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의 중속 이론
필리핀은 아시아 대륙 동남쪽이 위치한 7,107개의 섬으로 이루어 진 나라이며, 약 8,000만명의 인구와 전형적인 열대성 기후를
갖고 있는 나라 이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독립하기까지 약 400년에 가까운 식민지의 역사를 갖고 있다. 마젤란(1512년)이 도착
한 이후 300년 이상 스페인의 중상주의 절대권력에 지배를 받았고 1898년 파리조약 이후(미·스페인전쟁이 미국의 승리)미국에
의해 40년 간 식민지를 경험했다. (2차 세계대전중엔 일본에게 3년 반 동안 지배받기도 했다.) 이처럼 오랜 식민생활로 인해 그
들의 많은 부분이 영향을 받았을 거라고 생각하며, 현재의 경제 위기 또한 거기서부터 기인된다고 본다. 즉 식민지 시대때의 식
민지경제의 건설로 이어져 오는 그러한 문제들을 외세의 영향에 의한 것으로 설정하며, 지금까지 해왔던 정책들이 어떤 연결 고
리가 있었으며, 어떻게 외세에게 중속되어 있는 가를 중속이론으로 그 고리를 살펴보고자 한다.
본론
1. 중속이론
(1) 이론틀
저 발전과 미 발전은 다르다. 저 발전은 발전되지 못한 것이며 (어떤 제약으로 인해서), 미 발전은 아예 발전하지 않은 것이다.
세계자본주의 체제에 포섭되기 전에 제 3세계는 미 발전 되어 있었지 저 발전 되어있지는 않았다. 이 저 발전은 전통성이나 낡은봉건제, 정체된 농업부분 때문이라고 하지만, 반대로 세계자본주의에 포섭되었기 때문이며, 이미 농업부분에 초자도 자본주의(이중경제론)가 침투하여 있었다. 세계자본주의 체계는 중심부와 주변부로 구조 지워져 있고, 국대외적으로 잉여착취기제가 작동하여,주변부의 농촌에서 추출된 잉여가 중심부로 이전되어 간다. 그 결과가 주변부의 저발전 상태이다.
(2)저발전과정의 세단계(Furtado, 1979:120-127), (Dos Santos, 1970:231-232)
오늘날 주변국들이 세계체제에 통합된 데 따른 부산물인 중속이나 저발전은 대체로 세 가지의 역사적 단계를 거쳐 진행되어 왔다는것이 중속이론가들의 일반적인 견해이며 이에 대한 푸르타도와 도스 산토스의 연구업적이 특히 두드러진다.
① 1차상품 수출단계
대부분의 빈곤 국가들이 갖고 있는 정태적 비교우위(static comparative advantages)에 근거하여 1차상품을 특화시키는데 치중해서투자가 이루어져 온 것을 특징으로 한다.
② 수입대체산업단계
강조점이 1차상품 생산으로부터 수입대체적 산업에 대한 투자로 옮겨간 것을 특징으로 한다.
③다국적기업단계
오늘날의 일반적인 현상으로 국내 제조 활동에 있어서 다국적 기업이 지배력을 장악한 경우가 그 전형적인 특징이다.
이들 저발전과정의 각 단계들은 국민경제의 전반적인 성장에 불리하게 작용하는 소비 및 투자구조를 생성시켜 소득 불균형의 유발 및 악화에 직접적인 연관을 맺어 왔으며, 또한 이러한 각 단계를 거쳐 저발전이 진전되면서 주변국들이 안게 된 것은 중심에 의한 착취뿐이었던 것이다.
2. 필리핀의 식민시대
필리핀은 이미 서론ㅇ서 기술했듯이 2차세계대전후 독립하기 까지 약 400년에 가까운 식민지 역사를 경험했다. 이때의 필리핀은 경제적으로 또한 다른 식민지의 경우와 다름없이 필리핀에는 식민모국의 경제적이익에 봉사하는 식민경제가 건설되었을 뿐이다. 즉 열대산물과 천연자원의 개발만이 추진되었을 뿐, 주민의 농업을 개량하고 민생에 필요한 하부구조를 건설하는 것과 같은 경제 개발은 최소한으로 억제 되었으며 식민 모국의 공업제품시장으로서만 가능할 수 있었다. 유통부문은 다른 동남아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중국인들이 장악하게 되었다.
