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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주님의 말씀이 저에게 치욕 거리만 되었습니다."
<예레미야서의 말씀 20,7-9>
7 주님,
당신께서 저를 꾀시어, 저는 그 꾐에 넘어갔습니다.
당신께서 저를 압도하시고 저보다 우세하시니,
제가 날마다 놀림감이 되어, 모든 이에게 조롱만 받습니다.
8 말할 때마다 저는 소리를 지르며 “폭력과 억압뿐이다!” 하고 외칩니다.
주님의 말씀이 저에게 날마다 치욕과 비웃음 거리만 되었습니다.
9 ‘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 작정하여도,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 내지 못하겠습니다.
† 제2독서
"여러분의 몸을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 12,1-2>
1 형제 여러분,
내가 하느님의 자비에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
2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
† 복음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려야 한다."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16,21-27>
그때에 21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22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2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2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25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26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27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 송봉모 토마스.S.J. 신부님의 묵상글 *
<열성적인 신앙과 인간적 욕망>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있고 나서,
예수께서는 처음으로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십니다.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겪고 돌아가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을 예고하십니다.
이 예고 앞에서 베드로가 심하게 반발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를 향해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구나.” (마태 16,23)라고 꾸짖으십니다.
이 꾸지람 앞에서 머물러 보고 싶습니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구나!”
이 꾸지람은 베드로는 물론 모든 제자들을 향한 꾸지람입니다.
이 점은 마르코 복음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꾸짖기 전에 먼저 다른 제자들을 둘러보셨던 것입니다(마르 8,33 참조).
열성적인 신앙과 인간적 욕망으로 갈라져 있는 베드로의 이중적인 모습은
다른 제자들의 모습이면서 동시에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베드로가 수난을 예고하신 예수님을 붙들고 했던 말
“주님, 안 됩니다.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22절)는
모든 인류를 대신해서 모든 그리스도인을 대신해서 했던 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우리 자신의 일만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의 이기적 목적만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주님을 따르기보다는 주님이 우리를 따르도록 요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할 일을 정해 주기보다는
우리가 주님에게 할 일을 정해 주는 경향이 있습니다.
복음성가 중에 다음과 같은 성가가 있습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밖에는 없네.”
우리가 입으로 이 성가를 부르면서
우리 몸과 마음도 이 성가를 부르고 있는지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면
우리는 입으로만 이 성가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예수님보다 더 귀한 것이 없다고 하면서
양손은 재물을 잔뜩 움켜쥐고 있고,
입으로는 예수님밖에 없다고 하면서
마음은 세상 온갖 명예와 인간적 정념(情念)에 붙들려 있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베드로처럼 자기 내면에 있는 어떤 이해나 욕망을
하느님의 뜻이라 부르면서 그것을 채우려고 합니다.
분명 하느님의 뜻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을 추구하면서도
“그것은 하나의 섭리인 것 같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예언자 요나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외면하고 도망치려 할 때
요빠 항구에서 배 한 척을 발견합니다.
막 출항하려는 배를 보면서
만약에 요나가 하느님 섭리로서 그 배를 타고 도망가게 되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섭리를 자기 식으로 이용한 것입니다.
- 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
<그래도 계속 가라>
죠셉 M 마샬이란 특별한 작가가 있습니다.
그는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태어났는데,
현재 교사이자 역사가, 민속학자이자 인디언 전통 공예품 장인으로 활동하고 있지만,
많은 이들 삶의 스승으로도 유명합니다.
그는 간간이 인디언의 전통적인 삶과 철학에서 길어 올린 지혜와 통찰력을 바탕으로
난해한 인생의 문제들에 대해 깊이 있는 해석을 내어놓는데,
이번에 나온 책이 ‘그래도 계속 가라’(Keep Going)입니다.
저자는 강조합니다.
인생에 있어 기쁨의 순간은 찰나입니다.
