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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3685
11월25일[연중 제33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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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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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3Hx-4YkBDrM
[의정부교구 윤성흠 베르노 신부님 집전(호원동본당 부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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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의 고통과 눈물, 한계와 좌절, 희망과 기쁨 안에서 현존하시는 하느님!>
오랜 세월 아동 복지 분야 사목터에서 사목하시다가 정년을 마무리하신 수녀님께 들은 말씀입니다. 평생 사목 일선에서 고생하셨으니, 기도 안에서 편안한 노후 시간을 보내야 하나, 고민하시다가, 그게 아니다 싶어 장상께 청원 하나를 드렸답니다.
아동 보육 시설에서 많이도 말고 딱 한 명의 아기만 케어할 수 있기를. 장상께서 흔쾌히 수락하셔서 지금 그 일을 너무나 행복하게 하신다는 말씀, 그 아기를 통해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신다는 말씀을 듣고, 저는 너무 존경스러워서 크게 박수를 쳐드린 적이 있습니다.
심각한 저출산과 초고령화 현상을 동시에 직면한 우리 사회입니다. 저출산도 큰 문제이지만 초고령도 큰 문제입니다. 정년에 도달했지만, 몸과 마음이 아직도 이팔청춘인 젊디젊은 은퇴자, 저 같은 사람이 대표적인 인물인데, 아직 셀 수도 없이 남은 날들은 대체 어떻게 감당할 것입니까? 이런 측면에서 딱 아기 한 명을 선택하신 수녀님의 선택은 참으로 탁월한 선택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용기와 만용을 잘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연세가 90인데, 그래서 서 있기도 힘들고 팔에 힘도 없는데, 오직 용기로 충만해서 갓난아기 한 명 케어하다가, 바닥에 아기 떨어트리면 그 책임은 누가 질 것입니까?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없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명확히 식별할 수 있는 기도와 식별력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지난 세기 탁월했던 대 영성가 헨리 나웬 신부님도 비슷한 체험을 하셨습니다. 그는 저명한 신학자요 심리학자로 평생 유명 인사로 살았습니다. 전 세계를 두루 다니면서 자신이 개척한 고유한 영성을 전파했습니다. 그의 강의실은 수백 수천 명의 청중으로 가득 찼고, 가는 곳마다 큰 박수와 환호를 받았습니다.
그러던 헨리 나웬 신부님이 어느 날 모든 것을 내려놓습니다. 탁월한 강사, 심리학의 대가, 명문 예일 대학교 하버드 대학교 평생 명예 교수직을 다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캐나다 토론토에 위치한 새벽 공동체로 들어갑니다.
데이 브레이크 공동체의 공동체 일원이 되어 딱 한 명의 장애인을 돌보는 일에 헌신하게 됩니다. 나중에 헨리 나웬 신부님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전 세계를 다니면서 명강의를 설파할 때 만나지 못했던 하느님을 거기서 만났습니다.
아담이라는 중복 장애인을 하루 온종일 케어하면서, 그 형제 안에서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그의 고통과 눈물, 그의 한계와 좌절, 그의 희망과 기쁨 안에서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참으로 은혜로운 말씀 한마디를 건네고 계십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루카 20, 38)
그렇다면 우리가 매일 만나는 나와 맞지 않는 이웃들, 그가 죽은 이가 아니라 살아 있는 존재라면, 그 의 숨결, 그의 생명, 그의 인생 안에 하느님께서 반드시 살아계시고 현존해 계십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너무나도 당연히 아직 살아 숨쉬고 있는 결핍투성이, 상처투성이, 고통덩어리인 우리 각자의 인생 여정 안에도 하느님께서는 굳건히 살아 계시고 현존해 계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저 구름 너머 다른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몸담고 있는 바로 여기, 이 공동체, 부족해 보이는 동료 인간과 더불어 살아가는 이 자리입니다.
아직도 우리가 죽지 않고 이렇듯 열심히 살아 숨 쉬고 있음에 감사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비록 고통과 상처 비참으로 얼룩진 오늘 하루지만, 바로 그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심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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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진리가 부족하면 현세주의자가 되고 은총이 부족하면 인본주의자가 된다>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는 일본 돈 만 엔짜리 지폐에도 새겨져 있을 정도로 일본인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사람입니다. 그는 폐쇄적인 계급사회의 부조리함을 느끼고 그것이 일본을 망치고 있다고 믿어 어려서부터 견문을 넓히기 위해 영어 공부를 한 사람입니다.
그는 미국과 유럽을 여행하고 그곳에서 공부하며 받은 충격적인 사실을 ‘서양 사정’과 ‘학문의 권유’ 등의 책으로 출판해 엄청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습니다.
그는 인간의 평등, 개인의 권리와 자유, 한 인간으로서 개인의 독립과 책임, 관존민비의 타파, 민권의 신장, 국회 개설 등을 주장해 일본인들의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버렸습니다.
그의 덕분으로 일본이 빠르게 서양과 같이 근대화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에서는 오로지 서양처럼 되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만이 아니라 조선과 중국도 그런 길을 가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조선을 자신들보다 훨씬 미개한 상태로 여겨 침략해서라도 아시아를 유럽처럼 만들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서양보다 먼저 조선과 중국을 차지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잘살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우리가 선생이고 조선이 하인입니다.”라는 말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그는 서양 제국주의를 일본으로 끌어들여 다른 나라를 침략하게 만드는 정신적 기틀을 세웁니다.
