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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수 시인을 추모하며_____
시로 읽는 시업詩業 인생
──유정儒 정희수 시인을 추모하며
이동희
■마지막 식사
벌써 해가 바뀌었다. 흩날리는 성긴 눈발이 세밑을 공감하기에 충분한 날씨였다. 유정儒 이 점심이나 하자며 전화를 했다. 나는 망설일 것도 없이 그러마고 했다. <그때산집>은 중앙시장 초입에 있는 오래된 복어탕집이다. 아마 두어 번 미나리며 콩나물을 추가 주문했을 것이며, 해도 그만이요 아니 해도 그만인 방담을 나눴을 것이다. 그런 중에도 문단이며, 시문학이며, 문인들에 대한 이야기도 몇 마디 복어탕에 섞어졌을 것이다. 그래도 그 식사 자리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식사가 끝날 때까지 반주 한 잔을 서로 간에 권하거나 청하지 않았던 일이다. 세 사람이 함께 식사하며, 그것도 얼큰한 복어탕을 들면서 반주 한 잔이 곁들여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하여 조금은 생경했으나, 을씨년스러운 겨울 날씨에 감기몸살기를 동반하는 상태로 노년의 시절을 함께 건너가는 마당에, 굳이 권하지 않는 반주를 청하여 마실 경황이 아니었음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이런 기억은 필연적으로 한 달 후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날도 몇 명의 시인들과 모임자리에서 유정의 와병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전북대병원에서 병석에 누운 그를 지켜볼 수 있었다. 그래도 건장한 아들의 간병을 받으며 투병하는 모습이 그리 심각하지 않겠구나, 여기며 병실을 나오려 했다. 그때 유정 시인이 내 손을 잡으며 “유연油然 미안하네!”라고 뜻밖의 말을 건네었던 목소리가 어제처럼 아련하기만 하였다. 그러면서 한 달 전 식사자리에서 반주 한 잔 권하지 않은 것이 이런 신병의 기미가 있었던 것인가, 의아했던 마음이 조금은 이해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리고 해가 바뀌었다. 한국문인협회 이사장을 교체하는 문단선거가 끝난 뒤였다. 필자가 한국문협 이사장 선거에 유정을 부이사장으로 출마를 알선했던 사연과 그럼에도 치열한 선거운동 과정에 동참하지 못하고 병석에 눕게 된 사연을 뭉뚱그려서 미안함을 표시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더라도 인간사 유한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문단의 한 자리가 목숨과 비교될 가치가 무엇이란 말인가? “이 사람아, 미안하긴 뭐가 미안하다고 그러나. 어서 병이나 떨치고 일어나면 되지!” 하던 당부를 외면하고 유정은 병석에 누운 채 새 봄이 오는 것을 기다리지 못 하고 끝내 유명을 달리하게 되었다.
그를 보낸 뒤 생각해 보니 유정은 시업을 필생의 업으로 삼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와의 시문학적 인연은 꽤 오랜 시간의 터울을 간직하고 있다. 1980년대 중반 전주지방에서 그래도 젊음의 패기로 시를 화제의 중심에 두고 몰려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나기가 장대비처럼 쏟아지는 한여름에 젊은 동년배의 시인 네 사람(정희수, 진동규, 소재호, 필자)이 의기투합했다. 이대로 시간만 축내서는 아니 된다. 시도 아니고 삶도 아닌, 생활의 방편도 아니고 정신의 지주도 아닌 채 시문학의 여울에 휩쓸려가서는 안 된다는 발의가 누군가에게서 있었던 것 같다. 우리 네 사람은 곧장 도원결의桃園結義를 하자 하였다. 그때 중화산동 슬라브 단독주택에 살고 있던 유정이 자신의 집 옥상이 도원은 아니되, 결의하기에는 안성맞춤이라며 우리의 소매를 끌었다. 유정의 집 옥상, 비치파라솔 아래 평상에서 동인의 결성을 결의하게 되었다. 때맞춰 소나기가 장대비로 쏟아지는 가운데, 유정의 맏이─병실에서 간병하던─ 꼬마가 맥주를 사 나르느라 꽤나 힘들어하던 모습이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뇌리를 스쳐지나가고 있다.
그렇게 도원결의[옥상결의]를 하고 난 바로 그 해 1987년에 탄생한 동인이 바로 <전주풍물>이다. 그 뒤로 우리는 한 달에 한 번씩 만나 작품을 교류하고 작품을 묶어 서로 나눠보며 시문학의 텃밭을 가꾸는 일에 매진해 왔다. 그렇게 하기를 여러 해 지속하다가 본격 『전주풍물』 사화집 창간호를 낸 것이 1992년이다. 이제[2014년]는 전북지방에서 창작활동을 하는 시인들을 중심으로 동인이 21명으로 늘어났으며, 매년 발행하는 사화집이 23호에 이를 정도로 질적·양적으로 팽창하여, 동인이라기보다는 문학단체의 성격으로 발전하였다. 유정이 바로 이 시문학동인 <전주풍물>의 산파역을 하였다.
이밖에도 유정은 필자가 초대회장으로 임기를 마친 전북시인협회를 이끄는 제2대 회장으로 봉사하였으며, 전주문인협회 회장으로 지역사회에 문학의 향기를 피우는 일에도 적극 동참하였다. 또한 유정은 서울에서 이충이 시인이 이끌고 있던 『시와산문』에도 참여하였고, 특히 전국단위의 문학단체인 녹색시인협회에는 열정적으로 그 책임을 다하느라 애썼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가 명운을 달리하기 직전까지 월간 『한울문학』의 주간으로 책임을 다한 것은 기억되어야 할 시업이라고 생각한다. 유정은 『한울문학』의 주간을 맡자 곧장 필자에게 시월평을 청탁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그가 고군분투하고 있는 시업에 어떤 방편으로나마 도와야겠다고 생각하던 중에 흔연히 집필을 하기로 했다. 그러면서 한 필자가 계속 월평을 쓰는 것은 조금은 식상할 수 있으니 딱 1년만 쓰겠다고 약속했고, 그 1년을 집필하고 나의 임무를 마쳤다. 그 때 유정이 평소에 아끼고 흠모하던 지역사회의 많은 문인들을 필자로 초대하고 있음을 눈여겨보며, 유정이 그렇게도 주간의 책임을 다하는 일이 자신의 문필생활의 진흥을 위하는 데만 뜻이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지역사회 문인들의 필력을 전국에 소개하고자 하는 의욕의 발단이었음을 알고 내심 그의 강단 있는 저력에 감탄하기도 하였다.
