘 알지 못하는 일부가 종중에서 붙어서 한푼이나 벌어 보려고 자기가 새로운 지식을 알고 있는 것처럼 포장하기 위해 다 끝난 원파록을 꺼내서 혼란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제가 차씨 지석을 굳이 올린이유는 씨족사의 올올바름을 찾아가고자 해서 올린것입니다. 차원부설원기의 휘양찬란한 글보다는 위의 차씨 지석이 부모를 섬기고 선조를 섬기는 인간의 본 마음입니다.
지석에 해진차씨로 나옵니다. 해진은 지금의 진도이며, 나주목에 속해서 지금으로서는 진도차씨나 나주차씨로 보면 될 듯합니다. 그런데 진도차씨라 불린 차씨는 없었던 듯하고, 현재 나주차씨는 2000년 통계 기준으로 1235명이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알려진 역사와 유물들만 가지고도 훌륭한 가문사를 세울 수 있습니다. 구태여 조작을 하고 그것이 세상에 알려져서 추한 모습을 보이는 것보다 억만 배는 낫습니다.
위 자료는 마침 6월 10일 경에 어느 포털의 Q&A에 올라온 것을 보고 살펴본 것인데 여기서 보니 반갑네요. 그때 이미 글씨와 내용은 다 파악해 두었습니다. 나주를 亽州라 쓴 예는 태안 마도4호선이란 곳에서 나온 목간에도 있습니다. 또 거주지가 나주 북장리로 나오는데 당시 北藏里가 있었는데 지석에는 藏자가 초서체에 쓰이는 형태로 쓰였습니다.
저도 본에서 해자는 알았는데 뒷자를 잘 몰라서 해석을 못했는데 교수님 덕에 알게되어습니다. 조선 무과방목을 보면 용성, 나주, 경주 본 다른 차씨들이 많습니다.
지금도 자신들이 단일본이라고 생각하는 성씨들이 있는데 실상을 알고 보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차씨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류씨도 모두 대승공(문화류씨)에서 나왔다는 믿음도 조선 후기에 있었습니다. 이것도 사실로 볼 수 없습니다.
1. 현재까지 한국금석문싸이트에 공개되어 있는 수많은 고려시대 지석, 비문에 여러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차씨는 제가 찾지 못했고 다만 신륵사비문(1379년)에 연안군부인 차씨라는 여자가 등장합니다. 2. 아직까지 공개되지 않고 어느 박물관 수장고 보관되었을 고려시대 지석, 그리고 남북관계가 더 활발해져 해방이후 북한지역에서 발굴된 고려시대 지석들이 공개된다면 제가 보기에는 여러 가문에서 씨족사는 다시 써야 할 것으로 보여집니다. 3. 다 이런 것들이 족보의 원래 의미를 망각하고 만들어진 조선중후기의 족보에서 출발한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