때로 기쁨이 오랜 장마 간간이 먹구름 사이를 뚫고 잠깐 내비치는 햇살처럼 미약하기만 하고 대부분 슬픔과 고통의 연속인 것처럼 보이는 우리네 인생이지만, ‘그래도 계속 가라’고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베드로 사도는
‘그래도 계속 가라’를 충실히 실천한 분이 틀림없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보여준 모습,
예수님 보시기에 참으로 실망스러운 모습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토록 오랜 시간, 귀에 못이 박히게 강조해왔지만,
오늘 보시다시피 베드로 사도는 전혀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고 엉뚱한 말을 해대고 있습니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힘과 권력을 바탕으로 살상과 정복을 일삼는 세상의 왕이 아니라
비폭력의 하느님, 고통의 메시아, 산 제물로 바쳐질 어린 양임을 그토록 강조해왔건만,
베드로 사도는 아직도 납득하지 못하고 허황된 꿈속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베드로 사도를 향한 예수님의 질책을 매섭기만 합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아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베드로의 위신이 공개적으로 완전히 찌그러지는 순간입니다.
속까지 환히 들여다보시며 정곡을 찌르는 예수님이 오늘따라 엄청 밉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참혹할 정도로 부끄럽습니다.
자존심이 구겨진 베드로 사도의 머릿속은
‘이런 말까지 들어가며 계속 가야 하나?’하는 의구심으로 가득 찼겠습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의 태도를 보십시오.
그래도 계속 갑니다.
여기에 베드로 사도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삶이 우리를 위해 준비한 것은 행복과 기쁨만이 아닙니다.
때로 온 우주가 우리에게 호의적인 것 같은 때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풀잎 끝에 잠시 맺혀있는 아침이슬과도 같습니다.
눈 깜박할 사이에 우리들의 시야에서 사라집니다.
어떤 고난과 역경도 그 속에서 내딛는 미약한 한 걸음보다 강할 수 없습니다.
- 살레시오회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 이란성 쌍둥이가 이러한 대화를 나눌 수 있지 않을까요?
먼저 여동생이 오빠에게 말했지요.
“난 말이지, 태어난 후에도 삶이 있다고 믿어.”
오빠는 격렬하게 반대했지요.
“절대로 그렇지 않아. 여기가 전부라니까.”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여동생이 다시 말했습니다.
“말해줄 게 또 있어.
오빠는 안 믿겠지만 말이야. 난 엄마가 있다고 생각해.”
쌍둥이 오빠는 무척 화가 나서 말했지요.
“엄마라고?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난 엄마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너는 본 적이 있어?”
오빠의 기세에 눌린 동생은 마침내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가끔 무언가 꽉 조여 오는 것 같지 않아?
아주 기분이 나쁘고 어떤 때는 아프기도 해.”
“나도 그래. 그런데 그게 어때서?”
“음, 내 생각엔 이 꽉 조여 오는 게 다른 곳,
그러니까 여기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곳,
엄마 얼굴을 보게 될 곳으로 갈 준비를 하라는 표시인 것 같아.
오빠는 흥분되지 않아?”
바보 같은 소리라고 하면서 오빠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어때요?
누가 올바른 판단을 하고 있나요?
여동생일까요? 아니면 오빠일까요?
지금 이들의 상황에서 한 번도 보지 못한 배 밖을 상상하기 힘들며,
엄마의 존재에 대해서도 믿지 못하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배 밖으로 나와서 생활하고 있는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엄마가 없다고 말하실 수 있습니까?
또한 배 밖의 이 넓은 세상이 가짜라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사실 현대인들은 합리적이지 않으면 또 경험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믿지 않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분들도 있지요.
“하느님이 어디 있어? 내게 보여줘. 그러면 내가 믿을게.”
그러나 합리적이고 경험적인 것들이 꼭 진실만은 아님을
앞선 이란성 쌍둥이의 대화를 통해서 우리는 간접적이나마 깨닫게 됩니다.
결국 인간적인 지식과 판단만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맞게 생활하는 강한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에 베드로는 깜짝 놀라서 말합니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예고는 누구의 뜻을 밝히는 것일까요?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인 것이지요.
이에 반해서 베드로의 말은 누구의 뜻일까요?
바로 자신의 뜻입니다.
따라서 베드로는 자신의 뜻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보다 윗자리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자신의 뜻보다 낮은 자리에 위치하고 있는 베드로를 향해
예수님께서는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라고 말씀하실 수밖에 없었지요.
그리고 제자들을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예수님의 제자 되는 길은
첫째 자기 자신을 버리고,
둘째 자신의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지어야 하며,
셋째 무조건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내 자신을 버리는 것도 어려워하고,
이 세상에서 고통스럽고 힘든 십자가는 어떻게든 피하려고 하지요.