필자가 『한울문학』에 시월평을 1년 동안 집필하면서 매달 약간의 원고료를 받았다. 아무리 무명 필자의 원고료가 저평가 된다 할지라도 원고료라고 하기에는 주는 이나, 받는 이나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액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감내한 것은 이 적은 액수나마 순전히 유정의 호주머니 용돈에서 나온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필자만이 아니라 유정이 청탁한 원고에는 일일이 적은 액수, 그야말로 택시비 정도의 거마비를 지급해왔다는 사실을 알고는 유정의 문학생업이 얼마나 치열한 것인가를 짐작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이것은 세태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웬만한 잡지사나 이름 있는 출판사, 신문사에서도 “당신의 글을 실어주니 우리에게 감사해야 한다”는 당치도 않는 시대착오적인 발상을 간직하고 있는 이때에, 사재를 털어서 원고용지 값이나마 얹어주려 했던 유정의 마음은 아무리 상찬해도 모자라다 할 것이다.
유정은 이런 일들을 무슨 대가를 바라고, 어떤 반대급부를 바라고 했던 일이 아니다. 그저 시인의 한 사람으로, 한 시대를 문인으로 살아가는 처지에서 그냥 두고볼 수만은 없다는 의지가 이런 어려운 일들을 감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떠나고 나니 그의 이런 문학사랑─문인 존중의 아름다운 마음씨─이 그렇게 희귀하고 소중하게만 느껴진다.
■열권의 시집으로 남은 유정의 시정신
필자의 서가에 유정의 시집 10권이 남겨졌다. 시인은 가고 그가 남긴 시집들이 나를 지켜보며 시의 길을 묻고 대답하는 것 같다. 필자가 과문했거나, 혹은 받은 시집을 누락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꼼꼼히 그의 시집을 받아 읽고 간직해 온 내력으로 보자면 아마 이 10권의 시집이 그가 이 세상에 남긴 시업詩業, 시문학의 발자취일 것이다.
① 『춘하추동春夏秋冬』, 신아출판사, 1987.
② 『풀꽃을 위하여』, 도서출판 서울, 1989.
③ 『빈 집이나 지키는 달빛이 되어』, 도서출판 글마당, 1993.
④ 『손바닥으로 눈 가린 술래가 되어』, 신아출판사, 2001.
⑤ 『새롭게 눈 뜨는 그리움』, 시와산문, 2001.
⑥ 『내가 바라보는 하늘』, 시와산문, 2001.
⑦ 『내 마음의 풍경소리 날아간 자리』, 푸른사상, 2002.
⑧ 『내가 누운 자리에 꿈이 내리면』, 푸른사상, 2002.
⑨ 『내 목숨 다 풀고 싶다』, 시선사, 2005.
⑩ 『물의 길』, 시와산문, 2010.
각 시집마다 유력한 필자들의 발문-평설-해설이 붙어있어 그의 시를 이해하는 데에 참고하기에 충분한 분량의 글이 있다. 따라서 필자는 여기에서 다시 그의 시 세계를 논하는 췌언을 덧붙이지 않으려 한다. 다만, 젊음의 한 시절을 오로지 시문학에 기울인 순수 열정과 그를 통해서 나눴던 시우詩友로서의 우정, 또한 지역사회 문단행정의 심부름꾼으로 함께 고뇌하며 인생의 노년에 이르렀던 문우文友로서의 감회를 그의 시를 통해서 진중하게 기억하고자 할 따름이다.
사람들은 글이 곧 그 사람이라고 한다. 글을 보면 글을 쓴 사람을 연상할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사실은 그렇다. 글은 한 사람의 정신의 반영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글은 곧 그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정 시인을 모르는 사람이 유정의 시를 읽는다면 아마도 시인에게 ‘매우 곱상하고 여린 순둥이’의 이미지를 떠올릴 것이다. 유정의 시에는 여리고 섬세하며 자연적이고 감성적인 소재와 시어들의 등장 빈도가 높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그런 이미지를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유정 시인을 직접 보면 매우 우락부락한 얼굴과 선이 굵은 행동거지로 ‘사나이다운 단호한 인상’을 받게 된다. 하긴 시가 얼굴 생김새대로만 쓰이지는 않겠지만, 그처럼 남자다운 외모에서 어쩌면 그렇게 섬세하고 심지어 여성적이기까지 한 시상이 떠오르는지 궁금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묵직하고 투박한 질그릇에 담기는 다향茶香처럼, 그의 시는 한국 서정시의 통주저음通奏低音인 여성적 화자의 맥락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시작 태도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바람에 묻어 온 동백꽃의 향기에서
봄소식을 들었습니다
아직 차가운 기운 내 살갗에 내리고
코끝을 스치는 바람은 더욱 온기도 없지만
땅 밑 깊은 곳으로부터 들려오는
겨울이 무너지는 소리도 함께 들었습니다
이곳저곳 남아있지만
시누대 퍼런 이파리 곧추 세우고
먼 발치에서 망설이는 봄 구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무채색 투성이던 내 마음도
미련한 가슴속이지만 속내는 드러내지 못하고
이제는 연초록 그림이 좋아집니다
가끔씩 기침도 하며
저 깊은 계곡 속 얼음도 깨고
영혼을 부르는 발걸음으로
봄을 불러오고 싶습니다
──정희수, 「봄편지」 전문
이 작품은 유정의 시정이 어디에 근원을 두고 있는지 짐작하기에 좋다. 그의 시집 『새롭게 눈뜨는 그리움』에 첫 번째로 실린 작품이다. 유정의 시정詩情이 ‘그리움’이라는 시정詩情에 마련해두지 않았나 생각할 정도로 시집의 제목부터 ‘그리움’이지만, 이 시는 물론 시집에 수록된 여타 작품에서도 그리움의 정서가 넘쳐난다.