‘힘’만 좋아하고 ‘진리’를 모르면 ‘현세주의자’가 됩니다. 현세에서 잘살면 어떠한 비윤리적인 행위도 용납되는 것입니다. 많은 일본인은 아직도 후쿠자와의 생각을 따르며 자신들의 침략으로 한국이 근대화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진리는 ‘사랑’입니다. 힘은 이 사랑을 위해 쓰여야 합니다. 아무리 잘 살아도 자유가 없다면 지옥입니다. 남의 자유를 빼앗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후쿠자와는 공부는 많이 했을지라도 참 진리에 대해서는 무식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이와 같은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바로 사두가이파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지극히 현세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에 로마 지배하에 있으면서도 독립보다는 그 힘에 결탁하여 잘살고 있었던 이들입니다.
그러니 그들 안에 내세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심판이 있다면 현세를 즐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에 예수님께 부활은 있을 수 없다고 따집니다.
하지만 사랑을 진리로 믿는 이들에게는 부활이 필수적입니다. 사랑은 자신을 죽이는 일이기 때문에 부활이 없는 사랑은 허무한 죽음밖에 남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반드시 그에 대한 보상이 내세에서도 있어야 합니다. 사랑을 참 진리로 여기는 이들은 부활을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의 코를 납작하게 하는 것을 보고 좋아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율법학자,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사두가이들을 반박한 예수님을 두고 “스승님, 잘 말씀하셨습니다.”라며 칭찬해줍니다. 박해할 때는 언제고 지금은 스승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사두가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죽이는 데는 서로 일치했지만 자신들끼리는 교리가 달랐기 때문에 항상 싸웠습니다.
하지만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은 진리는 알았을지라도 은총(힘)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던 이들입니다. 그래서 그 힘을 주러 오신 예수님도 필요 없게 여겼습니다.
사람은 ‘은총과 진리’로 태어납니다. 은총은 에너지이고 성령이시며, 진리는 말씀이며 성자이십니다. 하느님 아버지는 이 은총과 진리로 인간을 새롭게 창조하십니다.
아기가 두 발로 걷기 위해서는 부모로부터 은총과 진리를 다 받아야 합니다. 은총은 부모님이 주시는 양식입니다. 그 양식의 힘으로 부모처럼 하려고 걸음마와 옹알이를 시작합니다. 부모에게서 진리를 배우는 것입니다. 음식을 주지 않는다던가, 부모가 어떻게 걷는지 안 보여준다면 아이는 온전한 인간으로 새로 태어날 수 없습니다.
힘만 강조했던 후쿠자와 유키치는 진리를 몰랐기 때문에 현세주의자가 되었습니다. 사두가이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은 십계명을 알고 내세도 믿었기 때문에 진리에는 민감한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은총의 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사랑을 자신들의 힘으로 지킬 수 있다고 믿었던 ‘인본주의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피인 성령을 힘입지 않고서는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도 할 수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아기가 부모로부터 양식을 받지 못하면 부모를 보아도 부모처럼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일본이 후쿠자와의 제국주의 사상으로 침략했을 때, 우리나라에서는 의병운동도 많았고 3월 1일 독립선언서에도 발표했습니다. 이때 독립선언서에 빠져있었던 종교가 있었는데 유교였습니다. 당시 유생들도 독립을 위해 큰 노력은 했지만 붓으로만 하였습니다. 이는 ‘마음이 곧 이치다’라는 사상으로 유교가 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유교는 ‘기(氣)’보다는 ‘이(理)’에 치중하던 때였기 때문입니다. 기는 힘이고 은총이며, 이는 말씀이고 진리입니다. 이 은총과 진리는 항상 함께 가야 사람을 온전히 성장시킵니다.
성령님과 예수님이 그러하신 것처럼 둘은 하나이면서도 둘입니다. 그 은총과 진리를 주시는 분과 함께 세 분이 사람의 새로운 창조를 이루어내시는 것입니다.
힘만 좋아하는 현세주의자는 진리가 부족하여 절제할 줄 모르고 자신의 욕구와 싸울 줄도 모릅니다.
반면 진리만 좋아하는 인본주의자는 은총이 부족하여 알기는 하지만 그 아는 것을 이루기 위한 힘을 청하지 않습니다. 자신들 안에 그 힘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은총도 진리도 다 하느님께서 아드님과 성령님을 통해 베푸시는 은총입니다.
우리는 이 둘의 균형을 잘 잡고 성장해야 합니다. 진리를 명확히 깨달아 현세주의에서 벗어나고 기도로 아는 것을 실천할 힘을 청해야 합니다.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가 균형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말씀(진리)만 강조하면 성사에 소홀해질 수 있고, 성사(은총)만 강조하면 말씀에 소홀해질 수 있습니다. 성경공부만 해서도 안 되고 기도만 해서도 안 됩니다. 둘 다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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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하늘나라의 참된 행복>
오늘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일곱 형제의 아내가 되었던 여인을 예로 들면서 부활이 있다면 그 여자는 과연 누구의 아내가 되는 것이냐고 묻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예수님께서 “사람이 죽었다가 부활하면 하늘나라에서는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결혼하는 일이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에 대해, ‘하늘나라는 남자와 여자의 구별도 없어지고, 이 세상의 모든 관계도 의미 없이 사라지게 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늘나라에 가면 예수님과 함께 했던 열두 사도가 그분 곁에 계실 것이고, 성모님은 여전히 예수님의 어머니로 계실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과 성모님은 당신 육체를 지니고 승천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늘나라에서도 여전히 예수님의 육체는 이 세상에서 살던 대로 남성이고, 그분의 어머니는 당연히 여성으로 그대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 올라갔다고 예수님께서 어머니를 모르는 사람 취급하실까요? 아닙니다. 그분들 성(性)에 혼란이 올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 육신으로 하늘로 올라가신 의미가 없습니다. 절대 이 세상의 관계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다만 하늘나라에서 다시 혼인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와 혼인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에서는 부활에 참여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고 합니다. 하와가 아담의 옆구리에서 빼낸 갈비뼈로 만들어졌듯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빼낸 피와 물로 만들어진 그리스도의 신부들입니다.
