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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달콤한 꿈을 선물하는 동화 원문보기 글쓴이: 김동석
일제시대 좌파계열 민족운동
鄭惠瓊(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역사전공 박사과정 수료)
▣ 목 차 ▣
1. 머리말
2. 사회주의자의 민족문제인식
3. 좌파계열의 민족운동
1) 국내에서 전개된 민족운동 - 6.10만세운동과 광주학생운동
2) 일본지역의 민족운동 - 총독정치반대투쟁
4. 맺음말
1. 머리말
개항 이후 외압에 의해 세계자본주의시장에 편입된 조선은 근대국민국가 수립이라는 과제를 해결해야 했다. 그러나 이 과제는 일본의 침략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국권수호로, 그리고 다시 '독립'으로 대체되었다. 이후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일본의 침략에 대항해 국권을 회복하는 것은 1945년 8월 해방을 맞을 때 까지 전 국민의 가장 큰 관심사이자 과제였다.
적극적으로 민족운동을 전개한 사람이든, 계몽사업에 헌신한 사람이든, 적당히 일제와 타협하면서 입신의 영달을 꾀한 사람이든, 친일의 길을 걸었던 사람이든, 민족운동이 무엇인지 모르고 그저 하루 하루 살아가기에 버거워 하던 사람이든, 풍족한 학자금으로 외국유학생활을 만끽하던 학생이든···. 그 모두에게 정도의 차이는 있었으나 그 누구에게라도 최소한 '독립'은 벗어버릴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
일제하 한국 민중들이 늘 '독립'을 머릿속에 새기면서 생활한 것이 아니었다. 과수원에 놀러가서 땅에 떨어진 사과를 주워 먹었다고 7살난 어린 딸 자식의 허벅지 살 한웅큼을 일본인이 가위로 도려내었을 때, 東京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일자리를 얻지 못하게 되었을 때, 어제까지도 아무 일 없이 갈아먹던 땅이 토지조사사업에 의해 남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을 때. 그럴 때 평소에 잊고 있던 '독립'을 떠 올리게 되는 것이다.
일제시대는 독립과 관련되어 다양한 방략과 수많은 소신과 주장이 있었다. '독립은 반드시 이루어야 한다' '지금 와서 독립을 운운하는 것은 시대착오이다' '독립을 이루기 위해서는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 '독립이 된다고 해서 좋아지는 것은 없다' 등등 독립을 둘러싼 다양한 목소리는 이들 모두가 '독립'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음을 의미한다. 좌파계열도 이 무리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름의 방식대로, 소신과 주장을 가지고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본고는 일제시대 근대국민국가 수립과 유지라는 시대적 과제속에서 좌파계열이 전개한 민족운동의 내용을 살펴보고 민족운동사속에서 자리매김하는데 목적이 있다.
본 주제에 들어가기에 앞서 간단한 용어에 대한 설명을 소개해보기로 하겠다. 일반적으로 민족운동은 민족주의운동과 혼용되거나 민족해방운동, 독립운동 등 여러 명칭으로 불리웠다. 이 가운데 '독립운동'는 일제시대 민족운동가들이 그들의 운동을 스스로 지칭하거나 당시 언론이 사용한 용어로서, 학문적 고민이 반영되지 않은 용어이다. '민족해방운동'은 연구자에 따라 '반제적 성격과 함께 계급적 성격을 동반하는 사회적 성격의 운동'으로 정의되거나, '일제시대에 우리민족이 안고 있었던 총체적 사회변혁의 과제를 설명'하는데 사용되기도 한다. 또한 '민족운동'이라는 용어는 일제에 대한 모든 저항행동을 지칭하거나 '국민국가를 위한 운동' 즉 '민족의 독립을 추구하고 시민의 정치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한 운동'으로 정의되기도 한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에는 운동의 주체인 민족에 대한 개념정의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한계를 갖고 있고, 후자의 주장은 원론적 설명이어서 일제시대에 전개된 민족운동에 적합한 정의인가 하는 점이 의문으로 남는다.
2. 사회주의자의 민족문제인식
개항 이후 다양한 사조가 다양한 통로를 통해 지식인들에게 유입되면서 사상사적인 면에서 일제하 한국사회는 비교적 '열린 공간'을 갖게 되었다. 다양한 사조 가운데 일제시대에 가장 강한 영향력을 미쳤던 것은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였다. 사회주의 수용 당시의 내용 정도와 관계없이 "사회주의자도 먹으면 잘 낫는 ** 감기약"이라는 광고문구가 일간지에 등장할 정도로 사회주의는 새로운 사조의 대명사로 자리했다. 물론 사회주의가 일제시대에 미친 영향은 단순히 사조의 유행만이 아니다. 사회주의는 각 계층을 조직화하고, 사회운동을 주도했으며, 사회운동을 민족운동의 부문운동으로 자리매김했던 것이다. 이하에서는 사회주의자의 민족문제인식을 사회주의 운동의 전개에 따른 변화상에 중점을 두고 살펴보기로 하겠다.
러시아 혁명 이후 노령과 일본을 통해 3.1운동이후 국내에 도입된 사회주의는 놀라운 파급력으로 확산되었다. 1920년 조선노동공제회 기관지 {공제}를 비롯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통해 사회주의사상이 소개되었고, 1922년에는 사회주의사상을 소개하는 잡지 {신생활}이 발간되었다. 인쇄매체를 통한 사회주의사상의 소개, 도입과 아울러 사회주의연구써클이나 사상단체도 조직되었다. 또한 청년, 노동, 여성단체 등 사회주의자들이 주도하는 부문운동단체의 결성도 이어졌다.
사회주의자의 민족문제 인식은 대체로 물산장려운동시기, 신간회 창립전후, 1920년대 후반 등으로 대표된다. 이러한 민족문제인식이 전체 민족운동선상에서 미친 영향이 그다지 크지 않았으나 사회주의자들이 전개한 민족운동과 어떤 연결선상에 놓여있는지에 대해 파악하는데 필요한 작업이다.
