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생활 10년이 넘었지만 딱히 내세울 것 없는 필모그래피에서, 비로소 [죽어도 해피엔딩]이라는 작품을 강조할 수 있게 된 것은 예지원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다. 오직 예지원만을 위한 영화 [죽어도 해피엔딩]에서 그녀의 존재감은 영화 전체를 지배한다. 이러다가 정말 [죽어도 해피엔딩] 속에서 그녀가 맡은 배역처럼, 캔느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것은 아닌가? 칸느영화제가 아니라, 캔느다. 저작권 문제 때문에 칸느가 아니라 캔느 영화제라고 나오기는 하지만, 예지원은 자신의 배우 이름 그대로 영화 속에서도 여배우 예지원으로 등장한다. 그녀는 캔느 영화제 여우주연상 시상식에 참석하기 위해 출국하기 하루 전, 갑자기 찾아온 네 남자들과 기가막힌 하루밤의 소동을 겪는다. 그것이 [죽어도 해피엔딩]이다.
파리, 시카고, 몬트리올 영화제 등에서 심사위원상을 수상했고 1999년 국내 개봉된 프랑스 영화 [형사에겐 디저트가 없다]의 한국판 리메이크작인 [죽어도 해피엔딩]은, 원작의 당돌성과 엽기성을 제거하고 된장을 많이 풀어 한국 관객들의 입맛에 맞게 재구성된 작품이다. 마니아들에게는 바로 이 점이 큰 불만요소로 작용하겠지만, 강경훈 감독의 리메이크작이 대중성 측면에서는 원작보다 한국 관객들에게 훨씬 더 경쟁력을 갖는 것은 사실이다. 원작이 갖는 빠른 속도감, 경사각이 큰 부감샷과 앙각샷, 표현주의적 양식을 극단으로 밀어붙인 카메라 앵글이나, 완급의 리듬을 의도적으로 강조하는 편집의 기교, 그리고 내러티브의 엽기성은 [형사에겐 디저트가 없다]를 추종하는 열혈 마니아를 낳았다.
[죽어도 해피엔딩]은 원작의 실험성에서 많이 후퇴하여 한국 관객들의 눈높이와 입맛에 맞춘 영화다. 특별한 새로움은 없다. 영화를 예술의 장르로 접근할 때 상상력 측면에서는 건질 게 하나도 없지만, 상업적 관점에서는 [죽어도 해피엔딩]은 외국 원작을 리메이크 할 때의 성공적인 사례를 보여준다. 원작의 큰 틀은 그대로 유지한채 [죽어도 해피엔딩]은 부분적 변형을 시도한다. 원작에서 소설가로 설정된 여주인공은 리메이크작에서는 여배우로 바꿔져 있다. 그녀를 사랑하는 네 남자의 역할도 조금씩 변형되어 있고, 그들이 우연한 사고로 혹은 예기치 못한 방법으로 죽음에 이르는 과정도 조금씩 다르다.
원작과 비교할 때 가장 큰 차이점은, 원작에는 없는 캐릭터로 여배우의 메니저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배우 예지원의 매니저 두찬(임원희 분)은 원작에는 없지만 한국판 리메이크작 [죽어도 해피엔딩]에서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임원희는 타의 주종을 불허하는 그만의 독특한 캐릭터로, 4차원의 정신세계를 가졌다고 명명되는 예지원과 만나 환상의 찰떡 궁합 코미디를 보여준다. 그들은 멀쩡하게 생긴 얼굴에 철판 깔고 코미디하는 김원희-신현준 커플 이후, 가장 환상의 궁합을 자랑하면서 관객들을 포복졸도하게 만든다.
영화의 대부분이 여배우 예지원의 집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보여주기 때문에, 집이라는 제한된 공간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활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연출의 가장 큰 관건이다. 강경훈 감독은 거실, 주방, 침실 등의 공간을 분할하고 각각의 공간을 조명으로 차별화해서 유려하게 동선을 이끌어간다. 그의 장점은 대중들의 입맛을 감각적으로 잡아내고 있다는 것이고, 단점은 세심한 것 같지만 완성도가 약하고 감각적인 것 같지만 세련미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크리스마스 이브, 캔느 영화제 여우주연상의 유력한 후보자로 시상식에 참석하기 위해 출국을 앞둔 여배우 예지원의 집으로 그녀와 남다른 사연을 간직한 네 남자가 차례로 찾아온다. 무식한 조폭 최사장(조희봉 분), 속물적인 지식인 유교수(정경호 분), 소심한 영화감독(박노식 분), 재미교포인 느끼남 데니스(리처드 김 분)는 모두 준비해 온 프로포즈 반지를 내밀며 자신과의 결혼을 약속해 달라고 한다. 그러나 예지원이 몰래 만나던 남자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치며 그녀를 곤경에 빠뜨렸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올드보이]의 오대수 식으로 말하자면, 그 남자들이 하나씩 죽어서 사라져버리는 것이 문제다.
예지원이 아니었어도 과연 이런 캐릭터가 구축될 수 있었을까 의문이 간다는 것은 그만큼 그녀가 완벽하게 자신의 배역을 수행했다는 뜻이다. 예지원의 코미디 연기에 화룡점정 역할을 하는 것은 임원희의 코미디 연기다. 일찌기 류승완 감독의 [다찌마와 리]에서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독보적 개성연기로 주목받은 그였지만, 너무 강한 개성 때문에 후속작이 안따라주는 불행을 겪은 임원희는 물 만난 고기처럼 마음껏 활개치고 다닌다.
[죽어도 해피엔딩]은 잘 만든 영화는 절대 아니지만 재미있는 영화라는 데 이의를 달 수는 없다. 왜 리메이크를 해야 되는가에 대해, 상업성과 대중성이라는, 뻔뻔하지만 나름대로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점에서, [죽어도 해피엔딩]은 과도한 관념성으로 대중들의 꿈을 뒤숭숭하게 만드는 의식과잉 영화보다는 훨씬 성공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