이렇게 죽은 이후에 결혼하지 않는 이유는 이미 그리스도와 혼인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성모님께서 하느님과 혼인하여 하느님 아드님의 어머니가 되셨는데, 또 요셉과 부부관계로 사셨다면 성모님께서 하느님과 맺었던 혼인관계는 온전한 것이 아니게 되어버립니다.
한 배우자와 혼인하였으면 더 이상 새로운 배우자를 찾을 필요가 없는 것처럼, 가장 완전한 단계인 그리스도와 혼인관계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는데도 또 혼인하려 한다면 그것은 그 관계에 불만족 한다는 것밖에는 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면 배우자도 부모도 자녀도 형제들도 미워하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진짜 미워하라는 뜻이 아니라 더 중요한 관계가 무엇인지 분별할 줄 알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동정부부 순교자가 계시지만 부부이면서도 동정을 지키려고 하신 이유는 이 세상의 애정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감소시키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사두가이파 사람들처럼 결혼해야 행복하다는 식의 이 세상의 시각으로 하늘나라의 행복을 이해하려하지 말고, 하느님과의 혼인으로 오는 참 행복을 이 세상에서부터라도 느껴보려 하고 또 그 행복을 위해 이 세상이 주는 기쁨을 던져버릴 수 있는 결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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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교우들과 함께 ‘지 세실리아 수녀님’의 금경축 축하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미사 후에는 본당에서 준비한 조촐한 축하 행사가 있었습니다. 수녀님은 1973년에 첫 서원을 하였고 어느덧 50년이 지났습니다. 수녀님과 함께 30년이 넘는 인연을 이어온 신부님께서 강론 중에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호메로스의 작품 오디세이아에서 오디세우스는 수많은 어려움과 난관을 극복하고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오디세우스는 부하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전우들이여 생각건대 이번일도 언젠가는 우리에게 추억이 될 것이다.’ 수녀님도 지난 50년 동안 다가오는 많은 어려움을 지혜와 열정 그리고 기도와 헌신으로 극복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금경축 축하행사를 하고 있습니다. 오디세우스가 다양한 능력으로 난관을 극복하였듯이 수녀님도 수녀님의 내면에 많은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수녀님은 낯선 미국 땅에서 이민자들을 위한 상담을 해 주었습니다. 교사로서 5,000명이 넘는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화가로서 많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수도자로서 가난, 정결, 순명의 삶을 충실히 살았습니다. 50살 밖에 안 돼 보이는 수녀님이 벌써 수도생활 50주년이라니 놀랍습니다. 앞으로도 더욱 건강한 모습으로 기쁘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축하드립니다.”
축하미사에는 저를 포함해서 4명의 사제가 함께 하였습니다. 시몬 신부님은 3년 후에 금경축이고, 강론을 하였던 브로스논 신부님은 8년 후에 금경축이고, 저는 18년 후에 금경축이고, 가비노 신부님은 계산은 하지 않았는데 대략 33년 후면 금경축이 될 것 같았습니다. 신부님의 강론을 들으면서 저도 제 안에 하느님께서 주신 은사가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능력이 부족하기에 제게 부지런한 성격을 주셨습니다. 남보다 일찍 일어날 수 있기에 좀 더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능력이 부족하기에 높은 목표를 정하기보다는 주어진 현실에 만족하며 살았습니다. 목표를 이루지 못해서 안타까워하거나, 실망하지는 않았습니다. 어차피 교회의 직무는 ‘이어달리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못하면 다음 분들이 이어 갈 거라고 생각합니다. 능력이 부족해서 혼자서 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았는데 주님께서는 제게 많은 협조자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분들의 도움으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좋았던 기억은 오래 기억하려 하였고, 나쁜 기억들은 빨리 잊어버리려고 하였습니다. 오디세우스처럼 불굴의 의지와 지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금경축을 맞이하는 수녀님처럼 다양한 능력을 지니지는 않았지만 하느님께서 주신 은사를 감사하게 생각하며 지내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활’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예수님께 부활 이후의 삶에 대해서 질문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의 삶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차원의 삶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능력과 업적으로 제국을 세웠던 왕들도, 이름 없는 산골에서 피었다 지는 꽃처럼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던 사람도 부활 이후의 삶에는 큰 차이가 없다고 하십니다. 그러기에 능력 있다고 하는 사람들은 좀 더 겸손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감사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 삶은 이 세상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웃과 세상을 섬기는 삶을 살았다면, 자신이 걸어온 길을 성찰하는 삶을 살았다면 우리 모두 천상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성서에서 말하는 ‘부활’이란 말의 뜻은 단순히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일어서다. 다시 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낡은 관습과 습관을 버리고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는 것이 부활입니다. 잘못된 생각을 버리고, 죄의 상태에서 벗어나 잘못된 틀을 벗어버리고 사랑과 희망의 날개를 얻는 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갈릴래아로 가라!’ 갈릴래아는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던 곳입니다. 절망 중에 있던 사람들에게, 두려움에 떨고 있던 사람들에게 죽음은 죽음이 아니요, 십자가의 끝은 절망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예루살렘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을 박해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던 사람들에 대한 용서입니다. 분노와 원망을 던져버리고, 화해와 용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몸의 변화가 부활이기도 하지만, 인식과 태도의 변화가 부활의 시작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이 있습니다. “믿으면 아나니, 그때 아는 것은 예전에 아는 것과는 다르다. 사랑하면 보이나니, 그때 보는 것은 예전에 보는 것과는 다르다.” 하느님을 믿으면서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봅니다. 분노와 미움, 증오와 불만에서 사랑과 용서, 겸손과 친절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봅니다. 이것이 천상에서 우리가 살아갈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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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20,27-40: 천국에서는 장가드는 일이 없다
