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책에 나오는 이야기로 글을 시작해보려 해요. 추운 겨울, 어떤 사람들이 말을 타고 얼어붙은 강 위를 지나갔는데, 이듬해 봄에 강이 녹을 때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는 거예요. 강이 언 자리에 소리도 얼어 봉인되었다가 날이 풀릴 때 같이 풀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저는 이 신비로운 이야기에 오랫동안 마음을 내어준 적이 있습니다. 소리가 뒤늦게 도착하면서 말과 사람이 거기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해줍니다. 소리의 어긋난 시차는 물론 현실이 아니라 환상이었지만, 때로 환상이 사실과 인과에 집착하곤 하는 차가운 현실을 조금은 견딜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는 게 아닐까요. 그러니까 현실에도 환상의 영역이 필요하다고요.
어쩌면 저와 비슷한 생각을 〈행복한 라짜로〉의 인물들이 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일까요. 〈행복한 라짜로〉에서 사람들은 자주 이야기에 매혹됩니다. 서로를 향해 이야기를 해주거나 들으면서 눈앞의 현실에, 현실을 초과하는 무엇이 스미는 일을 즐기는 것처럼 보여요. 저는 그 마음이 궁금해졌습니다.
이하 사진: 〈행복한 라짜로〉 스틸컷
인비올라타에 사는 사람들
시대를 가늠하기 어려운 이탈리아의 어느 마을 ‘인비올라타’를 비추며 영화는 시작됩니다. 집마다 전구가 넉넉하지 않아 몇 개로 나누어 써야 하는 불편함이 존재하지만, 마을에는 깊은 밤 사랑하는 여인을 향해 세레나데를 부르는 낭만이 있습니다. 이 황홀한 시간에 마을 사람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기꺼이 하객이 되어주는 이 소박한 공동체의 낙천을 본 순간 저는 이 영화에 마음을 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라짜로(아드리아노 타르디올로)는 이 공동체의 일꾼이었어요. 사실 마을 사람 모두가 농사짓는 일꾼이어서 굳이 따지자면, 라짜로는 일꾼들의 일꾼이었던 셈이지요. 마을 사람들 얼굴이 환한 것처럼 라짜로 얼굴에서도 그늘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사람들을 대신해 기꺼이 무거운 짐을 나르거나, 누가 시키지 않아도 사람들을 위해 커피를 타주기도 하지요. 한적한 시골의 목가적인 풍경을 담는가 싶던 이 영화에 변곡점이 찾아오는데요. 한동안 자리를 비웠다가 마을로 돌아온 알폰시나 데 루나 후작 부인(니콜레타 브라스키)의 등장이 바로 그 지점입니다. 그녀가 등장하면서 마을 공동체의 실체가 단숨에 밝혀졌습니다. 이 마을은 자연스럽게 형성된 공동체가 아니라, 담배 사업을 하던 후작 부인에게 속아 오랜 기간 부당하게 노동력을 착취당하던 사람들의 현장이었다는 것을요. 그러니까 이들은 후작 부인이 소유한 담배 농장의 일꾼들이었던 거예요.
이들을 고립시키는 후작 부인의 전략은 ‘거짓 이야기’였습니다. 이를테면, 마을 밖으로 사나운 늑대들이 돌아다니고 있으니 이 마을을 벗어나려는 순간 위험해진다는 것(사실 마을 사람들 누구도 늑대와 마주친 적은 없었습니다)과 바깥으로 나가기 위해 건너야만 하는 얕은 개울을 가리켜 ‘여기서 빠져 죽은 사람이 있다’고 한 것이죠. 모두 사람들의 고립을 지속시키기 위해 고안해낸 거짓이었습니다. 거짓 이야기가 마을을 에워싸고 있는 셈입니다.
후작 부인의 악행이 밝혀지는 계기가 된 것도 거짓 이야기라는 점은 생각해볼 만한 지점이에요. 마을 생활이 따분하게 느껴진 후작 부인의 아들 탄크레디(루카 치코바니)는 자주 (늑대가 출몰한다던) 그곳을 떠나 외딴곳에서 음악을 듣거나 춤을 추기도 합니다. 마을 사람들의 일꾼을 자청하던 라짜로는 탄크레디에게도 그렇게 합니다. 탄크레디는 그런 라짜로의 선의를 이용하는데요. 자신이 마을에서 보이지 않게 된 것은 라짜로에게 납치되었기 때문이고, 풀려나기 위해선 큰 금액이 필요하다는 식의 편지를 어머니 후작 부인에게 보냅니다. 정작 이 이야기에 속아 넘어간 사람은 후작 부인이 아니라 집에서 함께 살던 테레사라는 여자아이였어요. 이제는 식상하다며 속지 않는 후작 부인 몰래 테레사는 경찰에 범죄 신고를 해요. 그 여파로 마을에서 있었던 후작 부인의 불법과 악행이 수면 위로 떠오릅니다.