물산장려운동을 둘러싼 사회주의자들의 민족문제인식은 1923년 1월 물산장려회가 결성된 이후 사회주의자들의 반대에 대한 羅公民(羅景錫)의 반격에서 시작되었다. {동아일보} 1923년 2월 24일부터 3월 2일까지 실린 나공민의 글 가운데 중요한 점은 '민족의 독립이 선행되어야 사회혁명이 일어날 수 있으며, 물산장려운동은 민족독립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인식이다. 이러한 단계론적 인식은 사회혁명당에서도 찾을 수 있다. 1920년 김철수, 최팔용, 이봉수, 주종건, 이증림, 도관호 등이 결성한 사회주의자 비밀결사인 사회혁명당은 "일제구축이 선결 문제이니 민족주의자와 손을 잡고 나가야 하며 그 다음 사회주의 혁명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러한 인식은 당시 사회주의 일반이 갖는 인식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사회주의 수용 당시 사회주의자들에게 가장 크게 다가온 것은 해방사상이었으나 이는 소박한 수준의 프로레타리아 국제주의 원칙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당시 사회주의에 대한 인식수준으로는 사회주의자들이 다양한 사고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어려웠던 것이다.
나공민의 주장에 대해 주종건, 이성태, 장혁파, CKW생이 반론을 전개하였는데, 이러한 논쟁은 사회주의자들의 민족문제인식은 심화하며, 이들이 민족문제를 사회주의적 입장에서 접근하고 정리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는 계기가 되었다.
사회주의자들의 민족문제인식은 조선공산당이 창당하면서 공식적으로 다루어야 하는 과제가 되었다. 1923년 3월 전조선청년당대회의 토의내용(2항 '민족자결 및 민족독립은 오늘날 무용이다. 무산계급의 해방을 제1의적 급무로 한다')이나 조선청년총동맹 창립대회(1924년 4월) 결의안('타협적 민족운동은 절대로 배척하며 혁명적 민족운동은 찬성한다'), 그리고 1924년 11월 창립된 사상단체 북풍회의 행동강령('우리는 계급관계를 무시한 단순한 민족운동을 부인한다. 그러나 ···사회운동과 민족운동의 병행에 대한 시간적 협동을 기함') 등 사회주의자의 민족문제인식은 각기 다른 입장을 갖고 있으나 민족문제가 사회주의자들에게 간과할 수 없는 중요성을 가졌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조선공산당도 전위당의 입장에서 민족적 과제와 계급투쟁 관계에 대한 내부 이론을 정리하는 한편, 이들을 어떻게 조정해 나가느냐 하는 것은 조선공산당이 갖은 중요한 과제의 하나였다.
앞에서 언급한 사회혁명당원의 인식에 나타난 바와 같이 사회주의자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결코 민족운동에 머물지 않았다. 민족문제와 계급문제, 이 두가지 가운데 어느 한 쪽에 비중을 두느냐에 따라 의견대립이 일어나기도 하고, 신간회논전, 청산론과 양당론 등 지리한 논전이 계속 이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의 차이와 다양한 의견은 극적인 계기를 통해 산출되는 것이 아니어서 각기 일정한 관련성속에서 형성되어 운동론으로 드러났다.
조선공산당의 핵심간부이면서 6.10만세운동을 주도한 권오설의 민족문제인식도 그러한 배경속에서 살펴볼 수 있다. 그는 대한독립당의 명의로 된 격고문에서 조선공산당이 6.10만세운동을 주도해야 하는 당위성에 대해 "식민지 민족이 총체적으로 무산자계급이며 제국주의가 곧 자본주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는 당면한 적인 침략국 일본으로부터 정치적, 경제적인 모든 권리를 탈환하지 않으면 죽음의 땅을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전제 아래 "식민지에 있어서는 민족해방이 곧 계급해방이고 정치적 해방이 곧 경제적 해방임을 알지 않으면 안된다."(밑줄 : 인용자)고 주장했다. 물론 [격고문]이 대중시위운동을 촉발하기 위해 선동성을 갖추고 있음을 전제로 할 때, 권오설의 평소 소신과 얼마나 일치하느냐 하는 점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1925년 6월 개벽지가 [치안유지법의 실시와 금후의 사회운동]이라는 제목으로 몇몇 사회주의자들에게 던진 몇가지 질문 가운데 '사회운동과 민족운동과의 금후 관련 여하'에 답한 권오설의 입장을 볼 때, 민족운동에 대한 인식을 살펴볼 수 있다.
같은 시기에 심지어 6.10만세운동 당시 조선공산당 상해부를 주도하면서 만세운동을 사전 계획했던 김단야는 "원래 조선사회주의자의 대부분은 민족주의자들"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조선공산당의 민족문제인식은 신간회를 전후한 논쟁에서 여러 논객들에 의해 표명된다. 최익한은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 창립을 둘러싼 논쟁에서 "조선의 민족운동은 조선 현재 과정에서 이곳 반자본주의 운동인 사회주의운동의 일부분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권오설의 인식에서 한층 발전한 주장으로서 민족운동과 계급운동의 개념을 명백히 분리한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의 민족문제인식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청산론'의 대두이다. 장일성은 "프로레타리아의 성숙이 미약한 식민지·반식민지 제국의 무산계급운동은 일정한 시기까지는 독립한 계급적 운동으로서 진출하지 못하고 민족해방운동에 의존하게될 수 밖에 없다"고 전제한 후 '종래 지지해오던 관념적·계급적 표식을 버리고 그 대신 민족적 표식을 취해야 한다'고 계급표식 철거론을 주장했다.