그 결과 예수님을 따르기보다는
세상의 즐거움을 따르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에서 멀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왕이 평복을 입고 지방을 순찰하고 있는데
어떤 거지가 와서 무엇을 좀 달라고 손을 내밀더랍니다.
이에 왕은 그 거지에게 “네가 먼저 무엇을 내게 주면 나도 네게 주겠다.”고 말했지요.
그러나 거지는 왕에게 줄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생각다 못해 앞 동네에서 받은 옥수수 한 되 가운데서 다섯 알을 집어주며
“제게는 이것밖에 드릴 것이 없습니다.”하였지요.
그것을 받은 왕은 뒤에 따라오던 재정대신에게
“금자루에서 이 옥수수 알만한 금덩이를 5개 꺼내게.”라고 한 뒤 그것을 거지에게 주었습니다.
그 순간 거지는 속으로 크게 탄식하며 말했습니다.
“아하! 이럴 줄 알았으면 이 옥수수 주머니를 아예 다 그분께 드릴 걸!
그랬으면 그만큼 금덩이를 받았을 텐데. 내가 왜 다섯 알만 드렸던가!”
그렇습니다.
자기 것을 더 많이 챙기는 마음, 그래서 주님께 모든 것을 내어놓지 못하기에
우리들은 더 많이 받을 수 있는 은총을 조금밖에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제는 내 뜻이 아닌 주님의 뜻에 맡기는 마음,
주님 앞에 모든 것을 내어 놓을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이 필요할 때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오늘 제2독서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
내 뜻보다는 주님의 뜻이 우선이 될 수 있도록 합시다.
- 인천교구 간석4동 본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
<하느님 찾는 사랑의 열정>
하느님을 찬미하는 기쁨으로 살아가는 여기 수도자들입니다.
“여기 수도원에서 무슨 재미로 살아갑니까?”
누가 물을 때 마다 저는 주저 없이 대답합니다.
“하느님을 찬미하는 재미로 살아갑니다.”
하느님을 찾는 열정은, 하느님을 향한 그리움의 열정은
저절로 시편의 찬미 노래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주님은 나의 힘,
내 노래이시니,
당신이 나를 구하셨도다.”
얼마 전 새벽 동녘 붉게 물든 구름을 보며 써 놓은 글도 생각납니다.
“새벽마다
임 향한 그리움은
하늘 높이
떠올라
구름이 된다.
떠오르는 해님 사랑에
붉게 물든
구름이 된다.”
주님 향한 그리움의 열정이 살게 하는 힘입니다.
이 열정의 힘으로 살아가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또 언젠가의 주고받은 문답도 생각납니다.
“수도사제 된 것에 후회는 없습니까?”
“예, 추호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가끔 하느님께 투정한 적은 있어도 후회한 적은 없습니다.”
하느님 찾는 열정이 사라져
투정이 아니라, 답답하고 힘들 때, 다 놓아버리고 싶을 때
하느님께 투정입니다.
어찌 보면 이 투정 또한 기도입니다.
하여 예레미야의 하느님께 대한 투정에 공감이 갑니다.
“주님,
당신께서 저를 꾀시어, 저는 꾐에 넘어갔습니다.”
전혀 하느님을 저주하거나 원망하는 분위기가 아닙니다.
그냥 답답해 투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랑이 식어 투정이 아니라 사는 게 힘들어서 투정입니다.
사실 부부간 때로 투정하고 짜증내고 푸념하는 것도
믿고 사랑하기에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주님과 친밀한 사랑의 관계에 있는 예레미야 예언자인지
이 또한 그대로 절실한 기도입니다.
이렇게 힘들 때마다 사람이 아닌 주님께 자주 스트레스 풀며 기도해야
몸과 마음 무너지지 않습니다.
하느님 찾는 사랑의 열정 있어 성소입니다.
이 하느님을 찾는 열정의 사랑이
성소를 판가름하는 시금석입니다.
이 열정 있어 그 무슨 어려움도 다 돌파해 나갑니다.
도저히 하느님 품에서 달아나지 못하게 합니다.
사실 하느님은 한 번 자신이 택한 사람은 절대로 놓치지 않습니다.
누가 막고 열어줄 수 있는 성소도 아닙니다.