사두가이란 보상을 바라고 하느님을 섬기지 않는다고 하여, 의로운 자라는 뜻으로 불린 명칭이다. 그들은 부활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것도 하나의 보상심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사두가이들이 한 여인이 일곱 남편을 맞게 되는 경우를 들어 예수께 질문한다.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33절).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35절) 어째서 그럴까? 그들은 두 번 다시 죽지 않는다. 그들은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주님께서는 다가오는 세상의 새로운 상황을 알려주신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새로운 모습이란, 부활 자체가 결혼의 목적성을 상실해 더는 자손을 낳을 필요가 없다. 부활 때에는 사람들이 천사들과 같아지기 때문에(36절) 죽는 일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36절). 이것은 우리가 부활하게 되어 있고, 그 부활은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사실에 연결되고 있다. 즉 부활로서 완전한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우리는 이미 하느님의 자녀이다. 지금 어떤 모양으로든지 그분의 생명에 결합하여 있으므로 장차 부활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루카는 “저 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 받는 이들”(35절)에 대해서 말했다. 모든 일상의 삶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부활로 가는 진실한 하느님의 자녀임을 체험을 할 수 있는 장이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체험하기 시작한 사람만이 마지막 부활을 믿을 수 있고 또 갈망할 수 있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삭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37절)이라 한 것은 모세는 그 순간에 이미 수백 년 전에 죽은 그 선조들과 생명의 관계에 있고, 신비스러운 친교를 통해 계속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부활은 단순히 육체적인 사실로서가 아니라, 이미 하느님과 우리를 만나게 하는 그분과의 일치된 생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38절). 그리스도인은 현재 이 순간부터 그분과 사랑의 일치 속에 살아가야 하며, 그분과의 사랑의 일치 속에 사는 것이 참으로 살아 있는 사람의 모습이며, 이 살아 있는 인간의 모습이 하느님의 영광이라고 하였다. 항상 살아 있으면서 구원받은 사람의 삶을 이 땅에서부터 살아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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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루카 복음사가는 사두가이들과 예수님의 부활 논쟁을 다룹니다. 당시 유다교에는 여러 분파가 있었는데, 사두가이들은 죽음 이후 부활을 믿지 않았지만 바리사이들은 그 나름의 부활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일곱 형제가 한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지만 모두 자식 없이 죽었다면, 부활 때 그는 누구의 아내가 되냐는 것이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가이들의 질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그러나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 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라고 답하십니다. 부활을 믿던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의 대답에 맞장구를 칩니다. 인간의 경험이나 언어로는 하느님 나라를 완벽하게 설명하거나 이해하기가 턱없이 부족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설명하실 때, 다양한 비유를 쓰시는 이유입니다. 마찬가지로 부활 신앙은 머리로 이해하거나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마음으로 믿어 고백하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느님과 비교할 때 피조물 인간은 상대적으로 어린아이 수준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선으로 구성된 2차원에서 입체적인 3차원을 이해할 수 없고, 3차원에서 시공간을 초월하는 4차원을 이해할 수 없듯이, 우리의 이성과 지식은 명확한 한계를 지니고 있음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과 올바르게 소통하며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신앙 여정을 내딛는 첫걸음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부활 신앙을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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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오늘 몇몇 사두가이들은 죽은 다음의 삶에 대해 예수님께 묻습니다. 일곱 형제가 차례로 한 여자를 아내로 삼았을 경우, 부활 때에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는 질문입니다. 부활을 믿는 바리사이들과 달리 사두가이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지요.
물론 당시 죽은 다음의 삶에 대해 많은 의견과 주장이 있었습니다. ‘죽은 다음에는 불사불멸의 형태가 된다.’ ‘육체가 부활하여 이 세상에서 산다.’ ‘심판을 받은 다음에 다른 곳에서 산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부활에 대해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이는 부활하면 빛과도 같은 영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을 뜻하지요. 언젠가 우리도 부활하면 지금과 같은 육신의 형태를 취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문제는 육신의 부활입니다. 우리는 사도신경을 통해 육신의 부활을 믿고 있지 않습니까?