유정은 자연과 그 자연이 피워내는 생명의 약동함에서 마음의 눈을 떼지 못하였다. ‘무채색이던 마음’까지도 온통 자연의 미감에서 눈을 떠, ‘연초록 그림’이 된다고 고백한다. 그리하여 마음 안에 얼어붙어 있는 삶의 냉혹함[저 깊은 계곡 속 얼음]도 깨뜨리고 마침내 ‘영혼을 부르는 발걸음’으로 봄[詩]을 부르는 시의 세계를 살다 간 것이다.
그가 우리[시의 독자]에게 보낸 편지는 아직도 유효하건만, 그는 이미 봄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시의 자장 안에서 봄 편지에 담아 보냈던 시인의 삶마저 떠나보낸 것은 아니다. 그를 통해서 부단히 마음 안의 냉기를 깨뜨리며 삶의 전면에 봄을 불러오는 일을 중단할 수는 없음을 안다.
달려온 강물
둑 넘어
출렁대는 물 속 깊이 흘러
바다의 품 안에 들었다
물결 껴안고
떠돌던 구름 몇 점
가라앉혀
섬으로 찾아들면
해병에 물새들 울음
가득 찬 고요 깨트려
벌써 내 등은 앙상하게
뼈 문신만 남아
지나온 길 더 무거워졌다
땀냄새 찌든
헤어진 그 자락
무진하게 허둥댄
그 무지개는 얼마나 아름다웠나
수맥 한 줄기
평면도 꺼내어
곱게 그렸다
──정희수, 「물의 길」 전문
이 작품은 유정의 시집 『물의 길』의 표제시라 할 만하다. 섬세한 자연 서정에 머물지 않고, 그 자연성의 순박함으로 추구한 삶이 곧 ‘물의 길’이었음을 은유한다. 유정의 시 인생이 어떤 경로를 거쳐 오게 되었는가를 짐작하기에 좋은 작품이다. 가장 좋은 삶은 단연 물 같은 삶이다.[上善若水] 그 좋은 삶으로써의 물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형상화하여 보여주고 있다.
5개 연으로 구성되어 있는 위의 시는 각 연마다 ‘물’의 모습이 다르게 상징화되어 있다. 1연에서 물은 ‘둑 넘은[강물]이→[바다]의 품’으로 든다면, 2연의 물은 ‘떠돌던[구름]이→[섬]으로’ 찾아들고, 3연의 물은 ‘[물새]들 울음이→[문신]으로’ 무거워졌다가, 4연의 물은 ‘[무지개]로→[아름다워]지기도’ 하고, 마지막 5연에서 물은 ‘[수맥]한 줄기로→삶의 [평면도]’를 그려놓는 것으로 결구한다. 그러니까 유정 시인은 물 같은 인생, 물을 지향하는 최선의 삶이 어떻게 변용되어 가는가를 다섯 개의 변주형태로 보여준 셈이다. 자연의 서정이 물의 모습으로 변용하여 마침내 도도한 수맥의 평면도를 자신의 삶에 ‘시’라는 이름으로 그려놓았던 것이다.
그런 삶이라고 해서 어찌 고뇌가 없었겠는가? 그의 시업에 나타나는 고뇌의 일단을 다음 작품에서 엿볼 수 있다.
사람들은 가끔씩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떠난다
어린 왕자는 별자리 속에 숨고
다산은 유폐되어 간다
내 시장기 밴 시들이 일제히 일어서
첫울음 우는 천 년은 아프기만 하구나
어디에 숨어지낼 것인가
저 위선들이 날뛰는 바다,
파도는 잠재워 줄 선장도 없는데
자꾸 거세어지는 바람이 걱정이구나
나 하나 지키는 것이 무슨 대수일까 마는
저 태풍으로 몰아오는 그르친 위선들이
밝은 햇살 놓아두고
나를 어둠 속으로 끌고 간다
소름끼치는 이 어둠의 답답함
수심에 잠기어 나는 파도에 밀려간다
꿈도 꿀 수 없는 심해로
──정희수, 「근심」 전문
이 작품은 유정의 시집 『손바닥으로 눈 가린 술래가 되어』에 실려 있다. ‘봄 편지’로 드러내 보였던 유정 시심의 근원이 ‘물의 길’로 삶의 진로를 삼아가다가, 부딪친 암초이자 암벽 같은 현실의 고난을 만났던 것이다. 어찌 순탄한 항해만 바랄 것인가? 순수한 꿈[어린 왕자]들과 사려 깊은 지성[다산]은 그 현실의 암벽에 부딪혀 좌초 하[숨]거나 쫓겨 갈[유폐]뿐이다. 우리 인생은 새롭게 출발하는 각오의 시점[천년]마다 아픔을 동반한다. 그래서 시인은 승자의 기수가 아니라, 패자의 눈물을 닦는 손수건이 되어야 하며, 그런 시인이 노래한 시는 승자를 찬양하는 전승가가 아니라, 패자를 위로하는 엘레지가 되어야 마땅한 것이다. ‘나 하나 지키는 것이 무슨 대수일까’ 스스로 자신의 안위만이 아니라, 우리 시대가 짊어지고 나아가야 할 고뇌의 일단을 분명히 인식하고 시업에 나섰던 유정이다.
‘나를 어둠 속으로 끌고 갔던 것’이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묻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소름 끼치는 어둠’이었음을 간파할 수 있다. 시인은 말하기 전에 직관으로 그것을 간파한다. 태풍으로 몰려오는 위선들로 인하여 시인의 의식은 수심으로 밀려간다. 꿈도 꿀 수 없는 깊은 바다[심해]로 밀려간다. 그러므로 이 시에서 유정의 수심은 수심愁心이자 수심水深이 된다. 다만 아무리 간고한 삶의 고통이 따를지라도 시인은 결코 수심獸心을 가질 수 없어 우리의 삶은 어둡기만 하다.
