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원로시인 조병화(趙炳華) 별세
1921. 5. 2 경기 안성~2003. 3. 8 서울.
인간의 존재와 고독을 주제로 한, 말하듯 자연스러운 시를 많이 썼다. 아호는 편운(片雲). 생애와 활동
1938년 경성사범학교를, 1945년 일본 도쿄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49년 서울중학교 교사, 1955년 중앙대학교 강사 등을 거쳐, 1959년 경희대학교 조교수로 근무했다. 1960년 경희대학교 초대 출판국장, 문리과대학장, 교육대학원장 등을 역임했다. 1946~63년 대한럭비협회 이사, 1973년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1981년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1982년 한국시인협회 회장 및 세계시인회의 한국위원회 회장 등을 지냈으며, 그림에 취미가 있어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1974년 중국 문화대학에서 명예철학박사학위, 1982년 중앙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81년 인하대학교 문과대학장에 취임한 이후 부총장, 대학원장을 역임하고 정년퇴임했다. 문학세계
28세 때인 1949년 첫 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으로 등단한 이후 30여 권이 넘는 시집을 펴냈다. 발표시기와 성격에 따라, 〈버리고 싶은 유산〉에서 제8시집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1959)까지의 인간의 외로움과 사랑 등의 정서를 꾸밈없이 읊었던 시기인 제1기, 〈밤의 이야기〉(1961)부터 제17시집 〈내 고향 먼 곳에〉(1969)까지 청춘적 고뇌와 감정의 충일로부터 인생의 성찰을 표현한 시를 발표한 제2기, 〈오산 인터체인지〉(1971)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전까지의 내적 방황과 여행을 정리하고 삶과 죽음, 존재와 부재의 동일성에 대한 각성을 드러내 보인 제3기로 구분할 수 있다. 그의 시세계는 통속적 애상의 정서라는 비판도 받으나, 내면세계를 평이한 시어(詩語)로 표현한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밖의 시집으로 〈사랑이 가기 전에〉(1955)·〈존재의 이유〉(1963)·〈남남〉(1975)·〈딸의 파이프〉(1978)·〈다시 갈 수 없는 세월〉(1992) 등이 있다. 1960년 아세아자유문학상, 1969년 경희대학교 문화상, 1974년 한국시인협회상, 1976년 국민훈장 동백장, 1981년 서울특별시 문화상, 1985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1986년 국민훈장 모란장, 1990년 3·1문화상, 1991년 세계시인대회 공로상, 1992년 대한민국 문학대상, 1996년 금관문화훈장, 1997년 5·16 민족상 등을 받았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 군 사조직 하나회 숙정
← 하나회 핵심인물을 경질한 후 김동진 신임참모총장의 보직 신고를 받고 있는 김영삼 대통령(왼쪽).
김영삼 대통령이 1993년 3월 8일 김진영 육군 참모총장과 서완수 국군 기무사령관을 전격 교체함으로 군 사조직 하나회 숙정을 시작했다. 이는 1980년 신군부세력 등장이후 군요직을 독점하다시피 해온 육군 내 하나회 인맥의 대수술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3공이후 군부를 주름잡아 왔던 하나회 출신 제거는 김영삼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와 과감한 결단에 따른 것이다.
하나회는 육사 11기생의 친목모임인 ‘칠성회’로부터 시작됐다.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등 영남출신 육사 11기생 7명이 초급장교시절이던 1958년 결성한 칠성회는 5.16 이후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한 배려로 군부내 요직을 장악하면서 후배들을 끌어들여 1962년에 하나회로 확대 발전해 왔지만 이날 부로 막을 내리기 시작했다./조선
[1977년] 카다피, 인민주권 선언
리비아의 지도자 카다피는 제 3세계이론에 입각한 인민주권선언을 발표했습니다.
1969년 쿠데타로 집권한 카다피는 석유회사를 국유화하고 영국과 미국의 군사기지를 철폐했으며 이슬람 문화혁명을 시도했습니다. 카다피는 이슬람율법에 따라 음주와 도박을 금지시키고 이슬람공동체에 기반을 둔 독자적인 직접민주제를 이끌고 있습니다.
카다피는 국제적으로 테러국의 지도자이지만 국내에서는 열광적인 지지자들에 쌓여 독특한 체제를 수립해 전권을 장악한 정치인이라는 야누스의 두 얼굴을 갖고 있습니다. /YTN
[1975년] 시인 신석초(申石艸) 사망
1915. 6. 4 충남 서천~1975. 3. 8.