육신의 부활이란 육신까지도 포함하여 인간의 전 존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육신 때문에 죄도 짓지만, 육신을 통해 선행도 많이 하지 않습니까? 따라서 육신의 부활이란 지상에서 육신을 통해 쌓은 행위들을 함께 지니고 부활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루하루 선행을 더욱 베풀며 영혼을 단련시켜 나가야 하겠습니다. 그럼으로써 부활의 영광을 얻고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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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염철호 요한 신부님]
사두가이들은 천사의 존재와 육신의 부활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영혼이 영원히 산다는 것도 부인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영원한 생명이나 부활이라는 주제에서 바리사이뿐만 아니라 예수님과도 의견의 충돌이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도 바로 그 내용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부활이 있다면 설명할 수 없는 문제들이 있다며 이성적으로 질문합니다. 곧, 율법은 형제가 죽으면 그 후사를 이어 주려고 죽은 형제의 아내를 맞아들이라고 가르치는데, 만일 부활이 있다고 한다면 죽고 난 뒤 부활하였을 때 그 부인은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대답하십니다. 부활이란 지금 현재 세상에서 살고 있는 이 육신의 조건을 그대로 가지고 되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변화된 육신으로 되살아나서 천사들과 같아지기에 더 이상 세상의 연에 매여 있지 않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불교가 말하는 환생처럼 지금과 전혀 다른 존재로 되살아난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각자가 현세에 매이지 않는 온전히 변화된 몸으로 부활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을 칭찬합니다. 아마도 그들은 바리사이들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들과 같은 생각을 하고 계셨기에 예수님께 호의를 가집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예수님과 대립각을 세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조상의 전통보다 당신에 대한 믿음을 더 중시하시기 때문입니다. 곧, 당신을 하느님의 아들로 받아들이라고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은 모두 예수님께 등을 돌리고 그분을 죽입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완전히 다른 몸으로 부활하심으로써, 진정 부활이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오늘 제1독서는 역사적으로 유다인들을 가장 괴롭힌 임금 가운데 하나인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 4세의 죽음을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그가 맞은 불행한 죽음의 원인이 예루살렘에 대한 그의 죄 때문이었음을 안티오코스가 직접 입으로 고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크게 실망하고 죽으면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합니다.
그렇다면 그도 과연 부활을 누릴 수 있을까요? 원수들의 구원 문제는 우리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판단하실 문제인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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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텔레비전의 토론 프로그램이나 청문회, 아니면 국회에서 실시하는 대정부 질문 영상을 보면서 때로는 ‘정말 궁금해서 질문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답은 정해져 있고 질문에 답하는 사람을 궁지에 몰기 위하여 질문합니다. 상대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 내 생각과 주장이 옳음을 드러내려고 질문합니다.
나아가 상대방 자체를 판단하고 규정지어 그 사람이 하는 모든 행동을 비판하고 잘못된 것으로 몰아갑니다. 우리가 하는 질문들을 살펴보아도 이런 판단과 확증 편향은 비일비재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에게 그런 식의 질문을 받으십니다.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고 있는 그들은 마지막으로 자신들의 질문을 통해서 그분을 고발하려고 만반의 준비를 합니다.
그런 그들에게도 예수님께서는 ‘부활’의 의미와 하느님의 구원에 대하여 설명해 주십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아마도 사두가이들은 그들의 선조들이 체험했던 하느님 안에 갇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지금 여기에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와 만나십니다. 또한 나에게만 찾아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찾아오십니다.
자신들의 이론과 배움, 체험과 경험에만 갇혀 있던 사두가이들은 이를 제대로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었으며, 제대로 판단할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 논쟁으로 사두가이들을 이해시키려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평생을 지녀 온 그들의 신념을 예수님의 한마디로 바꿀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다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열린 마음, 받아들이는 여유를 바라신 것은 아닐까요?
자신이 언제나 옳을 수는 없음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나약함, 부족한 이해와 판단을 바라보라고 이야기하신 것이 아닌지 짐작해 봅니다. 그러한 열린 마음이 지금 여기에서 나와 함께 살아가시는 하느님을 느끼게 해 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산 이들의 살아 계신 하느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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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언제나 살아계신 하느님>
과거, 현재, 미래가 다 소중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미래를 더 소중히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주님께서 약속해 주신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과거에 묶여 삽니다. 미래가 없는 것처럼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미래에 잘못 집착해서 오늘을 인색하게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과거를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고 미래를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면서 오늘을 사랑으로 살아야 합니다. 약속된 미래가 오늘을 통해서 오기 때문에 미래를 희망하는 만큼 오늘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과거는 역사요,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신비입니다. 그러나 그 신비는 오늘 주어진 선물을 통해서 옵니다. 오늘을 사랑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새 시대를 살면서도 과거의 율법 안에 갇혀서 살았습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미래가 없이 오늘에 매여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현실에 밝아 자기 잇속을 챙겼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되었습니다. 어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 주셨다.”(1코린2,9) 하며 약속된 부활의 삶을 확인시켜 줍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당신이 몸소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우리에게도 새 생명에 대한 희망을 안겨 주셨습니다. 따라서 부활에 대한 희망 안에 있는 사람은 지금 여기서부터 부활의 생명을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부활을 믿는 이에게는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 닥치더라도 견디어 냅니다. 그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그분의 약속을 믿기에 현세적인 것보다도 영적인 것에 더 마음을 씁니다. 현세적인 것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약속된 미래를 희망하는 만큼 가능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희망을 간직해야 합니다. 그리고 씨를 뿌려야 합니다. ‘눈물로 씨 뿌리면 곡식 단 들고 올 제 춤추며 노래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믿음이 성장했고 마침내 목숨을 내놓고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셨고 약속에 충실하신 하느님으로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성경은“그분께서 명령하시면 뜻하시는 바가 모두 이루어지고 아무도 그분의 구원하시는 능력의 손길을 막지 못한다”(집회39,18).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는 그 약속을 믿고 사는 이에게 언제나 살아계십니다.