고통 속에서도 우리는 하늘을 바라보아야 한다. 내일을 위하여 꿈꾸기를 포기할 수 없다. 유정 시인은 자신의 시집 『내가 바라보는 하늘』에서 「내일을 위하여」를 통해 이런 인생이 밟아 나아가야 할 필연성에 대하여 당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바람이여 불어라
강풍이라도 좋다
아무리 추워도 다시 봄은 와서
물은 풀리어 흐르고
가지에 매달린 나뭇잎들 흔들려 날려도
언젠가 다시 열매는 함께 하느니
사람 사는 일들에 고갯길이 없다면
얼마나 삭막하랴
인생은 다 그렇게 살다가 가는 것 아니더냐
우리는 언제나 새로운 계절을 기다리며
그 계절을 예비해야 하느니
내일의 바다는 늘 새롭단다
하지만 어제를 잊지는 말라
──정희수, 「내일을 위하여」 전문
자연성에서 빌려온 이미지로 삶의 길-인생의 길을 제시한다. 마치 유정 자신이 미처 다 노래하지 못한 시업을 당부라도 하듯이, 아니면 미처 다 남기지 못한 시정의 유지를 남기기라도 한다는 듯이 그려냈다. 삶의 고통이 아무리 심해도[바람-강풍] 봄[화락함]은 와서 열매[보람]를 얻기 마련이다. “인생은 다 그렇게 살다가 가는 것 아니더냐”고 달관의 정신으로 인생을 규정하지만, 매사 자신보다 자신이 그려내는 시업詩業을 인생의 업보로 자임했던 자만이 할 수 있는 잠언이라 생각한다.
수시로 겪는 고난과 고통[고갯길]마저도 거부해야 할 역경[삭막함]이 아니라, 인생의 모습을 다채롭게 하는 장식으로 치부했던, 이 달관의 시정신은 어디에서 비롯한 것일까? 매사 문제를 복잡하게 생각하면 한없이 복잡하게 꼬이기 마련이고, 매사 문제를 단순화하면 또한 쉽게 풀리는 것이 모든 문제의 본질일 것이다. 인생이 거창하고 복잡한 미로가 아니라, 자연의 사계절처럼 힘든 고갯길이 있으면 쉬운 내리막길도 있는 것이 바로 인생이라고 단순화하면 또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유정 시인은 그런 맥락과 핵심을 간파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험한 폭풍우 속에서도 ‘내일의 바다’를 상정하여 생명이 약동하는 장을 상정했으며, 그것을 예비하는 삶을 주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맥락의 바탕은 바로 ‘어제[삶의 체험]에 있었음을 기억하게 한다.
■또 한 번의 식사
유정의 시업 인생을 거칠게 더듬어 봤다. 네 편의 시를 압축해 보니 그의 시 인생이 한눈에 보이는 듯하다. “봄 편지”로 띄워 보냈던 그의 시세계를 접하면서, 여리고 섬세한 여성화자의 목소리로 담아내고자 했던 진실이 결국은 삶의 진실임을 안다. 강하고 험악한 힘이 언제나 부드럽고 여린 리듬 앞에서 무너지지 않던가. 유정의 시어 선택의 특성이 이를 잘 보여 준다.
유정의 시심은 ‘물의 길’을 통해서 현실화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니 현실화의 외피성이 아니라 내면화의 길을 택한 것으로 보아야 마땅하리라. ‘강물 > 구름 > 물새 > 무지개 > 수맥’으로 변용하면서 결국은 어떤 모습으로 사느냐 보다는, 어떤 지향성을 지니느냐가 중요한 것이라는 해석으로 보인다. “무엇이 되느냐보다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는 덕담처럼 말이다. 그런 삶의 과정에서 “고뇌와 ‘근심’”이 없을 수 없다. 그럴지라도 “내일을 위하여” 오늘을 부단히 경작하고, 그렇게 이룬 오늘이 바로 ‘어제’가 되는 시간의 속성을 잊지 말며, 나 하나 떨어져 밀알이 되는 부활의 미래관을 펼쳐낸다. 이런 압축된 시세계의 답사가 유정 시의 폭넓고 깊이 있는 시심을 단정하고 속단한 폐단의 위험이 있음을 염려한다.
그럴지라도 그와 나눴던 마지막 식사의 온기가 미처 다 식지 않은 시점에서 시우로서─문우로서 그의 갑작스러운 서거를 애석하며, 그와 마주 앉을 또 한 번의 식사를 나눌 때까지 안부 삼아 몇 자 적는 소회다.
이동희 / 1946년 전주에서 태어났으며 1985년 『심상』으로 등단했다. 시집 『뜻밖의 봄』 외 다수, 수상록 『숨쉬는 문화 숨죽인 문화』가 있다. 전북문학상, 표현문학상, 전주시예술상, 목정문화상 수상.
정희수 시인, 이 무슨 청천벽력이란 말이오
김학
정희수 시인, 이 무슨 일이오? 이제 고희를 갓 넘긴 그대가 왜 그리 성급하게 하늘나라로 간단 말이오? 이 땅에서 정시인, 그대가 할 일이 태산처럼 많은데 왜 그리 빨리 떠난단 말이오? 하늘도 무심하단 말이 저절로 나오는구려.
정희수 시인, 하늘나라엔 무사히 도착하셨소? 어떤 교통편으로 가셨소?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이승과 저승 사이엔 소식을 주고받을 수 없어 안타깝구려. 전화는 물론 이메일도 통하지 않을 뿐 아니라 카카오톡도 주고받을 수 없으니 얼마나 답답하시오?
정희수 시인, 돌이켜 보면 그대는 참 정겨운 분이었소이다. 내 동생과 고등학교 동창이어서 그대는 유난히 나에게 잘 해주셨지요. 내가 전북문인협회 회장 때는 수석부회장으로 많은 도움을 주셨지요. 특히 그대가 전북시인협회를 조직했던 일은 잊을 수 없소이다. 역대 전북문인협회 선배 회장들이 못해냈던 일이 아니었던가요? 그런데 그대는 전북문인협회 부회장으로서 사비를 들여가며 기어코 전북시인협회를 조직했지요. 대단한 일입니다. 전북의 시인들은 지금 전북시인협회 우산 아래서 활발하게 활동들을 하고 있다오. 그들이 해마다 한 권씩 펴내는 동인지를 볼 때마다 나는 정희수 시인, 그대의 공로를 생각한다오. 또 내가 펜클럽 전북지역위원회를 창립할 때도 정 시인은 수석부회장을 맡아서 동분서주 해주셨지요. 돌이켜 보면 나는 정희수 시인의 도움만 받았구려. 참으로 고마웠소이다. 그대가 아니었다면 나는 전북문인협회 회장이나 펜클럽전북지역위원회 회장을 성공적으로 해낼 수 없었을 것이오.
