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대군 묘역 및 사당
세종아들인 임영대군의묘가 의왕에 있는까닭은?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무인세력과 정도전 등 신진사대부 세 력은 조선이라는 새로운 나리를 세우고 수도를 개경(지금의 개성)에서 한양(지금의 서울)으로 옮겼다. 유교를 국가 통치의 근본원리로 삼고, 왕권을 확립한 뒤 세종 때에 이르러 정치 · 경제 · 사회가 안정되고 문 화가 융성해졌다. 이와 관련하여 의왕시에는 세종의 넷째 아들 임영대군(臨屬大君)과 관련된 역사와문화유적이 있다.
임영대군 이구(李慘; 1418~1469)는 세종대왕의 넷째 아들이자 수양 대군의 동생이다. 그는 성격이 매우 활달하고, 문학과 역사를 두루 섭렵해서 논리가 뛰어나고 무예도 훌륭했다고 한다. 세조는 임영대군이 어질고 학식이 높은 선비와 같다고 칭찬하였다. 예종실록에 따르면, 임영대군은 항상 검소하고 재산에 욕심을 부리지 않았으며, 사람을 대할 때 정성을 다하고 거짓과 꾸밈이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성품을 따서 예종은 임영대군에게 정간(貞簡)이란 시호를 내려주었다.
임영대군은 세종과 문종대에 무기를 연구하여 총통을 새롭게 고쳐 만들고 화차를 제작했다. 형 수양대군이 단종을 물러나게 하고 왕위에 오르자 그의 통치를 보좌하였다. 왕자들 사이에 골육상쟁을 경험한 그는 동기간의 우애회복에 노력하여 여러 조카들 가운데 인재들을 찾아 내어 관리로 등용하기도 하였다. 세조가 화포제작을 주관한 경험을 살려 군기감을 조사토록 하자 그 잘못을 확인하고 군기감 운영을 바로 잡도록 하였다. 또한 세조의 명을 받아 신숙주와 함께 효령대군을 위한 원각사 창건에 힘쓰기도 하였다
임영대군은 비록 궁중에서 자라고 생활하였지만 민간의 생활을 잘 알고 백성들의 어려움을 헤아려 정책에 반영하려 했다. 예를 들면, 군사들에게 개인적으로 갑옷을 만들어 입게 하자는 논의가 있었는데, 당시 그 제도가 시행되면서 백성들이 소를 잡아서 갑옷 비용으로 다 써버리게되어 백성들의 원망이 많았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임영대군은 먹고 입는 것도 힘든 군사들에게 갑옷자l 만들어 입도록 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세조에게 건의했다. 이처럼 임영대군은 세조를 잘 섬기면서 백성들의 이로움과 해로움을 조정에 전하는 등 백성들을 보살피고 사랑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임영대군은 예종이 즉위한 직후 5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임금은 그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며 5일 동안 조정에서 히는 회의를 폐지하고 장례의 필요한물품을충분히 제공해 주었다. 후손들에게 전해져 내 려오는 얘기에 따르면,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임금이 되자 임영대군은 이곳 의왕시 능안마을에 내려와 숨어 지냈다고 한다. 세조가 함께 조정을 돌보자고 찾아왔지만 이를 끝내 거절하였으며, 매일 모락산 큰 바위에 올라가 망궐례를 올리면서 한성을 걱정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로 말미암아 모락산(暴洛山)이란 이름이 생겨났다고 한다. 그리고 임영대군의 묘역을 중심으로 후손들이 모여 살면서 능안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다.
임영대군의 묘역은 의왕시 내손동 능안마을 모락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묘역의 가장 큰 특징은 묘역을 상계 · 중계 · 하계 3단으로 구분하여 조선 전기 왕실 묘역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점이다. 상계에는 상석과 묘표가 배치되어 있으며, 중계에는 장명등과 망주석을, 하계에는 문인석을 차례로 배치하였다. 장명등과 문인석은 조선시대에 세워진 것 이며, 묘표는 1924년에 다시 중건되었고, 망주석은 1981년에 묘역을 정비할 때 새로 교체되었다. 광해군과 인조, 현종 때에는 임영대군의 묘역이 왕릉 후보지로 선정되기도 했다.
임영대군 사당은 묘역의 동쪽 구릉에 위치하고 있다. 사당은 원래 종가 뒤편에 있었으나 몇 차례 이전하여 지금의 위치로 옮긴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를 갖추고 있다. 지금의 사당은 2000년에 사당을 완전히 해체한 뒤 쓸 만한 재목만을 간추려 다시 원형대로 복원한 것이다.
사당은 맞배지붕의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기와지붕 양 옆으로 비바람을 막을 수 있도록 방풍널을 달았다. 사당 주위로 기와지붕 담장을 둘러 보호하고 정면에는 1칸 규모의 솟을대문을 세웠다. 사당 실내 중앙에는 임영대군의 신주가 모셔져 있 고, 나머지 공간에는 제사에 쓰이는 그릇과 옷이 보관되어 있다. 사당의 한 칸은 원래 서고로 시용하면서 고문서 와 유물을 두었는데 6 . 25전쟁 때 모 두 없어졌다고 한다. 사당에서는 매년 음력 1월 21일이 되면 전국의 후손들이 모여 임영대군 제사(기신제)를 지내고 있다
첫댓글 천량성님이 오십니다.
세종아들인 임영대군의 묘가 의왕 모락산 중턱에 있는 까닭에 대해 알아봅니다.
즐건시간되세요 .
인적 드문 곳에 외롭게ᆢ천량성님 말씀 잘 들어봅니다^^
해박하신 역사 해설~~
무언가 하나쯤은 건지는
유익한날 기대합니다.
역사의 한줄기 이렇게 또한번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