전통적 리듬을 빌려 옛 것, 사라져가는 것, 찰나의 것을 즐겨 읊었다. 본명은 응식(應植), 일명 유인(唯仁), 호는 석초(石艸 또는 石初). 생애와 활동
고향에서 보통학교(지금의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한학을 배우다가 1925년 서울로 올라와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몸이 아파 중퇴했다. 그의 문학에 대한 관심은 이때부터 시작된 듯하다. 1929년 일본으로 건너가 1931년 호세이대학[法政大學] 철학과에 들어가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 조선 프롤레티라아 예술가 동맹(KAPF) 맹원으로 활동했다. 1935년에는 〈신조선〉의 편집일을 했으며, 1948년 한국문학가협회 문화부장, 1954년 〈한국일보〉 기자로 들어가 1957년 논설위원 겸 문화부장을 지냈다. 1960년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1965년 한국시인협회 회장, 1965~66년 한국문인협회 시분과위원장 등을 지냈다. 문학세계
← 두 번째 시집
1931년 '신유인'이란 이름으로 〈중앙일보〉에 평론 〈문예창작의 고정화에 항(抗)하야〉를 발표하여 문단에 나왔다. 이 논문은 당시 카프의 강경노선을 공격한 내용으로 카프 맹원들 사이에 창작론에 대한 논쟁이 되기도 했다. 이무렵 프랑스 시인 P. 발레리의 〈테스트 씨와의 저녁 시간〉에서 깊은 감동을 받았고 노장사상(老莊思想)에 심취하기도 했다. 카프의 도식주의적 경향에 실망하여 1933년 박영희가 전향선언할 때 카프에서 탈퇴했다. 1935년 한학의 스승인 정인보의 소개로 이육사와 사귀게 되었고, 1937년 서정주·김광균·윤곤강 등과 함께 〈자오선〉 동인으로 활동했다. 여기에 나비가 꽃을 탐내는 본성을 읊은 〈호접 胡蝶〉·〈무녀의 춤〉 등을 발표했으며, 그뒤 〈파초〉(시학, 1939. 3)·〈가야금〉(시학, 1939. 9)을 비롯해 비취를 지고한 정신적 가치로 상징화하고 화자는 현실적 삶의 '쑥대 구렁'에서 번뇌하는 존재로 본 〈비취단장 翡翠斷章〉(문장, 1940. 10)을 발표했다. 1941년 문학잡지 〈문장〉·〈인문평론〉이 폐간되자 고향에 내려가 은거했다. 1946년 첫시집 〈석초시집〉을 펴냈고, 1959년 2번째 시집 〈바라춤〉을 펴냈다. 그뒤 1970년 〈폭풍의 노래〉, 1974년 〈처용은 말한다〉·〈수유동운 水踰洞韻〉 등의 시집을 펴냈다. 1985년 〈신석초 문학선집〉이 나왔다. P. 발레리의 영향을 받아 동양의 허무사상을 바탕으로 한 절제된 언어가 돋보이는 시를 발표하여 당시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1967년 대한민국 예술원상을 받았다.
[1971년] 무하마드 알리, 헤비급 챔피언 조 프레이저에게 15회 판정패
블랙 무슬림(주로 미국의 흑인들로 구성된 이슬람교 교리 옹호 단체)에 가입하고 이슬람교도의 이름으로 개명했으며, 1967년에는 종교적인 이유로 군 입대를 거부하다가 군역선발법 위반으로 유죄가 선고되어 링에서 추방되고 타이틀을 박탈당했다. 그 유죄판결은 결국 1971년에 대법원에 의해 파기되었다. 한편 알리는 1970년 복싱을 다시 시작해서 2명의 선수와 도전자 결정전을 벌여 승리했으나, 1971년 3월 8일 헤비급 챔피언인 조 프레이저에게 15회 판정패 당했다. 그후 약 3년 동안 알리는 제리 쿼리, 잠시 컴백을 시도한 플로이드 패터슨, 조 버그너, 켄 노턴 등과 싸웠다. 마침내 알리는 1974년 1월 28일 프레이저에게 심판 전원일치 판정승을 거두고 새로운 챔피언인 조지 포먼과 싸우게 되었다. 1974년 10월 30일 포먼을 8회에 KO시키고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헤비급 챔피언이 되었다. /브리태니커
[1965년] 미국 해병대 베트남 다낭 상륙
1965년 오늘, 미국의 첫 번째 전투부대인 해병이 남베트남의 요충지인 다낭에 상륙한다.
규모는 2개 연대.
제9해병 여단에서 차출된 해병 3천5백여 명은 긴장된 표정으로 육지를 밟는다.