하느님께서 산 사람들의 하느님이라는 말은 결국 깨어 있는 이에게 능력의 하느님으로 다가오신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 의지는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변함이 없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영원히 살아계십니다. 죽음은 인간의 잣대일 뿐입니다.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영생이 있고, 그것을 믿는 한 우리도 언제나 살아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마음이 흔들비쭉입니다. 이 시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으로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나 뵙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 주님을 기다리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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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세계적인 글로벌 유통 대기업과의 경쟁에서 이긴 토종 대형 마트가 있습니다. 이 대형 마트는 ‘노브랜드’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질 좋은 물건을 합리적인 가격으로 팔기 위해 브랜드를 붙이지 않겠다는 의미로 이름을 붙인 자체 브랜드입니다.
그런데 노브랜드가 햄버거 사업을 처음 시작할 때 내세운 광고 모델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검은 피부의 모델을 쓴 것입니다. 온라인에서는 다음과 같은 댓글이 등장했습니다.
‘검은 피부 모델이라니, 한국에서 만들어진 브랜드라며 외국인을 모델로 쓰는 것이 올바른 일인가?’
소비자들의 직관적인 추측에서 보았을 때, 검은 피부를 가지고 있으니 외국인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모델은 한국인이었습니다. 나이지리아 출신의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한국말만 쓰고 또 한국에서만 살았던 완벽한 한국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반박 댓글이 올라왔습니다.
‘한국인이 검은 피부일 리 없다고 생각하는 당신은 편협한 사람이군요.’
편협한 생각을 가지고 당연히 함께해야 할 사람을 내쳤던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함께해야 할 이유가 너무 많은데, 함께하지 못할 이유 몇 가지를 내세워 절대로 함께할 수 없다고 단언하는 모습도 또 얼마나 많습니까?
편협한 생각은 결코 하느님의 생각이 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을 훨씬 뛰어넘으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하느님의 뜻을 따라 하느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 몇 사람의 질문이 이어집니다. 당시 율법에 의하면 어떤 형제가 자식 없이 죽게 되면, 다른 형제가 죽은 형제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지만 자식 없이 죽었고 그래서 그 아래의 형제가 차례로 형수를 맞아들였지만 자식 없이 모두 죽게 되었다는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부활할 때 이 여자는 누구의 아내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하느님의 관점이 아닌, 세상의 관점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지상 생활의 연장선 정도로만 보고 있기에, 부활 자체를 인정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런 편협한 생각이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우리 생각을 훨씬 뛰어넘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래서 완전히 새로운 모습을 바뀌는 삶, 그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초대받은 하느님 나라의 모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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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삶 너머 삶>
루카 20,27-40 (부활 논쟁)
그때에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물었다.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 아내를 남기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둘째가, 그다음에는 셋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습니다. 그렇게 일곱이 모두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마침내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그러나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 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도 떨기나무 대목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 주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그러자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스승님, 잘 말씀하셨습니다.” 하였다. 사람들은 감히 그분께 더 이상 묻지 못하였다.
<삶 너머 삶>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루카 20,38)
삶 너머 삶
삶과 삶
사이 죽음
삶 너머 삶
삶과 삶
잇는 죽음
삶 너머 삶
은총의 삶
은총의 죽음
삶 너머 삶
삶의 은총
죽음의 은총
삶 너머 삶
없는 듯
있는 삶
삶 너머 삶
있는 듯
없는 죽음
삶 너머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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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정 떼기>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오늘 주님께서 부활한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시는데 제가 자주 하는 말이지만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사실 말이 되지 않는 말입니다. 이 세상 그 누가 하느님의 자녀 아닌 사람이 있습니까?
다 하느님의 자녀인데 그런데도 오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성숙한 하느님 자녀 또는 완성의 하느님 자녀라는 의미 말입니다.
사실 세례가 이런 의미입니다. 자기가 본래 하느님 자녀라는 것을 모르고 이 세상의 자녀로 살거나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지 않던 사람이 이제 자기 신원을 알게 되고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기로 새롭게 마음먹는 것이 세례가 아닙니까?
그런데 그렇게 마음먹고 일평생 살았지만 이 세상 사는 동안 하느님과 세상 사이를 왔다 갔다 했는데 이제 죽어 다시 태어날 때는 진짜 새로운 하느님 자녀로 태어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또한 이런 의미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육신 아버지의 자녀로도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오로지 하느님의 자식으로 사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의 경우, 아버지 베드로 베르나르도네의 아들이었다가 회개한 후 주교님 앞에서 옷까지 홀딱 벗어 돌려드리며 상속권을 포기할 때 이제부터 나는 하늘의 아버지를 자유롭게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선언했지요.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부자지간의 인연을 비롯하여 과거의 모든 인간적인 인연으로부터 훌훌 벗어난다는 의미입니다.
더 이상 누구의 아들딸이 아니고, 더 이상 누구의 엄마 아버지가 아니고, 더 이상 누구의 아내 남편이 아닙니다.
오늘 천사와 같이 된다는 표현도 있는데 천사처럼 더 이상 죽지 않을 뿐 아니라 천사처럼 더 이상 ‘누구의 누구’가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의 자녀라는 말입니다.
제가 이것을 확실히 깨닫고 실감하게 된 계기는 어머니의 죽음이었습니다. 그전까지는 머리로만 그렇게 생각했다는 뜻이지요.
제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저는 어머니를 이제 제 어머니가 아니라 하느님의 딸로 놔드려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헤어지기 섭섭하여 간신히 작별의 손을 놓듯 여간 슬프고 힘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그래야지만 어머니께서 하느님께 훌훌 떠나실 것이기에 그리했습니다. 그런데 신앙인이 아니어도 그런 말 있지 않습니까? ‘정 떼기’라는.
