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이 주께 있나이다(시편 39:1-7)23.02.05.주일낮설교
스페인 사람들은 소망을 '에스페라'(esperar)라고 합니다.
그 이름을 따서 자동차 이름을 붙인 것을 보았습니다.
그 뜻은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마야족들은 소망을 일컬어 '무엇에 걸려 있다.'라고 해석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기다림의 소망이 어디에 걸려 있습니까?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을 기다리고, 하나님께 걸려있습니다.
다윗은 입이 있어도 말을 할 수 없는 시련을 겪었다고 했습니다.
시편 39:1절에서 다윗은 다짐 하였습니다.
"나의 행위를 내가 지켜서, 내 혀로는 죄를 범죄하지 말아야지.
악한 자가 내 앞에 있는 동안에는, 나의 입에 재갈을 물려야지.”
사람들 앞에서 말을 않겠다는 것입니다.
미국 필라델피아에 있는 이스턴 스테이트 감옥은 1829년에 건립돼 1971년까지 감옥으로 사용됐고 지금은 전시장이나 영화촬영장으로 쓰이는데, 그 지역이 퀘이커교의 영향력이 강해 죄수일지언정 인간적인 대우를 받는 참회의 감옥으로 지어졌습니다. 19세기 초반이면 백악관에도 상수도 시설이 제대로 안 돼 있던 시절이건만 이 감옥은 당시
이미 상수도와 중앙난방 시스템을 갖춘 호텔급 교도소였습니다.
그 감옥은 죄수들에게 어떤 물리적인 고통도 주지 않았고,
단 하나 침묵만 하게 하였습니다.
모든 죄수는 독방에 들어가서 식사도 독방에서 하고 간수들도 복도를 걸을 때 덧신을 신어 걸음 소리를 내지 않을 만큼 침묵만 강요되었습니다. 그런데 죄수들이 가장 가기를 꺼려하는 감옥이었다고 하니,
말하지 못하는 고통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말을 할 수 없는 고통을 겪어 보셨습니까?
때때로 하나님께서 말하지 못하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외과 의사는 어떤 면에서 참 잔인합니다.
몸에 악성 종양이 발견되면 단호하게 칼로 잘라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종양이 더욱 커져서 환자의 생명을 위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의사는 칼로 째기만 하는 게 아닙니다.
의사들은 짼 후에 반드시 그것을 꿰맵니다. 째는 시간보다 꿰매고
아물도록 치료하는데 더 많은 시간과 정성을 쏟습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을 하는 사람들은 옳지 못한 것을 보면 칼을 들어 서슴없이 잘라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쨀 줄만 알지 싸맬 줄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꿰매고 치료할 줄을 모릅니다. 싸맬 줄을 모르면 결과는 살리는 게 아니라 죽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정작 당사자는 그것을 모르는 게 문제입니다.
‘내가 틀린 말을 했나?’이렇게 생각합니다.
다윗이 침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깨달았지만
말하지 않는 것은 너무나 큰 고통이었습니다. 2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잠잠하여 선한 말도 하지 아니하니 나의 근심이 더 심하도다” 심지어 좋은 말도 하지 않았더니, 걱정 근심만 더욱더 깊어 갔습니다.
속에서 불이 일어나는 것 같았습니다. 3절을 보면, 가슴 속 깊은 데서 뜨거운 열기가 치솟고 생각하면 할수록 울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 때, 다윗은 하나님께 그 마음을 쏟아 놓습니다.
3절 “...주님께 아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주목하여 보아야 합니다.
다윗은 원수들 앞에서는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입을 열었습니다. 처음에는 탄식이었습니다.
4절 "주님 알려 주십시오. 내 인생의 끝이 언제입니까?
내가 얼마나 더 살 수 있습니까?
나의 일생이 얼마나 덧없이 지나가는 것인지를 말씀해 주십시오."
5-6절을 보면 사람들의 조롱을 받고도 말 한 마디 못하다 보니
다윗에게 인생이 갑자기 허무해졌습니다.