이후 미국은 걷잡을 수 없는 전쟁의 수렁으로 빠져든다.
미국은 1968년까지 지상군 투입 규모를 54만 명으로 확대하고 전쟁비용도 크게 늘린다. /YTN
[1962년] 비틀스 첫 방송 출연
← 비틀스, 왼쪽부터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 폴 매카트니, 존 레논(1969경~70)
1962년 3월 8일 오후 5시 비틀스가 영국방송협회(BBC)의 프로그램 에 처음으로 출연함으로써 비틀스 시대의 서막이 올랐다. 비틀스의 음악은 리듬 앤드 블루스와 컨트리 앤드 웨스턴을 바탕으로 1950년대 후반부터 인기를 끌기 시작한 록에 기반을 두고 있다. 존 레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 등 4명의 멤버로 구성된 무명 그룹 비틀스는 1961년 11월 브라이언 엡스타인을 만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초창기에는 여러 레코드사로부터 레코드 취입을 거절당했지만, 1962년 영국의 레코드사 EMI와 계약을 맺고 데뷔 싱글 를 발표하면서 주목을 받았다. 이듬해 2월 13일 텔레비전 프로그램 에 출연해 새로운 싱글 를 발표하면서 비틀스 열풍을 일으켰다. 대중음악을 발전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엘리자베스 2세로부터 대영제국 훈장을 받기도 했다./브리태니커
[1957년] 한국-터키 국교 수립
터키는 한국전쟁 참전국으로서 우리 나라를 혈맹 우방국이라고 인식하고 있으며, 한국의 전후 경제발전을 높이 평가하면서 우리 나라와의 경제협력 증진을 희망하고 있다 . 터키는 1949년 8월14일 우리나라를 승인, 1950년 7월 한국전 참전 결정, 1957년 3월 한국과 수교하였으며, 같은 해 6월 한국 공관, 1966년 7월 유엔군 산하 터어키 중대 철수, 1972년 서울 공관을 설치하였다. 1977년 12월 통상진흥 및 경제협력협정을 체결하고 이스탄불 총영사관을 설치하였다. 1982년 12월 대통령 에브렌, 1991년 총리 아크불루트가 방한하였다. 1972년 사증면제협정, 1974년 문화협정, 1977년 통상진흥 및 경제기술협력협정, 1979년 항공협정, 1986년 이중과세방지협정, 1994년 투자보장협정, 1997년 섬유협정, 1999년 원자력협력협정 등을 체결하였다.
터키는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북부 이라크에 전통적인 우방관계를 갖고 있는 한국이 파병한 일에 대하여 적극 환영하는 입장이다. 특히, 케난 에브렌(Kenan Evren) 대통령의 공식 방한(1982년) 및 외잘 총리의 공식 방한(1986년) 후 우리 나라의 발전상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한국의 경제발전이 터키의 경제발전의 모델이 되어야 한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터어키는 UN, IAEA 등 국제무대에서 우리 입장을 지지하고 북한과는 2001년 6월 수교하였다. 양국은 국민 정서, 언어, 관습 등 여러 면에서 비슷하여 유대감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두 나라 국민들간의 유대감이 더욱 확산되었다.
러시아 혁명 이후 1920년대에 러시아 군대와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탈출한 200여 명의 터키인이 우리나라에 집단 이주, 서울과 대구·부산 등지에서 의류·담요·직물 등을 판매하며 거주하였으나 8·15광복과 함께 모두 해외로 이주하였다. /naver
[1945년] 최초의 상업용 헬리콥터 등장
← 탱크를 실어나르는 미국군 헬리콥터 CH-37
1946년 3월 8일 벨헬리콥터사의 헬리콥터 '벨 47'이 미국 민간항공위원회의 허가를 획득함으로써 본격적인 헬리콥터 시대가 열렸다. 중국인과 르네상스 시기의 유럽인 등이 처음 고안한 헬리콥터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 의해 구체화되었다. 그러나 헬리콥터가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20세기에 접어들면서부터였다. 1907년 폴 코르뉘가 만든 유인 헬리콥터가 수직 이륙에 성공했으며, 1930년대에 들어서는 완전한 수직 및 전진 비행이 가능해졌다. 1939년 이고르 시코르스키는 자신이 만든 'VS-300'을 타고 기록적인 비행에 성공함으로써 단발 회전익 헬리콥터의 실용성을 입증했다. 이후 헬리콥터 실용화에 뛰어든 젊은 발명가 아서 영은 1943년 '벨 30' 개발에 이어, 1946년 헬리콥터 산업의 신기원을 이룬 '벨 47'을 개발해냈다./브리태니커
[1923년] 방정환, 월간잡지 ‘어린이’ 창간
← 방정환
1923년 3월 8일 소파(小波) 방정환(方定煥)이 어린이들을 위한 월간잡지 ‘어린이’를 발간했다. 이 잡지의 신조는 ‘씩씩하고 참된 소년이 됩시다. 그리고 늘 서로 사랑하며 도와 갑시다.’였으며 이 문구는 매호마다 독자의 사진과 함께 실렸다.