옛날 정이 많고 사랑이 많은 사람이 죽게 되면 갑자기 전과 달리 모진 짓을 하면 그것은 정 떼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라고 했지요.
늙어갈수록, 아니 죽어갈수록 우리도 정 떼기를 해야겠습니다. 하느님의 완전한 자녀가 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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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희망의 여정>
-죽음은 새로운 삶의 시작-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시편23,1)
김수환 추기경님의 묘비명으로 평생 좌우명으로 삼고 싶은 시편 성구입니다. 단 하나의 소원이 있다면 우리의 착한 목자이자 벗인 살아 계신 주님과의 날로 깊어지는 우정의 관계일 것입니다. 11월 위령성월도 얼마 안남았습니다. 저는 위령성월을 희망성월, 성인성월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하루하루 성부 하느님을 향해 성자 예수님과 함께 성령의 사랑안에서 희망의 여정, 성화의 여정, 귀가의 여정을 살아가는 우리 믿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향하는 성부 하느님은 우리의 미래이자 희망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을 향한 희망의 여정, 성화의 여정, 귀가의 여정중 날로 하느님을 닮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제 좋아하는 위령미사 경문중 한 대목과 위령감사송에 나오는 한 대목을 나누고 싶습니다. 모두가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 부활의 삶으로 직결되는 새로운 삶의 시작임을 깨닫게 합니다.
“성자께서 죽은 이들의 육신을 다시 일으키실 때에
저희의 비천한 몸도 성자의 빛나는 몸을 담게 하소서.
또한 세상을 떠난 교우들과 주님의 뜻대로 살다가 떠난 이들을
모두 주님의 나라에 너그러이 받아들이시며
저희도 거기서 주님의 영광을 영원히 함께 누리게 하소서.
저희 눈에서 눈물을 다 씻어 주실 그때에
하느님을 바로 뵈오며
주님을 닮고
끝없이 주님을 찬미하리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 어머니이신 가톨릭 교회의 죽음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부활의 시작임을 알립니다. 참 요즘 주변에서 가을 단풍잎 지듯이 많은 분들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죽음도 아주 가까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기억하라”, 또 “날마다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고 끊임없이 충고하는 현자들입니다. 이어지는 위령 감사송의 다음 대목도 위로와 힘이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복된 희망을 주셨기에, 저희는 죽어야 할 운명을 슬퍼하며서도, 다가오는 영생의 약속으로 위로를 받나이다. 주님,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 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나이다.”
이 또한 거룩한 교회의 죽음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참으로 이런 하느님이 궁극의 희망이자 미래가 된 이들이라면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인생 함부로, 생각없이, 욕망대로 막 살지는 못할 것입니다. 늘 강조하지만 내 삶의 여정,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로, 일년사계(一年四季)로 압축하면 어느 시점(時點)에 와 있겠는지요? 바로 이런 구체적 점검이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을 거품이나 환상, 허영이 사라진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게 합니다.
바로 이점에서 제1독서 마카베오기 상권에 주인공으로 나오는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 임금은 완전히 실패인생을 살았음을 봅니다. 죽음에 임박해서야 뉘우치며 후회하지만 너무 늦었습니다. 그는 자기 벗들을 불러놓고 고백합니다.
“내 눈에서는 잠이 멀어지고 마음은 근심으로 무너져 내렸다네...권력을 떨칠 때에는 나도 쓸모 있고 사랑 받는 사람이었는데....내가 예루살렘에 끼친 불행이 이제 생각나네. 그곳에 있는 금은 기물들을 다 빼앗았을뿐더러, 까닭없이 유다 주민들을 없애 버리려고 군대를 보냈던 거야. 그 때문에 나에게 불행이 닥쳤음을 깨달았네. 이제 나는 큰 실망을 안고 이국땅에서 죽어 가네.”
참 허망한 죽음입니다. 죽음은 삶의 요약입니다.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 죽음을 통해 환히 드러납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한 물음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물음으로 직결됩니다. 문득 조선시대 서른 여덟 짧은 삶이었지만 ‘따뜻한 이상’과 ‘뜨거운 실천’의 힘으로 조선의 정신을 실천하다 억울하게 사사된 중종임금때 충신 조광조의 마지막 감동적인 유언시가 생각납니다.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 사랑하듯,
나라 근심하기를 내집처럼 하였노라.
밝은해 이땅을 굽어보고 있으니,
훤하게 이 충심 비추어 주리라.”
선조실록이 전하는 당대의 대학자 이황의 조광조에 대한 평이 참 적절하고 아름답습니다.
“조광조는 훌륭하고 어진 선비입니다.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게 아름다웠으며, 그 독실한 학문과 힘써 실천함은 비교할 사람이 없습니다. 도를 실천하고 인심을 맑게하여 세상을 요순의 시대로, 임금을 요순처럼 만들고자 하였는데 불행하게도 소인들의 참소와 이간질로 인해 참혹한 죄를 받고 말았습니다.”
너무 아름다운 삶과 죽음에 대한 일화라 인용했습니다. 또 하나 어른이 사라진 이 시대에 참으로 그리운 분, “김수환 추기경 영전에” ‘방문객’의 시인 정현종이 바친 추모시도 나누고 싶습니다.
-너무 늦게 말씀드리지요만,
우리가 모자라 어려움이 그칠 날이 없었던 그동안,
중대한 사안에 대하여 시의적절 말씀하시는 걸
우리가 얼마나 반겼으며
그 말씀 속에 들어 있는 나라 위한 진정에 눈물겹고
그 생각의 균형과 그 내용의 적절함에 우리가 얼마나 든든했는지
당신은 혹시 알고 계셨는지요.