신간회 창립을 전후해 사회주의자들의 논쟁을 통해 더욱 심화한 사회주의자들의 민족문제인식은 1928년 3월 제4차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채택된 [민족해방운동에 관한 논강]에서 조선공산당의 입장으로 정리되었다. [논강] 4항은 조선민족해방운동이 반제투쟁임을 명시하고 이를 위한 여러 반항 세력과의 협동을 강조했다. 물론 이러한 주장이 청산론이나 양당론을 수용한 내용은 아니었다. [논강]은 당시 조선혁명의 단계를 부르조아민주주의혁명단계로 규정하고, 조선민족해방운동의 3단계과정 가운데 현 단계는 조선 프로레타리아가 투쟁 양식을 전환하여 민족해방투쟁에 적극적으로 진출하는 단계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한 논의였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언급한 민족문제인식은 당시 식민지 조선의 제반 상황에 대한 분석을 수반하지 않았으므로 논의가 갖는 민족운동사적 의미가 반감될 수 있다. 세계운동사를 볼 때, 정확한 현실인식이 결여된 운동론이 실제운동상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의 사례는 적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사회주의자들이 시대적 상황에 따라, 때로는 전략전술에 따라 민족문제와 계급문제의 관계를 조정해갔다는 비판도 받을 수 있다. 이러한 점은 종래 민족운동사에서 사회주의자들의 역할이 인정받지 못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로 인해 일제시대 민족운동사에서 좌파계열이 전개한 민족운동의 실상 자체가 부정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본장에서는 이러한 논의 자체가 갖는 의미를 규명하기보다 좌파계열이 민족운동을 전개하게 된 이론적 배경으로서 사회주의자의 민족문제인식을 파악하는데 목적을 갖는다.
3. 좌파계열의 민족운동
본고에서는 좌파계열이 전개한 민족운동 가운데 국내는 1926년 6.10만세, 1929년 광주학생운동, 일본지역의 경우는 1927년부터 전개된 식민지해방투쟁인 총독정치반대투쟁을 대상으로 한다.
1) 국내에서 전개된 민족운동 - 6.10만세운동과 광주학생운동
국내 민족운동 가운데 전국적 규모로 전개된 민족해방대중운동은 3.1운동, 6.10만세운동, 광주학생운동 등 3가지를 들 수 있다. 이 가운데 3.1운동을 제외한 두 운동은 모두 좌파의 주도 아래 전개되었다. 이하에서는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두 운동의 양상과 민족운동선상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 살펴보겠다.
① 6.10만세운동
6.10만세운동은 순종의 사망에 운집한 애도 군중 사이에서 발생한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좌파계열의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준비속에서 전개된 1920년대 최대의 민족운동이자, 3.1운동 이후 새로운 사회계급적 관계의 변화속에서 조선공산당의 지도와 조직적 활동에 의해 전개한 목적의식적 반제 민족운동이다. 조선공산당은 1926년 4월 25일 순종의 사망을 계기로 급격히 표출되기 시작한 조선민중들의 반일감정을 통일적인 전국적 대시위투쟁으로 전화하고자 했다. 비록 조선공산당이 주도한 만세시위운동은 사전에 발각되어 이루어질 수 없었으나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일명 사직동계)와 '통동계'가 주도한 만세시위가 계획대로 전개되었고, 분산적이나마 지방에서도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나 3.1운동 이후 다시 한 번 대중시위를 통해 독립의 의지를 천명했다.
3.1운동이후 소위 '문화통치'를 통해 일부 부르조아지들의 반일의식이 희석되는 반면, 노동계급을 비롯한 민중들은 사회구조적인 모순에 대한 인식의 정도가 강화되었다. 이런 가운데 일어난 순종의 사망은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에 대한 연민과 아울러 민중의 반일감정을 강화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해외에서 활동하던 혁명가의 지적과 같이 "···자기의 전 재산을 건드리지 않는다는 것을 담보로써 주권을 강점자들에게 넘긴 군주의 禮앞에 서서, 주민들은 나라의 주권자가 된 일본제국주의의 온갖 유혈적인 역사와 그들의 수다한 앞잡이들이 빚어낸 온갖 공포들을 회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그들의 통곡은 식민지 폭압하에서 고통받던 자신들의 처지에 대한 울분이었던 것이다. 그들의 울분은 전국 각지에서 상인들의 철시, 학생들의 동맹휴교 등으로 나타났다.
6.10만세운동의 계획은 좌파계열의 주도로 사회주의 학생단체인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호응 아래 진행되었다. 가장 먼저 계획을 수립한 것은 조선공산당 상해임시부이다. 이미 [국민당 결성을 위한 조선혁명운동의 청원]을 통해 '국민당' 계획을 추진하고자 했던 조선공산당 임시상해부(이하 상해부)는 순종의 서거를 대중운동의 좋은 기회를 생각했다. 메이데이 기념일 대중시위를 계획하고 있던 상해부의 김단야는 1926년 4월 신의주에 잠입하여 국내 거사를 준비하던 중 순종황제서거소식을 접하고 민중들의 애도의 모습을 본 후 만세운동을 준비하게 된 것이다. 권오설과 만난 김단야는 권오설에게 6.10만세운동 계획을 전달하면서 "조선사회주의자의 대부분은 민족주의자들이므로 ··· 민족운동의 선봉에 서서 민족운동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그 방법으로 만세운동을 제시했다. 김단야가 권오설에게 한 이야기를 통해 당시 상황을 엿볼 수 있다.
今般의 國葬은 우리 주의운동자에게는 절호한 기회다. 이 때 주의선전의 삐라를 살포하여 대대적으로 소요를 전선으로 일으키자. 이 일은 민족운동의 선봉이 된다고 비난이 있을지도 모르나 원래 조선사회주의자의 대부분은 민족주의자들이다. 그러므로 今回를 對岸의 火視하여서는 아니된다. 세간의 태반은 공산주의와 절연하고 모두 민족운동산하로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타일 민족운동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각성하여도 공산운동으로 전환함에 상당한 일자를 요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것을 생각하여 민족운동의 先鞭으로 소요를 일으켜 그 중심인물을 파악하여 공산주의운동을 계획하는 것이 급선무다. ····· 그 실행방법으로서 간단한 삐라를 인쇄하여 살포할 것, 각지에서 만세를 부르게 할 것.(밑줄 인용자)
김단야를 만나고 돌아온 권오설은 1926년 5월 2일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에서 만세운동에 대한 상해부의 뜻을 전하고 당의 방침을 협의했다. 당시 책임비서 강달영은 지방에 있었는데, 회의석상에서 반대의견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권오설의 주장에 따라 운동 실행이 결정되고 잠정적인 명칭의 투쟁지도부 '6.10운동투쟁지도특별위원회(이하 지도위)'가 결성되었다. 지도위는 권오설의 책임 아래 李智鐸(고려공산청년회 선전부, 조선공산당 경성부 간부 산하 제1구 제2세포 조직원), 朴珉英(고려공산청년회 비서부, 조선공산당 중앙기구 혁명위원회 위원) 등 고려공산청년회 간부들이 담당했다. 이 때 지도위가 정한 투쟁방침은 '① 사회주의, 민족주의, 종교계, 청년계의 혁명분자를 망라하여 대한독립당을 조직할 것 ② 대한독립당은 6.10일을 기하여 대시위운동을 실행할 것 ③ 시위운동의 방법은 장례행렬이 지나는 연도에 분산 배치하였다가 격고문 및 전단을 살포하며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할 것' 등 세가지이다.