1999년 8월이던가요? 전북문인협회 회원 38명을 이끌고 금강산 문학기행을 다녀왔던 일이 떠오르는군요. 금강산 관광객 민영미 씨 사건으로 금강산 관광이 중단되었다가 재개되어 첫 번째로 갔지 않아요? 그 영향으로 45명의 회원이 참가신청을 했다가 7명이 취소하는 바람에 38명이 다녀왔었죠. 그때 우리는 강원도 주문진항에서 봉래호를 타고 금강산으로 갔었던가요? 우리는 그 봉래호에서 시화전과 문학 강연, 시낭송회 등 3대 행사를 마련하여 봉래호에 승선한 6백여 관광객들의 관심을 끌기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정시인, 기억나지 않소이까? 그 봉래호에서 관광객 노래자랑이 있었는데 전북의 선산곡 수필가가 출연하여 판소리를 불러서 대상을 받지 않았던가요?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그 기억이 생생하군요. 그밖에도 컴퓨터 시화전과 앞치마시화전을 여는 등 전북에서 처음으로 시도했던 색다른 시화전으로 주목을 끌었던 일도 생각납니다. 전북의 시인들이 스스로 자기 작품 중에서 대표작 3편씩을 골라 전북시인대표작선집을 출간했던 것도 전북문학사에 기록될 것이라 믿습니다. 그런 일을 할 때마다 정희수 시인은 앞장서서 나를 도와주셨지요. 고맙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런 고마움을 이제야 표하게 되어 미안합니다. 두고두고 감사하려고 했는데 그대가 너무 빨리 이승을 떠나버리는 바람에 이렇게 고마움을 표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미안합니다.
정희수 시인, 그대가 전북대학교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금세 퇴원하겠지 생각하며 차일피일 미루며 기다렸지요. 왜냐하면 나와 둘이서 점심식사를 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입원했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입니다. 그때만 해도 건강했지 않아요? 그런데 한 달이 지나도 퇴원을 하지 않아 나도 문병을 갔지요. 마침 병실 앞에서 정시인의 부인을 만났습니다. 근황을 자세히 설명해 주면서 부인께서는 정시인을 만나지 말고 그냥 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마지막이 될 줄이야 어찌 알았겠습니까? 정시인이 그렇게 홀연히 떠날 줄 알았더라면 그날 꼭 얼굴이라도 보고 왔을 텐데 그저 후회막급일 따름입니다.
정희수 시인, 그대는 이승에서 좋은 일들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래서 정시인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을 줄 압니다. 정시인, 아직 미련이 남은 일들도 있겠지만 이제는 모두 다 잊으시구려. 정 시인이 못 다한 일들은 후진들이 알아서 잘 해낼 것입니다. 그동안 이승에서 고생 많이 하셨으니 이제는 하늘나라에서 편안히 쉬소서. 삼가 명복을 빕니다.
김학 / 1980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했으며 수필집 『하여가 & 단심가』 외 14권, 수필평론집 『수필의 길 수필가의 길』 외 2권이 있다.
그는 녹색시綠色詩를 남겨두고 영원永遠으로 떠났다
이충이
정희수 시인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은 갑작스런 일이였다. 그는 오래된 시의 형식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시, 남과 다른 시를 추구했다. 최근 몇 해 동안 부단히 새롭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의 시는 아름다움을 통해서 일상의 모순과 충돌을 자연스럽게 녹색시로 담아내고자 했다. 이것은 그칠 수 없는 변주의 연속이었다. 그의 시 쓰기는 돌이켜보면 어떤 네모나거나 세모라는 틀 안에 대상을 집어넣으려 하지 않았다. 그 바깥으로 비워내는 시도였다. 다시 말해 대중적인 틀에서 끊임없이 벗어나려 했다. 시를 리듬으로 전개하고 디테일로 묘사하면서 비워내는 시작업을 계속했다. 그의 유작에 이런 형식의 죽음에 관한 시편이 있다.
그가 비워낸 네모나 세모의 틀 속에는 환상과 상상력, 현재와 더불어 과거와 미래가 존재하는 신성神性의 영원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신성에 대하여 한 마디의 말도 추가하지 않았다. 그가 말하는 녹색시는 지나온 과거나 지난한 현재와 영원한 미래의 생명生命을 지칭한다. 모두가 그러하듯이 우리의 일상도 언제나 불안전했고 삶도 언제나 깨질 수 있었다. 우리가 해변에 만들어놓은 모래성처럼 파도가 밀려오면 쉽게 무너져버릴 수밖에 없다. 우리는 특히 죽음을 통해 불안한 일상과 지난한 삶을 복기할 수 있다. 어떠한 죽음이라할지라도 살아남은 자들에게 죽음은 강렬한 메시지를 남긴다.
영원으로 떠나감을 아쉬워하면서 한없이 그리워하지만 모두가 빠짐없이 떠나가는 중이다. 모두가 삶에서 한 번 밖에 만날 수 없는 존재이다. 누군가의 말처럼 언제일지 모를 ‘정해진 날에 덮쳐올 철저한 비존재상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어쨌든 사물과 대상은 철저한 비존재상태로 변한다.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는 말이다. 무엇 하나도 삶을 끝간 데까지 소유할 수 없다. 삶을 소유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삶은 우리를 가차없이 팽개친다. 이미 예정된 시간은 삶을 소유하려는 우리를 조용히 영원으로 안내한다. 더러는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죽음은 경건하고 명성적이며 저 슬프도록 아름다운 속성, 곧 시간과 영원의 연속성’이 함께 있다라고 말이다. 이것은 슬프다고 말릴 수 없는 속성이다. 슬픔은 결국 살아남은 자의 몫이다. 살아남은 자는 종교를 통해 영원으로 갈 수 있다.