처음에는 한 달에 두 차례씩 발행됐으나 한 달에 한번씩 발행하는 월간으로 바뀌었고, 개벽사가 발행을 맡았다. 창간호는 안데르센의 동화인 ‘성냥팔이 소녀’를 번역하여 게재했고, 12페이지로 구성됐다. 월간으로 바뀌면서는 고한승, 마해송, 정인섭 등의 동화와 윤극영의 동요극 등이 선보였고, 1930년대부터는 이광수, 주요한, 주요섭, 이태준, 정지용 등도 참여하게 됐다.
이정호, 신영철 등이 방정환을 이어 잡지를 계속 맡았으나 1934년에 123호를 끝으로 폐간됐다. 광복 이후에 고한승이 ‘어린이’ 잡지를 계속 이어받았으나 곧 없어졌다. /조선
[1921년] 소련 신경제정책 채택
레닌은 혁명 직후, 주요 산업 및 은행의 국유화, 신분제 폐지, 인민재판소 설치, 의회의 해산 등과 같은 혁명적 입법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신생 소비에트 정권은 부르주아와 지주 등 우익 백군(白軍), 즉 반(反)혁명세력의 봉기와 연합국(영국·프랑스·미국·일본 등)의 개입으로 위기를 맞았다. 이에 레닌은 모든 기업의 국유화 · 노동의무제 · 곡물징발제 · 식량배급제 등을 내용으로 하는 '전시(戰時) 공산주의' 정책을 실시하는 동시에, 소비에트 적군(赤軍)을 동원하여 내란을 종식시켰다.
전시 공산주의 정책은 농민의 반발과 경제복구의 실패 등으로 오히려 신생 소비에트 정권을 위기상황으로 몰았다. 이에 1921년 레닌은 '신경제정책(New Economic Plan: NEF)'을 채택하면서, 자유농 인정, 농산물 판매 허용, 사기업 인정 등 자본주의적 요소를 도입하였다. 이러한 신경제정책으로 경제가 신속히 복구되었고 인민의 생활수준도 다소 향상되었다. 한편 레닌은 고전적인 마르크스의 명제에서 벗어나 러시아 한 나라만이라도 사회주의 건설이 가능하다는 '일국 사회주의론'을 전개하였다. 이는 러시아혁명 후 주변국가에서 기대했던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소비에트 정권의 안정 자체가 시급한 현실에 대한 전략적 대응으로서 나온 이념 수정이었다.
레닌의 신경제정책과 일국 사회주의론은 격렬한 이념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당내 갈등의 와중에 22년 스탈린은 당 총서기로 임명되었고, 러시아 · 우크라이나 · 벨로루시 · 카프카스 (아제르바이잔 · 그루지야 · 아르메니아)로 이루어진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소련)'이 탄생되었다. 한편 제1차 세계대전과 혁명을 거치는 동안 신생 소비에트 정권은 에스토니아 · 라트비아 · 리투아니아 등 서부지역의 상당한 영토를 상실하였다. 이러한 영토상실은 39~45년에 소련이 회복하는 영토보다 많았다.
[1917년] 러시아 2월 혁명 발발
← 레닌(1918)
1차 대전 발발은 러시아를 더욱 궁지로 몰았다. 독일과 개전 1년 만에 15만명이 전사하고 70여만명이 부상한데다, 서부 공업지대의 함락으로 물자부족과 물가폭등이 야기돼 곳곳에서 파업과 시위가 반복됐다. 1917년은 파업과 함께 열린 해였지만, 동시에 파업을 마무리한 해이기도 했다.
‘세계여성의 날’이기도 한 1917년 3월8일(러시아 구력 2월23일), 러시아 페테르부르크의 한 섬유공장에서 여성노동자들이 “빵을 달라!”며 스트라이크를 일으켰다. 러시아 ‘2월 혁명’의 봉화가 솟아오른 순간이었다. 날이 갈수록 파업 가담자가 늘어나고 시위 지역도 전 도시로 확산됐다. 시위에 합류하는 군인들도 생겨나 위에서 발포명령을 내려도 하늘을 향해 쏠 뿐 진압에는 관심조차 없고 심지어는 장교들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기도 했다. 감옥 문도 열려 2400여명의 정치범이 풀려나는 등 페테르부르크는 혁명의 도가니로 빠져들었다.