(1) 1차상품 수출단계 - 상업적 농업
19세기 스페인 통치하에 세계자본주의체제 속에 편입되면서 필리핀은 담배, 인디고, 면화, 사탕수수, 대마, 코브라 등의 상업적 수출농업주도의 식민지 무역구조를 지니게 되었다. 이것은 발전국보다 지리적 요인이나 기후조건등에 있어서 비교우위를 갖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조는 미국의 식민지로 개편됨으로써 더욱 심화되었으며, 1909년 페인 - 알드리치(Payne-Aldrich)법과 그 이후 언더우드 시몬즈(Underwood-Simons)법은 미국에 대한 필리핀의 경제적 종속을 가속화시켰다.
독립이후에도 필리핀 경제에 대한 미국의 식민지화는 지속적으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지적해야 할 중요한 점은 이러한 생산성의 증대가 주로 국제무역에서의 정태적 비교우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자원의 재분배 과정에서 이루어진 결과라고 하는 점이다. 따라서 기술적 변화도 찾아볼 수 없었고, 자립적 성장으로의 사회구조의 변환도 발견할 수 없었다. 이런 농업생산물의 단순한 팽창에서는 당시 유럽중심국가들이 겪고 있던 산업적 변환을 기대할 수 없었던 것이다.
(2)독립과 함께 다라온 종속 - 채취산업
1946년 7월 4일 벨(Bell) 필리핀 무역법이 미국의회에서 통과되었다. 이 법안은 일정한 쿼터의 필리핀 상품이 80년(1946-1954년)의 과도기동안 미국에 무관세로 수입되는 것을 허용하고, 그 다음에는 매년5%씩 관세를 인상하여 20년 후인 1974년 부터는 미국관제의 100%가 부과되도록 규정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필리핀은 미국상품에 대하여 같은 기간동안에는 관세를 면제하고, 그 다음에는 매년 5%씩 증가시켜 1974년 부터는 필리핀 관세의 100%를 부과하도록 했다. 이 법안은 또한 필리핀의 자원개발과 공익사업에 대한 투자에 있어서 미국국민에게 필리핀 국민과 '동등한 대우(내국인 대우)'를 부여할 것을 요구했다. 필리핀 화폐의 달러에 대한 태환성이 보장되고, 그 환율은 1달러당 2페소로했다. 이러한 법안의 수락의 조건으로 미국은 필리핀에 대하여 제2차세계대전 후 전쟁피해 복구와 전통적인 농업수출품에 대한 지원을 중점적으로 제공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렬의 과정은 필리핀 경제에 대한 미국의 식민지화를 유지 및 심화시키는 것이었다. 이런 관계는 1954년라우렐-랭글리 무역 협정(Laurel-Sangly Agreement)에 의해 더욱 강화 되었다.
아무리 서로간의 무관세로의 무역을 한다해도 상품의 질로 인한 소비는 당연히 중심부의 미국상품이 될 것이다. 또한 필리핀의 자원에 대한미국인에 대한 동등한 대우는 그야 말로 자본의 경쟁에서의 우위를 실질적으로 이룩해내고자 하는 법안이었다. 동등한 입장에서의 협정이었다면, 미국이 전후의 피해복구 따위나 수출지원 따위의 부수적인 요소는 절대 내걸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도는 바와 같이 이 경우도 농업생산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분야에서도 중심국들에 의한 투자의 효과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로 편입 발전되어 가고 있던 부젼국들의 경제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서도 산업적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고 생각에서의 기술적발전도 이루어 지지도 않았으며, 단지 특정한 채취산업의 외형적 규모만이 증대하였을 뿐이었다. 더욱이 채취산업의 증대가 현지주민들의 생활수준 증대에 미친 영향도 별로 없었다. 광물 채취산업의 경우에는 다른경제 부문과는 연계가 거의 전무하였기 때문에 광업부분에 대한 투자의경우 보다 훨씬 더 심한 소득 불균형 상태를 초래하는 것이 상례였던 것이다.