열심히 산다는 것이 모두 헛수고임을 알았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한 뼘 길이밖에 안 되는 날을 주셨으니,
내 일생이 주님 앞에서는 없는 것이나 같습니다. 진실로 모든 것은
헛되고, 인생의 전성기조차도 한낱 입김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속이 터질 것 같은 절망감으로 기도하다가
다윗이 은혜를 받습니다. 다윗의 마음에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7절을 보겠습니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내 소망은 오직 주님뿐입니다.
안타까이 기도하는 중에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바라본 것입니다.
다윗처럼 인생의 파란만장함을 겪은 사람도 없습니다.
성경의 인물 중에서 다윗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큽니다.
다윗은 인생의 고난과 영광을 가장 절실하게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양치기 목동으로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골리앗을 물리친 후부터, 사울 왕의 눈에 들어 그의 딸을 주어 사위로 삼았습니다.
나중에는 군대장관, 오늘의 국방장관으로 발탁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국민들의 인기가 집중되면서 사울 왕의 미움을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사울 왕은 그를 죽이려고 몇 번 씩 시도했으나, 그때마다 다윗은 모면하게 되었고, 결국 사울 왕이 죽은 후 그는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는 왕이 된 후에도 그가 겪은 고난과 시련은 다른 왕들과 비교할 것이 못 되었습니다. 특히 불만을 품고 있던 무리들이 충동하여 아들
압살놈을 내세워서 쿠테타를 일으켜 왕궁에서 쫓겨나, 피신하며 다녀야 하는 모멸을 당해야 했습니다.
인생의 배신, 허무, 거짓됨, 권모술수에 대하여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다윗은 이 모든 시련을 극복해 냈습니다.
그가 이러한 고난과 시련을 이겨낼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이었는가?
그 해답이 오늘 본문 7절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라는 고백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다윗의 고백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도 어떤 시련과 난관 속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1. 소망이 주께 있는 사람은 담대합니다.
가난이 문제가 아닙니다. 실패가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소망이 있느냐’ 하는 겁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앞으로 조금만 더 기다리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소망이 있으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흔히 이런 말을 합니다.
“소방관과 경찰관이 싸우면 누가 이기느냐?” 소방관이 이긴답니다.
왜?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 소방관이기 때문입니다.
“소방관과 맹인이 싸우면 누가 이기느냐?” 물론 맹인이 이긴답니다. 왜? 뵈는 게 없으니까요.
그러나 “맹인과 노인이 싸우면 누가 이기느냐?” 노인이 이긴답니다. 왜? 막가는 판이기에 그런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뵈는 게 있어야 이깁니다. 다윗은 누가 보였습니까?
골리앗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이 보였습니다. 소망이 하나님입니다. 골리앗이 왔습니다. 키가 6규빗 반입니다. 일 규빗이 한자 반입니다.
머리에 놋 투구를 썼습니다. 다리에 놋 경갑을 쳤고 어깨사이에 놋
단 창을 메었습니다. 그가 와서 “나와 싸우자” 그럽니다.
우리가 강한 사람을 보면 싸울 생각부터 없어집니다.
그래서 사울 왕도 다윗의 형들도 무서워 벌벌 떨고 있습니다.
누구도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내가 가겠다.”고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이 보였습니다. ‘소망이 주께 있나이다.’ 였습니다.
상대가 되어야 상대하지요. 골리앗이 보니 기가 막힙니다.
‘너는 창과 칼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삼상17:45)’ 하나님께 소망을 두면 담대하여 집니다.
2. 소망의 사람은 끝까지 인내하게 됩니다.
주께 소망이 있는 사람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잘 참고 기다립니다.
우리는 맹인 바디메오의 이야기를 잘 압니다(마가복음 10장).
제가 주일학교 교사를 할 때 유행했던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바디메오가 눈을 떴다네.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바디메오가 눈을 떴다네.
예수님, 예수님 나에게도 말씀하셔서 새롭게 새롭게 변화시켜 주소서.”