결국 반란진압을 포기한 군 장군들의 호소에 짜르(황제) 니콜라이 2세(Nikolai II, Aleksandrovich, 1868~1918)는 황제직을 포기하고 동생에게 양위했지만, 동생마저 신변에 위협을 느껴 거부함으로써 303년 동안 이어온 로마노프 왕조가 막을 내렸다. 3월16일이었다.
빈 자리는 임시정부가 차지했지만, 스위스로 망명했던 레닌(Lenin, Vladimir Il'ich, 1870~1924)이 4월16일 돌아오면서 러시아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레닌의 귀국에는 러시아의 혼란을 기대한 독일의 지원이 있었다. 10년 만에 조국 땅을 밟은 레닌 앞에는 수많은 붉은 깃발이 펄럭였고 군중들은 프랑스대혁명 노래 ‘라 마르세즈’를 부르며 그를 환영했다.
이튿날 레닌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평의회)로”라는 구호아래 10개항의 ‘4월 테제’를 발표했다. 상황도 레닌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독일군에 가한 임시정부의 무리한 대공세가 참패로 끝나 반전(反戰)을 외치는 레닌의 입지를 강화시켜 주었고, 육군 참모총장의 쿠데타까지 일어나 임시정부의 위상까지 흔들렸다. 보잘것없는 소수파 볼셰비키는 혼란한 틈을 이용해 자체 군대까지 보유한 거대한 정치세력으로 성장해 나갔다. 그리고 10월 혁명을 향한 시계추는 점점 빨라졌다. /조선
[1910년] 국제부인데이 시작
세계 여성의 날은 매년 3월 8일로, 여성의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업적을 범세계적으로 기리는 날이다.
세계가 함께 기리는 여성의 날을 만들자는 생각은 근대의 빠른 산업화와 경제 팽창 속에서 생겨나게 되었다. 1857년 뉴욕 시에서는 방직 및 직물 공장에서 일하던 여성들이 시위를 일으켰다. 그들은 자신들이 열악한 노동 환경과 저임금에 시달린다며 항의하였다. 하지만 시위대는 곧 경찰에 의해 공격받고 해산되었다. 2년이 지난 1859년 3월, 이 여성들은 최초로 그들의 노동 조합을 결성하게 된다.
이후 매년 3월 8일에는 더욱 더 많은 시위가 이루어졌다. 그 중에서도 1908년의 시위는 가장 두드려졌는데, 15,000명이나 되는 여성들이 근무 시간 단축, 임금 향상, 투표권등을 요구하며 뉴욕 시로 행진하였다. 1910년 최초의 세계 여성 회의가 Socialist International의 주최로 코펜하겐에서 이루어지고, 독일 사회주의자인 체트킨(Zetkin, Clara, 1857~1933)의 제안에 따라 세계 여성의 날이 정해졌다. 이듬해의 세계 여성의 날은 오스트리아, 덴마크, 독일, 스위스 등지에서 백만명 이상이 참가하는 대규모의 행사였다. 하지만 행사가 이루어지고 채 얼마 되지 않은 1911년 3월 25일, 뉴욕 시에서 발생한 트라이앵글 셔츠 공장 화재는 140명 이상의 여성의 목숨을 앗아갔다. 안전 시설의 부재로 말미암아 높은 사망률을 기록한 것이다. 또한 제1차 세계 대전이 임박했던 1913년의 세계 여성의 날에는, 유럽을 가로지르는 평화 대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wikipedia
[1908년] 미국 여성 노동자 시위
1908년 오늘, 미국 뉴욕에서 여성 노동자 만5천여 명이 시위를 벌였다. 봉제업체 여종업원들이었다. 여성참정권과 미성년자 노동금지, 노동조합 결성의 자유를 요구하고 나섰다. 2년 뒤인 1910년 독일의 노동운동 지도자 제트킨(Zetkin, Clara)의 제창으로 이 날 3월 8일이 '세계여성의 날'로 정해졌다.
'여성의 날'에 미국에서는 3월 내내 여성계의 다양한 행사들이 펼쳐지고 중국에서는 공식휴일로 정해져 잔치가 벌어졌다.