(3) 일반적인 1차상품 수출단계의 한계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농산물이나 광산물 생산에 대한 발전국들의 투자는 모두 주변 지역에서의 경제에 아무런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였다.만일 이런 유형의 투자가 저발전국가들의 경제 전반에 걸쳐 그 효과가 있었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기술적 변화가 일어났을 것이라고 푸르타도는가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 지역을 후진 시켜 놓았을 뿐이었다. 이와같은 1차 산업들은 사실상 발전된 중심국 경제의 연장에불과했다. 1차 산업의 주요한 ㅈ 2차적 확대 효과는 투자가 행해진 1차산업 국가에서 이루러진 것이 아니라 투자를 한 발전국가들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부수적 현상으로 남겨진 중요한 문제는 농업이나 광업에 종사하는 노예농이나 노동자계층과 그러한 산업에서 이익을 얻고 있는 집단들간의 계층화 현상 및 그에 연관된 소득불균형의 문제이다.
3. 필리핀의 독립이후
(1) 수입대체 산업 단계
독립 후 필리핀사회는 식민지경제의 특성인 전통적 농업상품의 특화와 공업제품의 해외의존성으로 인해 산업화를 추진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독립이후 생활필수품의 수요급증에 따른 해외수입품의 의존 심화와 만성적인 무역적자 그리고 기존의 경제구조를 주도하고 있는
지주계급 스페인식민지 시기에 필리핀의 상업화된 농업의 발전(1차산품수추란계)은 강력한 지주계급을 형성하였다. 이런 지주계급은 식민지 정부와 주민을 연결하는 매개고리로서 매판성에 기반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세력화를 지속적으로 추구하였고, 파리조약으로 미국의 식민지로 정치적 활동 무대를 제공받게 되었으며, 이로서 경제적 이익을 더욱 확고하게 보장하는 장치가 되었다. 이런 특징을 '과두체제적인'전통이라하기도 한다.
억압적인 착취체계가 맞물리면서 농민을 중심으로 하여 광범위하게 형성된 민중의 저항은 사회경제적인 위기를 심화시켰다.
이것은 1차상품의 특화에 따른 이익이 결과적으로 중심의 투자세력이나 국내 엘리트에게 편중됨으로써 나타난 소득집중현상으로 소수 부유층의 사치품 수입에 크게 의존하는 소비형태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것이 대공황과 2차 대전으로 인한 1차상품 수출의 하락과 그에 따른 주변 지역의 수지 위기로 인해 과거 소수 부유층의 소비를 위해 수입하던 상품의 국내생산으로의 전환이 필료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사회전반에 걸쳐 분출된 위기릐 상황을 1949년 지주계급에 기반을 두고 있던 로하스 정권으로 하여금 필리핀 자국시장의 활성화에 역점을 둔 수입대체 산업화 전력을 추구 하도록 강제하였다.
50년대 추진된 수입대체산업화는 지주들에게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수입대체를 위한 환율 통제정책이 실시되자 농업부문의 가격경쟁력이 상실되게 됨으로써 농업성장률이 급속히 저하하였다. 수입대체산업화로 인해 2차산업의 생산이 1949년 GNP의 약 8%에서 1958년 말 약 16%로 성장하였으며, 1960년에는 순국민생산의 약 20%가 제조업부문이었다. 반대로 농업수출부문은 1949년 약 42%에서 1958년 약 36%로 감소하였다.
(1)-1 수입대체산업화전략의 한계
농촌의 빈곤으로 인한 국내시장의 협소와 공업생산활동의 대부분이 수입원료나 중간대를 최종생산단계에서 가공하거나 조립하는 형태를 취함으로써 수입의존도가 높아질 수 밖에 없었고 또한 심각한 고용의 정체를 야기했기 때문에 이러한 산업화전략은 한계에 부딪히게 되었다.
글고 1차상품 수출단계에서부터 이어져 온 소득분배상의 현격한 불평등으로 국내 공장에서 생산되는 주요 수요원은 소수 엘리트(지주계층)에 국한되고 있었다. 물론 빈곤한 다수를 위한 생산도 있긴 하였지만 그 상품의 주종은 역시 필수품인 식랸과 의류가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생각 구조도 전통적인 형태 그대로이거나 대규모 경제 및 외부경제와의 연계가 전무한 상태였다.
여기서 소수 부유층을 상대로 국내에서 생산되는 소비상품은 그 종류가 다양할 뿐 아니라 그러한 상품 생산을 위한 복합적인 생산구조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자료출처 - 마닐라 서울 (http://www.manila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