조선공산당은 6.10만세운동을 계획하기 이전부터 국민당계획에 의거해 비타협민족주의자와의 제휴를 모색하였고, 이 계획과 관련해서도 접촉을 시도했으나 호응을 얻을 수가 없었다. 민족주의진영에서 탄압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공산당과 지도위는 천도교 구파와 제휴에 성공하여 권동진, 박인호, 박래홍 등이 조선공산당 서울지구 집행위원회 산하 제2지구 제5세포 책임자 박래원과 함께 6.10만세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권오설은 중앙집행위원회 결정이 있은 다음날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李柄立에게 계획을 전달했으며, 5월 10일에는 천도교 박래원에게 시위계획을 설명하고, 만세운동에 사용할 격문 인쇄와 지방 배포에 대한 임무를 부여했다. 이외에도 권오설은 조선노농총동맹, 인쇄직공조합 등과 연대를 이루며 만세시위를 추진해나갔다. 더구나 박래원은 조선노농총동맹과 천도교청년동맹 간부였기 때문에 연대활동은 더욱 용이했다. 권오설은 [격고문]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운동자여 단결하라] [조선인 교육은 조선인 본위] [산업은 조선인 본위] 등 5종의 전단을 작성하였고, 격문 인쇄는 박래원의 책임 아래 두 장소에서 이루어져 5월 30일경 5만 2천매의 선전문 인쇄가 완료되었다. 이들은 격문과 전단을 석유상자와 버들고리에 넣어 각지로 발송할 수 있도록 포장한 후 孫在基 집에 은닉하여 발송준비를 완료해두었다. 또한 박래원은 호남선, 경부선 방면의 격문 및 전단배포를 총괄하기 위해 대전에 파견되었고, 민창식(경성인쇄직공조합 집행위원)은 경의선 방면을 위해 평양에, 이용재는 경원선 연변지역을 위해 원산에 각각 파견되었다.
권오설은 대한독립당의 명의로 된 격고문에서 만세시위운동의 필연성을 "우리는 역사적 국수주의를 반복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항구적 국권과 자유를 회복하려 함에 있다. 우리는 결코 일본 전민족에 대한 적대가 아니요 다만 강도 일본제국주의의 야만적 통치로부터 탈퇴코자 함에 있다. 우리의 독립의 요구는 실로 정의의 결정으로 평화의 실현"이라고 명시했다. 나아가 민중들에게 "우리는 죽음의 땅에서 헤어나지 못하여 슬픔에 눈물을 흘리고 있다. 그러나 우는 것만으로는 죽음의 땅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정의의 결합을 한층 강고히 하여 평화적 요구를 더욱 더 강력하게 내걸고 싸우지 않으면 안된다."고 강조했다.
지도위는 학생조직화 사업에도 만전을 기했다. 연희전문 문과 2년생 李炳立(조선공산당 경성부 산하 제2구 제3세포 학생그룹 조직원, 조선학생과학연구회 간부)을 유인물 살포책임자로 정해 학생을 조직화하도록 임무를 부여했다.
조선공산당이 경찰에 적발됨에 따라 6.10만세시위의 계획을 수립하는 단계에 까지만 주력한데 비해 조선학생과학연구회는 지도위의 와해 이후 실질적인 운동을 전개하는데 중심이 된 조직체이다. 1920년대 학생운동의 발전과 사회주의운동 생성과정을 배경으로 1925년 9월 27일 서울 소재 전문학교와 고등보통학교의 20대 학생 70여명이 사회주의사상 연구와 보급을 목적으로 결성한 조선학생과학연구회는 세검정으로 야유회를 가던 도중, 순종의 사망 사실을 접하고 민족운동을 일으키고자 하였으나 구체적인 계획에까지 이르지 못하고 있던 상태였다. 그러한 와중에 이병립을 통해 5월 3일 권오설로부터 만세운동 계획과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주요임무를 전달받았던 것이다. 이 때 조선학생과학연구회에 부여한 주요임무는 인산 당일 가두 행렬에서 만세선창과 격문 살포였다.
이와 같이 만반의 준비를 갖춘 만세운동계획은 6월 4일 최초의 단서가 잡힘으로써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경찰이 위조지폐 범인을 잡기 위해 李東圭의 집을 수색하는 과정에서 개벽사에서 일하던 여직공의 실수로 위폐와 함께 격문 한 장이 발견된 것이다. 이를 단서로 경찰이 6일 개벽사를 수색한 결과 孫在基 집에 보관중이던 격문 5만여장을 압수할 수 있었고, 6일과 7일에 걸쳐 박래원, 권오설을 비롯한 관련자 50여명을 체포했다.
한편, 상해로 돌아온 김단야는 조봉암, 김찬 등과 함께 격문 [服喪 慟哭하는 民衆에 檄함]을 작성하여 상해 삼일인쇄소(崔昌植 경영)에서 5천매 정도 인쇄한 후 서울로 보냈다. 그러나 5월 28일 안동에 도착하여 서울로 발송된 격문은 국내에서 계획이 발각되자 서울역에서 압수되었다.