맹인 인 거지 바디매오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 생각하였습니다. '아 ..예수님, 죽은자도 살리셨고 귀신도 쫓았다는 그 예수라는 사람이 여기에 오셨단 말인가? 예수라면 내 눈을 뜨게 하여 주실 수 있을거야.... 그리고 큰 소리로 소리를 질렀습니다.
"예수님 예수님.... 저좀 봐주세요...저좀 불쌍히 여겨 주세요.."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러나 무리들은 그를 핀잔하였습니다.
"조용히해....저분은 보통 분이 아니시다.
지금 저분은 다른 사람을 만나 주기도 바쁜 분이셔...
사람들은 바디메오의 간절한 부르짖음을 헛된 짓으로 여겨 도리어 책망하였습니다. "조용히 해 저분을 귀찮게 하지 말아라..."
그러나 바디메오 계속해서 소리를 지릅니다.
"예수님...저 좀...봐주십시오...저는 너무 간절합니다."
예수님이 그의 소리를 들으시고 돌아보셨습니다.
그리고 무리에게 말씀하시어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셨습니다.
바디메오는 겉옷을 벗고 당장에 주님께 뛰어나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내가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느냐..]
"예수님 저는 보고 싶습니다."
[가라...네 믿음이 너를 구원 하였다.]
바디메오는 곧 보게 되었고 ...예수님을 바로 따르는 자가 되었습니다.
바디메오는 눈을 뜨고 싶다는 간절함과,
끝까지 인내함으로 눈이 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 소망을 둔 사람은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소망 중에 잘 참고 기다립니다. 소망을 예수께 두고 살아가는 사람은 힘들고 어려워도 잘 견디고 인내할 수 있습니다.
소망이 있는 사람은 시험에서 이기게 됩니다.
소망이 있는 사람은 낙심하지 않습니다.
3. 예수께 소망을 두면 기쁨의 삶을 살게 됩니다.
소망이 있는 사람은 삶의 스타일이 다릅니다. 기쁘게 삽니다.
찬송가 446장을 부르겠습니다.
1. 주 음성 외에는 참 기쁨 없도다 날 사랑하신 주 늘 계시옵소서
2. 나 주께 왔으니 복 주시옵소서 주 함께 계시면 큰 시험 이기네
기쁘고 기쁘도다 항상 기쁘도다 나 주께 왔사오니 복주옵소서. 아멘.
예수를 그렇게 믿고 ‘기쁘고 기쁘도다’ 라고 찬송을 부르면서도
‘기분 나쁘고 기분 나쁘도다’ 하는 마음으로 찬송 부르는 이가 있습니다.
세상을 보세요. 증오심과 경쟁심, 적대감, 미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자신이 기뻐야 합니다. 왜?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얼굴을 보세요. 웃음이 있습니까? 여유가 있습니까?
항상 “죽겠어. 안 돼.” 하면서 탄식하지 않습니까?
어느 학자가 성공한 사람들의 특징을 알아보았더니 세 가지 특징을 갖고 있더랍니다. 첫째는 생각이 다르더랍니다. 다른 이들이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고 ‘죽겠다’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잘 될 것이다’ 라고 생각하더랍니다.
둘째, 말이 다르더랍니다. 좋은 말을 합니다. 긍정적인 말을 합니다.
셋째는 행동이 다르더랍니다. 웃으면서 산다는 것입니다.
친절하게 삽니다.
성경은 어떻게 살라고 하였습니까? 항상 기뻐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항상 웃으면서 살아라. 창자를 잡고 웃으라.’는 말입니다.
웃으면서 삽시다.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웃음을 주어야 합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웃음을 주세요.
남편들은 아내에게 웃음을 주세요.
자녀는 부모에게 웃음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기쁨을 주세요.
웃으면 복이 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웃으면 혈액순환을 원활하게 합니다. 웃으면서 삽시다.
마음에서부터 기쁨이 있어야 진정한 웃음이 됩니다.
마음의 웃음은 마음에 소망이 있어야 됩니다.
그 소망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승리의 주가 되십니다.
우리의 소망이십니다. 불만과 고통을 참고 기도하며 나가야 합니다.
'나의 소망은 오직 주께 있나이다.'라고 고백하며 살아야합니다.