영화는 후작 부인의 불의를 고발하는 일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랬다면 영화 후반부는 지금과 전혀 다른 모습일 겁니다. 영화는 속인 사람보다 기꺼이 이야기에 속은 사람들, 즉 어째서 그들은 속게 된 걸까, 속은 사람의 내면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 걸까, 같은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는 일에 관심을 보입니다. 그들 내면의 윤곽을 그리는 일이죠. 영화 내내 제 앞에 던져진 질문에 어떤 답을 해야 할지 생각했습니다. 확실한 것부터 짚자면, 속는 일은 속이는 사람이 제시하는 거짓의 치밀함보다는 속아주는 사람의 마음에 달려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라짜로 내면의 풍경과 윤곽
그 중심에 라짜로가 있습니다. 탄그레디와 라짜로가 각별한 우정을 나누게 된 계기도 이야기였습니다. 마을에 가족이라곤 할머니 한 분밖에 없다는 라짜로에게 그는 이야기 하나를 지어냅니다. “내 아버지는 난봉꾼이셨고, 네 어머니는 아마 강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을 거야. 그러다가 아버지가 수작을 걸었을 테고… 그러니 우린 배다른 형제야.” 가정법으로 이루어진 이야기지만, 라짜로는 마음을 내어줍니다. 탄크레디를 자신의 형제라고 믿어요.
라짜로를 대하는 탄크레디, 탄크레디를 대하는 라짜로, 서로를 대하는 두 사람에게서 온도 차가 느껴지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탄크레디는 자신의 이야기를 진실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라짜로는 그렇게 믿기 때문이에요. 어떤 사고가 라짜로를 죽음에 이르게 했지만, 성경 속 나사로(요 11장)처럼 라짜로는 다시 살아나는데요. 영화는 이 부활을 기점으로 새로운 이야기로 나아갑니다. 부활한 라짜로가 가장 먼저 찾은 사람은 탄크레디였습니다. 죽기 전에 그와 했던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지키려고요. 죽어서조차 약속을 간직하던 라짜로의 마음을 생각해보면 어딘가 뭉클해집니다.
결말에 이르면 라짜로의 선한 마음이 한 번 더 반짝입니다. 탄크레디를 다시 만나고 점심 식사에 초대받았지만, 그의 변심으로 결국 식사는 이루어지지 못했는데요. 그때, 탄크레디와 함께 살던 테레사로부터 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자신들의 재산을 은행이 모두 갈취했다는 말을요. 그날 밤, 라짜로는 도시의 어느 나무 아래에서 중요한 것을 상실한 사람처럼 눈물을 떨굽니다. 다음 날 라짜로는 ‘무기’를 들고 은행으로 갑니다. 오래전 탄크레디에게 선물받은 고장 난 새총으로, 그의 돈을 다시 돌려달라 말하려고요.
라짜로에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탄크레디가 새총을 주면서 이 무기로 타인을 착취하는 세상의 모든 후작 부인과 맞서 싸우라 말했거든요. 그렇다 하더라도 이 맹목성에 많은 분이 공감을 표하긴 어려울 겁니다. 하지만 저는 라짜로의 선한 맹목성에 배어있는 작은 미덕 하나를 확대해서 보고 싶습니다. 여기에 어떤 미덕이 존재할까요.
그건 믿음입니다. 타인의 이야기를 그대로 들어주는 믿음이죠. 라짜로에게 있지만, 그를 속인 사람들에겐 없는 것이 바로 이런 믿음입니다. 라짜로가 가진 믿음의 반경은 한없이 넓어서, 그를 속이려는 허술한 이야기조차 끌어안습니다. 그가 가진 믿음의 반경에 제 믿음의 반경을 포개어봅니다. 믿음이 곧 타인을 수용하는 힘이라고 한다면, 저는 얼마나 타인을 제한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던지요. 이런 맥락이라면, 믿음은 나아가 자기 자신만이 아닌, 타인의 서사마저도 헤아릴 수 있는 상상력을 허락해준다는 생각도 듭니다. 우리는 대체로 시야가 좁아서 나의 입장과 내면만을 바라볼 때가 많지만, 믿음과 상상력은 우리 시력을 높여 자기 자신 너머에 있는 타인마저 볼 수 있게 해요. 그러고 보니, 이야기가 누구에게로 건너가기 위해선, 듣는 사람의 믿음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도 상징적인 일로 보입니다.
대체로 사실적인 장면들로 이루어진 이 영화 곳곳에 신비롭고도 환상적인 장면들이 들어와있는 것은 영화 〈행복한 라짜로〉를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줍니다. 예컨대 음악이 성당에서 떠나 라짜로를 따라오는 장면이나, 안토니아(알바 로르바케르) 거처에서 불현듯 과거 인비올라타의 삶이 현실로 밀고 들어오는 장면 말입니다. 인과와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아름다운 환상은 믿음과 상상력을 가진 사람에게만 허락된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믿음과 상상력. 두 단어를 만지작거리며, 저대로 라짜로 내면의 윤곽을 그리려 했는데 생각만큼 잘 이루어졌는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글을 쓰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 시도 자체가 라짜로에 대한 믿음을 전제하고, 나름의 상상력을 사용했다는 것을요. 저는 이렇게 제 현실에 환상을 초청합니다.
부기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장면이 많지만, 그중 이 지점을 꼭 말하고 싶은데요. 영화에서 무언가를 먹는 장면은 몇 번 나오지만 그럴 때마다 라짜로는 먹질 않습니다. 그저 음식을 맛있게 먹는 사람들을 바라보기만 하지요. 그 이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런 설정은 라짜로의 신성한 측면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내내 자신보다 타인의 이야기를 우선하는 라짜로의 선함과도 관련이 없진 않을 거예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