불꽃사 명의의 격문 [服喪 慟哭하는 民衆에 檄함]에서 김단야는 "비애와 통곡만 가지고서는 하등의 가치가 없는 것이다. ···즉 비통 자체는 우리의 유일한 활로인 일본제국주의 구축에도 하등의 힘이 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기를 이용하여 일본제국주의를 구축하는 투쟁력을 부식하고 나아가서 일보라도 그 구축하는 목표를 세워 투쟁을 개시하자. 위선 우리는 慟哭軍과 결합하자. ···울고 싶어도 울지 못한 전조선민중의 단결에 의하여 일본제국주의를 대항하여 싸움을 시작하자. ···금일의 통곡, 복상의 충성과 의분을 돌려 우리들의 해방투쟁에 바치자"고 호소했다. 이 격문은 앞에서 소개한 권오설의 [격고문]보다 논리성은 떨어지지만 애도의 감정을 대중시위로 전환하도록 하는 선동성이 뛰어난 글로 평가된다.
일본경찰의 탄압으로 지도위는 와해되었으나 조선학생과학연구회를 중심으로 시위운동은 다시 준비되었다. 6월 7일 박두종의 집에 모인 간부들은 8일에 태극기 60여매와 독립만세기를 제작하고, 야간을 이용해 유인물 만여매를 인쇄했다. 내용은 "2천만 동포야! 원수를 몰아내자. 피의 값은 자유이다. 대한독립만세!"이다. 또한 이들은 인쇄된 유인물을 조선학생과학연구회 회원과 인쇄직공청년동맹원을 통해 8일밤부터 종로일대, 활동사진관, 야시장 등에 뿌리고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조선학생과학연구회와 직접 관련은 없으나 중앙고보와 중동고보생으로 이루어진 '통동계'학생들도 시위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병립은 지도위가 와해되자 '통동계' 주역인 이동환과 접촉을 해 구체적인 협의과정을 가졌다.
순종의 인산일이 다가오자 일본경찰은 경찰특별경계방침을 내리고 경계를 철저히 하던 중 지도위를 적발하자 경계는 더욱 강화되었다. 전국에서 예비검속선풍이 불어서 수백명이 검속되었다. 그러나 6.10만세시위는 거행되었다. 첫 번째 시위가 大輿가 지나간 직후인 오전 8시반경 종로 3가 단성사앞에서 조선학생과학연구회 간부 이선호를 필두로 이동환, 이현상, 임종업 등의 선도 아래 일어나 40∼50명이 연행된 후 관수교 남쪽(이병립, 박하균 선도), 황금정(박두종), 훈련원 서쪽(천세봉), 동대문(김낙환), 창신동 채석장 입구(홍종현), 신설리 고무회사앞, 안암천 등지에서 8차에 걸쳐 전개되었던 것이다.
비록 분산적이기는 했으나 인천, 순창, 병영, 통영, 원산, 개성, 홍성, 전주, 신천, 평양, 마산, 공주, 하동, 당진, 이원, 강경, 구례 등 전국 각지에서 투쟁이 전개되었다. 서울과 지방에서 전개된 투쟁으로 전국적으로 5천여명이 연행되었고, 160여명이 중경상을 입었으며, 고문으로 불구가 된 사람이 10명이 넘었다. 권오설은 옥중에서 고문으로 사망했다.
6.10만세운동은 3.1운동과 비교해볼 때, 규모나 지속성에서는 미치지 못하지만 조선공산당이라는 전위정당이 지도하였고, 투쟁과정에서 민중들은 타도대상을 일본제국주의로 명확히 하였다는 점에서 민족운동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매우 높다.
② 광주학생운동
광주학생운동은 1929년 11월 3일 전라도 광주에서 발생한 한일학생간의 충돌사건에서 시작되어 1930년 3월까지 5개월간 전국 각지에서 149개교, 5만 4천여명이 참여한 대규모 학생운동이자 민족운동이다. 광주학생운동 또한 한일학생간의 충돌사건을 계기로 한 민족감정폭발사건이 아니라 사회주의 청년운동의 지도력이 학생들의 주체적 투쟁역량과 결합해서 일어난 조직적인 민족운동으로서 1920년대 식민지조선의 청년운동발전을 바탕으로 전개될 수 있었다. 이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구체적인 조직체는 '醒進會'와 '독서회 중앙본부'(성진회의 후신), '조선학생전위동맹'이다. 먼저 이들 단체의 결성과 활동내용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성진회는 1926년 11월 3일 姜海錫, 池龍洙, 韓吉祥, 張錫天, 姜永錫 등 광주고등보통학교생 9명과 광주농업학교생 7명 등 16명에 의해 비밀결사로서 결성되었다. 이 가운데 강해석, 지용수, 한길상은 1928년 제4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검거된 인물이고, 장석천과 강영석도 사회주의자였다. 이들은 1926년 여름부터 광주농교생 왕재일, 정남균, 광주고보생 국순엽, 장재성 등을 지도했다. 성진회는 강령 제1항에서 '일제의 굴레에서 조선의 독립을 쟁취한다'는 명시하여 독립을 목표로 한 비밀결사임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1927년 3월 성진회는 비밀유지와 조직정비를 위해 형식상 자진해산을 결의했다.
그 후 1928년 제4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으로 검거선풍이 일자 전남지방에서는 전남청년연맹위원장 겸 신간회 광주지회 상무간사인 장석천을 중심으로 재건에 착수해 일본에 유학중이던 장재성이 귀국하여 학생지도부를담당했다. 그 결과 1929년 6월 장재성을 책임자로 하고 각 부서를 둔 '독서회 중앙본부'가 설치되었다. 이 조직은 독서회원도 중앙본부의 존재를 모르는 철저한 비밀조직이면서 각 학교의 학생대중을 널리 조직할 수 있는 이중조직으로서 광주고보, 광주사범학교, 광주농업학교, 광주여자고보 등에 설치되었다.
한편, 광주청년회는 1927년 11월 26일 광주청년동맹으로 개편되어 대중조직으로서 활동하게 되었다. 이로써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기 직전인 1929년 광주지역은 사회주의세력의 지원 아래 '독서회 중앙본부'와 광주청년동맹에 의한 조직화와 대중적 단결이 이루어져 있었다.