우리나라에서는 1920년대에 처음 '세계 여성의 날' 기념행사가 열렸지만 일제에 의해 행사가 취소돼 1980년대까지 맥이 끊겼다. 그 뒤 1985년 제1회 한국여성대회가 열린 이래 매년 3월 '세계여성의 날'을 축하하는 전국적인 기념행사가 열리고 있다. /YTN
[1907년] 그리스의 정치가인 카라만리스(Karamanlis, Konstantinos) 출생
1907. 3. 8 마케도니아 세라이 근처 프로티~1998. 4. 22 그리스 아테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지인의 도움을 받아 학교를 겨우 졸업할 수 있었다. 아테네에서 변호사생활을 하였던 카라만리스는 정치에 뜻을 품고 정계에 입문하여 1935년 의회에 진출하였다. 뛰어난 정치적 수완과 명석한 두뇌는 곧 그의 입지를 확고히 하는 밑거름이 되었고 재선을 거쳐 1946년 노동장관으로 입각하였다. 여러 부처의 장관을 역임한 그는 1955년 총리로 선임되어 11년간 그리스정치의 중심에 있었다. 정치적 해결에 탁월한 능력을 가졌던 그였지만 1963년 키프로스에 얽힌 갈등으로 사임 후 프랑스에서 망명생활을 하였다. 1974년 군사정권의 몰락과 함께 귀국한 그는 군부를 복종시키며 그리스 민주화를 성공적으로 이끌었으며 1995년 까지 대통령을 지냈다.
[1905년] 교육가 권중휘(權重輝) 출생
1905. 3. 8 경북 안동~.
아호는 명원(命源), 호는 한산(閑山). 5세 때부터 가정에서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1911년 아버지가 죽은 뒤 삼종숙에게 한학을 배웠다. 1917년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8년 대구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1926년 일본 교토[京都] 제3고등학교 문과를 거쳐 1928년 도쿄제국대학 문학부 영문학과에 입학하여, 1931년에 졸업했다. 1941년 10월 만주 신징공업대학[新京工業大學] 영어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1945년 7월 서울사립광신상업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해방 이후에 교장이 되었다. 1946년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교수를 거쳐, 1949년부터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영문학과 교수로 있다가 1951년 부산 피난 중에는 서울대학교 학생처장을 맡아보았다. 1960년 중고교 영어 교과서인 〈모던 잉글리쉬〉를 펴냈다. 1961년 1월 한국외국어대학장으로 취임하였으며, 그해 12월 다시 서울대학교 총장으로 부임했다. 1963년 8월 학술부문문화포장을 받았다.
[1899년] 소설가 이미륵(李彌勒) 출생
1899. 3. 8 ~ 1950. 3. 20
본명 이의경(李儀景). 황해 해주(海州) 출생. 1917년 경성의학전문에 입학, 재학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반일(反日) 전단을 뿌리는 등 학생활동 주동자로 활약, 그해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의 일을 돕다가 유럽행 여권을 받았다. 1920년 독일에 도착, 1921년 3월부터 뷔르츠부르크대학교에서 의학공부를 계속했으나 건강 때문에 휴학, 1923년 하이델베르크대학교, 1925년부터는 뮌헨대학교에서 동물학과 철학을 전공하여 1928년 동대학에서 박사학위를 획득하였다.
1931년 《다메 Dame》지에 《하늘의 천사》를 처음으로 발표, 그후 민족적인 경향이 짙은 단편적인 문학작품을 독일어로 독일 신문·잡지에 수시 발표했다. 그의 문학은 주로 한국을 배경으로 동양문화의 전통과 풍습을 주제로 하였으며, 1946년에는 대표작인 《압록강은 흐른다》가 독일에서 발간되어 전후 독일문단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 소설은 영문 및 국문으로 번역되었으며, 그 일부는 독일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독일학생들에게도 애독되었다. 1947년부터 뮌헨대학교 동양학부 강사로 있다가 1950년 3월 위암으로 죽었다. 《압록강은 흐른다》의 속편인 《그래도 압록강은 흐른다》가 경상북도 왜관(倭館) 분도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독일에서 독일어로 작품활동을 한 유일한 한국작가이다. /naver
이미륵(李彌勒, 본명 이의경 李儀景, 1899년 3월 8일 - 1950년 3월 20일)은 황해도 해주 출생의(현 황해남도)망명작가이다.