그의 시를 통해 느꼈던 진실을 되새긴다. 우리는 앞으로 얼마를 살지 모르지만 이런 진솔한 시인을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에게 녹색시는 영원의 생명을 연결하는 패러다임이었다. 이 패러다임을 구성하려고 모인 시인들은 현실의 고통을 감수하고 미래를 바라보며 시라는 영혼 속에 시작품으로 살아남는다. 현재의 삶을 포기하더라도 시로 남을 것이라는 확신이 필요하다. 어떤 시인이 시로 남을 것인가. 물론 영혼의 시를 포기해서 살아남을 확률은 거의 없다. 우리는 늘 슬픔 속에 있는 존재가 아니다. 슬퍼하고 있을 뿐이며 시간에 밀려가는 존재이다. 그래서 우리는 슬픔에 머물기를 거부하며 낡고 부서지면서 영원으로 가고 있는 중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좋은 시를 읽거나 좋은 시인과 가까이 있으면 자신이 자신을 얼마나 포기할 수 없는지를 알 수 있다. 자신의 존재를 무관심한 채 지나칠 때도 있다. 우리는 서로 함께 어울리다가 헤어지는 방법에 늘 서툴다. 서툰 일들이 너무 많아서 고통은 그 때마다 귀먹은 우리를 일깨워준다. 상실의 고통이야말로 마음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다. 고통으로 상처투성이가 되었다가 온전해질 수 있다는 아이러니이다. 그러므로 삶의 완성, 영원은 곡직曲直한 것이다. 다시 말해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다. 이 시작은 역동의 미학이다. 그는 역동의 미학을 전제로 녹색시의 패러다임을 만들어 나갔다. 직선이거나 곡선일 수도 있다. 말을 전하는 입이 하나이듯이 진리는 하나일 수 있다. 또한 그 말을 듣는 귀가 둘이듯 둘일 수도 있다. 그것이 하나인지 둘인지는 고통을 통해서만 결론에 도달한다.
세상이라는 공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물거품 같은 삶을 시의 밝은 거울에 비춘다. 파블로 네루다의 말처럼 ‘시란 쓴 사람의 것이 아니라 시를 필요로 하는 사람의 것이다.’ 시인이란 통제할 수 없는 욕망을 통제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이런 시인은 강렬한 현실의식과 치열한 시대정신 그리고 새로운 형식을 위해 일상의 자의식을 드러내고 현재성을 형상화한다. 또한 관념과 현실이 만나 팽팽하게 긴장한다. 이 긴장감이 아름다운 녹색시를 만든다. 그는 이런 아름다운 시를 만들기 위해 우리가 절망에 빠졌을 때 구원에 이르는 길에서 앞장서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에게 더욱 더 질문을 제기할 것이다. 우리는 그가 말하는 녹색시의 뿌리가 인간이라는 종種과 인간의 언어 뿌리만큼이나 깊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는 시인을 무용지물로 만든 이 시대의 대중시를 산소통으로 짊어지고 사는 사람들의 일상에서 모르는 척 방관하는 것과 서정과 관념을 앞세우는 것을 걱정했다. 그래서 현재에 대한 질문으로 과거와 현재에 동시 말을 거는 치열함으로 사실 속에서 허구를 찾았다. 그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누리려면 불행을 미워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물론 삶을 논리적이고 도덕적으로만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 시간이 모든 것을 다 파괴한다는 사실과 다시 돌이킬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그는 언급했다. 그가 추구했던 품격있는 시와 갈수록 범람하는 싸구려 대중시 간의 완벽한 균형을 이룰 수는 없을까. 우리가 녹색시를 쓸 수 있는 것은 인간생명의 절대성 때문이다. 세상이 아무리 망가져도 그 세상 때문에 망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직도 방황하고 꿈꾸고 있다. 이것은 실존 자체의 힘으로 일체를 감당하려는 자각적 자존심에서 발단한다. 그는 무너져가는 세상을 몸으로 아파했다. 철저하게 자신의 의식흐름을 헤치면서 자신의 내면에서 고통을 끊임없이 길어 올렸다. 개인과 세상의 관계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치열한 삶이었다. 그는 말하는 것과 글 쓰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다르지 않았다. 경박과 위선의 시대에서 들풀 사이에 섞여서 한 포기 들풀로 살았다. 자신의 키를 낮추어 다른 들풀과 어깨를 맞추었다. 그는 자신의 삶의 의미를 스스로 찾아가는 녹색시인이었다. 우리는 대때로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잊어버릴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수없이 절망한다. 우리도 이제 조금씩 분별하기 시작했고, 저 영원을 조금씩 가늠하기 시작했다.
이충이 / 1943년 목포에서 태어났으며 1984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빛의 파종』 외 4권이 있고 시선집 『달의 무게』가 있다. 윤동주문학상, 자유시인상, 한국녹색시인상, 한국기독교문학상 수상.
그냥 시인이 아니었던 편집주간
장세진
이런저런 모임이나 문학회에서 만나 교유해오던 이들이 세상을 달리하고 있다. 엊그제 2주기를 넘긴 라대곤 소설가에 이어 작년엔 시인 여러 명이 작고했다. 그리고 2015년 2월 24일 정희수 시인이 우리 곁을 떠났다. 1945년생이니 그렇게 서둘러 갈 나이는 분명 아니다. 이렇듯 급하게 우리 곁을 떠날 줄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지난 겨울 혹독하게 몰아친 한파 때문이었을까. 고래희古來稀에 접어든 정희수 시인은 그의 시 「꽃샘추위」의 “아직 나무들 햇살 한 줌/ 제대로 쥐어보지도 못했는데/ 왠 추위는 그렇게 매운 것인지/ 아침나절 찾아왔던 까치/ 물고 왔던 풀씨는 싹도 못내고/ 더구나 실뿌리도 뻗지 못해/ 몸 웅크리고 쓸쓸히 뒤돌아갔다.”처럼 너무 허망하게 가버렸다. 막상 떠나고 나니 그가 그냥 시인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1987년 『월간문학』, 이듬해 『시대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물의 길』, 『풀꽃을 위하여』, 『내가 바라보는 하늘』 등 8권의 시집을 펴낸 시인이 맞지만, 그는 타계 직전까지도 어느 월간 문학지 편집주간이었다.