예레미야 예언자, 예언자로 사는 게 너무 힘들어
그 성소에서 벗어나려고 하지만
내면에서 샘솟는 열정 앞에 스스로 무너지고 맙니다.
“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 작정하여도,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 내지 못하겠습니다.”
바로 이게 성소입니다.
나도,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성소입니다.
성소를 피해 어디로 도망쳐도 붙잡아 내는 하느님이십니다.
나름대로 그 고유의 성소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하느님 주신 성소에 충실하고 있습니까?
열정의 불은 계속 타오르고 있습니까?
열정의 불 꺼지면 성소도 잃고,
세상은 무의미와 허무, 절망의 어둠 가득한 사막이 되고 맙니다.
하느님 찾는 사랑의 열정이 정신을 새롭게 합니다.
정신이, 마음이 새로우면
환경도 사람도 모두가 새롭습니다.
바꿀 것은 환경이나 이웃에 앞서 내 정신이요 마음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열정 있어
정신도, 마음도 새롭습니다.
열정과 함께 가는 마음의 순결입니다.
수도승의 필수적 자질인 열정과 순결은 쌍둥이와도 같습니다.
열정의 사랑 있어 마음의 순결이요, 마음의 순결에서 샘솟는 열정입니다.
죄 없어서 마음의 순결이 아니라,
끊임없는 열정의 사랑이 마음을 순결하게 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
또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심시오.”
열정과 순결의 사람들, 그대로 거룩한 산 제물이요,
이런 사람들의 예배가 진정 합당한 예배입니다.
열정 있을 때 현세에 동화되어 오염 변질되지 않고,
오히려 세상을 성화합니다.
정신을 새롭게 하고, 끊임없이 내적 변화를 이루어 주는 열정입니다.
열정과 순결, 비단 수도승만의 자질이 아닙니다.
수도승 영성이 보편화되어가는 시대,
세상에 속화되어 자기를 잃지 않고 살기 위한 모든 이들의 필수적 자질입니다.
이래야 혼탁한 세상에서 맑은 샘물로, 밝은 빛으로 살 수 있습니다.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찾는 사랑의 열정이 제 십자가를 지게 합니다.
하느님 향한 사랑의 열정이 제 십자가를 지게 하는 힘의 원천입니다.
세상 그 누구도 제 십자가에서 벗어날 자 아무도 없습니다.
누가 대신 저 줄 수도 없고 내려놓을 수도 없는 제 십자가입니다.
제 십자가를 내려놓는 것,
무책임한 일이요 사람됨을 포기하는 일입니다.
또 이 십자가의 길 아니곤 구원에 이르는 길도 없습니다.
참 힘들고 피하고 싶은 십자가입니다.
오죽 힘들었으면 대 예언자라는 예레미야도 피하려 했고,
수제자라는 베드로도 피하려 했겠습니까?
반석이라 격찬을 받던 베드로,
십자가를 피하려 하는 순간 주님의 호된 질책을 받지 않습니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내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졸지에 베드로에서 사탄으로, 반석에서 걸림돌로 전락되는 베드로입니다.
이 주님의 충격 요법의 말씀에 베드로 정신이 번쩍 들었을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
이게 바로 사탄의 간교한 유혹입니다.
아무도 내 환경, 책임, 의무, 성격, 약함, 부족함, 두려움, 불안, 병고의 온갖 십자가에서,
운명의 십자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 십자가를 치워 달라, 가볍게 해 달라 기도할 게 아니라
내 운명의 십자가를 사랑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또 이 운명의 십자가를 기꺼이 질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님 향한 열정의 사랑이, 믿음이, 희망이
십자가를 용감하게, 기쁘게 지고 가게 합니다.
늘 우리와 함께 동반하시는 십자가의 주님이 위로와 힘의 원천입니다.
주님을 찾는 사랑의 열정이 성소를 튼튼히 합니다.
정신을 새롭게 하여, 세상의 빛으로, 세상의 소금으로 살게 합니다.
내 운명의, 책임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게 합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길 말고
구원의 길은 그 어디도 없습니다.
이 거룩한 미사 시간,
주님은 거룩한 산 제물로 당신께 봉헌하는 우리 모두에게
열정의 불을 붙여주시어 그 성소에 항구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 수도회 성 요셉 수도원 원장
* 배광하 신부님의 묵상글 *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
19세기를 지나며 과학자들은 빛의 정체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빛은 다양한 길이의 파장을 가지고 있는데,
파장이 짧을수록 온도는 더 뜨겁다는 것입니다.