실은 당신의 얼굴이 참 마음에 든다고 저는 늘 말해왔습니다.
그 얼굴, 그 표정은
천품(天稟)의 선의와 천품의 진정과 천품의 겸손의 육화였습니다.
말씀의 힘이 나오는 그 청정심(淸淨心),
그 마음, 그 말씀, 그 얼굴의 움직이는 표정이 없으니 나라가 텅 비었습니다.
궁핍감이 커집니다.
사람의 궁핍, 천진의 궁핍, 평화의 궁핍....
김수환 추기경님
당신의 빛, 그 진귀한 아름다움을 추모하는 저희의 아쉬움과 슬픔 속에,
그리하여 그리움 속에 내내 꽃피소서.-
맑고 향기로운 삶이었기에 길이 맑고 향기로운 여운을 남기는 추기경님입니다. 희망없이, 생각없이 살다가 죽음을 맞이했을 때, 얼마나 당황스럽겠는지요! 그러니 하느님께 궁극의 희망을 두고, 희망의 여정, 성화의 여정, 귀가의 여정을 살아야 합니다. 희망의 여정과 함께 가는 기쁨이요, 귀가의 여정과 함께 가는 행복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참기쁨, 주님을 뵈올 참행복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으로 부활의 삶이 시작됨을 보여 줍니다. 일곱형제가 한 여자를 아내로 두었을 때 사후에 누구의 아내가 되겠는가라는 참 난해한, 말이 안되는 질문으로 주님을 시험했을 때 주님의 통쾌하고 명쾌한 답변이 죽음에 대한 궁극의 답이 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간다. 그러나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이미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이미 삶과 죽음을 넘어 오늘 지금 여기서 영원한 생명의 부활의 삶을 살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이미 오늘 지금 여기 지상에서부터 시작된 하늘 나라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모세오경을 근거로 부활을 부정하는 사두가이들에게 부활의 진리를 설파합니다.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도 떨기나무 대목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주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하느님 안에서 천상영혼들, 연옥영혼들, 지상영혼들인 우리 모두가 살아서 이 거룩한 미사를 봉헌하는 것입니다. 이래서 끊임없이 봉헌되는 연미사와 생미사입니다. 새삼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한 하느님 아버지만이 우리의 영원한 미래이자 희망임을 깨닫습니다.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모세뿐 아니라 우리 하나하나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 계신 ‘하느님의 벗’이 되어 하느님과의 우정을 날로 깊이하는 것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바로 이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의 목자이자 벗인 주님과의 우정을 날로 깊이해 주십니다.
‘주님께 아뢰옵니다.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행복 당신밖에 없습니다.”’(시편16,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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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루카20,38)
<부활신앙!>
오늘 복음(루카20,27-40)은 '부활 논쟁'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사두가이들과 바리사이들이 있었습니다. 사두가이들은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었고, 바리사이들은 부활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이 이 세상에 살아 있을 때, 일곱 형제가 똑같이 한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게 된 경우를 예로 들면서,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하고 예수님께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십니다.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하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져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루카20,35-36)
'부활신앙!'
우리의 신앙은 '부활신앙'입니다. 때문에 하느님을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고, '이제와 영원히 언제나 살아있음만' 존재할 뿐입니다. 믿는 이들에게는 이 세상에서 맞이하게 되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고, '영원한 생명이 있는 저 세상으로의 옮아감이며, 영원한 생명의 시작'입니다.
이것이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루카20,38) 라는 말씀의 의미라고 묵상했습니다.
우리는 이제와 영원히 죽지 않고 살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것을 이겨내시고, 죽음까지도 이겨내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분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를 위한 죽음이요 부활'입니다.
우리는 그런 분을 주님으로 믿으면서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해야 합니다. 죽지 않고 살아 있어야 합니다. '이제와 영원한 부활'이 '믿는 이들의 궁극적인 목적이며 희망'입니다.
오늘도 부활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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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2BBVT0LL8M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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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루카 20, 38)
자연의 섭리 앞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시간은 다시
되돌릴 수
없습니다.
현재는 과거를
내려놓으며
오늘이 되고
미래는 현재를
내려놓으며
우리의 어리석음을
허뭅니다.
내려놓고
오늘을 다시
사는 법을
배웁니다.
산 이들의
하느님께서
우리를 행복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살아계신
하느님이
아니었다면
소중함도
영원함도
있을 수 없습니다.
살아계신
하느님이
계시기에
성장하고
성숙하는
인격의 기쁨도
있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느님께서는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든
의미가 되어
주십니다.
삶의 이유와
삶의 의미에
목마른
우리들에게
행복할 자격이
있음을 당신의
부활로 친히
가르쳐주십니다.
산 이들의
하느님께서
오늘이라는
기적을
일구어 내십니다.
우리의 영혼과
육신을 만드신
하느님께
우리의 삶을
맡깁니다.
우리 존재의
본질을
부활에 참여할
자격으로
바꾸어 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존재의 날들이
우리를
건져 내시는
하느님 자녀들의
살아있는
날들이 됩니다.
하느님 자녀라는
가장 큰
자격이 있기에
십자가도 주어지고
부활도 주어지는
것입니다.
자격이
부활의 동참으로
이어지고
더듬거리며
찾아가는
아름다운 행복이
됩니다.
산 이들의
하느님과 함께
만들어가는
행복한 오늘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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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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