오는 19일 한울문학의 년말 행사가 국회의원회관에서 개최하도록 잡혀 있어 신년호를 이 행사에 사용하려 합니다. 또 인쇄소가 폭주로 인하여 부득히 원고를 오는 12월 7일까지 부탁 드리겠습니다. 촉박한 기일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신년초 날자(짜) 잡아 술 한 잔 대접해 드리겠습니다. 늘 건강하십시오.
2014.12.1.
정희수 올림
그가 우리 곁을 서둘러 떠나기 직전 받은 메일이다. 거의 술을 끊고 살다시피하는 터라 ‘술 한 잔’을 잔뜩 기대한 건 아니지만, 신년초가 되어도 잡지는 오지 않았다. 영화평을 연재하는 3년여 동안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더욱이 원고료는 이미 연말에 보내온 터였다. 내 통장엔 2014년 12월 26일 ‘보낸 이, 정희수’의 원고료 입금 내역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자연 배달사고인가 하는 의구심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 월간지에 영화평을 연재한 건 2012년 4월호부터다. 당연히 정희수 주간의 청탁이 있어서였다. 원고료 없으면 안 한다고 했더니 많이는 못 준다며 꼭 써달라고 했다. 그러기를 3년. 너무 ‘장기집권’ 아닌가 하여 2년쯤 되었을 때 그만두려 했으나 정희수 시인은 요지부동이었다. 적은 원고료라곤 하지만, 내가 먼저 그만둔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지난 1월, 그러니까 원고료 입금후 우편으로 받곤 하던 잡지 신년호가 오지 않은 것이다. 메일을 보냈으나 며칠간 ‘읽지 않음’으로 있었다. 전화 역시 불통이었다. ‘외국여행이라도 갔나’ 하는 생각을 하다 가까스로 통화가 되었을 때 전화를 받은 건 뜻밖에도 아들이었다. 비로소 와병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들은 아버지가 많이 좋아진 상태라고 했다.
이후 잡지 발행인 겸 편집장과 통화하여 내 글이 실린 잡지 신년호를 받을 수 있었다. 다음 호 원고도 두 번 더 보냈으나 원고료는 미입금이었다. 메일로 편집장에게 문의했더니 본사 차원에서 원고료를 지급한 적이 없다는 대답이었다. 그렇다면? 정희수 시인이 사비를 들여 3년 동안 원고료를 꼬박꼬박 보내온 것이었다. 세상에, 어떻게 그런 일이!
나뿐만이 아니다. 정희수 시인이 섭외한 이 지역 작가들은 10여 명에 이른다. 물론 나처럼 3년을 계속 연재한 경우는 거의 없다. 월간 잡지라 그런지 매호 수록필자가 바뀌었다. 그들에게 소액이라도 원고료를 지급해왔다면 이건 사비가 아니라 ‘사재’를 털어 편집주간을 해온 것이 된다. 퇴원 후 만나면 그 이야길 꼭 해야지 했는데….
정희수 시인은 전주문인협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평론가인 내가 문인시화전에 난생 처음 시를 출품한 것은 순전 그의 덕분이다. 정년퇴직 당시 전주동암고등학교장 등 같은 교단에 있어서였는지 10년쯤 후배인 나를 각별히 예뻐해서였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나는 출품할 용기를 냈다.
지금 나의 집 거실에 걸려 있는 <정거장>이란 시가 그것이다. 연전에 정지용백일장 대상을 받은 시였지만, 액자로 표구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걸 정희수 회장이 ‘공짜로’ 만들어준 것이다. 전시 마친 액자를 찾으러 그에게 갔던 기억이 새삼 떠오른다. 벌써 9년 전쯤의 일이다.
그 무렵 떠오르는 추억이 또 있다. 전주문인협회가 내는 기관지 이름은 다소 엉뚱하게도 『문맥』이다. 지역에선 대부분 안다해도 외지 문인들로선 아리송할 수밖에 없는 이름이다. 나는 정기모임에서 그걸 불식시키자며 『전주문학』으로의 제호 변경을 제안했다. 정희수 전주문인협회장은 흔쾌히 동의했지만, 그러나 지금도 기관지 이름은 『문맥』 그대로다.
아무리 한 번 왔다 가는 길이라지만 너무 빨리 가버린 정희수 시인은 노송문학회장 때 글쓰기 재능이 있는 중·고생을 선발, 소정의 장학금을 지급하기도 했다. 또 한국녹색시인협회장, 한국녹색문학아카데미 이사장을 역임하는 등 남긴 발자취가 적지 않다. 한편 정희수 시인은 평생 교단 봉직으로 받은 목조근정훈장을 비롯 전북문학상, 백양촌문학상, 아시아시인상, 한국녹색시인상 등도 수상했다.
그가 떠난 후 우편물이며 문자나 메일 등을 다시 들여다 보았다. 작고하기 불과 두 달 전 보내온 문자나 메일이 너무 생생해 다시 만날 수 없다는 현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한국녹색문학아카데미 이사장 시절 그가 보내온 연하엽서에 인쇄된 「나의 기도」라는 시가 눈에 들어온다. 일부나마 잠깐 음미해보자.
오늘과 내일 서로 다르지만
너와 나 또한 다르지만
자기 모양대로, 있는 그대로
마음이 통하는
그런 빛깔이게 하소서
산 것들과 죽은 것들
그 모든 것들 함께 품어 안는
그런 넓은 가슴의 하늘이게 하소서
빈 하늘에도 몇 줄 선 그으면
생명들 살아서 일어나는
그런, 그런 생명의 하늘이게 하소서.
나는 그가 노래한 대로 그런 하늘의 품에 안긴 걸 믿으며 그예 작별의 인사를 나눈다. 그에 대한 생각이 오래오래 일렁이겠지만, 소망도 있다. 그의 문학적·인간적 향취가 유족이나 문인단체 등에 의해 선양되는 것이다. 부디 영면하소서!
장세진 / 1955년 전주에서 태어났으며 1983년 <서울신문> 방송평론, 1985년 『스크린』 영화평, 1990년 <무등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문학평론집 『한국대하역사소설론』, 영화평론집 『영화, 사람을 홀리다』 등 42권의 저서를 출간했으며 전북예술상, 전주시예술상, 신곡문학상, 전북문학상, 남강교육상 수상.