결국 파장이 긴 빨간색보다
파장이 짧은 파란색이 더 뜨겁다는 것입니다.
파란색은 언제나 차가운 색깔로 인식되어 왔었는데,
파란색이 뜨거운 색이었던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의 몸을 이루는 가장 작은 물질이자 시작인 원자 역시 파란색이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 말고도 인간의 과학이 발전하게 되면서
그동안 우리가 가지고 있던 생각들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속속들이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늘 크고 작은 착각과 판단, 편견 속에 살고 있습니다.
신앙에서도 이 같은 착각과 편견은 계속되어 왔었습니다.
이를테면,
인간에게 닥치는 모든 고통을 하느님의 탓으로 돌리는 일,
부활만을 꿈꾸며 십자가는 멀리하는 안일한 신앙,
예수님의 자비와 용서와 사랑을 강조하며 심판과 정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그릇됨,
또는 그 반대의 신앙으로 심판과 징벌만을 강조하는 믿음,
기복적인 신앙만을 추구하며 교회는 복을 주어야 한다고 떼를 쓰는 신앙,
이 모든 그릇된 신앙 뒤에 반드시 존재하는 오류는,
자기 희생의 십자가는 싫고 축복의 부활, 영광, 행복만을 추구하는 믿음입니다.
예수님 십자가의 고난을 반대했던 오늘 복음의 베드로 사도는 그 좋은 예입니다.
그 같은 그릇된 믿음을 추구할 때, 우리 또한 예수님의 심한 꾸중을 듣게 될 것입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마태 16, 23)
우리의 믿음은 종종 하느님의 뜻이 아닌 자기의 생각, 편견, 착각, 교만함 속에 있어 왔습니다.
그리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는 신앙이 아닌 무엇인가 계속 움켜쥐는 신앙을 추구해 왔습니다.
그러니 자유롭지 못하고 신앙의 참된 기쁨을 만끽하지 못하였습니다.
자유와 기쁨을 살지 못하였기에
십자가는 늘 짐이었고, 신앙의 걸림돌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짜증과 미움과 절망적인 삶으로 나타났습니다.
십자가는 피하면 피할수록 지겨움을 만들고,
불평불만을 하면 할수록 더 큰 짐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그러나 기쁨으로 받아들일 때는
그 모든 무게가 사라지고 인내가 생겨 힘 있게 안고 갈 수 있게 됩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주신 사명이 너무 벅차 하소연 합니다.
사람들의 놀림감이 되고, 조롱과 치욕이 그를 괴롭힙니다.
우리 또한 참된 신앙 생활을 하다보면 같은 아픔을 겪게 됩니다.
직장 동료들이나 가족, 친지들에게 ‘미쳤다’는 소리를 들어야 하고 바보란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사도 성 바오로의 신학을 한마디로 말하라면
‘십자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십자가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바보로 사는 것, 손해보며 사는 것, 계산적이지 않고 세속적인 이윤의 잣대로 살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기가 너무 힘겨워 울부짖던 예레미야 예언자는
그래도 끝내 하느님 사랑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 작정하여도,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하겠습니다.”
(예레 20, 9)
우리가 세상에서 십자가를 살기에 너무도 힘겨워 할 때,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며 위로와 용기를 가지면,
말씀 안에서 인간의 힘으로는 감히 형언할 수 없는 주님의 놀라운 권능의 힘을 체험하게 됩니다.
때문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말씀을 믿는 정도가 아니라,
그 말씀이 우리들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게 만드는 일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 자신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때에는 세상의 십자가가 결코 고통의 무게로 다가오지 않게 됩니다.
부활은 분명 십자가의 죽음 뒤에 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1975년부터 이슬람 국가인 방글라데시에서 가장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고 있는 미국인 ‘봅 멕카일’ 신부는 그곳 방글라데시의 무슬림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면 무얼 주겠냐는 질문에, “당신이 그리스도교를 믿으면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고통뿐입니다”라고 대답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짧은 대답에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십자가의 역설적인 신비가 다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오늘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마태 16, 24)
- 춘천교구 '겟세마니 피정의 집'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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