1929년 10월 30일 항일운동의 기폭제가 된 나주역 사건이 일어나고, 이어서 11월 3일(성진회 창립 3주년 기념일이자 明治節) 오전 11시경 광주고보생과 광주중학생(일본인학교)간 몸싸움이 벌어지자 '독서회 중앙본부' 장재성 책임비서는 성진회원이었던 장석천, 나승규와 협의하여 투쟁방침(5개항)을 정하고 장재성이 현장에서 학생들을 지도하기로 했다. 이 투쟁방침 가운데 제1항 '우리들의 투쟁대상은 광주중학생이 아니라 일본제국주의이니 투쟁방향을 일제로 돌려야 한다'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이제 학생운동은 본격적인 민족운동으로서 투쟁대상을 일본제국주의로 명확히하였다.
장재성의 지시에 따라 광주고보생 400여명의 시위가 성공한 후 옛성진회의 핵심인물들은 '학생투쟁지도본부'를 신설하고 업무를 분담했다. 또한 11월 7일 서울에서 내려온 조선학생과학연구회 권유근, 박일, 중앙청년동맹 부건 등과 협의하여 운동의 전국확산방침을 논의했다. 그리고 11일밤 4종류, 2천매의 격문을 살포하여 일제의 가혹한 탄압실상을 폭로하고 민족운동의 과제를 제기한 후 독서회 조직망을 통해 12일에는 제2차 가두투쟁을 일으켰다. 이 투쟁에서는 일반대중을 상대로 뿌린 격문을 통해 '일본제국주의 타도, 피압박민족해방 만세' 등의 슬로건이 등장했다.
이 운동은 19일과 27일에는 인접지역인 목포와 나주로 확산되었고, 12월에는 서울에서 운동을 전개했다. 서울에서 일어난 운동을 주도한 주체는 조선학생전위동맹과 청년총동맹이었다. 그러나 조선학생전위동맹은 소규모 비밀결사조직이었으므로 광주를 다녀온 조선학생과학연구회 권유근과 연계활동아래 12월 2일, 전단 1,800매를 경신학교와 중동학교에 배포했다. 한편 검거를 피해 광주에서 올라온 장석천과 강영석은 조선청년총동맹 중앙집행위원 차재정, 중앙청년동맹 집행위원 곽양훈과 모의하여 격문 8,000매를 같은 날, 경성여자상업학교, 동덕여학교, 중앙고보, 중동학교에 뿌렸다. 격문이 살포된 이후 5일과 7일 경성 제2고보와 제1고보에서 시위투쟁이 시작된 이후 9일에는 서울지역의 전중등학생이 시위에 나서 시위는 13일까지 계속되었다. 13일 당일 검거자의 수는 1,200여명이었다.
이에 경찰은 학생전위동맹, 청년총동맹 간부들을 배후세력으로 파악하여 검거하고 투쟁이 종식될 것으로 기대했으나, 1930년 1월부터 학생시위운동은 다시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이번에는 근우회 본부, 신간회, 청년총동맹 지방조직이 주도세력이 된 것이다. 1930년 1월 15일 오전 10시를 전후해 이화여자고보, 경신고보, 보성전문을 비롯한 15개교 학생 3천여명이 시위투쟁을 시작한 이후 3.1운동 기념일을 전후한 시위를 끝으로 할 때까지 각지에서 투쟁은 끊이지 않았다. 운동이 전개되었던 5개월간 1,642명이 피검되었으며, 582명이 운동에 참가한 이유로 퇴학당했고, 2,330명이 무기정학을 당했다.
2) 일본지역의 민족운동 - 총독폭압정치반대투쟁
일본지역의 한인민족운동은 사회주의계열이 주도적으로 활동했다는 점을 특징으로 갖고 있다. 물론 2.8독립선언운동, 박열의 천황암살사건, 김지섭폭탄투척사건 등 사회주의계열과 무관한 운동도 있었다. 이러한 운동이 민족운동과정에서 큰 영향력을 미쳤으나 지속적인 반일민족운동으로 정착하지 못한데 비해 사회주의계열의 운동은 생명력을 가졌다. 즉 조직적으로 재일한인들을 민족운동에 구성하여 지속적인 운동을 주도한 것은 사회주의계열이었던 것이다. 在日本朝鮮勞 總同盟(이하 재일노총), 조선공산당 일본부 등이 그 주역이다.
일본지역에서 전개된 가장 대표적인 민족운동인 총독폭압정치반대투쟁은 재일노총이 1927년 6월부터 전개한 민족운동으로 大阪(오사카)에서 일어나 일본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총독폭압정치반대운동은 1925년 11월 검거된 朝鮮공산당원에 대한 공판에 따른 가혹행위, 전남 완도군 소안도 소안학교 강제폐쇄사건 등 국내에서 벌어진 식민통치정책의 모순을 배경으로 일어났다. 이 가운데 소안학교 강제 폐쇄는 전남지역민이 다수 거주하는 오사카한인사회에도 영향을 미쳐 1927년 5월 10일에 大阪완도향우회, 재東京완도향우회, 재橫濱완도향우회가 합동으로 격문 4천매를 발송하였으며, 특히 大阪완도향우회는 21일 오사카시내 金水館에서 소안사립학교페교반대동맹을 조직하고 반대연설회를 개최하였다.
소안사립학교폐교에 반대하는 운동은 성격이 1927년 6월 1일 총독失政공격대회로 확대되기에 이르렀다. 5월 21일 소안사립학교 폐교반대연설회를 개최한 주최측은 이 문제를 '전 조선적으로 확대시키는 동시에 지난 4월부터 일어난 경성제일고보사건(경성제2高普사건의 誤記), 해남.영흥사건, 통영김기정사건을 합하여 전 오사카에 거주하는 조선사람을 망라하여 當局失政탄핵운동실행위원회'를 발족한 후 6월 1일 대회를 개최하게 된 것이다.