달빛소리 들으시나요
──정희수 선생님을 추모하며
김영자
꽃비가 내리는 아침입니다. 꽃샘추위도 지나고 벚꽃 활짝 폈던 나뭇가지 사이 사이에서 봄비와 꽃잎들이 한몸이 되는 순간입니다. 4월의 아침 빗방울 소리는 한몸이 되는 순간의 경건함 때문에 적막감을 더 하고 있습니다. 완전한 고요입니다. 떨어지는 꽃잎들이 데리고 오는 소리 때문에 더 깊어지는 고요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봄날 아침에 내리는 꽃비는 꽃잎을 아래로 내리지만 자신의 향기는 자꾸만 하늘 위로 올리는 것 같습니다.
어제는 선생님의 서재에 들렸습니다. 그렇게 사랑하시던 시산문방 선생님의 서재에는 170여 편의 시가 지금 그대로 꽂혀있습니다. 여러 편의 시에서 유난히 자주 표현되는 ‘달빛소리’가 제게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한참 동안 동인들과 함께 선생님의 시에 대한 열정, 시에 대한 희망, 시와신문사를 아끼시던 마음을 이야기하다가 선생님께서 그리도 좋아하시던 달빛소리를 들으며 밖으로 나왔습니다.
어이 이리 서둘러 떠나셨나요? 삶의 끄트머리에서 ‘내 손은 약손이다’ 속삭이는 어머니의 따스한 손길이 그리워 그리 빨리 가셨나요? 시가 보이지 않을 때는 바위에 소리를 새기며 그 손끝으로 시를 읽는다 하시더니, 아직 시의 햇살 한줌 쥐어보시지 못했다고 아쉬워하시더니….
몇 년 전 광화문시인회가 잠시 멈출 듯 했던 때였지요. 회원들 모두 걱정만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아무래도 선생님께서 끌고 가셔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라고 말씀 드렸을 때,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시던 그 모습이 생생합니다. 그 동안 시와산문문학회, 한국녹색시인협회, 광화문시인회에서 활동하시면서 보여주신 열성은 참으로 대단하셨습니다. 선생님 초청으로 여러 번 전주에 갔을 때마다 정 많고 따스한 마음 듬뿍 받으면서 송구한 마음이 들었던 기억이 되살아납니다. 그런데 지난 가을 전주 문학기행이 마지막 여행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른 아침 왱이집에서 아침을 들고 모과를 탐내던(?) 제게 모과 한 개 얻어 주셨는데 겨우내 잘 숙성되었는지 모과향이 그윽한 그 모과차를 마시며 지금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덕진공원의 마른 연잎들도 생각납니다. 늦가을 마른 연잎들이 가득한 덕진연못을 보면서 시 한편 쓸 수 있을 것 같아 사진만 여러 장 찍어왔는데, 몇 줄의 메모만 담아 왔는데, 아직도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내 안에서 마른 연잎들이 새잎을 내는 날, 가슴속에서 발효되어 새 연꽃이 피어나는 먼 훗날 시 한편 쓸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 때가 오면 덕진공원의 시비를 설명해주시던 모습과 함께 전주 문학기행의 추억들이 다시 물밀 듯 밀려오겠지요. 시 낭독회 밤을 열었던 경기전이며 전북문학관, 신석정문학관 방문, 최명희 문학관에 전시된 선생님의 작품 이야기와 모주 한 잔 나누며 전주막걸리 거리 조성할 때의 이야기들이 오버랩 됩니다.
어느 해인가 지리산 팔랑치가 너무 좋아 그 곳에 우리를 초대하셨습니다. 팔랑치에서 하룻밤을 묵고 함안으로 넘어가던 길목에서 지리산을 가장 아름답게 볼 수 있는 곳view point으로 안내해 주셨지요. 겹겹이 보여주는 지리산의 몸을 바라보면서 휴식을 취할 때 참으로 정이 많으시다는 것을 느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요즈음엔 목요까페로 바뀌었지만 그 먼 길 마다하지 않으시고 몇 해 동안 수요까페에 거르지 않고 나오실 때였습니다. 까페모임을 마치고 늦은 밤 함께 3호선 지하철을 타기 위해 걸으면서 나누던 이야기, 밤늦게 귀가하면 피곤이 몰려와 다음 날까지 힘들어지는 제 경우를 생각하면서 입버릇처럼 자주 물었던 기억의 말.
“이렇게 밤늦게 심야버스를 타고 가시면 피곤하지 않으세요?”
“심야버스라 편안하고 잠들면 괜찮아요. 아직까지는 건강해요.”
하셨는데, 가끔 청바지차림으로 어깨에 메시던 그 밤빛가방이 잘 어울리셨는데, 지나간 이야기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제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헤어짐을 이별이라고 합니다. 살면서 겪는 일,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도 찰나인 것은 분명합니다. 봄날도 가고 여름날도 가고 가을날도 가고 물론 겨울날도 갑니다. 우리도 모두 갑니다.
어느 시인은 시를 쓰는 일이 무의식을 찾아가는 길이라고 했던가요? 무의식의 대표적인 것이 꿈이라고 했던가요? 2월 갑자기 찾아온 선생님의 비보를 듣고 도무지 믿기지 않았던지 그날 밤 꿈을 꾸었습니다. 시산문방에서 몇 사람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창가 쪽에 혼자 서 계시면서 아무 말씀도 하지 않고 물끄러미 우리들을 바라보고만 계셨습니다. 지금도 아름다운 천상에서 시와 산문을 사랑하시는 그 눈빛으로 시산문 가족들을 보고 계실 것만 같습니다. 맑고 향기롭게 머물렀다가 가신 자리에서 선생님의 온기는 시산문방의 따스함으로 계속 전해질 것입니다.
달빛소리와 함께 영원한 평화와 안식을 누리소서.
김영자 / 전북 고창에서 태어났으며 1997년 『문학과 의식』으로 등단했다. 시집 『양파의 날개』, 『낙타뼈에 뜬 달』, 『전어비늘 속의 잠』이 있고 서울시인상, 한국시인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