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철학은 삶의 기예
무엇이 인문학인가. 쇼펜하우어의 정의에 의하면, 그것은 “고대 작가들에 대한 연구”이다. 고전학이 즉 인문학이다. 그는 고전이 인문학이 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을 읽는 사람이 다시 인간이 되기 때문”이라고 부연했다. 인문학은 대학의 학술 연구와 논문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식(way of life)'에 있다. 그렇다면 도학(道學)이 곧 인문학 아닌가.
분야별로는 언필칭 문사철(文史哲)이라 부른다. 그것도 마찬가지, 포인트는 목표와 효용이다. 문학은 퇴계의 시학이 늘 거론하듯 감발흥기(感發興起), 더 나은 삶으로의 자극과 인스피레이션을 위한 것이다. 시를 통해 탕척비린(蕩滌鄙吝)하고, 온유돈후(溫柔敦厚)에 이르는 것. 그래서 한글로 노래를 짓는 것도 마다 아니했다. 역사는? 늘 ‘거울’로 비유되었다. 자신의 얼굴을 비추어 보고, 때를 씻고, 몸을 가다듬는 ‘반성’의 도구가 역사였다. 역사는 즉 ‘교훈’으로만 그 역할을 다한다. 윌 듀란트는 평생의 대작 『문명이야기』 11권을 탈고한 다음에 노트 혹은 후기로 『역사의 교훈(The lessons of History)』을 썼다. 사실을 확인하고, 이야기를 찾는 것은 아주 기초적인 작업인 바, 흥망성쇠, 개인적 정치적 판단이 삶을 어떻게 세우고 무너뜨렸는지를 늘 새기고 ‘경계하는’ 실용성에 역사의 이유가 있다.
철학? 이는 더욱 그렇다. 피에르 아도는 『고대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서구에서 진행된 철학의 심각한 변질을 추적한 바 있다. 형이상학적 건축이나 언어나 논리에 대한 변증이 철학은 아니고, 더욱 그 화석들에 대한 연구가 철학일 수는 더욱 없다. 소로우는 “우리 시대에는 철학 선생들만 있고, 철학자는 없다”고 탄식했다. 한 노인이 플라톤에게 “지금 덕에 대한 가르침을 듣고 왔소!”라고 하자, 플라톤은 말했다. “그럼 언제 덕을 실천하고 살려고 합니까”라고 했다.
역시 철학은 ‘삶의 기예’를 가리킨다. 진리를 아는 것보다 선을 행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철학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 이래의 표준 정의는 이렇다. “철학은 지혜의 통찰이다. 지혜란 삶의 기술을 가리킨다. 목표는 행복이다. 쾌락이 아니라 덕성이 우리를 그곳으로 이끌 것이다. (Philosophy is the science of wisdom. Wisdom is the art of living. Happiness is the goal, but virtue, not pleasure, is the road.)”
‘철학’의 이 정의를 어디선가 들은 것같지 아니한가. 유교를 위시하여 동양의 ‘철학적’ 전통은 바로 이 ‘정통적’인 철학의 정의 위에서 잉육되고 발전되어 왔다. 명말청조 고증학으로 지식을 위한 지식으로 낙착되면서 중국의 철학정신이 죽었다는 모종삼 등의 탄식을 기억하자.
2. 황혼의 유교
그런데 어쩌나? 오랜 ‘인문’과 ‘철학’의 중심이던 유교는 지금 쇠락하고 있다. 일부 아쉬운 회고가 그 황혼의 위광을 붙들고 있을 뿐, 현대인들은 유교를 돌아보지 않고, 때로 침을 뱉는다. 장엄하게 저무는 유교에 정녕 미래가 있을까? 유교의 적응력이 그래왔듯, 체(體)를 살리되 용(用)은 유연하게, 그리고 무엇보다 본(本)을 건지기 위해 과감하게 말(末)을 내버리는 전략이 필요하다.
우선 의복과 제사 등 ‘의례’에 연연하지 말 것을 제안한다. 공자 자신 예(禮)라는 것이 종고옥백(鐘鼓玉帛)에 있지 않다고 하지 않았는가. 절차를 중시하기보다 ‘마음’을 표현하는 것, 그리고 자신의 편견과 이해관계를 떠나 사람과 만나고 일을 처리하는 극기복례(克己復禮)를 예의 중심에 세우지 않았던가.
홍대용의 『을병연행록』을 읽다가 밥알을 튀긴 적이 있다. 북경, 송별하는 자리에서 친해진 중원의 학자들에게 담헌이 ‘마음을 터놓고’ 묻는다. “변발, 깎은 머리를 보니 마음이 짠하오이다.” 엄성은 묵묵히 듣고 있고, 반정균은 농담이다. “모르시는 말씀, 빗거나, 상투 트는 번거로움이 없고, 또 얼마나 시원한데, 그 맛은 잘 모르실 거외다.” “그렇군요, 증자가 그걸 모르고 왈, 신체발부(身體髮膚)는 수지부모(受之父母)라 읊었나 봅니다” 하고 다들 웃었다. “절강의 이발소 간판이 ‘성세낙사(盛世樂事)’인데, 과시 절창이지 않소?” 그러다 담헌이 말한다. “망건은 비록 대명(大明)의 제도이나 실로 좋지 않습니다.” 엄생이 반문하자 담헌의 대답이 이랬다. “거 어째, 말꼬리로 사람 머리를 덮는단 말이오. 관과 신발이 거꾸로 놓인 셈이지...”