6월 1일에 열린 총독失政공격대회는 일본지역에서 전개된 총독폭압정치반대투쟁의 始原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재일노총 大阪조선노조를 비롯하여 일본노동조합, 노동당 大阪지부, 전국청년동맹, 수평사 등 일본사회운동단체 40여개가 후원한 가운데 열린 대회에는 4천여 청중이 참가했다. 이 대회는 소안도 출신으로 당시 재일노총 중앙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던 정남국(鄭南局)의 진상보고와 일본노동조합평의회 본부집행위원장 野田律太의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에 대한 정책 이면 폭로]라는 연설의 뒤를 이어 泉尾노동조합 소년부 소속 한인 소년 소녀들의 [우리 조선 약소민족과 우리 소년의 비애]라는 연설로 진행되던 중 800여 경찰의 해산령으로 폐회되었다.
소안사립학교 폐교를 비롯하여 경성제2고보사건, 해남.영흥사건, 통영김기정사건 등 '총독폭압정치반대투쟁'의 계기를 제공한 사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소안학교강제퍠쇄사건은 도민의 의연금으로 1923년에 개교하여 교육목표를 항일민족운동가 양성에 두고 민족교육을 실시하던 소안사립학교를 1927년 5월 군수와 서장이 방문한 후 5월 10일 갑자기 폐쇄한 사건이다. 송내호, 송기호, 김경천 등 소안학교 교원들은 사회주의를 바탕으로 항일민족의식을 교육한 결과, 소안학교 출신들이 국내와 일본에서 비밀결사(守義爲親契, 일심단), 청년단체(배달청년회), 사상단체(살자회)를 조직하고 사회운동과 민족운동을 주도하는 등 소안학교는 민족운동의 양성소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으므로 당국은 학교 바로 옆에 주재소를 세워 학교를 감시했다. 그러나 송내호 등이 중심이 된 항일민족교육이 그치지 않자 폐쇄를 명하게 된 것이다.
경성제2고보사건은 6.10만세사건 이후 이 사건과 관련된 학생은 모두 자진휴학을 하였는데, 학교당국이 6.10만세사건과 직접 관계가 없는 학생에게 사상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전학을 권유하고 응하지 않는 학생은 출학처분한 사건이다. 이에 대해 학부형들은 학교와 당국에 부당성을 진정했으나 해결이 되지 않자 신간회에서 조사위원회를 조직하는 등 사회문제로 확대되었다.
해남.영흥사건은 함경도 영흥과 전남 해남지방에서 1927년 3월 디스토마를 예방하기 위해 도당국이 예방접종을 실시하는 과정에서 당국이 극약을 주사하여 사망자가 속출한 사건이다. 이 사건이 발생하자 함경도당국은 문제를 은폐하고자 하였으나 격분한 주민들이 시위운동을 하고 경찰서에 돌팔매질을 하는 등 격렬히 반대하였다. 함남과 전남지방의 사회운동단체는 시민대회를 개최하여 진상을 보고하는 등 사회적으로 문제를 확대시켰다.
통영김기정사건은 경남도 평의원인 김기정이 1926년 경남도평의원회 석상에서 평의원 尹炳浩의 一面一校制 제안에 대해 "현재에 잇는 학교만으로도 넉넉할뿐 아니라 조선안에서는 보통학교 교육이 필요치 안타. 보통학교를 맛치고 나면 여러가지로 사상이 악화되야 위험함이 만흔즉 보통학교를 더둘 필요가 업다"고 발언한 이후 이 주장을 굽히지 않자 金元錫이 1927년 3월 15일 징토문을 산포한데서 발단이 되었다. 그러나 김기정이 김석원을 명예훼손혐의로 고소하자 지역민들은 진상조사회와 懲討시민대회를 개최했다. 시민대회는 5개항의 결의문을 채택하고 김기정의 공직 사퇴와 전조선민중에게 사과할 것을 촉구했다. 또한 도의원들도 김기정에게 사직을 권고하고 다른 지역에서도 연설회가 개최되는 등 사태는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이 사건은 당국이 김원석 검속에 이어 지역청년회원을 검속하면서 더욱 악화되어 수천군중이 김기정의 집을 습격하고, 경찰이 기관총을 동원할 정도까지 확대되었다.
즉 오사카한인운동세력은 소안사립학교 폐교조치를 비롯하여 국내에서 일어난 각종 사회문제를 모두 총독정치가 낳은 산물로 파악하고 총독정치반대운동을 전개하게 된 것이다.
이후 오사카지역의 총독폭압정치반대투쟁은 7월과 8월의 연설회로 이어 졌고, 이후 오사카 한인노동조합이 반제반일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오사카지역의 한인노동조합 8개단체(西成, 港區, 大阪合同, 大阪동맹회, 今福, 浪速, 堺, 東大阪노동조합)는 9월 1일 노동조합대회를 열고 '조선총독폭압정치반대동맹조직촉성에 관한 건, 신간회지지의 건'을 비롯한 현안을 토의하고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 대회는 '과거분산적이고 부분적 할거적이며 조합주의적이었던 활동내용을 비판 청산'하고 금후 운동의 방향으로 '전민족적 정치투쟁'을 견지한다는 점을 결정한 대회인데 특히 소안사립학교폐쇄문제를 계기로 각 지방에서 분산적으로 전개되고 있던 총독정치반대투쟁을 전체적으로 결합시킬 것을 결의함으로써 이후 전개되는 총독정치반대투쟁이 일시적 운동이 아닌 상설운동으로서 정착되고 반제반일운동에 노동조합이 총매진하게 된 계기를 제공한 것이다.