독일에서 독일어로 집필활동을 했다. 윤택한 집안의 1남 3녀중 1남으로 태어나,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하였으며, 옛 풍습에 따라 조혼하여,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다.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재학중 3·1 운동에 참가, 일제의 검거를 피하여 상하이를 경유하여 독일로 망명하였다. 부르츠부르크 하이델부르크 등에서 약학을 공부하여 뮌헨대학에서는 동물학,철학등을 전공하였다. 졸업후에는 잡지투고,기여및 번역등으로 생업을 꾸렸다. 만년에는 뮌헨대학 동양학부에서 중국 고전,한국문화및 역사등을 가르쳤다. 《압록강은 흐른다》는 각고의 집필끝에 완성한 역작으로, 1946년 출판되었다. 독일 문학계에도 알려져, 교과서에도 채용되었다. 한국 전쟁 전인 1950년 3월, 51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그는 망명후 죽을때까지 한국땅을 밟지 못했다. /위키백과
[1879년] 독일의 화학자 한(Otto Hahn) 출생
1879년 3월 8일 태어남 / 1968년 7월 28일 죽음
"당신은 우리가 우라늄 폭탄을 만들지 못해서 유감입니까? 나는 우리가 그것을 만들지 못한 데 대해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고서 감사드립니다." - 오토 한
한은 방사능을 연구한 독일 화학자이다. 1932년 영국 물리학자 제임스 채드윅이 중성자를 발견한 이후, 당시의 수많은 과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연구팀도 중성자를 원자에 충돌시켜 핵변환을 일으키는 실험을 시도했다. 그 결과, 1938년 한과 프리츠 슈트라스만은 우라늄에 중성자를 쏘면 바륨이 생성되고 여기서 두세 개의 중성자가 나와서 연쇄반응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발견했으며, 리제 마이트너는 이것을 핵분열로 설명했다. 그러나 곧 자신의 발견이 핵무기 개발로 직결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한은 수차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1944년 그는 핵분열을 발견한 공로로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고, 1966년에는 마이트너, 슈트라스만과 함께 페르미상을 받았다./브리태니커
[1869년] 프랑스 교향곡 작곡가 베를리오즈 사망
← 프랑스 작곡가 베를리오즈
프랑스의 교항곡 작곡가로 유명한 베를리오즈가 1869년 3월 8일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남프랑스의 라코트생앙드레 출신인 그는 ‘표제음악’이라는 새로운 관현악곡 스타일을 창시하여 많은 작곡가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위고, 리스트, 쇼팽, 힐러, 넬바르, 뒤마(부친) 등과 교유하면서 정력적인 활동을 전개하였고, 이 시기의 작품에는 독주 비올라에 이탈리아의 추억을 상기시킨 교향곡 ‘이탈리아의 해롤드’(1834), ‘레퀴엠’(1837), 오페라 ‘벤베누토 첼리니’(1838), 그리고 독창과 합창이 곁든 극적 교향곡 ‘로미오와 줄리엣’(1839) 등이 있다.
1842년부터 국외로 나가 연주여행을 하면서 서곡 ‘로마의 사육제’(1843)를 남겼다. 또한 문장에도 뛰어나 바그너와 더불어 명문장가로 명성이 높았으며, 자서전 ‘회상록’은 음악가가 쓴 전기문학 분야에서 걸작 중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조선
[1495년] 이탈리아 화가 로소(Rosso, Giovanni Battista di Jacopo) 출생
← 로소가 그린 프레스코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1521), 이탈리아 볼테라에 있는 Pinacoteca Comunale 소장
흔히 초기 마니에리스모, 또는 피렌체 마니에리스모라고 부르는 표현적인 양식의 대표자이며, 퐁텐블로파의 창시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일찍이 같은 나이 또래인 폰토르모와 함께 안드레아 델 사르토의 화실에서 교육을 받았다. 이 두 젊은 화가의 초기 작품들은 미켈란젤로와 북구 고딕 판화에서 영향받은 새로운 화풍을 보여주는데, 전성기 르네상스 미술의 신조에서 벗어나 감정을 중시하는 주정주의(主情主義)가 그 특징이다.
이 시기에 로소가 그린 그림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 〈성모 승천 Assumption〉(1517, 피렌체 아눈치아타 교회의 프레스코)과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Deposition〉(1521, 볼테라 피나코테카 코무날레소장) 및 〈이드로의 딸들을 보호하는 모세 Moses Defending the Daughters of Jethro〉(1523경,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소장) 등이 있다.