이 유희 정신에 따라 공자의 예(禮)도 밟고 지나갈 수 있어야 한다. 일찍이 혜강 최한기가 말했던 ‘손익(損益)’이 그것이다. 유교는 어느 때보다 과감한 손익의 환골탈태가 필요하다.
3. 유교 문명의 꿈
그렇다고 모든 문화가 상대적인 것은 아니다. 에리히 프롬이 갈파했듯, 어떤 문화는 인간성의 실현을 위해 유리한 환경과 질서도 있고, 그것에 불리한, 인간성을 파괴하는 반인간의 체제도 있다.
다산은 ‘문명 상대주의’에 빠지지는 않았다. 그는 인간사회가 실현해야 할 ‘보편적 문명’이 있다고 생각했다. 유교적 원론에 입각하되, 시대의 요청을 접목한 새로운 문명을 꿈꾸었다. 물론, 『목민심서』라는 제목처럼 “실현되지 못한 마음 속의 구상(心書)”으로 남았지만...
유교의 꿈은 영원의 것이다. 대동(大同)의 이상은 여직 새롭다. “노인들에게는 편안한 말년을, 젊은이에게는 일을, 어린이에게는 교육을 제공한다. 의지할 데 없는 과부, 고아, 독거노인, 장애와 질환자들에게는 쉼터가 있다. 남자는 직장이 있고, 여자는 가정이 있다.(使老有所終, 壯有所用, 幼有所長, 矜寡孤獨廢疾者皆有所養. 男有分, 女有歸.)”
이인(里仁)의 공동체, 대동(大同)의 꿈에 대한 사람들의 열망이 그 어느때보다 절실해졌다. 커진 경제 규모, 복잡한 기대 수준에 맞추어, 일과 삶을 조화시키고, 직업의 질을 고민하게 되었으며, 일상적 권력과 불평등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과 인권이 시급해졌다. “우리의 공동체는 건전한가?” 이 물음에서 미래의 유교 담론이 시작되어야 한다.
새 공동체의 중추에 인의예지(仁義禮智)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지금 사회의 뜨거운 화두가 유교를 가리키고 있다면 지나칠까. 인(仁)은 공감과 소통의 능력, 무고한 자를 다쳐 이익을 도모하지 않겠다는 휴매니티이고, 의(義)는 자신과 파당의 이해관계를 유보하고 사회적 공정성을 향한 의지이다. 예(禮)는 의(義)가 카바하지 못하는 ‘일상’의 공간에서 소프트하게 작동하는 인간 관계의 중심 태도이다. 배려와 관용. 지(智)는 이 덕목들을 배양하는 교육과 훈련에 해당한다. 이 지식들은 태어나면서 저절로 아는 것도 아니고, 지식만으로 완전해지는 것도 아니다. 사려와 선택에서 이 ‘지식’들이 실질적 힘을 행사할 수 있도록 부단히 연습되어야 한다. 그를 위한 개인적 훈련과 사회적 질서의 통합 구상이 바로 유교이다.
4. 띠풀을 제치고
문제는 우리가 “유교를 잘 모른다!”는 것. 이곳이 치명적이다. 퇴계는 선배 중에 유교를 진정 아는 자가 거의 없다고 탄식했다. 길은 모색(茅塞)으로 뒤덮여 있다. 안으로는 근대의 분과의 칸막이로 예전의 르네상스적 종합 학문을 놓쳤다. 문학, 역사, 철학, 과학, 예술 그리고 사회과학까지 연관된 이 ‘문명’의 구상 전체를 장악한 사람이 없다. 밖으로는 동서양의 지적 전통과 대결하고 대화하는 지식 개방의 지평이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근사(近思)의 정신이, ‘현재’를 통해 사유하는 힘이 힘과 현실성을 줄 것이다. 유교는 지금 여기 무엇인가?
우리는 아직 유교의 몇 글자도 알지 못한다. 글자 한자, 명구 하나가 “평생을 수용(受用)해도 다 못했다” 했으니, 이 학문의 아득한 깊이를 알 수 있다. 바닥까지 내려가지 않으면, 유교를 알 수 없고, 그것을 이용하기는 더욱 난감하고, 자칫 손을 다친다.
‘교과서’를 잊고, 전통의 묵수를 그칠 것. 주자는 늘 골륜탄조(鶻圇呑棗)를 경계했다. 대추씨를 그대로 삼키고, 개념의 조합과 안배(按排)에 익숙하느라, 도무지 그 정신과 대면하지 못하고 미끄러져 왔다. 대학은 논문을 요구하고 있고, 정치적 중립성의 이름 아래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도록 권한다. 비평이 앞서고 이해는 뒷전이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이 자원의 ‘맛’을 알 수가 없고, 더욱 다른 지식과의 대비와 통섭을 통해 새로운 유교의 지평을 만들어 나가기도 난망하다. 니체의 경구대로, 고전은 “느리게 읽어야 한다!” 가능할까. 도무지 온 거리가 소음인 세상, 계량과 위인(爲人)의 실적을 요구하는 세상에, 시간을 가지고 깊이 읽고, 주의깊게 사유하는 ‘홀로’의 옛 여유를 가질 수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