소안사립학교폐쇄반대운동에 기원을 둔 大阪조선노조의 총독폭압정치반대운동은 이후 토오쿄오 등 기타지역의 반일운동에 도화선을 제공했다. 토오쿄오지방에서 전개된 운동의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927년 8월 3일, 토오쿄오지방에서는 대표적인 한인단체인 재일노총 東京조선노동조합, 신간회 東京지회가 주최한 조선총독폭압정치폭로연설회가 900여명의 청중이 운집한 가운데 열렸다. 참석한 연사 30명이 조선에서 실시되는 총독정치의 실상과 제국주의의 악행을 폭로하던 중 경관에 의해 연설회는 강제해산되었고, 이 과정에서 50여명이 검속되었다. 그러나 군중들도 검속자를 탈환하고자 石戰난투를 벌여 파출소를 파괴하고 경찰을 공격하여 경관 1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재일노총 東京조선노조 남부지부와 신간회 東京지회는 14일에도 조선총독폭압정치폭로연설회를 열고, 700여명의 군중과 연사들이 경관의 해산에 맞서 적기가와 혁명가를 부르면서 가두시위를 하는 등 격렬한 투쟁 양상을 나타냈다. 연설회는 끊이지 않아 같은 달 24일에는 재일노총 東京조선노조 동부지부와 북부지부가 주최하고 한인사회운동단체들이 후원하는 조선총독폭압정치비판대연설회가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렸다. 천여명의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300여명의 경관의 경계 아래 열린 연설회는 개회 즉시 해산되어 10여명의 검속자를 냈다.
오사카 한인운동세력이 총독정치반대투쟁의 시원을 제공하자 토오쿄오 한인운동세력은 총독정치반대투쟁을 상시적인 민족운동으로 정착시켜 나아갔다. 그 산물은 상설기관인 총독정치탄핵동맹 결성으로 드러났다.
그해 9월 17일, 토오쿄오에서는 이 투쟁을 상설운동화하기 위해 총독정치탄핵동맹 결성하고 창립총회가 개최되었다. 재일노총을 비롯해 학우회, 신간회 東京지회 대표가 모여 결성한 총독정치탄핵동맹은 본부를 신간회 東京지회 사무실로 정하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이로써 총독정치반대투쟁은 반일반제운동으로서 정착되고 확산되었던 것이다. 1927년 1년간 토오쿄오지방에서는 재일노총의 주최로 조선총독폭압정치폭로연설회와 강연회가 23회 개최되었고, 데모가 14회, 삐라가 40여회 살포되었다. 이러한 활동은 1928년에도 이어졌다.
총독폭압정치반대투쟁은 국내식민통치의 실상이라는 배경 외에 정치투쟁 매진이라는 재일노총의 운동방향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재일노총은 1927년 4월 제3회 대회에서 '민족해방의 정치투쟁'을 새로운 방향성으로 설정하고 그 첫 번째 활동으로 총독정치반대운동을 전개하게 된 것이다.
1927년 재일노총의 방향 설정에 관해 종래 연구자들 사이에는 결성 이후 부진했던 활동의 정체성을 탈피하고 한인 사회에서 위치를 확립하고자 하는 의도로 파악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이 보다는 국내상황에 대한 재일한인의 관심과 사상단체의 움직임속에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1926년 여름, 국내에서 정우회선언이 발표된 이후 일본지역에서도 11월 일월회가 해산을 결정하였고, 재일노총 정치부 또한 1927년 1월 12일자로 발표한 [방향전환에 관한 선언]을 통해 정우회 선언 지지를 표명했다. 이와 같은 국내와 일본지역 사상단체의 정치투쟁 매진이라는 방향은 재일노총에도 영향을 주어 제3회 대회 강령이 출현하게 된 것이다. 즉 총독폭압정치반대투쟁의 전개 배경에는 운동의 정체성을 탈피하고자 하는 재일노총의 의도보다는 국내의 식민지 구조 모순과 정우회 선언 이후 사상단체의 운동방향설정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총독폭압정치반대투쟁 또한 단순한 주도권 장악이나 정체성 탈피라는 단체 이익적 입장이 아니라 각종 국내 식민지통치의 부작용과 국내외 사상단체 및 재일노총의 단일한 운동 방향을 배경으로 전개된 반제반일운동이다. 이는 소안학교 강제폐쇄를 계기로 개최된 폐교반대대회가 총독失政공격대회로 전환한 모습을 통해 입증할 수 있다. 그 결과 재일노총은 이 운동을 전개함으로써 한인사회의 운동력을 결집시키고 민족해방운동의 주체로서 자리매김하는데 성공하게 되었다.
4. 맺음말
일제시대를 살았던 한국인들은 독립에 대한 나름의 주장과 소신, 방법속에서 자신들이 처한 상황이나 주의 주장과는 무관하게 지속적으로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그 가운데에는 좌파계열도 중요한 몫을 하고 있었다.
일제하 한국의 사회주의자들은 수용 초기에 강한 국제연대의식을 신봉했다. 이들은 프로레타리아 국제주의원칙이 민족해방을 해결하는 근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제시대 한국민들이 '독립'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자들에게도 민족문제는 중요한 과제였다.
사회주의 수용 초기, 각종 사회주의 사상단체는 '무산대중 해방운동'이나 '신사회 건설' 등의 문구로 강령과 선언을 장식했다. 이러한 선언적 내용의 이면에는 민족문제에 대한 고민이 내재되어 있었다. 그러한 고민이 때때로 '민족문제에 대한 강한 부정'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선행과제로 다루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사회주의자들의 인식과 궤를 같이하는 것은 바로 민족운동의 실천이다. 국내에서는 일제시대에 전개된 3대 민족운동 가운데 사회주의자와 전위당은 두가지 운동(6.10만세운동, 광주학생운동)을 주도했다. 이 운동들은 모두 계획적인 준비 아래 '일본제국주의 타도'를 운동의 대상으로 명시하고 지속적인 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식민지 본국인 일본지역에서는 수천명의 한인이 연일 생업을 제쳐두고 토오쿄오와 오사카 한복판에 모여 '식민지 해방'을 부르짖고 가두시위를 벌였다. 여기에 참가한 한인들은 대부분이 그날 그날 막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일용노동자들이거나 공장노동자라 해도 해고의 위협에 놓인 사람들이었다. 또한 재일한인들은 총독폭압정치반대투쟁동맹을 결성해 지속적인 반대투쟁을 전개했다.
이와 같은 좌파계열의 민족운동은 다른 계열의 민족운동과 마찬가지로 1945년 8월 광복을 맞는 그날까지 끊임없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여러 계열에서 전개한 다양한 양상의 민족운동은 신국가건설의 모델을 제시하는 데에는 소홀히 하였으나 일제하 최대의 과제인 '민족해방' 달성의 토대로 작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