1523년말에 로소는 로마에 가서 미켈란젤로가 그린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와 라파엘로의 후기 미술 및 파르미지아니노의 작품을 보았는데, 이것이 그의 화풍을 근본적으로 재편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천사들과 함께 있는 죽은 그리스도 Dead Christ with Angels〉(1526경)는 이 새로운 화풍의 본보기로서, 격조 높은 아름다움에 대한 감수성과 절제된 감정을 보여준다. 1527년 그는 로마의 약탈을 피해 도망친 뒤, 이탈리아 중부의 몇몇 도시에서 잠깐씩 일을 했다. 1530년에 프랑수아 1세의 초대를 받고 베네치아를 거쳐 프랑스로 가서, 죽을 때까지 궁정화가로 일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로소의 주요작품은 퐁텐블로 궁전에 있는 프랑수아 1세 미술관을 장식한 프레스코들이다(1534~37경). 여기서 그는 프란체스코 프리마티초와 함께 장식적인 양식을 개발했으며, 이 양식은 북구 유럽 전역에 영향을 미쳤다. 그가 인그레이빙을 제작하기 위해 그린 수많은 밑그림도 이탈리아와 북부 유럽의 장식 미술에 널리 영향을 미쳤다.
[ 725년] 오대산 상원사 종 조성
강원도 평창군(平昌郡) 진부면(珍富面) 동산리(東山里) 상원사(上院寺)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동종(銅鐘).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36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167cm, 지름 91cm이다. 우리나라의 현존하는 동종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운 범종(梵鐘)으로서, 음향이 맑고 깨끗하다.
종신(鐘身)에는 견대(肩帶)와 구연대(口緣帶)가 있어, 상하가 긴박한 느낌을 준다. 또한 상하로 연주문대(聯珠文帶)를 둘린 다음 유려한 당초문으로 채우고, 드문드문 1인 내지 4인의 낙천(樂天)을 양각(陽刻)한 반원권(半圓圈)을 둘렸으며, 견대에 붙여서 당초문을 양각한 유곽(乳廓) 4구(區)를 두고, 그 안에 각각 연화무늬를 새긴 유두(乳頭)가 9개씩 솟아 있다. 종신 공간에는 서로 마주 대하는 두 곳에 구름 위에서 무릎을 세워 하늘을 날면서 공후(箜 篌)와 생(笙)을 주악하는 비천상(飛天像)이 양주(陽鑄)되어 있다. 정상(頂上)에는 용뉴(龍鈕)와 원통음관(圓筒音管)이 있으며, 용은 두부를 특히 크게 표현하고, 몸은 음판에 붙어 있으며, 발은 위 꼭대기에 버티고 있다.
음관·유곽 등 한국 종의 전형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우수한 종이다. 용뉴 좌우에 종명(鐘銘)이 음각되어 있어 주성(鑄成) 연대가 725년(신라 성덕왕 24)임을 알 수 있다. 이 종이 주성된 후 어느 절에 소속되어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영가지(永嘉誌)에 의하면 경상북도 안동누문(安東樓門)에 걸려 있던 것을 1469년(조선 예종 1)에 왕명에 의하여 현재의 상원사로 옮겨온 것으로 되어 있다. /naver
그밖에
2009년 쇼트트랙 이호석 세계선수권 종합우승
2009년 변태섭 서울대 명예교수 별세
2009년 신지애, LPGA 시즌 첫우승
1999년 미국 야구선수 조 디마지오 사망
1997년 여야 3당 노동관계법 단일화로 노동법 사태 일단락
1990년 한필성-한필화 남매 일본에서 상봉
1989년 평민당, 주간조선 기사에 불만을 갖고 조선일보 관련자 5명을 명예훼손혐의로 고소
1983년 부산 미문화원방화범 김현장-문부식 사형확정
1981년 고려본 삼국사기 발견
1979년 경북 달성군 월배국민학교서 첫 태양열교실 등장
1972년 홍콩, 해저터널 공사
1965년 알제리 여성 행진
1962년 미국-소련 문화교류협정 조인
1958년 체신부, 한국 최초로 미국에 사진전송 성공
1954년 정부, 형사소송법 비토
1948년 김구, 남북협상 제의
1946년 최초의 영국 자동차를 만든 란체스터 사망
1946년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토지개혁법령 세칙 발표. 토지개혁 착수
1942년 일본군 버마수도 점령
1930년 미국의 제27대 대통령(1909-13) 태프트 사망
1925년 이우성 한국의 한문학자·국사학자 출생
1920년 러시아 과격파정부 수립
1879년 핵분열 발견으로 노벨화학상 수상한 독일 화학자 오토 한 출생
1874년 미국의 제13대 대통령 밀라드 필모어 사망
1445년 용비어천가 간행
1440년 남녀성혼기를 16세, 14세 이상으로 정함(세종 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